■ 저자 김두규
독일 뮌스터대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받았으면서도 대학에서는 풍수 강의를 하는 이채로운 인물. 문학뿐 아니라 침구 역학 등 다방면에 밝아 이른바 ‘인문학의 다종격투기 선수’다.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 대구 지하철 참사 등을 예측해 풍수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2004년엔 신행정수도 건설 추진위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9년 전북 순창에서 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및 동 대학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독일에서 독문학 사회학 중국학등을 수학했다. 1994년부터 우석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민중성과 리얼리즘’ ‘한국풍수의 허와 실’ ‘집터와 일터’ ‘우리 땅 우리 풍수’‘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우리 풍수 이야기’ ‘권력과 풍수’ 등이 있다. 역서로 ‘독일농민문학론’ ‘세기 말과 세기 초’ ‘아름다운영혼의 고백’ ‘호순신의 지리신법’ ‘명산론’ 등이 있다. 요즘 풍수 기행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는 그는 “이 책에 소개되는 수많은 터를잡은 사람들, 그 위에다 탑과 무덤 그리고 다양한 문화유산들을 조성한 옛 사람들께 이 책을 바친다”고 밝히고 있다.
■ 차례
1. 그곳에 가면 뭔가 특별한 게 있다
1. 남원 광한루 호랑이 석상
2. 김해 흥부암 호랑이와 제왕의 땅
3. 충남 금산 황풍리의 두꺼비 석상外
2. 풍수는 삶이다
일제의 ‘풍수침략’ 현장을 찾아서
권력지향과 풍수
대통령들의 풍수 사랑
3. 풍수는 생태학적 환경론이다
풍수학자대담
복을 부르는 풍수기행
1. 그곳에 가면 뭔가 특별한 게 있다.
토정 이지함 집안의 풍수 실력 - 한음이 부러워한 처갓집 명당 발복
오성과 한음, 조선 선조 때 명신(名臣)이자 일화가 많은 친구 사이였던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을 일컫는 말이다. 이 가운데 이덕형과 관련해서는 풍수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이덕형이 토정 이지함의 손녀사위이기 때문이다. 토정이 경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 등에도 능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훗날 그의 이름과 권위를 빌려서 ‘토정비결’이란 책이 나올 정도였다. 풍수지리와 사주는 물론 관상에도 능했던 토정은 조카인 이산해(훗날 영의정을 지냄)의 딸을 이덕형과 결혼시키도록 했다. 이덕형의 관상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이덕형은 38세에 좌의정에 올라 죽기 1년 전의 52세까지 영의정과 좌의정을 번갈아 지낸 인물이니 토정의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신묘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토정 가문에서는 토정보다는 그의 형님(이지번)을 비롯해 그 윗대 어른들이 더 천문, 지리, 복서에 능통했다. 토정과 그 일족이 묻힌 곳도 바로 토정의 형님이 잡아놓은 자리라고 한다. 어쨌든 토정 집안의 풍수적 지식이 얼마나 풍부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처가의 이러한 집안 내력 때문인지 이덕형은 처가 문중이 명당을 써서 집안이 흥성(興盛)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던 듯하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과 명당 발복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이덕형은 한 사람이 풍수의 허황됨을 주장하자 다음과 같이 논박했다(이산해의 14대 후손 이항복 전 예산문화원장의 증언).
‘명당 발복은 있다. 진혈(眞穴)을 못 찾아서 그렇지, 진혈만 찾으면 발복한다. 우리 처갓집을 보라!’
실제 이덕형은 처갓집의 명당 발복과 관련해 그의 주변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기록 ‘죽창한화(竹窓閑話)’도 전해진다.
‘내가 일찍이 처갓집 선영이 있는 고만산(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서 지관들의 평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수십년 후에 확인해 보니 귀신처럼 맞더라. 풍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덕형이 언급한 고만산에는 토정 이지함과 그의 조상, 그리고 토정 아들들의 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덕형이 풍수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왕조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명 지관으로 활약하였던 스님 성지(性智)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다고 전해진다. 성지 스님은 광해군 때 궁궐의 터를 잡는 데 관여해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으나 광해군의 실각과 더불어 죽임을 당한 지관이었다.
