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근대철학의 3대 고전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를 프로이드와 니체,앙리 베르그송, 미겔 데 우나무노, 베네데토 크로체, 폴 발레리,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까뮈, 토마스 만, 하이데거, 버트란드 러셀 등세계적인 서구 문명 해석자들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 저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
스페인근대철학의 대가로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철학자이자 문장가라는 찬사와 함께,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은현대 대중사회의 본질을 문명사적으로 분석한 세기적인 저작이다. 그의 근본사상은 니체나 딜타이 등의 계통을 잇는 "생의 철학"에 근원을 둔것으로, 19세기 초반 스페인 사상계에 쌍벽을 이루던 미겔 데 우나무노가 이성을 생에 적대하는 것으로 본 것과는 달리, 딜타이로부터 배운"역사적 이성" 또는 "생명적 이성"으로 초월함으로써, 생과 이성의 통합을 겨냥하는 독자적인 철학을 구성했다. 1921년에 발표한 『척추 없는스페인』에서는 스페인 몰락의 원인을 지도적 소수에 대한 대중의 불순종에 두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한 원인을 널리 현대사회의 일반적 상황에서찾았다.
■ 역자 황보영조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스페인 제2공화국 토지개혁을 둘러싼 각 정당과사회단체〉라는 논문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논문으로 〈스페인 왕정복고기 통치 엘리트의 민주화 시도와 한계〉〈스페인 내전 연구의 흐름과전망〉 등이 있고, 저서로는 『대중독재 : 강제와 동의 사이에서』(공저)가 있다. 현재 경북대 인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차례
책을 옮기고 나서
1부 대중의 반역
1장 대중의 출현
2장 역사 수준의 상승
3장 시대의 높이
4장 삶의 확장
5장 통계 자료
6장 대중의 해부
7장고귀한 삶과 평범한 삶, 혹은 노력과 게으름
8장 대중은 왜 모든 일에 폭력적으로 개입하는가
9장 원시성과 기술
10장원시성과 역사
11장 "자만에 빠진 철부지"의 시대
12장 "전문화"의 야만성
13장 최대의 위험은 국가
2부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14장 누가세계를 지배하는가
15장 진정한 문제에 도달하다
대중의 반역
1부 대중의 반역
대중의 출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오늘날 유럽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대중이 완전한 사회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대중은 개념상 사회를 통치할 수 없음은 물론, 자신의 실존도 조율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유럽이 이제 어느 민족이나 국가, 어느 문화도 겪어보지 못한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른바 대중의 반역이다.
나는 이것을 군중의 ‘충만’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군중은 갑자기 출현해 사회의 주요 장소를 차지했다. 예전에는 존재했다고 해도 사회 무대의 뒤쪽에 있어서 간과되었지만, 이제는 전면에서 조명을 받는 주역이 된 것이다. 군중을 사회학 용어로 번역한다면, 그것을 ‘사회대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회는 언제나 소수와 대중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 역동적 통일체이다. 소수는 특별한 자격을 갖춘 개인이거나 개인들의 집단이고, 대중은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집합이다.
