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역자 : 조중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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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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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06��



■ 책 소개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학자이자 정치학자가역사상 등장한 수많은 정치인들을 통해 리더십의 참된 본질을 추적한 책이다. 저자 제임스 번스는 1978년 발표한 『리더십강의(Leadership)』에서 리더십을 하나의 학문 분야로 개척하며 비즈니스와 행정 분야에서 리더십 교육 프로그램의 사상적 뿌리로 평가받는인물. 

 


책을 통해 저자는 "변혁의 리더십(transforming leadership)"이라는새로운 비전의 정치 리더십을 제안한다. 지도자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감화되고 변화할 수 있도록 이끄는, 더 나아가 세상을바꾸고 역사를 바꾸는(transforming) 것이 리더가 해야 할 임무라는 것.


원시 아프리카 부족장과 중세유럽의 절대군주,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들까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리더십에 관한 그의 논지를 펼치며, 엘리자베스 1세,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간디, 루스벨트, 고르바초프 등 역사상 뛰어난 정치인들을통해 정치 리더십의 본질과 진화, 그리고 비전을 보여준다.


■ 저자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미국 리치먼드 대학교와윌리엄스 대학 교수로 평생을 리더십 연구에 바쳐왔다. 저서로 『리더십 강의』 『루스벨트 : 사자와 여우』 『루스벨트 : 자유의 전사』등이 있다.


■ 역자 조중빈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대학 정치대학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사회과학대학 학장직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정치행태, 선거, 미국정치, 방법론 등이다.최근에는 문화교차학적 관점에서 통합학문적으로 한국, 한국인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하여 대학원 문화교차학 협동과정과 문화교차연구소를 개설하고교육과 연구에 열중하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진정한정치 리더십


제1부 리더십 개념의 역사적 변화
Chapter 1리더십이란 무엇인가
Chapter 2 X요인을 찾아서


제2부 리더의 자질
Chapter 3 체스게임과권력투쟁
Chapter 4 기획자로서의 리더

제3부 역사상의 리더십 사례
Chapter 5미국:건국 리더십의 대변혁
Chapter 6 프랑스:리더십의 시련
Chapter 7 갈등의 리더십


제4부 리더와 민중
Chapter 8 리더십의심리학
Chapter 9 창조적 리더십
Chapter 10 지도자-추종자 패러독스
Chapter 11 갈등과 리더십의무장


제5부 변혁의 리더십
Chapter 12 가치의힘
Chapter 13 민중의 힘


에필로그 - 새로운 리더십의 모색


역자 후기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제1부 리더십 개념의 역사적 변화
X 요인을 찾아서

리더십 분석의 연구과제 중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일은 인간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변화의 본질을 아는 것이 나머지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변화는 어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주도권을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군사적 침략에서부터 대학 설립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내는 것에서부터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데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문제의 핵심은 누가 어떤 여건 하에서 무슨 이유로 무엇을 향해 어떤 방법으로 진행하면서 변화의 주도권을 잡느냐 하는 것이다.


― 인간관계의 탐구
다윈과 마르크스는 계몽주의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역사적 인과관계 접근법을 최고로 발달시켰다. 역사를 지배하는 신의 법칙을 거부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우리는 역사의 흐름과 역사 발전의 여러 유형들 속에서 개별 사건들이 이해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역사의 흐름 자체에서 수많은 새로운 법칙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에 맞지 않는 개별 사건들을 우연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대체로 이것이 역사를 보는 합리적이고 낙관적인 시각이다.


부분적으로 인과적 과정에서 작용하는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 같은 인간적 동기, 지도자들과 통치자들의 야망, 행위력, 상황의 특성과 상호작용, 창의성, 갈등, 그리고 힘의 신비 등과 같은 변수들은 극단적으로 단순한 설명이나 일원론적 인과분석으로 풀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철학, 심리학, 역사학, 정치학 등 어떤 하나의 학문만으로는 인과 현상을 적절하게 다룰 수 없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리더십은 이 모든 학문 분야의 안과 밖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리더십이란 바로 역사적 인과관계에서의 X 요인이다.


