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기지 이전, 한미 FTA, 미국의 북한 인권법안, 새만금, 지역주의, 권력구조 개편,양극화 논쟁, 공무원 노조, 비정규직과 이주 노동자 문제…" 저자는 정치적ㆍ사회적 과제들이 비등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징후로 보이는 이 같은현상의 원인을 한국이 아직까지 "97년 체제"에 발목 잡혀 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97년 체제"란 국가보안법으로 대표되는 단순한 극우반공체제인 48년체제, 쿠데타와 개발독재로 상징되는 61년 체제, 61년 체제의 정치적 부분(군부독재)을 해체한 87년 체제에 이어 국가주도형 정치경제 체제를해체한 이후의 체제로, 신유주의 경제정책과 신자유주의 보수연합을 두 축으로 한다.
책은 양극화와 차별, 그리고 민주주의 위기가 97년 체제를 숙주로 해서 자라나고 있는만큼, 97년 체제를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적 개혁을 완성하고, 민중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정치적 사회경제적 차별을 해소할 수 있을것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이 책은 해방 60년 한국 현대사의 모순이 응축된 97년 체제를 재검토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있다.
■ 저자 손호철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양통신(현연합통신) 기자로 일했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오스틴)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전남대 교수를 거쳐 2006년 현재 서강대학교정치외교학과 교수로 한국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정치연구회 회장, 민주노총 정치위원회 자문위원장, 한국정치학회 연구이사와 편집이사 등을 거쳐한국복지국가연구회 회장, 진보평론 공동대표, 진보넷 참세상 이사, 참여사회연구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정치학의 새구상』『전환기의 한국정치』『해방 50년의 한국정치』『현대한국정치-이론과 역사』『신자유주의시대의 한국정치』『근대와 탈근대의 정치』『3김을넘어서』『빈 수레의 개혁을 넘어서 - 손호철 교수의 노무현 정부 1기 주간 브리핑』이 있다.
■ 차례
머리말 - 해방 60주년을 돌아보며
제1부 총론 - 해방 60년의 한국 정치
1장 분단과남남갈등 60년
2장 한국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60년
3장 한국정치 연구 50년
제2부 민주화이전
4장 박정희 정권의 국가 성격 - 시기별 변화를 중심으로
5장 1979년 부마항쟁의 재조명 - 정치적 배경을중심으로
6장 한국의 산업화와 노동·복지 체제
제3부 세계화 이후
7장 김대중 정부의 복지개혁의 성격- 신자유주의를 향한 전진?
8장 2002년 대선의 역사적 의미
9장 민주노동당의 미래와 도전
10장 반세계화 투쟁은 역사적반동인가 - 네그리·하트의 『제국』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제4부 결론 - 두 개의 개혁, 두 개의 전선
11장두 개의 개혁, 두 개의 전선 - 자유주의 정권들의 비극과 박정희 향수의 근원
12장 한국 정치의 발전 방향
찾아보기
해방 60년의 한국정치 1945~2005
제1부 총론 - 해방 60년의 한국 정치
한국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60년
‘제1기 민주화’가 끝나고 ‘제2기 민주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난 2002년 대선은 노무현 대통령의 승리로 끝이 나, 참여정부가 출범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반환점을 돌아섰고 해방 60주년을 맞은 현재,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는 싸늘한 배신감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 지난 60년, 특히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분기점인 1987년 6월항쟁부터 노무현 정부 출범에 이르는 ‘제1기 민주화’ 15년을 민주화운동과 한국 민주화, 한국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화운동, 민주화, 민주주의 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넘어가야 한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많은 논의가 필요한 논쟁적 주제이지만 민주화란 권위주의나 파시즘 같은 비민주적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인 민주주의로 변화하는 동태적인 과정을 지칭하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은 민주화를 야기해 비민주주의, 반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과 행동들을 말한다. 민주화운동이 민주화를 초래하고, 민주화라는 과정이 민주주의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이 관계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모든 민주화운동이 민주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해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고, 또 민주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해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는 변수가 유일하게 민주화운동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은 좁은 의미의 운동 내지 일종의 고유명사로서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이라고 불러온 것, 군사독재에 대항해 절차적 민주주의 내지 정치적 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벌여온 저항운동을 지칭한다. 