이덕형은 명당을 고르는 일에도 직접 나선 적이 있다. 이덕형의 장인이자 토정의 조카인 이산해가 죽자 충남 예산 대솔면 안골에 안장하는데, 이때 조정에서 예장(禮葬)을 위해 파견한 관리가 바로 이덕형이었던 것. 따라서 이 자리는 토정 가문의 풍수적 지식과 이덕형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산해의 무덤이 있는 마을 입구에는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는 흙으로 만든 3개의 작은 섬이 있으며, 그 위에 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다. 흔히 이것을 삼신도(三神島)라고 하여 도가(道家)의 흔적으로 본다. ‘이산해의 글 가운데 선경(仙境)을 동경하는 글이 많아서 삼신도를 만들었다’는 게 이산해 후손의 말이다. 그러나 풍수적 안목에서 보면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흠 없는 명당은 없다’는 뜻이다. 이곳 역시 흠이 적지 않은 곳이라,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삼신도를 세웠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무덤에도 비보(裨補) 풍수가 가능하다는 예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이순신 장군묘 - 사후 16년에 옮긴 이유
최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책과 TV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고 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도 일부러 왜군의 총에 맞았다는 ‘의도적 자살설’이나 전쟁이 끝난 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은둔생활을 했다는 ‘은둔설’등이 떠돌고 있다. 이런 설이 나도는 배경은 당시 선조 임금의 처지에서는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그에게 민심이 쏠리지 않을까 하여 극히 경계했을 것이고, 조정 대신들 또한 무장(武將)이 실세로 등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던 고려 왕조가 무장 이성계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것과 같은 상황이 재현될 수 있음을 선조 임금은 충분히 예측했고, 충무공 역시 당시 임금이나 조정 대신들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조는 충무공의 업적을 애써 무시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지금 왜적을 평정한 것은 모두 명나라 군대 덕분이다. 우리 장사들은 명나라 군대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히 패잔병의 머리를 얻었을 뿐, 일찍이 적장 머리 하나 베거나 적진 하나 함락시킨 적이 없었다. 그 가운데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의 해상 승리와 권율의 행주대첩이 다소 빛날 뿐이다.”
물락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 사람은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원균과 권율 등 다른 장군들이고, 이순신은 단지 그들과 함께 ‘전쟁에 조금 기여했을 뿐’이라고 깎아내리고 있다. 그런데 풍수와 관련, 왕실과 충무공 사이에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하다. 당시 선조 임금은 “우리나라엔 본래 술사가 없는데 어찌 지맥에 능통한 지관이 있겠느냐”며 조선의 풍수를 무시한 반면, 명나라 군대를 따라 입국한 중국인 풍수들을 상대적으로 우대했다.
흥미로운 것은 충무공 역시 중국인 풍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천문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 지리에도 관심이 많았을 것”이라고 충무공의 15대 직계 후손 이재엽씨는 말한다.
충무공이 교유관계를 맺은 중국인 풍수가는 두사충(杜師忠이)이었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충무공이 전사할 때까지 오랜 기간 교유했는데, 충무공이 두사충에게 준 ‘두복야에게 드리는 시’가 지금도 전해진다. 물론 충무공과 두사충의 만남이 왜군에 대한 공동전선을 펼치는 과정에서 미루어졌기 때문에 풍수가 일차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둘 사이에 풍수가 자주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것은 충무공이 죽었을 때 두사충이 직접 아산에까지 와서 무덤 자리(충남 아산시 음봉면 산정마을 뒤)를 잡아준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후 충무공 후손들은 이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는데, 7대손 이인수(삼도통제사 역임)가 두사충을 위한 신도비문을 쓰기도 했다. 신도비문에서 그는 ‘충무공의 묘지 소점’에 대한 고마움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한 충무공의 무덤은 사후 16년 뒤 그곳에서 약 1km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당대 최고 풍수이자 오랜 친구가 잡아준 자리를 버리고 굳이 이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리가 나빠서였을까? 만약 그랬다면 훗날 충무공의 손자가 다시 그 자리에 묻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역화되기 이전의 현충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재엽씨의 얘기가 흥미롭다 그는 어른들에게서 충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많이 들어왔다. 당시 명풍수 두사충이 잡은 자리에 안장된 것을 안 왕실에서 그 후손들의 명당발복을 두려워하여 알게 모르게 이장을 강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소문난 명당을 빼앗아 왕릉이나 태실(왕실에서 태를 묻던 석실)로 활용함으로써 신하들의 명당발복을 견제했던 당시 왕실의 관행을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진실은 하수 16년 이장의 역사다.
