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메르켈의 시대

   
슈테판 코르넬리우스(역: 배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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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담
   
16000
2014�� 06��



■ 책 소개 


지금, 전 세계는 앙겔라 메르켈을 주목한다. 타임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포브스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중 압도적인 1위(2014년을 포함하여 총 8차례 1위로 선정)로 메르켈을 꼽았다. 메르켈은 통일 독일이 선택한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였고, 그리고 마침내 2013년 3선에 성공했다. 






메르켈은 총리가 되기까지 독특한 인생을 살았다. 소련 주둔지였던 구동독의 템플턴에서 개신교 목사의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청년 시절 배낭여행자로서 트리빌시에서 노숙하며 사회주의의 쇠락을 경험했으며, 캘리포니아의 자유를 갈망했다. 물리학을 전공하여 자연과학자가 되었고, 메르켈은 궁극적으로 ‘학문적 발견’을 통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문제 해결을 추구했다. 






자유, 연대, 정의는 메르켈의 굳은 신념이었다. 이러한 메르켈의 신념은, 그녀가 정치에 입문하고 통일 독일의 총리가 되기까지, 그리고 유럽의 위기에 맞설 유일의 리더십이 되기까지 큰 힘이 되었다. 언제나 자유의 가치를 수호했고, 유연하고 현실적인 선택으로 보편적 정의를 구현했으며, 냉철한 이성적 판단과 숙고로 위기를 돌파했다. 또한 자연과학자 메르켈은 우연의 힘을 믿지 않는다. 끊임없는 토론과 타협, 논쟁과 투쟁으로,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으로 가장 합리적인 승리의 방식을 추구했다. 






■ 저자 슈테판 코르넬리우스 


슈테판 코르넬리우스는 독일에서 최대 부수를 발행하는 매체인 ‘쥐드도이체 차이퉁(Suddeutsche Zeitung, SZ)’의 외교정치보도국 국장으로, 1989년 앙겔라 메르켈이 민주약진(DA)의 대변인이었을 때 처음으로 만났다. 나중에 메르켈이 콜 정부의 장관으로 있을 때, 본의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워싱턴에서 해외특파원으로 여러 해를 보낸 후, 메르켈이 기민연(CDU)의 당대표가 되었던 1999년에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2000년부터 외교정치보도국을 책임졌고 메르켈과 그녀의 최측근 보좌진과 가깝게 지냈다. 특히, 이 책의 출간기념회에 메르켈 총리와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가 직접 참여하여, 이 책의 공신력을 보증했다. 






■ 역자 배명자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8년간 편집자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대안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독일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뉘른베르크 발도르프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가족과 함께 독일에 거주하며 바른번역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한다. 『위기의 시대 메르켈의 시대』 『부자들의 생각법』 『거짓말의 힘』 『위키리크스』 『독일인의 사랑』 등 다수를 번역했다. 






■ 차례 


한국어판 서문 






1. 메르켈 마니아_ 총리의 새로운 권력 






2. 딴 세상_ 구동독 시절의 온실 속 삶 






3. 새로운 한계를 찾아서_ 정치 입문 






4. 신념_ 앙겔라 메르켈을 지탱하는 것 






5. 시간제 협력자_ 총리와 대연정 






6. 평화의 꿈_ 그리움의 땅 미국 






7. 방어태세_ 앙겔라 메르켈 그리고 전쟁 






8. 시온의 빛_ 매혹의 이스라엘 






9. 영원한 푸틴_ 사랑스러운 러시아와 버거운 대통령 






10. 사업 혹은 신념_ 중국과의 체제 갈등 






11. 대위기_ 앙겔라 메르켈의 유럽전쟁 






12. 전부 메르켈?_ 탈정치적 총리 






촌평 


역자 후기 


찾아보기





레이디 가가에게 배우는 진심의 비즈니스

위기의 시대 메르켈의 시대


메르켈 마니아

총리의 새로운 권력

총리생활 8년째인 2013년, 앙겔라 메르켈의 권력은 다시 한 번 정점에 올랐다. 그녀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경제규모가 큰 국가의 총리직을 벌써 두 번째 수행하고 있다. 대적할 인물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당을 장악했고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 속에서 당을 이끌며, 변함없이 충직하고 성실한 장관들과 내각을 이끌고 있다.