대중을 단순히 ‘노동대중’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중이란 ‘평균인(de hombre medio)이다. 또한 대중이란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자신에 대해 선악의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일시하면서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를 의미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우리 시대의 특징은 우수한 전통을 지닌 집단에서도 대중이나 범인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이에 본질상 자질을 요구하고 있고 또 그것을 전제로 하는 지적인 생활에서조차, 자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질을 평가할 수도 없고, 정신구조상 부적격인 가짜 지식인들이 점차 승리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사회에는 원래 전문적인 것이어서 그런 재능이 없이는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업무와 활동과 기능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를테면 고급예술의 유희나, 공공문제에 관한 정치적 판단과 통치의 기능을 예로 들 수 있다. 예전에는 자질이 있거나 적어도 그런 자질이 있다고 자처하는 소수가 이런 전문 활동에 종사했다. 대중은 이런 활동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그에 필요한 자질을 갖춰야 하고, 대중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다시 말해 건강한 사회적 역학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 예전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유희를 즐긴다고 해서 개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소수의 활동 영역을 떠맡으려는 대중의 결정이, 유희 분야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의 정치 혁신이란 바로 대중의 정치 지배를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과대민주주의를 목격하고 있다. 여기서 대중은 법을 따르지 않고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물리적 압력을 행사하면서 자신들의 열망과 욕망을 실현시킨다. 우리 시대만큼 군중이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시대가 역사상 언제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그래서 과대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동일한 현상은 다른 분야, 특히 지적인 분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은 평균인이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차게 평범함에 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디서든 실현시키려는 데 있다. 대중은 모든 차이, 즉 우수하거나, 개성이 있거나, 자질이 있거나, 선택되는 모든 것을 억누른다. 모든 사람과 같지 않은 사람이나, 모든 사람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따돌림을 당할 위험이 있다. 물론 이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본래 대중과 전문적인 소수의 복합체였다. 그러나 이제 ‘모든 사람’은 대중일 뿐이다. 이것이 난폭한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낸 우리 시대의 가공할 현상이다.
대중의 해부
19세기에 점차 대량생산된 이 대중의 삶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 우선 모든 면에 파고든 물질적 편의를 들 수 있다. 평균인이 자신의 경제 문제를 이처럼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재산 규모의 비율이 축소되고 산업노동자의 생활이 더욱 곤란해지긴 했지만, 어느 계층이든 각 사회계층 내의 평균인의 경제적 전망은 날로 호전되었다. 또한 1900년부터는 노동자도 자신의 삶을 확장하고 안전을 확보해나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새 인간에게 제시된 삶이란 기본적이고 결정적인 모든 차원에서 거침이 없는 것이다. 과거의 서민들에게는 이런 삶의 자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런 사실과 그 중요성을 빨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인 면에서 시민적?도덕적인 면으로 눈을 돌리면 이런 상황의 대조는 더욱 분명해진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평균인 앞에 놓여 있던 사회적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공적인 사람의 영역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방해나 제한도 받지 않게 되었다. 아무 것도 그의 삶에 제약을 가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이런 조건들로 이루어진 상황과 조금이라도 흡사한 생활환경에 놓인 적은 결코 없었다. 19세기에 시도된 것은 사실 인간 운명에 나타난 근본적인 혁신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생활 무대가 만들어졌다. 이는 육체적인 면에서도 새롭고 사회적인 면에서도 새로운 것이었다. 이러한 19세기는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시대였다. 혁명적인 것을 바리케이드의 광경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그 자체로는 혁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혁명이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전통적인 질서를 얼버무릴 새 질서를 수립하는 일이다. 과거 ‘평민’에게 삶이란 무엇보다도 제약과 의무와 예속, 한 마디로 말하면 압력을 의미했다. 하지만 오늘날 새로운 인간을 둘러싼 세계는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으며 그 어떤 금지나 제지도 없다. 오히려 그의 욕망을 자극하여 무한대로 만든다.
이제 우리는 현대 대중의 심리 분석표에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기록해볼 수 있다. 하나는 삶의 욕망, 곧 개성의 무한한 확대이고, 다른 하나는 생활의 편의를 가능케 해준 모든 것에 대한 철저한 배은망덕이다. 이는 응석받이 어린이의 심리를 구성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자신이 호흡하는 공기를 두고 타인에게 감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기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희소하지 않은 ‘거기에 있는 것,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응석받이 대중은 물질적?사회적 조직이 공기와 다름없이 주어진 것이고 외견상 소멸하지 않기 때문에, 그와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고 너무 완벽하며 자연스런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다. 따라서 내가 제기하고 싶은 명제는 다음과 같다.
“19세기가 일부 생활 영역에 부여한 조직의 완벽성으로 인해 그 수혜자들인 대중이 그것을 조직이 아니라 자연이라고 간주한다.”
