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변동

   
김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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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
   
17000
2006�� 08��



■ 책 소개 
해방 이후부터 2006년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 정치사를 "분단", "산업화", "힘겨룸"이라는 세 가지 요인으로 분석한 책. 한국의 정치 변동을 권위주의와민주주의 교차 및 궁극적인 민주화라는 "주요 변동"과 일인 지배 체제의 성립과 그 해소라는 "부차적 변동"으로 나누어 살폈다.

 


5.16 쿠데타의 원인과 성공 요인, 유신체제 탄생에 대한 계급론적 설명이 타당하지 않은이유 등 여러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쟁점들을 다루었다. 또한 정치 "체제"의 거시적인 성격과 변화에 주목하여 1인체제의 해소뿐만아니라 지역주의의 해소, 이념적 개방과 민주제도의 발전, 정치인들의 자질 향상 등 민주 발전의 과제들도 언급하였다.


■ 저자 김영명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며 한글문화연대 대표이다. 지은 책으로 『일본의빈곤』『동아시아 발전 모델의 재검토』『고쳐 쓴 한국현대정치사』 등이, 옮긴 책으로 『벌거벗은 지식인들』 등이있다.

■ 차례
머리말


제1장 분석틀
제2장 민주주의의 도입과 타락
제3장 4월 봉기와 민주당 정권:민주주의의 짧은 부활
제4장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탄생과 변모
제5장 산업화, 안보, 권력의지: 유신체제 탄생의 원인
제6장유신체제의 성격과 모순: 일인 지배의 총력안보 체제
제7장 군부의 재집권과 민주화의 실패
제8장 잉여 군사정권과 민주화의 정치 동학:전두환 정권
제9장 노태우 정부와 민주주의의 되살림
제10장 민주화의 진전과 일인 지배의 지역 붕당체제: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정권
제11장 한국 민주주의의 성격과 과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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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변동


분석틀
정치변동의 원인 : 분단, 산업화, 힘겨룸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정치체제 변동에는 어떤 요인들이 작용할까? 정치체제가 형성되는 경로에는 진화, 혁명, 외부로부터의 이식 등 다양한 것이 있다. 이 책에서는 한국 정치체제의 주요 변동을 일으킨 핵심요인을 분단, 산업화, 힘겨룸의 세 요인으로 파악한다. 한반도의 분단이 한국의 정치체제와 변동에 미친 요인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① 분단은 미국이 주도한 세계 정치?군사적 전략 구도에 한국이 편입되었음을 뜻한다. 대한민국의 성립 자체가 미국의 영향이었다.
② 이런 상황은 한국의 정치 과정에 미국 정부가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었다.
③ 6.25전쟁으로 군부를 중심으로 국가기구가 크게 강화되었다. 반면 전통적 지배계급이 해체되고 새로운 계급은 탄생하지 못한 결과 사회세력들은 매우 취약하여, 이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오랫동안 가능하게 되었다.
④ 분단은 한국 사회와 국가에 반공 이념과 보수주의를 팽배하게 하였다.
⑤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는 군부의 비대로 말미암은 군부 통치를 쉽게 만들었다.
⑥ 국가 안보 문제는 국가 권력자와 보수세력으로 하여금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할 여지를 제공했다.
⑦ 분단 상황을 끝내고 통일을 이루려는 민간운동은 한국의 정치 과정에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⑧ 북한 관련 정책과 통일 노선들이 정치세력들 사이의 힘겨룸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자본주의 산업화가 한국의 정치 변동에 미친 영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①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은 한국 정치, 경제의 근본 성격을 규정했다.
② 국가가 주도한 산업화의 성공은 권위주의 지배세력의 물적 토대와 정치적 정당성을 가져다 주었다.
③ 산업화 속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에 처음부터 국가의 통제에 놓여 있던 노동계급은 오랫동안 국가나 자본과 싸울 만한 조직력과 결속력을 갖출 수 없었다.
④ 경제 성장의 과실은 중간계급과 상층계급의 정권에 대한 지지나 묵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상당히 이바지하였다.
⑤ 산업화는 그것을 추진한 세력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회 구조의 다변화를 초래했고, 결국 정치적 민주화에 영향을 주었다.
⑥ 산업의 불균형 발전이 계급 갈등과 지역 갈등을 야기했다.
⑦ 경제 위기는 산업화 과실에서 소외된 세력의 구조적 불만을 폭발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힘겨룸은 모든 정치현상의 한 본질이지만, 여기서는 한국 정치체제의 형성과 변화에 관련되는 문제들로 국한한다. 힘겨룸의 수준은 국가 안, 정치사회 안, 국가 대 민간사회, 그리고 민간사회 안 등 네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힘겨룸의 토대 중 한국 정치 변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들은 계급, 이념, 지역, 그리고 정치권력이다. 이 중 계급과 지역은 정치 행위자의 소속에 관한 것이고, 이념은 행위자의 선택에 관한 것이다. 소속에 관한 것은 원초적인 힘겨룸의 토대인데, 그 가운데 지역이 가장 원초적이고 계급이 그 다음이다. 한국에서 나타났던 힘겨룸의 구체적인 쟁점들은 민주화, 사회개혁, 남북한 관계와 통일, 그리고 권력배분에 관련된 문제들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분단, 산업화, 힘겨룸의 세 요소는 이론적 성격이 서로 다르다. 분단은 한국의 특수한 현실이며, 산업화가 정치체제에 미치는 영향은 변동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힘겨룸은 산업화보다 더 보편적인 것으로서 정권 변화를 포함한 모든 정치 현상의 한 본질을 이룬다. 따라서 이론적인 지위로 보면, 산업화와 힘겨룸이 분단보다는 높은 지위, 혹은 추상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론적 지위가 낮다고 해서 현실적 중요성이 낮다는 말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도입과 타락
이승만 정권과 민주주의의 쇠퇴