또한 두 번째 연정파트너를 길들임으로써 사회를 흔들 정부정책을 최소한으로 통제하고, 특유의 무심함으로 야당을 괴롭힌다. 대중으로부터는 존경을 받는다. 과거의 어떤 총리도 집권 8년째 이렇게 높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같은 해, 앙겔라 메르켈은 국제무대에서도 큰 권력과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긴 집권기간을 회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집권자에 속한다. 2013년 현재 유럽연합에서 몰타와 룩셈부르크 총리를 제외하면 메르켈이 가장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는 총리다.


성공과 실패는 연합정부의 안정이나 유권자들의 만족 혹은 외구 방문의 빈도수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가짜 척도일 뿐이다. 진짜 척도는 사건이다. "정부를 궤도에서 이탈시킨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영국 총리 해럴드 맥밀런은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사건! 사건이죠." 앙겔라 메르켈 역시 총리직의 성광과 실패를 결정할 역사적 사건을 만났다. 바로 위기다!


메르켈이 위기를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위기가 그녀를 찾아왔다. 위기는 머리가 아홉 개인 히드라나 지옥을 지키는 케르베로스 같은 신화적 괴물을 닮았다. 처음에는 금융위기의 모습으로 다가와서는 세계경제위기로 돌변하더니 결국엔 유로 위기로 변했다. 막대한 피해를 낳을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이 그 뒤에 숨어 있었다. 부채위기, 성장 및 경쟁 문제 그리고 결국엔 유로통화재앙, 문제의 무게를 이기 못하고 유로통화가 붕괴되면, 즉 유럽이 유로를 포기하고 옛 통화로 주저앉으면, 그때부터 통화재앙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파괴적인 위기가 메르켈을 압박해 왔다. 파괴를 막는 것이 그녀의 정치적 과제였다. 그녀가 통치하는 시대는 헬무트콜이 누렸던 행복한 역사의 수간이 아니다. 헬무트콜은 유럽의 자유운동에서 생긴 긍정적 동력과 시대의 이점을 이용하여 직관적으로 독일을 통일로 이끌었고 유럽에 새로운 호황을 가져 왔다. 그러나 메르켈은 다르다. 그녀는 방어전투를 지휘하고 파멸에 맞서 싸워 왔다. 화려하게 꽃피는 전망을 약속할 수는 없다. 유럽의 황폐화를 막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메르켈의 주제는 위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서독에 연방공화국을 안착시켰고 사회적 평등과 시장경제의 정치 모델을 관철시켰다. 빌리 브란트는 동독과의 긴장완화를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헬무트 콜은 통일총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메르켈은 역사적 과업을 이어 받았고 그것이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위기가 오히려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기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총리직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위기 덕분에 그녀는 위대한 국가 지도자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신념

앙겔라 메르켈을 지탱하는 것

앙겔라 메르켈은 오페라를 사랑한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가 쓴 비극적이고도 운명적인 작품 모두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하이너 뮐러가 연출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가장 좋아하는데, 메르켈은 통일 전에 이미 그의 작품을 특별히 기억해 두어 동베를린에서 관람한 바 있다. 뮐러가 연출한 바그너의 비극적 사랑은 바이로트 음악제에서 여섯 번이나 상연되었다. 메르켈은 뮐러의 해석을 기발하다고 생각 했다. 어쩌면 메르켈은 구원의 희망을 한 번도 품을 수 없었던 트리스탄 왕자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의 파괴된 사랑을 구원해 줄 것은 죽음뿐이었다.


