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죄수

   
자오쯔양(역자: 장윤미·이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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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리치홀딩스
   
26500
2010�� 05��



 책 소개
올해는 1989년 6월 4일 중국 톈안먼광장에서 유혈 사태가 발발한 지 21년이 되는 해이다. 아울러 개혁가이자 민주주의를 꿈꾸다 6·4 운동의 희생양이 된 자오쯔양(趙紫陽)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서거한 지 6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책은 1989년 6월 4일 일어난 톈안먼 운동 때 광장에 모인 학생들을 독려하고 무력 진압에 반대하다 덩샤오핑에게숙정된 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가택 연금 중에 과거를 돌아본 회고록이다. 자오쯔양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덩샤오핑을 보필하며 중국 경제의 선진화를이끌었으나 1989년 계엄이 선포된 톈안먼 광장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 후 무려 16년간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2005년 85세로 사망했다.

당시 자오쯔양에게 붙여진 죄목은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분열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6·4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으로서 그는 가택 연금 중 차분히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솔직담백하게회고한다. 그리고 자신이 신념으로 삼았던 개혁개방과 이에 반대하던 세력과의 당내 갈등, 덩샤오핑에 대한 서운함 등을 2000년 무렵 30시간분량의 육성 테이프 30개에 남겼다. 이 책은 당의 감시를 피해 일부러 손자들 장난감 옆에 방치하듯 보관해오던 테이프를 그의 사후 바오푸(鮑樸,자오쯔양 생전의 비서 바오퉁의 아들)가 미국으로 가져가 4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이후 홍콩과 타이완에서 출간되자마자 매진되는 사태를 빚었고중국은 금서로 지정했다.

죽어서도 국가의 죄수로 남아제대로 평가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자오쯔양. 이 책은 톈안먼 유혈 진압에 이르기까지 당내의 갈등부터 1980년대 주요 경제정책, 정치개혁에대한 구상, 가택 연금에 대한 그의 심경 등을 상세하게 담고 있어 중국 개혁사를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저자자오쯔양 
본명은 자오시우예(趙修業), 1919년 허난(河南) 화(滑)현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13세에 공청단에 가입했고고등학교 때부터 자오쯔양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농민운동으로 성공하여 중국 공산당 내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46세에 최연소의 나이로광둥성위 제1서기에 오른다. 문화대혁명 당시 비판을 받아 하방되어 노동 개조에 참여한다. 1975년 쓰촨에서 정무를 주관하면서 농촌경제개혁에성공한다. 당시 "식량을 구하려면 쯔양을 찾으라"라는 말이 유행했고 그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져 덩샤오핑의 중용을 받았다. 1980년에서1987년까지 중국 국무원 총리를 맡았고 1987년에서 1989년까지 중공중앙 총서기를 맡았다. "6 4" 톈안먼 사건에서 학생들을 동정하다16년간 연금을 당했으며 2005년 향년 85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 역자 
장윤미
 -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HK연구교수로 중국 베이징 대학교 정부행정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중국 노동조직의 변화와 성장」「중국의 체제전환과러시아」「중국 기층사회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과 인민의 일상」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문혁10년』이 있다.

이종화
- 목원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중국 베이징 대학교 정부행정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중국 지역발전전략의 특징과함의」「중국 산시성과 쓰촨성의 자율성 편차에 관한 비교연구」「경제개혁에 관한 중국식 분권화와 지방정부 역할의 재조명」「중국의 정치체제개혁과당내민주의 발전」 등이 있다. 공편으로 『중국의 부상』이 있다.

