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석유 위기는 오지 않는다고 명쾌하게 결론 내리고 있다. 이 책에는 석유 위기가 오지않는 여러 가지 이유를, 지금까지의 석유의 역사를 근거로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게 증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석유 시장의 역사는 그 시작 이래로끊임없는 불황과 호황의 반복이었다. 그때마다 온 세계는 심리적 불안에 휩싸였고, 이는 각국의 정치적인 결정에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회의론자역시 그때마다 석유 위기를 경고했지만, 결국 역사는 계속적인 호황과 불황을 반복할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우리는 지금 석유가 부족하지도않고, 석유 산유국이 석유로 공갈협박을 할 일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이 흐름을 잘못 파악하고 오해하여 잘못된 정치적 선택을 한다면,이것이야말로 석유를 통해 일어난 가장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한다.
■ 저자 레오나르도 마우게리
이탈리아 에너지 회사ENI의 전략 및 개발 담당 수석 부회장이다. 이 회사는 세계 60대 석유회사에 올라 있으며,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에너지 회사다. 그는세상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인 석유에 관한 글을 「뉴스위크」「포린 어페어」「사이언스」「월스트리트 저널」 등에 기고한 바 있다.
■ 역자 최준화
오클랜드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국제경영학을 전공했다. 국제경영으로 졸업 과정을 수료했다. 『한국 농업의 주요 지표(농촌 진흥청)』 『식약청 규정집』 『품질 공정(한국 노바티스』『어학 교재 시리즈(에듀박스)』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 차례
머리말
제1부 믿을 수 없는 석유 시장의 역사
1장 존 D.록펠러의 저주받은 유산
2장 가솔린 시대와 석유 제국주의
3장 아라비아 석유의 분할
4장 1930년대 석유의 분할
5장 냉전에 대한 공포, 미국과 아라비아의 유대
6장 이란의 비극과 7대 회사 카르텔
7장 석유 황금시대와 그 한계
8장 석유와 아랍 민족주의의 폭발
9장 제1차 석유파동
10장 제2차 석유파동
11장 카운터 쇼크
12장사막의 폭풍, 걸프전쟁
13장 소련의 파멸과 불안한 황금의 땅 카스피 해
14장 석유 가격 붕괴와 대형 합병
15장21세기 첫 번째 석유 위기
제2부 석유의 오해, 그리고 미래의 문제점
16장석유가 고갈될까?
17장 석유 속 비밀
18장 석유 매장량과 생산의 수수께끼, 조절 방법의 연구
19장 석유의 질과 가격,소비 행태에 관한 문제점
20장 석유에 대한 불안전한 예측과 불확실한 석유 대체재
21장 아랍, 이슬람과 석유 안보의 신화
부록
참고
약어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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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으면 하는 석유의 진실
냉전에 대한 공포, 미국과 아라비아의 유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석유는 군사 전략뿐 아니라 현대 경제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자원으로서의 석유는, 여전히 세계 기본 에너지 수요의 80%를 공급하는 석탄보다 훨씬 뒤처져 있었다. 미국은 하루 360만 배럴로 세계 하루 생산량 570만 배럴의 60% 이상을 공급하면서 석유 생산의 중심에 있었다. 중동은 아직 하루 33만 배럴을 생산하는 초기 단계에 있었고, 이는 세계 2, 3위 생산국인 소련과 베네수엘라에 못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은 이런 상황을 뒤집었고, 석유가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떠오르도록 길을 열었다. 또다시 석유 확보와 부족에 대한 공포가 이런 역할을 형성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석유는 세계 많은 전쟁터에서 지상 공격과 점령, 공중 군사 행동, 해군 전투의 승리를 결정하는 카드가 되었다. 서로 대립하는 강국들은 전략의 일환으로써 석유가 풍부한 지역을 장악하거나 적들이 이들 지역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 모든 것이 전후 전략가들에게, 충분하고 안정된 석유 공급 없이는 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생각을 깊이 새기게 했다. 이러한 인식이 처음이자 가장 극적으로 시작된 곳은 미국이었다.
