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인간을 하나의 소우주라고 일컫듯 지구도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할 수있고 이 지구 환경의 보호와 치유야말로 지구에서 생존해나가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건강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설파한다. 그리고 현재 세계가 조장하는 혼란과 불안이 오히려 세계를 복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 이것은 오히려 "축복받은 불안"이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사회변혁의 물결이 어떠한 사리사욕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지구 환경과 사회정의를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 이름 없는 풀뿌리개인들의 신념이 모여 이루어낸 결과이므로, 결국 우리 모두가 현재 세계의 부조리함을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고 밝은 미래를 가꾸어갈 희망임을역설하고 있다.
■ 저자 폴 호켄
폴 호켄은 사회적기업가이자 환경운동가, 교육가, 연설가, 저널리스트, 저술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폴 호켄은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환경과 사회운동가중 한 명으로 환경과 사회, 경제의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모토로 전 세계 환경보호운동과 사회정의운동을 이끌고 있다. 지은 책으로 『비즈니스생태학(The Ecology of Commerce)』 『성장 비즈니스(Growing a Business)』 『자연자본주의(NaturalCapitalism)』 등이 있다. 그의 책들은 지구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을 존중하는 삶의 방식인 지속가능성을 위한 긍정적 비전을제시함으로써 우리 시대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 2008년 지속가능성 관련 저작물에 수여하는 ‘그린 프라이즈’ 상, 2003년 환경운동지도자에게 수여하는 ‘그린 크로스 밀레니엄 상’ 등을 받았다.
폴 호켄 홈페이지
『축복받은불안』 홈페이지 &
■ 역자 유수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와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영번역학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똑똑한 쥐 vs 멍청한 인간』(공역), 『히스토리세계사』『세계도시파노라마제2권 베이징』 『작은 아씨들』이 있다.
■ 차례
서문
01 축복받은 불안
02 기나긴 녹음
03 기업의 권리,필요한가
04 에머슨의 후예들
05 토착문화
06 우리는 이 제국에 제동을 건다
07 면역반응으로서 풀뿌리 운동
08세계의 복원
부록
감사의 글
축복받은 불안
서문
지난 15여 년 동안 환경을 주제로 거의 천 번이 넘는 강연을 했다. 청중은 사실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척이나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 같은 강연자 입장에선 환경파괴 실태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아무리 어둡고 무서운 미래를 예고한다 하더라도, 청중을 우울하게 만드는 강연을 하고 싶지는 않은 법이다. 그러나 미래에 관해 낙관적인 비전을 제시하려면 건설적인 활동을 야기할 수 있는 그럴 듯한 근거가 필요하다. 현재의 문제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면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펼쳐보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은 늘 어렵다. 하지만 청중은 이러한 나의 지적 모순을 눈감아주었고 도리어 진귀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매번 강연을 마치고 난 후에 몇몇 사람들이 남아서 대화를 나누고 질문을 하기도 하면서 명함을 교환했다.
이들은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비영리단체나 비정부기구 출신들로 주로 기후변화나 빈곤, 산림파괴, 평화, 수자원, 기아, 에너지 절약, 인권 같은 우리 시대의 긴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강연자인 나는 여러 곳을 옮겨 다녔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은 주로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단체들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들이 몸담고 있는 단체들의 수와 다양함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전문 분야에 정통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활기찼다. 신선한 아이디어와 새로운 정보를 주었고 무엇보다 나의 식견을 넓혀주었다.
수년이 지나자 이렇게 받은 명함이 수천 개에 이르렀고 그것을 볼 때마다 ‘진보주의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단체와 기구의 수를 진지하게 세어본 사람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조사가 주류 문화의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았지만 중요한 사회운동이라는 직감이 들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여러 국가의 정부기록들을 살펴보고 다양한 방법으로 국세조사 데이터에서 환경보호 및 사회정의 운동을 하는 단체 수를 계산해보았다. 여기에 사회정의 단체와 원주민 권익보호 단체를 더하니 10만이 넘었다. 조사하면 할수록 특정한 분야나 지역에 관련된 리스트나 지수, 구체적인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낼수록 더 많은 단체들이 보태졌고 그 수는 계속 늘어만 갔다. 결과적으로 생태적 지속가능성(ecological sustainability)과 사회정의(social justice)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 수는 1백만 개(어쩌면 2백만 개까지도)를 훨씬 웃돈다고 볼 수 있다.
