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재발견

   
유창선
ǻ
지식프레임
   
14000
2012�� 06��



■ 책 소개
2012년 대선, 킹메이커는SNS다!

미디어 혁명을 넘어 정치의패러다임까지 바꾸고 있는 SNS. 우리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정치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온라인 공간에서 전방위적 평론 활동을펼치고 있는 1인 미디어의 선봉장 유창선 박사가 SNS 시대의 대한민국 정치를 깊이 있고 날카롭게 분석한다.
저자는 SNS 시대가 가져온 변화의 물결과 함께 MB 정부가 권력으로 점령한 미디어정책의 실태, 그리고 SNS가 대한민국 정치에 가져온 패러다임의 변화와 대응책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이야기한다. 나아가 진보의 소통 방법,그리고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진영 논리로 소통을 가로막는 SNS 사용자들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충고를 아끼지않는다.

■ 저자유창선
노트북 가방 하나 메고 새벽에 집을 나서 프리랜서로서의 유목생활을 하는 디지털 노마드. 직업은 시사평론가.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사회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정치평론을 해 왔다.거의 모든 채널을 섭렵하며 무척 잘나가던 시사평론가였지만 MB 정권이 들어선 이래 블랙에 걸려 지상파 출연을 못 하게 되자, 그 대안으로SNS를 통한 시사평론의 영역을 개척해 왔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아프리카 TV 등을 통해 수많은 독자, 시청자들과 만나며 1인미디어의 선봉장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2010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대상, 2010 아프리카 TV 캠코더방송 최고 인기 BJ에 선정된 바있다. 현재 SNS 현장 한복판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대학과 기관 등에서 소셜미디어와 사회 변화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오늘도 온라인과오프라인의 각종 미디어를 누비고 있는 그를 가리켜 한겨레는 ‘미디어계의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 차례 
프롤로그 - SNS 시대의 대한민국정치 보고서 

1부 MB의 블랙에 걸리다
1. MB에게 마이크를 빼앗기다 
2. 아프리카 TV로 망명하다 
3. 빼앗긴 마이크, SNS로 되찾다

2부 우리는 왜 나꼼수에 열광했던가
1. 듣도 보도 못 했던 쎈 놈이 나타났다 
2. 그들은 대단히 편파적이다 
3. 선거판을 뒤흔든 나꼼수의 힘
4. 나꼼수, 그러나 안타까웠던 것 
5. 개인방송, 1인 미디어를 꿈꾸다 

3부 대한민국, 정치를팔로잉하다 
1. SNS, 정치 참여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2. 촛불과 함께 타오른 한국의 SNS 
3.18대 대선, 킹메이커는 SNS다 
4. 4·11 총선은 소셜선거의 패배인가? 
5. SNS는 떴다방이 아니다

4부 보수는 왜 SNS를 두려워하는가
1. 보수는 왜 SNS를 못 할까? 
2. 보수의 한계, 종편채널의 실패 
3. SNS는 종편보다 힘이 세다
4. MB, 미디어를 점령하다 
5. 방송사 최장기 파업을 말하다 
6. 통합진보당 내분, 매카시즘으로 몰고 간 보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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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소셜미디어 시대,소통의 정치를 꿈꾸다 
1. 2040과의 소통, 슈스케식 접근의 한계 
2. 소통의 아이콘, 안철수 리더십
3. 안철수,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다 
4. 문재인과 안철수, 정권 교체의 파트너 
5. 박근혜, 소통 부재의 리더십
6. ‘빠’ 의 정치문화, 소통의 단절 
7. 진보는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가 
8. 동지도 신뢰도 끊어진 통합진보당의 참화

에필로그 - 12월 대선, 소통하는 진보를위해





정치의 재발견


프롤로그 - SNS 시대의 대한민국 정치 보고서

2009년이 시작되던 겨울.