― 변혁적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변혁적 지도자와 추종자 간의 맹렬한 상호작용은 그 자체가 변화의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변화의 과정에 참여시키고, 집단정체성과 집단능력감을 고무시키는 데 앞장선다. 이로 인해 더 강력한 자기가치감과 자기능력감이 생기게 된다. 탈바꿈하는 변화를 추구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탈바꿈시킬 수 있게 된다. 변혁적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대신 추종자들을 옹호하고 고무한다. 추종자들이 지도자들을 앞지를지도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 지도자가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변혁적 리더십을 참여적이고 민주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순수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건설적이고 서로의 능력을 고취하는 지도자-추종자 관계를 왜곡한다. 이때 추종자들은 너무나 충성스럽고 복종적이어서 비록 그 수가 수백만 명일지라도 지도자가 그 자신의 정신적 갈증을 충족시키는 것 이외에 지도자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창의적인 지도자-추종자 상호작용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추종자들에게 권한을 주지 못하는 바로 그때, 추종자들도 지도자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다.


― 비전의 힘
만약 당신이 리더십에 관해 강의하고 있고 활발한 토론에 불을 붙이고 싶다면, 케케묵은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아돌프 히틀러는 지도자인가?" 최근에 내가 이 질문을 던졌을 때, 한 여학생이 열정적으로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히틀러가 나쁘기는 하지만 그는 독일 국민의 희망과 증오를 반영했고,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그의 추종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독일을 변화시킴으로써 약속을 이행했다. 그러니 어떻게 그를 지도자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히틀러에 대한 혼동이 아니라 리더십의 핵심에 대한 혼동이다. 리더십이 가치중립적인 것, 다시 말해 히틀러와 간디에게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계적 과정이나 권력 잠재력인가? 아니면 선한 것으로 정의되어야만 하는가? 나는 세 가지 형태의 기준 또는 규범을 리더십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한다. 첫째는 미덕으로 정숙, 절제, 청결, 대인관계에서의 성실함 등과 같이 품행에 대한 오래된 행동규범을 뜻한다. 둘째는 황금률에서 최상으로 표현되고 있는 윤리로, 예컨대 성실함, 약속 준수, 믿음직함, 상호관계, 책임 등을 반영한다. 셋째는 변혁적 가치로 나에게는 질서, 자유, 평등(박애를 포함하여), 정의, 행복추구처럼 고결한 공적 원칙들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계몽주의적 가치를 가지고 그를 평가한다면, 그는 자유와 평등의 광신적인 적이었다. 히틀러는 내가 변혁적 가치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달성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것들을 구체화하지도 않았다. 그는 독일 국민들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영속적이고 의미 있는 기회들을 만들어내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따라서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했던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지배했을 뿐 그들을 이끌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2부 리더의 자질
체스게임과 권력투쟁

오랜 옛날부터 체스는 왕족의 게임이었으며, 미래의 통치자들을 위한 훈련장이었다. 체스게임을 한다는 것은 측정 가능한 힘의 수준을 계산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헤아릴 수 없고 급변하는 요인들, 대립과 협력의 대조적인 힘, 그리고 몹시 사나운 변수들의 바다, 이런 모든 것들과 함께 인간 체스 게임을 한다는 것은 리더십의 세계, 즉 리더십의 이론과 실천에 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 아프리카의 왕들
누가 어떻게 통치권을 계승하는가? 다양한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이것이 피비린내나는 결말로 이어지는 무서운 문제임을 확인했다. 아프리카의 초원과 습지에서 아프리카인들은 누가 누구에게 권력의 자리를 계승시킬 것인지에 대한 해답, 즉 폭력을 줄이고 정통성을 증가시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권력 계승과 정당화 과정을 고통스럽게 시험해왔다. 20세기 중반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시우아이족을 살펴보자.