■차례

서문 - 역사는 인민이 쓰는것이다
머리말 - 자오쯔양 녹취 회고의 역사적 배경

1부 1989년 6 4 사건

1장 1989 학생운동의 시작
2장 4 26사설
3장 학생시위와 정치투쟁
4장 무력 진압
5장 속죄양
6장 2차 문화대혁명
7장 큰형님덩샤오핑

2부 연금의심정
8장 당과 국가의 심판
9장 고군분투 

3부 개혁개방의 13가지 문제

10장 덩샤오핑과 천윈 간의 논쟁
11장1981년의 완충 역할
12장 대외개방의 진통
13장 경제 건설의 새로운 길
14장 후야오방과는 다른 경제적 견해
15장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16장 점진식 경제체제개혁
17장 경제 과열과 연착륙
18장 국제무역으로 장점을 살리다
19장 농촌농가생산책임제
20장 연해 지역의 대외경제 발전 전략
21장 연해로 전국을 선도하다
22장 부패에직면하여

4부 후야오방 시대에서 자오쯔양시대로

23장 후야오방의 하야
24장 1987년 반자유화의 한 해
25장 좌파 안의 좌파
26장 중국사회주의 노선을 확립하다

5부 거대한변화, 1988년
27장 13대 이후의 서광
28장 상품질서를 찾다
29장 경제 후퇴
30장 앞으로 나아갈수 없는 물가개혁
31장 개혁이 후퇴하고 체제가 과거로 돌아가다
32장 실권 잃은 총서기
33장 "자오 타도의 바람"이불다

6부 개혁의 이름으로
34장 덩샤오핑의 행정개혁
35장 중국의 이름 없는공포
36장 후야오방의 사회주의민주
37장 민주와 법제 사회


부록 1 - 연해 발전 전략에 관한 단독 녹취
부록 2 - 민주와 법제의 궤도에서 문제를 해결하자
부록3 - 5월 19일 톈안먼 광장에서의 즉석연설
부록 4 - 6 4 사건에 관한 해명 발언
자오쯔양 연보
인명록
옮긴이후기
 

 





국가의 죄수

머리말 - 자오쯔양 녹취 회고의 역사적 배경
신해혁명 이후 결국 중국은 근대화라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변화하고 발전해왔다. 1949년 내전이 거의 끝난 뒤의 중국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1949년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서 제정한 「공동강령」에 따라 어떠한 순서대로 나아갈지, 어떻게 근대화를 실현할지, 사회주의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논의했다면 ‘보통선거’와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실현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중국의 발전 방향을 완전히 역전시킨 것은 1953년에서 1958년까지 ‘사회주의 개조’의 이름으로, 또한 1957년 ‘반우파’의 이름으로 촉진된 두 개의 운동이었다. 전자는 소유제를 겨냥해 「소련공산당 당사」 제11장과 제12장의 모델을 모방한 것으로, 집단화와 국유화, 계획화를 통해 사유제와 시장경제 소멸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결정이다. 후자는 중공이 마오쩌둥의 의지에 따라 중공중앙 반우정풍(反右整風) 영도 소조(小組) 조장인 덩샤오핑의 지휘로 전국 500만 명의 지식인들 가운데 55만 명의 ‘우파분자’를 타도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운동은 중공 집정 역사의 전환점으로, 민주와 법제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마오쩌둥 시대의 사회주의로 인해 중국인들은 모두가 빈곤해졌고 근대화를 실현한다는 100여 년간의 꿈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멀어졌다. 마오쩌둥의 사후 그가 직접 지명한 후계자 화궈펑 당 주석은 ‘붕괴에 다다른 국민경제 기록’을 사실대로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중국공산당 안에서 경제 분야에서 가장 권위가 높았던 사람은 천윈이었다. 그는 1930년대에 이미 정치국에 들어갔는데, 덩샤오핑보다 29여 년이나 빨랐다. 마오가 죽고 나자 천윈이 중국 경제에 내린 처방은 ‘조정’으로, 불균형한 비율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 천윈은 당의 터무니없는 지시에는 반대했지만 당의 지도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일당 지도에서 경제적인 전면적 공유화와 계획화, 그리고 식량과 옷감과 기름의 일괄구매 일괄판매까지 천윈은 반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그 자신이 고생해가며 만들어놓은 제도들이었다. 마오의 이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는 것은 천윈 자신을 바꿔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덩샤오핑의 처방은 네 가지이다. 첫째, 속도를 내고 아끼자. 둘째, 안정하고 단결하자. 셋째, 각고분투하자. 넷째, 홍(紅)도 하고 전(專)도 하는 것이다(홍이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입장에서 정확한 정치 방향과 사상 결의를 갖추자는 것이고, 전이란 전문지식을 학습하여 기술에 능통한 직업인이 되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홍은 이데올로기와 혁명성을, 전은 전문지식과 기술을 강조하는 것으로 중국의 정책 분열을 이 두 가지 노선의 갈등으로 파악한다).


