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바오

   
마링 · 리밍(역자 : 지해범)
ǻ
w미디어
   
13000
2007�� 04��



■ 책 소개
지난 2003년 취임한 원자바오 중국총리는 후진타오 국가 주석과 함께 지난 5년 간 중국을 미국에 버금가는 ‘떠오르는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는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에 이은 제4세대 지도자 그룹의 핵심으로, 매년 10%가 넘는 고도성장의 경제력과 중국어를 기본으로 하는 소프트파워를동원, 아프리카와 중남미, 중동 지역에서 에너지 확보와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투철한 공무원 의식과 검소함으로 현재 중국에서 연예인 못지않게 인기를 누리고있는 원자바오 총리의 탄생과 성장, 남다른 재능과 총리 취임 이후의 활발한 활동, 정책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중국의 서민 총리’라 불리는원자바오가 2003년 취임 이후 벌였던 활약들이 고스란히 수록했고, 이런 그의 행로를 통해 중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또문화혁명 시기에 지식 청년들이 겪은 고초 및 성장 과정, 국가의 주요 정책결정 과정, 서부 대개발 사업의 계기 등 중국의 경제, 정치, 사회를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원자바오가 태어난 곳, 생활했던 곳, 옛 직장을 직접 찾아가 그를 겪어 보았던수많은 인물들과의 직접 인터뷰를 통해 지금까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지 못했던 원자바오 관련 다양한 자료와 사진들을 입수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펼친다. 특히 원자바오의 가족사, 총리 발탁 뒷이야기, 홍수를 막은 공훈 등 가치 있는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책은 원자바오란 인물을 통해 중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는데 매우 유용한 책이다.젊은 시절 문화혁명 시기에 중국의 지식 청년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게 되는지, 국가의 주요 정책 결정이 어떻게이루어지는지, 서부 대개발 사업이 어떤 연유로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저자 마링 ·리밍
중국 베이징의 중견 언론인 2인의 공저로, 이들은 책 본문에도 나오듯이 중국 총리를 직접 수행하고 보도한 기자들이다.하지만 정치적 문제 등을 고려해 구체적인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중국 정치 관련 책의 저자들이 가명을 이용해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있어왔는데, 이들의 이름은 실명이며, 그만큼 책 내용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는 점을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원자바오의 출생지는 물론 생활했던 곳과옛 직장을 직접 찾아가 많은 인물들을 만났고, 지금까지 보도된 적 없는 원자바오 관련 다양한 자료와 사진들을 단독 입수해 누구의 간섭도 받지않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썼다.『후진타오』에 이어 펴낸 두 번째 공저이다.


■ 역자 지해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 국제부 기자를 거쳐 북경특파원과 국제부장을역임했다. 현재 중국 전문기자로, 『세계가 뛰고 있다』(공저)를 펴냈으며, 『화교 네트워크』를 우리말로 옮겼다.


■ 차례
머리말


제1장 원자바오의 성장일기 
제2장 원자바오의 남다른 재능 
제3장 원자바오의명성을 일시에 떨친 대홍수 
제4장 원자바오와 후진타오의 공통점 
제5장 원자바오와 주룽지의 차이점과 공통점 
제6장 원자바오가앞으로 어떻게 홍콩을 밀어줄 것인가 
제7장 원자바오가 부패의 도전에 맞서다 
제8장 원자바오가 이끄는 중국 경제 
제9장정치인 후진타오와 경제인 원자바오의 협력


옮긴이의 말




원자바오


원자바오의 명성을 일시에 떨친 대홍수
1998년 여름, 장강 대홍수의 다섯 번째 물마루가 후베이성 징저우를 향하여 접근하고 있을 때, 장쩌민은 8월 13일 오전 격려차 샤시로 날아간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 지도를 펼치고 장강 제방 주변의 위험지역 위치를 살피며, 홍수와 싸우고 있는 재난구조 군 병력의 위치를 묻는다. “현재 강을 따라 총 몇 개의 부대가 동원됐나?” 장쩌민 주석은 건너편에 앉아 있는 장완니엔 중앙군사위 부주석에게 물었다. “인민해방군과 무장 경찰을 합쳐 모두 13만 명을 투입했고, 200만 명 이상의 민병도 있습니다.” “좋아! 국가 재해대책의 총지휘는 원자바오 동지가 한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임을 받아 일선에서 총지휘를 한다.” 장쩌민은 특별히 원자바오를 지명했다.


