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송국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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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북스
   
13000
2007�� 05��



■ 책소개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는 과거 청와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고, 또 현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소개한다. 문민정부부터 참여정부까지 3대째 청와대를 출입하고 있는 저자가 역대 9명의 대통령들이 거쳐 간 청와대의 각종 면모를 자세히 설명한다.이승만 초대 대통령 시절부터 노무현 현 대통령 시절까지 시간순서대로 다양한 사건들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는 우리 헌정사의 주요 고비 때마다 권력의 심장부에서 대통령을 중심으로 발생했던에피소드들을 정리하고 있다. 무리하게 권력의 이면을 파헤쳐 비사를 발굴하기보다는 청와대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있다.


 저자 송국건
1960년 진주 출생.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언론학 석사). 현 「영남일보」 서울정치부부장으로 재직. 1988년 「영남일보」 복간공채 1기로 입사한 뒤 1989년부터 서울지사 정치부에서 근무했다. 1996년부터 2년여 동안「국제신문」 서울지사 정치부에 근무하다가 복귀한 것을 포함해 20년 가까이 정치현장에서 취재 활동을 하고 있다. 국회와 민정당 &·민자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신민주공화당 &· 자민련, 국민회의 &· 민주당, 국무총리실 등을 두루출입했고, 정치부 기자 생활의 절반 가까운 8년여 동안 청와대를 담당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6공화국 때 간간이 청와대 취재 지원을 나간 것을 시작으로, 김영삼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8개월,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 3년 6개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 4년 정도를 출입하면서정치적 &· 사회적 격동기마다 권력의 심장부 청와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 차례
글을 시작하며 
한국의 역대 대통령 


1. 권력의 결정체 청와대 
행정부의 상전- 대통령 비서실의 힘 
바람소리도 놓치지 않는다 - 대통령 경호 
추락하는 정보부 - 대통령과 정보부 
별 달고 거들먹거렸단말입니까 - 대통령과 군 
일인지하 만인지상 - 대통령과 국무총리 
악어와 악어새 - 대통령과 재벌 


2. 대통령의 참모들Ⅰ 
얼굴마담인가 권력의상징인가 - 대통령 비서실장 
달콤한 유혹들 - 비서실의 낮과 밤 
쉘위댄스 실장 - 대통령의 특별한 참모들 
아침모임에의 초대- 대통령의 실세 참모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어 - 대통령의 홍보참모 
대통령의 입이자 복심으로 - 청와대 대변인 
핫라인- 대통령의 정무참모 


3. 대통령의 참모들Ⅱ 
나 홀로 연설문 -대통령의 스피치 라이터 
독도와 다케시마 - 대통령의 통역 
청와대에도 여풍이 - 대통령의 여성참모 
‘탈권위’의 뒷모습 -대통령 비서실의 추락 
게이트의 몸통? 깃털? - 대통령은 비서실은 의혹의 산실? 


4. 대통령의 사람들 
대통령의 1급 참모- 한국의 퍼스트 레이디 
명암 뚜렷한 대통령의 아들들 - 대통령의 자녀들 
비리 종합판 - 대통령의 친인척 
보고 싶다,친구야 - 대통령의 친구들 
동창회 정권 - 대통령의 동창들 
대통령은 나를 모를끼다 - 대통령의 스승들 
창업공신들의 몰락 -대통령의 창업공신들 
우리가 남이가 - 대통령의 친위외곽조직 


5. 대통령의 사생활 
국가 1급 비밀 -대통령의 건강 
학력 콤플렉스 있으세요? - 대통령의 학력 
대통령 전화를 받느라고 - 대통령과 스포츠 
그때 그 사람들 -대통령의 스캔들 
여보, 나 좀 도와줘 - 대통령의 저서 
경상도와 전라도 - 대통령의 고향 
칼국수에 얽힌 얘기 - 대통령의식사 
‘방황’이 나의 종교 - 대통령의 종교 
‘수전노’ 형과 ‘한량’ 형 - 대통령과 돈 