이 운동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인권운동의 형태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생겨난 운동이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운동은 주로 불공정과 불공평, 부정부패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사회악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하며 시대가 바뀔수록 전례 없는 새로운 고민거리(거대한 생태적 악화와 급속한 기후변화로 중병을 앓고 있는 지구를 예로 들 수 있겠다)가 생겨나고 있다.
수년 동안 여러 현상들을 연구하고 이 운동을 구성하는 단체들에 대한 데이터를 동료들과 함께 수집해본 결과, 이 운동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거대한 사회운동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무도 이 운동의 규모를 정확히 알지 못할뿐더러 이 운동의 작용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신비롭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응집력 강하고 유기적인 단체들을 자발적으로 조직해서 변화를 목표로 헌신한다.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인지 낙관적인지를 물어오면 내 대답은 항상 똑같다. 오늘날 지구상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듣고도 비관적이지 않다면 정확한 데이터를 접하지 못한 사람이고, 이 이름 없는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고도 낙관적이지 않다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나는 평범하거나 그다지 평범하지 않은 개인들이 이 세계에 품위와 정의, 미덕을 복원시키기 위해 절망과 권력, 무수한 불평등에 맞서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축복받은 불안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 중 하나는 진보를 나타내는 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는 문제이다. GDP 같은 물질적 축적을 나타내는 지표인가, 아니면 지구와 그 속 생명체의 건강 상태인가? 사회정의와 환경보호는 항상 동일한 수준으로 이루어진다. 하나가 지켜지지 않으면 나머지 하나도 보호되지 않는다. 노예와 농노, 빈민은 인간사회의 숲과 토양, 대양이라 할 수 있다. 두 부류 모두 정부든, 다국적 기업이든, 권력자들에게 반복적으로 수탈당하는 잉여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운명은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지구의 잉여물(토양, 대양, 종의 다양성,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룰 것인지에 달렸다. 이 새로운 운동의 조용한 중심은 토착문화다. 고정 중심축이 있어야 바퀴가 돌아갈 수 있듯이, 이 운동도 세계사 속에서 고정축이 될 수 있는 깊은 뿌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토착민들은 지구와의 관계를 불변의 진실된 척도로 삼아 토착문화의 진정성과 자아의 존재의미, 마음속의 평화를 계측한다. 대부분의 토착문화에서는 사회와 환경이 분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사회운동과 환경운동이 다르지 않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와 생각, 존재, 심지어 우리의 꿈조차도 환경에 속한다. 토착문화는 사회정의운동과 환경운동을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지역적이고 친밀하며 친숙한 세계인 토착문화와는 달리 우리는 거인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루에만도 8천 5백만 배럴의 석유를 끌어올려 태워버린다. 270억 파운드 무게의 석탄을 공기 중으로 날려보낸다. 현재 1억 명의 난민들이 집도 없이 지구상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런 악질적이고 불안정한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며, 자신들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도 알지 못한다. 권리와 존중에서 비롯된 의미의 조각들을 쌓아나가지 않으면 건전한 세계적 문명을 이룩할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이 책은 우리를 너무나 힘들게 했던 이데올로기 근본주의보다 더욱 매혹적인 이야기를 인류가 새로이 찾아냈는가를 묻고 있다. 작가 윌리엄 키트리지(William Kittredge)가 적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 명명이 가능한 사회는 스스로의 이야기들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이야기를 뗏목처럼 타기도 하고 지도처럼 탁자 위에 펼치기도 한다. 결국 그 이야기는 항상 시들해지고 다시 수정된다. 세계는 너무나 복잡다단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오래토록 이어질 수 없다. 세계가 스스로의 진화적 잠재력을 깨닫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새로운 이야기와 집단을 필요로 할 것인가? 이야기는 우리보다 더 거대하기 때문에, 그 관대함과 다양함에 기대어 꿈꿀 수 있다. 아이들에게 요정과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먼 곳을 바라보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의 가족과 공동체는 우리들에게 옛 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운동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이자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이다. 2백만, 3백만, 아니 5백만 개의 시민주도형 단체들이 인류의 생활방식과 지배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인식의 전환은 미래의 어느 순간에 이루어질 것인가? 지배적 소수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민주주의란 어떤 모습일까? 우리의 문제들을 완전히 근원까지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고안해낸 세계는 어떤 느낌일까? 우리들 대부분이 머리를 과거로 향하고 있어서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지 못하는 인류발전의 과도기에 막 들어선 것이라면 어떨까? 기본적인 가치들이 세계적으로 다시 퍼져나가 복잡한 사회적 의미망들이 힘을 얻게 된다면 어떨까? 아직 스스로를 운동이라고 깨닫지도 못한 운동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란 이런 것들이지 않을까 싶다.