경복궁 후원이 있던 청와대 - 대통령 거처 창덕궁으로 옮기자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청와대는 원래 경복궁 후원이었다. 고건축 전문가 신영훈 선생의 말에 따르면 후원의 규모는 경복궁의 30분의 1정도였다고 한다. 경복궁에 들어선 선물이 7000여 칸인 데 반해 후원 건물이 250칸 정도였음을 근거로 규모를 산정한 것이다. 즉 과거 왕들이 거주했던 공간의 30분의 1 정도의 작은 공간에 현재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작은 공간에 일제시대 총독 관저가 들어섰다. 문자 그대로 관저에 지나지 않는 곳이었다.
문제는 경복궁 후원이 풍수적으로 볼 때 대통령이 머무는 터로서 좋은가 하는 점이다. ‘터의 좋고 나쁨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 풍수의 기본이다. 경복궁 터는 어떠했을까.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왕자의 난’으로 두 왕자를 잃는 등 불행한 일이 겹쳐 개성으로 환도하고 만다. 태종은 경복궁이 싫어 옆에 창덕궁을 짓게 하고 그곳에 주로 머문다. 세종은 성군의 정치를 펼쳤지만 개인적으로 불행의 연속이었다. 왕자들의 잇단 죽음과 왕비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질병 등으로 괴로워했다. 당시 풍수 학자인 안효례와 승원로(承元老)는 왕이 거처하는 경복궁의 터가 불길해서 그러하니 개성이나 다른 궁으로 옮길 것을 주청한다. 10년 전인 서기 1433년(세종 15년)에도 풍수학자인 최양선이 경복궁 터가 명당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려 조정을 뒤집어놓은 적도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왕실이나 조정에서도 세종에게 잇따라 발생하는 불행이 ‘경복궁 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문종과 단종의 단명, 세조의 개인적 불운(의경 세자의 뜻밖의 죽음과 자신의 질병), 예종의 단명 등이 이어지자 왕들은 본능적으로 경복궁을 꺼려 다른 궁에 머물고자 했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궁들이 차례로 복원된 반면 경복궁만큼은 270년 동안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경복궁 중건이 이뤄지지 않은 까닭은 이곳이 불길한 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조선 말엽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짓지만, 이로 인한 재정낭비는 실각의 한 원인이 되었다.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시해를 당했고, 조선은 곧 망했다.
