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지만, 철학사이 중요한 전환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여성 철학자들의활약이 다양한 자료와 문헌 연구를 통해 복원되었다. 남성 위주의 철학과 그 밑바닥에 깔린 가부장적 가치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또하나의 철학사를 제시한다.
■ 저자 구드룬 그륀드켄(Gudrun Grundken) 외 8명
구드룬 그륀드켄(Gudrun Grundken) : 1957년생. 독일 보훔 대학에서 비교문학, 로마네스크, 독어독문학전공. 춤, 오리엔트, 성에 관한 저작물이 있음.
구드룬 마이어호프(Gudrun Maierhof) : 1962년생. 사회교육학 전공. 독일여성 운동 문헌 편찬 작업에 참가. 1994년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 거주. 현재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고 여성 운동에 관한 저서가 다수있음.
마리트 룰만(Marit Rullmann) : 1953년생. 독일 보훔 대학에서 고대 및근세 독어독문학 전공. 프리랜서 철학자 및 작가로 활동. 문학과 미디어, 그리고 페미니즘 철학에 관한 활발한 저술 활동.
모니크 도랑(Monique Dorang) : 1956년 워싱턴 D.C.생. 1985년부터베를린에서 비교문학과 스페인 문헌학 전공. 1995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마리아 삼브라노의 작품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 취득. 베를린에서프리랜서 문학 연구가 및 번역가로 활동.
빌마 치머(Wilma Zimmer) : 1949년생. 철학과 독어독문학 전공. 성인 교육및 재교육 분야에서 주로 정치 교육을 담당하고 있음.
에리카 칼데모르겐(Erika Kaldemorgen) : 1949년생. 철학, 독어독문학,비교학 전공. 프리랜서 철학자.
페트라 게링(Petra Gehring) : 1961년생. 기센, 마르부르크, 보훔 대학에서철학, 정치학, 법학 전공. 하겐 대학 철학연구소 연구원. 저서로 『안의 밖―밖의 안』(1994년)이 있음.
■역자 이한우
1961년생으로 고려대 영어영문학과와 대학원 철학과를 거쳐 한국외국어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중앙일보」 뉴스위크국 기자,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서로는 길버트 라일의『마음의 개념』, 빌헬름 딜타이의 『체험 표현 이해』등 서양 철학 분야의 20여 권이 있으며, 저서로는 『한국은 난민촌인가』『세종, 그가 바로조선이다』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 소피아, 즉지혜는 여성적이다
철학사에서 여성들의 숨겨진 부분 | 페미니즘 철학 | 전승과 텍스트 비판
작은 차이, 그러나 그에 따른 큰 결과| 이 책의 목표 설정과 문제 제기
1장 신화에서 우주론으로 - 고대 그리스에서 서양 철학의탄생
테아노, 다모, 미야, 티미카, 핀티스, 페릭티오네
악시오테아와 라스테니아
밀레토스 출신의 아스파시아
만티네이아 출신의 디오티마
히파르키아
아레테와 라이스
테미스타와 레온티온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
2장 기독교 철학의 전성기 - 중세(교부 철학과 스콜라 철학)
빙겐의 힐데가르트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트힐트
하케보른의 메히트힐트
헬프타의 대성인 게르트루트
시에나의 카타리나
크리스틴 드 피장
3장 대변혁의 시대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소타 노가롤라, 지네브라 노가롤라 자매
카산드라 페델레
라우라 체레타
툴리아 다라고나
아빌라의 테레사
올림피아 풀비아 모라타
모데라타 폰테와 루크레티아 마리넬라
마리 르 자르 드 구르네
안나 마리아 폰 슈르만
4장 혁명과 왕정복고 - 합리주의에서 계몽주의 및 그극복까지
마거릿 캐번디시, 뉴캐슬의 공작부인
앤 콘웨이 부인
메리 아스텔
에밀리 샤틀레 후작부인
마리아 가에타나 아녜시
라우라 마리아 카타리나 바시
도로테아 크리스티아네 에르크스레벤, 본명 레포린
올림프 드 구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도로테아 슐뢰처
소피 제르맹
클레르 데마
플로라 트리스탕
해리엇 하디 테일러-밀
5장 낭만적인 철학함 - 이성의 타자
베티나 폰 아르님
카롤리네 폰 귄데로데
카롤리네 슐레겔-셸링
제르멘 드 스탈
라엘 레빈 파른하겐
|보론| 19세기 말에서 오늘날까지 여성들의 상황
6장 신칸트주의에서 프래그머티즘으로 - 낡은 가치들의 전복인가,새로운 정립인가
루 안드레아스-잘로메
헤트비히 벤더
메리 화이턴 콜킨스
헬레네 폰 드루스코비츠
샬럿 퍼킨스 길먼
카렌 호니
레노레 퀸
로자 마이레더
콘스턴스 네이든
헬레네 슈퇴커
7장 20세기 전반기의 철학 - 논리실증주의, 현상학, 실존주의,그리고 정치철학
거트루드 엘리자베스 마거릿 앤스컴
한나 아레네트
시몬 드 보부아르
헤트비히콘라트-마르티우스
아그네스 헬러