이승만 정권의 기본 구조는 일인 체제 또는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규정될 수 있다. 가부장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인 통치자가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고, 이를 위해 사적 충성을 바치는 관리들에 의존한다. 또한 통치자의 권력은 주요 정치 엘리트의 충성을 확보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통치자는 지배를 강요할 강제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지지자에 대한 보상, 특히 물질적인 보상을 함으로써 복종과 충성을 끌어낸다.


이승만 정권의 통치 구조는 이승만 개인에 의해 지배되고, 이승만의 개인적 특질에 의해 성격이 좌우된 정권 구조였다. 후기에 이승만이 늙어 자유당의 과두세력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가부장적 지배구조는 엘리트의 동질성이 유지되고 대중의 묵종이 지속되는 한 계속될 수 있다. 그런데 엘리트의 동질성은 오래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나, 급속한 사회적 동원을 경험하는 근대화 사회에서 대중의 묵종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승만의 지배체제도 대중의 순응적 태도가 지속되는 한 유지될 수 있었으나, 그것이 사라진 1950년대 후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승만 정권의 위기는 경제의 난맥상과 미국의 압력에서 왔다. 미국은 이승만이 시도했던 총선 연기와 인플레 통제 문제로 원조 삭감의 공갈을 치는 등 그에게 압력을 가했다. 6.25전쟁 이전 미국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대한민국은 국가로서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쌀값을 비롯한 생필품 값은 날로 치솟아 사회적 불안을 조성했다. 이 문제는 6.25 이후 미국의 적극적인 경제?군사원조로 해결되었다.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위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다. 당시 국회는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이승만 반대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회를 통해서는 이승만이 재선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야당은 직선제 개헌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승만은 물리적?조직적?이념적 힘이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야당에 승리했다. 이승만은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74.6%의 압도적인 투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승만의 권력 강화는 1954년 제3대 총선에서의 대승과 같은 해에 자행된 불법적인 개헌(사사오입개헌)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막대한 경찰력을 투입했지만 전보다 의석 수는 더 줄었다. 자유당이 10석을 잃은 반면 민주당은 47석에서 79석으로 늘었다. 집권세력은 일련의 불법 행동을 통해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확보하려고 했다. 강력해진 야당의 도전 아래 국민의 지지를 잃은 집권세력이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은 정치적 저항과 사회?경제적 불만을 수용해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개발계획을 과감히 수행하거나, 아니면 더 큰 공권력을 바탕으로 권위주의 독재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두 길 중 어느 것도 택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 체제로의 개선도 본격적인 탄압 체제로의 개악도 불가능했던 시점에서 자행된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모든 부패와 죄악을 농축해 놓은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항거가 결국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의 정치를 일종의 혁명적인 상황으로 몰고 갔다.