6. 대통령의 개성 
이쯤 되면 막 가자는거죠 - 대통령의 성격 
폭탄주의 진짜 원조 - 대통령의 스트레스 
세계적인 강간(관광) 도시 - 대통령의 말 
인사가 만사니라-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 
어젯밤 열심히 일한 모양이군 - 대통령의 회의주재 스타일 
선물도 성격 따라 - 대통령의 선물


7. 대통령과 정치 
경선에서 이긴 사람이- 대통령의 후계자 
수행원들의 세관검사 - 대통령의 레임덕 
한 지붕 한 가족 - 대통령과 여당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 


8. 대통령의 정상외교 
에어포스 원 -대통령의 해외순방 
This man - 대통령의 정상회담 
DJ의 콩글리시 - 대통령의 외국어 실력 
청산가리를 가슴에 품고 -대통령의 대북 밀사들 


9. 대통령과 언론 
기자에게 박치기를 날린이유는? - 대통령과 기자들 
낮의 대통령, 밤의 대통령 -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10년 전쟁 
민심이 천심이다 - 대통령의 민심과의대화 
미안하다, 장기수여 -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세계 


부록 - 청와대 풍경 
청와대의 어제와 오늘 
대통령의 하루 일과
대통령의 지방순시 
대통령의 별장 
대통령의 비행기, 헬기, 열차, 승용차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권력의 결정체 청와대
일인지하 민인지상(대통령과 국무총리)

- 실세 총리 이해찬에 물먹은 대통령 비서실
2006년 새해가 시작된 1월 1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이병완 비서실장이 청와대 인근 한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이 날은 일요일이어서 조간신문사와 방송사 기자들이 정상 출근해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실장이 “새해 벽두부터 고생한다”며 점심을 산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한 기자가 질문했다.


“개각 시기는 언제쯤 될 것 같은가?”


이 실장이 답했다.


“좀더 봐야 한다. 구체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어서…. 압박을 느낄 필요가 없다. 연초니까. 내일부터 들어가 봐야지.”


그러나 바로 다음날 노무현 대통령은 4개 부처 장관을 임명하는 ‘1?2 개각’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개각 다음날인 1월 3일 국무회의가 열렸다. 회의 시작에 앞서 기자들이 청와대 김완기 인사수석에게 물었다.


“시위농민 사망 사건으로 물러난 허준영 경찰청장의 후임 인선은 어떻게 되나?”


김 수석이 대답했다.


“이제 막(인선 작업이) 시작됐다. 다음 주 초나 돼야… 이것저것 확인해 봐야 한다. 적임자가 나타나면 인사추천회의를 거쳐 경찰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행정자치부 장관의 제청을 거치게 된다. 이번 주에는 인사추천회의가 없다. 충분히 확인해 보겠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인 4일 청와대 김만수 대변인은 “노무현 대통령은 신임 경찰청장에 이택순 현 경기지방경찰청장을 지명하고 국회의 인사청문을 요청키로 했다”라고 발표했다. 청와대 참모진의 수장으로,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비서실장과 정부 요직 인사를 담당하는 실무책임자인 인사수석이 개각과 신임 경찰청장 임명 사실을 하루 전까지도 까마득히 몰라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비서실장가 인사수석이 다음날 인사 발표 사실을 알면서도 언론에 미리 보도되는 일을 막기 위해 ‘연막’을 쳤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때의 경우는 다르다. 여러 채널을 통해 확인한 결과, 실제로 비서실장과 인사수석이 개각과 경찰청장 인사 하루 전에도 구체적인 내용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참 동안 논란을 빚은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의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도 마찬가지였다. 유 의원의 입각에 대해 여당 내에서 반대 의견이 팽배하자 청와대 핵심 참모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러면서도 1월 4일 오전까지만 해도 “대통령께서 (유 의원을 입각시키려는) 뜻을 접을 것 같다”라고 관측하는 기류가 강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그날 오후 3시에 전격적으로 유 의원을 보건복지부 장관에 지명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 여권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은 그 같은 일련의 인사가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의 합작품’이기 때문에 다른 여권 인사들, 심지어 청와대 비서실장과 인사수석마저도 몰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유시민 장관 내정자의 경우 1988년 당시 이해찬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권에 처음으로 명함을 내민 인물이다. 장관 임명 제청권자인 이 총리가 열린우리당과 청와대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카드를 끝까지 고집한 이유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결과적으로 이해찬 총리의 손을 들어줬다.