그 무렵부터 나에게 하차 통보를 하는 방송사들이 한 곳 두 곳 늘어갔다. 촛불의 공포로부터 탈출한 MB정권은 본격적으로 방송 장악에 나섰고, 나 또한 망나니들이 휘두르는 칼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방송에서 퇴출당했던 그 무렵, 때마침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시대의 물결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 즉시 SNS를 통한 시사평론 활동으로 눈을 돌렸다. 오프라인 방송 출연을 봉쇄당한 나에게 SNS는 새로운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 빛이 어쩌면 나를, 아니 우리를 구출해 줄지 모른다는 설레임을 갖고 그곳에 본격적으로 판을 벌였다.


오늘날 SNS는 사회와 정치를 변화시키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까지도 바꾸어놓고 있다. 수직적 권위 체계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던 사회는 이제 수평적 네트워크로 재편되고 있다. 이로써 사회 구성원들은 SNS 공간에서 공평한 발언의 기회를 부여받고 있다. 여론은 거대 미디어나 권력에 의해 주입되지 않고 SNS 참여자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만들어지고 있다.


SNS 미디어 혁명은 단지 현대 기술의 발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SNS는 우리의 일상을 넘어 정치사회적 문화와 틀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낡은 관점이 아닌, 이제 SNS 시대에 걸맞은 시선으로 우리의 정치를 바라볼 때이다. 그동안 정치평론을 해 왔던 사람으로서, 나는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12년의 정치를 그러한 관점에서 진단해 보고자 했다. 책의 제목대로 정치의 재발견이다.



MB의 블랙에 걸리다

MB에게 마이크를 빼앗기다

MB정부 아래에서 방송인으로서의 나의 수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KBS와 MBN에서의 퇴출은 다른 방송사에서의 활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종종 섭외가 오던 MBC TV의 <100분 토론>이나 MBC 라디오 프로그램들에서는 아예 섭외가 끊겼다. TBS(교통방송)의 경우도 MB정부 들어 몇 년 동안 출연을 못 하다가 지난해부터서야 정상적으로 출연하고 있다. 여러 방송에서 간혹 나를 출연시키려고 섭외까지 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죄송합니다. 어렵게 되었습니다"라는 전화를 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상황은 방송을 전업으로 하다시피 했던 나에게 생존권을 위협하는 문제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방송사들을 옮겨다니며 방송 활동을 하던 나에게서 MB정부는 마이크를 빼앗아갔다. 그것도 납득할 만한 한마디의 설명조차 없이.


그저 내가 PD들을 통해서 들었던 얘기라고는 노무현 정부 때 방송에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했던 방송의 내용이 편파적이라거나 공정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나는 방송이란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인 만큼, 할 말은 하되 어느 편에 속하지 말고 공정하게 해야 한다는 원칙을 불문율로 삼아왔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노력은 정권이나 그 하수인들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유창선이라는 사람은 MB정부와 코드가 다르고, 따라서 정부를 비판할 소지가 있다는 점이 껄끄러웠던 모양이다. 이는 자신들 편이 아니면 방송에 나올 수 없다는 야만적 폭력이었다. 도대체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아무런 근거조차 없이 마이크를 빼앗고 한 사람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폭력이 어떻게 버젓이 자행될 수 있는 것인지,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는 현실이 그저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자신에 대한 학자들의 비판을 막기 위해 책을 불태우는 분서갱유를 했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막기 위해 방송을 장악하고 마이크를 빼앗는 일을 저질렀다. 나의, 아니 우리의 겨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왜 나꼼수에 열광했던가

그들은 대단히 편파적이다

나꼼수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자 그동안 이를 무시해 왔던 보수 신문들이 들고 일어났다. 나꼼수를 미디어로 간주하지도 않고 무시하던 매체들이 나꼼수의 영향력이 커지자 공격을 하고 나선 것이다. 대략 나꼼수가 맹위를 떨쳤던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전후한 시점이었다.


나꼼수에 대한 공격은 다른 보수언론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했다.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꼼수가 편파적인지, 그리고 편파적이면 안 되는 것인지를 논하기 이전에 짚고 가야 할 문제가 있다. 이들 조중동이 과연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조중동은 줄곧 아니면 말고식의 기사로 진보를 공격해 왔다. 그것은 사실에 근거한 논리적 비판이 아니라, 사실을 왜곡한 채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가치를 주입하는 정치적 선동이었다. 수준으로 말하자면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언론으로서의 기본을 망각한 조중동이야말로 수준 이하의 언론이었다.


