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조건

Team Of Rivals

   
도리스 컨스 굿윈(역자: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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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북스
   
28000
2007�� 09��



■ 책 소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정부"라는 연설로 유명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을 통합과 화해의 리더십으로 조명한 책. 그는 남북전쟁 때 라이벌에게 내각의자리를 내어주는 용단을 내렸고, 결국 정적에게서 최고의 역량을 이끌어내 나라를 국난에서 구하였다. 책은 여러 당파를 반영하는 신문 기사와 주요정계 인사들 간에 주고받은 편지, 라이벌들과 그 가족들의 세세한 일기와 회고록, 의미 있는 사학자들의 글을 망라하는 방대한 인용 자료를 통해링컨을 다차원적으로 분석해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전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링컨이 펼친 리더십을"포용"과 "관용", "미래지향"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벽지의 무명 변호사였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유망한 라이벌들과 어떻게 연합했는지를 통해우리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또한 대통령 선거, 남북전쟁, 노예해방 등 다양한 사건 및 정책, 링컨과 함께 했던여러 사람의 인생을 다루면서, 링컨이 어떻게 사람을 다스렸고, 어떻게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길이 남을 수 있었는지도 보여준다.국가적 위기 속에서 더 빛을 발한 링컨의 리더십을 통해 진정한 리더, 진정한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 저자 도리스 컨스 굿윈(Doris kearnsGoodwin)
1964년 콜비 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린든 존슨 대통령의 보좌관을지냈으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10년간 ‘미국 대통령의 통치’ 등에 관해 가르쳤다. 『No Ordinary Time』으로 1995년에 역사 부분의퓰리처 상을 탔으며, 그밖에 『Wait Till Next Year』『The Fitzgeralds and the Kennedys』『LyndonJohnson and the American Dream』 등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NBC방송과 <짐 레러와의 뉴스 시간&&의 정치분석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5년에 『권력의 조건(Team of Rivals)』으로 링컨상을 탔다. 현재 남편 리처드 굿윈과 함께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 살고 있다. 

■ 역자 이수연
상명대학교에서 교육학과영어교육학을 전공했고,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일요신문 외신부에서 해외정보작가로 근무하다 현재는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옮긴 책으로는 『반 고흐 vs 폴 고갱』『고야, 영혼의 거울』『삶은 유한하다』『환상』『수백 가지 신의 얼굴』『왓슨, 내가 이겼네』 등 다수가있다.


■ 차례
서문 - 마음을 얻은 사람, 링컨


1부 링컨과 그 라이벌들 
1장 결전의 날 아침 :1860년 5월 18일, 대통령 후보 공천일 
2장 성공에 대한 열망 : 변호사가 되기까지 
3장 정치의 유혹 : 정계 진출
4장 고난이라는 이름의 희망 : 실패한 하원의원 시절 
5장 리더의 제1조건, 화술 : 격동의 50년대 
6장 오직 원칙으로싸우다 : 더글러스와의 논쟁 
7장 중도주의의 힘 : 대통령 후보 공천 초읽기 
8장 정의는 설득이다 : 시카고 최후의 결판
9장 길, 없다면 만들어라 : 대통령 당선 
10장 최고의 라이벌로 최선의 팀을 만들다 : 내각 구성 
11장 비전을 향하여: 정치의 중심 워싱턴으로 


2부 역사가 된 링컨, 화해와 통합의 리더십 
12장의무 앞에서 정직하리라 : 남북전쟁 발발 
13장 먼저 자신을 다스리다 : 불 런 전투의 참패 
14장 이타적 가슴으로 무장하다 :프레몽 장군의 선포문 
15장 그래도 행복하라 : 아들의 죽음 
16장 운명 공동체 앞에 서서 : 반도 작전 실패 
17장 고통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 : 노예제 폐지를 위한 노력 
18장 불평불만이 부른 재앙 : 내각의 위기 
19장 사랑은 옮음을 보고기뻐한다 : 노예해방 선언서 서명 
20장 관대함으로 충성을 끌어내다 : 게티즈버그와 빅스버그 대승 
21장 시대가 요청하는 진리를파악하라 : 스탠턴의 대담한 작전 
22장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 게티즈버그 연설 
23장 후퇴는 없다 : 링컨의재공천 
24장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 싸우라 : 재선 성공 
25장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 노예제의 종말 
26장 링컨,역사가 되다 : 링컨의 죽음 