4월 봉기와 민주당 정권: 민주주의의 짧은 부활
4월 봉기의 성격

국민적 폭발은 학생 세력의 주도로 나타났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의 대변자로서, 당시 수적으로 크게 팽창하고 서구의 진보적 아이디어들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으며 사회적 정의감이 충만하던 세력이었다. 학생들은 물리적 강제력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 특유의 도덕적 이상과 열정, 행동력으로 무장했고, 도시 시민과 언론을 비롯한 온 국민의 지원을 받았다. 또 당시 한국의 정치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던 미국 정부의 지지도 획득해서 엄청난 힘으로 국가의 비효율적인 무장력을 압도할 수 있었다.


4월 봉기에서 보인 힘겨룸의 여러 측면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국가와 민간사회 간의 수준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조직이나 제도를 통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대중 봉기의 유형이었다. 방법은 적나라한 힘겨룸에 의한 것이었고, 토대는 자유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독재의 대결이라는 정치이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힘겨룸의 쟁점은 정권의 성격을 둘러싼 정치적 민주화를 핵심으로 하고, 통일, 자립경제 확립 등의 민족주의적 요구가 이승만 정권이 와해된 뒤 이에 덧붙여졌다. 도전의 주도 세력은 조직화되지 않은 학생 대중이었고, 도시 주변 계층과 일반 시민들도 대거 가담하였다.


4.19는 혁명, 의거 또는 아무 명칭 없이 그냥 4.19 등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다. 4.19를 혁명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유는 혁명이라는 말의 뜻 때문이다. 혁명이란 어느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데 4.19는 한국의 국가나 민간사회의 근본적인 구조 변혁을 이루지 못했고, 이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시도할 이념이나 지도력도 없었다. 정권이나 정치사회의 수준에서 보면 권위주의 일인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도 법이나 제도 면에서는 민주정권이었고 민주적 정치절차가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 정권의 법, 제도와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실제 적용의 차이뿐이다. 이런 면에서 4.19는 봉기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4월봉기의 정치사적 의미는 크지만 중요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학생이 4월봉기를 주도했다는 것은 학생 외에는 이승만 정권을 타도할 힘이 없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의 정치?사회적 성숙도가 낮았다는 말이다. 이승만이 사라진 후에도 이를 대체할 민간 정치 세력은 크게 미흡했다.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탄생과 변모
쿠데타의 원인과 성격

5.16쿠데타가 발생한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쿠데타 주도 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내세운 명분에 대해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용공사상의 대두, 경제적 위기, 고질화된 정치 풍토, 사회적 혼란과 국민 도의의 피해, 그리고 한국군의 발전과 군사혁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혁명을 추진해야 했던 이유로 군부의 정치적 초연성, 군의 민주적 훈련, 군의 행정적?정치적 역량, 투철한 반공정신, 정의와 양심의 편에 선 군인의 청렴성 및 행동주의를 들었다.