카타리나 칸타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수잰 캐서리나 랑어
로자 룩셈부르크
리지 수전 스테빙
에디트 슈타인
시몬 베유
마리아 삼브라노
8장 아우슈비츠 이후의 철학함 - 근대적인 것의 위기에서 해체로
메리 데일리
하이데 쾨트너-아벤드로트
뤼스 이리가레이
사라 코프만
줄리아 크리스테바
에이드리엔 리치
주디스 니세 슈클라
엘프리데 발레스카 틸슈
브리기테 바이스하우프트
도나 해러웨이
9장 세 번째 밀레니엄을 향한 출발 - 최근 20년간의페미니즘
역자 후기 - 여성 철학 역사 혹은 여성 철학사
용어 풀이
참고 문헌
찾아보기
저자 약력
여성철학자
1장 신화에서 우주론으로 - 고대 그리스에서 서양 철학의 탄생
“무릇 최고의 여성이란 사람들의 입방아에 가장 적게 오르는 여성을 이른다.”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당시의 여성들에게 남 앞에 나서지 말고 가능하면 대화에 끼여들지 말 것이며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튀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유복한 집안에 시집간 여성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내실(內室)에 한정되었다. 그들은 일체의 공공 생활로부터 격리된 채 일생을 보냈다. 혼자 집 밖을 나가서도 안 되었고, 교제의 범위는 가족과 여성 친구들로 제한되었다. 소녀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장차 주부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맞는 교육만 받았다. 소녀들을 위해 고대에 존재했던 유일한 교육 공간이라면 기녀(혹은 기생) 양성 학교가 전부였다. 따라서 이런 직업 세계에서 많은 여성 철학자들이 나왔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이스, 라스테니아, 레온티온). 남성들과 공개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여성은 기생들이었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교양 있고 매력적인 기생들은 종종 높은 명성을 누렸다.
테아노, 다모, 미야, 티미카, 핀티스, 페릭티오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마흔 살 때 독재 정치를 피해(기원전 530년경) 남부 이탈리아로 이민을 갔다. 그는 그곳의 도시 크로톤에서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까지 사로잡는 강연을 했다. 그는 건강하고 조화로운 인생살이를 위해 수많은 규칙들로 이뤄진 수행 지침들을 제시했고,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자연스럽게 반(半)종교적이고 반(半)정치적인 공동체가 생겨났다. 이 교단이 가진 현지 권력자들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이 주민들 사이에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폭력을 수반한 반(反)피타고라스의 운동이 일어났다.
피타고라스의 부인 테아노는 딸들과 함께 공동체를 정신적으로 결집시키면서 피타고라스의 학설을 그리스와 이집트에까지 확산시켰다. 또한 피타고라스는 딸 다모(Damo)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공간(公刊)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비밀 물건들을 넘겼고, 다모는 이를 딸 비탈레에게 물려주었다.
테아노는 결국 최초의 여성 철학자이며, “모든 면에서 부인의 전형(典型)”이었다. 그녀는 부인의 의무와 관련하여 남편을 위해 절대적으로 정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지극히 대세 순응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테아노의 견해는 매우 보수적이다. ‘남자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니라 여자가 적응해야 한다.’ 스파르타 여성인 티미카는 독재자 디오니시오스에 맞서 남편과 함께 피타고라스의 비밀들을 대담하게 누설했다. 칼리크라테스 왕의 공주 핀티스는 “모든 면에서 현명한 절제”를 의미하는 신중함을 “제1의 여성적인 덕목”이라고 규정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소속인 페릭티오네는 동명이인이라는 이유로 플라톤의 어머니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그녀 역시 여성들에게 절제 있고 검소한 생활을 할 것을 요구했다. 피타고라스주의 여성 철학자들은 대단히 똑똑하고 교양도 갖춘 여성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인습화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진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순종형의 가정주부들’이었다.