대통령의 참모들Ⅰ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어(대통령의 홍보참모)
청와대 홍보수석실에서 국장(행정관) 급으로 근무했던 어느 인사는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특히 홍보 파트를 담당하는 참모들은 웬만한 신념과 체력으론 버티기 힘든 직업이라고 말한다. 참여정부 들어서는 더욱 그렇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는 전국지와 지방지, 방송사의 펜기자와 카메라기자를 모두 합쳐 80여 명 정도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과 노태우 대통령 때도 비슷했다. 전두환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나 참여정부에서는 청와대 홍보수석실에 등록된 출입기자만 300명을 넘어섰다. 기자단을 해체하고 대신 브리핑 룸을 운영하면서 인터넷 매체와 전문지 등 특수매체에도 기자실을 개방한 데 따른 것이다. 홍보수석실 직원들의 업무에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 홍보수석실은 수석비서관 밑에 홍보기획, 국정홍보, 국내언론, 해외언론 비서관실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대변인팀’이 있는데 여기엔 대변인과 부대변인, 보도지원비서관(춘추관장)이 소속돼 있다. 이 가운데 청와대 기자들이 머물고 있는 춘추관에 상주하면서 몸으로 부대끼는 사람들은 대변인팀이다. 10명 가량의 대변인팀 직원들이 300여 명의 기자를 상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청와대 홍보팀과 기자들이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정권과 언론과의 ‘긴장관계’가 이어졌기 때문에 양쪽 모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다. 어느 참모는 “겉으론 기자들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인간적으론 친해지고 싶은데 그렇게도 못하는 이유가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들과 친해지려면 저녁에 술도 한 잔씩 해야 하는데 이른바 ‘실탄’이 지급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로 참여정부 청와대 1, 2급 비서관들이 사용할 수 있는 법인카드의 월 사용한도가 소관업무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100만 원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여정부 출범 초 당시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은 언론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강조하면서 “젖을 떼는 어미의 심정”이라고 말했다. 또 “금단 증상이 나타나도 어쩔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청와대 홍보참모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정권에서는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과 비교해 일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상대해야 할 기자수도 적었을 뿐 아니라 실탄도 풍부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 때까지는 홍보수석이 아니라 공보수석 직제가 있었다. 차관급인 공보수석은 자동적으로 대변인을 겸직했다. 참여정부처럼 홍보수석 산하에 비서관급 대변인이 있는 체제가 아니었던 것이다.(참여정부도 임기말에는 윤승용 홍보수석이 대변인을 겸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공보수석에는 정치권에서 산전수전을 겪었거나 언론사에서 국장급 이상 간부를 거친 인물들이 기용됐다. 따라서 기자들이 조금은 공보수석을 어려워하기도 했다. 반면 그때 임무를 교대한 김종민 전 대변인과 김만수 신임 대변인은 41세 동갑으로 대부분의 청와대 출입기자보다 나이가 적었다.



대통령의 사람들
대통령의 1급 참모(한국의 퍼스트 레이디)

- 대통령의 1급 참모, 핵심 측근
그렇지만 대통령 부인의 동정 하나 하나에 여론이 민감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 부인이란 자리는 이 나라 여성계의 상징이며, 어떤 의미로는 대통령의 ‘최측근 실세’이자 ‘1급 참모’인 까닭이다. 그만큼 세인들의 시선을 모으고, 국민생활에도 직?간접적 영향을 미치는 대통령 부인들의 청와대 생활은 어땠을까. 청와대에서 대통령 부인의 생활을 챙기는 부서는 ‘제2부속실’이다. 제2부속실의 구체적 업무는 ‘영부인 일정 및 행사 기획, 집행’, ‘영부인 활동 수행 및 비서업무’, ‘영부인 활동 대내외 네트워크 및 비서활동’, ‘관저생활 보좌’ 등이라고 청와대 홈페이지는 설명하고 있다. 관저 생활까지 포함해 대통령 부인과 24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업무인 셈이다.