탐사와 생산에 대한 투자는 1937년부터 회복되기는 했지만, 세계 대공황과 1930년대 초의 가격 폭락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석유의 범람 및 싼 가격은 새로운 유전을 개발하고 신기술을 시행하는 데 사용할 모든 동기를 없애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많은 전문가들과 분석가들은 미래에는 석유 확보가 더 어렵고 한정적이며 많은 비용이 들 것이라고 제안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석유 기근과 값싼 석유의 종식에 대한 잘못된 논쟁과 꼭 닮았다. 결국 새로운 불황 국면은 상황을 거꾸로 가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극적인 변화였다.
미국은 예기치 못한 수요를 충당하는 데 필요한 석유를 공급할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했다. 철강 같은 중요 물자의 부족은 늘어나는 새 굴착과 송유관 건설을 제한했다. 더구나 산지에서의 석유 가격은, 전쟁 비용을 제한하려는 의도로 1942년 정부가 동결시켰다. 이 조치는 이미 높은 철강 가격으로 인해 위태로워진 새로운 투자를 위축시키는 부작용이 있었다. 연합군의 전쟁 수행이 거의 미국 석유 자원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전례 없는 석유 고갈을 불러 일으켰다.
냉전 때문에 세계는 다시 불안정한 기류에 휩싸였다. 그로 인해 미국이 서방 세계에 대한 장기적인 석유 공급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 명백해졌다. 1948년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석유 수입국이 되었는데, 이것은 국내 생산만으로 자국의 소비 수요를 맞출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공산 세계와의 충돌이 임박한 불안한 상황을 가정하면, 이것은 자유무역에 개방된 세계에서 가졌던 것보다 미국의 집단 심리상태에 훨씬 더 영향을 미쳤다. 미국 전략가들의 마음속에 이런 상징적인 상황은 미국이 에너지 독립을 영원히 상실함을 의미했다. 또한 유럽 석유 수요 중 80% 공급자로서의 전통적인 역할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과 사우디의 새로운 제휴는 곧바로 사우디와 지중해를 잇는 첫 번째 송유관 건설로 이어졌다. 그리고 1949년 가을 트랜스 아라비안 송유관이 사우디산 석유를 레바논의 시돈 항으로 운반하기 시작했다. 이런 중요한 업적들도 1948년 석유다국적기업이 베네수엘라에 부여한 획기적인 계약 방식을 알게 된 이븐 사우드 왕의 기대를 달래지는 못했다. 50 대 50 이윤 배분 계약으로 알려진 이 방식은, 거의 25년간 지속되어온 석유 회사와 산유국 관계에 중요한 변혁을 의미했다. 이 새 방식을 알게 된 이브 사우드 왕은 곧 아람코에 이 방식을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1950년 후반 사우디아라비아는 50대 50 이윤배분 방식을 부여받았고, 이것은 바로 다른 아랍의 산유국으로 확대되었다.
새로운 이윤배분 방식과 함께 또 다른 중대 혁신이 일어났다. 소위 공시가격제라는 가격 결정 방법이었는데, 이는 20년 이상 시행되었다. 석유 가격을 공시하는 회사들의 관습을 이용해 산유국들은 이윤배분의 참고용으로 고정된 공시가격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 가격은 회사와 산유국의 이해를 강화하는 실제 시장 조건과는 관계없었다. 이는 일종의 계약으로써 인위적인 도구가 되었다. 사실 여러 해 동안 석유 회사들은 산유국과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그들이 합의한 공시가격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실제 가격이 하락했을 때 손실을 부담하는 쪽을 택했다.
제2차 석유파동
OPEC은 공식 원유 가격을 특정 회의에서 결정했다. 그럼으로써 과거에 세븐 시스터스(7대 석유회사)가 맡았던 가격 결정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73년 10월 그들은 처음으로 그 가격을 계약에 적용했다. 하지만 시스터스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시스터스와는 달리 카르텔은 결속력 및 내부 통제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균형 있고 현실적인 가격을 운용하는 능력이 약화되었다.
