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욕조

   
이흥환
ǻ
삼인
   
18000
2015�� 01��





■ 책 소개


미국의 국가 기록 시스템을 들여다보다!
그들은 어디까지 기록하고, 어떤 것까지 보관하며, 얼마만큼이나 공개하는가?


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의 역사. 내셔널 아카이브에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에 관해 기록한 문서가 쌓여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을 빼놓고는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풀어 갈 수 없다. 이 책은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찾은 한국 관련 문서 59건을 소개한다.


한국전쟁과 그 이전 또는 그 이후를 기록한 문서들이다. 문서 사진과 함께 각 문서마다 짤막한 설명문도 곁들였다. 내셔널 아카이브의 문서 색인도 영문 그대로 옮겨 적었다. 이 출처 정보만 있으면 누구든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문서 원본을 열람할 수 있다.


내셔널 아카이브는 군사, 외교, 정치 분야의 문서만 문서 대접을 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이 책은 이승만, 조봉암 등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나오는 문서도 소개하지만, 28세 농사꾼 아낙의 조선인민군 입대 청원서라든가, 어느 인민군 병사의 낡은 사진첩을 소개하기도 한다. 특히 미국인들은 전쟁이 기록 싸움이라는 것을, 기록의 싸움이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인의 시각에서 본 한국전쟁이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책에서 뽑은 문서들은 미국이 한국의 어느 구석까지 기록하고 있고, 어떤 문서까지 보관하고 있으며, 얼마만큼이나 공개해 놓았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본보기가 될 만한 것들이다.


■ 저자 이흥환
미국 워싱턴 KISON의 선임편집위원이다. 지은 책으로『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2012),『미국 비밀 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2002),『부시 행정부와 북한』(2002),『구술 한국 현대사』(1986)가 있다.


■ 차례
머리말


1. 미국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내셔널 아카이브
대통령 욕조를 증명한 한 장의 문서 | ‘큰’ 문서 ‘작은’ 문서 | 내셔널 아카이브라는 이름의 문서 창고 | 720만 달러짜리 ‘알래스카’ 수표 |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문서 15억 장 | 대통령을 듣는다 - 밀러 센터의 녹취록 | 대통령 집무실의 비밀 녹음 장치 | 아카이브 II - 아무나, 언제나, 원하는 대로 | 공개된 문서 90억 장, 열어 보지도 못한 문서 2억 장 | 24미터 지하의 석회암 문서고 | 미국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 전자기록물 아카이브(ERA)의 탄생 | 이젠 디지털, 그러나 앞으로 1800년 더 | 비밀문서 수거 통지문 - 어느 사학자의 항의 | 감쪽같이 사라진‘클린턴 하드 드라이브’ | 국가안보보좌관, 문서를 훔치다


2. 숫자로 읽는 NARA 80년사
루스벨트가 승리한 해, 1934년 | 1921년, 의회로 이사 간 독립선언서 | 1200만 달러짜리 건물 | 100일 목록에는 없었다 | 첫 입고 문서 1억 7640만 장 | 역사의 신전(神殿)에 입주한 265명 |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700번지의 방탄 기지 | 30년 전 문서도 참전 | 셋방살이 시작, 1949년 | 불길에 휩싸인 문서 2200만 장 | NARA의 독립기념일은 1985년 4월 1일 | 5만 평짜리 새 집 - 아카이브 II | 30억 장에 도전하다 | 검색 목록, 아직은 65퍼센트


3. 백악관 문서의 정권 교체 - 대통령 도서관 이야기
백악관 만찬 메뉴 | 정권 교체, 백악관 문서 이관으로 시작 | 내 돈으로 짓고, 관리는 정부가 - 대통령 도서관의 탄생 | 트루먼 - 도서관 복도에서 만난 대통령 | 후버 연구소에서 후버 도서관으로 | 케네디 - 주인 잃은 문서들 | 존슨 “이관 작업은 밤 아홉 시 이후에만” | 닉슨 “내 문서는 내가 가져간다” | 포드 - 퇴임 하루 전의 마지막 문서 트럭 | 레이건 파일, 처음 비행기를 타다 | 아버지 부시 - 걸프전의 용사들이 문서를 나르다 | 클린턴의 신기록 행진 | 열세 개 도서관, 문서 4억 장 | 예우 보관 - 한 시간 안에 찾아 드립니다 | 대통령을 역사 속으로 호위해 가다


