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흔히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맑스주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불리고 있는 그람쉬의 평전. 그의 일생을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켜 서술하고 있으며, 탁월한 이론가이자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정치가, 혁명가, 언론인이었던 그람쉬의
면모를 다채롭게 비추고 있다.
■ 저자 쥬세뻬 피오리
이탈리아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전기작가다. 이탈리아 국영방송 RAI2의 뉴스프로그램
■ 역자 김종법
1965년 서울 생이다. 한국외대 이태리어과를 졸업하고 「문화적 확장을 위한 그람쉬 문학 연구」로 한국외대 일반 대학원에서 이태리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탈리아 국립 토리노대학교 정치학과를 수료하였으며, 2003년 2월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6년 이후 한국의 여러 신문과 잡지의 통신원이였으며 1998년 UTET(이탈리아 백과 사전)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섬유연감 1997년과 1998년 판 집필진을 역임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이탈리아 스터디 - 이탈리아 섬유/의류 산업』, 『역사와 문화로 본 이탈리아 포도주』, 『그람쉬』 등이 있다.
■ 차례
화보
머리말 ― 한 인간의 초상
01장 불그스레 퇴색한 석조건물
02장 조그만 관과 흰옷
03장 반역의 본능
04장 부제루의 비극
05장 엉터리 중학교
06장 인간 폭풍
07장 도시로 가다
08장 멋들어진 긴 머리
09장 또리노의 사르데냐 사람
10장 물줄기를 끊는 사람
11장 분노와 절망을 품고
12장 혁명가, 탄생하다
13장 새로운 질서
14장 거센 혁명의 파고, 그리고 역류
15장 새로운 당 속에서
16장 은빛 숲에서 만난 사람
17장 새로운 지도집단
18장 거대한 용암의 강
19장 무쏠리니와 그람쉬
20장 낡은 공식과 결별하다
21장 남부문제
22장 억눌린 자유
23장 차가운 수갑
24장 국가보위 특별법정
25장 옥중수고
26장 이중의 감옥
27장 병든 몸과 고통스런 마음
28장 죽음의 문턱
29장 의지와 지성으로 마지막을 불사르고
30장 최후
옮기고 나서
안또니오 그람쉬 연보
안또니오 그람쉬
불그스레 퇴색한 석조건물
한때 그람쉬 일가가 살던 집은 불그스레 퇴색한 단층으로 된 석조 건물로, 길라르짜라는 제법 큰 마을의 시내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안또니오 그람쉬가 몹시 가난한 집안 출신일 것이라고들 쓰고, 또 그렇게 믿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람쉬의 아버지 치칠로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갖고 있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변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람쉬의 할아버지는 근위경찰대 대령이었다. 그람쉬의 어머니 뻬삐나 쪽도 역시 어느 정도는 갖춘 집안이었다. 뻬삐나가 스물둘, 치칠로가 스물셋일 때 둘은 결혼했다. 다음 해인 1884년에 젠나로가 태어났고, 1887년에 그라찌에따, 1889년에 엠마, 그리고 드디어 1891년 1월 22일에 안또니오 그람쉬가 세상에 나왔다.
1897년 선거에서 정치다툼 때문에 당시 소르고노 등기소장이던 아버지 치칠로가 실직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치칠로는 1898년 8월 9일에 체포됐다. 혐의는 공금횡령, 수뢰, 공문서 위조였고 5년 8개월 22일의 형이 언도됐다. 뻬삐나의 어깨에는 아이들 일곱 명의 생존이 걸려 있었다. 막내인 까를로는 아직 강보에 싸인 아이였고 장남인 젠나로가 겨우 열네 살이었다(안또니오는 일곱 살이었다).
조그만 관과 흰옷
니노(안또니오의 애칭)가 처음부터 곱추였던 건 아니다. 그런데 등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혹이 생겨났다. 병을 고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니노는 다 자란 뒤에도 1미터 50센티미터가 안 됐다. 게다가 늘 병치레를 했다. 안또니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린 시절, 네 살 때 사흘 동안 계속해서 코피를 쏟은 일이 있다. 코피 때문에 출혈이 과다하게 됐고 나중에는 발작까지 일어났다. 의사들은 모두 죽을 것이라고 했고 어머니는 1914년 무렵까지도 조그만 관과 흰옷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날 묻을 때 쓰기 위해서.”
반역의 본능
1900년, 열여섯 살이 된 젠나로가 취직을 했다. 중등학교가 있는 도시 사르데냐는 길라르짜에서 너무 멀었다. 그곳에서 공부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졸업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는데도 안또니오는 학업을 단념해야 했다. 공부를 중단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람쉬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비로소 반역의 감정이 움트고, 그람쉬는 고독한 생활을 계속했다.
안또니오는 등기소의 노동에서 해방된 시간을 라틴어를 공부하는 데 사용했다.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학교에 다니겠다는 희망을 아직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강의실을 떠나 길라르짜에서 2년을 보내는 동안 독학에 힘썼다. 마침내 희미한 빛이 비쳐왔다. 1904년 1월 31일, 아버지가 특사로 3개월 형기가 단축돼 출감했다.
부제루의 비극
안또니오 그람쉬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이 지나 열세 살이 되던 1904년 9월(이때 길라르짜에서 등기소 일을 하고 있었다), 사르데냐 섬 남서 해안에 있는 광업 중심지 부제루에서 군대가 파업 중인 노동자들에게 총을 쏴서 세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약 15년 전부터 시작된 해묵은 위기가 처음으로 폭발한 것이었다. 이 섬에서 사회적 투쟁을 위해 처음 흘린 피였다. 이딸리아 전역에서 총파업이 선언됐다. 이딸리아 노동운동 역사상 처음 벌어진 대규모 집단행동이었다.