석유 수요가 차츰 늘어감에 따라 세계적으로 새로운 소비 형태가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PEC 국가들은 석유 소비가 두드러진 상승세를 보일 거라 예측했고, 카르텔이 원유 시장을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이에 OPEC은 1975년 봄, 벌써 총생산량의 35%를 삭감해야 할 정도로 과잉생산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OPEC은 원유 가격 붕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석유 소비국들은 과잉생산에도 불구하고 원유 부족 시기가 다가올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재앙론자들은 다시 절망과 비관의 불길을 퍼뜨리느라 바빴다. 1977년 4월 미 중앙정보부는 영향력 있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OPEC의 잠재력이 한계에 이르렀고 소련 석유 생산이 이미 정점에 와 있기 때문에 세계 석유 수요 증가가 생산을 추월하게 될 거라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비관론자인 국제에너지기구 역시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세계가 1985년까지는 전적으로 OPEC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OPEC의 정책을 세우는 데 전지전능한 아랍 국가들은 석유를 선진 경제의 순환 체제를 파괴시키는 바이러스처럼 이용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서구를 제압하려는 못된 속셈을 드러냈다. 이런 전망과 분석에 과잉 반응했고 비이성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또한 OPEC은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카르텔로 행동했다. 이에 석유 가격은 제1차 석유파동 이후 계속 상승해서 1978년에는 약 13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석유 가격이 정상적인 시장 가격에서 이탈하자 대부분의 OPEC 국가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미 제2차 석유파동의 주요인들이 조용히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산유국들은 상승장을 기회로 이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몇 십 년 동안 지켜왔던 정기 계약 원칙에서 벗어나 소위 ‘현물 판매’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소량의 현물 석유 시장은 존재했지만 그것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1970년 초반에는 전체 국제 석유 거래량의 1~2%밖에 미치지 못했다. 1978년 현물 시장은 여전히 전체 석유 시장의 3~4%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범위는 점차 넓어졌다. 많은 OPEC 국가가 장기 계약에 한정된 양보다 많이 팔기 위해 현물 시장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현물 가격은 시장 심리에 의해 OPEC이 지정한 공식 가격을 다시 한 번 크게 뛰어넘었다. 세계 곳곳의 몇몇 석유 회사는 미래 석유 부족의 재앙적인 예측에 촉진된 상태였다. 그들은 어떤 가격이든 망설이지 않고 석유에 입찰했다. 뿐만 아니라 석유 분야의 거의 모든 당사자가 미래 석유 부족을 대비해 석유를 사들여 비축했다. 시장의 야수들은 이런 심리를 왜곡했고, 이로써 제2차 석유파동을 이미 만들고 있었다. 그것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촉매뿐이었다. 이 촉매는 한 번의 반짝임이 아니었다. 2년 동안 계속된 중요한 사건들의 폭풍이었다. 이 폭풍으로 인해 석유 가격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건의 전개는 1978년 말에 시작된 이슬람 혁명에서 시작되었다. 이란 국가 전역에서 일어난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정권에 맞선 혁명이었다. 복잡한 상황은 드디어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불가사의한 아야톨라 호메이니라는 정치적 촉진제를 맞았다.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명명된 9월 8일 테헤란에서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대량 살육 후 이란의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란 곳곳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그들은 호메이니의 귀환과 국왕 폐지를 요구했으며, 석유 관련 노동자들은 대규모 파업에 들어가 이란 석유 생산을 마비시켰다. 1979년 1월 국왕은 이란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팔레비 정권이 무너지면서 석유 세계는 공황에 빠졌다.
혁명 전 이란의 생산량은 하루 550만 원유를 조금 넘기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는 당시 전 세계 생산량의 10%가 조금 안 되는 양으로 세계 네 번째 규모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두 번째 규모의 석유수출국가였다는 사실이다. 1979년 1월 이란 생산량은 하루 4만 배럴로 급하강했고, 4월에는 하루 400만 배럴로 되돌아왔다. 기타 출처의 추가 생산량 200만 배럴을 고려했을 때 이 공황 속에 일어난 최종 손실량은 당시 하루 6,400만 배럴에 이르는 총 석유 수요의 5.5%였다. 세계 많은 기업의 어마어마한 석유 창고량에 비하면 석유 결핍 기간은 짧았고 규모 또한 미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년 초 몇 달은 새로운 OPEC 공식 가격 상승을 불러왔다. 이는 1981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뒤이은 사건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우선 1979년 3월 펜실베이니아 스리마일 섬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대부분의 원자로가 멜드다운(정전 사태로 원자로가 녹는 것)되었다. 이 사고는 많은 산업 국가를 실망시켰다. 원자력 에너지는 석유 의존도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되고자 갈망했던 석유 대체에너지였다. 이런 원자력 에너지의 활용성에 대한 믿음이 흐려진 것이다.