4. NARA의 한국 문서 - ‘X파일’은 없다
미 비밀문서, 흔한 오해 다섯 가지 | 비밀의 3등급 - 1급 비밀과 극비 | 전문(電文)에도 위아래가 있는 법 - ‘화급’과 ‘긴급’의 차이 | 문서의 배포 통제 - 아무나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 CIA가 문서를 도로 다 가져갔다? | 내 자식 먹을 쌀, 쥐새끼가 다 먹는다 | 노획 문서 - 독일식, 일본식, 한국식


5. 이런 문서들① - 노획 북한 문서
시인 고은이 다녔던 군산중학교의 학생 수 | 미룡인민학교에 태극기는 없었다 | 김일성 수상께서 보내는 선물이오니 | 김일성 위원장 전화번호 2268번 | 박헌영 외무성 ‘리발사’ 채용하고 ‘타자원’ 해고 | 외무성 조약부 첫 업무 조미통상조약 연구 | 인민위원회 외무국의 극비(極秘) 중국 관계 자료집 | ‘근로 인민의 가정 부인’ 김달네의 조선인민군 입대 청원서 | 조소문화협회 지시문, ‘회원 동태 정확히 장악하라’ | 최고인민회의의 첫 ‘만장일치’ 회의록 | 극비 공격 명령서, ‘땅크로 왜관을 해방시키고’ | 인민군 려행증명서 ‘부친 위독으로 인하야……’ | ‘근로자의 자식’이 쓴 로동당 입당 청원서 | ‘적탄에 맞아 신체가 머리밖에 남아 있지 않음’ | 부천군 소래면 몰수 토지 조사서 | 도시 빈민에 대한 식량 배급의 건 | 소래면 인원 동원 ‘1인당 백미 4.5홉 대우’ | 포마(砲馬) · 차마(車馬) · 승마(乘馬), 병든 말[病馬]의 전쟁 | 내무성 지령서 ‘남반부 내무부장들에게’ | ‘아들 장가보낸 집’ ‘구루마 고친 집’의 식량 사정 | ‘사람’이 찍힌, 어느 인민군의 ‘알루빰’ | 제715군부대 문화부의 ‘모란봉 지령’ | 남한 ㄷ시 반동분자 및 월남자 명단 | 죠-냐, 너는 고흔 처녀 사랑스럽더라


6. 이런 문서들② - 미국이 쓴 한국전쟁
남한 진주 12일째, 하지가 분석한 ‘한국 상황’ | 전쟁 15개월 전, 국가안보위원회의 대통령 보고서 | 6월 23일 합참 보고서, ‘한국, 전략적 가치 없다’ | 맥아더가 남침을 보고받은 시각, 09:25 | 개전 닷새째, 모스크바의 미 무관 ‘소련, 북한 잃을 것’ 보고 | 미 해병대의 낙동강 전선 ‘살인자 작전’ 첫 전투 인터뷰 | 미 합참 ‘원자탄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도’ | 맥아더 ‘평양 사수 불가, 서울로 후퇴’ | 맥아더 해임을 통고한 1급 비밀 전문 | 정전협정 2개월 전, 미국의 여섯 가지 선택지 | 덜레스 ‘이승만이 우리 등 뒤에서……’ | 무초와 이승만의 정전협정 신경전 | 극동군 사령부 G-2가 분석한 북한의 남침 가능성과 공격 시점 | 미 해병대원들의 ‘냄비 흥정’ | 심리전 전단 살포 작전 ‘물라(MOOLAH)’ | 전남 형제도 조기 어장 폭격 사건 | 탄약 부족? ‘쏘고 싶을 때 쏠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 | 미 정보 보고서, 지리산의 빨치산 한 자릿수까지 파악 | 주한 미 대사관 ‘독도 분쟁에 끼어들면 안 된다’ | 6월 25일 새벽 38선을 넘어 남진했던 인민군 포로 심문서 | 병사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던 18세 중공군 포로


