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경제 질서: 21세기의 시대정신

   
김철
ǻ
한국학술정보
   
34000
2010�� 12��



■ 책 소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이 책은 같은 저자의 『경제 위기 때의 법학』의 모든 전개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이 책의 주제가 사용하는 중요한 역사적 소재는, 지금 우리에게 가까운 순서로 2008년 9월 이후의 세계 금융위기의 진행과 대비, 2008년금융위기의 거시 역사적 텍스트가 되는 1929년 10월 이후의 세계 대공황의 진행과 이를 막기 위한 뉴딜 입법이 큰줄기이다.
&nbsp&
■ 저자 김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수료하였으며, Fulbright fellowship으로 Georgetown University National Law Center를 거쳐,University of Michigan Law School Graduate Study를 졸업하였다. New York University LawSchool의 research scholar 및 University of Santa Clara Law School의 visitingscholar를 역임하고, Harvard Law School, Columbia Law School, Stanford Law School에서 단기연구를 하였으며, 한국공법학회 부회장, 한국헌법학회 부회장, 한국사회이론학회 회장, 한국인문사회과학회(현상과 인식) 회장 역임하고, 공법판례 및이론연구회, 한국법철학회, 한국법사학회, 도산법연구회, 재정법연구회, 한국행정법학회 회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서강대학교, 경희대학교, 홍익대학교에서 강사를 역임하고, 숭실대학교법경대학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 법학의 반성-사법개혁시대의 법학을 위하여』『경제 위기 때의 법학-뉴딜 법학의 회귀가능성』『한국법학의 철학적 기초-역사적, 경제적, 사회ㆍ문화적 접근』『종교와 제도-문명과 역사적 법이론』(역저) 『미소 비교론』(공저)『러시아소비에트 법-비교문화적 연구』등이 있다.
&nbsp&
■ 차례
제1장 한국에 있어서의 자유주의와자유지상주의에 대한 반성
제2장 21세기의 세계경제상황과 세계 대공황 전기의 법사
제3장 경제위기의 역사와 아노미의 법학
제4장한국 법치주의의 반성
제5장 최현대의 경제공법 사상(1)
제6장 최현대의 경제공법 사상(2) 
제7장 최현대의 경제 공법사
제8장 법과 평화 
제9장 지성사에 있어서의 경제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순환 
제10장 세계 금융위기 이후의 경제와규범, 도덕의 관계 
제11장 근대 이후의 자유주의의 변용과 경제공법질서의 전개과정(1) 
제12장 근대 이후의 자유주의의 변용과경제공법질서의 전개과정(2) 
제13장 법사와 경제사의 상호교호관계 





법과 경제 질서: 21세기의 시대정신


한국에 있어서의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반성

들어가는 말 - 자유의 법철학적 의미

자유의 의미는 근세 절대주의 시대와 근대 시민 국가 시대, 현대 복지 국가 시대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시민혁명 시대의 자유의 의미는 그 이전 시대의 특징이었던 압제, 전제(despotism), 자의(恣意, capriciousness)에서부터의 해방에 있었다. 근대 시민사회를 형성시킨 자유의 에너지는 산업화, 도시화를 거치면서 현대에 이르러서, 다른 모습을 띠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유는 공평(fairness)이나 올바름(justice)에 의해서 모습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계약 자유원칙은 계약 공정원칙으로 이동한다.


전체주의와의 전쟁을 거친 2차 대전 이후 문명세계에 있어서의 자유주의는 또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국가주의, 집단주의, 전체주의 체제에서 생명과 생존을 부인당한 소수민족과 한계인들은 대규모 전쟁과 갈등의 와중에서 언제든지 안전과 생존을 부인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따라서 국가 공동체를 비롯한 어떤 집단들도 그것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존립목적을 사람의 생명권과 존엄권에 둔다는 신앙 고백의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존엄가치의 원천으로서 자유로운 인간의 자유라는 가치는 사회존립의 기반을 개인에게 두는 것으로 천명되었다. 이상형으로서의 자유주의는, 한편에서는 그 명목성에 의해서, 무정부주의로 가는 도정에 이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숙명인 특수 이해관계, 집단주의, 유사가족주의에 의해 유명무실해져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이윽고 21세기의 벽두에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방위 벽을 뚫은 호전적 테러에 의하여 그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자유는 어떤 관점에서는 명목적이 되고, 구실과 핑계가 될 수 있다. 자유라는 이름(in the name of freedom) 아래 행해지는 모든 불공평·불공정한 집단적 행위를 직시하고 직면하는 것이 21세기의 과제라고 보인다.