3월에는 호메이니가 이끄는 새로운 신권 정치를 예고했다. 이란 정부의 선언은 종교 무력세력과 이란을 비롯한 중동 아시아 전역의 반서구적 감정의 급진화를 예고했다. 호메이니 혁명 성공은 아랍 집단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호메이니 혁명은 정치적 계획을 완성시키고 중동의 새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종교라는 도구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 결과 이란 밖에서도 긴장과 변동이 일어났다. 1979년 11월 학생 및 투쟁자가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을 점령하고 50명이 넘는 미국 직원을 444일 동안 인질로 잡았을 때 정점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이란은 미국과 심각한 대립에 놓였다. 몇 주 후 500명이 넘는 과격 이슬람 교인이 메카의 대 모스크에 유례없는 공격을 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반란군은 제압당했지만 이 사건은 이란 혁명이 과격 종교 집단에 미친 잠재적 영향을 보여줬다.
12월 27일 이란과 1,000km의 국경을 나누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이 침범했다. 이로서 페르시아 만 상황은 정점에 이르렀다. 소련의 움직임은 당시 집권 중인 아프간 공산당을 지지하고 지방 부족과 연합하며, 소련 남단에 이슬람교도 인구를 확대시킬 위험이 있는 무자헤딘, 즉 이슬람 집단의 격변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위험성은 또한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일으킨 혁명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다. 이는 서구의 이해관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분석가와 정책가에게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무서운 경고처럼 울려 퍼졌다. 그들은 모스크바의 행동이 중부 아시아에서 펼쳐질 ‘광대한 게임’의 첫 걸음일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들은 소련의 궁극적인 목표가 페르시아 만과 엄청난 석유 저장고일 거라 생각했다. 이 사건에 노한 카터 대통령은 1980년 1월 ‘카터 독트린’이라는 발표함으로써 대응했다. 카터 독트린 발표에 잇따라 미국은 중동으로 파견될 수 있는 ‘신속배치합동수행병력’을 창설함으로써 페르시아 만에 기나긴 군사 증강을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석유 시장은 강자의 법칙에 너무 휘둘렸다. 그리고 OPEC은 자신들이 그 강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세계 경제난 및 대부분의 산업 국가가 석유 소비를 줄이기 위해 시행한 정책은 잊은 채였다. 1980년 9월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서 전쟁이 터졌다. 이에 세계 시장에서 두 나라 수출 합산인 약 300만 배럴이 줄어들면서 석유 가격은 어리석은 마지막 가격 반등을 신고했다. 현물 시장이 역동적으로 증가해 국제 석유 거래의 10% 가량을 차지했다. 치솟는 현물 가격에 흥분한 OPEC은 그 가치를 그들만의 공식 가격에 반영했다.
엄격히 따지면 현물 가격 인상은 OPEC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영국국립석유회사(BNOC)마저도 1979년부터 현물 가치를 반영해 석유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다. 유명한 OPEC 정세 전문가는 이렇게 논평한 바 있다. ‘BNOC, 즉 영국 정부가 OPEC처럼 처신하는데 어떻게 OPEC이 가격 상승의 고리를 끊으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결국 두려움은 공황으로 바뀌었다. 각종 비관적인 예측이 이어졌고, CIA가 재앙론자들의 포괄적인 결론을 요약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CIA의 분석 및 불쾌한 예언자의 어두운 관측과는 달리 석유를 위해 생사를 가르는 전투는 필요 없었다.