에필로그 - 역사가 요청하는 리더십 
옮긴이의 말





권력의 조건


고난이라는 이름의 희망 : 실패한 하원의원 시절
워싱턴에서의 실패와 희망

1848년 9월, 링컨은 의회가 휴회 중일 때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 운동에 뛰어들었다. 휘그당의 대통령으로 지목된 멕시코 전쟁의 영웅 재커리 테일러를 위해 북동부 전역에서 선거 운동을 했던 것이다.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에 초대도 없이 도착한 그는, 마침 연설가가 필요했던 휘그당 집회 의장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링컨의 이 즉흥 연설을 보도한 보스턴의 「데일리 애드버타이저」는, “지적인 얼굴을 가진 키 큰 의원이 냉철한 정신과 판단력을 보여주었다.”고 전하면서 “뛰어난 웅변과 적절한 예로 청중을 사로잡았다.”고 평했다. “그가 연설을 마치자 청중은 일리노이 주를 위해 만세삼창을 했으며, 그 주 출신의 능변가 휘그당원을 위해 한 번 더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보스턴의 트레몬 템플에서 열린 대규모 휘그당 대회에서 선거 운동을 하는 동안, 링컨은 슈어드와 처음으로 만났다. 두 사람은 넓은 홀의 똑같은 연단에 앉아 있었다. 뜨거운 관심 속에서 슈어드가 먼저 연설을 했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부분의 휘그당 연설가들이 국내 개선과 관세, 국유지 문제에 집중했던 반면, 슈어드는 노예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테일러가 좋은 사람이며 멕시코 전쟁으로 얻은 지역에 노예제가 확산되는 것에 반대하는 휘그당의 입장을 잘 뒷받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매사추세츠 주뿐 아니라 나라의 모든 시민이 노예소유주보다는 북부의 자유인을 그들의 리더로 뽑을 때가 오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슈어드는 결국 사회적 의식이 바뀌고 나라의 모든 노예가 해방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링컨이 연단에 나섰을 때는 무척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보스턴 쿠리어」가 “가장 힘차고 설득력 있다.”고 극찬했던 명연설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이 연설에서 링컨은 당적과 입장을 자주 바꾸어 ‘킨더훅의 교활한 사기꾼’이란 별명을 얻은 자유토지당원 밴 뷰런과 민주당의 캐스를 공격했다. 그는 귀청이 터질 것 같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 속에 연설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슈어드는 20여 년 후 “그 연설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지만 노예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는 피했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다음날 밤, 슈어드와 링컨은 우스터 호텔에서 한 방을 썼다. 슈어드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그날 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견해를 정확하게 정리하고 대담하게 발언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던 링컨은 “당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노예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링컨은 시종일관 윌모트 단서 조항을 지지하면서도 노예제 문제에 대해 연설하거나 노예제 폐지를 위해 활동한 적은 없었다.


휘그당은 그해 11월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재커리 테일러는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건 휘그당의 마지막 국가적 승리였다. 4년 후 휘그당은 노예제 문제로 분열되어 겨우 네 개 주에서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체이스는 자유토지당의 마틴 밴 뷰런이 북부 유권자 표 중 10퍼센트 이상을 얻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그것은 노예제 폐지 운동이 국가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증거였다.