1887년까지 사르데냐 경제는 나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타격은 1889년에 프랑스와 체결한 통상협정 때문이었다. 이딸리아 정부가 북부의 공업 부르주아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관세인상 정책을 취했다. 전통적인 시장을 잃은 사르데냐 농업은 때마침 수년 동안 번지고 있던 병충해와 그 밖의 여러 요인들 때문에 소멸 직전에 있었다.
엉터리 중학교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삶은 여전히 고달팠다. 젠나로는 병역 때문에 또리노에 가 있었기 때문에 전처럼 집안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아들 중에서 집에 돈을 갖고 오는 것은 안또니오뿐이었다. 이제 막 열다섯 살에 접어든 소년은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고 싶었다. 안또니오는 정규 학업을 다시 계속할 수 있게 됐지만 이 학교는 ‘정규 학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불안정했다. 안또니오 그람쉬는 길라르짜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산뚤루쑤르지우 학교를 “정말 엉터리 학교였다. 그 조그만 중학교에는 자칭 교수가 세 사람 있었는데 수업시간을 바꿔가면서 다섯 교실을 돌아다녔다”라고 회상한다.
인간 폭풍
안또니오 그람쉬가 중학교 3년을 마칠 무렵인 1906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사르데냐에서는 ‘인간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갖가지 다른 요인들이 뒤얽혀서 이 시기의 사르데냐는 온 섬이 거대한 지각변동을 겪고 있었다. 농민계층이 무정부적인 소요를 일으켰다. 그러나 조직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유공장이나 세무서를 습격해 방화하거나 약탈하는 모양을 띨 뿐 좀더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런 모습과 달리 시민적 권력을 공격하거나 거꾸로 그런 권력을 지키려는 도시민들의 당파적 음모도 있었고, 항의시위에 폭력성이 가미돼 무고한 상점 진열장에 돌을 던지고 상품을 약탈하는 일이 있었고, 기계가 등장해서 본 손해를 회복하려는 편협한 분파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의 바탕에는 굶주린 대중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탄압의 여파로 사르데냐 주민의 주권회복주의가 싹텄다. 이때 북부와 남부 사이의 균열이 더욱 심해졌고 ‘사르데냐주의’는 이 시대의 정서가 됐다. 안또니오 그람쉬도 이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도시로 가다
열여덟 살이 될 무렵 안또니오 그람쉬는 깔리아리의 데또리 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옮겼다. 1908년 말이었다. 당시 깔리아리는 작지만 활기찬 도시였다. 안또니오에게 도시로 들어가는 일대 도약은 지방주의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안또니오와 젠나로는 셋방을 얻어 살기로 했다. 두 형제는 젠나로의 월급 100리라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다.
그람쉬는 공부밖에 할 일이 없었다. 당시 그람쉬는 이미 맑스에 가까워져 있었다. 1924년에 쓴 어느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지적 호기심에서’ 맑스를 이미 읽었던 것이다. 국어교사 가르찌아의 총애를 받던 그람쉬는 가르찌아의 추천으로 『사르데냐 연합』의 지방 통신원이 됐다.
멋들어진 긴 머리
1910년, 안또니오 그람쉬는 스무 살이 됐다. 이제 도시의 분위기에 훨씬 잘 적응했다. 당시 그람쉬가 쓴 미공개 편지를 읽으면서 우리는 새로운 그람쉬를 떠올릴 수 있다. 긴 머리를 한 학생, 오페라 극장의 3등석에서 휘파람을 불며 떠들어대는 그런 학생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은 나빴다. 젠나로의 수입만으로 (집에서 오는 송금이 없으면)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생활 필수품 가격이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월수입 100리라 가지고는 두 사람이 살아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또리노의 사르데냐 사람
구 사르데냐 왕령 출신의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으면 까를로 알베르또 재단의 장학금으로 또리노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1911년 가을에 까를로 알베르또 재단은 장학생을 선발하는 공고를 냈다. 그람쉬는 최종 시험에 합격했고 여기서 사르데냐 출신인 똘리아띠를 만나 가까워졌다.
그람쉬는 영양실조와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고독감에 시달리며 기력이 다해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이 힘든 상태인 채로 학업에 전념했다. 또리노대학은 당시 이딸리아 문화의 다양한 방향성을 반영하는 학풍을 갖고 있었고, ‘권태’와 ‘실증주의 시대의 억압’ 이후의 혁신에 대한 의욕, 연구에 대한 긴장 등 신선한 자극이 넘치는 위대한 대학이었다. 사르데냐에서 바다를 건너온 청년의 흥미는 오직 이 대학에 집중돼 있었다. 몇몇 청년들이 1909년 5월, 로마의 사회주의청년동맹에 딸린 하부조직인 최초의 ‘파쇼’를 또리노에 설립했다. 청년들은 아직 실증주의 단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리노 사회당 지부를 지배하고 있던 실증주의에서 청년들은 점차 멀어져갔다.
“안또니오 그람쉬는 사르데냐에서 나올 때 사회주의자가 돼 있었다. 이런 변화는 아마 사회주의 사상의 체계를 완전히 파악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르데냐인이 지닌 반역의 본능과 지방 출신 젊은 지식인의 인문주의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똘리아띠는 회상하고 있다.