7. 이런 문서들③ - 문서가 남긴 이야기들
주한 미 영사가 기록한 1960년 4월 19일 | 와세다 대학의 한국 청년 게오르그 김 | 아펜젤러와 미 군사정보처 | ‘국회의원 사찰’ 극비 지시서 |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 미 군사정보국이 분석한 한국, 한국인 | 미 공보처, 한국의 다방(茶房)을 들여다보다 | ‘한국의 모세’를 자처했던 사람 - CIA의 이승만 분석 | 조봉암 사형 직후, 미 대사관 비망록 | 인민군 포로들의 ‘통조림 상표’ 항의문 | 밴 플리트, ‘전쟁포로 해외 철수’ 건의 | 중공군 반공포로 석방 - 이승만의 산술과 미국의 계산 | 미 육참, ‘한반도 비무장화’ 검토 | 딘 소장의 평양 생활 - 이규현의 진술 | 군수품 7만 5000톤을 한국군에게 넘겨주려면 


 




대통령의 욕조


머리말

남북한 정상 회담록은 ‘증권가 찌라시’만도 못한 대접을 받았다. 우리는 남북한의 두 정상이 나눈 얘기를 보란 듯이 전 세계에 까발렸다. 그러고는 회담록을 시위대의 깃발처럼 머리 위에 치켜들고 서서 1년이 넘도록 온 국민을 패싸움의 구렁텅이에 처박아 넣었다. 자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 최고 지도자와 마주 앉아 회담한 내용을 종이에 끄적거려(녹취록을 읽어 보면 안다. 왜 끄적거렸다고 하는지) 인터넷에 올려놓는 나라라는 오명만큼은 절대 후대에 넘겨 줘서는 안 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유산이다.


미국의 몇몇 지도자들은 기록의 힘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거대한 대리석 조형물이나 화려한 청동상 대신 돌보다 가볍고 청동보다 약한 종이를 영구적인 국가 기록물로 택했다. 문서를 남기기로 한 것이다. 문서고에 가둬 놓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풀어 놓는 편이 더 안전하고 힘이 강해진다는, 아무나 깨닫기 힘든 기록물의 비밀스러운 속성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국가 기록의 진짜 소유주가 누구인지 깨닫고 주인에게 문서의 소유권을 넘긴 일이야말로 그들이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정부 기록’이니 ‘국가 기록물’이니 하는 말에서는 고리타분한 냄새가 난다. 사실 기록이란 그렇게 따분하거나 싫증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한 일을 써 놓은 게 국가 기록이다. 남겨 놓은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남겨 놓지 않으면, 즉 정부가 한 일을 적어 놓지 않으면, 정부가 한 일을 국민이 점검(inspect)할 방법이 없다. 그 이야기를 남겨 놓지 않으면, 관료나 기관이 자기네가 한 일을 검토해 볼(review)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미국의 국가 기록 시스템은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 기록과 보관, 공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가 빠져나가는 순간 국가 기록이라는 시스템은 무너지고 만다.



미국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내셔널 아카이브

대통령 욕조를 증명한 한 장의 문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미 역사상 행정부와 사법부 수장을 모두 거친 유일한 인물이다. 대통령 퇴임 후 대법원장까지 지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기록이 있다. 몸무게가 150킬로그램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뚱뚱했고 키도 180센티미터나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거구였다.


마셜은 태프트가 파나마에 타고 갈 미 군함 노스캐롤라이나 호의 함장이었고, 이 편지는 태프트가 군함에서 쓸 물품의 제작을 요청하는 주문서였다. 대통령 당선자 태프트를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함장은 태프트의 승선에 앞서 그가 묵을 선실에 들여 놓을 초대형 욕조와 침대를 특별 주문했던 것이다.


