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바꾸는 생각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고전을 바탕으로 ‘공자와 플라톤이공산주의였다, 한비자 안에 마키아벨리가 있다, 루소와 정약용의 공통점’ 등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답함으로써세계 정치사상의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돕는다.
■ 저자 황광우
그는 1958년 광주에서태어났다. 고교시절, 반독재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 및 제적을 당했으며,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에 입학했다. 1970년대에는민주화운동에 동참했고, 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두 번째 제적을 당하면서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의 길을 걸었다. 1991년 월간 「길을 찾는사람들」을 창간했고, 2002년에는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뒤늦게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는 전남대학교 철학과대학원을 다니면서 광주 ‘다산학원’에서 제자들과 함께 고전을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콘서트』『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들어라 역사의외침을』『노동자의 사상』『사회주의자의 실천』『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다시 생각하는 사회주의』『진리는 나의 빛』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세계를 알아야세계를 만들 수 있다
1. 신은 죽었다. 그 이후의 사회는? : 자유주의Liberalism
개인 없이는 자유도 없다? | 사라져가는 태양왕 | 최소의 국가가 최선의 국가 | 보이지 않는 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열정적 고전읽기 1 - 『두 개의 우주 세계에 대한 대화』 | 열정적 고전읽기 2 - 『국부론』 | 깊이읽기 -프랑스 혁명의 아버지, 루소
2. 평등사회를 향한 인류의 꿈 : 사회주의와 공산주의Socialism and Communism
유토피아의 업그레이드 | 마르크스, 나이브한 사회주의와 선을 긋다| 러시아가 평등사회를 이루지 못한 이유는? | 20세기 공산주의의 오류 | 사회주의의 다양한 판본들
열정적 고전읽기 1 - 『유토피아』| 열정적 고전읽기 2 - 『옥중수고』 | 깊이읽기 - 19세기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
3. “역사상 가장 안정적이고 강력한 정치사상” :자유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지배 | 시민혁명의 열매, 자유주의 | 부자들만의 리그| 자유민주주의의 탄생 | ‘방망이 든 경찰’에서 ‘거대한 거인’으로
열정적 고전읽기 1 - 『법의 정신』 | 열정적 고전읽기 2 -『자유론』 | 깊이읽기 - 권리를 위한 투쟁
4. 잔 다르크가 프랑스를 구한 이유는? : 민족주의Nationalism
프랑스를 구하라 | 나폴레옹, 유럽의 민족을 깨우다 |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 | 민족 없는 민족주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하다
열정적 고전읽기 1 - 『조선상고사』 | 열정적 고전읽기 2 - 『삼민주의』 | 깊이읽기 - 중국 민족주의운동의 세 갈래
5. 왜 그들은 나치즘에 열광했는가? : 파시즘Fascism
1,100명의 유태인 명단 | 히틀러의 투쟁 | 나치즘에 열광한 이유 | 과학 역시 인종적이다? | 파시즘,그후
&열정적 고전읽기 1 - 히틀러의 연설문 | 열정적 고전읽기 2 - 파시즘으로 이어진 니체와 베르그송의 철학 | 깊이읽기 1- 파시즘과 스포츠, 문화 예술 | & 깊이읽기 2 - 20세기 세계의 독재 정권들
6. 중국 왕조의 공식 사상 : 유가 사상Confucianism
그 많은 학파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 공자와 3,000명의 백수 제자들 | 현실과 맞서 싸우는 데유용한 창과 칼 | 공자가 꿈꾸는 사회, 대동(大同) | 맹자는 천명을 바꾸는 혁명가? | 동양 최고의 학파, 유가
열정적 고전읽기 1-『논어』 | 열정적 고전읽기 2 -『맹자』 | 깊이읽기 1 - 중국 고대의 왕조와 사상 | 깊이읽기 2 - 유가의 학통
7. 은둔자가 피워낸 눈물의 꽃 : 도가 사상Taoism
똥과 오줌, 그 안에 도(道) 있다 | “약한 것은 강한 것을 이긴다” | 무위의 정치 | 자본주의의 병폐를치유할 대안 사상
열정적 고전읽기 1 - 『도덕경』 | 열정적 고전읽기 2 - 『장자』 | 깊이읽기 1 - 노자의 여러 가지 얼굴 |깊이읽기 2 - 도가와 불교
8. 천하통일의 사상적 무기 : 법가 사상Legalism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의 공통점은? | “하늘의 별점이 길조라고 승리를 기대할 수는 없다” | 왕이든 노예이든모두가 법! 법! 법! | 중국 왕조의 기본적인 통치술
열정적 고전읽기 1 -『순자』 | 열정적 고전읽기 2 - 『한비자』 | &깊이읽기 - 묵자의 사상
9. 조선 왕조 재건 프로젝트 : 실학사상Silhak
혼돈의 시대, 술이나 마시자? | 도탄에 빠진 백성들 | 한국판 루소, 정약용 | 정약용의 개혁 프로젝트 |“수확 빠르기는 누에치기가 으뜸이라” |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혜택을 입는 것이 나의 소원”
열정적 고전읽기 1 -『목민심서』 | 열정적고전읽기 2 -『성호사설』 | 깊이읽기 - 조선 사회의 변화와 실학
10. 사람이 곧 하늘이다! : 동학사상Donghak
반란의 시대 | 19세기 조선의 민중 사상 | 하늘과 사람은 하나 | “망할 것은 얼른 망해버리고 새 세상이와야 한다” | 농민 통치, 새 세상이 열리다 | 녹두 장군의 최후
열정적 고전읽기 1 -『동경대전』 | 열정적 고전읽기 2 - 『주역』| 깊이읽기 - 『동경대전』 읽어 보기
에필로그 - 21세기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는무엇인가?
위대한 생각들
신은 죽었다. 그 이후의 사회는? : 자유주의 Liberalism
자유주의 사상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어떤 사상도 그렇게 등장한 적은 없다.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려면 무엇보다 사회?경제적인 토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어떤 사상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고, 그런 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집단이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자유주의는 상공업의 발달과 시민계급의 등장이라는 토대 위에서 꽃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 없이는 자유도 없다