민주화 보상법도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런 인식에 기초해 있어서 민주화운동을 “1969년 8월 7일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볼 때, 한국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세우고 확대하기 위한 운동”이다. 즉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수행한 운동은 모두 한국 민주화운동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크게 보아 상호보완적인 네 가지 민주주의가 있다. 첫째, 정치적 민주주의이다. 최근에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단순히 직선제와 같은 엘리트 간의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슘페터류의 ‘최소주의적’ 입장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다. 둘째, 기본적으로 사회민주주의가 관심을 갖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다. 이것은 자유권에 대비되는 사회권의 문제로서 빈곤에서 벗어날 자유 등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보존되어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과 관련된 사회경제적 권리의 문제다. 부의 분배가 지나치게 불평등할 경우 정치적 민주주의는 사실상 비민주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셋째, 맑스주의와 같은 좀더 근본적인(radical) 좌파들이 관심을 갖는 민주주의로서 생산자 민주주의다. 모든 민주주의와 시민권은 공장 문 앞에 오면 멈추게 되어 있고, 공장 안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일방적인 지시, 복종과 지배, 종속 현상이 일상화돼 있는 ‘공장 전제정’ 체제다. 일부 진보적인 선진자본주의의 경우 주요 의사결정에 노동자들을 참여시키는 노동자 경영참여를 제도화하는 형태의 산업민주주의를 실시해왔는데, 이것은 생산자 민주주의의 초보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넷째,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맑스주의 등 포스트주의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일상성의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국가나 자본과 같은 거대 권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모든 사회적 관계들에는 권력 관계가 내재돼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보면 다양한 일상적인 삶의 제도화된 관계들은 모두 민주주의의 문제와 연결된다.
제3세계적 맥락과 분단이라는 한국의 특수성과 관련해 그동안 한국 학생운동과 재야운동 내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해온 반미자주화와 통일운동도 민주화운동이다. 즉 외세의 문제, 분단과 통일의 문제도 우리 사회의 억압, 착취, 배제, 차별과 관련이 있다면, 다양한 민주주의와 기본권들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 또한 민주화운동이다.
합법성, 폭력성 문제도 짚어봐야 한다. 민주화운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한 운동에 국한시켜야 할까? 폭력/평화학의 권위자 중 한 명인 요한 갈퉁이 지적했듯이 폭력이란 단순한 직접적 폭력만이 아니라 반민주적 질서와 같은 구조적 폭력을 포함하며, 민주화운동 등 많은 저항운동이 5?18항쟁처럼 구조적 폭력, 나아가 군부의 강력한 직접적 폭력에 저항해 불가피하게 방어적인 직접적 폭력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폭력성 여부로 민주화운동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시기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민주화보상법은 김종필 자민련 총재라는 현실 정치세력의 존재 때문에 민주화운동의 범위를 1969년 이후, 즉 박정희의 3선 개헌 이후의 운동으로 국한한 것이다. 이것은 3선 개헌 이전에는 한국이 하자 없는 민주주의라는 이야기, 예를 들어 6?3사태에 저항한 운동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법의 규정에 따르면 이승만 독재에 저항한 4?19도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민주화운동은 그것이 반드시 근대 국민국가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시기를 근대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
민주화운동 제1기는 1953년 분단체제가 고착화돼 남한 사회에서 좌우이념 분쟁이 사라졌을 때부터 1980년 광주학살까지 이르는 기간으로,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헤게모니 하에 정치적 민주주의를 중심적인 투쟁의 목표로 했던 시기다. 제2기는 1980년 광주학살부터 1987년 6월항쟁에 이르는 시기다. 광주학살에 의한 우리 사회의 급진화의 결과로 자유주의적 틀을 넘어서 좀더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려는 급진적 민주화운동이 활성화됐다. 제3기는 1987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다. 6월항쟁의 결과로 합법적 공간이 넓어지면서 그동안 억눌려왔던 다양한 운동들이 분출되면서 노동자, 농민부터 학생과 급진적 지식인들에 이르는 다양한 세력들의 사회경제적 민주화운동, 생산자 민주화운동, 대외적 민주화운동 등 급진적 민주화운동이 정점을 이루던 시기다. 제4기는 1990년대 초반 이후 현재에 이르는 시기다. 정치적 민주화운동은 점차 약화됐지만 포스트주의적 운동은 활성화됐다.