마오쩌둥 사후 남겨진 혼란스러운 국면에 직면해 덩샤오핑은 정치 업무를 맡은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는 영도력을 강화했고 사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1980년 1월까지도 그의 1980년대 강령 안에 체제개혁은 없었다. 덩샤오핑과 천윈을 포함해 당시에는 누구도 무엇이 ‘체제개혁’인지 분명히 알지 못했다. 쓰촨에서 경제체제개혁 실험을 진행하기 전까지 중앙 지도자 중 체제개혁이 무엇을 바꾸는 것인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혹은 분명히 말하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쓰촨에서는 분명히 알아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옮겼고 매우 안정적으로 시작했다. 1976년 쓰촨에서는 완화 정책을 시작한다. 1978년부터 정책 영역을 체제 영역으로 확장하고 도농 경제체제개혁의 실험을 진행한다. 농촌경제체제개혁의 내용은 농민의 자율권을 확대하는 것이고 도시경제체제개혁의 내용은 기업 자율권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쓰찬성위 제1서기 자오쯔양은 안정적으로 경제를 개혁했고, 중공중앙 조직부장인 후야오방은 억울한 사건에 대한 복권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이들은 당시 거리에서 회자되던 두 개의 불빛이었다.


1부 1989년 6·4 사건
1989 학생운동의 시작

학생운동은 1989년 4월 15일 세상을 뜬 후야오방의 추모를 둘러싸고 시작되었다. 거리에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지만 전체적으로 질서가 유지되었고 도를 넘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4월 22일 추도식이 개최되었을 때 톈안먼 광장에는 수만 명의 학생들이 모여 애도를 했다. 이것은 동의를 얻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인민대회당 안에서 추도식을 거행했고 학생들은 밖에서 추모를 했다. 이것이 4?26 사설 발표 전에 있었던 학생시위 상황이다.


후야오방 서거에 대한 학생들의 애도가 왜 이렇게 강렬했는가? 첫째, 후야오방의 이미지가 좋았다. 그는 많은 억울하고 조작된 오심 사건들을 바로잡았고 개혁개방을 주장했다. 무엇보다 그는 매우 청렴했다. 둘째, 1987년 후야오방의 퇴진 방식에 대해 불만과 분노를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반자유화 투쟁에 대해 불만족스럽거나 상호 모순된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후야오방의 퇴진과 같은 지도자 교체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셋째, 1988년 가을 치리정돈(治理整頓)의 제기 이후 개혁개방이 전면 축소된다. 학생들은 이런 상황에 불만이었고,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 형식을 통해 개혁 진전에 대한 자신들의 희망을 나타냈다.


나는 폭력?파손행위?약탈?방화?공격 등 다섯 가지의 위법 행위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처벌하되 그 이외의 행위에 대해서는 느슨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추도식이 끝난 후 나는 세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첫째, 추도식이 끝났으니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돌아가도록 하며 학생들이 시위를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가도록 한다. 둘째, 학생들에 대해 소통의 방침을 채택해 다양한 수준과 절차, 그리고 다양한 형식의 대화를 전개하고 의견을 구해야 한다. 셋째, 어떻게든 유혈사태는 막아야 한다. 그러나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나의 이런 의견에 대해서는 리펑과 모든 상무위원들, 덩샤오핑도 동의했다.


4·26 사설
그러나 1989년 4월 26일 「인민일보」에 게재된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제목의 4?26 사설이 발표된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학생들은 사설에서 풍기는 태도와 정치적 낙인에 매우 분노했다. 학생들은 그동안 무슨 ‘반당?반사회주의’라거나 ‘계획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원래 중도 입장이었던 사람들도 급진적으로 변했다. 다음날 거리행진을 하는 사람들의 수는 순식간에 10만 명으로 불어났다. 4?26 사설은 공공기관?사회단체?민주당파 등도 동요하게 만들었다.