기업의 권리, 필요한가
1962년 6월 16일, 「뉴요커」지는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이 쓴 ‘침묵의 봄(Silent Spring)’ 시리즈 3회 중 첫 글을 실었다. 『침묵의 봄』에서 기업이 뿌린 독성물질이 환경을 좀먹고 있다는 카슨의 폭로로 인해 처음으로 환경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제 ‘환경’은 1969년에 오염이 심해서 화염까지 일어나 유명해진 쿠야호가 강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엄마의 젖, 아프리카계 미국인, 농부, 빈민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침묵의 봄』은 1세기 동안 이어진 산업과 환경의 공조상태를 깨뜨렸다. 환경운동의 개념적 틀이 확장되어 인권과 모든 생명체의 권리도 보호대상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침묵의 봄』은 환경오염뿐만 아니라 인체 내 오염도 드러냄으로써 환경문제를 긴급한 문제로 느끼게 만들었다. 또한 독성이 생명체를 비롯한 모든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똑같다는 사실도 분명히 했다.
카슨은 기업 그 자체에 대한 반대의견을 피력한 것이 아니라 기업우선주의가 몰고 오는 악영향에 주목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 생물다양성보존협약에 서명을 거부하면서 자신은 기업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유주의자와 개혁론자들은 상업을 매도하고 경제발전을 저해한다는 기업계의 판에 박힌 불평을 그대로 답습했다. 이런 논리는 돌처럼 굳어져서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과거 역사를 언뜻 훑어보기만 해도 기업의 권리가 보호되지 않은 경우는 사실상 찾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업계는 기업이 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자신들의 권리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기업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파괴되는 가치도 만만치 않다라는 반박을 야기한다. 그 가치가 자원 같은 자연환경에서 나온 가치이든, 임금이나 노동조건, 건강 같은 노동자에서 연유한 가치이든, 이런 가치들은 기업의 가치 계산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 레이첼 카슨의 결론은 한번 명성을 얻은 기업은 가치를 파괴하는 제품마저도 생산한다는 것이다. 한 번 정도를 넘은 기업은 계속 공중보건을 위협하게 된다. 기업의 권리는 그것이 다른 기업의 권리를 박탈하거나 시민의 권리와 상충되거나 다른 생명체를 절멸시키는 것이라면 보장받지 못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기업이 사회적 비용을 강이나 마을, 환자, 전 세대에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완전한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기 위해서 시민들이 200년 동안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카슨 시대의 환경보호론자들이나 랭커셔의 방적공, 에머슨 시대의 환경운동가들, 200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케냐의 왕가리 마타이(Wangari Maathai)가 열렬히 호소하는 주장은 동일하다. 그 주장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바로 ‘삶(life)이다. 삶은 가장 근본적인 인권이며 모든 운동들은 삶을 위한 좋은 조건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 조건에는 생계수단과 식량, 안보, 평화, 안정된 환경, 폭정으로부터의 자유가 포함된다. 이 권리가 침해되는 어느 순간이나 어느 곳에서라도 사람들은 분연히 일어설 것이다. 오늘날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 제국에 제동을 건다
시장 근본주의를 뒷받침하는 가정들은 너무나 속속들이 퍼져 있어서 마치 진짜 사실처럼 인식되었다. IMF와 세계은행, WTO에는 비자발적 실업 같은 것은 없다고 믿는 거시경제학자들이 많다. 그들의 경제적 모델에서 수요는 항상 공급과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시장이란 늘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조정하는 뛰어난 기제이기 때문에 실업이나 빈곤, 영양장애 같은 경제적 이상현상들은 반드시 외부요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기 때문에 불균형은 규제나 제약에 의해 야기된다. 이 논리에 따르면 노동조합과 높은 임금이 실업을 초래하고, 빈곤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높은 세금이 부가되어 일어나는 결과이다. 이 거꾸로 된 세계에서는 이상주의가 사회를 해치고 탐욕이 이득을 가져다준다. 우리의 물질적 필요성과 일자리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초국가적 기업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간주된다.