남은 회기를 마치기 위해 의회로 돌아간 링컨은 ‘워싱턴의 점진적 노예해방’을 위한 건의안을 작성했다. 슈어드와의 만남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전에도 비슷한 건의안을 제출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엔 몇 가지 조건을 더 추가했다. 그는 정부 기금으로 노예의 값을 주인에게 보상해주고, 노예주 출신의 정부 관료들이 업무 출장을 갈 때는 하인들을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하자는 단서 조항을 포함했다. 마지막으로 접경 지역에 거주하는 남부 노예 소유주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지역 당국에 “해당 지역으로 도망 노예를 체포하는 데 적극 협조하고, 체포된 노예는 주인에게 이송하도록” 요구하는 단서 조항도 첨가했다. 노예제 페지론자인 웬델 필립스가 링컨을 ‘일리노이 출신의 노예 사냥개’라고 비난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마지막 단서 조항이었다.


10여 명의 동료 휘그당원들과 길고 신중한 대화를 나눈 끝에, 링컨은 남부의 온건주의자와 북부의 강경한 노예제 폐지론자 모두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적당한 타협안을 만들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건의안을 발표한 후 링컨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점점 격렬해지는 분열로 인해 타협의 여지가 사라졌다. 열성파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도망 노예에 대한 단서 조항과 노예 소유주에 대한 보상 모두를 반대했다. 남부인들은 워싱턴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면 노예제 폐지가 나라 전체에 확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황을 현실적으로 파악한 링컨은 다시는 안건을 제출하지 않았다.


1849년 3월에 임기를 마친 링컨은 불행히도 좌초된 그의 정치 경력을 끌어올릴 만한 것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의 휘그당 의회 선거구는 민주당으로 넘어갔고, 많은 휘그당원들은 링컨이 전쟁을 비판했기 때문에 민주당에 패배했다고 그를 비난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고,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는 의회 재임 기간 동안 눈에 띌 만한 공적을 세우지도 못했다. 그는 의회 소집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당을 위해 충직하게 일하는 부지런한 의원이었지만, 두각을 나타내거나 유명해지지는 못했다.



중도주의의 힘 : 대통령 후보 공천 초읽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링컨

서부 바깥 지역에서도 유명해지고 싶다는 링컨의 소망은, 체이스의 지지자 제임스 브릭스가 1860년 2월 27일 뉴욕 시에서 열릴 연속 강연에 그를 초청했을 때 실현되었다. 체이스는 강연 기획자들이 슈어드를 대신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 자리에서 강연을 거절했다.


거의 15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쌀쌀한 밤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서부 사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쿠퍼 유니언 대강당에 모여들었다. 그가 이 행사를 위해 새로 산 검은 양복은 여행 탓에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한 청중은 “그의 한쪽 바지자락은 신발에서 약 10센티미터 가량 위로 올라가 있었고, 그의 머리카락은 수탉의 깃털처럼 흐트러지고 삐죽 나와 있었다. 외투는 그의 몸집보다 너무 컸지만 팔은 소맷자락보다 훨씬 길었다.”고 전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일단 그가 연설을 시작하자 그의 열정적이고 힘찬 연설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링컨은 수 주 동안 이 연설을 준비하며 노예제에 대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입장을 폭넓게 조사했다. 그는 상원의원 더글러스가 노예제에 대해 말한 연설을 강연 주제로 삼았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정부를 세웠을 때 이 문제를 지금 우리만큼, 아니 우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링컨은 이어 건국의 아버지들이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행동했는지 자세히 고찰한 후, 그들이 노예제를 “확장되어서는 안 되는, 하지만 우리 가운데 노예제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만 묵인되고 보호되는