석유 가격 붕괴와 대형 합병
1997년 석유 가격은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예상은 압도적인 수요 증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997년 11월 29일 자카르타에서의 장관급 회담에서, OPEC은 1998년 처음 여섯 달 동안 하루 총생산량을 약 250만 배럴 늘리기로 합의했다. 이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는 높은 생산 할당량 및 베네수엘라의 과다생산에 대한 부분적인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OPEC이 이미 공식 할당량 이상을 생산하고 있어서 시장에는 석유가 넘치고 있었다. 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석유 가격은 그 후 수개월 동안 하락했고 파멸적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OPEC은 역경을 딛고 부활했다. 1999년 3월 이 기구는 비엔나에서 생산 감축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이번에는 멕시코, 노르웨이, 오만, 러시아와 같은 다수의 비OPEC 산유국도 참여했다. 그들 역시 생산 감축을 수용했다. 생산 감축에 대한 지지가 거의 90%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는 불과 몇 개월 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석유 가격은 급속히 회복되었고 1999년 말경에는 위기가 해소되었다. OPEC은 급작스러운 석유 가격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국제 석유회사들은 아직도 터널 끝을 지나지 못하고 있었다. 1990년대 내내 그들은 생존을 위해 열심히 싸웠으나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1980년대 시작된 산업 및 금융 개편이 계속되어 조직 및 인력을 감량하고 있었다. 비용 삭감과 자산 처분은 지속적인 과제였다. 투자자들은 낮은 석유 가격 및 가치 창조 능력에 대해 몹시 회의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이미지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 안 좋은 것은 금융 시장 역시 석유 분야가 성장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여 전반적으로 다른 투자로 이동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석유 산업은 단기간에 가장 높은 수익성을 요구하는 재정적인 명령에 굴복했다. 특히 회사는 투자자와 분석가가 브렌트 석유의 장기적인 가격을 명목상 약 16달러로 이용하여 가치 창출을 계산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것은 석유가 단지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다는 강력한 믿음에서 비롯된 비현실적인 시각이었다. 석유 가격도 결국 다른 원자재처럼 하락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이러한 가격 시나리오에서 회사들은 자본이익률(ROCE)을 가중평균자본비용(WACC)보다 적어도 4~5포인트 높게 창출하도록 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7~8%였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회사들은 거친 파도를 계속 항해해 나갔다. 그들은 불필요한 사업 및 산업용 부지를 헐값에 매각하고 비용을 대폭 삭감하며 자산 생산성을 쥐어짰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과거의 잘못 및 낮은 석유 가격 안에서 생존하는 어려움을 더욱 실감해야 했다. 석유 생산은 물론 석유 산업의 다른 전통적인 주요 부분도 위협받고 있었다. 아시아와 중동에서의 활기찬 새 공장 건설은 석유 정제 및 화학제품 생산능력을 팽창시키고 석유 회사들이 대단위 감산으로 얻고자 했던 효과를 막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두 부분에서의 수익은 빈약했다. 해가 갈수록 그들은 산업 국가가 부과하는 석유 제품에 대한 새로운 환경 규제로 인해 타격받았다. 30년 전 시작된 환경 문제가 이제는 세계 거의 모든 정부의 최우선 사항이 되었다. 이런 민감성을 잘 나타낸 것이 1997년 12월 84개국이 서명한 ‘교토의정서’다. 이 중 39개국이 2008년~2012년 자신들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로 했다. 그때가 되면 에너지 회사의 전통적인 개념 또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산업 분야의 새 모델은 언론 및 대학은 물론 세계의 투자은행, 재무 분석가, 무역업자, 전략 컨설턴트를 유혹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회사가 제안한 모델이었는데 하룻밤 사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회사의 이름은 엔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엔론은 석유 회사가 아니었고 천연가스, 전력 운송 및 배송 무역이 주 업종이었다. 엔론은 1980년대 미국의 천연가스 및 전력 시장을 휩쓴 극적인 소동을 이용해 급속히 성장했다. 엔론은 몇 가지 새로운 방법 덕분에 미국 가스시장 규칙들을 스스로 재편하는 데 성공했다. 즉 대단히 융통성 있는 계약, 수백 명의 공급자 및 소비자의 수요를 수용할 수 있는 가격과 물량 방식, 복잡한 수학 방정식에 기초한 거래 절차 및 고도의 파생자금기법을 이용한 총체적인 위기관리시스템이 그 방법이었다.