다만 대통령 부인이 각종 공식행사에 참석할 때 필요한 연설문은 제2부속실이 아닌 대통령 ‘연설팀’에서 작성한다. 경호도 경호실에서 별도로 관리한다. 제2부속실에서는 1급 또는 2급 비서관인 실장을 필두로 3급 국장(행정관)부터 9급 사무원, 계약직까지 합쳐 모두 9명의 직원들이 대통령 부인을 보좌한다. 여기는 미용사와 코디네이터 등도 포함된다. 참고로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 보좌하는 곳은 ‘제1부속실’이다. 제2부속실이 대통령 부속실에서 독립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2년이라고 한다. 당시 제2부속실장의 직급은 ‘2갑’이었고,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 시절 ‘2급’으로 변경됐다. 노태우 대통령의 6공화국 때 3급으로 하향 조정됐다가 이후 1급 또는 2급이 맡고 있다.


대통령은 나를 모를끼다(대통령의 스승들)
- 윤보선의 스승은 우드로 윌슨
군 출신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이렇다 할 정치적 스승이 없다. 굳이 꼽는다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 감각을 익혔다고 할 수 있다. 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여당 대표를 하면서 박준규?채문식 전 국회의장 등 고향 선배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스승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선친인 김용하 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서예가 취미였는데 이는 대구사범학교 시절 습자시간에 붓글씨를 배우면서 시작됐다. 당시 서예 선생님이 김용하 씨였다. 이런 스승-제자의 인연으로 김우중 회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대기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한다. 초대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으로, 훗날 미국 28대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을 스승으로 모셨던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대통령의 개성
인사가 만사니라(대통령의 인사 스타일)

- 노무현의 인사 실험
1983년 11월 어느 날, 청와대 최재욱 공보비서관은 당시로선 규모가 큰 종합병원이었던 서울의 메디컬센터에 입원해 있었다. 그 전 달 전두환 대통령의 대양주 순방을 수행했다가 첫 방문지인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발생한 폭탄테러에 의해 큰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병문안차 병실을 찾았다. “몸이 완쾌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전두환 대통령이 물었다. “고향인 대구에 가서 조그만 신문사라도 하나 차려 열심히 운영해 보고 싶습니다.” 최재욱 비서관은 「대구일보」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 “그래? 그보다는 서울에 있는 신문이 나을 텐데… 어쨌든 알았네!”


1986년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최재욱 비서관은 「경향신문」 사장으로 전격 선임됐다. 그의 나이 46세 때다. 이후 그는 한국언론인 금고 이사장, 청와대 대변인, 13?14대 국회의원, 환경부 장관 등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언론사에서 정치부 차장까지만 지낸 청와대 비서관의 중앙언론사 사장 발탁은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인사다. 격도 격이지만, 언론사 사장 선임이 대통령의 뜻에 따라 이뤄져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그런 시기였다. 그로부터 2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대통령의 정당한 인사권이라도 여론의 극심한 견제를 받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새해 벽두에 발생한 ‘이기준 교육부총리’ 인사 파동 이후 여러 가지 새로운 인사 실험을 했던 것은 여론의 견제를 극복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 실험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하나는 고위 정무직 공무원에 대한 후보자 사전 공개 방식이다. 정식 임명 절차를 거치기 1주일 전쯤 후보자를 복수로 공개한 뒤 여론의 검증을 거치는 이 방식을 둘러싼 장단점 논란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공개된 후보자 가운데 배제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육지책’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른 하나의 방식은 ‘물 타기’다. 취임 후 줄곧 ‘코드인사’, ‘정실인사’ 시비에 휘말렸던 참여정부가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으로, 일찌감치 내정자를 언론에 흘려 비판 분위기의 김을 빼 버린다.