군부는 6.25전쟁 와중에 급속히 성장해, 1950년의 10만 규모에서 1956년 70만 대군으로 변모했다. 1958년 10만이 감축되어 이후 60만의 규모가 유지되었으나, 한국사회에서 단일집단으로는 여전히 가장 큰 규모에 속했다. 군부의 양적 팽창은 민간집단이 미성숙한 현실에서 자연히 사회적인 역할 팽창으로 이어졌고, 미국의 막대한 군사 원조와 훈련지도로 성장한 군부는 사실 1961년 당시 한국에서 가장 근대화되고 서구화된 집단이라 해도 좋을 만했다.


군 내부의 불만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상급 장교들이 부패하고 이승만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에 대한 불만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급 기회의 소멸을 중심으로 한 직업적인 불만이었다. 모두는 한국 군부의 뿌리깊은 파벌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군부의 갈등은 장면 내각 수립 이후 하급자 주도의 정화운동으로 본격화되었다. 이런 갈등은 같은 교육?전투 경험을 지닌 청년 장교 집단으로 구성된 소수의 모반 집단 형성으로 이어졌고, 쿠데타라는 직접적인 정치 행동을 일으키게 했다. 즉 그들은 군 정화운동이 실패하고 사회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자, 이를 일거에 해결할 목적으로 쿠데타라는 직접적인 무력행동을 감행했던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민들은 적극적인 지지도 적극적인 반대도 하지 않고 침묵하며 방관했다. 국민들은 대체로 쿠데타를 필요한 조치로 받아들였으나, 이를 오직 일시적인 치유수단으로만 간주했다.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유일한 세력이던 미국 측은 한국의 행정수반을 찾지 못해 적극적인 반쿠데타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어쨌든 국민과 현직 민간 정부, 군부 내 반대세력, 그리고 미국 정부의 효과적인 반대나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쿠데타가 성공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전세계적으로 드물게 피를 적게 흘린 쿠데타였다. 그만큼 쿠데타에 대한 명시적 반대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해방 후 13년 동안의 국가 건설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상징했다.



노태우 정부와 민주주의의 되살림
노태우 정권의 의미 : 민주화의 과도기

1988년 2월 공식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그리고 군사정권에서 민간정권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정부였다. 노 정부의 출범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정권 변환을 이루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 정치는 민주 절차를 회복하여 의회와 정당정치가 활성화되었다. 언론, 집회, 결사의 기본적인 자유도 상당히 보장되었으며, 자의적인 체포와 구금 등 인권침해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노태우 자신이 군부 권위주의 세력 출신이었을 뿐 아니라 국가와 집권 세력 안에 권위주의 잔존세력이 많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치의 민간화, 민주화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전체적인 정치사회 노선이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는 3파전의 경쟁 속에서 지역 붕당체제가 탄생해 정부와 여당은 여소야대 구도에서 정국을 장악할 수 없었고, 이에 따른 당파싸움이 고조된 점이다. 이런 당파싸움은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점이다. 게다가 노태우는 유약한 정치 지도력을 보여 당파싸움과 이로 인한 정치혼란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이런 점은 이전까지의 강력한 권위주의 통치력과 매우 대조적이었는데, 어찌 보면 바로 이런 점이 오히려 민주화의 과도기에서 민주 과정을 강화하는 구실을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국가와 지배연합의 성격은 과거와 본질적으로 같았지만, 지배세력 가운데 온건개혁파가 집권함으로써 국가가 더 개방되고 국가와 민간사회의 관계가 덜 강압적으로 되어갔다. 전체적으로 민간사회의 힘이 커지고 국가에 대한 도전이 거세졌다. 시국사범의 증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가의 탄압이 증가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국가의 강압적 지배력이 증대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민간사회의 도전이 그만큼 커진 증거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국가의 사회에 대한 지배력은 과거에 비해 강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화되었다.