시우아이족의 정치는 지도자와 추종자들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라는 리더십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준다. 야심이 있는 빅맨은 우선 여러 명의 부인을 두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다. 그는 타로토란을 재배하기 위해 여러 명의 부인들을 필요로 했으며, 그 타로토란은 돼지를 기르는 데 필요했다. 그는 축제에 돼지고기를 제공하기 위한 돼지가 필요했는데, 그가 지지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축제였기 때문이다. 대체로 시우아이족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느 정도의 안정을 제공했다. 그러나 빅맨이 죽으면 이 안정은 깨진다. 그는 왕국을 남기지 않는다. 단지 미망인들과 타로토란과 돼지들만 남긴다. 새로운 빅맨이 추종자를 모을 때까지 그곳에 후계자는 없다. 이런 불안정성과 반복되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시우아이족은 개인의 성격과 능력에 의한 지배의 훌륭한 사례가 된다.


단순한 부계 계승이 해결책인가? 아마도 세계에서 권력 계승과 관련된 가장 일반적인 관례는 아들을 권력 계승의 최우선 순위로 삼는 것이었다. 지금의 우간다 지역에서 수세기 동안 가장 강력한 부족이었던 바간다족은 오직 죽은 왕의 아들들만이 그들의 카바카(통치자)로서 왕위를 이어받도록 했다. 따라서 죽은 왕의 형제들은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바간다족은 안정을 이루었지만 끔찍한 살생이 발생하기도 했다. 왕의 여러 부인들 중 누가 낳은 왕자든 부족과 씨족의 원로들에 의해 계승자로 선택될 수 있었기 때문에 종종 왕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인들, 어머니들, 그리고 누이들까지 살해하는 잔인한 경쟁이 촉발되었다.


부계 계승이 분쟁에 직면했다면 모계 계승을 시도하는 것은 어떨까? 여러 아프리카 종족들은 모계 계승을 시도했다. 동남아프리카 지역의 중앙집권화된 벰바족에서의 왕위 계승은 오직 여성의 혈통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즉 왕가의 여자들이 낳은 아들들만 왕이 될 자격이 있었다. 여자들은 아들들을 왕위에 앉힐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는 있었지만, 단지 인큐베이터 역할이었을 뿐 그들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계 계승에도 그것만의 독특한 혼란이 발생할 수 있었다. 사실 모계 계승은 대단히 복잡했다. 다툼은 누가 연장자인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같은 세대의 자매들의 아들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연장자인가, 아니면 왕의 가장 나이 많은 누이의 맏아들이 연장자인가? 규정은 매우 애매했다. 따라서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는 왕위 계승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왕위 계승과 관련된 이런 경험에서 통치권에 관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권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대단히 길고 때로는 소름끼치는 길을 가도록 할 만큼 인간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법과 제도를 통해 투쟁을 억제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참여적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지도자와 추종자 간의 관계를 배태하고 있는 진정한 리더십의 등장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런 진정한 리더십만이 의미 있는 변화와 사회의 발전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제3부 역사상의 리더십 사례
프랑스 : 리더십의 시련

1789년 10월 5일 교회의 종이 울릴 때, 파리 시장의 여인들과 어물전의 여자들은 이미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에게 교회의 종소리는 행동 신호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언제 빵을 줄 것인가?"라고 외치며 생트마그리트 성당 앞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속속 합류했고, 칼과 곡갱이를 든 그들이 파리 시청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7천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베르사유로 진격해 왕을 만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총과 창으로 무장했고 2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왕에 대해 분노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했다.