자유화 시절 한국 자유주의의 반성적 고찰

1993년에 성립된 문민정부는 민주화·자유화를 그 주된 구호로 내세운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이때의 민주화·자유화는 시장경제를 그 동반자로 하고 진행되었다. 문민정부는 말하자면 반권위주의(anti-authoritarianism)의 정치문화와 법문화(legal culture)를 표방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자유주의(liberalism: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으로 한다는 근대 입헌주의의 오래된 특징)를 국정 전반과 법문화에 실천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행정법질서에 있어서 이것은 오랜 권위주의적 지배의 특징이라고 생각되었던 사회경제생활에 대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는 것으로 기대되었다.


각종 자유화 조치가 경제생활에 행해졌다. 종래 국가기관 또는 정부의 제3자적 규제가 가해졌던 영역, 대표적으로는 금융기관의 대출과 관련된 각종 규제, 외환거래나 외환관리에 관련된 각종 규제 등에서, 선진국의 제도와 그 운용을 모델로 차츰 탈규제해 나가고 금융기관과 그 거래 당사자의 계약 위주로 자율화·자유화하는 방향이었다. 또한 이 시대의 자유화는 기업 주체들의 요구와 관련되는데, 대체로 대기업을 대표로 하는 기업군들은 정부의 각종 규제에서 벗어나 기업의 자유를 구가하는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문민정부 시대의 자유와 자유화의 문제

문민정부 시대는 말하자면 1961~1979,1980~1993년까지 계속된 권위주의적 정부의 억압적 통치(Regierung)에 대한 반작용(reaction)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권위주의에 대한 반작용시대 - 1960년 4월 19일부터 1961년 5월16일까지 - 가 그러하여 왔듯이 주로 시민적·정치적 자유와 관계된 헌법상 문제(헌법 21조 1항 언론·출판의 자유ㅡ 집회·결사의 자유 → 합쳐서 표현의 자유 Freedom of Expression)에 열중하였다. 시민적·정치적 자유(Civil & Political Liberty)가 초점이 되었으며, 새로운 지식인들이 이에 가담하였다.


영국 근대의 고전적 자유주의와 1993년 이후의 문민정부의 자유화 공통점은 무엇인가? 첫째, 근대자유주의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로부터의 자유라는 의미에서, 네거티브한, 즉 빼기 하는 자유주의였다. 정부로부터의, 특히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에서 보인 것처럼 국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특징을 보였다(Smith, 앞의 글, 281). 둘째, 영국 근대의 고전적 자유주의 특징은 경제적 목적보다 정치적 목적이 강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문민정부의 자유화와 자유주의를 요약하면 근대적 의미의 헌법 요소로 영국고전자유주의에서 나타난 입헌주의, 법의 지배, 권력분립과 함께 1688년의 종교적 관용 1689년의 프레스(press)의 자유를 실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법학사에 있어서의 자유의 두 갈래-정신적 자유와 재산권의 문제

서양 공법사에 있어서, 자유의 또 다른 갈래는 헌법학적 용어로는 재산권의 자유(한국 헌법 제23조)에 관한 것이다. 재산권은 1770년대 버지니아 헌법에서는 당시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선언되었던 생명, 신체의 자유 그리고 행복추구권과 함께 천부인권으로 생각되었다. 근대의 기간을 통해 재산권의 자유는 변용을 거듭하고, 1차 대전 전후에는 정신적 자유권과 구별하기에 이르렀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 1919년 1차 대전의 책임에 관한 베르사유 조약과 바이마르 헌법이 성립한 이후를 법학에 있어서는 현대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에 있어서는 재산권은 이미 다른 근대적 자유권과는 성질이 다른 것으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서양 법학사의 큰 교훈은, 제대로 형성된 시민민주주의 국가라면 기본적 인권존중과 자유주의라는 근대 이후의 큰 성과 위에 서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권 존중에도 우선순위가 있으며, 정신적 자유권 우선의 원칙이 그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할 때 한국의 자유화 과정에서 자유의 요구는 정신적 자유권과 경제적 자유권 또는 재산권의 자유의 구별 없이 주장되었다. 1990년대의 한국은 그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서양 근대의 자유주의와 함께 서양 현대의 법 원리(재산권의 상대화)를 동시에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두 갈래의 자유주의가 구별되지 않고 뒤섞여서 함께 자유로 불리고, 행사되게 되었다.