악”으로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6년 전 유명한 피오리아 연설 때처럼, 링컨은 쿠퍼 유니언에서도 남부 사람들을 향해 직접 말을 건넴으로써 극렬한 파벌 싸움으로 인한 적개심을 없애고자 했다. 이 무렵 남부의 반응에 대한 그의 믿음은 심각할 정도로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공화당원들이 원하는 것은 “건국 아버지들의 정책”으로 돌아가 “과거의 평화”를 다시 이루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노예 소유주들이 알게 되면, 그들의 분노가 진정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링컨은 파벌주의를 비난하지 않고, 그저 공화당원들은 “과거의 것을 고집하고 아직 시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을 반대하는” 진정한 보수파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료 공화당원들을 향해서는 “성급하게 움직이지 맙시다. 남부 사람들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해도, 그들의 요구에 대해 침착하게 생각하고 우리 임무와 신중하게 견주어보아 가능하다면 그 요구를 들어줍시다.”라고 호소했다. 그의 주장은 전체적으로 대단히 온건했다. 하지만 동시에 ‘노예제가 전국의 준주와 자유주에 확산되도록 할 수 없다’는 공화당의 원칙을 열정적이고 확고하게 호소했기 때문에, 가장 급진적인 공화당원들조차 그의 말에 매료되었다. 그가 끝으로 “정의가 이긴다는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끝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실천하도록 합시다!”라는 인상적인 발언을 했을 때, 청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연설이 각종 신문에 보도된 후, 링컨은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연설 초청을 받았다.


링컨은 이 연설 여행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동부에서 큰 명성을 얻은 그는 더 이상 먼 변경의 외톨이가 아니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출마 자격을 거론했다. 링컨은 그의 연설을 높이 칭송했던 예일 대학 교수에게 말했다. “서부에서의 성공에도 무척 놀랐습니다만, 동부에서 이렇게 크게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고매한 학자들께 그러한 칭찬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제임스 브릭스가 “당신이 차기 대통령이 될 확률은 이 나라 모든 사람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자, 링컨은 “동부에 갔을 때 여러 신사들이 지금 당신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확률이 최고의 후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과 똑같다고 생각했소이다.”라고 대답했다.



비전을 향하여 : 정치의 중심 워싱턴으로
2월 11일, 링컨이 친구들과 함께 기차역으로 향하던 그날, 날씨는 습하고 몹시 추웠다. 수도 워싱턴으로 에둘러가는 12일 동안 링컨은 수십만 명의 시민들과 만날 것이었다. 그는 자기 트렁크를 밧줄로 묶은 다음 간단하게 적었다. “A. 링컨, 워싱턴 D.C., 백악관.” 장남 로버트는 아버지와 함께 출발했다. 메리와 어린 두 아들은 다음날 합류할 예정이었다.


기차역에 도착한 링컨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몰려든 천여 명의 시민을 보았다. 그는 대기실에 서서 친구들과 한 명씩 악수를 나누었다. 오전 8시가 가까워오자, 링컨은 전용 객차의 승강장으로 향했다. 그는 모자를 벗고 연설을 시작했다. “이 고장과 여기 살고 계시는 친절한 여러분에게 저는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25년 전에 이곳을 찾아왔던 젊은이는 이제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제 아이들이 태어났고 한 아이는 묻혔습니다. 오늘 저는 떠납니다. 언제 돌아올지, 혹은 돌아올 수는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제 앞에는 그동안 워싱턴의 대통령들에게 주어졌던 것보다 더 막중한 임무가 놓여있습니다. ……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애정을 담아 여러분께 작별을 고합니다.”


짧지만 애정 어린 인사를 전할 때, 링컨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화려한 대통령 객차도, 객차 밖에서 나부끼는 색색가지 깃발과 장식리본도 대통령 당선자의 우울한 기분을 회복시켜주지 못했다. “첫 번째 정류장인 인디애나폴리스로 가는 동안 링컨은 전용 객차에 혼자 앉아 평소의 유쾌한 원기를 잃고 침울해했다.”고 기자들은 전했다. 링컨은 조국이 위기, 어쩌면 역사상 가장 큰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인디애나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서른네 발의 예포가 울려 퍼졌고, 기차에서 내린 그는 2만 명이 넘는 인파의 거대한 환호성을 들었다. 사람들은 거리마다 줄지어 서서 베이츠의 집으로 향하는 링컨에게 깃발을 흔들었다. 그날 링컨은 베이츠의 집에 묵을 예정이었다.