주체라는 측면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이 갖는 중요한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민주화운동에 있어 학생운동의 주도성이다. 1953년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학생운동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해방 정국을 거치고 분단 체제가 고착화되면서 정치적 행위자인 계급운동과 사회운동이 사라져버린 한국적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둘째, 부르주아 계급의 불참여와 자유주의 세력의 취약성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르주아 계급은 항상 군부독재 등과 연대해 반민주세력의 중심에 자리잡아 왔다.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나아가 노무현 정부의 출범에도 불구하고 가장 초보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면에서도 한국은 아직 정치적 민주주의 내지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아직도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제한적 정치적 민주주의 수준이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아직도 초보적 수준이며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복지 지출은 2002년 현재 국내총생산에 대한 비율을 기준으로 할 때 5.94퍼센트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다. 생산자 민주주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의 생산자 민주주의는 다양한 민주주의 중 가장 낙후한 분야다. 대외적 민주주의도 아직 무척이나 부족한 분야다. 주한 미군의 주둔과 국군 통수권 문제, 불평등한 SOFA 협정이 보여주듯이 한국의 대외적 민주주의는 ‘비교 제3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매우 열악한 실정이다. 일상성 민주주의도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다.
왜 한국 민주화가 민주화운동의 치열성에도 불구하고 수동혁명과 보수적 민주화로 귀결되어왔는지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성찰해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특히 그동안의 민주적 성과까지 빼앗아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공세 속에서 다양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이론적 연구와 실천이 필요하다.
제2부 민주화 이전
박정희 정권의 국가 성격 - 시기별 변화를 중심으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서민 등을 중심으로 박정희 향수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과 정치 정세를 고려할 때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재평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한 역사적 과제다.
제3공화국의 국가성격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박정희 정권의 시기 구분 문제다. 박정희 정권은 크게 보아 다음과 같은 세 시기로 나뉜다.
제1기 군정기(1961년 5월 쿠데타~1963년 말 ‘민정’ 이양)
제2기 ‘민정기’(1963년 말 민정 이양~1972년 10월 유신)
제3기 유신통치기(1972년 10월 유신~1979년 10?26)
박정희 정권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1961년 쿠데타에서 유신에 이르는 시기를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군정기는 독자적인 시기로 구별해 국가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군정기는 사실상 헌법이 정지되고 기본권이 거의 동결된 시기고, 1963년 민정 이양 이후는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시기라는 이유만은 아니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5?16 쿠데타 세력이 지향했던 한국 사회의 미래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내용이다.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 계획은 “초기 공업화의 일본이나 1960년대 초의 홍콩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한국의 근면하고 영리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수출 상품을 생산”한다는 외향적 산업화 전략을 기조로 한 것이다. 