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소리의 자본주의"는 "소리를 부르주아적 기호로서 유통시키고소비해가려는 사회적 전략"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소리 문화를 엿보고, 그 안에 내재하는 산업 논리를 파헤치는 이 책은 나치 독일과전시 일본 등에서 지배자의 소리를 대변하는 이른바 국가적 소리문화의 형성을 통해 축음기와 전화, 라디오 등의 음향 미디어를 고찰한다.
■ 저자 요시미 슌야
1957년 도쿄 출생으로1981년 도쿄(東京)대학 교양학과 상관사회과학분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도쿄대학사회정보연구소 조교수이며, 전공은 도시론, 문화사회학이다. 저서로는 『도시의 드라마트루기』『미디어 시대의 문화사회학』『박람회의정치학』『기록·천황의 죽음』『미디어로서의 전화』 등이 있다.
■ 역자 송태욱
연세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대학 연구원을 지냈으며, 2006년 현재 연세대에 출강하고 있다. 논문으로 「김승옥과 고백의 문학」이있고, 지은 책으로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번역과 번역가들』『탐구 1』『윤리 21』『일본정신의기원』『포스트콜로니얼』『천천히 읽기를 권함』『움베르토 에코를 둘러싼 번역이야기』『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은빛 송어』등이있다.
■ 차례
서장 소리의 자본주의
1. 나가이가후와 라디오 소리
2. 음분열증과 복제기술의 상상력
3. 음향 미디어와 소리를 소비하는 사회
1장 경이의 전기술
1. 동물자기설의 대유행
2. 구경거리가 된 전기요법
3. 전기 마술과 과학자들
4. 기술적 지식의 정치학
2장 소리를 복제하는 문화
1. 음성을 복제하는테크놀러지
2. 에디슨, 축음기를 발명하다
3. 음 에크리튀르의 대량생산
4. 축음기 노점과 가두음악대
3장 텔레폰의 즐거움
1. ‘전신’으로서의 전화
2. 수화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다
3. 텔레폰 힐몬드의 실험
4. 네트워커가 된 여성 교환수
5. 광장의 소리에서밀실의 소리로
4장 마을의 네트워킹
1. 국가장치로서의 전신·전화
2. 여자 교환수와 소리를 둘러싼 정치
3. 유선방송 전화와 커뮤니티 공간
5장 무선의 소리 네트워크
1. 무선통신과 라디오 방송사이
2. 포레스트의 방송과 아마추어 무선가들
3. 네트워크화하는 아마추어 무선통신
4. 라디오 방송과 상품으로서의소리
6장 다이쇼의 라디오 매니아들
1. 일본의 라디오 방송전사
2. 자유권으로서의 공중전파대
3. 집권을 위한 통제기구, 라디오
4. 곤다 야스노스케와 민중오락으로서의 라디오
7장 모더니즘과 무선의 소리
1. 이탈리아 미래파와무선 상상력
2. 브레히트와 바이마르 시기의 라디오 예술
3. 일본 모더니즘과 라디오 드라마
4. 아방가르드와 아마추어사이
8장 다시, 소리의 자본주의
1. 미디어 변용으로서의1930년대
2. 국가의 소리, 전자의 웅성거림
참고문헌/지은이 후기/옮기고 나서
소리의 자본주의
서장 소리의 자본주의
산업혁명, 그리고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생겨나 퍼지기 시작한 전기적 음성 복제 기술은 침묵, 즉 음의 어둠을 죽이고 귀의 원근법을 평면으로 만들어버렸다. 음을 무한하게 복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시간은 물론 공간에서도 음이 그 국소성이나 방향성을 상실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재하는 음향기호가 범람해 애초에 청각 세계 자체를 있게 한 공백을 메워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시각 세계에서 전기조명이 어둠을 묻어버리고 사진에서 영화, 텔레비전에 이르는 영상기술이 ‘상=이미지’를 원래 사건에서 분리해 무한하게 복제하고 편재화하게 된 것과 완전히 동시에 진행된 과정이었다. 라디오는 그 대표선수고, 축음기와 전화가 라디오를 보완했다.