니베룽의 반지에서도 메르켈은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의 해석은 짧고 명료하다. "처음에 잘못되면, 그럭저럭 진행은 되겠지만 다시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그녀는 바그너를 향해 비장한 말을 던진다. "출발점에서 잘못된 일을 다시 고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므로 바르게 하려면 처음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메르켈 총리는 이보다 더 좋은 삶의 모토를 차지 못한 것 같다. 처음부터 바르게 하기, 한 걸음씩 체계적으로 침착하게, 이것이 그녀의 목표다. 아니면 적어도 그녀의 요구다. 일을 시작할 때 결과를 생각한다는 점에서 메르켈은 재정부 장관 볼프강 쇼이블레와 닮은꼴이다. 메르켈은 피할 수 없는 사건, 불가피한 결과를 혐오한다. 쫓기듯 서두르는 걸 싫어한다. 진행과정을 통제하고 지휘할 수 있기는 바란다. 그런 면에서 바그너의 웅장함, 강한 톤 그리고 낭만주의의 무거운 소재는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매르켈은 바그너의 오페라와는 정 반대로 조용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바그너의 열렬한 팬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자신과 거리가 먼 피겨스케이팅 선수나 무용수, 팝스타 같은 사람들을 롤 모델로 삼았던 것처럼.


독일 국민 대다수는 메르켈을 안정적이고 평범하다고 인식한다. 그녀의 성격에 대한 관심이 계속해서 높아지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인격이면에 또 다른 인격이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메르켈은 속을 알 수 없는 총리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때문에 계속해서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


답은 사실 시시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이미지 뒤에 어떤 대단한 비밀도 감춰져 있지 않다. 인물분석가와 그녀의 오랜 동행자들에 의하면 메르켈의 인격과 연결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특징들이 무수히 많다. 그녀는 호기심이 많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식과 배움을 갈망한다. 어떤 문제를 다룰 때는 먼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메르켈은 자신의 세계관을 정확히 분석한다. 주장을 분석하고 성실하게 자료를 수집한다. 이런 독특한 재능이 야기하는 문제가 있긴 하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중재하기를 더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선동적인 정치가와 이념주의자의 대척점에 서있다.



시간제 협력자

총리와 대연정

앙겔라 메르켈은 국내정치보다 외교정치를 더 좋아한다. "외교정치는 내 적성과 잘 맞는다." 메르켈은 독일연방총리로 처음 선출되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고, 오늘날에도 똑같이 말할 것이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모두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혹은 살짝 바꿔서 말하기도 했다. "외교정치는 쉽다."


메르켈이 이렇듯 기꺼이 세계를 품은 까닭은 간단하다. 대부분의 국가 지도자들이 외교정치를 편애한다. 외교정치가 그들의 가치를 높여 주기 때문이다. 총리가 국가 간의 일을 처리 할 때보다 더 많은 재량권과 자유를 누리는 대중에게 더 깊이 각인되는 때는 없다. 메르켈은 국내정치에서 걸핏하면 어깃장을 놓은 연정파트너, 제멋대로인 기사연(기독교사회연합(CHristlich-Soziale Union)의 약자로, 기민연과 유사한 정강과 이념을 추구한다) 그리고 연방의회의 수백 가지 요구를 다뤄야한다.


내각의 장관들을 고려해야 하고 각 연방 주의 요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연방참의원들과 잠시 대화를 해야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정치적 운신의 폭이 점점 좁아진다. 모든 것이 법으로 정해졌고, 법마저 명확하지 않으면 헌법재판소가 나서서 결정하는 과도하게 규정된 체제 속에서 이 모든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외교정치는 매우 자유롭다. 국가 간의 일이 성황을 이루고, 세계는 반응하고 협력하고자 하며, 혁명과 재난들로 인해 국가 지도자에게 이목이 쏠린다.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이 과제를 받아들인다. 지난 10년간 외교정치는 그 가치가 상승했으며, 정치 분야에서 서열 1위를 차지했다. 이제 국가 지도자들이 직접 외교정치를 요리한다. 세계가 한 덩어리로 뭉치고 인터넷이 직접적인 소통을 가능케 한다. 한마디로 지구화 되었다.