물줄기를 끊는 사람
1913년 3월, 스물두 살 안또니오 그람쉬는 또리노대학교 문학부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또리노에서는 3월 19일, 자동차공장 노동자 6500명이 일손을 멈췄다. 96일 동안 투쟁이 이어진 뒤 파업은 노동자의 승리로 끝났다. 그때까지도 그람쉬는 사회주의 조직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1913년 여름에는 선거권이 확대된 뒤 처음으로 선거가 치러졌다. 마침 사르데냐에서는 자유무역주의 논쟁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그람쉬는 길라르짜에서 「소리」제41호에 반보호무역주의 선전집단의 테제에 동의하는 글을 투고했다. 선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10월 26일에는 하원의원 12명을 뽑을 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선거에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투표할 수 있게 처음 허용해 사르데냐의 유권자는 4만 2000명에서 17만 8000명으로 급증했다. 새로 유권자가 된 사람들의 투표에 따라 지각변동을 일으킬 만한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11년 말부터 1913년 초에 걸쳐 사회주의 조직들은 일보 전진하기는커녕 후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물질적 수단과 중간 간부가 부족했다.
그러나 하층계급이 선거라는 무대에 진출할 수 있게 되자 변화로 대표되는 위협은 그때까지 사르데냐주의라는 모호한 외피 아래 일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갖가지 이해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구실을 했다. 한편에는 한 무리의 보수파 그룹이 형성되고, 다른 편에는 노동자들이 섰다. 사르데냐주의를 위한 공동투쟁이라는 오래된 모호함에서 이제 벗어나 양쪽 모두 아주 명확하고 충분하게 계급으로 나뉘어 결집하게 됐다. 섬의 농민들, 소지주들, 사무원 등 중간계층의 억압자들과 남부의 모든 빈민계급을 짓누르는 진정한 억압자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믿고 있던 것처럼 북부의 공업노동자와 소유자계급의 연합체가 아니라 사르데냐의 반동집단들을 포함한 남부 전체의 반동집단과 함께 하는 북부 소유자계급의 연합이었다.
분노와 절망을 품고
안또니오는 안젤로 따스까, 빨미로 똘리아띠 등과 좀더 자주 왕래하게 됐다. 거기에 법학부에 갓 들어온 움베르또 떼라치니는 나이가 가장 어렸지만 함께 어울렸다. 이 네 명(그람쉬 23세, 따스까 22세, 똘리아띠 21세, 떼라치니 19세)은 5년 뒤 전쟁이 끝나고 「신질서」의 편집진으로 재결합했다. 당시 정식으로 정치활동을 펼치고 있던 사람은 따스까와 떼라치니뿐이었다. 둘 다 사회주의 청년 ‘파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람쉬는 그다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유럽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무익한 살육’이 시작되기 나흘 전인 1914년 7월 28일, 사회당 지도부와 국회의원들은 이딸리아의 ‘절대 중립’을 요구했다. 이딸리아는 8월 4일에 이르러 중립을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중립의 확대냐 발전이냐를 놓고 사회주의자들 내부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10월 18일 「전진」의 3면에 무쏠리니가 쓴 긴 글이 실렸다. 제목은 ‘절대 중립에서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으로’였다. 그람쉬는 1914년 10월 31일자 「인민의 외침」에 글을 써서 이 논쟁에 끼어들었다(이것이 그람쉬가 최초로 쓴 정치적 글이었다). 제목은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이었는데 무쏠리니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의도는 명확히 달랐다. 전쟁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와 방향의 차이가 그 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혁명가, 탄생하다
그람쉬는 사회당 지부 내에서 눈에 띄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1차대전이 시작된 첫 해에도 적극적인 정치활동 무대의 언저리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 청년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과거의 좌파 논객과 비교해서 그람쉬의 글이 발산하는 색다른 빛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젊은 ‘문화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하고 있던 안젤로 따스까는 전쟁이 시작되자 곧 징집되어 또리노를 떠나야 했다. 똘리아띠나 움베르또 떼라치니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동지들 중에서 그람쉬 한 사람만 남았다.
2월이었다. 곧이어 러시아에서 사건이 터졌다. 3월 18일, 사람들은 짜르가 타도된 사실을 알았다. 임시정부가 성립돼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미 레닌이 지도하는 급진적 혁명분파인 최대강령파 그룹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즉각 휴전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 이딸리아에서 이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주의 진영의 저술가들(그람쉬가 선두에 있었다)과 이딸리아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레닌이 이끄는 당에 신뢰를 보냈고, 그 당이 러시아혁명을 자유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반전 여론이 드높던 또리노에서 8월 23일 금요일 아침, 총격전이 시작됐다. 사회당 지도자들과 반란자들 사이에는 아무 연결고리도 없었다. 군중은 충분히 계산된 혁명의 밑그림을 갖고 있지 않았고, 약탈과 파괴라는 목적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병사들이 자신들 편에 서기를 기대했지만 목숨을 위협하는 총격이 돌아올 뿐이었다. 50명 정도 죽고 2백 명 넘게 다쳤다. 대량 검거가 뒤따랐다. 사회당 지부의 지도부는 거의 모두 검거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또리노 노동운동을 지도하는 임무가 임시 집행부에 맡겨졌다. 그람쉬는 새 집행부의 12인 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스물여섯 살에 비로소 또리노 사회당 지부에서 지도부의 지위를 맡게 된 것이다.