또한 나꼼수가 편파적이라는 비판만 해도 그렇다. 편파적이기로 치면 어디 조중동만 매체가 또 있을까. 그들은 항상 보수의 편에 서서 진보를 음해해 왔다. 이명박 정권의 편에 서서 그 비판 세력을 공격해 왔다. 그것은 대단히 불공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매우 편파적이었다.


나는 나꼼수가 편파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고 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 여기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나꼼수는 편파적이면 안 되는 건가. 나꼼수가 편파적이지 않아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과 같은 SNS 시대에는 모든 미디어나 매체가 다 중립적일 필요가 없다. SNS 시대의 미디어가 어디 수백 수천 개인가. 수백만 개의 미디어가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개인방송 등을 통해 콘텐츠를 생산해 내고 있다. 말 그대로 1인 미디어의 시대이다. SNS 가운데 어느 하나를 기반으로 해서 자신의 발언을 하면 그것이 1인 미디어가 되는 세상이다. 오늘과 같은 SNS 시대에는 중립적인 미디어보다는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다양한 미디어들이 필요하고, 편파적인 미디어들도 필요한 것이다.


나꼼수가 어느 한쪽으로 편파적인 방송을 만들었다면, 그것이 못마땅한 사람들은 다른 한쪽으로 편파적인 방송을 만들면 된다. 그러면서 미디어들 간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회적 조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나꼼수는 애당초 균형 있는 보도라든가 공정한 논평을 위해 만든 방송이 아니다. 그저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이 모여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자신들의 주장을 많은 청취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만든 방송이다. 처음부터 가카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것을 후련하게 까기 위해 만든 방송이다. 거기다 대고 편파적이지 않느냐며 점잖게 훈계하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뻘짓이다. 나꼼수 4인방이 어째서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아니 가카와 국민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그냥 자기들 생각대로 말하고 떠들면 되는 것이다.


나꼼수 같은 방송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배려할 이유도 없다. 나꼼수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안 들으면 그만이다. 원하는 사람만 듣게 되어 있는 것이 팟캐스트 방송이다. 그러니 구태여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에게까지 마음에 들 방송을 만들 책임은 없다.


이것은 나꼼수에게만 한정되는 얘기가 아니다. SNS 시대에 등장하고 있는 수많은 미디어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이다. SNS 미디어들은 저마다 자유로운 목소리를 내면 된다. 자기가 무슨 주장을 하든, 그것은 각자의 소신이고 권리이다. 누구도 거기에 절대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특정한 논리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는 결국 표현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바라볼 문제이다. 나꼼수의 내용이 편파적이더라도 그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한다. 요즘 세상에 가카만 깐다고 해서 문제가 될 이유가 무엇인가. 가카를 찬미하는 미디어가 보호받듯이, 가카를 까대는 미디어도 당당하게 존중받을 이유가 있다. 그것이 곧 표현의 자유이다.


조중동은 나꼼수의 편파성을 논하고 있을 시간에, 어째서 수백만의 청취자들이 나꼼수에 열광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이런 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김어준 총수의 말이 제격이다. "그러면 너희들도 하나 만들어! 씨바!"



대한민국, 정치를 팔로잉하다

SNS, 정치 참여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SNS 환경의 도래는 인류에게 단지 기술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SNS 시대의 도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방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더 나아가 사람들의 생활양식에까지 큰 변화를 낳고 있다.