당시 많은 원로들은 학생시위를 상당히 우려했다. 덩샤오핑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격화되어 유혈사건이 발생할까 걱정하며 재차 중앙에 무력행사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펑전은 직접 중앙판공청에 몇 차례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있어도 무력을 써서는 안 되고 어떠한 경우에도 자제해야 한다면서 중앙이 갈등을 격화시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4?27 대규모 시위의 결과는 다음 몇 가지를 설명해준다. 첫째, 4?26 사설에서 ‘반당?반사회주의’의 논조가 확정되었으나 학생들은 흔들리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학생운동을 진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소란만 확대시켰다. 이것은 교조적인 잣대로 몰아붙이는 옛날 방식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덩샤오핑의 4?25 담화가 외부에 알려졌기 때문에 학생들도 4?26 사설이 덩샤오핑의 지지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것은 최고 권위를 지닌 지도자에 의존한 발언 역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베이징시에서 시위 관련 관리 방안을 발표하고 엄격한 통제와 규제를 실시한다고 했으나 역시 소용없었다. 학생들은 4?27의 대규모 가두시위를 경험하면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2부 연금의 심정
당과 국가의 심판

13기 4중전회에서는 나의 모든 직무를 박탈하고 나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를 진행한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조치는 역사적으로 선례가 없는 것이었다. 조직의 엄격한 처분을 받은 이상 더 계속해서 조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 문제가 철저히 조사되지 않아 지속적인 심사가 필요하다면 정치적, 조직적 결론을 낼 이유가 없었다. 1989년 6월부터 1992년 10월까지 나에 대한 조사가 3년 4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조사 기간 동안 나는 활동의 자유를 상실했다. 1989년 9월 3일 왕런중과 딩관건은 나에게 중난하이 화이런탕에서 면담하자고 했다. 그 후 1989년 12월 8일, 1990년 2월 4일, 3월 2일, 이렇게 왕런중과 나는 세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또 내게 세 번의 편지를 보냈고 나도 회신을 보냈다.


나에 대한 조사는 동란 과정에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개입했는지의 여부와 외부에 비밀을 누설했는지를 추궁하는 것 이외에도 주요하게 왜 덩과 서로 다른 입장과 방침을 견지했는지, 그 동기는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하는 것이었고, 내게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밖에 내가 몇 년간 지도자로 있으면서 자산계급 자유화와 관련된 일을 유화적으로 대하고 이러한 사람들을 중용한 것에 대해 잘못을 따지고자 했다.


왕런중과의 면담과 서신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반박하고 진실을 밝히는 데 역점을 두었다. 첫째, 1988년 이해 국내외에 ‘덩샤오핑 타도, 자오쯔양 보위’라는 풍조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일부 사람들이 모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작한 것에 불과했다. 둘째, 도처에서 ‘자오쯔양의 지위가 불안정하다’, ‘권력이 약화됐다’, ‘경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 ‘이미 실권을 잃어버렸다’ 등의 소문이 떠돌 때에도 덩은 여러 차례 현재의 인사 구조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며, 심지어 내게 연임으로 다시 총서기를 맡아달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셋째, 나는 결코 경제 상황이 나쁘다고 인식하지 않았다. 마땅히 10년간의 경제체제개혁에 커다란 성과가 있었고, 국가의 경쟁력이 크게 발전했으며, 인민들의 생활수준도 크게 개선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1988년의 통화팽창 상황도 결코 심각하지 않았다. 나 역시 해결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경제 실패로 이미지가 좋지 않기 때문에 학생시위를 이용하여 정치적 자본을 챙기고 이미지를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은 결코 없었다. 넷째, 수십 년간 당내에서 일했기 때문에, 당내 고위층의 정치적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학생시위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유치하고 무지하지 않았다. 다섯째, 학생시위에 대한 덩의 방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학생시위의 성격과 진압이 장차 야기할 부작용에 대해 인식상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에 책임을 질 것이며 학생을 진압하는 총서기는 절대 될 수 없다.