새로운 질서
전쟁이 끝났다. 1918년 12월 5일 이래 그람쉬는 「전진」에 전념했다. 따스까, 똘리아띠, 떼라치니도 돌아왔다. 예전에 또리노대학 그룹에서 구상한 신문발행 계획이 다시 거론됐다. 그람쉬는 러시아의 10월혁명과 뒤이은 변화를 철저히 연구했다. 그후 1919년 5월 1일 「신질서」 제1호가 나왔다. 「신질서」는 이론연구나 실천상의 문제제기, 그리고 러시아, 프랑스, 영국의 노동자계급을 대상으로 한 간행물에서 번역한 글이나 공장생활과 노동자평의회에 관련된 보고를 계속 실었다.
전후 최초로 실시되는 총선거가 1919년 11월 16일로 예정돼 있었다. 사회당 전국전당대회는 6주 앞선 10월 5일부터 8일까지 볼로냐에서 열렸다. 명확한 좌파 노선이 지배하는 전당대회였다. 또리노에서는 이딸리아사회당이 선거에서 압승해 18석 중 11석을 얻었다(‘신질서파’는 후보자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당은 당세가 팽창하면서 도리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전쟁 전에 5만 명이던 당원이 30만 명에 이르렀고, 전쟁 전 50만 명이던 노동총동맹 가맹자 수가 200만 명을 넘어섰다. 소속 국회의원도 세 배로 늘어 50명에서 150명이 됐다. 이런 급격한 팽창은 몽상을 낳기도 했고, 당내 세력 판도에서 새로운 문제들을 낳기도 했다.
국가는 봉기를 겁내고 있었다. 그러나 사용자 측은 그람쉬가 확신한 대로 봉기를 도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봉기를 유혈로 진압하고 이번에 또리노 노동운동을 아예 파괴해버릴 작정이었다. 그람쉬는 사용자 측이 공격을 걸어오는 의도를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정면충돌할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4월 13일, 총파업이 선언됐다. 도시에는 “큰 물결처럼 전투부대가 밀어닥쳤고 주변의 전략 요충지에는 대포와 기관총이 배치됐다.” 10일 동안 이어진 처절한 싸움이 끝난 뒤 협정에 따라 노동자들은 다시 직장에 복귀했지만, 사실상 이런 상황은 그람쉬와 ‘신질서파’의 패배를 의미할 뿐이었다.
이딸리아사회당 내부의 위기는 갈수록 깊어져 세 가지 다른 경향들, 즉 개량주의파, 최대강령파, 공산주의파의 대립이 이미 실질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에 이르렀다. 또 공산주의파 중에서도 두 그룹(보르디가의 ‘소비에트파’와 그람쉬의 ‘신질서파’)이 대립하고 있었다. 더구나 같은 ‘신질서파’ 내부에서도 따스까와 결별할 것이 명확해지기 시작했고, 견해 차이가 표면에 드러나면서 그람쉬도 똘리아띠, 떼라치니 등과 멀어질 정도였다.
거센 혁명의 파고, 그리고 역류
7월 19일부터 모스크바에서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2차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붉은 군대가 반혁명군을 완전히 격파한 뒤였다. 세계 각국으로 혁명이 전파돼갈 전망이었다. 혁명당(러시아 볼셰비키당 같은)이 개량주의 경향의 온건한 정당(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들 없이 (또는 그런 정당들에 반대해서) 혁명을 향해 전진한 경우에만 혁명이 성공했다. 코민테른 제2차 대회의 중심노선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8월 20일부터 금속노조의 임금인상 요구를 사용자측이 일축하는 바람에 모든 공장에서 ‘준법투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즉 각 사업장마다 공장폐쇄를 막기 위해 노동자들이 공장에 들어가 작업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준법투쟁의 목적은 혁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노조 지도자들은 그런 행동을 함으로써 정부가 개입해 중재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리노에서는 노동자들의 행동이 단순한 시위에서 혁명적인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8월 31일부터 9월 1일에 걸쳐 밤중에 공장폐쇄가 선언되자 다음날 아침부터 공장점거가 이어졌다. 모든 권력이 평의회의 손에 장악됐다. 준법투쟁을 멈추고 생산을 재개하되 작업지침은 공장평의회가 규제하기로 했다. 피아트 중앙공장에서는 보통 때 67대 정도이던 일일 생산량이 대다수 기술자와 사무직원이 공장에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7대가 됐다. 이딸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또리노에 눈과 귀를 집중했다. “사회의 위계질서는 붕괴했다. 모든 역사적 가치는 전도됐다. 노동자계급, 도구의 계급이 지도하는 계급이 됐다.”
혁명의 물결은 당을 결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몇몇 공장에서는 노동자의 강력한 핵심을 구성하고 있던 극좌파가 그람쉬를 염려하게 만들 게 틀림없는 선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딸리아사회당과 즉시 결별하고 새로운 공산당을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람쉬는 이딸리아사회당 내부에서 동의를 얻고 세력을 획득하기 위해 기층부터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강화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공장점거는 좌절의 길을 걷고 있었다. 혁명적 공세를 취하려면 대중이 참가해야 했는데 또리노를 뺀 곳에서는 참가율이 각양각색이었고, 노동조합 조직은 ‘명예로운 탈출구’를 찾는 데만 혈안이 돼 정부의 중재와 개입을 기대하고 있었다. 혁명은 서서히 퇴조해갔다. 사실상 패배한 노동자들은 공장을 포기해야만 했다.