자유지상주의의 문제

1989년 봄, 유럽의 공산주의는 마치 지지대가 뽑힌 텐트처럼 무너졌다. 전쟁이나 혁명이 공산주의를 몰락시킨 것이 아니었다. 지쳐 쓰러진 것이다. 중·동부 유럽에 새로운 정치체제, 새로운 정치사회가 탄생하였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후 처음에는 국가와 국가의 규제에 대항하는 거대한 분노의 파도와 함께 정부에 대한 반감이 팽배했다. 그들은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가 하던 일을 새로운 사회인 시장과 민간 조직에게 맡겨라. 공산주의가 몇 세대 지난 후에 발생한 이런 반발들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였다.


특히 미국의 미사여구들은 이런 반발을 상당히 뒷받침했다. 자유지상주의라는 미사여구. 시장이 지배하게 하고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라. 그러면, 반드시 자유와 번영이 성숙할 것이다. 모든 것들은 스스로 해결될 것이다. 국가의 지나친 규제는 필요 없고, 들어설 여지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스스로 해결되지 않았고, 시장이 번창하지도 않았다. 정부는 불구가 되었으며, 불구가 된 정부는 자유에 대한 만병통치약이 아니었다. 권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정부에서 마피아로 옮겨 갔으며, 때로는 국가에 의해서 마피아가 조성되었다(김선경, 1998). 하나의 통제시스템이 또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지만, 어떤 시스템도 서구의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체제는 아니었다.


1990년대의 자유주의, 한계,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비교 법철학적 논의

자유주의자(liberal)로서의 드워킨(Dworkin, 1995: 1~6)

1990년대 한국인은 모든 사회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치하고 사회기구나 제도, 조직의 문제를 개인과 개인의 사적 인간관계의 문제로 환원하여 단순화하는 방식이 유행하였다. 개인의 문제는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에도 단순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즉, 원자화한 개인은 투표에서 다수를 구성하기만 하면 다수결의 원리에 의해서 어떤 결정도 할 수 있다. 한국에 있어서는 오래 계속된 권위주의의 폐허 위에서 단순 다수결에 의한 수많은 결정이 행해졌다. 그러나 오랜 선거의 경험, 오랜 재판의 경험, 많은 분쟁을 사법적인 해결이라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경험한 미국인들은 대표적인 법철학자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묻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수결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과연 최전성기의 영국 의회는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이외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어져 왔다. 자유로운 개인의 집합체인 민주 사회는 그 의사의 다수만 획득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일까? 다수의 숫자만 차지하면 만능인가?" 이 질문은 일견 자유주의의 한계와 관련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가깝게는 2차 대전이 전체주의를 해체시키고, 1945년 이후의 세계의 주된 질서가 어떤 경우라도 부인할 수 없는 개인의 존엄권을 기초로 출발한 이후 국가 사회의 구성 원리로서의 자유주의는 개인인격을 기초단위로 하고 이러한 개인인격은 한편으로는 계약이라는 방식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하며, 한편으로는 투표라는 방식으로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다수결이 마지막 보루가 되는 것은 결국 그 근거 사회가 투표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인격의 평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만약 자유주의적 원리가 아니라면 어떤 문제도 다수결의 원리에 호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95년에 유사한 문제를 법철학적으로 추구한 사람이 로날드 드워킨(Ronald Dworkin)이다. 그는 자유주의(Liberalism)의 전통에 서서 이 문제를 추구하였다(Dworkin,1995:1~6). 드워킨은 두 가지 측면을 지적한다. 즉, 한국인이 1990년대에 익히 경험한 다수지배의 원리이다.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다수지배의 원리로서 세계인에게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95년에 드워킨은 텔레비전과 민주주의(Television and Democracy)에서 미국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고, 그 주된 이유는 정치적 캠페인에서 텔레비전이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중을 들고 있다. 그가 쇠퇴의 이유로 드는 것은 입후보자들이 텔레비전 캠페인 경비를 부담하기 위해서 엄청난 액수의 선거자금을 거두어야 하고, 그 결과로 "특수이해관계의 자금과 아메리카의 입법부의 행동과의 유독한 연합"을 들고 있다(Dworkin, 1995:1~6). 그가 민주주의 쇠퇴의 또 다른 현상으로 드는 것은 평균적인 미국인들은 투표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다수의 지배(Majoritarian rule)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다.