밀레토스 출신의 아스파시아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들에서 디오티마 이외에 또 한 명의 여성을 자신의 스승으로 꼽고 있다. 바로 밀레토스 출신의 아스파시아다. 그는 악시오쿠스의 교양 있는 딸이었고 페리클레스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그러나 정식 부인은 아니었다. 아스파시아의 아테네 생활에 대해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러나 일차적이고 시대적으로도 맞아떨어지는 자료들이 남아 있다. 희극 작가들은 아스파시아를 기생이라 해서 모욕하고 조롱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학파에서 묘사되는 아스파시아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녀는 최고의 여성 철학 교사로 찬양 받고 있다. 크세노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추억하며』에서 그를 상당히 주목하며 언급하고 있고, 플라톤도 자신의 『대화편』(메넥세노스)에서 그를 위한 비문을 쓰고 있다.
그녀는 독립적인 정신을 가진 여성이었으며 철학뿐 아니라 수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가 페리클레스의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페리클레스의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조사(弔辭)도 써야 했다. 또 아스파시아는 그의 이름을 따서 아테네에서는 처음으로 살롱을 열었는데, 거기에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남자들이 드나들었고, 후에는 부인들끼리 와서 서로 교유(交遊)했다. 희극 작가들은 외국 여성 아스파시아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색녀”로 묘사했다. 페리클레스는 아스파시아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는 매춘 알선 혐의까지 덮어썼다. 그녀는 결국 무죄판정을 받았고, 페리클레스가 죽은 후 아스파시아는 페리클레스의 친구 리시클레스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계속 살롱을 운영했다. 이 여성이 두 번째 남편이 죽은 후에도 당시 속물적이었던 아테네에서 혼자의 힘으로 나름의 자리를 확보했다는 데 주목한다면, 그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높은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다.
대변혁의 시대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즉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 전통이 ‘재탄생’되는 동안 ‘비라고(virago), 다시 말해 교양 있는 여걸이라는 여성상이 14세기와 15세기에 형성되었다. 이런 여성들에게 자신이 귀족이나 명문가 출신이라는 사실이 대단히 중요했다는 점은 당시의 사회적 관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교양을 습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의 이상은 두루 교양을 갖춘 인간이었다. 교양은 매력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귀족 집안에서는 그것을 체면 유지나 사교의 수단으로 여겼다. 그러나 여성들이 그 수준을 넘어서 학문을 응용하는 일은 기대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주부와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고유한 과제를 방기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르네상스기의 학식을 갖춘 여성, 즉 ‘비라고’는 “인문주의자들이 찬양했던 비르고(숫처녀)와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래서 조안 깁슨(1989년)은 이 시기 여성들의 교육 상황을 “침묵에 이르는 교육”이라고 특징짓는다.
이 시대를 휩쓸던 대변혁의 분위기를 교회라고 비켜갈 수는 없었다. 로마 교회에 대한 불복종으로 교회가 대분열 상태에 들어가면서 이단과 미신이 꾸준히 늘어갔다. 교회에는 정당성 위기가 찾아왔고 힘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도 휘청거렸다. 교회는 종교재판을 통해 일체의 이단적인 사상들을 박해했고 마녀사냥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여성들에게 르네상스기는 오히려 현저한 퇴보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상의 재탄생이 바로 그 시대의 반(反)여성적인 사상도 함께 불러왔던 것이다.