‘대통령 욕조’ 이야기는 이렇게 대미를 장식했고, 워싱턴에서 열린 전시회는 1908년에 작성된 ‘대통령 욕조’ 주문 편지를 등장시킴으로써 화려한 막을 열렸다. 그 전시회는 <BIG!>이라는 주제로 열린 내셔널 아카이브(National Archives) 설립 75주년 기념 전시회였다. 2009년 3월 워싱턴 시내 아카이브 설립 법안에 서명한 해를 기념하는 행사였다.


대통령이 썼던 욕조를 없애지 않고 보관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 100년의 시간이 흐른 후 자칫 잘못 다루었다간 망가질 수도 있을 그걸 꺼내다가 전시하자고, 국민들에게 보여 주자고 제안한 사람, 또 그 전시품을 놀라는 기색 전혀 없이 당연하다는 듯 묵묵히 구경하고 발길을 돌리는 관람객, 얼마든지 하찮게 보였을 수도 있는 욕조 제작 주문서를 내버리지 않고 간식한 사람 –이들은 미국 역사에 100년을 보탠 사람들이다. 욕조 하나, 문서 한 장으로 미국사의 맥을 잇고,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남겨 준 사람들이다.


‘큰’ 문서 ‘작은’ 문서


우리는 남북전쟁 시기의 문서뿐 아니라 걸프전 때의 문서도 보관하고 관리한다. 독립선언서, 미 헌법, 권리장전 같은 ‘큰(big)’ 문서도 보관하지만, 시민 증명서, 전역 군인의 참전 기록 같은 ‘작은(little)’ 문서도 보관한다.


존 칼린이 한 말을 무심코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 같지만 ‘우리는 보관할 수 있는 문서, 보관해야 하는 문서라면 모두 보관한다’는 당당한 선언의 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하다 우연히 버리지 않고 남겨 놓은 기록물 몇 장 보관해 놓고 이런 말을 했다면 손가락질을 받았겠지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을 남긴 사람, 그 기록을 철저하게 보관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절대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 무슨 문서를, 왜, 어떻게 보관하는지 한 번쯤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아카이브는 그냥 창고일 뿐이다. 그 아카이브 건물의 주춧돌을 놓는 정초식 행사 때 자기 손으로 주춧돌을 올려놓고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80년 전인 1933년 2월 10일에 한 말이다.


이 건물은 우리 역사의 신전(神殿, temple of our history)이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며, 미국의 혼(魂)이 담긴 곳(an expression of the American soul)이기도 하다.


내셔널 아카이브라는 이름의 문서 창고

미국 국가 아카이브의 정식 명칭은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이다. … NARA에는 아카이브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 기록물을 모아 놓은 아카이브(대통령 도서관)도 있고, 연방정부의 행정문서를 모아 놓은 아카이브(Federal Records Center)도 있다. 아카이브라는 낱말에 복수형을 쓴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의 내셔널 아카이브는 어느 기관에 속한 하급 기관이 아니다. 대통령 직속이다. 그러니 NARA에 ‘administration’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고 해서 ○○청으로 옮겼다면 잘못된 번역이다. ○○청이라고 하기보다는 내셔널 아카이브라는 통칭을 그대로 살려 ‘미 국립문서보관소’ 정도로 하는 것이 그나마 오해 없이 쓰기에는 가장 나은 번역어가 아닐까 싶다.


아카이브 Ⅱ - 아무나, 언제나, 원하는 대로

미국인뿐 아니라 이런 이들이 전 세계에서 아카이브를 찾아와 미국 문서를 뒤진다. 짧게는 사나흘에서 길게는 1~2년씩도 머문다. 이용자더러 어느 나라에서 뭘 찾으러 왔느냐고 묻는 아카이브 직원은 없다. 어디에서 왔든 상관없고 얼마나 있든 내몰지 않는다.

