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폴 윌리스
영국 캠브리지대학교에서 문학비평을공부했다. 1972년에 버밍햄대학교 현대문화연구센터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 현재 영국 킬대학교에서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을 가르치고있다. 지은 책으로는 『Learning to Labour』, 『Profane Culture』, 『Profane Culture』, 『MovingCulture』, 『The Ethnographic Imaginat』 등이 있다.
■ 역자
김찬호
1962년 대전에서 태어나연세대학교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신학으로 시야를 넓히면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기독학생운동에도 참여했다. 일본 오사카대학에서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연세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강의했다. 2005년 현재 대안교육 분야에서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백의 질서』, 『사회를 보는 논리』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작은 인간』,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 등이있다.
김영훈
미국 남가주대학(USC)에서 문화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 현재이화여자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류의 시각문화, 한국 전통문화 예술과 재현 등을 주제로 글쓰기와 영상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영상 작품으로
■ 차례
한국어판 서문
옮긴이의말
책머리에
감사의 글
모닝사이드판 서문
1. 들어가는 글
해머타운 사례연구
제1부 문화기술지
2. 문화의 구성요소
권위에 대한 반항과 순응적인 아이들에대한 거부 / 비공식적 집단 / 개기기, 거짓말하기, 까불기 / 익살떨기 / 지루함과 신나는 것 /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3. 계급과 제도화된 문화형태
계급형태 / 제도화된 형태
4. 노동력, 문화, 계급 그리고 제도
공식적인 배려 / 학교와 노동현장의 연속성 /직업 / 노동현장에의 도달
제2부 인식
5. 간파
분석의 요소 / 간파
6. 제약
분리 : 육체 - 정신노동, 남 - 녀, 인종차별 / 노동력과 가부장제 /인종차별과 노동력
7. 이데올로기의 역할
확정 / 교란 / 내부의 매개자
8. 문화적인 형태와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이론에 대하여
재생산과국가제도
9. 새로운 시작과 그 이후
부록
학교와 계급재생산
들어가는 글
계급별로 자녀들이 어떻게 직업을 선택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중간계급의 아이들이 그대로 중간계급의 직업을 갖는 것을 보고만 있을까? 왜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은 자기 부모의 직업을 그대로 물려받을까? 우리 사회(영국)의 노동자계급은 뚜렷한 물리적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노동에 몸담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국에서 육체노동의 사회적 위상이나 가치가 다른 사회와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계급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직업이 육체노동인 것이다. 그런데도 육체노동자의 자녀들은 부모의 직업을 계승한다.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은 이 놀라운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흔히 개인의 능력과 직업 및 학업적 재능 사이에는 정비례의 함수관계가 성립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덜 성공한 중간계급 자녀들과 가장 성공한 노동자계급 자녀들이 남겨놓은 일들을 ‘낙오한’ 노동자계급 자녀들이 갖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에서 나타나는 ‘실패’의 문화적 패턴이 다른 패턴들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것이다. 이 계급문화는 어떤 중립적인 패턴이 아니며, 하나의 정신적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외부에서 학교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들의 집합인 것이다.
육체노동력에 대한 특정한 주관적 의식을 형성하고, 육체노동에 종사하겠다는 객관적 결단을 내리게 만드는 특수한 환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의 반학교문화다. 노동자계급의 주체들은 이 문화의 맥락으로 개인과 집단에 전달되어 아이들의 독자적인 실천 속에서 문화의 여러 면모들을 창의적으로 발전?변형시키며, 재생산 과정을 거쳐 결국 특정한 종류의 노동으로 인도한다.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이 노동에 스스로 편입되는 과정은 노동자계급 문화가 재생되는 부분이 된다. 이 과정은 문화가 복합적인 방식으로 통제적인 국가제도들과 관련되는 것을 보여준다.
해머타운은 잉글랜드 한 가운데 있는 대도시권에 속해 있다. 산업혁명 초기에 생겨난 산업도시로, 인구는 약 6만 명 정도다. 해머타운의 연령 및 성별 인구비율은 잉글랜드 및 웨일즈의 다른 지역과 비슷하지만 계급구성은 전혀 다르다. 주민의 8%(영국의 평균 비율의 절반)만이 전문직과 관리직에 종사하고, 거의 대다수가 육체노동자들이다. 성인들 중 학교에 다니며 공부만 하는 사람은 2%(이 역시 영국 전체 평균의 절반이다)도 안 된다. 총노동인구 약 3만 6천 명 중에서 79%가 제조업에 종사하는데, 이것은 영국 전체 비율인 35%나 이 마을이 속한 대도시권 비율인 55%에 견주어볼 때 대단히 높은 비율이다.