자유주의는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사상에서 가장 힘주어 주장한 재산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요구할 수 있는 ‘개인적인’ 자유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자유의 개념은 ‘개인’의 발견 없이는 탄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그리고 과학혁명은 인류 정신사에서 ‘개인’을 찾게 해준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 사상을 등장시킨 사상적 토대였다.
사라져가는 태양왕
나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시기를 유럽 역사에서는 절대왕정 또는 절대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왕은 상비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여 전국을 통일하고, 행정?사법?군사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절대왕정이 성립하여 발전하자 왕권의 강화를 옹호하는 정치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다.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왕권은 신이 준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며, 왕은 오직 신에게만 책임을 진다. 신하와 국민은 왕에게 절대 복종할 의무가 있을 뿐, 왕의 행동에 대해 일체 항의할 권리가 없다. 그래서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었다.
왕권신수설을 비판하기 위해 신흥 시민계급들이 들고 나온 무기가 ‘사회계약설’이었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존 로크는 『정부론』에서,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각각 사회계약 이론을 전개했다. 사회계약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왕권을 신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합리적인 계약에 근거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권은 신성하거나 절대적이지 않으며 국왕은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왕이 국민과의 계약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할 경우에는 왕권이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이 사회계약설의 요체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프랑스 대혁명은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되었다. 1789년 7월 14일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자”는 혁명가 카미유 데믈렝의 선동에 고무된 파리 시민들은 시내에 있는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몰려갔다.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은 왕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은 곧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혁명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는 혁명의 이념을 널리 알려야 했다. 8월 26일 국민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라는 선언문을 채택하여 만천하에 공포한다.
제1조.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제2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권을 보호하는 데 있다.
제3조.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제4조. 법은 사회에 해로운 행위만을 금지한다.
제5조. 모든 시민은 법의 제정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
이후 ’자유, 평등, 우애‘로 집약되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은 나폴레옹 군대와 함께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간다
.
자유주의 사상은 인간이 왕권의 횡포와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의 완전한 주체로 서는 과정에서 탄생한 위대한 정치 이념이다. 그 속에는 인종과 종교,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지녀야 하는 기본 권리가 천명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사상이 비록 서구에서 만들어진 것이어도 우리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2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현실적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 사상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이후의 역사를 통해 수정?보완되면서 현재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평등사회를 향한 인류의 꿈 :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Socialism and Communism
사회주의는 아주 폭이 넓은 개념이다. 좁게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을 통한 계급 없는 사회’를 가리키기도 하고, 넓게는 ‘지배 계급의 억압과 수탈이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를 가리키기도 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압제와 불평등이 있었던 곳에서는 일하는 근로 대중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희구했는데, 인류의 현자들은 이들의 바람을 여러 형태의 사회주의사상으로 대변했다. 사회주의는 서양에서만 발달한 사상이 아니었다.