프랑스나 미국의 대통령은 언제나 외교정치의 선장이다. 그들은 국가선박의 조타륜을 직접 잡는다. 독일에는 그들과 견줄 만한 힘을 갖춘 지도자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마침내 등장했다. 독일에서도 모든 카메라가 메르켈 총리를 따라 다닌다. 이 정상회담에서 저 정상회담으로 바쁘게 다니고 점점 더 많은 양자회담을 끝내며 점점 더 자주 국가 간 협의에서 앞자리에 앉는 총리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게다가 수많은 유럽연합 정상들이 그녀를 찾아온다. 메르켈 총리는 "유럽정치는 국내 정치다"라고 늘 말하지만, 유럽 정치를 고전적인 외교정치처럼 대하고 수장으로서의 특권으로 여긴다. 정치가 국가 지도자 중심으로, 계급조직처럼, 중앙집권적으로 변하고 있다.


외교정치에서 메르켈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본원칙은 이렇다. 독일은 자신의 문제를 혼자 풀 수 없다. 그래서 독일은 동맹과 연합의 일부가 된다. 유럽과 유럽연합, 미국, 북대서양 조약기구, 유엔 헌장의 국제법 준수, 이스라엘에 대한 의무, 이것이 메르켈의 가장 중요한 지향점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도 여기서 도출되었다. 프랑스와의 우정, 폴란드의 의미, 유럽의 균형, 유로, 최후통첩으로서 군대 투입 준비 등.



평화의 꿈

그리움의 땅 미국

앙겔라 메르켈에게 미국은 두 나라다. 사적인 미국과 공적인 미국. 공적인 미국은 총리로서 만나는 미국이다. 대통령, 국가, 지도자, 거물정치가들과 함께 화상회의에서 만나는 미국이다. 공적인 미국은 총리의 정치 풍경 뒤에 거석처럼 서 있고 그녀의 이념적 지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가치, 신념, 전략 등 모든 것이 정치적 미국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공적인 미국은 때때로 앙겔라 메르켈에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메르켈은 총리를 오래 하면 할수록 그 원인에 대해 더욱 고심하게 된다. 메르켈의 공적인 미국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미국의 국내정치, 속을 알 수 없는 오바마 대통령 그리고 날로 의심스러워지는 자기인식능력으로 특징지어져 있다.


반면, 사적인 미국은 감동을 주는 꿈과 이상의 나라다. 앙겔라 메르켈은 청소년 시절에 이 나라를 그리움의 땅이자 자유와 자아실현의 장소로 만났다. 당시에 그녀는 60세가 되면 꼭 미국에 갈 거라 결심했다. 구동독은 60세가 넘어 연금을 수령하는 여자들에게 서방국가로의 여행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겔라 메르켈은 36세에 벌써 그 그리움의 땅을 여행했다.


"나는 왜 미국에 감탄했을까요? 나는 아메리칸 드림에 감탄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곳, 성공이 있는 곳,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는 곳!" 메르켈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많은 십대들이 그렇듯, 나 역시 서독에 사는 친척이 정기적으로 보내 주었던, 동독에서는 구할 수 없는 특정 브랜드의 청바지에 열광했습니다. 나는 미국의 넓은 땅을, 자유의 정신과 독립성을 동경했습니다. 1990년이 되자마자 남편과 나는 평생 처음으로 미국 캘리포니아를 여행 했습니다. 태평양을 처음 본 순간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장엄 그 자체였습니다."


메르켈은 신중하면서도 전술적이며 논리적 주장의 격렬한 논쟁이 통하는 미국의 정치 스타일에 매료되었다. 미국은 사회복지정책 면에서 독일이나 유럽의 표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보수적인 나라다. 메르켈은 미국의 정치가 독일에 비해 상당히 오른쪽을 쏠려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미국을 닮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국 정치에서 만나는 주장의 명확성과 논쟁의 날카로움에 놀란다. 예를 들어 독특한 대통령 후보제도, 적나라한 과격성으로 사회의 기본상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티파티 운동, 혹은 국가보조정책의 목적과 의미가 뒤로 밀쳐지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국가가 정말로 연금에 관여해야 할까? 아픈 사람들을 돌봐야 하는 것이 과연 정부의 과제일까? 국민 한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개인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국가를 필요로 하는 조직은 얼마나 될까? 국가가 견딜 수 있는 불공정의 한계는 어디일까?