그해 6월, 왕런중에게 회신을 통해 왜곡된 자료에 대한 수정 의견을 보냈다. 나는 전체 30개항 중에서 12개항에 대해 반박했다. 그 뒤로 왕런중은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그 어떠한 사람도 자료를 확인하러 오지 않았다. 나에 대한 조사는 실제로 흐지부지되고 만 것이다. 


3부 개혁개방의 13가지 문제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덩샤오핑은 줄곧 시장의 역할을 강조했고, 개혁개방 초기 외빈을 접견할 때마다 사회주의는 결코 시장경제를 배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이후에도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결합에서 어느 것을 위주로 할 것인가는 서로 다른 시기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말해왔다. 12기 3중전회의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에서는 가치법칙과 시장의 역할을 강조했고, 사회주의 역시 상품경제임을 지적했다. 덩은 이러한 결정을 높이 평가하면서 새로운 정치경제학이라고 했다.


후야오방 역시 계획경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야오방은 상명하달식의 고도로 집중된 계획경제는 대중들의 적극성과 창조성을 제약할 뿐만 아니라 기업의 적극성과 기층의 적극성, 지방의 적극성도 구속한다고 인식했던 것 같다. 그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대중과 기업, 지방에 대한 규제를 풀어 적극성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는 과거의 대중운동 방식과 거의 유사했다.


천윈과 리셴녠은 항상 계획경제를 강조했다. 특히 천윈은 195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경제를 다룰 때는 새를 키우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너무 세게 쥐면 질식해서 죽고 너무 풀어주면 새가 날아가 버린다고 하면서 반드시 새장 안에 가두고 질식하지도 또 날아가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새장경제 사상이다.


그는 중국 경제의 1차 5개년계획을 성공적이었다고 보았을 뿐 아니라 1980년대 말까지도 소련이 계획경제를 실시하여 낙후된 소련을 수십 년 안에 미국 다음가는 강대국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계획경제의 성공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중국에서 잘하지 못했던 이유는 주로 마오 주석의 간섭과 문화대혁명 때문이었다고 했다.


당시 농촌에서 농가생산책임제가 막 추진되고 있을 때, 천윈은 1981년 12월에 개최된 농촌공작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농촌경제 역시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고, 시장조절을 보조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중 양식?면화?연초 등과 같은 경제작물에 대해서는 반드시 재배 면적을 규정하고, 양돈 역시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1984년 10월, 11기 3중전회에서 천윈은 1950년대 식량 문제에 대해 가치법칙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확했다고 보지만, 전체회의에 제출된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에 찬성한다고 서면 발언을 했다.


하지만 1985년 9월 당의 전국대표대회에서는 그는 또다시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고 시장조절을 보조로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런 정책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1987년 13대 정치보고에서 나는 향후 경제운행의 메커니즘은 ‘정부의 시장조절, 시장의 기업 인도’라고 발표했다. 당시 정세는 전체적으로 개혁개방의 분위기가 더욱 짙어졌기 때문에, 나는 보고서 초안을 계속해서 천윈에게 보내 검토하게 했다. 


계획경제에 대한 나의 인식에도 일련의 변화 과정이 있었다. 처음에 나는 중국이 거대하고 지역간 상황도 천차만별이며 교통 통신도 발달하지 않았는데, 만약 모든 생산 유통활동을 중앙에서 계획하고 획일적으로 배분한다면 분명 관료주의가 만연하고 폐단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에 중앙에서 업무를 보면서 경제효율이 높지 않고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중앙계획체제가 가져온 폐단 때문이라고 보았다. 시장조절과 가격규칙의 역할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주의국가로서 서방 국사의 시장경제체제를 실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 역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1981년 정부공작보고에서 한 경제 건설에 대한 10개 방안 중 계획체제는 서로 다른 기업과 상품에 따라 네 가지 상황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 국가의 지령성 계획에 따라 생산하는 것으로, 예컨대 국민경제의 명맥과 관련된 핵심기업과 국가경제와 국민생활과 관련된 주요 상품들이다. 둘째, 시장변화에 따라 기업과 경영자 스스로 생산을 결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제품이 다양한 소상품 등이다. 이상의 두 가지 중 하나는 지령성 계획에 의해 생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과 경영자가 스스로 판단하여 생산하는 것이다. 이 두 종류 이외에도 두 가지의 제품과 기업이 더 있다. 하나는 대부분 국가에서 계획하고 일부는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 시장에 따라 생산하고 일부는 국가계획에 따라 생산하는 것이다. 당시 이러한 구분으로 인해 비록 계획경제체제를 유지했지만 시장조절의 부분을 확대할 수 있었다.