입장료? 그런 것 없다. 정부 기록물은 공공의 재산이고 국민의 것이다. 기록물 열람에 관한 한 아카이브는 외국인과 자국민 사이에 차이를 안 둔다. 똑같이 대한다. … 단, 입장료가 없는 대신 지켜야 할 규칙은 있다. 자기 집에 진흙 발로 들어가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아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서를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문서에 혹시 저작권 같은 것이 있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간혹 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아카이브 문서는 공공의 영역(public domain)에 속한 것이다. … 복사비가 조금 비싸긴 하지만(1장에 25센트, 280원꼴) 열람실에 설치되어 있는 복사기로 얼마든지 복사할 수 있다. 조명기만 쓰지 않는다면, 플래시만 터뜨리지 않는다면 들고 온 카메라로 문서를 찍어도 되고, 평판 스캐너(flat bed)로 스캔해 갈 수도 있다. 천 장을 복사해 가든 만 장을 찍어 가든 이용자의 수집 능력, 주머니 사정, 하드 드라이브의 용량에 달렸을 뿐, 아카이브 규정에 수집 매수 제한 같은 건 일절 없다.



NARA의 한국 문서 - ‘X파일’은 없다

미 비밀문서, 흔한 오해 다섯 가지

미 비밀문서는 사실과 진실만을 기록한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런데 의외로 꽤 된다. 미 정부의 비밀문서에 대한 맹신 때문이다. 내셔널 아카이브의 문서들은 미 행정부의 기록물이다. … 따라서 모든 시각이 미국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미 비밀문서들이 미국 중심적인 시각으로 작성되었다고 해서 객관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대사나 서기관 등 해외 공관에서 근무하는 미 외교관들이 미 국무부로 보내는 주재국 현황 보고서를 보면, 전문(電文)을 쓴 외교관들의 객관적인 시각과 날카로운 통찰력, 풍부한 취재력에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오곤 한다. 주재국의 역사를 해석해 내는 안목과 사회 분위기를 탐지해 내는 직관도 나무랄 데가 없다. 정책 결정자들의 올바른 판단을 위한 1차 자료로서는 훌륭한 셈이다. 하지만 미국의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 이후의 이야기는 달라진다.


‘X파일’을 찾겠다?

글쎄. 미국을 빼놓고는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풀어 갈 수 없기에 여전히 숱한 의문점을 남기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궁금증을 미 비밀문서 몇 장이 단숨에 풀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은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일부 한국인 열람자들이 그토록 오매불망 원하는 이른바 한국 현대사의 ‘X파일’이란 것은 그 목록이 빤하다. 목록 맨 윗줄에 있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 배후’다. 더 좁혀 말하면 박정희 살해에, 즉 김재규 뒤에 미국이 있었느냐는 것. 다음으로는 ‘백범 암살의 배후’ 또는 ‘1980년 광주항쟁의 미국 개입 여부’ 등이 X파일 목록의 두 번째나 세 번째 줄을 차지한다.


최초 공개, 독점 발굴, 단독 입수?

제발! 미술품 전시장 다녀와서 “나만 보고 왔다”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NARA 문서는 이미 공개된 것들이다. 누구나 다 본다. 그런 문서들을 자기 손에 넣었다고 해서 “내가 처음으로 봤다”, “나만 봤다”고 말하면 대꾸할 말이 없어진다. 말문이 막힌다.



‘척’ 가면 ‘착’ 찾을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몇 번의 우연이 겹치는 행운만 따라준다면. 하지만 열람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문서를 찾기 위해 몇 주, 몇 달, 몇 년의 시간과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한다.


내셔널 아카이브의 명성과 권위가 열람자의 문서 찾는 시간과 노력을 단축시켜 주지도 않는다. 아카이브 컴퓨터에 검색어를 몇 단어 넣기만 하면 원하는 문서가 검색창에 나타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없지 않은 게 아니라 사실은 많다. NARA가 자판기가 아니듯 NARA의 문서 역시 돈만 넣으면 나오는 자판기가 결코 아니다.


‘중요한 문서’는 따로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 너도 나도 다 안다. 중요한 건지 중요하지 않은 건지는 이용자가 판단한다. 내게는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한테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한테는 소중할지 몰라도 내겐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도 있다. 상대적일 뿐이다.