문화의 구성요소
반학교문화의 가장 기본적이고 두드러진 특징은 ‘권위’에 대해 집단적으로, 개인적으로 집요하게 저항하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싸나이들’의 일상언어에서 쉽게 드러난다.
조이 : 선생들은 우릴 벌줄 수 있죠. 우리보다 덩치도 크고, 더 거대한 제도 편에 서 있잖아요. 우리는 뭐 보잘 것 없고, 그들은 거대한 모든 것을 등에 업고 있구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선생들에게 복수하려 들죠. 그쵸? 권위란 게 티껍지 않나요?
에디 : 그들은 자기들이 선생이기 때문에 높고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정말 별 볼일 없어요. 보통사람들에 불과하다고요.
‘범생이’라고 불리는 순응적인 학생들이 ‘싸나이’들에게 교사 다음의 표적이 되는 이유는 범생이들이 직접적인 권위를 열성적으로 추종하기 때문이다. 싸나이들은 범생이들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낀다. 이것은 범생이들이 포기해버린 것들, 즉 재미있고 독립적이며 흥미진진한 일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난다.
교사들에 대한 저항과 범생이들과의 분리는 전체적 분위기를 통해서도 끊임없이 표출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공급하고 노동자계급 나름의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이용하는 세 가지 주요 소비재(옷, 담배, 술)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어떤 스타일적?상징적 담론 속에서 구체화되기도 한다. 옷이 상징하는 것을 생각할 때 교사와 아이들 간의 갈등이 대부분 복장을 둘러싸고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아이들이 드러내놓고 담배를 피고 건방짐을 과시한다면 교사들은 이것도 묵과할 수 없는데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 하나의 큰 도전, 거짓말과 결부될 때는 격분하게 된다. 음주가 개인이 학교에서 분리되어 더 성숙하고 우월한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공공연히 이런 행위를 즐기게 된다.
반학교문화에 공식적인 규칙이나 물리적 구조는 없어도 비공식적인 사회집단은 있다. 비공식적 집단은 문화의 기본 단위며, 저항의 기초적?근본적인 원천이다. 반학교문화에는 성인 노동자계급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쌔비기(좀도둑질)’, ‘등쳐먹기’ 같은 비공식적 형태의 거래와 교환체계가 이미 존재한다. 반학교문화가 충분히 발전하면, 구성원들은 공식적인 체계를 다루거나 체계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데 능숙해진다. 학교를 단순히 출석을 부르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싸나이들은 더 적극적인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는다. 그 중 폭력은 가장 완전한, 그러나 왜곡되거나 맹목적인 형태의 반항이다. 그것은 관례적인 ‘지배자’의 독재를 잠시나마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재에 사내다운 힘으로 대항하는 것은 싸나이들에게 묘한 쾌감을 준다.
싸나이들은 온갖 잡일을 구한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결석도 한다. 스파이크라는 학생은 스스로 번 돈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일하는 것이 ‘진짜’고 학교는 차라리 휴직 상태라고 느낀다. 학교 내의 반학교문화와 학교 밖의 노동현장 문화는 비슷한 점이 많다. 일찍 일을 경험하면서 싸나이들은 이후 노동과 보상, 권력과 균형에 대한 가치기준을 세우게 된다. 아울러 자신들의 노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심스런 적개심도 이 과정에서 생겨나기 시작한다.
계급과 제도화된 문화형태
노동현장 문화에 진입할 수 있는 자격은 반학교문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패배자의 그것이 아니다. 그 자격에는 기술, 솜씨, 자신감, 무엇보다도 역동적인 자세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반학교문화에서 발견되는 남성성과 억척스러운 기질은 노동현장 문화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테마, 남성우월주의를 반영한다. 사실 딱딱하고 기름 낀 기계들 사이에 붙여놓은 풍만한 가슴의 여자 사진이야말로 성차별주의의 직접적인 예가 되겠지만, 노동현장에는 더 일반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남성성이 만연해있다. 노동현장 문화의 또 다른 테마는 노동과정에 대한 비공식적인 통제력을 획득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불굴의 시도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 스스로 최소한의 인원을 배치하고 생산 속도를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경우가 있다.
