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CSI

   
표창원·유제설
ǻ
북라이프
   
13800
2011�� 12��



■ 책 소개
표창원, 유제설의 ‘흥미진진 범죄학강의 콘서트’
프로파일러 표창원 교수와 과학수사 전문가 유제설 교수가 안내하는 경이롭고 치밀한 한국CSI 보고서. 현장 감식, 지문, DNA, 혈흔, 미세 증거부터 검시, 화재 감식까지 과학수사의 대표 영역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실제사례를 통해 상세하게 알려 준다. 또한 오 제이 심슨 사건의 무죄 판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세계적 법과학자 헨리 리 박사, 촉망 받는생명공학도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지문 감식 전문가로 탈바꿈한 임승 검시관 등 분야별로 활동 중인 전문가들을 소개하고, 그들과의 인터뷰를정리하였다. 풍부한 자료사진과 디테일한 설명은 드라마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사건 현장을 현실감 있게 체험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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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표창원
 -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프로파일러이자 경찰대학 교수로활동하며 우리 사회의 안전을 책임질 경찰관들을 양성하고 있다. 경찰청 강력범죄 분석팀 자문위원, 미제사건 분석 자문위원, 수사보안연구소 범죄학및 범죄심리학 강사, 아시아경찰학회 총무이사 및 회장 등을 역임하는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동 대상 성범죄, 피해자 및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활동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링 르포 프로그램 <범죄심리분석 더 프로파일러&&의 진행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지은책으로는 『한국의 연쇄살인』『EBS 지식 프라임』『숨겨진 심리학』 등이 있다. 

유제설
 - 경찰대학을 졸업한 후 10여 년 동안 경찰로 근무했고, 일선수사팀장으로 업무도 담당했다. 경찰대학 경찰학과 교수로 과학수사와 강력범죄 수사, 지능범죄 수사를 강의하고 있다. 현장 감식, 지문, 미세증거, 혈흔 형태 분석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 모임(working group)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순천향대학교에 국내 최초로 개설된법과학대학원에서 법과학 전문가 양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사이언스101 법과학』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CSI, 범죄와의 전쟁
CSI를 탄생시킨 과학수사 실패 사례1 존베넷 램지 사건 

Part1. 현장 감식, 모든 수사의 출발점 
수사의 시작이자 최후의 수단
현장감식의 절차 

Part2.지문, 감춰진 범죄자의 흔적 
두 얼굴을 가진 증거, 지문 
지문 증거가 내포한 위험성 
지문이 만들어낸 누명,브랜든 메이필드 사건 
지문에 미친 여자, 김재원 경위 
지문 감식의 탄생 
다양한 지문 감식 기법 
CSI를 탄생시킨과학수사 실패 사례2 오 제이 심슨 사건 

Part3. DNA, 살인자의 또 다른 얼굴 
과학수사의 혁명, DNA의 등장
DNA, 최초로 사건을 해결하다 
국내에 도입된 DNA 수사 기법 
DNA로 범인을 검거하는 과정 
DNA 지문, DNA프로파일링 
DNA 데이터베이스 
DNA, 무고한 시민의 누명을 풀어주다 
국내 DNA 수사의 현실 
성폭력범의 DNA를확보하는 ‘성폭력 키트’ 
최악의 현장에서 빚어낸 최고의 기술 

part4. 혈흔 형태 분석, 범죄 상황의 생생한 증언 
혈흔 형태 분석의 역사
영화 <도망자&&의 실제 주인공, 샘 셰퍼드 사건 
놀라운 한국의 혈흔 형태 분석 발전 속도 
혈흔의 방향
옷에 남아 있는 혈흔이 말하는 것 

Part5. 미세 증거, 범인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증거 
작지만 결정적인 증거
미세증거의 종류 
웨인 윌리엄스 사건과 미세증거 
CSI를 탄생시킨 과학수사 실패 사례3 가수 김성재 사건