물론 세계화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 효과에는 정치적 경계의 해체, 정치적 행위자의 투명성 증가, 전 세계 사람들의 접속성 증가, 고용과 교육, 소득에서의 새로운 기회증가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이런 이점은 자원과 노동자 착취, 기후변화, 오염, 공동체 파괴, 생물학적 다양성 감소 같은 단점을 가려버린다. 세계화된 시장체제라는 개념에는 지역 경제가 경기순환 사이클에 견디는 능력을 뜻하는 경제적 탄력성이라는 요소가 없다. 또한 경제적 안보라는 요소도 없다. 지역사회가 수천 마일 떨어진 곳의 생산에 온전히 의지하게 되면 그 사회는 패스트푸드 매장과 대형할인점만 즐비한 유령마을이 되어버릴 것이다.
시장자유화 뒤에 깔린 이론은 얼핏 보기에는 명백해 보이는 눈속임이나 마찬가지다. 그 이론은 가난한 국가들이 더 많은 돈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잘 살게 될 것이고, 제품의 흐름이 원활해질수록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의 생활이 윤택해질 것이라는 논리이다. 개발도상국가에서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시장 옹호자들은 자유와 번영에는 시간과 희생이 요구된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누구의 시간과 희생이란 말인가? 비평가들은 자유의 확산이 아니라 부와 권력의 집중을 목격하고 있다. 200개의 세계 최고기업들이 세계 인구의 80%가 가지고 있는 자산의 두 배를 소유하고 있고, 그 자산 기반은 대부분의 세계인이 얻는 소득보다 50배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부의 흐름은 거꾸로 되어 가난한 사람에게서 부유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비교적 인구가 적고 지구의 자원이 풍부했을 때는 미래를 위해 자원을 배분할 시장이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 복잡한 지구에서는 자원배분이 느려지면 아주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인류의 연속성을 위해서는 시장구조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시장구조가 더 길고 느린 시간틀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은 효과적이기는 하지만 실재가 아니라 도구일 뿐이다. 시장은 좋은 하인이 되기도 하지만 나쁜 사장이나 사이비 종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현대 세계무역에 19세기의 자유방임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것은 고혈압을 고치기 위해 동맥을 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빈곤이 줄어들고 환경파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역은 중점적인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무역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집행하느냐이다. 돈을 불리는 것이 주요 목적인 단체가 그 기준을 정하고 집행한다면 지속가능성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민자와 난민, 농민이 도시의 슬럼으로 몰리는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자유무역을 가장 굳건히 받치고 있는 기관은 세계은행이지만 인류가 처한 상황을 가장 비관적으로 보는 기관도 세계은행이다. 세계은행은 2030년이 되면 50억 이상의 사람들이 하루에 2달러도 되지 않는 돈을 벌 것이며 그들 중 20억 명은 대도시의 슬럼가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세계의 미래는 슬럼가의 절망과 분노, 음침함 속에서 배양되고 있다. 진화적 용어로 말하자면 날마다 20만 명의 새로운 이주자들이 도시빈민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군사분석가들은 젊은 층의 인구가 증가하면 범죄가 급격히 늘어난다는 이론을 인용하면서 슬럼가는 사이코패스와 미치광이, 선동가, 민병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Planet of Slums)』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미래의 도시는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나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상상한 것처럼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손으로 찍어낸 벽돌, 지푸라기, 재활용 플라스틱, 시멘트 덩어리, 나뭇조각으로 지어진 도시다. 21세기의 도시는 하늘을 찌를 듯 빛나는 도시가 아니라, 공해와 배설물과 부패로 둘러싸여 더러움 속에 눌러앉은 슬럼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슬럼에 거주하는 10억 명의 빈민들은 9,000년 전 도시생활의 여명기에 세워진 아나톨리아 정착촌 차탈휘위크의 튼튼한 진흙집 잔해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보게 될 것이다.”
면역반응으로서 풀뿌리 운동
인류에 유기체적 은유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집단적인 운동이란 인류가 위협에 맞서 견디는 능력을 보호하고 고치고 복원한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반응능력은 개별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면역체계처럼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억 개 비영리단체의 공동 행위는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질병, 생태계 파괴 같은 독성에 대한 인류의 면역반응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 면역체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에 반하는 요소를 규명하여 그 요소를 포용하거나 중화하거나 제거하는 것이다. 면역체계는 공동체와 문화, 생태계가 피해를 당하면 그 현장에서 추가적인 피해를 막고 상처 부분을 치료하고 복원한다. 선례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운동을 분류하다보면 새로운 종류의 단체를 알게 된다. 사회개척을 위한 단체도, 복원을 위한 단체도, 아주 공상적인 단체도 존재한다.