비밀의 3등급 – 1급 비밀과 극비

문서라고 다 같은 문서가 아니다. 전문(電文 또는 電通文, Telegram)과 항공송달문(Airgram), 발송 공문(dispatch)이 각각 다르고, 비망록(Memorandom), 공식 서신(official letter), 사신(私信, informal letter 또는 personal letter)이 다르다. 같은 전문이라도 1급 비밀(Top Secret)인지, 2급 비밀(Secret)인지 아니면 3급 비밀(Confidential)인지에 따라 그 중요도가 또 달라진다. 그뿐인가. 같은 1급 비밀 전문이라 하더라도 전달하는 우선순위가 또 달라진다. 최우선 순위로 ‘화급(Flash)’하게 전달할 것이 있고, ‘긴급(Immediate)’, ‘우선(Priority)’, ‘일반(Routine)’ 등 전달의 우선순위가 각각 따로 매겨져 있다.


문서의 비밀 지정은 세 가지로만 하게 되어 있다. 1급 비밀(Top Secret), 2급 비밀(Secret), 3급 비밀(Confidential) 이렇게 세 가지다. 국가마다 비밀 지정 등급은 조금씩 다르나 대부분 이 3등급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따라서 미국 비밀문서를 우리글로 표현할 때, ‘극비’니 ‘기밀’이니 ‘특급 기밀’이니 하는 용어는 맞지 않는다.


미 국무부가 채택하고 있는 비밀 등급에 따르면, 1급 비밀(Top Secret)은 “인가받지 않은 채 공개했을 때 국가 안보에 ‘대단히 위태로운 손상(exceptionally grave damage)’을 줄 수 있는 정보”다. 이 1급 비밀은 지정할 때도 ‘극도로 제한적(with the utmost restraint)’이어야 한다.


“만약 칫솔과 다이아몬드를 똑같게 취급한다면, 칫솔은 덜 잃어버리겠지만, 다이아몬드는 더 많이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대통령 국가 안보 보좌관을 지낸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의 말이다. … 모든 걸 비밀로 하면, 아무것도 지켜지는 게 없다(If everything is secret, nothing is safe)는 말이다.


전문(電文)에도 위아래가 있는 법 - ‘화급’과 ‘긴급’의 차이

에어그램과 텔레그램

우선, 최우선 순위인 ‘화급(Flash)’은 두 가지 경우에만 해당된다. 대외 업무(foreign relations) 수행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정보를 담고 있어 가장 신속하게(most urgent) 전달되어야 할 때이고, 주간이든 야간이든 시간에 상관없이 수신자가 받는 즉시 즉각적인 조치(instant action)를 취해야 할 경우다.

‘화급’으로 지정을 할 때는 ‘극도로 신중하게(extremely sparingly)’ 해야 한다. 곤히 자고 있는 동아태 담당 차관보나 차관, 또는 국무부 장관을 깨울 만한 사안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화급’ 전문은 또 자다 일어난 사람이 잠결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짧아야 한다. 규정집에는 “단 몇 개의 문단만 담으라”고 되어 있다. 내용이 길어서는 안 된다. 전통문은 반드시 간략해야 한다(Brevity is mandatory).


문서의 배포 통제 – 아무나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NODIS’, ‘EXDIS’, ‘LIMDIS’ 순으로 통제

이 문서 앞머리에는 ‘NODIS’라는 배포 통제 캡션이 붙어 있다. ‘배포 금지’를 뜻하는 ‘No Distribution’의 약자다. 수신자로 지정된 국무장관만 읽을 수 있고 그 외 사람에게는 배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국무부 규정에 따르면, 대통령 또는 국무장관이나 재외 공관장 사이에 오가는 메시지 가운데 극도로 민감한 내용(highest sensitivity)이 담긴 것에만 이 ‘NODIS’를 적용하도록 되어 있다. 함부로 아무 데다 붙일 수 없는 최고 수위의 배포 통제 캡션이다.


CIA가 문서를 도로 다 가져갔다?

지금은 그런 말이 잘 들리지 않지만 내셔널 아카이브를 이용하는 한국인 열람자들이 한때 흔히들 하는 소리가 있었다. … 그럴싸하게 들렸다. 표현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9·11 이후’ ‘CIA(또는 국무부)가’ ‘주요 문서를 대부분’ ‘수거해갔다’는 말이었다.