― 왕의 통치와 군중의 리더십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외국 태생이라는 점과 소문난 부패 행위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 무척 인기가 없었다. 특히 혁명 기간에 권력을 남용하고 정치적 간섭을 일삼으면서 더 비난받았다. 루이 16세는 물려 받은 관행이 있었고 대신들도 그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음모와 부정부패에만 열중했다. 루이 16세는 국민들 위에 군림만 했을 뿐 통치하지는 못했고, 그들을 이끌 수도 없었다. 그는 방대한 특권제도와 조달체제를 관장했다. 명예, 작위, 독점권, 급여 등은 정치적 거래와 질서 유지의 핵심 도구들이었다.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들, 즉 길드, 귀족, 교회, 지방 행정단위까지 법적?경제적 특권을 요구하고 또 부여 받았다. 하지만 왕의 통치권은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었다. 1787년에 미국인들이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있는 동안 루이 16세의 이런 편벽된 통치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다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1760년대 말에 시작된 무질서는 가장 근본적인 결핍, 즉 식량 부족으로 인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빈민층의 참상은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의 유래 없던 풍요와 점점 극명하게 대비됐다. 부자들도 국고가 텅텅 비어가자 불만이 쌓였다. 7년전쟁과 영국에 맞서 싸우는 미국을 원조하는 일로 재정은 고갈되었고 왕정은 파산에 직면해 있었다. 1787년에 이르러 귀족회의는 왕에게 150년 동안이나 소집된 적이 없었던 삼부회를 소집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왕은 동의했다.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과 분리되어 따로 모인 회의에서 제3신분(평민)의 대표자들은 갈팡질팡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한데 뭉쳐 의회절차를 확립했다. 그리고 재빠른 속도로 의도한 바도 없이 혁명을 일으키고 말았다.


1789년 8월 4일과 5일에 열린 밤샘 회의에서 대표자들은 만장일치로 "국민의회는 봉건제도를 완전히 폐지한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1주일간의 토론 끝에, 8월 26일 국민의회는 왕이 아닌 국가 자체가 모든 주권의 원천이며, "천부의, 절대적인,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주장하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했다. "군주에 의해 매개되는 특권이 아니라 국가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이 체제 내에서의 권리의 기준이 되었다." 평등과 형제애에 따라 통일된 단 하나의 신분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분배에 대한 희망은 무한대로 뻗어갔다.


― 공포의 지배
1793년 10월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과 처형, 외국의 위협, 그리고 혁명의 의미를 둘러싸고 급진파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국민공회는 공포정치의 주무대가 되었다. 정치적 갈등은 곧바로 살육의 정치로 변모했다. 1793년 10월에 급진적인 산악파는 좀더 온건한 지롱드파를 재판하여 처형함으로써 서로 대립했다. 로베스피에르파는 상퀼로트 세력의 지도자격인 에베르파를 분쇄하고자 당통파와 제휴했으며, 이번에는 2주일 만에 당통과 그 추종자들이 단두대에 서게 되었다. 공포정치가 통치제도화하여 파리와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794년 봄에 이르러 혁명정부는 살육의 괴물이 되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성공은 결과적으로 그의 실각을 불러왔다. 그가 살육 대상이 되었을 때, 그의 오랜 지지자들은 그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국민공회에 충성을 다했던 군인들이 자살 시도 끝에 기진맥진해진 그를 단두대로 끌고 갔다. 무엇이 그토록 끔찍할 정도로 잘못되었을까? 1789년 1791년까지의 2년간 프랑스인들은 거의 교과서적인 혁명을 만들어냈다.


왕의 탈출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파리와 지방에서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정치의 중앙에 어떤 리더십도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간극이 생겨났다. 어떤 세력도 안정을 이룰 수 없었다. 국민들의 필요와 요구가 폭증하고 그들의 희망과 기대가 분출되면서, 그리고 자유가 허가증에, 평등이 극단주의에, 박애주의가 살해주의에 자리를 내주면서 절망적인 상태의 시민들은 생존과 안전을 원했고 구세주를 찾게 되었다.


― 나폴레옹의 통치술
이때 나폴레옹이 등장했다. 나폴레옹은 국가의 생존을 위한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질서는 최고지도자의 정통성을 요구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나폴레옹이 국민투표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매우 창의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국민투표는 로마시대에 국민과 상의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자코뱅당이 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것을 자신의 야망에 접목시켰다. 1802년의 국민투표는 유권자들에게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나폴레옹은 종신통령이 되어야 하는가?" 다른 대안은 제시되지 않았고, 종신통령이 되어 무엇을 하겠다는 말도 없었다. 당시는 비밀투표도 아니었다. 성인남자들은 예나 아니오 중의 하나에 자신의 이름을 써야 했고, 따라서 경찰로부터 보복당할 위험성이 있었다. 투표 결과는 360만 표의 예와 8272표의 아니오였다.