10월 초 밀라노에서 공산주의파의 선언, 강령이 발표되는 회의가 열렸다. 모든 분파를 대표해서 봄바치, 보르디가, 포르띠끼아리, 그람쉬, 미시아노, 뽈라노, 레뽀시, 떼라치니 등 8명이 문서에 서명했다. 당을 소수의 비타협적인 사람들이 모인 분파로 생각하고 대중은 뒤이어 일어나는 혁명적 행동 속에서 그 분파를 따르면 된다는 생각(보르디가)과, ‘프랑스 쟈코뱅 파를 영웅적으로 모방하기 위해 대중을 이용하는 당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대중정당 개념이 있었다. 따라서 두 관점은 이딸리아사회당에 대한 태도에서도 대립하고 있었다. 한쪽은 분리(보르디가)이고, 다른 한쪽은 내부에서 시도하는 혁신(그람쉬)이었다.
혁명의 물결은 역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동의 파고는 높아졌다. 1920년 10월 30일~11월 7일의 지방선거에서 이딸리아사회당은 1919년에 거둔 고무적인 결과를 재현했다. 꼬무네 8000여 곳 중 2162곳에서, 69개 현 중 26개 현에서 다수당이 됐다. 이딸리아사회당 지도부는 결국 세라띠(‘통일공산주의파’)에게 맡겨졌다. 보르디가의 ‘순수’ 공산주의파는 리보르노에서 ‘이딸리아공산당’을 결성했다. 아마데오 보르디가는 새로운 당의 절대 지배자였다. 너무 늦게 이런 현실을 인정한 탓에 그람쉬는 신당이 만들어진 뒤 구성된 최초의 중앙위원회에서도 제외될 뻔했다.
새로운 당 속에서
1921년 1월 1일 이후 「신질서」는 일간지로 복간됐고, 그람쉬는 편집장이 됐다. 문화인으로서 그람쉬는 이딸리아 사회에 작용하는 여러 힘을 창조적이고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실천하는 인간으로서 그람쉬는 신문 일에 몰두했다. 정치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보르디가에 자신의 노선을 일치(크게 대립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한정된 의미의 형식적 일치)시키는 편이, 비록 자신의 사상세계 전부는 아니겠지만 근본적으로 어느 정도 자기 요구를 표명하는 데 저해되지는 않았다. 비공산당원인 노동자나 카톨릭 계열의 노동자, 또는 반대파 지식인에 대한 ‘개방성’도 그런 요구 중 하나였다.
모스크바에 열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참석할 이딸리아공산당 대표에 그람쉬가 지명됐다. 그람쉬는 1922년 5월 말에 이딸리아를 떠났다. 『신질서』의 편집부에서도 떠나게 됐다. 그러나 인생 대전환이 그람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러시아혁명의 주역들 가까이 머물며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동시에, 남은 삶을 행복으로 채워 줄 인생의 반려자 줄리아 슈흐트를 만나는 것이었다.
은빛 숲에서 만난 사랑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람쉬의 건강은 매우 나빴기 때문에 그해 초여름 코민테른 의장은 모스크바 근교 세레브라니 보르(‘은빛 숲’이라는 뜻)의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권했다. 거기서 그람쉬는 에우제니아 슈흐트라는 여자를 알게 되었다. 에우제니아의 동생이 바로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 슈흐트였다. 몇 번인가 만난 뒤, 자기 몸 상태를 생각하면 위축될 뿐이었지만 그람쉬가 먼저 편지를 썼다. 줄리아가 에우제니아를 보러올 때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체구는 빈약해도 푸른 눈동자가 정답고 내면의 힘이 풍성한 이 젊은 이딸리아인이 줄리아의 사랑을 얻은 것이다.
이딸리아에서는 파국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파시스트의 ‘로마 진군’은 1922년 10월 28일에 벌어졌다. 이튿날 국왕은 베니또 무쏠리니에게 조각을 의뢰했다. 각지의 노동협회가 약탈되고 방화됐다. 파시스트 돌격대는 민주적인 신문의 편집국을 습격했고, 좌익 지도자들은 박해, 투옥, 구타, 살해됐다. 이딸리아공산당 다수파는 파시즘 세력이 부르주아 전선의 좌파를 담당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람쉬는 파시즘의 새로운 성격, 그것이 대표하는 위험의 심각성, 코민테른이 제기한 방어노선의 정당함을 이해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람쉬는 이딸리아사회당 전체는 아니지만 당장 이 ‘제3파’를 상대로 통합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많은 지지를 받았다(그람쉬는 본의 아니게 지옥의 꾀를 지닌 늑대라는 평을 얻었다). 통합을 위해 14개항의 조건이 설정됐고, 그 조건을 적용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공동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람쉬는 이딸리아에 돌아가지 않았다. 세라띠는 귀국 직후 체포됐고, 따스까는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딸리아에서 통합을 위한 활동이 공산당부터 사회당에 이르기까지 양당 다수파의 저항 속에 진행되고 있을 때, 그람쉬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때 이딸리아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그람쉬 체포령이 떨어진 사실을 알리고 당분간 귀국을 미루라고 권하는 전보가 날라왔다.
당 지도부의 많은 사람들이 체포됐다. 그람쉬에게 비엔나에 머물면서 이딸리아공산당의 어려운 상황을 좀더 면밀히 확인하라는 임무가 부여됐다. 이리하여 또리노 시절 막바지에 상대적인 고립 상태에 빠져 있던 이 사르데냐 청년이 이제 당에서 최고의 책임을 지는 지위에 올랐다. 코민테른이 판단하기에 서른두 살의 그람쉬가 이딸리아공산당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였던 것이다.