추측으로만 그쳤으면 좋았을 생각이 입에서 입으로 옮아 다니면서 과대 억측이 망측한 수준에까지 이르러 그저 듣고만 있자니 민망할 지경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 침소봉대된 말이다.


세계 질서의 슈퍼 파워이자 세계 경찰 노릇을 자처하는 미국은 비밀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는 체제다. 하지만 어느 국가 어느 정부 못지않게 정보 공개에 저만큼 앞서 가는 체제이기도 하다. 알 권리를 주장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도 늘 떳떳하고 당당하다. 정부에 구걸하지 않고 요구한다. ‘9·11이 터지고 CIA가 중요한 문서는 몽땅 다 가져갔다’는 패배주의와 왜곡된 비밀주의를 입에 담기보다는 정보 공개 요청서를 한 장이라도 더 써서 보낸다.



이런 문서들② - 미국이 쓴 한국전쟁

함포와 전투기만이 전쟁의 무기가 아니다. 기록이야말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무력이다. 군사 전략, 전술, 첩보, 작전 등 지휘관들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전력(戰力)을 글로 옮겨 가시화한 것이 전쟁 기록이다. 기록은 사후에 정리된 것만을 일컫지 않는다. 사전 계획 역시 엄연히 기록으로 남는다. 기록에 실패한 지휘관 치고 전쟁에서 성공한 지휘관은 없다.


한국전의 순간순간을 기록한 문서 25건을 내셔널 아카이브의 문서고에서 뽑아 보았다. 수백만 장의 한국전 문서 가운데 극히 일부일 뿐이다.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미군이 도대체 어떤 내용까지 기록했고, 어떤 문서까지 남겼으며, 얼마나 많이 공개해 놓았는지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그래야 미군이 치른 한국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이들이 기록한 것은 ‘한국전쟁’이나 ‘6·25 동란’이 아닌 ‘Korean War’다.


남한 진주 12일째, 하지가 분석한 ‘한국 상황’

“한국이 서로 판이한 정책의 두 점령 지역으로 분단되어 있는 것은 통일국가 형성에 극복하기 힘든 장애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는 또 “연합군의 의도에 대한 한국인의 불신이 팽배하며, 두 점령군이 38도선을 경계로 한국을 양분한 것에 대한 불만도 크다”고 지적하면서, “일제 치하에서 상상을 넘어서는 부정부패와 수뢰, 독직의 관행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고 군정 책임자로서의 견해도 밝히고 있다.


한국인들은 몇몇 직위의 사람만 빼놓고는 대부분 신뢰가 가지 않고, 업무를 수행할 만한 능력이 없다. 전반적으로 한국인들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대부분이 몽상가이며 실제로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미 합참, ‘원자탄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도’


미국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미군의 참변을 방지하는 유일한 물질적 수단이 되는 상황이 한국에서 벌어질 수도 있음.


1950년 12월 4일 미 합참이 국방부 장관에게 제출한 비망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미 합동참모부 문서군(RG 218 Records of the U.S. Joint Chiefs of Staff, 1941~1978)의 문서다.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직후였다.


주한 미 대사관 ‘독도 분쟁에 끼어들면 안 된다’

미 국무부의 해외 공관 문서군에는 한일 간 독도 영유권 분쟁 초기 단계에서 미국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보여 주는 문서들이 꽤 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 15일 주한 미 대사관이 작성한 한 3급 비밀 비망록도 그런 문서 가운데 하나다. ‘독도 영유권 분쟁에 개입하는 것은 미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비망록이 작성될 당시 독도는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일 간 분쟁 대상인 독도 영유권 문제에 미국은 개입하기를 원치 않음. 그러나 주일 미 대사관이 보내 온 10월 3일 자 문서를 보면, 미일 안보 협약을 이끌어 낸 합동위원회가 독도가 불발탄 하치장으로 쓰였던 점을 들어 과거 한때 ‘이 섬을 일본 정부 시설로 지정한다는 것에 동의’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음. 일본과 그런 협약에 동의했다는 것은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유로 인정했다는 의미로 봐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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