대중은 왜 모든 일에 폭력적으로 개입하는가
적어도 지금까지의 유럽 역사에서 일반대중이 매사에 어떤 ‘견해’를 자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신앙과 전통, 경험, 격언, 그리고 습관적인 생각은 갖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물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를테면 정치나 문학에 대한 이론적인 견해를 자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오늘날의 평균인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그리고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 매우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래서 경청하는 습관을 잃어버렸다.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이미 갖고 있는데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제는 들을 때가 아니라 판단하고 판결하며 결정할 때이다. 눈이 멀고 귀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회생활에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고 관여한다.
이것은 장점이 아닌가? 그렇지가 않다. 평균인이 갖고 있는 ‘견해’는 진정한 것이 아니며 교양도 마찬가지이다. 견해는 진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 견해를 갖고 싶어하는 자는 먼저 진리를 구하고 진리가 요구하는 놀이 규칙을 수락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 토론하면서 상대방의 최종 입장을 존중해주지 않는 곳에는 교양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럴 때에는 야만성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이 대중의 반역이 진행되는 유럽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벌써 수년 전부터 유럽에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예로 생디칼리즘과 파시즘 같은 정치운동을 들 수 있다. 새로운 사실들이 기이한 것은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기상천외한 모양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디칼리즘과 파시즘이 전개되면서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근거를 제시하거나 마련하려 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 태도를 취하는 유형의 인간이 출현했다. 여기에 새로움이 존재한다. 그것은 근거를 갖지 않을 권리, 곧 무(無)근거의 근거다. 나는 여기서 능력도 없으면서 사회를 지배하겠다는 결의를 보이는 매우 분명한 대중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발견한다. 이러한 대중은 토론을 할 때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최고 권위를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따라서 유럽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토론의 중지’이다. 결국 대중은 정상적인 절차들을 모두 폐지하고 바라는 것을 직접 강요한다. 때때로 폭력은 이성과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 사전에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해본 뒤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대중의 ‘직접행동’은 폭력을 제일의 이성으로, 엄밀히 말하면 유일한 이성으로 선언하고 있다.
반대세력이 공존하는 국가가 계속 감소하고 있고, 거의 모든 국가에서 하나의 동질적인 대중이 공적 권위를 제압한 다음, 반대집단을 모두 진압하고 전멸시키고 있다. 밀집한 군중의 모습을 보고 누가 이렇게 말하겠는가마는, 대중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자들과의 공존을 원하지 않는다. 대중은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싫어한다.
최대의 위험은 국가
오늘날 유럽 문명을 위협하는 최대의 위험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이 위험 역시 문명을 위협하는 다른 위험들과 마찬가지로 유럽 문명 자체에서 생겨났으며, 더구나 유럽 문명이 자랑하는 영광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바로 근대 국가다.
18세기 말 유럽에서 국가가 무엇이었는지를 상기해보라.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기술, 곧 합리화된 신기술이 최초의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와 그 산업 보직을 통해 일차적인 사회 성장이 이룩되었다. 그리고 규모와 세력 면에서 기존의 계급보다 훨씬 더 강력한 새로운 사회계급인 부르주아지가 출현했다. 약삭빠른 이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한 가지 재능, 곧 실질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운동을 조직하고 훈련시키며 일관성 있게 지속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을 통해 부르주아지는 공권력을 장악하고 국가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가치를 부여하여 한 세대가 조금 지난 뒤에는 혁명을 종식시킬 만큼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와서 국가는 완벽한 기능을 갖추고 그 수단의 양과 정확성 면에서 놀라운 효율성을 갖춘 경이적인 기계가 되었다. 대중은 국가를 바라보며 찬탄한다. 그는 국가가 언제나 거기 있으면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준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사회 생활에서 어려움과 갈등, 문제가 발생하면 국가가 즉시 개입해서 거대하고 막강한 수단을 동원해 그 문제를 해결해주길 요청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오늘날 문명을 위협하는 최대의 위험이다. 그것은 곧 삶의 국유화와 국가 개입주의, 그리고 국가에 의한 모든 사회적 자발성의 흡수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유지?양육?발전시키는 역사적 자발성의 근절이다.