그 시각에 원자바오는 혼탁한 물이 일렁이고 있는 장강 제방에서 선비의 풍모를 갖춘 장군의 몸으로 백만의 군과 민중을 지휘하여 제방을 공격해 오는 홍수를 막아내고 있었다. 8월 16일, 장강의 여섯 번째 물마루가 밀어 닥치자 징저우의 장강 수위는 계속적으로 높아졌다. 그날 저녁 9시, 홍수는 마치 모든 걸 쓸어버릴 기세로 덮쳐 방류해야 할 위험 수위인 45m에까지 이른다. 후베이성은 방류를 요구했다. 원자바오가 징저우에 도착한 후, 현장의 비상대책 부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도대체 제방을 폭파해 방류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원자바오는 이 순간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10일 전, 주룽지 총리는 후베이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임위원회가 방류할 수 있는 ‘핵단추’를 재해대책 총지휘자인 원자바오에게 넘겼다고 발표했다. 알아둬야 할 것은 지난 1954년도 징저우의 방류로 인해 100만 명 이상의 농민이 논밭을 등지고 떠났다는 것이다. 물에 잠겨버린 논과 밭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방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하는 최후의 선택이었다.


원자바오는 심사숙고한 후에 과단성 있는 결단을 내렸다. “죽을 각오로 제방을 막아내어, 위험한 고비를 넘긴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원자바오를 대신해 손에 땀을 쥐며 걱정했다. 방류를 하지 않아 만약 제방이 터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누가 생각했으랴! 평소 태도가 온화하던 원자바오는 이날만큼은 위풍당당하고 의연하게 지휘를 하는 대장군과도 같았다. 제방을 보호하려는 대군의 탁월한 투쟁으로 대홍수는 마침내 퇴각했다. 사람들이 기뻐 승리를 외치고 있을 때, 원자바오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그는 자신을 발탁해 베이징으로 올려 보냈던 쑨따꽝 전 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험에 직면하여 임무를 받아 온통 걱정과 부담뿐이었습니다. 일단 제방이 견뎌내지 못하여 터지게 되면, 그것은 나의 정책 결정의 오류였습니다. 나는 도도한 홍수 속에 몸을 던져 순직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1998년 여름, 중국 화남 지역과 서남 지역의 동부, 그리고 동북 지방의 서북부에 장기간의 폭우와 집중호우가 몰아쳐, 장강 유역은 물론 동북 넌강과 쑹화강 유역에 역사적으로도 전대미문의 대형 수재가 발생하게 된다. 미친 듯한 폭우는 혼탁한 파도와 일렁이는 홍수를 밀고 가며, 남북으로 협공하여 한꺼번에 중화 대륙을 사납게 기습해 왔다.