Part6. 검시, 사체가 말하는 진실
검시 제도의 역사 
우리나라의 ‘경찰검시관’ 제도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어라 
검시관의 현장 조사활동 
CSI를 탄생시킨 과학수사 실패 사례4 치과의사 모녀 살인 사건 

Part7. 화재 감식, 화염으로도 감출 수 없는 범죄 
불은 어디서 발생했는가? 
화재의 세 가지 요소
화재 조사와 현장의 재구성 
최고의 과학, 화재 감식 

에필로그 : 범죄의 재구성 
저자 후기 : 사명감의 가치를아는 조연들의 이야기 

 





한국의 CSI


현장 감식, 모든 수사의 출발점

또 살인 사건이다. 언제나처럼 들어서자마자 피비린내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박 반장 같은 베테랑도 쉽게 참아 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는 출동에 앞서 현장 보존을 위해 둘러 친 노란색 폴리스 라인 밖에 도열한 반원들에게 현장 수사의 원칙과 유의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 후 각자의 임무를 부여했다.


먼저 현장 사진 촬영을 담당한 김 형사와 동영상 촬영을 담당한 이 형사가 현장 주변을 촬영하며 범인이 드나들었을지 모를 통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저 멀리 안방 침대에 여자의 시체가 보인다. 본능적으로 카메라 셔터가 눌러졌다. 현장이라는 큰 도화지에 시체라는 작은 점의 위치를 정확히 기록하기 위해 릴리즈를 연속 모드로 맞춘 채 셔터를 눌러 댄다.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다.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 그대로 이미지 센서에 입력해야 한다. 예술 사진이나 풍경 사진과 달리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될 ‘법 사진(forensic photography)’은 일체의 왜곡이나 변형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상 물체가 놓인 위치, 주변 물건과의 상대적 크기, 색깔, 모양, 부착물 등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사진과 동영상 촬영이 이루어지는 한편에선 미술을 전공한 형사가 현장 스케치를 하고 있다. 아무리 첨단 디지털 시대라 해도 인간의 눈과 손끝을 따라오려면 기계 문명은 아직 멀었다. 최첨단 현대 디지털 광학이 잡아내지 못한 중요한 디테일을 형사의 눈과 손끝이 잡아낸 일은 이미 한두 번이 아니다.


1차 현장 스케치와 촬영이 끝나자 채증반이 투입된다. 단 하나의 숨겨진 지문, DNA를 포함한 세포, 섬유 등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현미경과 집게, 증거물 봉투, 각종 분말과 시약, 광원을 든 채증반의 모습은 마치 외계를 탐사하는 우주인처럼 장엄해 보일 정도다.


현장반장이 해야 할 일은 현장수사팀을 지휘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만의 고유 업무가 있다. 각 요원이 발견하고 기록한 것과 자신의 현장 관찰 결과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현장을 ‘해석’하는 일이다. 그의 해석은 현장 감식 보고서와 함께 수사팀에 보내져 수사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박상선 반장은 그가 보는 것, 담는 것, 관찰하고 분석하는 모든 것이 이 ‘아무도 모를’ 사건을 한편의 영화처럼 재현해 내리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현장 보존이 해제되고 주인에게 온전히 돌아가기 전까지, 현장은 마치 연인처럼 보고 또 봐야 하는 존재다. 참 신기한 것은 똑같은 사건 현장이라도 방문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모습, 새로운 증거를 내놓는다는 점이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박 반장에게 사건 현장은 마치 생명을 가진 유기체 같다. 늦기 전에, 현장이 생명력을 잃기 전에, 현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모두 들어야 한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 조급하다.


수사의 시작이자 최후의 수단

우리는 <CSI>라는 미국의 드라마를 통해서, 또는 범죄와 수사를 소재로 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현장 감식’이라는 용어를 쉽게 접한다. 사실 현장 감식은 ‘초기의’ ‘처음의’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수사 초기에 일찍 마치는 작업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현장 감식은 성공리에 수사를 수행하기 위한 최초의 활동임과 동시에, 법정에서 범인의 유죄를 밝혀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 주고 올바른 법 집행을 가능하게 하는 마지막 카드, 즉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는 최후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처럼 현장 감식은 수사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며 범죄 수사 전반의 성패를 좌우한다.