병원균에 대처하기 위해서 이 운동은 서로 다른 형태의 조직들로 구성되어야 했다. 거기에는 연구소, 공동체 개발기구, 마을과 시민에 기반을 둔 단체, 기업, 조사기관, 연합, 네트워크, 종교단체, 재단 등 다양한 조직들이 존재한다. 각 조직의 범주 안에서도 활동에 따라 수십 가지 형태의 단체들로 나누어지고, 이 활동영역 안에서도 각 단체는 구체적인 중점(아동 권리, 문화 다양성, 산호초 보호, 민주주의적 개혁, 에너지 안보, 문맹 타파 등등)에 따라 갈라진다.
무수한 단체들이 함께 노력해서 심원한 조직적인 문제에 대항할 수 있는가? 조직들이 한 발 물러서서 서로 겹치는 부분은 없는지 찾아보지 않는가? 그들은 충분히 협력하는가? 그들은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 기금을 최대화하기 위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더 큰 전체를 위해 각자의 정체성을 승화시킬 수 있는가? 모두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요소이다. 개별적인 단체들로 이루어진 운동이라고 해서 개별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뉴욕의 소규모단체인 가필드 재단은 1년 동안 미드웨스트 지역에 있는 12개의 비영리단체와 8개의 재단과 함께 협력해서 그린에너지(대기오염을 일으키지 않는 깨끗한 재생에너지-옮긴이)의 소비가 급속도로 늘어날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을 만들어내고 실천했다. 모두 조직적인 접근방법은 아니었지만 소속 단체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할 수 있는 조치로, 낡은 화력발전소를 폐쇄하고 새로운 화력발전소에 대한 허가를 중단하며 재생에너지 생산을 늘리고 에너지 효율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간간이 회담을 가지면서 각자 맡은 임무를 해나갔다. 그러다 더 많은 비영리단체들이 뜻을 같이 하게 되어 하나의 통일된 비전이 제시되었다. 미드웨스트 그린에너지 경제가 활성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80% 줄인다는 목표가 설정되어 기후변화 문제도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미래에 희망을 제시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인류의 모임일 것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이 세계의 상처를 모두 치료할 수는 없기 때문에 중앙집중화되지 않고 각각의 대표성을 지닌 모임이 늘어나는 것이야말로 낙관적인 미래를 예상케 해준다. 면역체계는 신체에서 가장 복잡한 체계이며 인간문명은 유기체들이 가장 복잡하게 얽힌 모임이다. 이 운동은 단체들이 가장 복잡하게 연합된 조직이다. 무정부주의자, 억만장자, 거리의 예술가, 과학자, 청년운동가, 토착민, 외교관, 컴퓨터 괴짜, 작가, 전략가, 농민, 학생 등이 공통된 목표를 향해 함께 일하는 모습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 인간의 욕구를 증명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같은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서로 협력하게 된다. 이 운동은 따로 떨어진 가장자리의 세력들을 연결하여 우리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함께 공통의 걱정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구와 사람들이 받는 끝없는 부당함과 상처에 잘 대응하려면 개인으로서 우리의 기능과 잠재력을 이해한 후에 공동의 행동을 벌여야 한다. 항원은 우리 몸의 세포 표면 위에 살짝 내려앉는다. 바이러스와 병균은 고유의 항원을 가지고 있고 우리 몸은 그 항원이 이물질임을 경고 받는다. 수백만 개의 서로 다른 항원은 각자 다른 미생물에 붙어서 우리 몸으로 들어올 길을 찾는다. 비슷하게 수백만 개의 서로 다른 항체는 항원에 톱니바퀴처럼 딱 맞붙어서 침입자를 중화하는 동시에 다른 면역세포에게 도움의 신호를 보낸다. 이것이 면역반응의 시작이다. 이 운동을 구성하는 수십만 개의 단체들은 권력이라는 병원균에 맞붙는 사회적 항체들이다. 그 면역반응이 현재는 아주 많이 불완전해서 많은 실패를 거듭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함께 작용해야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지구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온 방식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