링컨은 베이츠의 저택 발코니에 서서 당선 후 첫 번째 연설을 시작했다. 긴 여행 동안 그가 한 몇 번의 주요 연설 중 하나였다. 그는 먼저 ‘강제력’이라는 단어를 설명했다. “시민의 동의 없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로 군대가 진격한다면, 그것은 분명 ‘강압’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자국의 요새를 지키거나 빼앗긴 요새를 재탈환하고자 하는 것도 강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의 표현은 큰 환호성과 끊이지 않는 박수를 자아냈다. 연설은 성공적이었다.


다음날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의 주 의회의사당에서 열린 환영 행사에 참석했을 때, 링컨은 선거인단이 개표를 하고 그의 당선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위해 워싱턴에 모였다는 전보를 받았다. 지난 몇 주 동안, 슈어드와 스탠턴은 탈퇴주의자들이 선거인단의 집회를 막기 위해 이날 수도를 공격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슈어드는 “13일이 안전하게 지나갔다는 데” 몹시 안도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점점 침착해지고 심지어 내가 제안했던 정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소. …… 마침내 나는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났소. 나는 모래사장에서 배를 끌어내 바다에 띄웠고, 사람들이 뽑은 선장의 손에 조타석을 넘겨줄 준비를 다 했다오.”라고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링컨은 여행 내내 자신이 정식으로 취임하기 전에 국민을 자극하거나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언행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저 탁월한 유머 감각을 발휘해 심각한 정치적 논쟁을 회피하며 군중의 환호에 답할 뿐이었다. 차기 내각의 의도를 조금이라도 알까 싶어 열심히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에게 그의 연설은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는 “링컨의 연설은 지금껏 높게 쌓아 올린 평판을 빠르게 깎아내렸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하지만 링컨은 언제 발밑에 펼쳐질지 모르는 실패와 절망의 나락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말을 조심하고 공식적인 발언을 자제했지만, 신중하게 선택한 문장의 미묘한 의미 차이를 해석해보면 자신이 직면하게 될 시련과 위험을 얼마나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고 존 니콜라이는 말했다.


취임식까지 열흘 동안 링컨이 워싱턴 어디에서 지내느냐 하는 문제가 몇 주 동안 논의되었다. 위드는 링컨에게 “이제 공인이니, 취임할 때까지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링컨은 동의했다. “사실, 저는 이제 공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호텔은 사람들이 저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해서 14번 가와 펜실베이니아 거리 모퉁이에 있어 백악관이 잘 보이는 윌라드 호텔 스위트룸이 예약되었다.