그러나 앵글로-아메리칸의 전통에서 이미 다수의 지배에 대한 강력한 제어장치가 있어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 번째 예를 들 수 있는 것은 영미 전통의 사법심사제도(judicial review)의 가장 큰 의미이다. 사법부에서 기존 법률의 합헌성을 심사하는 사법심사제도는 한마디로 대중정치가 가져오는 폐해로부터 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이다(김철, 1994c: 54). 한국은 제3화국의 헌법에 의하면 일반 법관이 직접 위헌법률을 심사할 수 있는 사법심사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꼭 미국식의 사법심사제도/한국의 헌법재판소제도라는 대비보다는 과연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정치의 한 측면에 대해서 시간과 장소를 달리해서 어떤 제어장치를 마련해 두었느냐의 관점이 중요할 수 있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살아서 현재 한국의 법제도나 혹은 한국이 속해 있는 2차 대전 이후의 주된 법제도를 관찰한다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B.C. 399년, 고대 아테네의 시민정치에 의해서, 즉 다수의 지배에 의해서 처형당한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다수의 지배에 대한 제어장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것이고, 어렵게 말할 필요 없이 한국의 사법제도 자체가 그가 경험한 다수의 지배의 폭거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소크라테스를 위해서라도 모든 사법제도와 절차가 그물망같이 안전망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다수결의 지배는 현대의 사법제도에 의해서 일단 보완되고, 여과되도록 균형 잡혀 있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의 경제와 규범, 도덕의 관계

서론: 최현대의 자연법론의 역할

자연법론(Natural law theory)은 오해받기 쉬운 라벨이었고 형이상학 또는 신학의 영역으로 오랫동안 밀려나서, 과학과 논리성을 특징으로 하는 1980년대의 법학자들에게는 일단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Ronald Dworkin, 1983: 165). 그러나 법의 도덕성을 추구하는 큰 흐름에서는(Fuller, 1949, 1958, 1964) 어떤 라벨에 의해서든지 그 내용은 거듭 논의되어왔다(Dworkin: 1964~1965).


1945년 이후의 세계질서 형성과 1989년 동유럽 러시아혁명에서의 자연법의 형성과 해체의 역할

법의 효력에 대한 시대를 꿰뚫고 흐르는 큰 조류는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이다(Sigmund, 1971; 황산덕, 1972; Finnis, 1980). 법이 정당하기 때문에 효력이 있다는 자연법론은 인류의 역사에서 대변동기에 늘 다시 나타나서, 법이 주권자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법실증주의의 시대를 교정하여 다른 시대로 인도하여 왔다.(김철, 2007ㄱ: 39~43).


2차 대전 이후문명국가의 기본법제도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기본가치로 하는 데서 출발했는데, 이것은 자연법론의 내용이 반영된 것이다(김철수, 2009). 2차 대전 이후 동·서 냉전의 대결도 공산주의 국가의 기본법제도가 논리적 목표를 향한 법실증주의(John Wu, 1955: 13; 김철, 1989: 46)라고 파악되고, 사회주의 법 그룹이 붕괴되고 중부 동부 유럽의 모든 사회주의국가와 러시아의 구체제가 해체되었다는 점에서 자연법론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자유주의가 그 영역을 확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김철, 1992ㄷ, 2007ㄱ).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 법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입장

1989년의 동유럽·러시아혁명 이후 최근 지구촌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2008년 9월 분화구가 폭발한 금융위기와 그 여진이라고 보인다. 금융위기의 문제를 위기가 일어난 당해 연도인 2008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크루그먼(Krugman, 2007, 2009)은 아노미적 경제현상과 양극화된 정치현상의 근본을 1980년대에 시작된 탈규제 시대에서 찾고 있고, 신보수주의나 레이거노믹스를 궁극적으로는 법제도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김철, 2009ㄱ, 2009ㄴ, 2009ㄷ). 2010년 전미 경제학회(AEA)에서 새로운 경제학의 시대를 요구한 규제의 경제학자 스티글리츠(Stiglitz, 2002, 2003)의 논의 역시 규제에 초점이 주어지면 규제법의 문제 또는 탈규제·규제완화의 논의가 중점이 되어서(김철, 2009ㄹ) 결과적으로 크루그먼과 같이 법제도와 그것의 규제역할에 빛을 비추게 된다.