12기 3중전회에 보고할 경제체제개혁 결정 문건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나는 몇 가지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중국 경제는 계획경제이지, 서방의 시장경제가 아니다. 둘째, 중국 경제는 상품(商品)경제이지 산품(産品)경제가 아니다. 공유제의 기초 위에 계획 있는 상품경제를 건립한다는 것으로 개괄할 수 있다. 셋째, 계획을 직접계획과 간접계획으로 구분하고, 직접계획의 부분을 점차 축소하고 간접계획 부분을 확대한다. 넷째, 간접계획은 주로 시장과 경제수단에 의존해 조절하고, 직접계획 역시 가치법칙의 역할을 중시한다.


1984년과 1985년의 계획체제개혁 과정에서 기업에 권력을 이양하는 것을 제외한 주요 업무는 국가계획위원회에서 직접 계획하는 비중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그해 몇 년 동안 국가계획위가 직접 계획하는 제품을 점차 축소했고, 국가계획위가 직접 관리하는 일괄배분 물자를 축소했다. 13대 정치보고에서는 중국 경제의 운영 메커니즘이 ‘정부의 시장조절, 시장의 기업 인도’임을 더욱 명확하게 제기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시장원칙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데올로기적 제약으로 인해 시장경제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4부 후야오방 시대에서 자오쯔양 시대로
후야오방의 하야

1979년 덩은 이론학습토론회에서 4개항 기본원칙 견지에 대한 보고를 한다. 이때부터 후와 덩은 자유화 문제에 대해 의견 차이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후 몇 년간 갈수록 뚜렷해지고 커졌다. 1981년 7월 덩샤오핑은 사상이론전선의 해이함과 나약함을 지적했고 1983년 10월에는 12차 2중전회에서 사상전선에 정신오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제의했다. 덩은 지식인들 사이에 자유화 사조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느꼈으며, 이런 분야는 후야오방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후야오방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오방은 이 정신오염 제거 운동에 대해 본래 반대 입장이었고 회의적이었다. 그는 1984년 2월 상하이시 서기들과의 대화 자리와, 그 뒤 만난 일본 외빈과의 담화 자리에서 모두 정신오염 제거라는 방법은 적합하지 않으며 일을 확대시켰다고 말했다. 또 자신은 이후 이러한 표현법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이 문제는 당시 매우 민감했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특히 지식인 계층에게 정신오염 제거가 틀렸다는 인상을 주었다.


자유화 말고 다른 분야에서도 덩은 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예컨대 덩은 후의 일처리가 진중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외업무에서 북한과의 관례를 처리하면서 분위기가 너무 좋은 나머지 후가 과도하게 북한 측의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그가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덩은 이를 부정해버렸다.


중앙 12차 6중전회 당시 야오방의 대외 업무, 경제 업무, 당 지도?정비, 그리고 업무 태도에 대한 일부 원로들의 논평이 반쯤 공개되었다. 이들은 야오방이 당 건설에 집중하지 않고 지나치게 경제 업무에 관여하고 있으며, 공산당의 총서기로서 자본주의 국가 방문에 열을 올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가 수년간 군중이 보낸 수천 통의 서신을 읽었고 며칠 동안 몇 개 현을 뛰었다는 신문 보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서기처회의에서 제기한 야오방의 의견은 대부분 원로들로부터 제지와 거절을 당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고려할 때 야오방이 업무를 주관한다는 것은 이미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2차 6중전회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야오방은 최근 덩샤오핑과 얘기를 나눴다면서 13대 때 덩은 정치국 상무위와 고문위원회 주임을 사퇴하고 자신에게 이 직무를 넘기고, 총서기는 다소 젊은 사람에게 맡길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고 내게 알려주었다. 야오방은 또 덩과의 자리에서 총서기로 자신보다 약간 젊은 나를 추천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총서리를 맡고 싶지 않았고 계속해서 총리를 맡아 경제개혁에 매진하고 싶었다. 당시 덩의 말을 전하던 야오방의 표정은 매우 차분하고 정상적이었으며, 조금도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1986년 12월 일부 도시에서 학생시위가 발생했다. 상하이에서 가장 크게 일어났으며 시 정부까지 돌진했다. 이 일은 덩샤오핑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이번 학생시위는 우연이 아니며 자산계급 자유화를 내버려둔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야오방을 질책했다. 학생시위 처리에 있어 그는 단호한 조치, 심지어 독재의 수단을 써서라도 평정할 것을 주장했다. 물론 독재 수단은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발언은 실제로 학생시위의 책임을 완전히 야오방에게 돌리는 것이었으며, 1984년 이후 자유화 문제에 대한 두 사람의 갈등이 폭발한 것이었다.