개인에게 있어서 SNS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위한 소통의 도구이지만, 그 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여 새로운 소통의 바다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SNS는 개인의 소통 방식의 변화를 낳는 데 이어 정치사회 전체의 운영 방식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모바일을 손에 쥔 시민들은 저마다 미디어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했고, 이들이 SNS에 올린 정보와 의견들은 새로운 소셜미디어의 시대를 열고 있다. 이제 여론 시장의 권력은 거대 주류 미디어로부터 SNS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들에게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민주주의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시민들은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에 자신의 의견을 올리고, 자신이 공감하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전파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다. 거대 미디어들이 주도했던 여론의 일방적 형성 과정은 이제 시민들이 SNS를 통해 아래로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가는 풀뿌리 여론의 형성으로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거대 언론, 한국의 예를 들면 조중동이 여론을 일방적으로 주도했던 시절이 있었다. 조중동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맛대로 의제를 선정하고 이를 이슈화시키면 그것이 여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되고 특히 SNS 이용자가 급증하면서 여론은 더 이상 소수의 거대 언론이 아닌 다수의 시민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02년 대선에서 조중동의 집요했던 음해와 공격을 딛고 노무현 후보가 승리했던 것은 풀뿌리 여론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단지 인터넷뿐만 아니라 모바일에 기반한 SNS를 통해 여론이 형성되는 영역이 크게 넓어졌기에 조중동 같은 올드미디어의 여론 주도력은 더욱 퇴조하게 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트위터 혹은 페이스북 공간에서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이슈를 만들어내고 서로 소통하며 여론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물론 SNS 여론이 반드시 오프라인의 전체 여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종종 괴리 현상도 발견되지만, 그래도 전체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은 오히려 조중동을 넘어선 지 오래이다. 조중동이나 KBS, MBC 뉴스가 다루지 않는 사안이 SNS를 통해 사회적 관심사로 부상한 사례는 이제 부지기수이다. 홍익대 청소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결국 해결될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SNS의 역할을 통해서였다.


이와 같은 점에서 소셜네트워크 민주주의는 과거 참여민주주의가 이루지 못했던 미완의 과제들을 성취시켜가고 있다. 정치사회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가 과거에는 NGO를 통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이제 SNS를 통해 예고 없는 혁명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 민주주의는 크게 세 가지 단계로 구성된다. 첫째, SNS를 통한 시민들의 소통이다. 둘째, SNS를 통한 의제의 창출과 여론의 형성이다. 셋째, SNS에서 만들어진 의제와 여론은 개인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형성된 네트워크를 통해 오프라인에서의 행동으로까지 발전한다. 이와 같은 소셜네트워크 민주주의는 이전까지 NGO가 선도했던 참여민주주의의 실험, 인터넷에 기반한 온라인 민주주의로부터 질적으로 발전한 새로운 단계라 할 수 있다.


또한 SNS는 각자의 의견을 웹에 쏟아내는 데 그쳤던 온라인 민주주의를 넘어, 개인으로 분리되었던 이용자들이 네트워크화되어 결속하고 조직적인 행동으로까지 연결된다는 점에서 온라인 민주주의보다 진화된 단계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수는 왜 SNS를 두려워하는가

보수는 왜 SNS를 못 할까?

영향력 있다고 하는 파워 트위터리안들은 한결같이 진보 성향의 인물들이다. 페이스북에서도, 블로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 TV에서의 시사방송을 봐도 시청자가 많은 방송은, 망치부인, 커널TV, 유창선의 시사난타 같은 진보 성향의 방송들이다.


반면에 보수 쪽은 맥을 못 춘다. 이제는 보수 여당 정치인들 가운데서도 SNS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그들의 친구 숫자는 진보 야당 정치인들에 비해 현격히 뒤지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가 있을 때 야권의 한명숙 후보나 박원순 후보는 한명숙 TV, 박원순 TV를 방송해 많은 시청자들을 모았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후보들은 그러한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기껏 한두 번 해 보고는 시청자가 없으니까 그냥 접어버리곤 했다.


왜 그럴까. 보수는 태어날 때부터 SNS에 둔감하게 태어난 것일까. 이는 개인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 존재하는 SNS 능력의 격차에는 구조적인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SNS의 환경 자체가 그러하다는 말이다.