2005년 2월 17일 청와대 홍보수석에 정식 임명된 조기숙 전 이화여대 교수가 대표적인 사례다. 조기숙 수석 발탁 사실은 공식 발표가 있기 무려 20일 전쯤에 청와대측이 출입기자들에게 ‘엠바고(일정시점까지 보도제한)’를 걸어 귀띔해줬다. 이병완 전 홍보수석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한 직후다. 정부 인사 내용의 엠바고 기간이 통상적으로 2~3일 정도에 불과한데 비해 조기숙 수석의 경우 그 기간이 길었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는 청와대 관계자는 없었다. 그렇지만 청와대 기자실에서는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비판여론이 들끓을 것에 대비해 물 타기를 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교수 시절 조선?동아 등 보수언론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던 그에게 청와대 언론정책의 책임을 맡길 경우 시비가 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적대적’ 언론사들도 인사 내용을 미리 알게 해 김을 뺐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노무현 대통령 주변의 386세대 가운데 맏형 격인 이호철 씨가 같은 해 2월 25일 제도개선비서관 직함을 달고 청와대로 복귀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참여정부 출범 때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맡았던 그는 ‘좌(左)회정, 우(右)광재, 중(中)호철’로 불릴 정도로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청와대에 재입성할 경우 ‘노사모 386’이 다시 청와대를 장악한다는 지적이 일 것이 염려됐다. 당시 이호철 비서관이 돌아올 것이란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한 달이 훨씬 넘었고, 그 사이에 기자들의 비판의식은 무뎌졌다.



대통령과 정치
경선에서 이긴 사람이(대통령의 후계자)

- 노무현, “경선에서 이기고 오는 사람이 후계자”
2007년 연말 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범여권의 자천?타천 잠룡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제도 정치권에선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영남후보론을 내세우는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 정동영?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천정배 전 법무장관,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있었다. 여기다 비정치권의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오픈 프라이머리(개방형 경선제도) 참여를 저울질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가운데 누구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향간에는 자신과 정치 스타일이 유사한 유시민 장관을 꼽거나, 자신과 같은 ‘PK인 김혁규 전 지사에게 무게를 두고 있을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핵심 측근인 이강철 대통령 정무특보는 2007년 3월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노심(盧心, 노대통령의 의중)은 없다”고 못 박았다. 이 특보는 “노 대통령의 성격상 누구를 밀어주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그랬듯이 오픈 프라이머리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후보가 곧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도 임기 내내 후계구도를 둘러싼 여권의 암투 때문에 애를 먹었다.


- 임기 중반부터 불꽃 튀는 후계 경쟁
2005년 6월 8일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열린우리당 내 호남세력의 맏형격인 염동연 의원이 상임중앙위원직을 전격 사퇴했다. 표면적인 사퇴의 변은 “안팎의 시련에 직면한 대통령과 당의 어려움을 덜고자 하는 순수한 충정에서”였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염동연 의원의 당직 사퇴를 결코 ‘순수하게’ 파악하지 않았다. ‘차기’를 겨냥한 세력들 간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이 많았던 것이다. 심지어 염동연 의원이 모종의 비리에 연루돼 있고, 이를 빌미로 여권 일각에서 2선 퇴직을 압박했다는 얘기까지 권력 주변에서 나돌았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을 돌기도 전에 ‘후계구도’를 둘러싼 권력다툼이 본격화되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됐다. 특히 참여정부의 권력을 형성하는 세 축인 열린우리당-행정부-청와대가 부쩍 난타전을 벌였다.


고영구 국정원장 후임 인선을 둘러싼 당?정?청의 힘겨루기, 이해찬 국무총리의 ‘대통령 측근 주의보’와 이에 맞선 염동연 의원의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 등 권력 주변에서 아슬아슬한 파워게임이 이어지는 것도 후계구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 이상 남은 시점에 후계자를 노리는 세력들이 막후 암투를 벌인 것은 역대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찌감치 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로 자리매김해야 인재가 몰려들고 자금도 풍족해지기 때문에 언제나 고지 선점을 위한 알력이 있었다. 청와대 사람들도 현직 대통령의 임기 중반쯤 되면 슬슬 ‘줄서기’를 시작한다. 대부분은 현직 대통령의 의중이 누구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는지 살펴 그쪽에 고급정보를 제공하는 등 정권 차원에서 필요한 도움을 준다.