본론

금융자본주의의 위기(김철, 2009ㄴ:38~39)

2008~2009년의 경과를 금융자본주의의 위기로 파악하고 지구촌을 제패한 자유자본주의의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의 징조가 시대적 맥락에서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이 차츰 밝혀졌었다. 아메리카에 있어서 1978년 이후 약 30년을 탈규제와 자유방임의 시대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Krugman, 2007; 김철, 2009ㄱ), 2008년 9월 28일 비로소 30년에 걸친 자유지상주의(김철, 2009ㄱ: 191~210)와 탈규제(같은 사람, 2009ㄴ: 249)가 동반한 아노미가 월가에서 폭발하면서 한 시대가 끝나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대정신과 법학 그리고 경제학(김철, 2009ㄴ: 242~243)

2008년 가을, 경제위기가 가시적이 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의 기술성, 높은 정도의 수량 분석, 고도의 테크닉을 동반하는 전문성에 몰입하여서 경제학이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어떤 시대의 시대정신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점은 법학도 거의 마찬가지다. 현대의 법학은 법학 내부에서의 계속적인 분화와 전문화, 독립화를 지향했기 때문에 역시 높은 정도의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전문성과 기술성을 구가하기에 이르고 따라서 한 시대의 법학이 어떤 시대정신을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할 수 없었다.


케인즈주의자-크루그먼과 스티글리츠의 역할

세계경제학계에서는 레이거노믹스(1981~2008) 시대에 비주류로 분류되었던 케인즈주의자 - 그중에서도 호황과 번영의 와중에서 경종의 소리를 내었던 폴 크루그먼과 스티글리츠와 같은 이단아들이 선지자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법학의 영역에서는 규제가 30년 만에 키워드로 등장하게 되었다. 실로 1980~1982년부터 시작된 탈규제 경향 이후 첫 번째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김철, 2010ㄱ: 166).


법철학자 드워킨의 "법은 도덕에서 뻗은 나뭇가지이다"

법철학자 로날드 드워킨은 2008년 10월 방한 때 첫 번째 전문가 세미나에서, 법제도의 윤리성의 회복(Dworkin, 2008: 12~14)과 법개념의 출발을 도덕과의 관계에서 다시 설정하였다(김철, 2009ㄱ: 48). 이것을 성급하게 자연법론으로의 회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으나, 최소한 명백한 것은 드워킨은 두 세미나에서(Dworkin, 2008) "Law and Morals"에서 2.5페이지, "Law as Morality"에서 3페이지, "Is Morality Closed"에서 무려 6페이지에서 Moral과 Morality 논의에 대해 쓰고 있다. 또한 "Two Ethnical Principles"에서는 2페이지이다. 두 개의 세미나의 페이퍼의 총 쪽수는 32쪽이었다.


근대 법학과 경제학의 아버지로서 아담 스미스의 도덕 철학과 법철학에서의 동정과 이타심

지금까지 경제학에서 경제윤리의 연구가 있었으나, 이 문제의 원형은 1764년 이후에 글라스고우에서 도덕 철학의 강좌를 가진 아담 스미스에서 발견된다(김철, 2009ㄱ: 242). 최현대의 여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공감(compassion)을 그의 논의의 키워드로 삼았다(Nussbaum, 2008: 3~34). 그의 공감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1764년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아담 스미스의 도덕 철학의 출발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고려 또는 타인에 대한 의무감과 지각력과의 관계이다(김철, 2007ㄱ: 256). 동정이나 이타심의 문제이다. 동정이나 이타심의 문제는 극심한 변화기에 있어서 객관적인 제도의 문제보다 객관적인 제도 안에 있는 구체적 인간의 미덕 문제이다. 최소국가의 시대에 포즈너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세계의 영웅들의 개인적 미덕을 탐구하면서 동정이나 이타심과 같은 심정적 요소를 부각시킨다(Posner,1983: 122).