마셜 맥루한에 따르면 활자 미디어의 보급으로 음독이 묵독으로 바뀌고 활자문화는 민중의 생활 깊숙한 곳에서 숨쉬고 있던 소리문화를 밀어냈다. 이것이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를 관통하는 미디어 변용의 기본 경향이었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새롭게 출현한 전화나 라디오에서 녹음기와 텔레비전에 이르는 전기 미디어는, 이런 시각의 우위와 세계 균질화의 흐름을 다시 역전시킨다. 이제는 다시 ‘청각=촉각’이 우위를 점해 활자시대에 시각이 우위였던 관점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 실제로 우리 중추신경계의 확장인 전기 미디어는 지구적 규모로 거리를 없애버리고 사람들에게 전(全) 감각적인 공존 상태를 가져다 준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입에 현대의 미디어 테크놀러지, 즉 축음기, 전화, 라디오로 대표되는 음향 미디어의 사회적 형성과 수용의 과정을 동시대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나 새로운 기술에 대한 태도, 특히 기계적으로 복제되는 ‘소리(聲)’를 둘러싼 동시대의 다양한 집단, 계급, 젠더 사이의 다툼 속에서 다시 파악하려는 시도다. 작가나 사상가, 음악가의 관점에서 도움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말한 것과 밀접하게 관계된 두 가지 문제가 이 책 전체를 다양한 부분에서 관통하는 기축이 됐다.
첫째는 새로운 음향 테크놀러지가 사회화해 나가는 초기 단계에서 이미 사회적 지위를 확립한 전문 송신자가 아니고, 신기술에 완전히 수동적인 청중도 아닌, 오히려 그 중간에 위치하는, 넓게 보면 ‘아마추어’라 불리는 사람들이 이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 사용하며, 나아가 거기에서 복제된 ‘소리문화’를 어떻게 형성해갔느냐는 문제다. 그리고 축음기, 전화, 라디오라는 미디어 개념 자체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린 사회적?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는 각종 음향 미디어의 경계가 더욱 모호했다. 그리고 이 모호한 경계선에 어느 정도 기술적 변용의 역선(力線)이 각 형성기 미디어에 동시에 작용해, 오늘날과 같은 미디어 문화가 배치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초창기 음향 미디어의 복잡한 얽힘에 각 미디어를 횡단하는 형태로 작용한 기술적 변용의 역선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이 책이 축음기와 전화와 라디오라는 세 음향 미디어를 연결해 살펴보는 두 번째 문제다.
이렇게 ‘소리’를 부르주아적인 기호로서 유통시키고 소비해가려는 사회적 전략을 여기서는 ‘소리의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로 한다. ‘소리의 자본주의’라는 말이 함의하는 것은 예컨대 자본주의란 결국 ‘소리’라는 인간의 신체성/관계성의 구조적 변용 안에 존립하는 시스템이며, 적어도 18세기 말까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17세까지 그 단서를 찾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음향 복제 미디어의 등장과 소리문화의 변용은 산업혁명이나 자본주의의 결과라기보다 그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경이의 전기술
1. 동물자기설의 대유행
1778년 빈에서 파리로 온 의사 프란츠 안톤 메스머는 이미 1770년대 전부터 빈에서 자기요법 진료소를 운영하는 한편, 자석을 이용하지 않고 자기의 흐름을 조작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독자적인 ‘동물자기’ 요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런 활동이 빈 의학계의 반감을 사자 메스머는 본거지를 파리로 옮겨 프랑스 귀족과 대중에게 자기요법의 ‘과학성’을 호소한다. 메스머는 인체를 자기의 흐름, 즉 자류의 집합으로 파악하고, 흐트러진 자류를 반듯하게 해 줌으로써 다양한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곧 메스머의 자기요법은 메스머의 당당한 태도, 다양한 의사(擬似) 과학적 진료 장치, 빠른 치료 효과 덕분에 파리의 지식인이나 프랑스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시대의 전기나 자기에 대한 열광은 전유럽적 현상이었다. 사람들은 이 무렵부터 자신들이 전기 또는 자기의 흐름에 둘러싸여 있고, 이 흐름들은 인간이나 동물의 몸을 관통하고 거기에 축적되며 평형 상태에 도달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널리 공유했다.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계몽의 시대’인 혁명 전야의 프랑스에서 메스머리즘이 유행한 현상의 바탕에는 더 넓은 사회의식의 변화가 놓여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어서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 말기 메스머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최면술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진이나 무선전신, X선 같은 테크놀러지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초능력이나 최면술을 현실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보면 메스머리즘에 열광한 18세기 말 프랑스인들과 19세기 초 일본인들의 대중 심리 사이에 비슷한 요소가 보일 것이다.