그러나 5?16쿠데타 세력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국가주도형 산업화에 수출주도형이 아니라 수입대체 산업화의 심화, 즉 ‘내포적 산업화’를 통한 자립 경제의 추구를 기본 색조로 하고 있었다. 즉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 계획과는 정반대의 내용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① 소비재나 경공업보다는 철강, 정유, 조선 등 중화학 공업과 기간산업 시설에 초점을 두어 수입대체 산업화에 심화를 기하고, ② 외채보다는 재벌들의 부정축재 재산의 환수와 유휴자본 동원 등 국내자본의 동원을 소요 자원의 주된 원천으로 삼으며, ③ 금융기관의 국유화 등 국가주도형 산업화 내지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를 지향했으며, ④ 수출 증진의 경우 공산품의 수출을 위한 경공업 위주의 산업화보다는 원조 감소 등에 대처하기 위한 전통적 1차 상품의 수출 확대를 기하는 한편, ⑤ 농업의 희생을 통한 공업 발전이라는 불균형 발전이 아니라 농어촌 고리채의 탕감 등을 통한 농업의 동시 발전을 목표로 했다. 이런 내용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명백하게 사회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5.16쿠데타 세력이 지향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낫셀주의 등 제3세계의 민족주의적 분위기, 국내적으로 4?19혁명 후 조성되었던 민족주의적 분위기, 주체세력의 개인적 배경 등을 반영해 상당히 민족주의적이고 ‘비자본주의적 발전’을 지향하는 요소와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그간의 통념과는 달리 ‘민족민주ND국가’적인 요소가 강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초기에 미국과 재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게 됐다. 미국의 적대적인 태도와 경제 상황이 엉망인 상태(쿠데타 이후 원조 감소와 정치적 불안정, 여기에 따른 재벌들의 투자 기피에 따라 1인당 국민총생산은 전년의 87.7달러에서 85.2달러로 오히려 떨어졌다)에서 민중권력에 기반하지 못한 군부의 정통성은 경제의 향방에 달려 있었다. 결국 혁명의 정통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경제를 살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재벌들의 환심을 사 투자 등 경제활동을 활발히 해야 한다고 판단한 군부는, 공장을 지어 국가에 헌납하는 것을 조건으로 구속한 재벌들을 석방했다. 그나마도 당초 계획했던 부정축재 재산 환수액의 5퍼센트에 불과한 벌금을 내는 것으로 감면시켜주고 말았다.
결국 쿠데타 세력은 대내외적 압력에 굴복해 1963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포기하고 미국이 그동안 동결했던 원조 방출조건으로 미국에 의해 강제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정안을 채택했고, 박정희는 군사혁명과 개혁은 실패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다. 이 수정안은 ① 정부투자의 축소와 사적 자본의 역할 극대화, ② 중화학공업화의 축소 등 내포적 산업화 노선의 포기와 수출주도형 산업화, ③ 수입과 외국자본 활동의 자유화와 외채에 의존한 자본조달 등을 골자로 한다. 즉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과 민족민주국가적 노선의 포기, 세계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적극적 통합을 통한 종속적 자본주의적 노선의 추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박정희 정권 시기에서 하나의 단절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유신이 아니라 1963년 민정이양,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정안 채택이며, 이는 국가 성격이라는 측면에서도 단절점이 된다.
박정희 정권 초기인 군정기와 유신 사이의 시기, 즉 1964년부터 1972년까지의 8년간은 박정희 정권 중 정치적으로 상대적으로 민주적이었던 시절이다. 쟁점이 되는 것은 첫째, 1964~1972년까지의 시기와 유신 시기 간의 연속성과 단절성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 둘째, 박정희 정권의 기본적인 국가성격이 관료적 권위주의냐 종속적 파시즘이냐 하는 문제다.
유신 이전과 이후 사이에는 단절성보다는 연속성이 강하다. 따라서 그것을 관료적 권위주의로 보건 종속적 파시즘으로 보건, 그 출발점은 유신이라기보다는 1963년이며 유신은 그런 경향이 강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유신 이전을 단순한 권위주의로 보고 유신 이후를 관료적 권위주의 내지 종속적 파시즘으로 보는 것보다 타당하다.