메르켈은 체제 비교를 좋아한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비교 기준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하고,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더 잘하는가? 미국은 이런 호기심을 조롱하듯 메르켈을 혼란스럽게 했다. 미국은 언뜻 복기에 유럽 국가들과 매우 비슷한 데다, 유럽의 옛 역사와 문화가 주입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은 곧 깊은 절망에 빠질 수 있다. 미국도 매우 무자비하고 급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온의 빛

매혹의 이스라엘

앙겔라 메르켈의 외교정치는 늘 점검과 조절을 수반하며, 또한 유연하다. 성공적인 외교정치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운신의 폭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외다. 메르켈에게 이스라엘은 마음으로 연결된 나라다. 이스라엘과 유대교에 관한 한, 메르켈 총리만큼 확고한 결의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주제만큼 그녀가 강한 확신과 확고부동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없다. 이스라엘은 그녀의 외교정치 좌표의 기본 축에 속한다. 중요도에 있어서 유럽연합과 미국에 비견할 만하다. 메르켈의 신념에서 이스라엘은 독일의 국가이성에 속한다. 메르켈의 국가이성은 해석이 분분하여 격렬한 논쟁을 야기하는 도그마와 같은 신조다.


그녀는 유대교와 이스라엘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독일 역사에 대한 이해와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그녀가 총리로서 세운 정치원칙은 독일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과의 정치는 유대인의 삶에 대한 존중과 호원이고 역사적 의미가 강했다. 메르켈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녀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며, 그녀의 정치에서 이 나라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역사적 맥락에서 독일의 의미로 여긴다. 이스라엘과의 정치에 관한 메르켈은 모든 선임자들을 능가한다.


메르켈은 독일의 잘못과 유대인의 학살의 특수성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연설에서 자주 다루었다. 그녀는 역사로부터 남아 있는 임무와 문명 파괴 개념을 강조했다. 그녀는 총리 임기 첫 7년 동안 이스라엘을 네 번이다 방문했고 이스라엘 의회에서, 히브리 대학의 명예박사학위수여식에서 그리고 중요한 정책연구소에서 연설을 했다.


그녀는 독일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레오백상이다. 2009년 금융위기가 한창일 때 그녀는 유대인 대박해의 밤 70주년 기념연설을 했다. 그녀는 이 기념연설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래서 연설의 뼈대를 구성한 보좌진들과 긴 토론을 거쳐 연설문을 완성했다. 결국에는 메르켈이 직접 연설문을 쓰거나 적어도 문장을 수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고 작성에 관한 한 그녀는 매우 꼼꼼했다.


이 기념 연설에서는 쇼아로 인한, 이스라엘에 대한 독일의 책임이 빠지지 않고 언급되었다. "독일과 이스라엘은 쇼아에 대한 기억으로 특별하게 연결되고 있고 이 연결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녀가 이스라엘 의회에서 말했다. 메르켈이 신중하게 표현했듯이, 이것은 근본적인 힘의 원칙이다. 메르켈의 쇼아 연설에는 두 가지가 등장한다. 첫째,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둘째,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외국인 혐오증, 인종주의, 반유대주의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학살의 교훈이다.


메르켈은 외국인 혐오증,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이 세 가지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때 외국인 혐오증과 인종주의가 반유대주의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이스라엘 의회에서만 특별히 반유대주의를 제일 먼저 언급했다. 예측컨대 그녀는 오늘날 인종주의가 유대인 증오보다 더 위험하다고 본다.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메르켈의 임무가 생긴다.


유대인 사회와 독일의 관계 후원하기 그리고 이스라엘의 안전관 공동 가치를 위해 애쓰기, 이스라엘에 대한 메르켈의 관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가치다. 아랍지역의 저항운동에서 메르켈은, 이 지역에서 민주주의국가로서 유럽의 가치를 보호하고 있는 나라는 이스라엘뿐임을 확인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정착촌 조성에서 스스로 이 가치를 지키지 않을 때, 메르켈은 특히 더 화가 났다.