드라마 <CSI>에는 첨단 장비와 과학 원리를 적용한 기법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자주 등장하며, 그것을 통해서 범인의 윤곽과 범죄를 밝히는 장면을 통쾌하게 풀어 나간다. <CSI>에 나오는 내용은 대부분 허구일까? 그렇지 않다. 단지 드라마 한 편의 러닝타임인 50여 분 안에 모든 단서가 범인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사건을 깔끔하게 해결한다는 점이 매체가 가진 과장과 허구를 포함할 뿐, 드라마는 놀라우리만큼 사실적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과학수사도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첨단 장비와 기법을 적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증거는 범인의 혐의를 입증하고 그의 범죄 행위를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문, 감춰진 범죄자의 흔적

한 마을에서 피해자가 벌써 네 명째다. 피해자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범인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 여성을 강간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며 담배까지 한 대 피우고 나서 현장을 벗어나는 대담함도 보인다. 허술함인지 여유로움인지 알 수 없다. 현장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그가 사용한 휴지와 콘돔 등이 담긴 검은색 비닐 봉투를 발견했고, 어렵지 않게 DNA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폭력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에서는 동일인을 찾을 수 없었다. 임의 제출받은 인근 거주 전과자들의 DNA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초범인가 보다. 용의자가 검거되면 DNA를 통해 진범 여부를 확인할 수 있지만, 지금은 ‘서울역 광장에서 김서방 찾기’다. ‘지문’만 발견하면 당장 범인을 밝혀 낼 텐데….


오랜 시간 과학수사 부서에서 일하며 남달리 지문에 자신이 있는 김 팀장 역시 사건 현장에서 용의자의 지문을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김 팀장은 콘돔과 함께 발견된 휴지를 주목했다. 아무리 치밀한 범죄자라도 어쩔 수 없이 장갑을 벗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얇디얇은 휴지를 집어 민감한 성기를 닦아 내는 순간이다. 그런데 과연 휴지에서 지문을 발견하고 채취할 수 있을까?


휴지에 남은 지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지문의 아미노산에 자색으로 반응해 마법처럼 지문이 드러나게 만드는 화학 물질, 닌히드린이 있다. 닌히드린은 아세톤, 에탄올 등의 용매에 녹여서 사용한다. 하지만 휴지는 매우 얇고 부드러워서 이러한 용액에 담글 수가 없다. 용액에 집어넣자마자 분명히 풀어지고 말 것이다. 단, 언제나 방법은 있다. 닌히드린 용액을 에어로졸 상태로 분무하면 휴지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지문에 아름다운 자색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역시 김 팀장의 생각이 맞았다.


지문 융선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고 ‘긴급’이라는 메시지를 달아 경찰청 과학수사센터로 무선 전송한 뒤 범인의 이름 석 자가 문자 메시지로 분명하게 찍히리라 자신했던 김 팀장에게 돌아온 것은 “지문의 소유자가 주민등록 DB에 존재하지 않습니다”란 실망스런 회신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굴까? 이 녀석은 생각보다 어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국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수집된 지문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두 얼굴을 가진 증거, 지문

이러한 물음은 법과학에서 비단 지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독 지문에 대해 이런 가혹한 질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 지문은 누군가를 범인으로 만들거나 어떤 범인을 아무런 처벌 없이 사회로 방류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방법이기 때문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유일한 증거는 흉기의 손잡이에 남은 지문이다. 범인이 맞다면, 그리고 검거된다면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유일한 수단인 지문이 정확하지 않다면 그가 범인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일은 ‘신의 영역’으로 넘겨야 하지 않을까? 지문은 개인을 식별하는 매우 강력한 수단이면서도 생각보다 많은 오류의 위험성을 갖고 있는 ‘양날의 검’이다.