5부 거대한 변화, 1988년
실권 잃은 총서기

치리정돈의 전체 권력이 모두 국무원 수중으로 집중되었고 나와 중앙재경영도소조는 실권을 잃게 되었다. 이 시기에도 나는 계속해서 경제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토론하지 않았고 집행하지 않았다. 원래 중앙재경영도소조는 13대 준비 기간 동안 덩샤오핑이 제안했던 조직 형식이다. 그 목적은 내가 총리직을 겸임하지 않게 된 뒤에도 여전히 경제 건설과 개혁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내가 총리직을 겸임하지 않고 리펑이 총리를 맡은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개혁과 건설은 수년 동안 내가 지도해왔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잘 알고 있었지만 경제개혁에 대한 리펑의 태도는 줄곧 분명하지 않아 모두들 그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했다. 이에 따라 덩샤오핑은 특별히 조항 하나를 만들어 내가 총리를 그만둔 뒤에도 여전히 경제 업무를 주관하게 했고 그래서 별도로 재경영도소조를 설립했다.


그러나 치리정돈이 제기되자 그들은 경제 업무를 지도하는 내 지위가 약화되었다고 여겼다. 그들은 이 기회를 틈타 치리정돈의 통제권을 독차지하게 되면 중앙정치국 상무위와 중앙재경영도소조, 그리고 나 본인까지도 경제에 대해 간섭하지 못하게 하고 치리정돈을 빙자해 예전의 방식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상무위와 재경소조는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에 동의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1989년 정월 초하루 전 정치국 상무위에서 생활회를 열어 야오이린과 리펑이 앞장서서 나를 비판했다. 사실 당시 그들은 이미 나의 실권을 잃게 만들었지만 회의에서 내가 지나치게 많이 간섭한다고 하면서 총리직을 맡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야오이린과 리펑 두 사람의 태도는 우연이 아니라 어떤 분위기를 대표했고 누군가 배후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있었다. 


1988년 가을 이후 이러한 바람이 불었고 이와 동시에 나와 나의 가정에 대한 유언비어가 많았다. 우리 아이들 몇 명이 컬러텔레비전과 자동차, 식량, 합금강을 전매해서 큰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훗날 내가 자리에서 내려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사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그냥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에게 준 인상은 마치 우리 집이 ‘관다오(공무원이 직권을 이용해 불법 전매활동을 하는 것)’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우연이 아니라 나를 추악한 인간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개혁을 주장해온 내 이미지를 훼손시키려는 것이었다.


6부 개혁의 이름으로
중국의 이름 없는 공포

원래 우리는 상황의 추세에 따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13대에서 이미 제기했던 정치체제개혁의 조치를 잘 관철시켜야 했다. 예컨대 당정분리와 공무원제도, 그리고 중요한 상황은 인민이 알도록 하고 중대한 문제는 인민과 협상하며 지식인이 비교적 많은 단위에서는 한발 앞서 민주 건설을 실행하게 하고 지식인의 정치참여 요구를 만족시키는 등등이다. 우리가 이미 제기했고 계획했던 정치체제개혁을 적절하게 관철시켰다면 민주 추진을 요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이러한 궤도 위로 이끌어 13대에서 설계했던 단계적 순서에 따라 민주를 확대하고 민주정치건설을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3대 이후에는 정치체제개혁을 전개해 나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우선 덩샤오핑과 일부 원로들은 정치체제의 어떠한 개혁이라도 공산당의 권력에 도전할까, 공산당의 권력을 약화시킬까, 공산당의 용도 지위를 동요시킬까 몹시 두려워했다.