그러나 때로는 대통령의 뜻과 상관없이 제3의 인물에게 과감하게 ‘베팅’하는 참모들도 있다. 후계자로 낙점될 가능성이 희박한 후보자를 청와대의 힘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도운 뒤 만일 그 후보자가 실제로 권력을 잡으면 한 몫 단단히 챙기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이런 사례는 여권의 대선후보를 완전 자유경선으로 선출했던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많았다. 국민의 정부 중반 이후 적지 않은 청와대 사람들이 낮에는 대통령 비서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각 후보자의 비밀캠프에 모습을 나타냈다. 당시 동교동 가신 출신인 A비서관은 초기에 청와대가 밀었던 이인제 후보나 동교동계인 한화갑 후보가 아닌 김중권 후보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줄을 서는 바람에 동교동 사람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그렇지만 ‘후계자’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인물은 역시 현직 대통령 자신이다. 정책의 연속성 차원 외에도 누구를 후계자로 고르냐에 따라 퇴임 후 자신의 신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언론
기자에게 박치기를 날린 이유는?(대통령과 기자들)

- 산행 인터뷰와 언론과의 긴장관계
2005년 3월 27일 일요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상주하는 춘추관이 아침부터 붐볐다. 전날 홍보수석실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출입기자들의 동반 산행이 이날 오전부터 있을 것이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약 1년 전인 2004년 3월 12일 있었던 노 대통령과의 산행을 떠올리며 필기도구나 녹음기, 카메라를 챙기느라 분주했다. 2004년 봄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는 바람에 직무가 정지돼 관저에만 머물고 있던 노 대통령은 새봄을 맞아 기자들과 함께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올랐다. 당시 노 대통령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이라고 자신의 심경을 피력하며 속에 있는 생각들을 많이 이야기했다. 기자들은 올해도 같은 코스를 오르는 노 대통령이 신상 대화에서 많은 속내를 털어놓을 것으로 선뜻 기대했고, 노 대통령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올 봄에는 꽃이 늦게 피는 것 같다”고 운을 뗀 뒤 2시간 30분 가량의 산행에서 끊임없이 기자들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중간 중간 쉼터와 산 정상에서는 ‘간이 기자간담회’까지 열렸다. 이를 통해 노 대통령은 민감한 사안, 특히 최대 현안이 돼 있는 한?일 관계에 대해 깊은 말들을 많이 했다. 때문에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파장이 예상되는 발언에 대해선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요청했다. 따라서 대통령의 산중 발언 가운데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대통령의 말을 기사로 다 쓰지 못했다고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다양한 현안을 놓고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국정 방향의 배경 설명을 듣게 된 데 대부분 만족했다.


그날 산행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급적 기자들과 스킨십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대선을 훨씬 앞두고 아직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지도 않은 경선 후보 시절, 청와대에 출입하며 김대중 대통령을 취재하던 기자 7~8명과 반주를 곁들여 저녁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서울 인사동의 허름한 술집에서 노무현 경선후보는 청와대 출입기자들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두고 봐라. 내가 청와대에 입성한다. 그러면 청와대 브리핑 시스템을 싹 뜯어 고치겠다. 공보실에만 맡기지 않고 미국 대통령처럼 주요 현안마다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직접 설명하겠다. 아울러 기자단도 없애고 백악관처럼 브리핑룸을 운영해 모든 언론에 문호를 개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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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노 후보의 말을 들은 기자들은 속으로 냉소를 띠었다. 당시 그는 이인제, 한화갑 후보에게 밀려 민주당 대선후보조차 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고, 만에 하나 대통령이 되더라도 대통령이 기자들을 직접 상대하기는 우리의 정치?언론문화에선 실천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대통령이 돼 버렸고, 언론과의 접촉도 대폭 확대했다. 청와대 기자실을 개방했는가 하면, 일요일이면 불과 몇 시간 전에 통보만 한 채 춘추관에 들르곤 해 기자들이 ‘일요일 노이로제’에 걸리게 했다. 조금 큰 현안이 발생하면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연다. 물론 “기자들과 소주파티하며, 기사 로비하지 말라”고 공무원들에게 엄명을 내리고, “국민의 정부를 봐라. 기자들 밥 사주고, 술 사주고 해도 물어뜯기는 마찬가지 아니더냐”고 참모들에게 말한 일이 대변하는 ‘언론과의 긴장 관계’는 별개 문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