법철학자 카스 선스타인의 규범적 행동의 영향에 대한 발견(김철, 2009ㄹ)

선스타인은 "사람들의 행동에는 그 개인의 성향, 취향 또는 단순히 좋아하고 선호함이 영향을 미친다고 개인인격의 결정이론으로 설명하여 왔으나"(김철, 2009ㄱ: 204~207; 2009ㄴ: 222~223) 실험심리학(Cialdini 등, 1978: 463)의 증거로는 행동을 결정하는 개인인격 - 자유주의의 최초의 출발 동인이 되는 -의 성향, 취향 또는 좋아함과 선호함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Sunstein, 1995: 1~3). 실험심리학은 사람들의 확정된 취향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어 왔다(김철, 2009ㄱ: 205). 사람들은 경제학적 게임에서 경제적 합리성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과 또한 상대방에게 최적 이익이 되도록 행동할 것 같고 경제원칙에 따라 행동할 것 같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선스타인의 함의는 미세한 도덕적 행동, 즉 규범이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그때까지 신자유주의시대의 총아였던 자유방임 내지 자유지상주의를 대변하던 경제학자들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김철, 2009ㄹ: 125).


신고전학파 또는 신보수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의 허점

신자유주의시대를 풍미한 경제학자들을 이론모델이나 특히 정밀하고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경탄할 만한 정확성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법의 경제 분석을 발전시킨 포즈너의 이론을 함께 비판한다면 의외로 단순한 경제학의 전제에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선스타인이 사회심리학으로 증명한바 사람들은 경제학적 게임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1980년대 이후 세계 금융위기 때까지 한국인이 상당한 기간 익숙하게 학습한 경제이론은 당시 워싱턴 정부나 그 영향 아래에 있던 IMF, 월드 뱅크와 그에 관여한 경제학자들의 이론과 정책이었다. 이 이론과 정책 목표의 주된 형성기간은 레이거노믹스와, 신보수주의 또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아메리카의 주류로 통용될 때였다. 법학 또한 80년~82년 이후에는 비슷한 경향으로 전개되어서 규제완화, 탈규제의 방향으로 신보수주의 경제학과 동반하였다. 모두가 신보수주의 내지 신자유주의 내지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스티글리츠는 IMF의 관료들이 동아시아들의 국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본시장을 개방하도록 더 많은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특별히 사정에 밝은 재무장관들은 이러한 압력에 대해서 경악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본시장의 개방과 함께 유입된 단기성 자금이 그들 국가의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간파했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는 한국의 경우도 자본시장 개방에 의한 통화투기꾼들에 의해서 위기 상황이 발생한 예로 들고 있다(Stiglitz, 2003: 91~95).


요약하면 1981년부터 시작된 레이거노믹스는 드디어 1997년경에 이르러서 1.시장자유화, 2.사유화, 3.불평등이나 사회응집력을 무시, 4.기업을 경제 주체로 하고 정부는 최소한 역할을 담당한다. 5.자본시장의 개방을 교리로 하고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 경제수행의 주체로 하는 강령으로 세계화라는 옷을 입고 그때까지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동아시아의 국가들을 무장해제시켰다는 얘기가 된다. 한국인들은 신자유주의나 레이거노믹스가 처음에는 해방의 교리 내지 자기 자신의 번영과 영화를 주는 신종 교리로 받아들여, 정치적 자유화·민주화 기간을 시발점으로, 드디어 이를 의식·무의식적으로 실행하게 된 것이 된다(김철, 2009ㄱ).


금융경제에 도덕성의 자리가 있는가?

금융위기가 전문인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에 미친 피해를 감안하면, 아무리 전문영역에서의 논문이라도 법의식, 규범의식의 기반이 되는 도덕성의 기준의 출발을 시민의 도덕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사태의 진원지의 대표적인 저널리즘에 나타난 금융위기 이후의 태도가치를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정도 무엇에 대해서 반성하느냐, 누가 반성하느냐에 대해서 분노는 세계 대공황 때나 2008년 이후의 사태에 있어서, 월 스트리트의 금융가의 은행가에게 향해졌다(김철, 2009ㄹ: 128). 우선 시티그룹, AIG, 메릴린치의 재난을 지휘한 아무도 감옥에 가거나 처벌받지 않았다(Sloan, 2009).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에 대해서 거대 투자은행을 재난으로, 이윽고 엄청난 숫자의 이해관계자를 도탄에 빠뜨린 CEO들은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유는 무능력했다든가 오만했다는 것은 형사법의 처벌대상이 아니라고 한다(Time, 2009). 그러니까 순전히 기술적인 판단에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능과 오만으로 한 회사뿐만 아니라 한 나라뿐 아니라, 국제적 금융 시스템을 망가뜨린 원인제공자에게는 어떤 도덕적 제재가 있다는 말인가(김철, 2009ㄹ: 128).