나는 공산당 영도의 다당 합작과 정치협상제도를 정말로 풍부하고 완전하게 만들고 참정의 역할을 발휘하게 하여 이 제도를 형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각 민주당파가 활기를 띠고 참정과 감독의 역할을 발휘할 수 있게 되고 사회적으로 정치참여를 하고 싶은 사람은 민주당파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정치참여 욕구를 실현할 수 있게 되어 체제 밖에 당과 대립되는 조직을 또다시 만들 필요는 없게 된다. 이렇게 한다면 실제로 권력을 나누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공산당이 권력을 전면 독점하지 않지만 공산당의 집정 지위에도 절대 도전할 리 없었다.


나는 또 민주당파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국무원 각 부서의 부부장이나 부장으로 임명하자고 건의했다. 해방 초기 우리는 이렇게 했었다. 또한 어떤 일들은 공산당의 결정을 기다린 뒤에 민주당파에 알리는 것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아도 민주당파의 의견을 들을 수 있게 하고 정협을 형식이 아닌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되진 못했다. 당정분리 문제나 공장의 공장장 책임제 실행 문제 등에 있어서는 당내에서 우려와 저항이 매우 컸다. 실제로 권력의 배분 문제와 관련되었고, 기득권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권력을 포기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패 문제도 있었다. 1988년 나는 광둥에서 설 연휴를 지내면서 많은 상황을 접해본 뒤 시장경제를 한 뒤로 경제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지만 부패 문제가 생겨났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구체제가 새로운 체제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시기에 만약 감독이 없다면 부패가 자라게 될 것이다. 돈과 권력이 거래되고, 관료의 투기매매 활동과 관료기업인, 횡령과 뇌물 등이 생겨난다. 이러한 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투명도를 해결하고 언론감독과 여론감독, 사법독립을 포함한 민주감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정치체제개력의 문제이다.


나는 정치체제가 반드시 이에 상응하여 개혁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당내 노인네들 중에는 이런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13대 이후 정치체제개혁은 실제로 정체 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 인민들의 요구, 특히 지식층의 요구는 당의 생각과 그 차이가 매우 컸고 모순적이었다.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는 아직 비교적 느슨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담하게 말했고 톈안먼 사태였던 6.4 이후처럼 고압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오히려 사람들은 더욱 민주를 요구했으며 과격한 주장과 행동이 나타나고 갈등이 격화되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실시도 쉽지 않았다. 저항이 아주 컸고 걱정이 많았으며 이름 모를 두려움이 이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낙인을 붙였다. 이것은 외국인과의 관계와 관련된 문제로 언제나 주권을 잃고 나라를 욕되게 한다는 걱정과 스스로 손해를 보는 일이라는 우려가 있었으며 ‘좋은 물은 외부 사람의 논으로 흘러가지 않게 하는 법’이라는 말들을 했다. 이에 나는 항상 다음과 같은 이치를 얘기했다. “외국인의 중국 투자는 원래 많은 우려가 따르는 일이다. 우리의 정책이 이렇게 불안정하고 많은 위험이 있다면 두려워할 사람은 바로 돈을 갖고 들어오는 외국기업이지, 우리 정부가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특구를 만들 때 마카오처럼 식민지로 변하게 될 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마카오는 처음에는 포르투갈에 어망을 말리는 곳을 임대했는데 그 뒤로 식민지로 변했다. 실제로 당시 청조는 부패하고 무능했지만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런 문제가 없다.


중국은 다년간 쇄국정책을 해왔다. 명분은 독립자주였지만 실제로는 문호를 봉쇄하고 타국과 교류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고 무엇이든 국내에서 해결하려 하면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된다. 대외무역 역시 남에게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물건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교환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자력갱생이다. 이러한 쇄국의 생각으로는 자신의 장점을 활용할 수 없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