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국가 시민사회

   
손호철 외
ǻ
이매진
   
20000
2006�� 10��



■ 책 소개
세계화와 정보화는 이미 한국뿐만 아니라전세계적인 화두가 된 용어다. 세계화·정보화는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아니라, 근대 이후 국가·시장사회 사이에 만들어진 제도적 관계에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세계화는 생산·금융시장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문화 영역에 걸쳐 총체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더불어 정보화의 진전은다양한 측면에서 세계화를 가속하는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화와 정보화의 결합은 국제 정치경제·국가·시장·사회문화·공동체 전반을 관통하면서기존 질서에 급격한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책은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시민사회의 관계 변화와 정체성을 다뤘다. 세계화·정보화 시대에이른바 국제정치와 국내정치의 구분이 모호해지며, 초국적 기업과 NGO 등 국가 이외의 행위자들이 국내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다는사실을 고려해, 일국적 수준과 국제적 수준을 동시에 분석했다. 또한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새롭고 질적으로 상이한 경향이 현재를 살고 있는 개개인의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결과 일어나는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를 전망했다. 특히 세계화·정보화라는 전세계적 흐름과 탈냉전이후 밀접해진 남북한 관계의 변화를 동시에 고려해 세계화·정보화 시대 남북한의 국가-시민사회와 정체성을 분석했다.


■ 저자 
손호철
 -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동양통신(현 연합통신) 기자로 일했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오스틴)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전남대 교수를 거쳐 2006년 현재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한국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정치학의 새 구상』『전환기의 한국정치』『해방 50년의한국정치』『현대한국정치 ― 이론과 역사』『신자유주의시대의 한국정치』『근대와 탈근대의 정치』『현대한국정치 ― 이론과 역사,1945∼2003』『3김을 넘어서』『빈 수레의 개혁을 넘어서 ― 손호철 교수의 노무현 정부 1기 주간 브리핑』이 있다.


최용환 -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대학원에서 「북한의 대미 비대칭 억지·강제 전략: 핵과 미사일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 분야는 북한의대외관계, 동북아 국제질서, 안보문제 등이며, 서강대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경기개발연구원 동북아지역연구부 책임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박용수 -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고려대학교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서 「민주화 이후 한국의 규제개혁의 정치」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 분야는 한국정치이며, 서강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 차례
1부 세계화·정보화 시대 남한의 국가와시민사회

세계화와 한국 국가의 성격 변화 ― 손호철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조합의 균열구조 변화: 한국통신 정규직과비정규직 간의 노동조합 내부 정치를 중심으로 ― 김 원 
한국 국가-시민사회의 변화와 제도개혁의 정치: 정치관계법의 변화를 중심으로 ―오승용 


2부 세계화·정보화 시대 북한의 국가와 시민사회
세계화·정보화 시대 북한 국가의 변화: 지도부의 대응과 그 평가를 중심으로 - 신지호 
세계화·정보화 시대 북한시민사회의 형성과 변화 ― 김영수 
세계화 시대 북한 국가-사회관계의 변화 ― 최용환 


3부 세계화·정보화 시대 남북한의 정체성과 통일
세계화시대 한국의 정체성 변화: 국민정체성의 법적 규정과 관련 정책을 중심으로 ― 전재호
세계화·정보화와 북한의 국가정체성 ― 김갑식
세계화 시대 남북한 민족주의의 특성 ― 박용수 