이소타 노가롤라, 지네브라 노가롤라 자매
노가롤라(Nogarola) 자매의 생애는 여성에게 강요된 ‘침묵에 이르는 교육‘의 전형적인 사례다. 지네브라와 이소타 자매는 베로나의 존경받았던 명문가 출신이다. 두 사람은 열 여덟 살 때 라틴어를 공부할 수 있었는데, 이소타는 다양한 분야의 인문주의자들과 서신 교환을 시작했다. 이소타는 2년이 넘도록 이런 방식으로 인문주의 그룹에 가담하려고 노렸다. 그러나 이소타는 다른 남성 동료들이 그의 폭넓은 교양을 칭찬하면서도 늘 여성으로서만 평가했기 때문에 실망하고 편지 교환을 중단해버렸다. 동생 지네브라는 1438년 감바라의 브루네로라는 귀족과 결혼하면서 그 즉시 인문주의 연구를 중단해버렸다. “문학적 취향을 가진 젊은 여성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퇴락한 부엌데기가 되는 데는 2년이면 충분했다.” 그는 일찍부터 “침묵에 이르는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이소타는 동생의 끔찍한 사례에 충격을 받아 일찍부터 숫처녀로 남기로 결심했다. 이소타는 생을 다할 때까지 부모의 집에서 마치 수녀처럼 지내며 자신의 연구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베네치아의 유명한 인문주의자이며 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루도비코 포스카리니와의 2년여에 걸친 집중적인 서신 교환의 중요한 산물 중 하나는 『이브와 아담이 지은 죄의 같음과 같지 않음에 관한 대화』이다. 이 책은 이브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이소타는 기독교 교회의 전통적인 여성상을 아이러니하게 강조하면서 이브를 옹호했다. 본성상 사고력이 떨어지고 남자들과 같은 확고한 신념도 부족하다면, 그가 져야 할 책임도 그만큼 적다는 것이다. 이소타는 성서의 구절들에 입각해서 하느님은 늘 남성인 아담만 부른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남성을 더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고, 만물 특히 계율의 준수에 대한 책임도 남성에게 부과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루도비코는 아담이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이브의 꾐 때문이라는 주장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 대화에서 이소타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여성관과 충돌했다. 그리고 일반 여성에 대한 그의 아이러니한 옹호는 ‘엄청나게 대담한 주장’이었다.
서른 다섯 살 때 청혼을 받은 이소타는 루도비코에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지에 관해 물어보았다. 루도비코는 처녀성 포기의 위험을 경고했다. 이는 이소타가 처녀성을 버릴 경우 더 이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의 교류는 끝이 났다. 1453년에서 1466년까지 이소타는 자신의 방에서 병과 고독에 시달렸다. 끈질긴 반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침묵에 이르는 교육’이 그에게서도 성공을 거둔 것이다.
혁명과 왕정복고 - 합리주의에서 계몽주의 및 그 극복까지
‘자유, 평등, 박애’는 프랑스 혁명의 모토였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는 지난 200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여성들은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재산이나 자유 혹은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했다. 이 시대에도 영원히 반복되는 질문들이 계속 토론거리가 되고 있었다. ‘여성들은 생각할 능력이 있는가? 여성은 도대체 영혼이라는 것을 갖고 있는가?’ 등이 그런 것이다.
계몽주의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인식론적 사고는 합리주의와 감성주의다. 합리주의의 제1의 원천은 이성이다. “18세기는 이성의 단일성과 불변성에 대한 믿음이 관통한다. 이성은 모든 사유하는 주체, 모든 민족과 국가, 모든 시대, 모든 문명에게 똑같은 것이다.” 이는 여성들이 이성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 시대에 여성 철학자들이 많이 등장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가정과 사회 속의 여성은 ‘윤리적이고 성적인 순결’에 책임이 있다는 견해가 점점 확산되었다. 여성은 가사와 가족, 아이들의 도덕 교육과 감수성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또 여성은 현모양처가 되어야 했고 가능한 한 자기를 내세우지 않아야 했다. 20세기 초 30여 년 동안 플로라 트리스탕과 해리엇 테일러-밀과 같은 몇몇 깨달은 여성들이 말과 행동을 통해 가족과 사회에서 여성의 평등한 지위를 내세운 반면, 1840년에서 1890년 사이에 해방되거나 학문적 활동을 펼친 여성들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해리엇 하디 테일러-밀
해리엇 테일러-밀은, 그의 두 번째 남편인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그들의 공동 작업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높은 찬사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철학사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이 1830년 급진적인 민주주의 단체 ‘공리주의자’를 알게 되었을 때, 해리엇 테일러는 스물 세 살이었고, 이미 상인인 존 테일러와 5년째 결혼 생활동안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다. 그는 독학으로 지식을 쌓았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아버지가 정해준 결혼이 얼마나 싫었는지에 관해 자주 언급했다. 그것은 그가, 처녀들이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결혼 조건들에 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결혼하던 당시의 통상적인 혼인 절차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게 된 동기였다.