엔론의 보배는 텍사스 회사의 활동 특징이 된 ‘가스은행’으로 후일 가장 주요한 자회사 ECTR이 되었다. 엔론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90년 설립자 케네스 레이가 맥킨지컨설팅회사의 전직 파트너였던 제프리 스킬링을 ECTR의 최고경영자로 선임하면서였다. 1990년 엔론에 합류할 때 스킬링은 양자택일 조건으로 레이에게 마크 투 마켓이라는 회계 시스템을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후일 엔론이 몰락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본질적으로 마크 투 마켓 시스템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의 기본 원리는 자산과 수입, 부채를 당시의 가치 대신 현재 시장 가치에 따라 기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 회계를 나타내는 다른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마크 투 마켓 시스템은 투자자를 속이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게다가 자회사에 참여했을 때 지분의 최대 가치까지 기장할 수 있었다.
석유 회사도 이제 새로운 진화론자가 주문하는 우선 대상에 포함되었다. 진화론자들은 시장의 극적인 진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체는 분명 소멸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부분의 석유 회사 모임에서 분석가와 컨설턴트는 방향감각을 잃은 회사에게 대규모적으로 사업 모델을 바꾸거나 마음을 여는 데 있어 어떻게 엔론의 경험을 이용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물, 전기, 천연가스, 심지어는 통신시설과 다른 많은 소비자 지향적인 서비스의 통합 같은 기이한 전방위적 접근방식을 다중 공익사업 모델로서 제시했다. 그러면서 석유 회사는 최종적으로 교과서적인 전략인 ‘통합’으로 반응했다.
1998년 여름 BP와 아모코가 합병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우호적인 미국 회사 인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2월에 괄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었다. 7대 석유 회사였던 액손과 모빌의 합병이었다. 1999~2001년 토털, 페트로피나 그리고 엘프의 합병, BP, 아모코 그리고 아르코의 합병, 셰브론과 텍사코의 합병이 이루어졌다. 작업의 통합 금액은 천문학적이었다. 거의 금액은 2,750억 불에 달했다. 그 후 다른 많은 소형 규모의 합병이 뒤따랐다.
광범위한 통합의 결과 새로운 부류의 거대 석유 회사가 출현했다. 소위 슈퍼메이저라고 불리는 액손모빌, 쉘과 BP였다. 이들과 함께 새로운 그룹의 국제적인 석유 회사들이 나타났다. 여기에는 토털피나옐프, 셰브론텍사코, 에니 그리고 코노코필립스가 포함되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합병된 이들 7대 석유 회사는 이전의 7대 석유 회사의 허약한 옛 모습에 불과했다. 전부 합해 그들은 세계 석유 매장량의 5%, 세계 석유 생산의 15~18%만을 장악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석유 회사들은 1990년대 대부분의 서구 주식 시장을 특징짓는 비이성적인 풍요로움과 그늘진 구석으로 내몰렸다. 이들은 2001년 말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급작스런 붕괴는 소위 새 경제에 대한 투자자들의 예상을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하이테크, 인터넷 그리고 통신 관련 주식의 대폭락을 야기했다. 이 거대한 파멸의 축소판은 미래 에너지 회사의 상징으로 부상했던 엔론이었다.
그렇지만 엔론과 금융 시장의 붕괴가 석유 회사에 대한 투자자의 태도 혹은 투자자의 투자계획 접근방법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수년 후 이러한 문화는 석유 산업에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석유 전문가들은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까지 어떤 예상도 하지 않았다.
석유가 고갈될까?
석유 산업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석유의 가용량에 대한 거짓 경고는 세계 위기 때마다 되풀이되는 이야기다. 20세기에는 세 종류의 석유급변가설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시작되어 1930년 엄청난 석유 과잉으로 사그라졌고, 두 번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시작되어 몇 년간 지속되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석유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사라졌다. 20세기의 마지막 석유급변설은 두 번의 석유 파동으로 최고조의 긴장에 이른 1970년대에 시작되었으나 1986년에는 상황이 급격히 반전되었다. 그러나 과거 경험은 석유 고갈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데 실패했고, 석유 부족 기간 이후의 석유 과잉공급은 사람들에게 절약정신을 주기 어려웠다. 치솟는 석유 가치와 함께 가격 폭락은, 이 특별한 시장을 조정하는 기본 규칙인 비신뢰성을 알리는 데도 실패했다.