DNA, 살인자의 또 다른 얼굴

단순 절도 사건의 범인이었다. 주택가를 돌며 네 곳에 침입해 물건을 훔치고 달아난 범인이 잡혔다. 연이은 절도 사건에 분노하고 불안에 떠는 주민들의 걱정을 덜기 위해 기약 없는 잠복 수사에 나섰다가 현행범으로 붙잡은 것이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 열린 재판에서 초범, 피해액 경미, 반성하는 태도 등을 참작해 집행유예 판결을 내리자 바로 풀려났다. 범죄 현장에서 직접 느끼는 형사나 피해자들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고귀한 판사님의 아량과 관용’ 덕분이었다.


형사들은 열린 창문을 통해 침입하는 그의 수법과 범행 대상 지역이 서울시 용산구에 치우쳐 있다는 점을 수상하게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속되기 전 체포 상태에서 DNA 검사를 할 수 있는 구강 상피 세포를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 둔 상태였다. 그가 집행유예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보내 온 긴급 회신은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신길동 발바리’였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절도 방식과 동일하게 혼자 사는 여성의 집만 골라 열린 창문을 통해 침입한 뒤 흉기로 여성들을 위협, 강간하고 금품을 강취해 온 연쇄 성폭행범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절도범으로 알고 DNA를 채취해 두지 않았다면 그 ‘발바리’는 여성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유린하고 평생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는 잔혹하고 파렴치한 성폭행 범죄를 계속 저질렀을 것이다. 절도범의 독특한 수법을 가볍게 여겨 지나치지 않고, 범죄자는 한 가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한 베테랑 형사들의 노련함이 DNA라는 첨단 과학수사 기법을 만나서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국내 DNA 수사의 현실

타액에는 우리의 상상보다 많은 양의 구강 상피 세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강간 피해자의 유두, 범인이 사용한 컵과 담배꽁초 등에서 쉽게 DNA를 확보할 수 있다. 심지어 과일을 깨문 자국에서도 DNA를 발견할 수 있다. 가끔 범죄 현장에 마치 동물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듯 대소변을 남기는 범인이 있다. 여기에도 범인의 DNA는 존재한다. 정상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요에서는 쉽게 세포를 발견할 수 없지만 몸에 염증이 있거나 혈뇨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요에서는 DNA를 확보할 수 있으며, 대변에도 직장 상피 세포나 항문 상피 세포가 부착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범죄 현장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쓰고, 되도록 대화를 삼가는 것도 현장 수사 요원의 DNA를 남기지 않기 위한 수칙이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사람은 말을 하는 중에 많은 양의 타액을 공기 중으로 배출한다. 그것이 시체나 현장의 다른 물건에 부착되고 다시 채취될 경우 그 과학수사 요원은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밝혀야 하는 애매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혈흔 형태 분석, 범죄 상황의 생생한 증언

예기치 않은 갑작스런 죽음만큼 비극적인 일이 있을까? 특히 사랑하는 가족이 이런 일을 당한다면. 새벽녘 112에 걸려 온 다급한 목소리에도 그런 비극의 내음이 가득했다. “빨리 좀 와 주세요. 제 안내가 2층 계단에서 굴렀는데 움직이질 않아요. 어떡해요… 빨리 좀 와주세요.” 지방경찰청 과학수사팀이 현장에 도착해 보니 피해자는 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사망했음이 확인된 상태였다.


집 안에서 발생한 사망 사건. 신고한 가족은 계단에서 굴렀다고 하고…. 누구인지 모를 범인의 흔적과 신원을 찾는 통상적인 과학수사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피해자가 목격 진술처럼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구른 것인지, 아니면 외부의 힘에 의해 떠밀린 것인지, 그도 아니면 스스로 자해 혹은 자살을 위해 굴러 떨어진 것인지 등 사망에 이른 원인과 과정을 밝혀내야 한다.