대동(大同)은 공자가 돌아가고 싶어 했던 동아시아 고대인들의 유토피아(Utopia)이다. 가족적 질서, 그것의 확대판이 공자의 대동이었던 것 같다. 동양에 공자가 있었다면, 서양에는 플라톤이 있었다. 하나의 나라를 인간의 합리적 사고에 따라 구상해볼 수 있다는 것. 그런 프로젝트에 따라 인간의 합리적 사고에 따라 사회를 마음대로 개조할 수 있다고 보았던 플라톤의 대담한 시도야말로 ‘사회주의사상의 초석’인 셈이다.
유토피아의 업그레이드
서양에서 고대의 공산주의사상이 환상적인 사상으로 치부되어왔다면, 공산주의사상의 새 버전을 만들어 근대인의 담론 안으로 유입시킨 이는 토머스 모어이다. 농업 노동과 공업 노동을 통합하고, 도시와 농촌의 삶을 통일하려는 기획의 배경에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통합을 통해 전인적 인간을 실현하려는 토머스 모어의 높은 이상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것이 사회주의사상의 특질이다.
마르크스, 나이브한 사회주의와 선을 긋다
본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둘 다 평등 사회에 대한 인류의 꿈을 대변한 것으로 크게 보아 똑같은 의미이다. 문맥에 따라 사회주의를 써서 좋은 경우가 있고, 공산주의를 써서 좋은 경우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카를 마르크스가 1848년 ‘공산당선언’을 작성한 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용법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말하기 좋아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아무런 실천적 책임 없이 그냥 떠들어대는 담론으로서 사회주의가 유행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이들의 나이브한 사회주의와 선을 긋기 위해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이후 마르크스가 정식화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해방을 위한 실천적 사상, 이것만을 가리켜 공산주의라 지칭하게 된다.
사회주의의 다양한 판본들
그렇다면 ‘마르크시즘이 아닌 사회주의’에는 어떤 사상이 있었던가? 마르크스는 생시몽, 푸리에의 사상을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아냥거렸고, 미국에 노동자들을 위한 이상촌을 건설하여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영국의 로버트 오언의 시도 또한 공상적이라며 비웃었다.
러시아의 혁명가 바쿠닌의 무정부주의도 광의의 사회주의이다. 마르크시즘이 혁명의 기본 동력을 노동자계급으로 본 반면, 무정부주의는 각성된 소수의 인텔리겐치아로 보았고 마르크시즘이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에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국가조직이 필요함을 역설했던 반면, 무정부주의는 혁명 후 국가의 즉각적 폐지를 주장했다. 역설적으로 보면, 마르크시즘은 무정부주의의 격렬한 행동성과 투쟁하면서 냉정한 과학적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또 독일의 노동운동가 라살의 국가 사회주의도 사회주의의 한 유파임에 분명하다. 라살의 국가 사회주의란 무정부주의와 정반대로 국가의 힘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보통선거권이 보장되고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이 의회의 다수당으로 성장한다면 노동자들은 국가의 도움을 받아 생잔자들의 조합을 관리함으로써 사회주의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라살의 아이디어였다. 라살의 국가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격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회주의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노동당마저 라살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이다. 좋건 싫건 한국의 젊은이들은 북한에 대해 알아야 한다. 좋건 싫건 사회주의에 대해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북한은 스탈린 체제에 토대를 둔 공산주의 국가이다.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고, 공산당 일당의 독재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이다. 북한의 청소년들과 남한의 청소년들에게는 서로를 만나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불가피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북한에 대한 반공주의적 적대 의식이나 주사파 등의 맹목적 북한 찬양은 건전한 상식을 갖춘 젊은이들이 지향할 바가 아닐 것이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어떤 오류를 저질렀고, 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 역사의 전개를 정확히 알아두어야 한다. 동시에 자본주의의 모순은 무엇이고 그 극복의 해법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남한 사회가 안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을 반성할 줄 아는 겸허한 교양과 더불어 북한의 청소년들과 사회주의의 역사를 논할 수 있는 깊은 지성이 요구된다.