참고문헌 
게재 논문 발표지 
필자소개





세계화 국가 시민사회


1부 세계화?정보화 시대 남한의 국가와 시민사회
세계화와 한국 국가의 성격 변화 - 손호철

21세기 세계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경향과 화두는 세계화(지구화)?정보화이다. 지금까지 세계화?정보화에 관한 연구들은 남한과 북한을 각각 별개의 분석 단위로 설정하고 연구해왔지만, 세계화?정보화는 남한과 북한에 동시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주요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공통의 매개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남한과 북한을 총체적으로 보는 시각과 분석이 필수적이다. 특히 앞으로 남북한의 통일을 전망하고 준비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연구과제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 지구화, 국제화 등의 개념들은 아직도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개념적인 문제들을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국제화와 세계화를 구별하는 기준은 국가의 주권적 속성에 대한 변화와 인류는 하나라는 인식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즉 세계화는 ① 주권적 속성의 변화라는 현실 경향, ② 그에 대한 인식이라는 두 개의 주객관적 요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세계화와 국제화의 질적 차별성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화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세계화가 그 정의에 따라 국가의 주권적 속성의 변화, 즉 민족국가의 약화(극단적으론 소멸)를 의미하게 된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세계화의 내용에 있어서, 세계화 이론가들이 서술하는 세계화는 ① 소련 동구의 몰락에 따른 명실상부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출현, ② WTO 체제로 상징되는 새로운 단계의 자본의 지구화, ③ 정보화 혁명에 따른 시공간의 압축, ④ 환경 문제 등의 부상에 따른 인류의 상호의존성의 증대 등 차원을 달리하는 복합적인 현상을 총괄적으로 지칭한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서술되는 이상의 내용들은 민족국가의 약화와 강화를 둘러싼 대립적인 입장들과 마찬가지로 단절성의 문제를 해명해야 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즉 세계화의 내용으로 언급되는 1980년대 이후의 변화들이 얼마나 단절적인 것인가,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쟁점을 형성한다.


다양한 수준의 세계화를 구별하고, 이런 역사적 틀 속에서 현재의 세계화의 위상을 파악하고 그 문제를 인식하는 유물론적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세계화는 인류의 역사로서의 세계화, 자본주의의 역사로서의 세계화, 독점자본주의의 역사로서의 세계화, 그리고 최근의 세계화가 존재한다.


세계화 현상은 기본적으로 불균등 세계화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세계화의 불균등성은 우선 국가별, 지역별로 불균등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선진국에서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반면에 제3국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또한 진행 속도의 불균등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그 효과의 불균등성이다.


세계화가 이미 하나의 현실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반경향도 공존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그리고 그 향방은 결국 사회세력의 힘의 역관계와 투쟁, 전략의 문제이다. 궁극적으로 어떤 세계화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컨대 결국 세계화는 자본을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세계화와 민중을 중심으로 한 아래로부터의 세계화가 존재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본 주도의 세계화의 미래상은 "구매력이 있는 자들을 위한 동질화된 슈퍼마켓으로서의 세계"이며 구매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경찰과 유사-군사적 내지 군사적인 수단에 의해 배제되고 필요한 만큼은 억압되는" 세계화이다. 문화적으로도 이는 "새로운 지구적 미국화"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본 주도의 위로부터의 세계화와 지구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리바이어던에 비판을 가하고 저항하면서, 다양한 민주세력과 위로부터의 세계화에 의해 버림받을 소외세력을 전세계적으로 조직해 연대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전략을 수립해 투쟁해나가야 한다.


제3세계 국가의 일반적인 특징은 국가의 과대성장성과 중심성이다. 식민지의 역사적 유산에 따른 국가 장치의 과대성장, 경제적 토대와 사회계급의 미성숙에 따른 국가의 중심성 등 국가가 사회에 비해 과대성장하고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97년 경제위기 당시 김영삼 정권은 발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추진했지만, 실제로는 발전주의라는 낡은 박정희 모델과 신자유주의가 결합한 최악의 조합이었으며, IMF 위기는 국가의 실패와 시장의 실패가 중첩된 결과였다. 1997년 금융외환위기로 촉발된 IMF 관리 체제는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확대되어온 신자유주의가 세계화와 결합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지배적인 틀로 자리잡는 계기로 작동한다.