2. 구경거리가 된 전기요법
1780년대 유럽에는 더욱 직접적이고 대중적인 방법으로 전기나 자기와 의료를 결합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메스머의 대중오락판이 그것이다. 이들에게 전기가 지닌 생리학적 힘을 실험으로 실증하고 공들여 논증하려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한편 일본에서도 전기의 신기한 힘에 매료된 사람이 나타났다. 박물학자 히라가 겐나이가 일본 최초의 전기장치로 에레키테르(마찰정전기 발생장치)를 제작해 주위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후 겐나기가 연 쇼의 대중염가판이라고 할 수 있는 에레키테르 구경거리가 에도나 오사카의 번화가에 자주 등장했다.
3. 전기 마술과 과학자들
1780년대 무렵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전자기 현상에 대한 대중의 마술적 관심은 19세기 말이 돼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세기말의 사람들은 다양한 종류의 환약이나 비누에서 차, 화장수, 의복, 보석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에서 전기의 효능을 찾아냈다. 19세기 말 전기의 힘과 대중적 상상력의 이런 결합은 카리스마적인 인물 주위로 구심화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속의 박물관이나 대중 저널리즘을 통해 일상적으로 환기되고 통속화되는 시스템이 완성됐다. 이리하여 19세기 초 영국아드레이드 갤러리나 폴리테크닉 같은 과학 전시관이 새로운 테크놀러지의 경이로운 힘을 보여 주는 기관으로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된다. 19세기 런던에는 과학적 계몽을 위한 공개된 시설이 차례로 나타났는데, 이런 움직임은 1851년의 런던 만국박람회 또는 그 뒤의 만국박람회와 테크놀러지의 스펙터클한 전시가 결합하는 것으로 계속 이어졌다.
4. 기술적 지식의 정치학
19세기의 전기기술자들이 본질적으로 대중에 아양을 떠는 마술사나 흥행장에서 마술적인 쇼를 위해 새로운 전기기술 개발에 힘쓴 사람들은 아니다. 19세기의 전기기술자들은 앞다투어 전문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권위 있는 과학자들의 후원을 얻으려고 했다. 이런 전기기사들의 미묘한 처지의 배경에는 19세기 무렵 전기산업의 빠른 발전으로, 기계 수리공에서 전신기사 그리고 물리학자까지를 포함하는 전기 전문가들, 즉 전기기사들의 수가 빠르게 늘어난 사회 상황의 변화가 놓여 있었다. 전기산업은 급속히 발전했지만 직종 개념이 모호하고 아무것도 제도적으로 보증된 것이 없었으므로 전기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전기기사’를 자처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기기사들은 전기 기술의 정통 담당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긋고, 자신들을 서구문명의 ‘진보’를 선도하는 기술 엘리트로 연출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때 정통과 이단의 구분에는 전기와 관련된 장치나 관념, 인물군에 대해 적절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가 아주 중요했다. 이렇게 전문 지식을 정의하고 그것에 사회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전기기술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선을 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전문 지식을 둘러싼 전기기사들의 이런 전략은 인종이나 계급, 젠더, 생활 방식 등으로 마이너리티를 차별하는 전략과 결부돼 있었다. 전기기술과 그 기술의 독점적인 사용자인 전기기사, 양자의 관계에서 당분간 배제됐던 수용자 대중의 관계는 각종 차별과 지배의 맥락 안에 배치됐다. 초창기의 음향 미디어 역시 마술적이며 다양한 구경거리의 성격을 내포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권력 배치와 관련돼 발전해 나간다.