또한 메르켈은 역사의 보전을 아주 구체적으로 염려한다. "시대의 증인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 쇼아의 기억을 보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의회에서 그녀가 물었다. 다른 자리에서도 삶의 증인과 만행이 너무나 빨리 망각 속으로 사라져 늘 새롭게 놀란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쇼아를 직접 겪었던 세대가 더는 우리 곁에 없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역사적 책임을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푸틴

사랑스러운 러시아와 버거운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개 사건을 매우 의식적으로 계획했을 것이다. 러시아 대통령은 개를 좋아한다. 앙겔라 메르켈은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기는커녕 개를 무서워한다. 1995년 8월 우커마르크에서 베시에게 공격을 당한 이후로 줄곧 그랬다. 당시 메르켈은 자전거를 타고 주말병장 근처를 달렸는데, 이웃 집 사냥개가 그녀에게 달려들어 무릎을 물었다. 그 일이 있는 후 메르켈은 자전거를 다시는 타지 않았고 개도 싫어했다. 푸틴 같은 사람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이 남자에게는 그런 것을 감지하는 직관이 있다.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 취임 얼마 후 2006년 1월에 모스크바로 취임방문을 갔을 때, 권력을 과시하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대통령궁에서 그녀에게 개 인형을 전달했다. 인형은 한참을 의자등받이에 걸쳐져 있다가 외교정책보좌관 호이스겐의 품에 숨어서 크렘린궁 밖으로 몰래 나가야 했다. 이것이 푸틴의 악의적 행동 제1부였다. 제2부는 1년 뒤 2007년 1월에 크림반도에서 이어졌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검은 래브라도가 방으로 뛰어 들어와 메르켈의 냄새를 맡고 발을 핥았다. 이 장면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메르켈은 얇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잔뜩 경직되어 두 다리를 바짝 끌어 당겼다.


푸틴은 새디스트 자세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다리를 벌리고 느긋하게 뒤로 기댄 채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메르켈은 이런 자세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녀는 우연을 믿지 않고 기만당하는 것을 증오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총리와 푸틴이 만나는 자리에서는 개를 멀리하기로 약속 했다.


메르켈에게 미국이 두 나라인 것처럼 러시아도 두 나라다. 사적인 러시아와 공적인 러시아. 사적인 러시아는 앙겔라 카스너에게 러시아어 올림픽, 여행, 문학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한다. 무성한 소문과는 달리 그녀는 러시아에서 공부한 적이 없지만 모스크바 여행 때 러시아 남부 캅카스도 가 보았을 것이다. 이런 사적인 러시아는 여전히 러시아어를 사랑하는 초리의 마음에 좋은 감정으로 남아 있다. 반면 정치적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랜 관계 끝에 어느 정도의 존중이 생겼지만 경쟁은 여전하고 심지어 미세한 조롱까지 느껴진다. 다시 대통령이 된 푸틴이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메르켈은 그에게 또 지각이냐고 어머니처럼 엄하게 꾸짖었다. 지각으로 유명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은근히 빗댄 것이니라. 그러자 푸틴은 러시아 사람들이 원래 그렇다는 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대꾸했다.


둘 사이에 격렬한 논쟁도 있었다. 메르켈과 수행원들은 2007년 크림반도 방문을 잊을 수 없다. 첫 번째 진짜 권력싸움은 크림반도에서 석유가스사업, 안보, 우크라이나 등 늘 있었던 주제들을 다루면서 시작되었다. 푸틴은 KGB장교처럼 행동했다. 호통을 치거나 큰 소리를 내다가 다시 목소리를 깔고 조용히 강요하듯 말했다고 저속한 태도로 서류들을 내밀며 수치들을 지적하고 거칠게 굴었다. 거만한 비밀첩보원이 되어 온갖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동원하여 메르켈을 가르치려 들었다.


메르켈은 구동독의 비밀경찰에게서 익히 봤던 터라 이런 태도를 잘 안다. 메르켈은 옛날 생각을 일깨우는 이런 태도를 몹시 싫어했다. 회담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메르켈의 한판승을 전한다. 침착한 메르켈이 대단한 관련지식으로 단번에 제압한 것이다. 그녀의 자료와 지식은 주목할 만하고 기억력 또한 혀를 내두르게 만한데, 몇 년 전의 대화인데도 세부 내용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때가 많다.