새로운 지도집단
그람쉬는 비엔나에서 거의 은둔자로 시간을 보냈다. 식사하러 나갈 때와 조직 업무가 생길 때를 빼면 외출도 하지 않았다. 이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람쉬는 편지마다 함께 살자고 줄리아를 계속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올 수 없었다. 몸이 몹시 허약한 데다 임신한 몸이었다.
정치적 단절도 있었다. 그람쉬는 충분한 정보를 모아 러시아의 정세와 이딸리아공산당 내부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1922년 초부터 레닌은 두 다리와 오른팔이 마비됐고, 1923년 3월에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러시아공산당 내부에서는 우익 소수파와 다수파가 파벌투쟁을 시작했다. 보르디가는 이딸리아공산당 다수파가 코민테른과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람쉬는 그것에 반대했다. 그람쉬의 이의 제기가 형식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가로 성장하던 초기부터 그람쉬는 ‘대화’와 ‘개방’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분파의 껍질 속에 틀어박히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역시 새로운 지도집단을 구성할 인물을 정하는 게 커다란 문제였다.
1924년 5월 12일, 그람쉬는 다섯 달 반 동안 머물던 비엔나를 떠났다. 4월 6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베네찌아 선거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신분으로는 체포되지 않는다는 면책특권 덕분에 이딸리아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람쉬는 귀국 직후 당이 과거와 다른 조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리와 몸통, 새 지도집단과 지방의 간부가 분열과 단절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런 단절이 언제나 당의 기능을 마비시켰으며, 더욱 나쁜 것은 머리가 사상적으로 어느 한 방향(코민테른과 그람쉬의 지도방침)을 정했는데도 팔과 다리(하부기구)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순에 빠지기도 했다는 점이다.
거대한 용암의 강
사회당 소속 개량주의파 의원이던 마떼오띠가 납치돼 피살됐다. 파시즘은 사건을 무마시킨 다음, 의회 안에서 야당이 드러내는 무능에 초점을 맞춰 반격을 펴면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람쉬의 정치활동은 심각한 한계를 겪고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에 충분히 조직돼 있지 않은 신생 정당을 이끌고 있었고, 더군다나 그 정당이 분파주의라는 독에 감염돼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좌파 이상주의자들의 행동 때문에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람쉬는 주저 없이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냈다. 첫째, 부르주아 질서를 타도하기 위한 결정적 공격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미 상실한 위치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부르주아 세력을 포함해서 모든 반파시스트 세력과 폭넓은 동맹체제를 형성하지 않으면 상실한 위치를 회복할 수 없다.
줄리아에게서 아들 델리오가 태어났다는 편지를 받았다. 파시스트 폭력의 물결이 다시 밀려왔다. 1921~22년과 마찬가지로 폭행, 살인, 파괴가 저질러졌고, 신문사가 습격을 받고 반대파 인물의 집은 쑥대밭이 됐다. 그 뒤 9월에는 로마에서 파시스트 국회의원이 전차를 타고 가다가 정신분열증 환자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파시스트가 보기에는 이 사건이 마떼오띠 피살사건과 피장파장이었고, 이렇게 해서 사태가 종결된 것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탄압정책이 한층 강화됐다. 그람쉬는 이제 몇 달 전처럼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무쏠리니와 그람쉬
1925년 1월 3일에서 6일까지 사흘 동안 정치색이 짙다는 혐의를 받고 있던 단체와 집회소 95곳이 폐쇄되고 ‘파괴적인’ 조직 25개가 해산명령을 받았으며, 자유이딸리아협회에 속한 120개 단체도 해산됐다. 그리고 가택수색이 655건 있었으며, ‘파괴주의자’ 111명이 체포됐다. 반정부 신문에 내리는 정간명령은 아예 정기적인 조치가 됐다.
1925년 1월 말에는 처형 타티아나 슈흐트를 만나게 됐다. 1925년 2월 말에는 1년 반만에 아내를 만나러 가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 곧 여덟 달 된 델리오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4월 28일에는 다시 이딸리아로 돌아왔다. 정부는 희한한 법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결사, 법인, 단체의 활동과 여기에 공무원이 가입하는 것을 규제한다’는 내용이었다. 법안의 속뜻은 뻔했다. 이 법안이 일단 통과되면 타협이 불가능한 여러 조직들을 겨냥한 탄압의 회오리가 몰아칠 게 분명했다.
1925년 5월 16일, 그람쉬는 이 법안의 억압적 본질을 고발하기 위해 의사당에 들어갔다. 국회의원 그람쉬의 첫 무대였다. 좌파 진영의 젊은 지도자(그람쉬는 이때 서른네 살이었다)와, 1914년까지 「전진」의 편집장이자 혁명적인 젊은 세대의 지도자였지만 지금은 반동 부르주아지의 돌격대가 ‘두체(두령)’라고 부르는 42세의 인물, 무쏠리니는 이렇게 한 자리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게 됐다.
낡은 공식과 결별하다
파시스트 테러가 일어나고 3년이 지나자 이딸리아의 인민대중 속에서 혁명에 대한 의지보다는 민주주의를 향한 희망이 다시 대두되고 있었다. 이딸리아의 정치적 상황이 발전하는 과정을 눈여겨보고 있던 그람쉬는 코민테른의 노선(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최종적인 해결이지만, 이딸리아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자유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줄리아와 델리오가 10월에 도착했고, 에우제니아도 함께 왔다. 주변 분위기도 달라져 있었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숨은 이제 안전하지 못했다. 신중히 행동해야 했다. 1926년 줄리아가 둘째 아기를 가졌다. 줄리아는 소비에트 대사관 일을 그만두고서 이딸리아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정세의 추이를 고려해야만 했다. 줄리아는 1926년 8월 7일에 국경을 넘었다(그리고 23일 뒤인 8월 30일에 줄리아노가 태어났다).