동양 최고의 학파 : 유가 사상 Confucianism
그 많은 학파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한 사상가들의 유파를 보통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부른다.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 등이 제자백가의 대표 격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학파들이 일어나서 자웅을 겨루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많은 학파들이 탄생하고 활동할 수 있었을까?
이 시대, 특히 전국시대는 서로 힘이 비슷한 강국 사이에 절묘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서로 경쟁하는 일곱 나라는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면에서 조금이라도 더 우세해지기 위해 국적과 출신을 묻지 않고 모든 나라에서 인재를 모집했다.
공자와 3,000명의 백수 제자들
공자도 춘추시대에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고 실현하기 위해 활동했던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그의 학파는 유가(儒家)라고 불린다. 공자는 노(魯)나라와 제나라에서 몇 년간 벼슬을 할 때, 그리고 말년에 고향인 노나라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칠 때를 빼고는 늘 중국 전역을 여행했다. 공자는 나름의 연구와 경험을 통해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길을 터득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자신의 말을 들어줄 왕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는 3,000여 명이고, 그 가운데 학문에 능통한 사람만도 7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은 공자가 죽은 뒤에 공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전파·전승했다.
공자가 꿈꾸는 사회, 대동(大同)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윤리적 이상은 모두 주공의 가르침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자는 주공이 만든 예, 주나라의 문물을 다시 살려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자고 주장했다. 힘으로 다스리는 정치를 벗어나 예로 다스리는 정치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런 공자의 주장을 예의정치라고 한다.
공자는 예의정치가 실현된 사상,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대도(大道, 큰 진리)가 행해지면 천하에 공의(公義)가 구현된다. 현명한 이를 지도자로 뽑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주며, 신의와 화목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버이만 어버이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노인으로 하여금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하고, 장년은 일할 여건이 보장되며, 어린이는 길러주는 사람이 있고, 의지할 곳 없는 과부와 홀아비를 돌보며, 병든 자도 모두 부양받는다. 남자는 남자의 일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일이 있다. 재화가 땅에 버려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반드시 사적으로 저장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노동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남을 해치려는 음모가 생기지 않고, 도적이나 난적(亂賊)도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집집마다 바깥문을 닫을 필요가 없다. 이런 사회를 ‘대동(大同’이라고 한다.
- 『예기(禮記)』 「예운(禮運)」편
맹자는 천명을 바꾸는 혁명가?
공자의 사상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은 공자보다 약 100년 뒤에 살았던 맹자이다. 맹자는 백성들을 착취하여 자신의 쾌락을 추구한 자들은 이미 임금의 자격을 잃은 것이고 그런 임금이라면 신하나 백성이 갈아 치우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를 한다. 맹자는 이어서 폭군에 맞서 혁명을 일으킨 탕왕과 무왕은 백성들을 구제한 성군이었다고 칭찬한다.
이처럼 맹자의 사상에는 혁명을 인정하는 주장이 있다. 본래 천자는 하늘의 아들로서 하늘의 명령, 곧 천명을 받아 천하(天下)를 다스린다. 그런데 혁명이란 이 천명을 바꾸는 것, 곧 왕을 바꾸는 것을 가리킨다. 그럼 언제 왕을 바꾸는가? 맹자는 왕이 어질지 못하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아 민심을 잃었을 때 혁명을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잘못하면 갈아 치울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오”라고 왕에게 경고한 것이었다.
동양 최고의 학파, 유가
공자의 사상은 원래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강화하고 천자의 권위를 확립해서 예의정치를 실현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 같은 보수적인 성격 때문에 유가는 언제든 안정된 왕조의 통치 이론으로 채택될 여지가 있었다. 특히 신하와 백성들이 예를 지켜 자신의 직분을 다해야 한다는 주장은 왕의 입장에서 보면 크게 장려할 만한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한나라 때 현실화된 것이다. 왕권이 확고해지고 엄격한 신분제가 정착된 후대로 넘어올수록 유교의 이런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유가는 동양에서 최고의 학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최고가 되는 길’은 동시에 ‘보수화의 길’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유가는 원래의 맛을 상실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공자나 맹자의 주장에 살아 있던 파릇파릇한 생동감, 칼날 같은 비판 정신, 인간에 대한 훈훈한 사랑을 많이 잃은 것이다.