 IMF 관리체제 이후의 정치 경제적 전환의 핵심은 기존의 국가주도형 산업화 모형인 발전국가와 종속적 포드주의 축적 체제의 완전한 해체이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부응하는 종속적 신자유주의와 유연 축적에 의존하는 종속적 포스트포드주의 축적 체제, 더 정확히 표현하면 종속적 포스트포드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이다. 이런 전환은 복지국가가 부재한 상황에서 구조조정과 실업의 고통이 노동자, 여성, 장애인에게 집중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를 야기했고, 정치적 민주주의의 차원에서도 기존의 제한적 정치적 민주주의,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위임민주주의, 전근대적인 정당체계(지역정당체계)와 정당구조(사당체제), 정경유착, 대외적 종속성 등을 유지시키거나 오히려 심화시키는 효과를 낳은 바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한국의 국가 성격의 변화는 국가의 중심성과 그 기능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통상 신자유주의는 작은 국가, 다시 말해 국가의 축소를 지향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통념은 신화에 가깝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민영화, 탈규제, 복지 기능의 축소 등을 통해 국가의 축소를 지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부문에서는 국가의 규제 강화를 추구하고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것처럼 강한 국가를 지향하기도 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축소가 아니라 국가의 기능 조정을 의미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기능이란 면에서 한국의 독특성은 복지국가의 부재에 있기 때문이다. 오페식으로 표현하자면, 한국 국가는 원래 예전부터 상징 조작 이외에 물질적 복지 등을 통한 정당화 기능은 거의 없이 자본 축적 기능만을 수행해왔다. 굳이 복지제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고도성장에 따른 낮은 실업률과 안정된 고용이었지만, 그나마 신자유주의적 노동 유연성을 도입하여 복지 기능은 더욱 악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복지국가의 부재와 정리해고 및 실업의 일상화라는 최악의 조합, 즉 동아시아 모델과 서구 모델의 나쁜 점만을 조합한 형태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경우 슘페터적 근로 국민국가에서 탈민족적 자본유치 국가로 전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종속적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모델로 형성되고 있고, 선진국과의 경쟁은 포기하고 선진국 금융자본의 하위 파트너로 편입하는 국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동안 한국 국가가 그 이익을 대변해 온 국내 독점자본, 즉 재벌과 해외 독점자본 중 후자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지고 이들의 이익을 과거에 비해 더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추세이다. 단적인 예가 외국인 주식 소유 비율의 엄청난 상승이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1998년 6월에 3.77%였던 외국인 주식 소유는 2004년 5월말 43.7%까지 상승해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사회적 갈등의 격화를 관리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경찰국가의 성격도 보이고 있다.



2부 세계화?정보화 시대 북한의 국가와 시민사회
세계화 시대 북한 국가-사회관계의 변화 - 최용환

탈냉전 시대 세계화는 매우 강력하게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유독 북한은 세계화 물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섬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은 동구권 붕괴 이후에도 자유주의?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는 것이 주는 영향, 즉 우호적인 동구권의 붕괴로 인한 국제적 고립이라는 측면에서 북한은 세계화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냉전 체제의 붕괴와 이후의 세계적 질서는 이에 편승해 있던 북한 체제에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폐쇄체제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자력갱생과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은 북한의 대내외 경제정책 운영과정에 있어 기본 노선이었다. 설사 북한이 대외개방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미국이 가하고 있는 제재 조치를 극복하지 않는 이상 세계경제에 편입될 수도 없다. 미국은 대단히 포괄적이고 엄격한 경제제재조치를 북한에 가하고 있다.


1990년대 미국의 식량난에 대한 한 연구는 식량 원조로 초래된 북한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지적하고 있다. 이 논의에 따르면, 원조된 식량이 전용되면서 시장이 활성화되고 북한 주민들 사이에 외부세계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심어졌다. 또한 배급 체계의 붕괴와 경제?식량난은 2차경제(지하경제)의 성장을 가져왔다. 2차경제는 합법?비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었으며, 경제활동의 전 영역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고립된 결과 북한 경제에 위기가 도래했으며, 이는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의 확대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북한의 경우 주민들은 여전히 엄격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살고 있으며, 이에 저항하면 즉각 처벌이 가해지는 강압적 통치체제 역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북한 주민들은 공식적인 행위, 특히 정치 행위에 있어서는 국가의 공식적 요구에 순응하고 있다. 방어적 시민사회운동이라고 할 만한 조짐들은 탈북자의 인터뷰 등을 통해 간헐적으로 접할 수 있으나, 조직화 정도는 아직 미약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방어적 시민사회운동보다는 제2사회라는 비공식 영역의 확대에 대한 증거는 뚜렷한 편이다. 아직 북한은 신민에서 시민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존재하는 두 가지(공식, 비공식) 사회의 병행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병행 현상이 북한의 국가와 주민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영향에 대해 북한의 국가와 주민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북한의 경우 제2사회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영역은 경제 부문이다.