노동현장 문화도 반학교문화와 똑같 기본적인 조직 단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비공식 집단이 다른 모든 요소들을 배치하고 가능하게 한다. 이런 문화에서는 공식적 권위에서 벗어나 상징적이고 실제적인 공간에서 통제력을 겨루어나가는 전략들이 생성되고 보급된다. 노동현장 문화가 중간계급 문화와 가장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바로 이런 비공식 조직이 바탕에 폭넓게 깔려 있다는 것이다. 노동현장의 비공식 집단이 권위에 순응하는 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싸나이들의 태도와 같다. 싸나이들처럼 노동현장에도 물건을 조금씩 슬쩍하는 일이 널리 퍼져 있으며, 이것이 어떤 암묵적이고 비공식적 규준에 의해 인정되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노동현장에서 발견되는 언어, 그리고 상당히 발전되어 있는 협박조의 익살들이 갖는 특징적인 형태도 반학교문화를 연상시킨다. 학교 공부를 우습게 보고 자기들이 그래도 세상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싸나이들의 보편적 심리 상태는 흔히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느끼는, 이론보다 실제가 더 중요하다는 정서에 견줄 수 있다.
계급문화란 어떤 명확한 조건과 개별적인 대항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만들어진다. 다른 집단, 제도, 성향과 일정하게 대결하면서 발생하는 문화는 친숙한 테마들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발전시키면서 개별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서 테마들이 공유되는 이유는, 계급사회에서 동일한 수준의 모든 위치들은 유사한 구조적 속성이 있고 노동현장에 있는 노동자계급 역시 비슷한 문제에 부딪히고 비슷한 이데올로기적 구성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급문화가 비공식적 집단들의 커다란 연결망과 경험들의 무수한 중첩으로 지탱되고 있는 까닭에, 중심적인 테마와 아이디어들은 직접적인 논리가 가장 적절하지 않은 실제상황에서 발전하거나 영향력을 갖게 된다.
노동력, 문화, 계급 그리고 제도
교육의 새로운 물결, 즉 진보적이고 변형된 양식에서건 전통적인 양식에서건 상관없이 싸나이들은 직업교육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대부분의 것들을 거부하거나 무시하고, 곡해하고 조롱한다. 싸나이들은 자격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그들에게 있어 자격이라는 것은 제도적으로 규정된 지식의 힘이라는 실제적인 무기를 뜻한다. 싸나이들은 지식을 거부하기 때문에 자격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저항감을 갖고 불신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모든 노동 상황이 다 똑같다는 견해는 싸나이들이 실제로 직업을 구하는 방식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어떤 특정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실은 아주 마구잡이로 골라잡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싸나이들에게 직업은 그저 노동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그 노동을 어디에서 할 것인가는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싸나이들이 학교에서는 파악되지 않는 방식으로 문화의 중심에서 가장 절실하게 체득하는 기본적인 것 중 하나는, 현대 노동의 일반적 공통성을 주관적으로 인식함으로써 개별적으로 구체화된 노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심해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노동과 내적 자아가 분리되는 경험과 관련 있다. 노동력은 세상의 요구와 내적으로 연계되어 있지 않고, 그것을 가로막는다. 노동에서 만족이란 기대되지 않는다. 노동 자체에서 본질적인 만족을 취할 수 있을 만한 자아의 어떤 부분은 부정된다. 개인이 중대한 차원의 자기 미래와 직면하는 것은 노동의 고유하거나 기술적인 본질보다는 학교에서 비공식적으로 준비된, 피부에 와 닿는 노동의 인간적 측면이다. 결국 어떤 일이라도 견딜 수 있게 된 것은 특별히 문화적인 전환에 힘입어 가능한 것이다.
노동자계급 문화의 다른 패턴을 발견하고, 싸나이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기들이 믿었던 바가 환상이었음을 아무리 절실하게 깨닫는다 해도 그들의 삶의 경로는 이제 달라지지 않는다. 노동현장에서의 문화적 견습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이제 앞으로 남은 것이란 열악한 환경에서의 노동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힘든 생산 활동임이 분명해질 때, 감옥처럼 보이는 (한때 학교가 그러했듯이) 작업장에는 이중의 함정이 존재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동현장을 감옥으로 여기게 되면서, 그들은 회한에 차 과거를 돌이켜 보며 교육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한다.