국가 성격에 대한 새로운 성격 부여와 분류 기준이 필요하다. 국가성격은 그때 그때 새로운 상황의 전개와 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것의 다양한 측면 중 새로운 측면을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1997년 이전의 경우 한국의 국가 성격 논쟁은 박정희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져온 종속적 파시즘(내지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가 자유민주주의로 변했느냐 하는 민주화의 문제에 국한돼왔다. 그러나 1997년 이후 생겨난 또 다른 변화는 국가와 경제의 관계, 그리고 국가의 역할에 있어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다. 과거의 국가주도형에서 미국형 내지 1980년대 이후 남미형의 신자유주의적 국가로 나아가는 변화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 때의 국가를 ‘종속적 신자유주의형 제한적 정치적 민주주의’ 국가로 이해할 경우, 박정희 정권의 국가의 경우 단순한 종속적 파시즘이라는 인식을 넘어서 ‘신자유주의적’이라는 규정에 상응하는 ‘발전국가적’ 내지 ‘발전국가형’ 종속적 파시즘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제3부 세계화 이후
반세계화 투쟁은 역사적 반동인가 - 네그리?하트의 『제국』에 대한 비판적 고찰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등 최근의 현대자본주의의 변화를 가장 체계적으로 분석한 야심작이다. 지구화와 관련된 『제국』의 핵심 가설은 다음 네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가설 1 제국과 지구화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며 필연이다.
가설 2 제국과 지구화는 역사적 진보이다.
가설 3 따라서 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적 지구화) 투쟁은 역사적 반동이다.
가설 4 우리의 대안은 (반지구화 투쟁이 아니라)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하는 것, 이것을 통해 대항지구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구적 시민권, 사회적 임금권, 재전유권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현대자본주의의 경우 ① 핵무기의 발달에 따라 제국주의 간의 전쟁은 세계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핵무기가 갖는 세계대전에 대한 억제력, ② 군사력에서 현재 미국이 갖고 있는 압도적 우위성, ③ 제국주의 국가 간의 교차 투자와 완벽하지 못하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와 다른 초제국주의적인 조절장치 등을 고려할 때 제국주의 국가 간의 세계대전을 전망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제국』의 ‘제국주의 종말론’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제국주의 옹호론자들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미국이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고, 세계 500대 다국적기업이 미국 소유이자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고, 워싱턴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개입전쟁을 하고 있을” 때 “제국주의는 끝났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또 국민국가 체제의 변화에 동의하면서도 과거에는 “전지구적인 생산과 교환을 근대 제국주의적으로 조직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행위자”였던 국민국가가 세계시장에서 “점차 단순한 장애물로 나타난다”라는 주장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특히 제국론에 회의가 드는 것은 부시 정부 때문이다. 부시 정부는 제국의 다자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대신 일방주의와 (밖으로는 자유무역을 강제하면서 자신은 중상주의를 강화하는) “중상주의적 제국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하트는 2002년 8월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지구적 지배자들은 … 지금 … 두 가지 선택을 앞두고 있다. … 첫 번째 선택은 미제국주의입니다. … 또 다른 선택은 안토니오 네그리와 내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는 중심 허브가 있는 원환구조적 네트워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터넷과 유사한 형태죠.” 즉 제국은 우리의 현실과 역사적 필연이 아니라 두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부시를 비롯한 전 세계의 지배자들이 어리석지 않고 합리적인 지배자들이라면 제국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불행히도 이들이 어리석어 부시의 이라크 침공처럼 고대 로마 쇠퇴기에서 볼 수 있는 오도된 군사적 모험을 통해 낡은 제국주의로 가고 있다는 탄식이다. 불쌍한 ‘제국’이여!