후베이가 위험하다! 장시가 위험하다! 동북이 위험하다! 당시 중국의 헤드라인 뉴스는 거의 매일 홍수 소식에 관해 보도하고 있었다. 이재민을 구하고, 각 방면의 지원을 요청했다. 전국은 삽시간에 물과의 전쟁에 휩싸이게 됐다. 장쩌민, 주룽지는 잇달아 재난 지역의 제1선으로 향했다. 중국 중앙텔레비전 방송국(CC-TV)의 7시 저녁종합뉴스 화면은 주룽지가 위기에 빠진 후베이로 날아가 비행기에서 내려, 현지 구조에 나서고 있는 광저우 군구 부사령 꽁꾸청 장군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두 눈에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그렁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이 장면은 마치 갑자기 멈춘 정지 화면처럼 보였고, 많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1998년도 홍수가 생긴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원자바오가 홍수와의 한 바탕 격전을 치르면서 그렇게 과감한 용단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단지 텔레비전을 통해 원자바오가 왜소한 체격을 이끌고 폭풍 속에서 분주히 뛰어다니며 지휘하던 모습을 보았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당시 그가 국무원 부총리에 오른 지 겨우 반년이 됐으며 농업, 환경보호, 재해대책 등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강의 방류 문제 여부에 대해 결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던 원자바오에 대해 정부 당국은 공개적인 보도를 하지 않았다. 후베이 지역의 신문과 텔레비전 역시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아, 마치 고의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홍수를 물리친 공로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의 핵심 지도부 및 그 부서만이 기억하고 있었다. 홍수를 막은 원자바오의 장거에 대해 많은 대중들은 알지 못했지만 관료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은 자자했다. 총서기인 장쩌민으로부터 총리인 주룽지에 이르기까지, 중국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의 각 부서 고위 직원들도 원자바오에 대해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중국인이라면 우임금이 물을 다스린 이야기는 다 알고 있다. 4천여 년 전, 우임금은 처음으로 막힌 물을 통하게 하는 방법으로 황하의 홍수를 성공적으로 막은 선례를 남긴다. 물난리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추대까지 받았으며, 후에 순임금의 후계자로 추천 선발된다. 원자바오의 치수와 우임금의 치수를 비교할 수는 없어도 그 결과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건 바로 그가 나중에 주룽지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총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많은 요소들이 있겠지만 1998년도 홍수를 막았던 공로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원자바오를 걱정했었다. 물과 불은 원수도 못 갚는다는 말이 있다. 만약 제방이 터졌다면 그 결과는 상상도 할 수 없다. 하류는 바다로 변했을 것이고, 인명 피해는 물론 징저우와 우한 및 장한의 유전에 큰 손실을 갖고 왔을 것이다. 원자바오 역시 그런 결과는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의 이익이 우선인가, 아니면 인민의 안전이 우선인가? 그도 당시 머리를 굴리며 묘수를 찾고 있었을까? 만약 개인의 이익을 우선으로 한다면 방류 결정을 하지 않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수위가 45미터를 돌파했고, 그는 공평하게 방류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이는 무엇도 거스르지 않는 적당한 조치로써 방류 규정이 원자바오 개인에게는 어떤 위험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원자바오는 “明知山有虎(명지산유호), 偏向虎山行(편향호산행) - 저 산에 호랑이가 있으면, 나는 호랑이 있는 산으로 갈 것이다” 심정으로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 장강 우측 연안은 남쪽으로 뚱팅호 평원이고, 좌측은 만경창파의 장한 평원이었다. 장강 제방은 후베이 장린현 짜오린깡 남쪽에서 지엔리현 남쪽까지 1,100만 무의 경지와 8천 만 명을 보호한다. 그는 학생 때부터 농민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어 중요한 시기에 이기심을 버리고 농민을 위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홍수는 재해지역 사람들에게 크나큰 손실을 안겨주었다. 그해 8월 22일 통계로, 전국 2억 2,300만 명이 수해를 입었고, 가옥 피해 497만 가구, 수해 면적 3억 1,800만 무에, 피해 면적만 1억 9,006 무에 달했다. 직접적 경제 손실만 1,666억 위안으로 추산했다. 이런 세기적인 대재앙 앞에 선비의 풍모를 갖춘 무장 원자바오가 홍수 방지의 총지휘를 맡아 수백만 명의 군사를 지휘했다. 홍수와 맞선 대규모 토벌 작전을 벌이고 이를 막아내어 한 시대의 군을 이끈 인물의 풍모를 드러낸 것이다.



원자바오가 이끄는 중국 경제
원자바오는 이미 주룽지로부터 중국 경제에 관한 권력을 이어 받았다. 그러나 중국 경제의 다음 단계 실천방향에 대해서 그는 새 정부의 차별성을 제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옛 정부와의 공통점만을 강조하는 데 주력했다. 서방 국가에서는 새로운 인물이 나오려 하거나, 혹은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반드시 독자성을 보이며 구 정부 및 그동안의 정책과 다른 점을 홍보해 유권자의 기대와 지지를 얻어내려 한다. 그러나 중국은 그와는 정반대인데, 반드시 붉은 깃발을 높이 올려 세우며 구 정부에 대한 존중과 그 정책에 대한 지속성을 표현해야 한다.


비록 원자바오가 주관하는 것이 중국 경제이지만 중국 내에서 권력을 잡고 태도를 표시하는 것은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이다. 중국은 일당 권력 국가로, 서방 국가처럼 양당 혹은 다수당이 경쟁하면서 통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 신입 정부의 권력이양은 자연히 서방 국가처럼 선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체를 주도할 당간부의 선발로 이루어진다.