두 사람에게 1830년은 우정이나 공동 작업 모두에서 가장 생산적인 한 해였다. 첫 남편이 이혼을 거부하는 바람에 해리엇 테일러가 여전히 기혼 상태였던 20년 동안, 영국의 엄격한 윤리 아래서 그들의 관계는 공개적인 도발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리엇의 남편이 죽고 두 사람이 그들의 관계를 합법화했을 때, 밀은 해리엇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명시적으로 포기했다. 이처럼 존 스튜어트 밀은 이론적인 면에서 페미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신념들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와 해리엇 테일러는 1830년대 초에 이미 결혼과 이혼을 주제로 에세이들을 썼다. 그리고 1851년 헤리엇 테일러-밀은 여성 해방에 관한 연구서를 발간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공리주의 윤리학의 의미에서 “더불어 사는 남녀의 자유로운 활동에 대한 모든 제한”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런 “제한을 가하면 가할수록 인간 행복의 샘은 메말라버리고, 개개의 인간이 인생을 가치 있고 살 만한 것이라고 여기게 하는 모든 것을 훨씬 더 궁핍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해리엇 테일러-밀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존 스튜어트 밀의 공동 저자이자 그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상대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리버럴-페미니즘 여성 철학자이기도 했다.
신칸트주의에서 프래그머티즘으로 - 낡은 가치들의 전복인가, 새로운 정립인가
19세기 말의 철학은 한편으로는 역사주의와 당시 힘을 얻어가던 유물론적 역사철학의 영향 아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마누엘 칸트의 세 비판서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지식 분야의 분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칸트 철학의 지속적인 영향은 우리가 계몽주의라고 부르는 과정을 지배했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이 올바르게 해독해내야만 하는 하느님의 소식(갈릴레이)이 아니다. 자연의 현상들은 원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말한 ‘세계의 탈주술화’가 이루어지고, 이런 탈주술화는 기술로 나아가는 세계의 자기 경험에 상응한다.
인간의 자기 계몽은 완전할 수 없는 기획이 된다. 카를 마르크스, 막스 슈티르너,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 등과 같은 이성에 대한 새로운 급진적 비판가들은 계몽의 계획에 착수한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계몽의 이상, 즉 이성, 시민적 자유, 인권뿐 아니라 진보에 대한 믿음, 인간을 통한 원칙적인 세계 지배의 가능성 등은 보존된다.
루 안드레아스-잘로메
그는 러시아에 살던 독일계로, 3남 1녀의 막내였다. 그는 따뜻한 배려와 보살핌이 있는 가정에서 일찍부터 탁월한 재능과 품성을 키웠다. 일찍이 그는 현실의 각종 비밀들을 해석하고, 동시에 서로 얽혀 있는 연관들을 인식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특한 소녀는 어머니가 심어주려고 했던 일체의 여성관을 벗어 던진 것이다. 이 시기에 루는 세계관의 기초를 형성하며, 일생 동안 유지되는 무조건적인 개방적 사고를 갖추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 겪은 하느님의 실종이라는 체험을 기억하며 스피노자의 그것과 일치하는 명확한 신 개념을 발전시킨다. 그가 스피노자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신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현명하고 자유로운 인간은 삶을 뛰어넘지만 죽음은 뛰어넘지 못한 채 사유한다는 스피노자의 명제가 루의 철학적인 근본 태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루는 삶을 사유의 아래에 둔다. 즉 이성이 삶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삶의 극단적인 충만이다. “삶이 곧 모든 것이다.” 삶은 또한 루의 철학적 지반이다. 따라서 그의 사유는 시대의 흐름 속에 있으며 세기의 전환기에 일어난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대변혁에 관여한다.
남녀의 사랑에 관한 네 편의 글을 담고 있는 철학 논문집 『에로틱』은 그가 쓴 가장 유명하면서도 독창적인 작품이다. 논문 〈여성으로서의 인간〉에서 제시한 남자와 여자의 정신적인 결합에 관한 그의 명제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매력적이다.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정신적 특성을 갖고 있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그 자체 안에 인간적인 것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둘 다 자기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그는 양성 평등의 문제에 회의적이다. 여성의 생활 세계가 남성의 생활 세계로 흡수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상태에 의해 에로틱한 사랑에 이르게 된다. 이런 에로틱한 경험은 타자가 낯선 사람으로 남아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둘은 둘로 남아 있을 때에만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의 방향에서만 사물들을 고찰한다는, 이 세계의 딜레마를 폭로하는 일이 그에게는 늘 주된 관심사였고 핵심 사상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철학함 - 근대적인 것의 위기에서 해체로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 특히 아우슈비츠 이후의 모든 철학은 자신들이 서있는 바로 그곳을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가? 생활 세계와의 윤리적인 연관성을 끊은 채 순전히 추상적인 것들에만 근거를 두는 철학함이라는 게 있으며 또 그래도 되는가? 이런 문제들과 강렬히 씨름했다.