중앙에 의한 계획적인 자재공급기능의 와해와 만성적 물자부족 상황은 국영?집단 부문에 대한 국가독점 현상을 약화시키게 된다. 이는 공장?기업소 단위 등 일선의 공식계획영역에서의 2차경제화 현상 내지 반(半)사적 기업화 현상을 증대시키고 있다. 또한 공장의 가동률이 30% 이하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노동자들이 출근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경우가 증가하고, 배급제의 불안정성은 공장?기업소의 노동에 대한 통제를 약화시키고 있다. 결국 노동자, 인민들은 생존을 위한 자구책 모색을 위해 점차 2차경제에 의존하게 되고, 국가는 계획경제체제의 작동이 어려운 상태에서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2차경제의 성장은 비공식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며, 계획경제 하의 일탈과 부패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북한은 이미 1992년에 임금 및 물가 인상, 화폐 교환 조치를 실시한 바 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997년에 나진-선봉 지대에서 환율을 조정하고, 자영업과 국경자유시장을 허용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이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런 변화와 실패를 종합해 2차경제 영역의 변화를 계획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획기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2002년의 7?1경제관리개선조치이다. 


7?1조치의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 임금을 약 15~20배 인상하여 물질적 인센티브를 강화한 것이다. 둘째, 물가를 현실화하여 평균 25배 인상하였다. 셋째, 지배인 중심의 책임 경영을 강화하고 독립채산제 실시를 강조하였다. 넷째, 경제 하부단위의 자율권을 확대하였다. 다섯째, 무상공급과 국가 보상 등 각종 혜택을 폐지하였다.


7?1조치는 이전의 북한 경제정책 변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첫째, 경제 위기가 가져온 현실적 변화를 북한 당국이 수용한 것이며, 국가의 거시경제 운영 능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변화가 시도되고 있다. 둘째, 이 조치는 과거와 달리 개방보다는 개혁이 우선 추진되고 있다. 셋째, 국제 시장 환경 변화에 따라 북한 역시 경쟁력 있는 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7?1조치는 그동안 확산된 비공식 부문을 흡수함으로써 공식 부문을 정상화하고 계획경제 메커니즘을 복원하겠다는 시도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북한이 복원을 시도하고 있는 계획경제 메커니즘은 과거와 같은 지령형-중앙집권형 계획 경제가 아니라 분권형-유도형 계획경제이다. 이는 현실의 경제 여건상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에 입각한 기존의 지령형 계획경제로의 복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중앙 정부의 역할 축소, 하부 단위의 자율성 강화, 인센티브제도의 도입, 기업관리방식의 변화 등을 통한 분권형-유도형 계획경제로의 이행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3부 세계화?정보화 시대 남북한의 정체성과 통일
세계화 시대 남북한 민족주의의 특성 - 박용수

세계화의 영향력이 커지고 그 범위가 넓어지면서 민족주의가 약화될 것이라는 예측이 주장되기도 했지만,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오히려 민족주의의 표출이 강화되고 있다. 최근 세계화의 수준과 성격이 단절적인 것은 아니지만, 과거와 다른 새로운 특징들을 무시할 수 없다. 우선 그 영향력의 지리적 범위와 부문별 심화 정도에서 최근의 세계화는 과거 어느 때보다 광범위하고 심층적이다. 서비스 교역이나 교통 및 정보통신 등 현재 세계화의 물질적 기반은 과거 어느 시기보다 강하다. 인구 이동의 경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는 주로 특정 지역으로의 1회 이동으로 그치는 이민의 방식이었다면, 최근에는 이민 이외에 인구 이동 원인이 다양하며 유동성이 크다. 이런 최근 세계화의 특징은 이질적 문화의 접촉이나 충돌 또는 융합 과정을 통해 민족주의를 약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시킨다.