나폴레옹은 군대의 통수권자가 되어 프랑스인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지도자와 추종자 간의 상호교환이 결여되어 있었다. 의미 있는 정치는 사라졌고, 군사적 모험 드라마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통치는 정체되고 퇴행적이었으며, 황제가 전쟁에서 패배한 뒤 증명되었듯이 그 핵심은 공허한 것이었다.


― 드골의 리더십 브랜드
드골의 신념은 모두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의 무질서와 불안정에 대한 분노에서 형성되었다. 드골은 광신적인 공산주의자들과 극우파들에 의한 또 다른 혼란을 두려워했다. 1958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 독립 문제를 해결할 때 공황에 빠진 국민의회는 국가적 수모와 내전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드골을 지목했다. 6월 1일 국민의회의 투표 결과에 따라 드골은 수상에 취임했으며, 자신이 요구했던 권한, 즉 질서를 회복하고 새 헌법을 입안할 권한을 위임받았다.


드골은 대통령직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통치의 목적인 것처럼 국정을 운영했다. 그는 많은 젊은 신진 관료들이 포진된 행정부를 지휘하면서 능률과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비정치화된 전문 관료들로 충원된 관료 집단은 국민의 요구와 이해관계로부터 유리되었다. 정부는 국민 모두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대통령의 웅변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사회 속에서 프랑스인의 빈곤은 계속되었으며 오히려 차츰 심화되었다. 그러나 드골이 주장했던 리더십은 경제에 대해서가 아니라 질서와 통합에 대해서였다.


이듬해 초 드골은 대통령선거가 아니라 ― 그의 두 번째 대통령 임기는 1972년에 가서야 끝나기 때문에 ― 그가 가장 선호하는 방식, 즉 국민투표를 통해 직접 국민들에게 호소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신임투표를 요구했고,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자 사임했다. 드골이 국민투표를 통해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파벌정치를 극복했기에, 국민투표를 통해 그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굉장히 역설적이었다. 리더십에 대한 드골의 생각은 맹렬한 정도로 개인주의적인 것이었다. 이 개념은 위대한 프랑스의 실현을 위해 일치단결된 위대한 국민을 인도하는 구세주 같이 지도자, 추종자, 국가 사이에 거의 신비적인 일체감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드골도 나폴레옹처럼 늑대로부터 양을 보호하는 목자처럼 국민을 보호하고 싶었지만, 국민들이 양처럼 잘 따라주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제4부 리더와 민중
지도자-추종자 패러독스

국민(people)이라는 말보다 더 무게감 있으면서도 모호한 단어는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엄연한 진실을 알고 있다. 국민이라는 정해진 실체는 없다. 국가의 거주민은 성, 나이, 계층, 지역, 수입, 교육, 문화관, 민족적 혈통, 종교, 이념 등으로 나뉘어 있다. 리더십 연구자들은 국민을 지도자와 추종자들로 구분한다.


― 지도자로서의 추종자
얼핏 보기에 지도자와 추종자의 관계는 매우 단순해 보인다. 지도자는 이끌고, 추종자는 따르면 된다. 지도자는 꿈을 꾸고 주도권을 잡으며, 추종자들과 관계를 맺고 행동을 시작한다. 추종자들은 부름을 받고 꿈을 공유하며, 지도자의 선창에 반응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는 복잡하다. 


― 추종자로서의 지도자
1935년 늦겨울에 루스벨트의 리더십은 쇠락했다. 루스벨트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빈곤계층과 실직자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제공하는 한편 경제회복을 위해 좌우 양극단의 중도를 택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의회는 그의 소망과는 반대로 점점 좌경화되고 있었다. 보수층 역시 루스벨트에게 등을 돌렸다. 놀란 대통령의 동료들은 그에게 취임 초기의 과감한 리더십을 다시 한번 펼치라고 주문했다.