텔레폰의 즐거움
1. 전신으로서의 전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전화는 1876년 그레이엄 벨이 발명한 이래 편리함 덕분에 급속하게 전신을 능가하게 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전화를 신호 대신 목소리를 전송하는 전신과 동일한 미디어로 이해했고, 목소리 송신이 의미하는 결정적인 전환에는 좀처럼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예컨대 초기에 전화사업을 시작한 사람들은 사업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열쇠가 전화가 사회적 용도를 명확히 하고 이것을 널리 확신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사업 세계에서 전화가 아주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전화가 있으면 긴급한 업무 연락을 바로 할 수 있고, 고객을 얻는 데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크워크가 가장 신속하게 발달한 북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각지의 전화회사가 업무용뿐만 아니라 가정용으로 전화를 적극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광고의 핵심은 가정에서 주부들의 ‘일’을 돕고 시간을 절약하는 미디어라는 것이었다.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전화로 하는 ‘잡담’은 전화 본래의 이용법에서 벗어난 쓸데없는 짓으로 생각해 꺼렸다.
2. 수화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다
1880년대 이후 전화는 빠르게 유럽과 미국의 대중에게 익숙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발명자들이 공개 실험에서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로 유선 라디오적 오락 미디어로서였다. 1880년대에서 1890년대에 걸쳐 전화는 흔히 음악이나 연극, 교회 설교나 선거 연설, 선거 결과를 비롯한 다양한 뉴스를 많은 청중에게 전해 주는 미디어였다. 그리고 선거운동이나 스포츠 경기는 물론이고 교회의 설교든 흉악범 재판이든 대부분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에 이르는 20세기의 여러 미디어를 통해 쇼가 된 것은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도 없다.
3. 텔레폰 힐몬드의 실험
19세기 말 유럽과 미국의 대도시에서 확대된, 음악이나 연극을 비롯해 교회의 설교나 선거 연설을 전화로 중계하는 사업은 확실히 20세기 대중매체의 선구적 형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중계는 행사 자체에서 부수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예외인 것으로, 전화로 하는 프로그램 방송을 일상적으로 한 네트워크가 있었다. 1893년부터 1차대전까지 20년 넘게 매일 정치나 경제, 스포츠 뉴스, 강연, 연극, 음악회, 낭독 등의 프로그램을 마자르어로 가입 세대에 제공한 텔레폰 힐몬드가 있었던 것이다. 부다페스트의 텔레폰 힐몬드는 티바달 푸쉬카슈라는 헝가리인 과학자가 시작했다. 1893년 중앙교환국에서 약 1천 명의 가입자에게 처음 프로그램을 방송한 이래 1896년에는 6천 세대의 가입자를 얻었다. 힐몬드의 하루 프로그램은 아침 9시 30분, 빈에서 온 소식이나 전보로 알려진 최신 뉴스를 읽어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에는 주식 정보, 연극이나 스포츠 뉴스와 주식 정보, 국정 뉴스나 국제 뉴스, 공연과 음악회 중계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그리고 10시 30분 무렵 하루의 뉴스를 반복하며 방송을 끝냈다. 말할 것도 없이 힐몬드의 하루 편성에서 주축을 이루는 프로그램은 뉴스였다.
19세기 말 전화로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분야에서 텔레폰 힐몬드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안정된 성공을 거둔 네트워크는 없었다. 그런데 텔레폰 힐몬드는 늘어나는 가입자들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자본금이 없었고, 이것이 원인이 돼 사업은 금세 파산했다.
4. 네트워커가 된 여성 교환수
일반적으로 전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유선방송도 발전할 수 있게 한 초창기의 전화를 생각할 때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전화 교환수들의 역할이다. 젠더론의 관점에서 캐나다 전화 문화의 발전을 살펴본 미셸 마틴에 따르면 전화를 어디까지나 전신기술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한 전화사업가들은 처음에 전신 배달부였던 젊은 남성들을 전화 교환수로 채용했다. 게다가 19세기에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관여하는 것은 항상 남성적인 영역과 결부돼왔다. 그러나 채용된 소년들은 교환대 앞에서 몇 시간씩 묵묵히 앉아 작업을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얼마 안 있어 사업가들은 젊은 남성에게는 ‘본성상’ 교환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런 이유에서 벨 전화회사가 여성 교환수를 채용하기 시작한 때가 1880년이다. 그 뒤 전화 교환 수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계속 늘어났고, 결국 거의 ‘여성의 일’이 됐다. 물론 이런 사태의 배경으로, 여성이 신흥 사업에 필요한 대량의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는 원천이 된 사정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교환수의 여성화에는 이런 경제적 요인을 뛰어넘어 19세기 후반의 젠더를 둘러싼 문화적 통념이 작용했다.