운명 공동체 앞에 서서 : 반도 작전 실패
윌리엄이 세상을 뜬 지 이틀이 지난 후, 맥클렐런 장군은 링컨 가족에게 닥친 “참혹한 일”에 대해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신은 내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당신은 내가 힘들어할 때 힘을 실어주셨습니다.”라고 장군은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 다음 서부의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 점령을 동부 진격의 “상서로운 출발”이라 언급하며, 링컨이 “군사(軍事) 때문에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진격에 대한 맥클렐런의 확신은 링컨에게 별 다른 위안을 주지 못했다. 장군은 지난 몇 개월 동안 비슷한 약속을 했지만, 포토맥 군단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에는 신문만 장군을 비판했지만, 이제는 새로 구성된 상하 합동 전사위원회에서도 그를 강력히 비난하고 있었다. 벤 웨이드와 미시간 주의 재커라이어 챈들러, 인디애나 주의 조지 줄리언 등 상하 양원의 급진주의자들이 주도한 전사위원회는, 전쟁을 강력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노예제에 보수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들어 맥클렐런을 비난했다. 12월 말부터 1월 중순까지 맥클렐런은 장티푸스에 걸렸다며 병석에 누워 있었다. 장군이 병을 핑계로 진격하지 않는다고 의심했던 전사위원회는, 링컨과 내각에 진격 문제에 관해 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국회의원 줄리언은 “회의 동안 대통령도, 조언자들도 맥클렐런 장군의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 놀랍게도 링컨은 자신이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맥클렐런에게 결정을 맡기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베이츠는 링컨의 이러한 생각을 강력히 비판하며 “그만의 참모를 조직하고”, “지휘관을 지휘할” 의무가 있는 총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라고 촉구했다. 이 의견은 링컨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국회도서관에서 군사전략에 대한 헬렉 장군의 책을 빌렸고 며칠 후 브라우닝에게 “직접 전쟁터에서 연설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링컨은 일단 군사행동을 서둘러 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정 상황에 대해 메이그스 장군에게 털어놓았다. 거의 파산 상태에 다다른 재무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수십만 명의 군사들에게 식량과 의복, 수용 시설을 제공하기 위한 어마어마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링컨은 전했다. 체이스는 대통령에게, 진격 없이는 불만을 품은 시민에게서 추가 기금을 모을 수 없다고 말했다. 메이그스는 군사회의를 소집해 과단성 있는 행동 방침을 세우라고 링컨에게 제안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맥클렐런은 갑자기 몸이 회복되어 다음날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맥클렐런은 여전히 계획에 대해 함구하며 메이그스에게 “대통령은 비밀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링컨은 그가 자랑하던 참을성을 잃었다. 1862년 1월 27일, 그는 일반 전시명령 1호를 발표하여 2월 22일을 “미합중국 육?해군이 반란군에 맞서 일제히 진격하는 날”로 정했다. 링컨은 북부의 병력이 수적으로 우세한 것을 고려할 때 동시에 여러 반란 지역을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명령이 발표되자 맥클렐런은 즉시 자신의 계획을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를 우선 포토맥 강을 따라 체서피크 만까지 배로 이동시키고, 그곳에서 래퍼해녹 강의 남쪽 해안을 따라 어배너에 진입시킨 다음, 다시 남서부의 리치먼드로 행군한다는 계획이었다.


링컨은 스탠턴과 맥도웰 등 여러 장군들과 협의하여 다른 전략을 세웠다. 매나서스를 지나 육로로 행군하여 반란군을 “우세한 병력으로 궤멸하면서” 리치먼드 쪽으로 계속 후퇴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하면 수도와 연맹군 사이에 계속 연방군을 두고 워싱턴을 점령하기 위해 리치먼드를 내놓을 수도 있었다. 연맹이 연방의 수도를 차지하면, 국제사회는 틀림없이 연맹을 인정할 것이었다. 이후 링컨은 마지못해 맥클렐런의 반도 작전에 동의했지만, 그 전에 수도를 안전하게 방어할 충분한 병력을 남겨두라고 요구하는 서면 명령을 내렸다.


스탠턴은 맥클렐런이 여러 번 자신을 기다리게 했을 때 더욱 기분이 상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전쟁장관은 링컨과 달리 맥클렐런의 오만한 행동을 묵과할 수가 없었다. 전쟁부로 가던 도중 맥클렐런의 본부에 들렀다가 한 시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던 스탠턴은 분통을 터뜨리며 “맥클렐런 장군이 나나 대통령을 푸대접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몇 주 후, 스탠턴은 전신국을 맥클렐런의 본부에서 전쟁부의 자기 집무실 옆방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클렐런은 더 이상 워싱턴과 북부 전역의 군 관료, 막사, 요새를 연결하는 획기적인 새 통신망으로 전달되는 전보를 독점할 수 없었다. 맥클렐런은 이를 “모욕적인 처사”라며 분개했다. 전신국을 차지한 스탠턴은 모든 군사 연락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링컨은 이제 총사령관이 아닌 전쟁장관을 찾아가 몇 시간씩 시간을 보냈고, 이 때문에 맥클렐런은 영향력을 잃었다.