결국 사회는 국가를 위해 존재하게 되고 인간은 정부라는 기계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 더구나 국가는 자신의 실존과 유지를 생명체에 의존해야 하는 한낱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 사회의 골수를 빨아먹은 다음 말라비틀어져 해골만 앙상한 채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것이 고대 문명의 처참한 운명이었다. 국가 개입주의는 결국 인민을 국가라는 단순한 장치와 기계의 먹이인 고기와 빵으로 변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점을 깨닫는다면, 무솔리니가 지금 이탈리아에서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모든 것이 국가를 위한 것이고, 국가 위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에 반하는 것은 없다”고 외칠 때 오히려 어리둥절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파시즘이 전형적인 대중운동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무솔리니가 발견해낸 국가는 그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그가 대항하던 세력과 이념, 곧 자유주의 국가가 건설해낸 것이다. 그는 단지 국가를 무절제하게 사용하려 했을 뿐이다. 이러한 결과, 유럽 국가들은 내부의 난제들과 굉장히 심각한 경제, 법, 공공질서의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대중의 지배 아래 국가가 개인과 집단의 독립성을 말살하고 결국 미래를 황폐화시키고 있는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부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유럽 문명은 자동적으로 대중의 반역을 불러왔다. 겉에서 보면 이 반역은 더할 나위 없는 현상이지만 동일한 현상의 이면은 두려움을 안겨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대중의 반역이란 인류의 철저한 타락과 다르지 않다.
한 시대를 이해하려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던져야 할 질문 가운데 하나는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배는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힘이나 물리적인 강제력 행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하여 그 상태를 한동안 유지했지만 그는 진정 단 하루도 스페인을 지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힘을 갖고 있긴 했지만 오직 힘밖에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배는 정상적인 권위 행사다. 그것은 언제나 여론에 기초한다. 오늘날이나 1만 년 전이나, 영국인이나 부쉬맨이나 항상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따금씩 여론이 존재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여론의 힘을 상쇄시키는 몇 개의 반목하는 집단들로 나뉘게 되면 하나의 지배권이 구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해 생겨난 이 공백 상태는 자연이 진공 상태를 못 견뎌 하듯 이내 난폭한 세력으로 채워진다. 결국 난폭한 세력이 여론 부재 세력을 대신한다.
이는 지배라는 것이 하나의 여론, 곧 하나의 정신의 우세를 의미하고, 그것이 결국 정신적인 권력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나 민족 혹은 어떤 동질적 집단이 주어진 시대를 지배했다는 말은 특정한 여론 체계 - 사상, 편애, 열망, 목적 - 가 당시의 세계를 지배했다는 말과 같다. 결국 정신권력이 없고 아무도 지배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리고 그런 적이 부족하면 할수록 혼란이 인류를 지배할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상대적 무질서와 상대적 야만, 여론 결핍을 상징한다. 이 시대는 사랑하고 미워하며 열망하고 반발하는 시대이고 이 모든 것이 대규모로 나타난 시대다. 반면에 견해는 거의 없다. 제1차 대전 이후 근래에는 유럽이 더 이상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런 식의 정신 상태는 지구상의 다른 민족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들도 현재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의아해 한다. 그들도 확신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나는 지금까지 이에 대한 답 - 대중이라고 명명한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 - 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스스로 평범하다고 생각하면서 평범함의 권리를 주장하고 상층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들의 풍경과 같다. 학교에서 누군가가 선생님께서 나가셨다고 알려주면 아이들은 일어나 난장판을 벌인다.
지금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건강하지 못한 기이한 것이다. 유럽이 지배를 중단했는데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유럽이란 프랑스와 영국과 독일 3개국을 의미한다. 이들 3개국이 차지한 지역에서 하나의 생활방식이 성숙했고 세계는 그에 따라 조직되었다. 하지만 이들 3개국이 몰락 중에 있고 그들의 생활방식이 효력을 상실했다면 세계가 타락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전세계가 타락한 상태다.