19세기 후반 부르주아 사회는 남성을 자신감 넘치고 능동적인 존재로 보고, 여성을 순종적이고 수동적이며 인내력이 강한 분별 있는 존재로 봤다. 게다가 젊은 여성은 양친의 감독 아래 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마틴이 지적한 대로 여성에게 기대한 이런 사회규범은 몇 가지 점에서 교환수에게 요구하는 규범과 딱 맞아떨어졌다. 교환수들은 교환국 주임의 감독 아래 계속 교환대 앞에 앉아 각 통화자에게 대단한 인내력으로 대응해 나가야만 했다. 상층 중산계급의 가정을 더욱 강하게 사로잡은 남녀 관계에 대한 규범이, 하층계급 출신자들로 구성된 교환수에게는 회선 가입자와 교환수의 관계로 치환된 것이다. 때문에 여성 노동력이 전화교환 업무에 대거 투입되는 것은 이 직종의 사회적 지위를 떨어뜨리지 않았고, 오히려 여성들은 전화교환수를 임금은 낮지만 ‘존경받을 만한’ 몇 안 되는 직업으로 생각했다. 미래에 여성 아나운서와 스튜어디스까지 이어지는 부르주아적 통념으로 젠더와 테크놀러지를 결합하는 직업 유형이 이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환국의 처지에서 보면 여성교환수들은 단순한 시스템의 부품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 불완전했던 시스템을 가동하는 핵심 부분이었다. 이런 초창기 전화교환수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것이 교환수들과 회선 가입자 사이에 오가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북아메리카 대륙에서는 1883년까지 가입자에게 전화번호가 부여되지 않아 교환수가 지역에 있는 모든 계약자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있었고 계약자 쪽에서도 교환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교환수와 회선 가입자의 관계는 단지 통화를 연결해 주는 것을 넘어서는 개인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런 일상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교환수들은 지역의 정보를 잘 아는 네트워커 같은 존재가 됐다.
5. 광장의 소리에서 밀실의 소리로
초창기, 특히 농촌 지역의 독립 전화회사가 교환 시스템이 충분히 발달하기 이전에 보급한 것은 각각의 회선에 복수의 가입자가 직렬로 연결되는 공동회선 전화였다. 이른바 오늘날의 내선전화를 가까운 곳까지 확대한 시스템이다. 이런 전화 시스템에서 사람들은 수화기를 들고 거기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나중에 그 대화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공동체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입수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전해줬다. 이런 전화 커뮤니케이션의 모습은 길거리와 광장 같은 ‘모임’ 장소의 커뮤니케이션과 비슷하다. 이런 성격을 띠던 전화가 폐쇄적인 미디어로 바뀌는 것을 재촉한 계기로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지금까지 이 장에서 살펴본 초기 전화의 다양한 발전, 즉 공동회선이나 여성 교환수들의 네트워킹, 음악이나 연극 중계나 프로그램 방송 등은 어느 것이나 전국이나 회선망을 확대하려는 벨 계통의 시스템보다 농촌 공동체나 도시에서 일정하게 닫힌 사회집단을 기반으로 전화가 발달해갈 때 더욱 두드러진 경향이다. 이것에 비해 20세기의 전화산업이 지향한 것은, 회선망을 전국으로 연결하는 국가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이 국가적 시스템은 프라이버시에 관한 19세기의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규범으로 삼았다. 이런 인식을 기초로 전화는 개인 공간 사이를 밀실로 연결하는 사적인 미디어로 부각됐다. 이 과정은 그대로 19세기 후반에 발달한 부르주아적 사생활 관념, 그것을 기초로 도시의 백화점과 교외의 주택을 연결하는 소비사회의 생활방식이 계급의 단층이나 도시와 농촌의 경계를 넘어 확대돼간 과정과도 평행하게 진행된 것이었다.