그러나 맥클렐런에게 여전히 몽고메리 블레어를 포함한 정계에 든든한 동지들이 있었다. 민주당계 언론은 그랜트가 맥클렐런의 꼭두각시라도 되는 듯,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에서의 승리를 “젊은 나폴레옹”의 공으로 돌렸다. 스탠턴은 “맥클렐런이 전신국에 앉아 그랜트와 스미스의 요새 점령을 지휘”한 것처럼 묘사한 신문의 그림은 “인형극에나 어울리는 그림”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결과적으로 서부의 승리는 맥클렐런에게 군사행동에 대한 부담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리고 3월 8일, 마침내 포토맥 군단은 야영지에서 진군할 준비를 했다. 이들의 이동을 예상한 연맹군은 매나서스에서 래퍼해녹 강기슭으로 포병중대를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후퇴 보고를 받은 맥클렐런은 남은 부대를 격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급습했다. 그러나 연맹군은 이미 막사와 보급품, 무기를 가지고 떠난 뒤였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몇 달 동안 난공불락이라 여겨 공격하지 못했던 방어시설은 그저 대포 비슷하게 검은색으로 칠한 통나무일 뿐이었다. 맥클렐런이 좀 더 일찍 공격했더라면, 엄청난 전과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 게티즈버그 연설
선거 당일, 평소처럼 링컨은 북적이는 전신국에 앉아 있었다. 자정이 될 때까지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온 모든 전보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링컨은 확실해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새벽 1시 20분, 체이스로부터 반가운 전보가 도착했다. “기대 이상의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체이스는 브로우가 밸런디검을 최소 5만 표 이상 앞지를 것이며 군인들의 표까지 계산하면 표 차는 더 커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새벽 5시 경, 브로우는 10만 표까지 차이를 벌렸다.


링컨은 승리를 거둔 주지사 당선자에게 전보를 보냈다.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오하이오 주가 이 나라를 살렸소.” 펜실베이니아 주에서도 커틴 주지사가 반전을 주장하는 상대 후보를 물리쳤다는 결과가 전해졌다. 전신국에서는 또 한 번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펜실베이니아에 경의를!”이라고 스탠턴은 존 포니에게 전보를 보냈다. “7월에 펜실베이니아는 남부 침입자들을 그 땅에서 몰아냈고, 10월에는 다시 연방을 위해 단결하여 투표로 적을 압도했습니다!”


웰스가 축하 인사를 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들렀을 때, 대통령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공화당이 중요한 두 주에서 코퍼헤드를 전멸시켰고, 이를 통해 다음달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체이스는 이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고향 방문으로 대통령직에 대한 장관의 열망 역시 더욱 높아졌다 해도 상관없었다. 링컨은 대통령직에 대한 체이스의 욕망을 이해했다. “원하는 것을 차지하지 못하면 얼마나 마음이 괴로운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걸세.”라고 그는 말했다.


링컨은 체이스가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한 그의 모략을 눈감아주었지만, 각료들의 참을성은 링컨에 미치지 못했다. “난 체이스 장관이 대통령직에 대한 갈망 때문에 머리가 돌아버릴까 걱정된다.”라고 베이츠는 일기에 적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서부 방문을 선거 운동으로 여기고 있다.” 체이스의 연설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던 법무장관은 키케로(로마의 웅변가 겸 정치가)가 “불멸의 신을 두고 말하건대 내가 이 나라를 구했다.”라고 단언한 것처럼, 체이스 역시 자신의 훌륭한 재정 시스템이 나라를 구했다고 여긴다며 조소했다.

웰스 역시 체이스가 대통령직에 대한 욕망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 “공화당 과격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남부 재통합을 이용하고 분열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도 블레어 가족이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쏟아 부었던 맹비난에 비하면 온화한 편이었다.