남부문제
그람쉬는 남부문제에 관한 평론의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새삼스러운 주제는 아니었다. 남부문제는 그람쉬가 처음으로 시도한 정치적 고찰의 주제였다. 어린 시절 길라르짜나 산뚤루쑤르지우에서 농민과 목축민과 함께 살 때부터 그랬고, 다시 깔리아리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부터 살베미니의 논문을 탐독하던 때까지 줄곧 그람쉬의 정치적 관심사였다. 또리노에 온 뒤, 농업이 지배적인 환경을 벗어나 공장노동자들과 지내면서도 줄곧 이 문제를 생각해왔다. 다만 시각은 다양해졌고 문제를 분석하는 방법도 좀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이 문제를 더욱 폭넓은 문제의 한 국면으로, 다시 말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문제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국민적 문제와 동떨어진 남부문제, 특수한 대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남부 자체에만 귀결되는 문제로서 남부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람쉬의 생각이었다.
억눌린 자유
소비에트 연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갈수록 불안을 더해갔다. 이미 레닌이 사망하기 전부터 존재하던 볼셰비키 지도부 내부의 대립은 갈수록 날카로워졌고 분파싸움도 치열해져갔다. 1926년 11월 5일에 이딸리아 정부는 모든 여권의 효력 정지, 비합법 망명 시도자에 대한 무기사용 허용, 반파시스트 신문의 정간, 체제에 반대하는 정당과 단체의 해산을 결의했다. 사형제도 부활과 특별법정(군사법정과 비슷한)의 설치를 위한 법안도 제정했다. 국회는 11월 9일에 관련 법안을 심의해 통과시키기로 돼 있었다.
그람쉬를 안전한 스위스로 망명시키는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람쉬를 밀라노까지 데리고 나갈 임무를 띠고 「통일」지 사장의 아내 에스테르 잠보니가 로마로 갔다. 그러나 그람쉬는 동행하지 않았다. 11월 5일의 각의에서 결정된 자유압살법이 심의될 11월 9일의 국회에 참석하고 싶다는 그람쉬의 의지가 강했다. 자신이 국회의원의 불체포 특권을 보장받을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1월 8일 밤 공산당 의원들이 국회의원에서 제명당했다. 밤 10시 30분,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에도 불구하고 그람쉬는 자택에서 체포됐다. 이때가 서른다섯 살이었다.
차가운 수갑
1927년 1월 20일, 그람쉬는 밀라노의 산 빗또레 교도소로 향했다. 타티아나는 안또니오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친척이었다. 그런 타티아나의 병이 길어지면서 그람쉬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다른 몇몇 가족들하고는 연락이 끊어져버렸다.
국가보위 특별법정
밀라노를 출발한 날이 1928년 5월 11일이었다. 논고는 5월 28일에서 6월 4일까지 계속됐다. 국가보위 특별법정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이것은 국가기관의 파시스트화에 약간 저항을 하던 일반 검찰을 대신해 무쏠리니가 특별히 제정한 정치적 사법기관이었다.
그람쉬한테는 20년 4개월 5일의 형이 떨어졌다. 1928년 6월 8일에 길라르짜에 있던 동생 떼레지나가 무쏠리니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정밀’ 검진과 진찰을 해 달라는 것, 그리고 진찰한 뒤에는 ‘병에 맞는 식사와 간호가 가능하고 지나치게 긴 형기를 좀더 인간적으로 보낼 수 있도록 병원시설이 갖추어진 곳에 수감시켜 달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미 치아 12개가 빠져 있었던 그람쉬는, ‘요독증과 신경의 가벼운 피로에 따른 정기적인 발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얼마 후 그람쉬는 몹시 쇠약해져서 뚜리 교도소에 도착했다.
『옥중수고』
투옥된 지 2년 4개월이 된 1929년 2월 초, 그람쉬는 가까스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 당시 생각하고 있던 문제들은 네 가지였다. 첫째, 이딸리아 지식인에 대한 연구로 지식인의 기원과 문화의 조류에 따라 나뉘는 지식인들을 각 분파로 분류하는 문제. 둘째, 비교언어학 연구. 셋째, 삐란델로의 희곡을 포함해 삐란델로가 대표하고 결정지은 이딸리아 연극관(演劇觀)과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넷째, 연재소설에 대한 평론과 대중의 취향.
작업조건은 나빴다. 금고형을 사는 사람에게 공통된 악조건에다가 필요한 서적이나 문헌을 폭넓게 살펴볼 수도 없었고, 건강도 점점 나빠지더니 줄리아와 소식이 끊긴 뒤로는 차츰 기운을 잃어갔다. 그래서 비망록을 적든지,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닥치는 대로 짧게 메모하든지, 나중에 다듬어 완성할 생각으로 평론을 쓰는 일이 이제 그람쉬의 일과가 돼버렸다. 그람쉬에게는 이것이 혁명적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고, 바깥 세상과 이어진 끈을 유지하는 것이며, 인간사회에서 벌이는 사상적 활동이었던 것이다. 이 작업이 모여 마지막에는 32권의 노트가 된다. 그 중 21권은 뚜리에서 쓰거나 쓰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 2848쪽에 이르는 이 노트는 타이프 용지로 정리하면 4000쪽 정도가 된다.