이런 타락이 한동안은 즐겁게 해주고 심지어 막연한 환상을 심어줄 수 있지만 축제는 얼마 지속되지 않는다. 일정한 방식으로 살도록 강제하는 계명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완전히 제멋대로의 상태에 놓인다. 속박 없는 자유는 공허감으로 이어진다. 산다는 것은 뭔가 특정한 것을 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 삶에서 어떤 짐을 짊어지길 회피하면 회피할수록 삶은 공허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 유럽을 대신할 수 있다면 유럽이 지배를 중단한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지배와 복종은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하다. 사회에서 누가 지배하고 누가 복종하는지의 문제가 불확실하면 나머지 문제도 어설프고 문란해진다. 여기서 복종한다는 것은 잠자코 지내는 것이 아니고 - 잠자코 지낸다는 것은 비천한 것이다 - 그와 반대로 지배자를 존중하고 그를 추종하며 그와 연대 책임을 지고 그의 깃발 아래 열정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는 심각한 타락 현상을 보이고 있다. 여러 가지 징후들 가운데서도 대중의 터무니없는 반역이 두드러진다. 이 반역의 기원은 유럽의 도덕적 타락에 놓여 있다. 이 도덕적 타락을 불러일으킨 요인은 다양하다. 그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유럽 자신과 그 외부 세계에 대해 행사해오던 유럽의 권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유럽의 지배가 불확실해지고 나머지 세계의 피지배도 불확실해졌다. 역사적인 주권이 흩어져버렸다.
인간사가 가까운 장래에 어떤 무게 중심으로 균형을 잡을지 모른다. 그래서 세계의 삶은 형편없는 일시적인 것에 빠져든다. 오늘날 공적인 분야와 사적인 분야 - 심지어 내면적인 분야 - 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일부 과학의 특정 분야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시적인 것이다. 오늘날 진행되는 선언과 지지, 실험과 찬양의 모든 내용을 신뢰하지 않는 자가 현명한 사람이다. 그런 것은 모두 나오기가 무섭게 사라져버린다. 스포츠에 대한 열광에서 정치폭력에 이르기까지, 신예술에서 익살스런 해변의 일광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렇다. 그 어느 것도 뿌리가 없다. 요컨대 그 모든 것은 삶의 본질적인 차원에서 보면 거짓이다. 일례로, 오늘날 자신의 정치 활동을 불가피하다고 느끼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다. 그의 태도가 극단적이고 경박스러울수록, 그리고 운명의 강제를 덜 받을수록 불가피성을 덜 느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거대한 단일 사업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오직 대륙의 여러 민족 집단을 하나의 거대한 국가로 건설하겠다는 결정만이 유럽의 맥박을 다시 뛰게 만들 것이다. 유럽이 다시 스스로를 신뢰하고 그에 따라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자진해서 단련을 시작할 것이다.
진정한 문제에 도달하다
문제는 바로 유럽에 도덕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대중이 새로 출현하는 도덕을 위해 낡은 것을 경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체제의 중심에서 어떤 도덕에도 매이지 않은 채 권리란 권리는 모두 차지하고 의무는 전혀 감당하지 않으며 살아가길 열망한다는 것이다. 반동주의의 탈을 쓰든 혁명주의의 탈을 쓰든 한 두 차례 뒤집어보면, 결국 모든 의무는 무시하고 아무 문제의식도 없이 무제한의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여기서 도덕이란 언제나 본질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복종의 감정이고 봉사와 의무에 대한 의식이다. 그런데 대중은 어떻게 이러한 무도덕한 삶을 확신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현대의 모든 문화와 문명이 그런 믿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지금 스스로 가꾼 정신 활동의 고통스런 열매를 거두고 있다. 유럽은 훌륭하긴 하지만 뿌리가 없는 문화를 맹목적으로 채택해왔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우리는 내가 이 책에 일종의 복선처럼 엮어 넣고 암시하고 속삭여온 삶의 원리를 충분히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