게티즈버그에 도착한 링컨은 봉헌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데이비드 윌스의 집으로 안내받아 앤드류 커턴 주지사, 에드워드 에버렛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냈다. 도시의 모든 호텔뿐 아니라 개인 주택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라 전역에서 사람들이 이 행사를 위해 몰려든 것 같았다. 링컨이 방에서 연설문 초안을 완성하는 동안 저녁식사를 마친 군중은 그가 머물고 있는 집 앞에 모여 세레나데를 불렀다. 그는 정문으로 나와 감사 인사를 했지만, “전 연설하지 않겠습니다. 저로선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는 게 다소 중요하니까요.”라면서 연설하지 않는 이유를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그가 연설을 꺼리자 “그게 도움이 되겠습니까!”라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링컨은 재빠른 답변으로 군중을 즐겁게 만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딱 한 가지 도움이 될 때가 많더군요.”


방으로 돌아온 링컨은 하인을 아래층으로 보내 종이를 몇 장 더 가져오도록 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링컨은 연설문 작성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한 줄 한 줄 살펴보며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결론 부분을 고쳐나갔다.


군중은 다시 슈어드가 머물고 있던 로버트 하퍼 호텔로 몰려갔다. 슈어드는 세레나데에 진심 어린 연설로 화답했다. 그는 “이번 전쟁이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위대한 운명을 부여받은 이 날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동족상잔이 되리라 믿으며” 이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그 후 쾌활한 장관은 집안에서 몇 시간 동안 유쾌하게 모임을 주관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친 링컨은 조심스레 연설문을 펼쳐 마지막으로 수정하고는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붉은 말에 올라 묘지로 가는 행렬에 동참했다. 아홉 명의 주지사와 국회의원, 외교 사절, 군 장교, 세 명의 각료가 링컨과 동행했다.


약 9000명의 청중이 연단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둘러앉았다. 링컨은 맨 앞줄에 앉았고 양 옆에는 에버렛과 슈어드가 있었다. 에버렛은 두 시간 동안 연설하면서 3일 동안 일어났던 여러 극적인 전투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자세히 이야기했다. 링컨은 이쪽저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다리를 꼬며 연설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에버렛 다음으로 연단에 오른 링컨은 쇠테 안경을 쓰고 원고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겐 연설을 준비할 시간이 조금밖에 없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이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게리 윌스가 이 연설에 대한 권위 있는 저서에게 말한 것처럼, “그는 당대의 가장 민감한 문제들을 독립선언서의 최고 원칙과 관련시켜 파헤치면서 1850년대의 대부분을 보냈다.”


스티븐 더글러스와 논쟁할 때도 그는 독립선언서에 담겨 있는 중요한 약속을 청중에게 거듭 상기시켰다. “언젠가 인종 간에 우열이 존재한다는 궤변이 사라지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말이 진리임이 증명될 것이다.” 노예해방을 선언하기 20개월 전, 대통령은 헤이에게 “이 투쟁의 핵심은 민주정치가 불합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네.”라고 말하면서,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국민에게 자치 능력이 없다는 편견을 증명하는 꼴이 될 걸세.”라고 주장했다. 게티즈버그에서 그는 훨씬 간결하고 감동적인 언어로 이러한 확신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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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이 연설을 마쳤을 때 “관중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고 조지 깃은 전했다. “지극히 짧은 연설의 갑작스러운 종결에 놀란 청중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링컨이 몸을 돌려 자리로 향하지 않았다면, 관중은 몇 분 더 말없이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링컨은 처음에는 관중의 충격을 실망으로 해석했다. 연설을 마치자마자 그는 워드 라몬을 바라보았다. “라몬, 이 연설은 가래질이 안 됐어!(켄터키 지역 농부들이 밭을 제대로 갈지 못했다고 말할 때 쓰는 표현) 완전히 실패했네. 사람들이 실망하는군.” 그러나 에드워드 에버렛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고, 감탄과 존경을 표현했다. 그는 링컨에게 편지를 보냈다. “각하께서 2분 안에 했던 것처럼 제가 두 시간 동안 그 봉헌식의 중심 사상에 가까이 다가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링컨은 조국의 신념과 전쟁의 의미를 모든 미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말과 개념으로 바꾸었다. 아버지의 모험담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개작하느라 잠들지 못했던 그 아이는, 언제까지나 학생들이 암송하게 될 나라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이상을 굳게 세웠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