메르켈과 푸틴의 대결 분위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그사이 푸틴도 메르켈을 학습했고 이제는 메르켈 방식으로 메르켈을 공격하려 시도한다. 만약 메르켈이 러시아 주재 외국정당재단에 대한 러시아 관청의 태도를 비판하면, 푸틴은 정치적 결사의 자유에 대한 독일헌법의 보장수준을 지적한다.


그의 메시지는 뻔하다. 독일이나 러시아나 뭐가 다르죠? 때때로 메르켈과 푸틴의 이런 다툼은 마치 상대방의 묘책과 요령을 이미 터득했고 모든 주장들이 이미 한 번씩은 다 들었던 내용인 노부부의 부부싸움을 연상케 한다. 메르켈은 아마 푸틴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말할 테다. 조심해야하기는 푸틴도 마찬가지다.



대위기

앙겔라 메르켈의 유럽전쟁

벨기에의 동화마을 브뤼헤에 자리한 유럽칼리지는 이상주의의 본거지라 할 만하다. 유럽을 믿고 유럽의 화합정신을 믿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공부한다. 유럽칼리지의 베르베르스디예크 신축건물은 거대한 산소 호흡기처럼 생겼다. 벌집 모양의 콘크리트 정육면체, 언제나 유럽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 줄 것 같은 풀무처럼 생긴 지붕. 유럽연합의 정신이 자유롭게 숨 쉬는 곳이자 앙겔라 메르켈이 지혜의 말로 유럽 젊은이들에게 길을 안내하고자 했던 바로 그곳이다. 어쩌면 그녀는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을지 모른다.


2010년 11월 2일 화요일. 앙겔라 메르켈은 이날 아침 우편물을 받았다. 소포 하나가 총리실에 배달되었고 경호원들을 이를 즉시 치웠다. 그리스에서 메르켈 총리 앞으로 온, 끈으로 묶인 폭탄 소포. 이런 일은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 생기더라도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메르켈이 그리스 과격주의들의 목표라고? 뜨거웠던 위기의 첫 몇 달이 지나면 이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총리는 이날 다른 뉴스를 준비 했다. 대중은 메르켈이 브뤼헤 유럽칼리지 연설 서두에 재미있게 들려준 아인슈타인에 대한 일화를 뉴스로 접해야 했다.


메르켈 총리는 유럽칼리지의 61회 입학식을 축하하기 위해 벨기에로 갔다. 모든 입학생들에게 학년마다 부여되는 수호자의 이름을 받게 된다. 이번 입학생들에게는 이론물리학의 대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선택되었고, 이에 이론물리학자인 메르켈 총리는 특히 기뻐했다. 메르켈은 먼 19세기로 학생들을 데려갔다. 그녀는 자신의 롤 모델이기도 한 마리 퀴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닐스보어, 그리고 당연히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그런 다음 총리는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과학자조차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매우 힘들었을 거라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양자역학 같은 다른 큰 세계를 이해하기 힘들었고 테고 많은 것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것도 그를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학생들은 속으로 싱긋 웃었을 것이다. 물리학이 아니라 사회학을 공부하는 그들로서는 어쩌면 양자역학의 관련성을 하나도 이해하기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양자역학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뭔가 다른 것을 전달하고 싶었다. 아인슈타인의 사례에서 보듯이 익숙한 세계관에서 벗어나 학문적 발견으로 얻은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성의 한계이자 특정 시대의 한계입니다."


메르켈은 이성에 한계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해하려 노력하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한다. 유로위기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메르켈은 11월 2일에도 시간을 끌었다. 계속 진행할 수 없을 때는 언제나 시간을 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메르켈이 확신에 차서 유럽칼리지 학생들에게 말한 것처럼, 언젠가는 한계가 위대한 인류에 의해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다루고 생각하고 연구하면, 갑자기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해 보입니다. 이전 세대가 왜 고민만 하고 있었는지 의아해집니다."