둘째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전화산업은 점차 교환수들의 세부 노동에 대한 관리 시스템을 정비했다. 그리고 교환수들을 둘러싼 권력의 배치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중심 의미를 지닌 것이 교환수 목소리의 규격화였다. 기업의 논리에서 보면 상대와 접속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가장 짧게 만들어 일정한 시간 안에 최대의 교환량을 달성함으로써 이익을 내려면 교환수들이 매뉴얼에 따라 유형화된 대응을 하고 계약자와 맺은 개별적 관계나 개인의 창의적인 대응은 철저하게 배제해야 했다.
셋째로, 오늘날처럼 전화가 사생활과 밀착된 미디어가 된 최대의 계기는 이 미디어를 통한 계약자 사이의 잡담을 전화산업이 장래성 있는 시장으로 재발견한 점에 있다. 1920년대 이후 산업은 별안간 전화를 가정에서 쓰는 사교성의 미디어로 광고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전반에만 해도 전화의 사교성은 이미 회선에 가입하는 사람들이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한 친구와 잡담하는 데 한정돼 있을 뿐이었다.
다이쇼의 라디오 매니아들
1. 일본의 라디오 방송 전사
1922년 무렵 일본에서는 각종 박람회장 안 방송국에서 일본 음악이나 서양 음악, 독창, 강연 등의 프로그램을 방송했는데, 수신기는 전람회장뿐 아니라 시내 곳곳에 설치돼 주위가 인산인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쿄방송국이나 오사카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에서 정규 프로그램이 되는 교양 프로그램이나 뉴스, 연예 프로그램의 기본형이 이미 이런 공개실험 방송에서 실현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25년에 도쿄, 오사카, 나고야의 방송국이 방송을 시작해 본격적인 라디오 시대에 돌입했다. 이렇게 라디오가 급속히 보급되고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자 체신성은 방송사업을 더욱 강력한 국가통제 아래 두고, 전국을 하나로 묶는 방송망을 건설하여 그 뒤 일본의 라디오는 체신성의 강력한 통제 아래 국가 미디어로 발전해간다.
2. 자유권으로서의 공중전파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라디오 방송에 어떤 형태의 규칙을 적용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다양한 형태로 동시대의 저널리즘을 떠들썩하게 했다. 1927년, 실험 상대하고만 교신할 것, 실험 성과를 체신장관에게 보고할 것 등의 조건을 달아 약한 단파에 한정해 아마추어 무선이 허가되고, 민간의 무선 연구를 촉진하는 것이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전파는 원래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이것으로 오락을 즐기거나 서로 관계를 형성하는 개인의 것이라는 생각은 ‘라디오’나 ‘무선’에 대한 국가적 틀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점차 표면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3. 집권을 위한 통제기구, 라디오
일본의 라디오 방송은 일찍부터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통제 아래로 편입됐다. 그러나 1920년대 말까지 라디오 방송은 “될 수 있으면 ‘정치’ 분야와 관련되지 않고 거기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런데 “이런 소극성은 상황의 변화와 더불어 만주사변의 충격 이후 사라지기 시작한다.” 1930년대 이후, 이를테면 ‘라디오의 시국화’가 진행됐고 라디오는 파시즘 체제를 위해 더욱 능동적으로 대중의식을 동원하는 미디어가 됐다.