경복궁 후원인 청와대 터는 어떠했을까. 일제시대 이곳에 관저를 짓고 살았던 일본인 총독들도 거의 불우하게 생을 마감했다. 일반인들이 이곳 터의 문제점을 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남산에 올라가 보는 것이다. 남산 봉수대 부근에서 청와대를 바라보면 북악산이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다. 거기다 북악산의 험석(險石)들이 눈알을 부라리고 있고, 서쪽에는 암벽으로 이루어진 우람한 인왕산이 위압적으로 서 있다. 또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 자하문 방향에서 불어오는 살기 띤 바람을 옛사람은 황천살(黃泉煞이)라 하여 경계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신행정수도 이전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청와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방법은 없을까. 풍수적으로는 가능하다. 현재 서울에는 경복궁 말고도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4개의 궁궐이 중건 되었거나 복원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좋은 터는 창덕궁이다. 역사적으로 역대 임금들이 이곳에 즐겨 머물렀고, 전란이나 화재의 와중에도 조선 500년 내내 궁궐의 모습을 지켜온 곳이며, 1980년대 말까지 왕족이 거주했던 곳이다. 창덕궁 후원 쪽으로 가보면 북악산에서 팔각정 휴게소로 이어지는 뒷산 ‘북악 스카이웨이’가 마치 병풍을 둘러치듯 이곳을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산능선(龍이) 창덕궁까지 힘차고 위엄 있게 내려오면서 생기를 뿜어준다. 앞으로 바라보이는 남산도 다소곳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위엄을 갖추었으되 편안한 자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곳을 어떻게 대통령 궁으로 활용할 수 있겠느냐 하겠지만 아름다움은 그저 바라보는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요긴하게 쓰일 때 값을 하는 것이다. 창덕궁이 너무 넓기 때문에 일부분만 활용해도 충분하다. 경복궁 안에 박물관들이 들어서 있는 것처럼 이곳 창덕궁을 대통령의 집무실로 활용한다면 대통령뿐 아니라 국운 상승에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에서 국가의 큰 행사나 외국 사절들에 대한 접견이 이뤄지고, 후원에서는 대통령이 국무위원들과 산책하면서 나랏일을 논의하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흐뭇하다.
2. 풍수는 삶이다
대통령들의 풍수 사랑
“신은 죽었다”며 신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린 철학자 니체는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한가’라는 글에서 그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장소와 풍토, 즉 우리 식으로 말하면 풍수(風水)적 조건을 언급하였다.
‘어느 누구도 아무 곳에서나 살수는 없다. 자기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큰 과업을 이뤄야 할 사람은 누구나 이 점에 있어 선택이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 풍토가 신진대사에 끼치는 영향, 즉 그 부정적 및 긍정적인 영향은 지대하다. 장소와 풍토 선택에 한번 실수하면 자기가 지향하는 목적을 완수할 수 없으며, 아예 그 기회조차 갖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니체는 좋은 땅에서 나올 인물로,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천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니체는 천재가 나올 수 있는 땅의 조건으로 ‘맑은 공기, 청명한 하늘, 즉 거대하고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을 언급하였다. 그러니 니체가 말한 천재가 나올 수 있는 지리 조건을 염두에 두고 역대 대통령들의 땅을 보면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이나 권력자들은 니체와 같은 천재 사상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란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한 자들이다. 니체의 논리를 따르자면 그들의 생가 터는 ‘권력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땅이어야 할 것이다.
과연 집터의 기운은 있으며 그것은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인가.
‘무릇 땅에 집을 짓고, 뼈를 묻을 때 받게 되는 것은 그 땅의 기운이다. 땅의 기운에는 좋고 나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즉 땅의 기운을 받아 태어날 때 맑고 탁하고, 현명하고 어리석고, 착하고 악하고, 귀하고 천하고, 부자가 되고 가난하게 되고, 오래 살고 일찍 죽고 등의 차이가 어찌 없겠는가.’
이는 조선조 지관을 선발하는 데 필수 시험과목이었던 ‘지리신법’의 한 대목이다. 특정한 땅의 기(地氣)가 특정한 인체의 기(人氣)와 만나 상생(相生)관계를 가질 때 발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인걸지령론(人傑地靈論)이다. 따라서 특정한 땅의 기를 받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에 한 명씩 독특한 인물이 나올 수 있다. 반면에 특정 지기(地氣)와 인기(人氣)가 만나 상극 관계를 가질 때 재앙이 일어나기도 한다.
역대 대통령 집터의 공통점
실제 역대 대통령들과 몇몇 대권을 지향하는 정치인들의 생가와 선영 묘소를 살펴보면 독특한 보편성을 보여준다. 먼저 이들의 집터, 즉 생가에 대해 언급해 보기로 하자. 역대 대통령들의 집터를 따지는 데 우선 언급되어야 할 것은 그 출생 성분에 따라 집터 입지가 두 가지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출생 성분이라 함은 신분이 아니라 태어날 때 집안의 빈부 정도를 말한다.