국가에 대한 민간사회의 도전은 전두환 정권 말기 이후 학생?재야?노동 운동 세력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으로 계속되었는데, 노태우 정권 출범 뒤 여기에 통일운동이 보태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학생과 재야 세력의 급진 운동은 침체에 빠졌다.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 민주화의 목표가 일단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학생과 재야의 급진적 통일운동과 반정부 투쟁은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과 김일성 면담, 5월의 동의대 사건(시위하던 동의대 학생들이 전경들을 불타 죽게 한 사건), 6월의 평민당 서경원 의원 간첩사건, 7~8월의 임수경 밀입북 사건 등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이 사건들은 이듬해 초의 현대중공업 파업 사태와 더불어 공안정국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런 사태들을 계기로 국가는 강경노선으로 돌아서서 이들을 구속하고 운동권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중간계급과 대체로 이를 대변한 야당 정치인들은 원래 보수적 이념을 가지고 있었고 자유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안정을 원했다. 그리고 이 둘이 충돌할 때는 민주주의보다 안정을 선택했다. 노태우 체제에서 진행된 자유민주주의의 절차에 만족한 이들은 더 급진적인 민중민주주의를 원하는 민중세력에게 등을 돌렸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격과 과제
새로운 문제와 발전의 방향

한국 정치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가? 한국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로 굳어졌는가? 일단은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어떤 민주주의이며 또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인지가 문제이다. 한국 민주주의에는 진보와 퇴보의 가능성 두 가지 다 존재한다. 정치 제도의 면에서 한국 정치는 분명히 발전하고 있다.


문제는 정치적 자유와 인권, 헌정 절차의 확립과 사회경제적 평등이나 복지가 함께 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에 대한 우려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와 민주가 대립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심화와 함께 계급 불평등이 심화됨으로써 민주주의가 퇴보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필연코 계급 격차를 확대하며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와 보수적 엘리트주의를 선호할 것이다. 이는 결코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겉모습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그 민주주의에 참여하고 그 혜택을 받는 주민의 숫자를 지금보다 축소하거나 최소한 동결시키려고 할 것이다. 대중의 정치 참여 확대는 부르주아 계급이 목숨 걸고 저지해야 할 일임을 서구의 역사가 증명했고 이제 한국의 역사가 다시 증명하려 하고 있다.


이런 가능성을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정해진 한도 안에서라도 대중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기업 지배, 시장 지배와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중의 참여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정기적인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 운동을 통한 방법이다. 그런데 대중의 투표 참여는 요즘 와서 크게 낮아지고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앞날을 어둡게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대중,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도 볼 수 있다. 시민단체의 조직적인 활성화는 재벌 지배에 대한 그나마 가장 효율적인 도전이 될 수 있다. 조금 다른 현상으로는 비교적 덜 조직화된 대중운동이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각종 촛불시위들은 대중의 힘을 과시하고 한국 정치가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는 구실을 했다. 또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듯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인터넷, 이동통신 등을 이용한 대중의 정치 참여가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열었다. 지금 한국 정치는 조직화된 엘리트 금권정치가 일상화하느냐 아니면 대안 세력과의 경쟁을 통해 다른 길을 모색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할 것인가? 갈등은 그 자체로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사회 차원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고 이를 오히려 증폭시키기만 하는 정치사회의 미숙함이 더 큰 문제이다. 다양한 갈등의 존재를 긍정하면서 이를 제도와 정치 지도력을 통해 조화시켜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차원에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는 대표성의 증대이고, 둘은 정당 제도의 성숙이며, 마지막으로 정치인의 자질 향상이다. 이는 각각 체제, 제도, 문화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시민사회의 성숙이나 이념, 세대 갈등 같은 것도 문제가 되긴 하지만 이것은 덜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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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산업화, 힘겨룸의 요인들을 동원한 이 책의 분석틀은 한국 정치의 거시 변동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민주주의 체제가 정착된 마당에 이 거시 분석틀의 효용은 떨어진 것 같다. 이것이 기쁘다. 거대 변동의 소멸이 민주주의의 정착과 심화 가능성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성장을 기원하며 이 책을 마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