4. 곤다 야스노스케와 민중오락으로서의 라디오
무로부세 고신, 기요사와 기요시 등에 의해 제기된 라디오가 지닌 국가통제 장치의 측면을 강조한 논의에 비해 라디오 방송을 민중의 자발적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매체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가 동시대 일본에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것과 저변에서 통하는 관점에서 라디오를 ‘민중오락’으로 파악하고, 여기서 가정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 창조의 가능성을 탐색하려고 한 사람이 곤다 야스노스케였다. 그는 각종 연예 방송이나 스포츠 중계, 문화 프로그램이 여러 가지 점에서 자신이 말한 ‘민중오락’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곤다의 민중오락 연구는 민중의 문화 창조 가능성을 어디까지나 민중 자신의 자생적 계기 속에서 탐색하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다시, 소리의 자본주의
1. 미디어 변용으로서의 1930년대
히틀러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방대한 청중의 귀에 불어넣는 확성기, 더욱이 그것을 전 독일로 확산하게 해 준 라디오는 권력 행사의 바탕이 되는 장치였다. 나치 제3제국의 라디오 사업을 독점적으로 장악한 괴벨스는 연달아 방송국의 요직을 나치계 인물로 교체하고, 선거를 라디오전으로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방송의 국영화와 일원적인 관리, 게다가 값싸고 통일된 규격의 ‘국민수신기’를 대량 판매한 것이 독일 전 국민의 귀를 일상적으로 히틀러의 목소리에 종속시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 무렵,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자신의 라디오 목소리를 교묘하게 이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온화하고 강하며 자신감에 찬 루즈벨트의 목소리는 라디오에 안성맞춤이었고, 흔히 연설 내용 자체에서 드러난 모순이나 모호함을 숨기고 수신기 앞의 청취자를 매료시켰다. 이런 루즈벨트의 목소리=이야기의 테크닉을 대통령 취임 뒤에 시작된 ‘노변담화’에서 유감없이 발휘한 일은 유명하다. 루즈벨트는 이 담화에서 “자택에서 느긋하게 쉬면서 함께 거실에 앉아 있는 이웃에게 솔직하게 또는 정중하게 말하고 있는 한 남자” 역을 훌륭하게 해냈다. 루즈벨트는 활자 미디어 시대의 대통령이 아니라 전자 미디어 시대의 도래를 명확하게 계산에 넣은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까지 천황의 목소리가 공식적으로 방송 전파를 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쟁 말기 ‘천황의 목소리’라는 최후의 수단을 꺼냄으로써 일본의 지배 엘리트들이 절박한 위기에 처한 민족적 통합 감정을 어떻게든 유지하고 그것을 파시즘 체제에서 분리해 미군의 점령 체제로 결합해갈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렵까지 그런 최종적인 심급을 향해 사람들의 귀를 끊임없이 구심화해가는 국가적인 소리의 유통 시스템이 완성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치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라디오를 국가적인 소리의 확성기로 파악하는 관점을 전쟁 시기 일본의 라디오 정책에서도 활발하게 받아들였다.
2. 국가의 소리, 전자의 웅성거림
1930년대 이후 나치 독일과 뉴딜의 미국, 전시체제 아래의 일본에서 라디오 전파는 급속하게 국토의 전 영역을 뒤덮으면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배자의 소리와 국민의 귀를 연결하고 국가적인 소리문화를 조직해 나갔다. 초창기 사람들과 전화나 라디오의 결합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이 미디어들이 처음부터 사람들의 목소리를 국토 공간의 균질한 확장 속에서 일원적으로 유통시켜 나갈 장치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초기의 전화나 라디오가 가능하게 한 것은 트리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뉴런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세미래티스(Semi-Lattice, 격자세공) 상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1930년대 또는 엄밀하게 말해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 국가나 산업이 강력하게 추진한 미디어 재편은 이런 전화나 라디오의 모습을 수면 아래로 밀어버렸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관련해 여기서는 다음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이 변화를 이끈 한쪽 역선은 이 무렵부터 산업이 일상의 소리 커뮤니케이션을 무척 유망한 시장으로 보게 됐다는 점이다. 둘째,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 본격화한 이런 소리 커뮤니케이션의 산업화는 1930년대 이후 국민국가의 재편 과정과도 밀접히 관련된다. 산업화는 동시에 전화나 라디오 소리를 국토 공간의 균질적인 확장 속에서 일원적으로 유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는 점차 전화 대화를 지역적인 생활권의 확대와는 무관한, 거리가 없는 개인적 커뮤니케이션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경우라면 이는 1960년대 이후에 비로소 본격화된 움직임이었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부터 전기 테크놀러지와 관련돼 발전한 음성의 복제 미디어가 그때까지 소리가 뿌리내리고 있던 장소성에서 유리된 형태로 어떤 ‘이차적인 소리문화’를 형성해왔는지 생각해보려고 한 것이다.
이 책의 관점에서 본다면 19세기 이후 복제기술의 발전 과정에는 오늘날에는 자명해진 방송이나 통신으로 대표되는, 모두 거리를 없애면서 국토나 지구를 뒤덮어가는 미디어로 일원화되는 움직임만이 아니라 다양한 중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중간 영역은 결코 역사에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대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구성하는 기층 문화로 존재하고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