윤보선과 김영삼은 그 윗대 조상부터 인근에서 알아주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집터는 그 동네에서 가장 좋은 터에 자리한다. 윤보선과 김영삼 생가 모두 산 능선이 동네 한가운데로 뻗어내려, 산 능선의 끝집이면서 동네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윤보선 생가 터(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새말)는 풍수 전문가의 안목으로 볼 때 가진 자의 겸손을 적절히 보여주면서도 풍수적 지혜를 활용한 완벽한 예술품이다.
그에 반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의 경우 살림이 가난해 여유 있게 터잡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이승만의 생가는 북한에 있어 답사가 불가능하므로 제외함).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들 역대 대통령들이 집터 공통점은 집 바로 뒤로 산 능선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즉 동네를 감싸주는 변두리에 있지만, 산자락의 끝 집이라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풍수지리는 산 능선 끝 집을 ‘산이 다하는 곳’, ‘용(龍:산 능선)이 다하는 곳’이라고 하여 중요시한다. 그것은 전선을 따라 흐르는 전기와 마찬가지로, 산천의 정기는 산 능선, 즉 요의 지표면을 따라 흐른다는 관념에서 유래한 것이다. 집터 풍수의 대표적 고전인 ‘양택십서(陽宅十書)’에서는 ‘사람이 거처할 집에서는 그 내려오는 산 능선의 기세가 중요하다’하여 집 뒤로 이어지는 산 능선을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양택십서’의 이론과 역대 대통령 집터 입지가 일치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풍수지리의 윤리
문제는 땅이 인간의 윤리를 무시하고 자체의 논리를 가져 악한 사람에게도 부귀를 주는가 하는 문제다.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는 국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야망과 부귀를 탐해 정권을 찬탈하고, 인권을 유린하였고, 국정을 파탄시켜 수많은 국민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자가 더 많다. 만약 풍수지리가 이러한 불의한 자와 무능한 자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준다면 비난받아야 한다. 풍수지리의 윤리 역시 인간의 윤리와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과 풍수지리가 서로 상정하는 시간 개념이 틀릴 뿐이다. 역대 정치인들에게 좋은 땅이 주어진 것은 하나의 기회 부여이며 시작일 뿐이다. 그들이 대통령이 되었다가 물러난 후 그들의 잘잘못에 대해 사법적 심판이 있었고, 더러는 역사적 심판으로 미뤄지기도 했다. 풍수적 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심판은 인간의 심판과 다르다. 더욱 잔인하다.
당나라 때 복응천(卜應天)이 지은 ‘설심부(雪心賦)’에는 ‘나쁜 짓을 하면 좋은 땅도 도리어 재앙을 부른다’고 하였는데, 원나라 때의 학자 조방은 ‘장서문대(葬書問對)’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무릇 집안이 장차 흥성하려면 반드시 그 조상이 음덕과 선행을 두텁게 베풀되 그 보답을 당대에서 누리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비록 땅을 골라 일부러 장사지내지 않더라도 명당을 차지하며 그 자손이 번창하는 것은 확실하다. 하늘의 묵계, 이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다. 후손들이 그 조상의 번창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모르고, 이에 묘하게 탐하고 교묘하게 취하고 농락하고 비정한 짓을 하는 것이 누구의 계략인지 모르고(즉 돈을 탐하는 지관들의 행위인지 모르고) 땅을 고르는 데 급급한 것은 역시 사사로움을 심고 이익을 엿보는 일단일 뿐이다. 마음을 이와 같이 쓰면 하늘에 죄를 얻어 스스로 그 운명을 재촉함이 허다하다.’
송나라 유학자 채원정(蔡元定)은 주자(朱子)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주자에게 풍수지리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그의 ‘발미론(發微論)’은 풍수의 윤리를 정의하는 말로 끝을 맺는다.
‘나쁜 업보가 가득하면 하늘은 반드시 나쁜 땅으로 대응하는데, 그 자손이 화를 입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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