2000년에 이르자 세계 원유 부족은 더욱 강조되었고 전 세계에 퍼졌다. 하지만 이에 대한 두려움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현재 석유 종말론자는 풀리지 않는 땅속 비밀을 알아낸 것처럼 그럴 듯한 모형과 공식적인 통계 자료를 제시하여 사람들을 설득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견해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 누구도 지금 땅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땅속을 파고 들어가 접근할 방법, 또는 그 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석유 자원이 얼마나 있는지 측정할 방법은 없다. 다음 분류들을 살펴보고 나면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조사함과 동시에 현재 석유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의 예측이 무엇이든지 간에 공통분모는 있다. 바로 휴버트 모델이다.
휴버트의 핵에너지와 화석 연료에서 제시된 이론을 바탕으로 개념적으로 보면 아주 단순하다. 처음의 석유 엔지니어들이 따른 경험적인 지식에 따라 휴버트는 성공적인 시추지로 알려진 석유 생산지의 생산 곡선을 시간 들여 관찰했다. 0에서 시작해 매장량의 반을 뽑아내어 최고점에 도달할 때까지, 생산은 시간이 갈수록 늘었다. 이것을 중간고갈점이라고 한다. 휴버트는 이 단계에서 생산이 성장과 같은 비율로 감소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석유 생산의 대칭적인 상승과 하향이 종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곡선 아랫부분이 석유 매장지의 누적 생산량을 보여준다. 이는 그 지역에 있는 ‘궁극가채매장량(URR)’으로 채취의 경제적, 기술적 조건은 무시하고 물리적으로 추출 가능한 매장량을 의미한다. 결론은 석유 매장지가 충분히 조사된다면 휴버트 곡선은 언제 석유가 고갈될지 언제 최고 생산량 시점에 도달할지 예측 가능하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사실 휴버트 모델과 다른 예측 모델의 문제점 중 하나는 생산과 소비에 영향 미치는 생활습관의 변화, 가격 변동 그리고 생산과 소비에 영향 미칠 수 있는 기술의 진화 등으로 영향 받은 정치적인 결정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자원의 규모나 순서조차도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다른 어떤 것보다 자원의 측정값이 정확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미국에 대한 휴버트의 성공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휴버트의 제자들은 미국의 미래 석유 생산량을 예측하기 위해 대칭적인 곡선을 선택했다고 강력하게 강조하지만, 휴버트는 단지 학계에서 통용되는 이론을 따랐을 뿐이다. 바로 가장 간단한 설명이 좋다는 오캄의 면도날이론을 적용한 것이다. 그 이론은 휴버트 모델에 맞아떨어졌다. 미국 석유 산업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으며, 지질학에 대한 정보도 풍부했고, 예상치 못한 미국 석유 정책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 대륙에 대한 그의 예측이 증명되자 그는 영웅이 되었다. 자만심에 가득 찬 휴버트가 자신의 이론을 세계 석유 시장에 적용하려고 했을 때 그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 예로 1970년대 초 그는 1980년 중반에 세계가 석유 생산 정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2000년에는 약 34만 배럴로 감소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실제로 2000년에는 약 75만 배럴이었다.
사실 휴버트 곡선은 지형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제공되는, 여러 가지 기술로 인해 집약적으로 개발된 지역에서만 적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지형학적 지식의 증가와 기술의 진보 그리고 시추 기술의 발달은 여러 정책과 석유 가격의 변동과 더불어 시간이 걸릴뿐더러 생산정점은 감소되거나 늦어질 수 있다. 그래서 종 모양 곡선의 감소기는 휴버트 이론과는 달리 응용 가능성이 있어 변경될 수 있다. 이미 성숙한 미 대륙조차도 아직 많은 양의 석유가 묻혀 있을 수 있다. 경제적 혹은 기술적인 이유로 오늘날까지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다.
휴버트 자신뿐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 또한 그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휴버트 이론의 근본적인 오류는 수정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임박한 석유 위기를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다. 우리 모두 석유뿐 아니라 어떤 문제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객관적인 사실만 가지고 대중을 선동할 수는 없다. 석유 고갈을 걱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예측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