전문 교육을 여러 차례 이수하고 현장 경험을 쌓아 온 ‘국내 최고의 혈흔 형태 분석 전문 수사관’ 서 형사가 투입되었다. 계단에 뿌려진 사망자의 혈흔을 자세히 관찰하던 서 형사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머리를 계단에 부딪쳐 사망했다면 혈흔이 시작한 부분은 계단 모서리여야 한다. 그런데 사망자의 혈흔은 사람의 키높이 이상으로 벽면과 천장에 튀어 있었고, 그 혈흔의 크기도 충격 부위로부터 비산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컸다. 병원 응급실에서 전송해 온 사진을 통해 사망자의 상처 부위를 살피던 그는 이 죽음이 사고사가 아님을 확신했다. 다양한 방향으로 크게 벌어진 정수리 부위의 상처는 실족으로 넘어져서 생길 수 있는 형태라기보다는 묵직한 둔기가 직접 타격한 좌열창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 형사는 곧 현장팀장에게 보고한 뒤 사건을 담당한 강력팀에 분석 결과를 설명했다. 곧이어 신고자인 피해자의 남편이 사고 전 피해자 명의로 거액의 생명보험을 여러 차례 가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프로파일러(범죄 심리 분석관)의 면담 조사 과정에서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놀라운 한국의 혈흔 형태 분석 발전 속도

우리나라는 혈흔 형태 분석 기법이 비교적 늦게 도입되었다. 그것도 한 개인의 ‘특별한 관심사’가 낳은 혁명적 결과였다. 현재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과학수사계장으로 재직하는 최용석 경정이 그 주인공이다. 최용석 경정은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수년간 현장에서 직접 과학수사와 강력 수사를 지휘해 오며 혈흔 형태 분야의 베테랑으로 인정받고 있다. 남보다 먼저 ‘수사는 현장 재구성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혈흔이 존재하는 대부분의 강력 사건에서 현장 재구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혈흔 형태 분석임을 깨달았다. 그 후 무작정 법과학 선진국 캐나다의 온타리오 경찰대학으로 날아가서 혈흔 형태 분석 전문 교육을 이수하고 돌아와 혈흔 형태 분석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나선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다른 분야보다 비교적 빠른 발전 속도를 보인 혈흔 형태 분석 분야는 수사 요원 전문 교육 기관인 경찰수사연수원의 정규 과정으로 편성되어 많은 전문가를 양산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혈흔 분석 전문가 20여 명이 전국의 사건 현장을 누비고 있다. 물론 혈흔 형태 분석 전문가가 필요하지 않은 나라가 되는 것이 더 좋은 일이겠지만.



미세 증거, 범인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증거

그 부부가 각방을 쓴 지는 오래되었다고 했다. 남편은 아내의 방문이 잠겨 있어 베란다 쪽 창문으로 들어가 봤더니 옷장 손잡이에 넥타이로 목을 매어 자살한 상태였다고 진술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넥타이는 이미 남편이 가위로 잘라 낸 상태였고 현장은 다소 변형되어 있었다. 신고자의 남편의 진술을 그대로 믿어야 할까? 현장을 어지럽힌 것이 매우 의심스러웠지만 아내의 시신 옆에서 슬퍼하는 남편을 집요하게 추궁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은 여성의 목을 감았다던 저 넥타이는 남편의 진술대로 옷장 손잡이에 묶여 있던 것일까? 홍 형사는 마치 셜록 홈스나 형사 콜롬보를 연상케 하는 능숙한 동작으로 늘 지니고 다니는 휴대용 현미경을 꺼내 옷장 손잡이를 관찰했다. 이상하다. 현장의 넥타이는 섬유가 쉽게 이탈되는 재질이었다. 그런데 옷장 손잡이에서는 단 한 올의 섬유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여성의 몸무게를 견뎌 낼 정도의 마찰력으로 섬유가 매달렸던 곳이라면 반드시 그 섬유의 일부가 남아 있어야만 했다. 그게 자연의 법칙이고,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법과학 제1원칙인 ‘로카르의 교환 법칙’에도 부합한다.