우선 한국에서 SNS가 급성장한 배경을 이해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서 SNS는 기존의 올드미디어에 대한 불신 위에서 성장하였다.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보수 언론의 편파성과 불공정성에 대한 불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대안 미디어로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 바로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 같은 SNS였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 언론에 비판적인 진보층이 SNS의 중심을 이루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에 힘입어 진보 진영의 SNS 활용 능력은 보수 진영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위를 누려왔다. 그동안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등의 야당과 그에 속해 있는 정치인들은 여당인 새누리당에 비해 SNS 활용에 있어서 우위를 보여왔다.


그렇다고 SNS에서 보수가 뒤지는 현상을 전적으로 구조적 문제로 돌릴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보수의 게으름, 무능력, 그리고 소통 마인드의 부재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보수를 대변한다는 인사들이 SNS에 올리는 내용을 보면 단순, 무식, 과격의 행태를 발견하게 될 때가 많다. 보수를 폄하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상대할 수 없는 욕설 혹은 일방적 주장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보수는 애당초 소통이라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곳으로 SNS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 자세로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여 공감을 넓혀가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에 대한 혐오만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다.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꾸준하거나 지속적으로 SNS를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을 때만 한다. 둘째, 쌍방향 소통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몇몇 보수 정치인이나 논객들이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이슈를 제기하는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끌고 있다. 그러한 인물로 강용석, 전여옥, 조갑제, 변희재, 강재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등을 통해 진보를 공격하거나 폭로하며 이슈를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왔다.


그러나 이들의 역습은 그 요란함에 비해서 공감의 폭을 넓히는 데는 실패했다. 이들의 트위터 글에 찬동하며 리트윗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겹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오히려 반대 의견이 많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일시적 이슈로 떠오른 경우가 많다.


결국 오프라인에서든, 온라인에서든, SNS에서든, 진정성 있고 좋은 콘텐츠가 있어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SNS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왕도라는 사실. 대한민국 보수가 10만 팔로워 양병론을 주장하기에 앞서 진정으로 되새겨야 할 것은 바로 이 대목이 아닐까.



소셜미디어 시대, 소통의 정치를 꿈꾸다

문재인과 안철수, 정권 교체의 파트너

문재인은 많은 강점을 가진 좋은 후보이다. 그가 갖고 있는 강직하고 불편부당한 이미지는 대중들의 호감과 신뢰를 가능케 하는 힘이 되고 있다. 그는 참여정부에서 요직을 지냈던 다른 인사들과는 달리, 정치적 비토층이 적은 편이다.


무엇보다 그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힘은 진정성의 정치를 한다는 점이다. 야권 내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생겼을 때 문재인이 막후에서 해결사 역할을 하곤 했던 것도 그가 정치적 기술에 능해서였기 때문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심 없이 진정성을 갖고 정치를 한다고 믿고 있기에 그 같은 힘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문재인은 야권의 훌륭한 대선 주자이다.


그러나 대선이라는 대회전을 앞두고 그의 좋은 점만을 열거하며 장밋빛 그림을 그리고 있을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정치인으로서 대중에게 얼마나 호소력을 갖고 지지를 끌어모을 수 있는지는 박근혜와의 대결을 염두에 두었을 때 쉽지 않는 과제이다. 오랫동안 참모로서 정치를 해 왔던 그가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끌어모으는 대중 정치인으로 거듭나야 대선에서의 경쟁력도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4·11 총선에서 확인된 박근혜의 탄탄한 지지 기반을 감안하면 민주통합당과 문재인의 힘만으로 12월 대선에서 야권의 승리를 기대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범야권의 특정 인물로 대선 후보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범야권의 인재들을 최대한 판에 끌어들여 범야권 후보의 경쟁력을 극대화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의 행보와는 상관없이 안철수의 참여는 범야권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다.


범야권에 안철수가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새누리당의 재집권에 반대하는, 그래서 범야권으로 분류되는 인물 가운데 가장 경쟁력이 높은 주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지지가 두텁게 자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가 되는 것이 맞다. 두 사람은 12월 대선까지 함께 가야 하는 시대적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다. 12월 대선에서 범야권의 승리 여부는 이렇게 당사자들이 어떻게 판을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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