『옥중수고』는 남부문제에 관한 평론의 취지를 더욱 심화하고 확대한 것이다. 통일국가가 형성될 때까지 이딸리아 역사에서 지식인이 한 구실에 대한 연구가 담겨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 지배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여러 철학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그리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의 세계관, 피착취계급의 의식 속에서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맞서 그것을 대치할 새로운 인생관을 정립하려고 했던 사상가 그람쉬의 업적이 담겨 있다.
이중의 감옥
그람쉬는 몇 달 간격으로 아내 줄리아의 편지를 몇 통 받았다. 아무 종이에나 연필로 휘갈겨 쓰거나 간단하게 용건만 적은 것도 있었고, 어느 때는 상투적인 편지였다가 또 어느 편지에서는 애정이 넘치기도 했다. 그람쉬는 혼란스러웠다. 1929년 7월에서 1930년 7월까지 1년 동안 줄리아는 달랑 편지 한 통만 보내왔다. 그람쉬는 마치 이중의 감옥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정치적인 연계도 대부분 끊겨버렸다. 그람쉬는 무척 괴로워했다. 왜냐하면 현실의 정치적 실천에서만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옛 동지들과 주고받던 연락도 끊어지면서 코민테른과 각국 공산당, 특히 이딸리아공산당 내부에서 논의되는 사안이나 노선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됐고, 그나마 자세히 알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병든 몸과 고통스런 마음
1930년 중반부터 1932년 말까지 2년 반 동안은 그람쉬에게 무척 힘든 시기였고, 가족들이 보내는 안부나 소식이 자주 끊어졌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줄리아는 일종의 심한 신경쇠약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몸이 아프다는 사실은 그람쉬가 줄리아의 오랜 침묵을 납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람쉬는 병을 앓고 있었다. 몸은 점점 더 쇠약해지고 가족들과 동료들의 몰이해로 연락이 자주 끊기거나 논쟁을 벌이는 데 시간을 허비하면서도 연구는 진전됐다. 그러나 심각한 병에 걸렸는데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조건 아래서 아마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몸을 혹사했을 것이다. 마침내, 그람쉬는 쓰러져버렸다.
죽음의 문턱
1933년이 시작됐다. 이 무렵부터 그람쉬는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1933년 초까지 그람쉬의 비판력과 의지력은 거의 쓰러지기 직전인 육체에서 분리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제 그람쉬는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람쉬는 육체의 파탄이 성격의 파탄을 가져오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3월 7일, 그람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그 뒤 다시는 혼자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게 됐다. 그람쉬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1932년 9월 15일에 수상 앞으로 그람쉬가 감옥 밖의 믿을 만한 의사에게 진찰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이가 바로 타티아나였다. 1933년 3월 20일, 움베르또 아르깐젤리 교수에게 그람쉬를 진단해도 된다는 허가가 났다. 아르깐젤리 교수는 이런 결론을 덧붙였다. “현재 상태로는 환자가 오래 살 가망은 없다. 가석방이 불가능하다면 하다못해 민간병원이나 요양소로 옮겨야 한다.”
병세가 비교적 좋아져 평온하던 몇 주일이 지난 뒤 다시 상태가 나빠졌다. 그람쉬는 연구와 집필을 계속했다. 1933년에 노트 제1권(여러 가지 주제에 관한 잡록)과 제2권(정치학의 요소들), 그리고 제4권과 제12권(잡록)이 씌어졌다.
의지와 지성으로 마지막을 불사르고
포르미아에 도착한 날은 1933년 12월 7일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도 그람쉬의 건강은 뚜리에 있을 때만큼 위기는 아니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람쉬는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해 전문클리닉이 있는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싶어했다. 4월에는 그런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1934년 7월 12일에는 로마에 있는 뀌시사나 병원의 빗또리오 뿌치넬리 박사가 진찰을 하러 왔다. 그리고 사흘 뒤인 7월 15일에 다시 이송 청원서를 냈다.
병원을 옮기는 수속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1934년 늦여름, 형법 176조에서 정하고 있는 조건에 합당했기 때문에 그람쉬는 먼저 보석을 신청한 다음 건강상 필요에 따라 거주지를 선택하기 위해서 필요한 진단을 해 줄 믿을 만한 의사를 고를 수 있었다. 해외에서는 그람쉬 구명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가석방 신청은 1934년 10월 25일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가석방이 결정된 뒤에도 그람쉬의 일상에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침실에 헌병이 들어오던 것만 없어졌을 뿐 방 바깥에서 하는 감시는 여전히 계속됐다. 쇠창살이 사라지고 병원 밖으로 나갈 수도 있었지만, 밖에 나갈 체력이 부족했다. 가석방이 허가되고 열 달이 지난 뒤에야 가까스로 다른 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1935년 8월 24일, 안또니오 그람쉬는 포르미아를 떠나 로마의 뀌시사나 병원으로 향했다.
최후
8월 26일에 그람쉬는 프루고니 교수의 진찰을 받았다.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척추 카리에즈와 폐결핵이 겹친 데다 혈압은 200까지 올랐고, 인후염과 통풍이 겹치면서 병세가 악화됐다. 그람쉬는 줄리아를 생각하고 다시 편지를 썼다. 그러나 줄리아는 오지 않았다. 안또니오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1937년 4월 21일에 형기가 만료되면 그람쉬는 사르데냐로 돌아가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937년 4월 27일 오전 4시 10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