홍 형사는 남편의 팔뚝을 주시했다. 긁힌 상처로 보이는 흔적이 뚜렷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시신의 손을 증거물 봉투로 감싸고 테이프를 감아 봉인했다. 그리고 남편이 입었던 옷에서 섬유 샘플을 채취했다. 홍 형사는 이 사건이 정말 자살이기를 바랬다. 여자의 손톱에서 아무런 섬유도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너무 슬픈 결말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미세증거의 종류

섬유는 미세 증거 중에서도 가장 많이 발견되는 증거로 강간이나 폭행, 살인에 이르기까지 상호 간에 강한 접촉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한다. 미세 증거가 발견됨으로써 범인임을 입증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미세 증거 조사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음으로써 무고한 사람이 의심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유리는 ‘침입’이라는 단어와 매우 친숙한 미세 증거물이다. 도구를 사용해서 유리를 깨고 대상 공간에 침입하는 경우, 깨진 유리의 미세한 조각들은 범인도 모르는 사이에 범인의 몸 곳곳으로 튀어 들어간다. 유리는 한없이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탄성을 가진 물체다. 탄성 이상의 힘이 가해지면 유리는 결국 깨지는데 그 순간 특유의 형태와 방향성을 보인다. 유리에 힘을 가할 때 반대 방향으로 튀는 것을 ‘백스케터(backscatter)’라고 하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한 경우, 범행에 사용된 총기에서 피해자의 혈흔이 발견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힘이 나아가는 방향 쪽으로만 혈흔 또는 유리 조각이 튀는 게 아니라 충격에 의해 힘이 출발한 쪽으로도 그 흔적이나 파편이 튀는 것이다. 이때 부서지면서 튄 유리조각은 침입자의 머리카락, 의복, 신발 등에 남는데 유리만의 특징으로 인해 한번 부착된 유리 조각은 잘 떨어지지 않으며 쉽게 변질되지도 않는다.



검시, 사체가 말하는 진실

보모가 돌보던 첫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경찰 공의로 지정된 동네 의사를 불러 검안을 의뢰했고, 의사는 영아들에게서 간혹 발생하는 ‘영아 급사 증후군(엎드려 자다가 숨이 막히는 등 알 수 없는 이유로 영아가 사망하는 증상. ‘영아 돌연사’라고도 부른다)’이라는 소견을 제시했다. 그 의견은 그대로 경찰서를 거쳐 검찰에 보고된 뒤 승인을 받아 ‘병사’로 내사 종결, 부검 없이 유족에게 시신이 인도되었다. 그리고 슬픔과 충격에 빠진 부모는 아기의 시신을 화장했다.


다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사건 소식을 들은 검시관은 왠지 사건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담당 경찰서 수사진에게 요청해 사건 기록을 검토하던 검시관은 아기의 검안 당시 사진들을 보면서 아기의 꼭 쥔 손 틈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세탁소에서 옷을 포장할 때 사용하는 얇은 비닐 봉투 조각이었다. 그 조각이 아기의 움켜진 손 안에 있는 이유가 뭘까? 그 순간 검시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인이 ‘영아 급사 증후군’이 아니라 누군가 아기의 머리에 비닐을 씌워 숨을 못 쉬게 해 사망한 ‘비구 폐색 질식사’일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검시관의 문제 제기는 즉각 재수사로 이어졌고, 다행히 보관된 증거물 더미에 남아 있던 비닐에서 살인자의 DNA를 검출할 수 있었다. 범인은 보모였다.


검시 제도의 역사

검시관의 주 임무는 사망한 사람이 누구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가는 밝히는 것이다. 검시관의 조사를 통해 그 죽음이 ‘갑작스럽거나, 원인을 알 수 없거나, 자연스럽지 않거나, 폭력에 의한 것이라고 의심될 경우’ 부검을 의뢰하거나 ‘사망 사건 수사(inquest)’를 실시한다. 검시관의 역할이 주로 죽음을 둘러싼 조사와 수사, 행정 처리, 책임 등이다 보니 미국의 일부 주를 제외하고는 ‘의사의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검시관 조직 내에 병리학이나 법의학 등 관련 전공 의사를 조력자로 두고 있다.