결국 현실에 ‘제국’의 ‘요소’와 ‘계기’가 현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낡은’ 제국주의적 요소와 계기도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제국이 이미 우리의 현실이며 제국주의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잉 일반화 내지 과장이다. ‘진행 중인 전화를 둘러싼 많은 불확실성’이라는 측면에서 제국을 역사적 필연이 아니라 단순한 하나의 선택으로 분석한 하트의 최근 입장이 올바른 입장이며, 오히려 『제국』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제국』이 지구화와 ‘제국’을 역사적 진보로 보는 이유는 제국이 해방의 기회를 과거보다 훨씬 많이 열어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국이 해방의 기회를 넓혀준다고 믿는 이유는 지구화가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자본유동성을 통한 균등화와 남에서 북으로 향하는 노동유동성(이주)을 통한 균등화라는 이중의 균등화를 통해 여러 가지 실존적 조건을 균등화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거리가 먼 낙관주의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제국』이 국지적 자율성을 지키려는 좌파의 ‘낡은’ 반세계화 전략을 해롭고 반동적인 것으로 보는 이유는 국지성, 특히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 내지 ‘하위 민족주의’를 포함한 민족주의의 억압성, 반진보성 때문이다(맑스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지지’한 것도 정확히 이것과 유사한 논리였다). 『제국』은 주장한다. “국민이 주권국가로서 형성되기 시작하자마자 국민의 진보적 성격은 거의 사라진다. … 민족‘해방’ 및 국민국가의 구축과 함께, 근대 주권의 모든 억압적 기능들은 필연적으로 강력하게 꽃핀다.” 문제는 하트와 네그리에게는 ‘식민주의’만 있고 ‘신식민주의’라는 개념은 없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식민주의와 독립국이라는 이분법만 존재할 뿐 형식적 독립은 획득했지만 실질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신식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주의와 국지적 정체성이 억압성을 내재하고 있고 국제주의와 대항지구화라는 지구적 연대에 장애가 될 수 있지만,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해 국지적인 것을 방어하는 반지구화 투쟁은 그 나름의 진보성을 갖고 있으며 이것은 진보진영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제4부 결론 - 두 개의 개혁, 두 개의 전선
두 개의 개혁, 두 개의 전선 - 자유주의 정권들의 비극과 박정희 향수의 근원
1987년 민주화 이후, 특히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핵심적인 화두가 있다면 그것은 개혁이다. 그러나 개혁이 과연 무엇인가는 혼돈스럽다. 우리가 두 개의 전혀 다른 개혁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 ‘개혁’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민주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흔히 개발독재라고 부르는 ‘61년 체제’다. 이 61년 체제는 관료적 권위주의 내지 종속적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억압적 정치 체제와 발전국가 내지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국가주도형 경제체제를 특징으로 했다. 이 체제는 두 개의 과정을 거쳐 해체되어왔다. 먼저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억압적 정치체제로서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로, 국가주도형 경제체제는 1997년 시작된 IMF 프로그램으로 급속히 해체되었다.
지금까지 노무현 정부의 집권기는 크게 보아 제3기로 나누어진다. 집권 후(2003년 2월)부터 정권을 잡았지만 여소야대 아래에서 한나라당의 발목잡기 등으로 탄핵의 수모(물론 노 대통령이 상당 부분 자초한 면이 있지만)까지 겪어야 했던 2004년 4월 총선까지가 제1기라면, 제2기는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고 4대 개혁입법 등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총선 승리 때부터 2005년 초라고 할 수 있다. 제3기는 노 대통령이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겠다고 말함으로써 개혁에서 경제 살리기로 방향을 전환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2005년 초 연두 기자회견 이후부터 지금까지다.
개혁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노무현 1기에서는 3김식의 사당정치와 제왕적 대통령의 탈피 등 탈권위주의화라는 민주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소야대 등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제기하지도 못하는 등 또 다른 민주개혁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반면 제2기 때는 노무현 정부가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비정규직 개혁안을 추진하지만 노동계의 반대로 정기국회에서 법안을 다루지도 못하는 등 신자유주의 개혁(개악)이 교착상태에 남아 있게 된다.
노무현 정부는 현재 경제 살리기라는 이름 아래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개혁(개악)을 중단하는 대신 흐지부지되고 있는 민주개혁을 다시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에는 ‘전투적 리더십’과 ‘스타일의 급진주의’를 버리고 ‘내용의 급진주의’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까지 그것과는 정반대로 내용은 별로 없고, 보수적(이라크 파병, 노동자들의 잇단 분신에 대한 강경대응, 집시법 개악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대부분 보수적이며 좋게 보아도 중도우파적이다)이면서도 스타일이 급진적이어서 잡음을 일으키고, 기득권층의 불안감을 조성해 사회적 갈등이 불필요하게 증폭되는 식으로 정무를 수행해왔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표현대로 빈 수레의 개혁을 추진해왔는바, 이것을 바꿔 스타일은 부드럽되 내용이 급진적인 ‘깊은 강의 개혁’으로 나가야 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