루스벨트는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1935년 미국의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국가산업재건법을 무효화시켰다. 이 법이 연방의 권한 범위를 넘어선다는 이유에서였다. 루스벨트는 국책사업을 무력화시키고 집단적 리더십을 무력화시키는 대법원을 비난했다. 그는 공화당과 보수파의 반대에 대처하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딱히 해답이 없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1935년 6월과 9월 사이에 그가 정치적 충격과 사회적 변화의 측면에서 1933년 취임 초기의 100일을 능가하는 창조적 입법과 행정적 조치들을 취했다는 사실이다. 그때의 업적들은 지금도 인상적이다. 사회보장법, 노동관계법, 거대 전력회사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지주회사법, 고소득에 대해 가파르게 누진되는 부유세, 50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한 직업개선행정청 창설 등이 그것이다. 비판자들은 이 법안들이 적절하지 못하거나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으나 법안들은 발효되었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영향과 파급효과는 심도 있게 나타났다.


많은 신민중주의자들은 뉴딜정책의 추종자로 시작됐다. 대공황이 지속되면서 그들은 구원을 가져다 줄 것으로, 진정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던 뉴딜정책의 초기 실험이 실패함으로써 상처받고 좌절한 사람들 속에서 자신들의 추종세력이 있음을 발견하자 루스벨트와 결별하였고, 자신들이 지도자가 되었다. 2차 뉴딜정책과 함께 루스벨트는 그의 이전 추종자들을 따르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입장에서 그는 가지지 못한 자, 뒤처진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반영하는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정책들로 지지를 이끌어냈고, 또한 신민중주의자들의 지지자들을 돌이켜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었다.


― 연대맺음에서 힘 실어주기로
힘을 실어주는 지도자들은 모든 지도자들이 그랬듯이 추종자와의 연대에서 단지 주도권만을 잡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잠재적 추종자들의 물질적 욕구, 그리고 자기 결정과 자기개발을 위한 심리적 욕구를 인식하고 이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창조적인 연대를 맺는다.


제5부 변혁의 리더십
민중의 힘
― "생명, 자유, 그리고..."

리더십 ― 즉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 그리고 추종자 자신들 내의 관계 ― 은 그 핵심적?감성적 요소로서의 효능감, 그리고 자기효능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성격의 것이든 심대한 자기신뢰감을 가리키며, 개인적, 집단적 리더십을 통해 목표가 달성될 수 있고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이다. 그 효능감의 원천은 잘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라도 그 원천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그렇다고 해도 강한 동기와 가치를 가진 사람, 간디나 대처나 만델라 같은 사람은 보통 끊임없는 장애와 반대를 무릅쓰고 리더십을 실천하는 효능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효능감을 느끼게 된다. 이로써 개인적 효능감은 선순환적으로 집단적 효능감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집단적 효능감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 "행복의 추구"
만약 인류의 행복이 사회 구성의 제1법칙이라면, 그리고 제퍼슨이 설파했듯이 일반 대중을 위해 가능한 한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정부가 가지는 유일의 정통적 목표라고 한다면, 21세기에 들어선 세상은 이 원칙을 심대하게 위반하고 있다. 오늘날 물질적 만족의 가능성이 엄청나게 확대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억 명의 사람들은 사회적 예속과 비참한 궁핍 속에서 연명해가고 있다.


과연 무엇이 빈곤층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단 한 가지 종류의 리더십이 그들의 삶에 들어가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설교를 하거나 그들을 위무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과 연계하는 리더십이어야 하고, 이것은 그들을 돕는 최초의 행동으로서 그들이 가진 인간적 잠재력을 깨닫게 해준다. 이것은 변혁적 리더십이 생생한 욕구와 필요로 점철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기회를 확대하는 데에서 절정을 이루어야 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