결론: 실정법의 효력의 문제 - 법실증주의와 자연법론

법(Recht, Droit, Jus, Pravo)과 법률(Gesetz, Lex, Zakon)은 다른 뜻이다. 법은 집단 명사이며 법률은 개별화된 것이다. 실정법은 의회에 의해 통과된 국가의사로서 강제력을 가지는 법이다. 법은 최초에는 넓은 의미의 뜻으로 실정법과 함께 다른 법도 포함한다.


법이 왜 효력을 가지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고대 그리스 때부터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 국가기관에 의해서 강제력을 가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강제력보다는 타당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에 효력을 가진다는 뜻이다. 인간의 문명만큼이나 오래된 이 두 방향의 대답은 긴장관계에 있어 왔다. 인간의 법에 대한 생각을 두 방향으로 요약하면 강제력 때문에 효력을 가진다는 생각을 법실증주의라고 하고 이에 대해서 타당성을 가지기 때문에, 올바르기 때문에 효력을 가진다는 생각을 자연법론이라고 한다.


현대에 있어서 자연법론의 약화

법 효력에 대한 전문적 법 이론은 방대하다. 자연법론과 실정법론의 긴장에 대한 역사는 실로 인간 공동체의 역사만큼이나 길고 복잡하다(Finnis,1980). 산업 사회와 기술 사회의 영향 때문이다. 이것은 철학이 과학철학으로 중점이 바뀌고 형이상학과 윤리학이 다소 뒤로 물러난 것과 궤도를 같이한다. 이제 법 이론가들은 다른 용어로 사유하기를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관점이 다를 뿐 기본적 문제는 같다(김철, 1997, 2007ㄱ, 2009ㄴ).


실정법에 대한 사유

실정법에 대한 사유는 대칭적으로 자연법에 대한 사유를 동반한다. 인간의 국가생활에서 국가제도가 완비된 어떤 경우에도 실정법만의 지배는 생각하기 힘들다. 현대인은 국가제도가 사회제도를 거의 압도하고 경제와 사회 모든 부분에 있어서 거의 완벽하게 보이는 제도법 위에서 살고 있어서 국가법 이외의 어떤 법도 그의 생활에서 직접적으로 찾아내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외관일 뿐 우선 어떤 국가법도 완벽하지 않다. 어떤 법이 존재할지라도, 있을 수 있는 모든 사건과 사례에 대해서 입법자가 모든 경우를 총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순전히 입법 기술상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떤 문제에 대해서 법을 제정한다는 것은 이미 제정법 이외의 사항을 양해한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어떤 입법자의 의도도 인간의 개별 사례에 완벽하게 타당할 수 없다.(김철, 1997, 2007ㄱ, 2009ㄴ).


실정법에 대한 집착과 숭배와 지식집약과 기술주도형의 후기 산업사회와 교정적 입법

그러나 실정법에 대한 집착과 숭배는 또한 인간의 공동생활과 국가생활에 있어서 항상 있어 왔다. 그 이유는 첫 번째는 맞지 않는 실정법이라도 전혀 없는 상태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로 근세 절대주의국가 이후 공동생활의 초점이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최종 결정자에게 귀착된 경우 국가의사의 제도화의 필요성이다. 이것은 첫 번째의 경우가 인간성의 자연과 관련된 데 비해 두 번째는 절대주의 시대의 특징이다. 실정법에 대한 집착과 숭배는 인류가 후기 산업 사회의 기술주도형 사회에서 안주함으로써 증대하였다. 마지막으로 교정적 입법이 실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한 최종판단은 정책입안자의 행동에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즉, 1933년 세계 대공황 와중에 루스벨트가 글라스 스티걸 법을 긴급히 입법 제안했던 것과 유사한 사회·경제적 배경으로 2010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 오바마가 글라스 스티걸 법을 입법 제안한 것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