이렇듯 ‘죽음에 관한 사항을 전담하는’ 기관이 있을 경우, 가족이 합심해 병든 노인을 살해하고는 병사나 자살로 위장하거나, 길거리에서 발견된 행색이 초라한 사망자를 수사 없이 사고사나 병사로 단정해 처리하는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경찰이나 검찰에 의해 종결 처리되어 부검 한번 못 해본 채 한을 품고 원혼이 되는 억울한 죽음이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는 제도적 결함을 안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찰검시관’ 제도

우리나라는 검시 제도가 없는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경찰청에서 의학이나 보건학 관련 학위와 경력 소지자를 대상으로 특채하는 ‘검시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범죄 수사에 투입되어 증거를 수집하고 시체의 상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그러나 형사소송법은 사법경찰관에 의한 수사만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사법경찰관이 아닌 검시관은 수사의 주체가 아니며 독자적인 조사 권한이나 증거 수집 자격이 없다. 외국의 ‘검시관’과는 명백히 다른, 법적으로 ‘경찰 수사의 보조자’에 불과하다. 검시관의 권리에 대한 법률적 제도적 장치 마련과 검시관의 업무에 맞는 자질 향상을 위한 장기 프로그램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화재 감식, 화염으로도 감출 수 없는 범죄

불은 어디서 발생했는가?

화재 감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화재가 최초에 어디서 시작했는가다. 일반적으로 화재 현장의 증거는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다른 현장과는 다르게 화염에 의해 모든 것이 소실되기 때문이다. 화재의 원인을 밝혀낼 증거는 반드시 현장에 존재한다. 그 화재가 사고인지 고의인지를 알아내는 일은 범죄 여부를 밝히고 책임의 소재를 분명하게 한다.


가정집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에서 소방대원들이 불을 모두 끈 후에 조사했는데 현장에는 전기장판이 불에 탄 채로 남아 있었다. 소방관이 전기장판의 코드를 따라가다 보니 벽면 콘센트 부위에서 탄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일단 전기적 원인으로 발화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화재 현장에 도착한 화재 감식 전문가는 다른 조사관이 바닥과 벽면을 조사한 것과는 달리 천장의 소훼흔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른 조사관들의 의견대로 벽면도 소훼되어 있었지만 전기장판의 한가운데와 부합하는 천장 부분에 고열에 의해 형성된 균열이 발견되었다. 만일 다른 조사관들의 의견처럼 벽면 콘센트 부위에서 발화되었다면 벽면에 인접한 천장면이 가장 많이 소훼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장의 모습은 전기장판 한가운데에서 발화되었음을 보여 주었으며, 이상하게도 전기장판의 그 부위에서 열선의 직접적인 소훼가 관찰되지 않았다. 그리고 장판을 들추자 미처 타지 않은 석유 냄새가 심하게 났다. 서문 팀장은 모든 집기를 최초의 상태대로 돌려놓고 화염과 연결했다. 그리고 국과수에 보낸 샘플에서는 방에서 전혀 취급할 리 없는 등유 성분이 검출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보험금을 노리고 방화한 집주인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불은 마술이 아닌 자연 현상이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며 과학으로 이해하고 규명하고 대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과거의 경험에만 의존하는 종래의 방식으로는 화재의 진실을 밝히기 어려워졌다. 화재와 관련된 여러 기관, 즉 소방과 경찰, 가스와 전기 관련 기관 등이 서로 협력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서 ‘불을 사용하는 범죄는 반드시 진실이 밝혀진다’는 사회적 믿음을 만들어 내야 범죄자들이 불을 두려워하고 피하게 된다. 화재 수사의 전문화와 과학화를 위한 국가적 관심과 지원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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