한편 구조주의 및 구조주의 이후의 사유는 더 이상 헤겔적인 변증법이나 초월론적 철학과 같은 대립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역사적, 구체적이거나 생생한 지식 형태들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담론에서 대립의 개념 대신 그에 비견되는 것으로 빈번하게 사용되는 용어가 ‘차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성 차이’다. 이제야 비로소 철학에서 성적인 차이가 부각되고, 나아가 더 이상 위계질서를 세우는 일이 중시되지 않게 되었다.
사라 코프만
글쓰기는 사라 코프만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다. 아우슈비츠 이후 아우슈비츠에 관해 글쓰기, 예술, 자신의 삶, 글쓰기나 글 자체, 진정으로 불가능한 어떤 것, 모순으로서의 글쓰기. 이런 모순은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일체의 모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그 자체의 모순들과 이중적인 의미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리고 야누스의 얼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남성의 머리,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하는 표상 등도 그의 철학적 사유의 특징이다. 그의 생애는 타자의, 차이의 삶이고, 궁극적으로는 유대인이자 여성으로서의 체험에서 나온 삶이다. 차이의 이념의 동시에 그의 철학적 창조의 속살이다. 사라 코프만은 1994년 10월 15일 자살을 선택하면서 이런 모순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초창기에 그의 관심은 주로 고전 철학의 주제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부터 점차 페미니즘적인 문제의식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는 〈웃고 있는 제3자-프로이트의 위트〉에서 평가와 무시 사이를 오가는 여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모순적인 입장을 다루었다. 또 〈여성의 존중〉에서는 칸트와 루소가 제시한 여성들에 대한 태도로서의 존중의 개념을 탐색한다. 여성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무기로 남성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존중하게 만든다. 그런데 존중이란 하나의 경향일 뿐 실질적인 지배력을 갖지는 못한다. 하인이면서도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지성을 활용하는 남성이다.
또한 그녀는 포스트모던 사상가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대한 포괄적인 입문서 『데리다 읽기』를 펴냈다. 코프만이 글쓰기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된 것은 데리다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다. 그는 언어철학적인 견지에서의 차이 개념을 뛰어넘어 데리다가 차이의 개념을 성차의 문제에 적용했던 데도 관심을 쏟는다. 글쓰기란 항상 ‘타자’이며 동시에 언제나 ‘타자’의 상실이기도 하다. 그의 텍스트 “예술의 우울”은 주제를 ‘넘어서는 글쓰기’다. 그는 이 분석의 첫머리에서 “예술에 관해 글쓰기-과연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인가?”라고 묻는다. 그는 철학이 언제나 예술을 예속시키려 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예술을 문제나 언어로 해독하려는 의식은 곧 그것을 ‘예속’시키겠다는 의지와도 통한다. 예술도 ‘타자’, ‘낯선 것’의 표상이다.
세 번째 밀레니엄을 향한 출발 - 최근 20년간의 페미니즘
1960년대부터 시작된 새로운 여성 운동을 배경으로 이제 여성 철학자들도 자신의 학문에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늘 논의 대상에 머물러 있는 여성적인 것이 주체로 바뀌어야 함은 물론, 고대 이후부터 역사에서 여성 철학자들이 사실상 배제되어온 실상이 드러나야 한다. 페미니즘 철학의 이 같은 목표 설정은 여성 철학자들이나 여성적인 주제의 추가라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확장이 아니라, 남성들이 지배하고있는 철학과 그 바탕에 깔린 가부장적인 가치와 규범들에 대한 비판을 지향한다. 페미니즘 철학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곧 여성 해방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다.
역사 다시 읽기, 그래서 현재 우리의 가치 및 규범 체계들을 함께 규정해온 철학자들 -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 - 의 규준을 비판적으로 뒤집어 읽는 작업은 페미니즘 철학의 기본에 속한다. 이 과정에서 아주 참신하고 독특한 개념들이 형성된다. 이어 전통적인 철학사 서술에서는 외면당했던 부분인 여성 철학자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자연을 여성과 동일시하는 관점에 대해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자연에 대한 남성의 지배권 요구를 비판한다.
그러나 실제로 연결과 발전의 의미가 포함된 역사라는 점에서 여성철학사는 어쩌면 앞으로 상당 기간 불가능할지 모른다. 여성 철학사를 구성할 수 있는 의미의 여성 철학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본격화되고 있다. 아마도 수백 년 후에는 20세기 후반을 여성 철학의 태동기라고 부를지 모르겠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