원자바오는 2002년 12월 말 인수 작업이 한창이던 시기, 전국계획회의에서 “최근 몇 년 간 우리는 내수 확대 방침과 적극적 재정 정책, 그리고 안정적 화폐 정책을 실시하여 국민 경제가 지속적으로 신속, 튼튼하게 발전하도록 촉진했다. 실천으로 증명하는 것이 명확하다. 내년에도 계속해서 거시 경제정책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실제로 중국 경제에서 2002년만큼 경기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 연간 국내 총생산액은 10조 위안을 넘어 전년도보다 8%가 증가했고, 1인당 GDP는 1천 달러에 근접했다. 외국의 대중국 직접투자는 처음으로 미국을 넘어서면서 세계 1위가 되었다. 중국 경제가 비록 대호황일지라도, 결코 모든 지역의 상황이 좋기만 하고 근심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껏 많은 경제학자들이 “중국이 다년간 시행했던 ‘적극적 재정 정책과 안정적 화폐 정책’은 반드시 강도를 약화시켜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했었다. 원자바오도 중국의 통화 긴축이 아직 계속되어 국채 발권을 늘여 경제를 유지하는 식의 이런 비(非) 시장경제 수단을 핵심으로 하는 ‘적극적 재정 정책’은 장기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분명히 장기적으로 확장성 재정 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적으로 시장에 투자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성 재정 정책으로 진행하는 국채투자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일단 적극적 재정 정책을 중지하면 GDP 증가가 완만해지고, 국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동반 상승하여, 위험이 그 속에 잠복해 있다. 또한 어떤 전문가는 “적극적 재정 정책이 바로 퇴출되는 건 불가능하고, 이 정책을 사회보험과 노동보험 방면의 건립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낫다”라고 건의했다.


내가 경제학자 우징리엔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그는 원자바오가 취임 후 국채 발행을 줄이고 점차로 적극적 재정 정책을 완화시키는 단계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징리엔도 중국에서 단순히 경제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경제는 역시 정치와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자바오가 막 취임했을 때 지방 세력과의 우호적 관계 유지도 고려해야 했는데, 지방 정부는 여전히 투자 전문 안건과 대규모 건설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단번에 확장성 재정 정책을 퇴출한다는 것은 현재 아직 현실적이지 않다.


원자바오는 선임자와 선배를 존중할 줄 안다. 또한 전반적이고 넓은 시각으로 국가의 안정을 고려해 모든 것을 조정할 줄도 안다. 원자바오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잠재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재임 동안 얼마나 큰 매력을 보일지 아직까지는 알 수가 없다. 중국의 정치와 경제는 시종 서로 얽혀 있다. 원자바오가 ‘구역을 재정비 중인 정치경제학’을 잘 처리할 수 있을까? 우징리엔 같은 경제학자도 관찰하고 있는 중인 듯하다. 우징리엔은 원자바오가 1998년 직면한 장강 홍수 방제 긴급 상황에서 보여준 능력으로 봤을 때, 그는 중요한 시기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필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원자바오가 취임하여 중국은 사유화의 길을 갈 것인가? 이는 국내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이다. 이에 식자들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고 한다. 중국은 지금 그 방향으로 묵묵히 가고 있다. ‘중국적 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는 ‘중국적 특색이 있는 자본주의’로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길로 갈 것인가?


중국은 1999년 헌법을 수정할 때 “국가는 사회주의의 초반 단계로 공유제 유지의 주체이며, 다양한 소유제 경제가 공동으로 발전하는 기본 경제제도이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공유제는 줄곧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기초로 여겨졌다. 만일 공유제라는 ‘껍질이 없으면’ 사회주의라는 ‘털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현재 비(非) 국유경제가 사회투자에서 차지하는 일부 액수는 이미 국유경제를 초과했다. 비국유경제의 중국 GDP에 대한 공헌은 이미 63%에 달한다. 그러나 중국이 ‘공유제’에서 ‘사유화’로 바뀌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도 멀다.


미래에 예건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극적 재정 정책과 안정적 화폐 정책이 국민경제의 움직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작아질 것이라는 것이며, 비국유경제가 국민경제의 움직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장차 갈수록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국가 정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비국유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전통적 정의에 따르면 공유제와 사유제는 사회주의제도 하에서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관계이다. 사회주의의 공유제는 사유제를 소멸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중국 개혁 개방 20여 년 이래 일찍이 공유제와 사유제는 서로 조화를 이루었으나 단지 중국이 지금까지 사유제를 천명하려 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단지 용어를 변환한 방식으로 ‘비공유제’ 혹은 ‘민영’이라고 말할 따름일 뿐 사실 내용은 완전히 같다.


원자바오는 실제를 중요시하는 사람으로 문제를 보고 일을 하는 데 있어 실질에 잘 직면한다. ‘사유화’ 문제에 원자바오도 응당 실제의 태도를 채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유화’라는 세 글자는 매우 복잡하며, 단순히 경제 문제만은 아니다. 그래서 최후에 ‘사유화’가 원자바오의 입을 통해 공개적으로 발설될 수 있는지는 ‘후진타오-원자바오’ 연합 체제에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용이 끼치는 영향은 매우 커서 결정이 힘든 것이다. 일부 식자들은 중국 경제가 건강하게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오로지 ‘사유화’의 길을 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단언한다.