다른 이념과 결합되고 다양한 정치?사회 현상을 통해 나타나는 민족주의는 나름의 논리적 구성을 갖는 여타 이념들과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는 사상의 논리적 체계화를 통해 이상향을 추구하는 여타 이념과는 달리 전근대 시대의 종교를 대체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측면에서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집단과는 달리 자신의 집단이 주권을 가진 민족임을 인정받고자 하는 집단적 욕구의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민족주의란 주권을 매개로 하는 집단적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약소국의 경우 국제 환경에 대한 대응 방식이 극단적이기 쉽다. 남한의 지배세력은 정부 수립 직후 미국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생존 전략을 채택했다. 대미 의존성의 극단성은 전근대시대 중국과의 사대관계와 비견될 정도였다. 1980년대 이전 한국인들의 미국관은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라는 환상과 신화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남한의 어떤 지배 이념도 미국과의 동명관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것은 민족주의적이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에서 반공이념은 공산주의를 막아내자는 방어적 의미의 이념이 아니었다. 남한에서 반공주의는 전쟁과 대량학살 그리고 테러를 통해 뿌리내린 극단적인 지배 이념이었으며, 존재하는 빨갱이를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빨갱이를 만들어내는 자기재생산적이고 공격적인 이념이었다. 이런 반공이념의 안티테제는 민족주의보다 민주주의에 가깝다. 반공이념이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있다는 이런 판단은 권위주의 정부들의 다른 매개를 통한 민족주의 동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예를 들어 이승만 정부는 많은 부분 친일파에 기초하면서도 일본과의 국교수립을 거부하면서 반일민족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남한의 지배 이념 중에 또 하나 중요한 것으로 발전주의를 꼽을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개발자금을 차관에 의존하고 수출에 모든 자원을 집중시켰다는 점에서 내용상 대외의존성이 강했다. 박정희 정부의 발전주의가 국제주의적 경향이 강했지만 발전주의가 갖고 있는 민족주의적 측면은 무시할 수 없다. 발전주의는 그 추진방식과 상관없이 민족주의의 전형적 양상인 부국강병론의 맥락에서 전개되었다.


세계화 시대에 접어들어 남한에서는 기존의 지배 이념이던 반공이념이나 발전주의가 약화되고, 신자유주의 이념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지배력은 권위주의를 대체하고 등장한 민주주의도 시장을 효율성을 침해한다면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다. 신자유주의가 전면에 부각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의 강화는 제한적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IMF 관리체제 하의 상황은 세계화 시대 남한에서 민족주의 표출이 제약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경제주권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1945년의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같은 민족주의 현상을 불러오지 않았다. 이것은 세계화 시대 민족주의가 한국에서 지배이념의 위상을 지니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IMF 구제금융의 조건은 단순히 가혹할 뿐 아니라 불공정성이 두드러졌다. 위기 원인을 크게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구분한다면, IMF의 처방은 일방적으로 내인론에 기초한 셈이다. 게다가 한국에 투자한 외국자본을 피해자로 규정했다. IMF의 처방은 실물경제에 악영향을 미쳐, 1998년 한국 경제는 공황으로 치달았다. 그 처방은 한국의 위기가 러시아와 남미에 영향을 주고 세계공황의 조짐을 보인 1998년 9월에야 비로소 완화되었다. 결국 IMF도 한국에 대한 조치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경제위기 발생 시 동맹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국제기구에 의해 과도한 책임을 부과받으면서 공황으로 악화된 1998년 남한의 경제 상황은 폭발적인 민족주의 분출의 환경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주요 신문기사에서 외국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발이나 분노의 표출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시기에 나타났던 민족주의 현상은 저항적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 모으기 운동이다. 1998년 2월부터 3월까지 두 달 동안 이 캠페인에 350만 명에 참가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민족주의의 현상을 보면 배타적이라기보다 순응적이었다. 금 모으기 운동은 일제시대의 국채보상운동을 연상시키는 민족주의 현상으로서, 외환 위기의 책임을 고스란히 우리 국민들이 떠안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현상 속에서 외국자본이나 외국에 대한 어떤 위협이나 배타적인 보호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대외적인 문제 제기로는 1997년 대통령 선거 운동과정에서 김대중 후보가 제기했던 IMF와의 재협상론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당시 주요 대통령 후보 세 사람은 모두 선거 이전에 IMF에게 기존 협상내용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했다. 당시 외국자본이나 IMF에 대한 비판은 위기로 인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놓치는 태도로 비난받았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결정적인 위기 시 남한에서 미국이나 외국자본에 대한 반대나 거부를 하는 민족주의는 세계화 시대에도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 민족주의가 남한에서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을 계기로 2002년 말 촛불시위가 발생했다. 촛불시위는 문화행사를 연상케 할 만큼 자기절제적으로 전개되었다. 즉자적인 반발도 아니었다. 여중생 사망 사건은 6월에 발생했고, 촛불시위는 그해 12월에 시작됐다. 6개월 동안 시민단체들이 소규모 항의시위를 계속했고, 미군 피의자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인터넷상에서 대중적인 촛불시위가 공론화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촛불시위가 반미감정에 기초한 즉자적 대응이 아니라, 신중하면서도 인본주의와 법치주의에 기초했음을 의미한다.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때 나타난 국민들의 열광적 응원은 촛불시위와는 다른 성격의 민족주의 현상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 긍지가 국가대표 축구팀의 연승으로 폭발한 민족주의였다. 응원에 태극기가 활용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명을 구호로 사용하면서 개인들은 국가적 행사의 엄숙함을 걷어내고 재미를 만끽하며, 과감하게 자기과시를 하면서 공동체 의식을 발현했다. 월드컵 응원을 통해 세계화?정보화시대 한국에서 민족적 자긍심이 축제의 양상을 통해 분출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것은 예외가 아니다. 이런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북한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강렬하고 예민하다. 세계화 시대 더 이상 사회주의 블록의 지원이나 동조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외전략과 경제적 측면에서 북한의 태도 변화가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식량난과 경제마비 상황에서 개건, 개선의 이름으로 개인에 대한 인센티브 부여 시스템을 확대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북한 지배이념의 핵심 개념인 자주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있다.