조선 왕조 재건 프로젝트 : 실학사상 Silhak
정약용의 개혁 프로젝트
조선 중?후기에 정치가 문란해지고 사회 기강이 흐트러지면서 발생한 여러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농업 문제였고 농업 문제의 핵심은 토지 문제였다. 소수에게 토지 소유가 집중된 것이 문제였다. 세력 있는 가문들은 전국의 토지 가운데 상당수를 소유했고 수많은 농민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조차 갖지 못했다.
토지 문제는 농업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세금의 문제, 국가재정의 문제였다. 따라서 당시 경제 개혁의 핵심은 농업 개혁이었고, 농업 개혁의 핵심은 토지제도 개혁이었다. 실학자들은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고 다양한 제안을 내놓았다. 우리는 이렇게 농업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 및 사회 개혁을 이루려 한 실학자들을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라고 부른다. 정약용도 이 같은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에 논의되었던 토지제도 개혁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정전제(井田制)와 균전제(均田制)이다. 여전제(閭田制)라는 토지 개혁안을 내놓은 정약용의 목표는 분명하다. 모든 토지는 국유로 하고 국가가 농민에게 그것을 경작할 권리를 주자는 것이 정약용의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농민이 토지를 직접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정약용은 국가 소유의 토지를 분배할 때 ‘여’를 기준으로 하자고 한다. 여는 자연적인 지형을 따라 나눈 것이다. 여 안에서는 농민들이 여장의 명령에 따라 일을 하면서 생산한 곡식을 각자 일한 대로 공평하게 나눈다. 물론 세금과 여장의 임금은 공동 부담한다.
정약용은 여전제에 근거한 세금제도로 10분의 1세를 주장했다. 이것은 농민들에게 무척 유리한 제도이다. 그동안 농민들은 생산물의 2분의 1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경작을 농민들이 하면 지주가 끼어들 틈이 없으므로 자연스레 농민이 부담할 세금은 줄고 국가재정은 오히려 튼튼해진다.
그는 군사제도도 여전제에 근거해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여에서 농사짓는 농부들이 평소에는 농부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군인이 되는 것이다. 농민들은 평상시에 생업에 종사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군사훈련을 하고 여장은 그 마을의 지휘관이 된다. 당연히 여장 위에 있는 이장, 방장도 각각 더 큰 단위의 지휘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군대가 강력해질 것이라고 정약용은 주장한다.
이처럼 정약용의 여전제는 단순한 토지제도 개혁안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제도 개혁을 토대로 조세, 군사 등 사회제도 전반을 개혁하려는 야심 찬 기획이었다. 그는 여전제를 실시하면 조선이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깨끗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혜택을 입는 것이 나의 소원
그가 남긴 503권이라는 방대한 저술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 『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경세유표(經世遺表)』이다. ‘2서 1표(二書一表)’라고 불리는 이 책들을 통해 정약용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정약용은 개혁적이고 실천적인 유가였다.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학문과 저술에 몰입한 최고의 학자였지만 그의 학문은 학문을 위한 학문이나 공허한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현실을 개혁하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 데 적극 참여한다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조선 후기에 가장 온전하게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의 사상은 당대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실학 사상은 성호 이익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작은 물줄기로 나누어졌다가 마침내 정약용이라는 커다란 호수로 모여들었다. 그의 사상과 실천은 사회질서의 붕괴를 막고 백성의 고통스런 삶을 개혁해보려는 시도였다. 무너져가는 조선을 개혁하고 재건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 듯이 그의 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먼저 사회적으로, 정약용의 주장을 받쳐줄 사회 계급이 없었다. 서구 시민혁명의 주축 세력이 된 시민계급(부르주아지) 같은 것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정약용은 불우했다. 10년 동안 관료 생활을 했지만 그의 생각을 펼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그를 후원했던 정조도 정약용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려 할 때 그만 죽고 말았다. 그 후 이어진 18년간의 유배 생활은 현실을 개혁하려 한 모든 시도를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조선은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간다. 나라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의 원대한 목표를 다시 세워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조선은 그 대가를 100년이 지나지 않아 치러야 했다.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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