원자바오는 지금 경제를 손에 넣고 지휘봉을 휘두르고 있다. 그의 총체적 느낌은 분명히 그 책임감이 기쁨보다 클 것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조금도 대충일 수 없다. 이에 그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미 얻은 영예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가이다.


현재 중국은 동서가 분화됐고, 도시와 농촌이 분화됐고, 지역이 분화됐고, 사회 계층 간 빈부가 분화되어 소위 ‘마태 효과(馬太效應)’라는 것이 형성되었다. ‘마태 효과’란 부자는 갈수록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갈수록 가난해진다는 것이다. 가난과 가난의 차별에서 가난과 부자의 차별까지, 그리고 다시 부자와 부자의 차별까지 길이 아주 멀고도 험하다. 중국은 현재 상품의 ‘과잉’과 ‘결핍’이 병존한다. 가격 하락이 효과적으로 수요 부족을 해결할 수 없으며, 가격이 효과적으로 공급과 수요를 조절할 수가 없다. 자금의 ‘과잉’과 ‘결핍’이 병존하고 있어 이율의 하락이 소비와 자본시장 발전을 촉진시킬 수 없으며, 자금이 효과적이고 합리적으로 배분되도록 할 수 없다. 노동력에서도 ‘과잉’과 ‘결핍’이 병존하는데, 임금이 효과적으로 노동력 자원의 공급과 수요를 조절할 수 없다. 국민경제는 전반적으로 ‘시장 불능’과 ‘정부 무능’이 특수하게 병존하는 상태이다. 국유은행의 자금은 ‘국민들로부터 받아 기업으로 돌리는’ 시스템으로 통제되는데, 자금이 대량으로 경영이 불량한 국유기업으로 유입되어 한번 들어가면 회수되지 않는 상황이 형성된다. 국유기업은 대부분 여전히 손해를 보고 있으며, 손해 본 기업은 모두 채무를 감당 못하여 마이너스 장부의 누적 상황은 날씨가 춥지 않아도 떨게 만드는 정도이다.


종합적으로, 중국은 현재 4종류의 ‘이원(二元) 구조’가 존재하는데, 노동력을 핵심으로 하는 도시와 농촌의 이원 구조, 소유제와 재산권 구조를 핵심으로 하는 공유경제와 민영경제의 이원 구조, 자금 분배 시스템을 핵심으로 하는 국유금융과 지역금융의 이원 구조, 행정 구획과 산업 구조의 구별을 핵심으로 하는 지역 이원 구조이다. 그러나 ‘이원 구조’들은 상호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자연히 중국 경제에 수많은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것이다. 이로 볼 때, 원자바오가 중국 경제를 지속적으로 고속 성장시킬 수 있는가는 수많은 문제와 도전을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렸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2년 말 한 기사에서 중국은 현재 13억 인구로 세계적으로 소비품 수요가 최대일 뿐만 아니라 기본 개발이 되지 않은 원천지라고 지적했다. 중국은 세계 상업계의 최후의 만찬이다. 중국 농민은 과거 내내 현금이 없었고, 중국의 역대 정부는 외국 기업에 대해 걱정이 너무 많아서 이 꿈을 현실화시킬 생각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2003년 중국 소비자가 아시아 지역 발전을 촉진시키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세계 경제를 촉진시키는 한 해가 되었다. 중국은 아마도 상당한 규모의 변혁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그 경제는 계속 앞으로 뻗어 나아갈 것이다.


중국의 『경제 백서』에서 2003년 재정경제 형세에 대해, 2003년 거시경제가 계속 좋은 추세를 유지할 적극적 요인이 비교적 많다고 보고했다. 주요한 것으로 첫째, 중국 경제는 이미 안정적 성장 시기로 접어들었다. 둘째, 시장 주체의 자체적 발전 능력이 강화되었다. 셋째, 사회 소비가 안정적으로 증가되었다. 넷째, 세계 경제 회복은 중국에 충분한 외부 환경을 제공한다 등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2003년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첫째, 재정 출입 모순이 여전히 비교적 뚜렷하다. 둘째, 시장 가격이 지속적으로 내려가고 있다. 셋째, 사회 취업이 한층 더 약화된다. 넷째, 수입 분배 차이와 ‘3농’ 문제가 소비 수요를 한층 더 제약한다는 것이다.

?

전문가는 원자바오 시대의 중국 경제는 2003년에는 기초를 닦을 뿐이며, 진정으로 성숙하는 해는 2004년 이후가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중국 경제가 원자바오의 지도 아래 성숙된 후 어떻게 발전할지는 중국과 세계가 모두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문제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