자연과학자 메르켈은 궁극적으로 학문적 발견을 통해 내부의 문제를 밖에서 이해하게 될 지점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녀는 문제가 명확하고 간단하게 드러날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고자 했다. 위기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가 다른 기회에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눈앞에 있는 손조차 보이지 않는 깜깜한 공간이었다.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걸음만 잘 못 디뎌도 다시는 출구를 차지 못할 것이다.



전부 메르켈?

탈정치적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외교 및 유럽정책을 공정하게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아마도 몇 년을 더 기다려야 결산을 낼 수 있으리라. 2013년 현재 독일연방정부의 총리로서 7년을 지냈지만 여전히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이미 한 일의 무게를 바르게 저울질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위기 때문이다.


총리가 축적해 놓은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릴 만큼 위기는 너무나 강력하다. 메르켈은 위기의 포로로 잡혔고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고 있다. 그리스나 스페인은 한동안 계속 힘겨울 것이다. 시장은 긴장상태에 있다. 프랑스는 전후역사상 가장 힘든 자기발견의 시간 앞에 섰다. 그리고 독일에서도 유로문제가 2013년 선거를 지배할 것이다.


위기가 누그러지면 비로소 사람들은, 메르켈이 유로구제(혹은 멸망)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 알게 되리라. 메르켈의 측근들은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잘못되면 즉시 욕을 먹고, 잘되면 20년 뒤에 칭찬을 들을 것이다." 이것은 고전적인 겸양이긴 하다. 어째든 메르켈은 쉬운 길을 마다하고 위험을 무릅썼다. 그녀는 독일조차도 견디기 힘들었을 거친 치료책을 유럽에 처방했다. 게다가 걸림돌까지 있었다.


위기가 유럽의 약한 구가를 가혹하게 무너뜨릴수록 독일은 낮은 이자율, 높은 경제력, 고급인력의 매력적인 일터로서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런 사실 때문에 메르켈은 한편으로 더욱 강력해졌고 다른 한편으로 더욱 공격을 받았다 그녀가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커졌다. 그녀의 실패는 곧 유럽의 붕괴를 의미했다.


메르켈의 측근 중 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메르켈 총리는 완벽한 탈정치적 정치가다. 그것은 칭찬의 의미로 한 말이었다. 탈정치적 정치가들이 정치적 무대에 오르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탈정치적 정치가는 한곳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 확신을 버리고 유연성을 유지하며 올바른 타이밍을 기다린다. 이념이 발붙일 곳 없는 과도하게 규정된 체제에서 이런 자세는 결코 나쁘지 않다.


메르켈의 권력 또한 메르켈의 방식에서 나온다. 그렇다. 앙겔라 메르켈에게는 깊은 권력의식이 있다. 그녀는 누가 그녀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지 정확히 감지한다. 그녀는 이념적 신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탈정치적 정치가의 모범으로서 그녀는 이념을 권력의 척도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내용적인 추종을 요구 한다. 합리적 가늠과 근거 있는 주장이 우선하게 세계, 즉 논리와 반대논리의 세계에 참여하기를 요구한다. 그녀는 강력한 주장에 직면하면, 이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혹은 받아들일 말한 주장을 찾으려 애쓴다.


메르켈은 권력을 큰 소리로 과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소리치지 않고 조용히 말한다. 탁자를 내려치지 않고 오히려 몇 날을 밤새 일하여 상대를 피곤하게 만든다. 연방의회의 신임투표를 그녀는 약함의 증거로 본다. 만약 그것을 강요받으면, 정치계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로위기는 그녀의 가장 큰 도전과제다. 메르켈은 상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너무 많고, 영향을 미치는 정치가들이 너무 많다. 그녀도 잘 알고 있듯이 사건과 인물들이 그녀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2013년 연방의회선거에서 자민당이 성공하도록 도울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리스 내각, 스페인 총리, 프랑스 국가채권의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운명의 날이 올 것이다. 메르켈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운명의 그날에는 그녀는 무엇을 남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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