대외전략 측면에서도 1998년 개정된 헌법은 자주, 평화, 친선을 대외목표로 설정했는데, 이는 과거 혁명과 해방을 목표로 설정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제2차 북핵위기 과정에서 북한은 미국에 대해 핵개발 시도를 포함한 소위 벼랑끝 외교를 견지해왔지만, 벼랑끝 외교의 목표로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했고 해결방식에서도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통한 일괄타결에 집착했다.


북한의 전투적 민족주의가 완화되는 조짐은 남한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남북한 기본합의서와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남한체제와의 공존을 수용한 북한의 통일전략의 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속적인 이산가족 상봉, 공단 개발, 관광 허용 및 관광지 개발, 남북한 철도 개통 등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든 협조관계가 확대되고 있다.


북한은 민족공조 노선을 넘어 전방위 외교전략, 다시 말해 거의 모든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남아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 노력은 일정한 성과를 낳고 있다. 이것은 민족주의보다 국제주의적 경향에 가깝다.


북한은 정보화와 관련해 21세기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해 산업화 과정을 축소하고 정보화를 추구하는 단번도약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 특히 IT 기술의 개발에 주목하고 있다. 시장을 도입하는 북한은 저발전 국가들이 추진하는 국가주도 발전주의 전략에 가깝다. 북한의 경제정책은 단순히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조치는 아니며, 경제강국을 만들기 위한 조치이다. 경제강국은 사상강국, 군사강국과 더불어 북한을 강성대국으로 만드는 주요 측면 중 하나이다. 강성대국은 민족주의의 전형적 목표인 부국강병과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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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 남한과 북한의 민족주의는 기본적인 차이가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전투적 또는 근본주의적 경향이 완화되거나 자기조절적 또는 보편가치에 친화적인 경향이 강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발전주의적 요소를 통해 남한과 북한의 협조의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남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북 평화전략은 북한을 새로운 투자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반면에 북한 민족주의의 개방적이고 온건한 방향으로의 전환은 체제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조치이다. 즉 남한과 북한은 서로 국가 이익의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화 시대 남한과 북한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는 조심스럽지만 평화 협조에 긍정적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원초주의적 관점에서 남한과 북한의 민족주의를 무리하게 동일시하거나 규범적 관점에서 민족주의 현상을 극단적으로 평가할 때 과도한 반응과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