싸나이들을 생산과정 속에 편입시키는 것은 그들 자신이지 공식적인 학교교육이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학습, 의미의 전용, 그리고 일종의 저항이라는 형태로 체험된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간파와 제약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해온 문화를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간파’와 ‘제약’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접근해보겠다. 간파란 한 문화적 형태 안에 있으면서 구성원들이 처한 삶의 조건과 전체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꿰뚫어보려는 충동을 가리키는데, 어느 면에서 이것은 어떤 중심을 가진 것도 아니고 본질적인 것도 아니며, 개인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제약이란 그런 충동의 충분한 발전과 표출을 뒤섞고 방해하는 이런저런 장애요소와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가리킨다.
간파는 복합적인 방식으로 구조를 꿰뚫어보고 폭로하기 때문에 구조에서 독립된 듯 보인다. 그러나 간파는 내적?외적 제약들로 인해 독립성을 박탈당할 뿐 아니라 결국 그 구조에 다시 얽매이게 된다. 둘 사이에는 궁극적으로 상충하는, 그러면서도 인식되지 않는 관계가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노동자계급 문화에는 육체노동력의 제공이 자유, 선택, 초월을 상징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체제 속으로 정확하게 편입되는 것을 상징하는 계기가 있다는 - 이렇게 해서 장차 노동자계급의 선택의 여지는 차단되고 만다는 - 점이다. 앞의 측면은 미래를 기약하고, 뒤의 측면은 현재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본주의 현실에서 자유를 불평등 속에 못박아버리는 것은 현재 속의 미래인 셈이다.
노동자계급의 독립적 산물들 - 공식적인 것에 대한 속된 평가, 날카로우면서 구체화되지 않은 언어, 반항적 유대, 그리고 공식적 직업과 지위에 근거를 두지 않는 유머러스한 현존과 스타일과 가치 - 은 비록 그것이 체제 전복적인 것이라 해도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그런 것들을 과장하거나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진정한 자유와 물적 토대를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은 자본주의의 요구로 말미암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그에 대한 창조적 반응이다.
이데올로기의 역할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조직의 원리 중에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바로 ‘그들(them)’과 ‘우리(us)’라는 원리다. 그들‘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은 흔히 간과되는데, 이런 내적 분리는 놀라운 것이 아니다. 실제 계급이 분리되어 있는 평화로운 사회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들‘과 ’우리‘는 결코 뚜렷이 식별될 수 없다. 가장 ’우리‘적인 집단이나 개인조차 그 안에 ’그들‘을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배반할 수 있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우리‘ 안에 있는 ’그들‘이다. 비공식성, 정치적 실천에 관심이 없는 개인적 정당화와 ’문화적 투쟁의 힘‘이 그것을 초대했다. 이데올로기는 간파를 부분적으로 확장하고 교란시킨다. 이런 과정은 ’우리‘가 집합적 연대를 갖추고 자기선언적인 ’우리들(we)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대신 이데올로기가 그럴 듯한 가짜 ‘우리들’이 되어 사람들은 가상적인 집합체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이름으로 통치권을 양도한다.
새로운 시작과 그 이후
현재 교육은 위기를 맞고 있다. 위기는 진보적 교육방법이 갖는 기본적 기준과 정당성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지금 일어나는 논쟁에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계급갈등의 실제적 과정, 노동력의 재생산, 문화적이고 일반 사회적인 재생산 과정이 부분적으로 왜곡된 채 반영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싸움이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어느 한편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반학교적인 아이들을 위한 교육의 목표와 형태는 지금 벌어지는 ‘대토론’의 맥락과는 별개로 구성돼야 한다. 가령 진보적인 기법들에는 매우 강한 이상주의적인 요소가 담겨 있고, 이런 기법들은 재생산의 아이러니컬한 과정들 속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거꾸로 말하면 노동자계급 아이들이 훈련된 표현 기술과 상징적 조작을 발전시키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발전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모든 구조적 제약을 받아들이고 문화적 형태들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이런 결론과 이 책 전체의 근본적 주제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통일성 추구라 할 수 있다. 문화적 수준을 규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그 통일된 것을 더 자기각성 쪽으로, 정치적인 것 쪽으로 끌어와서, 문화적인 것이 물질적인 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식하게 만든다. 문화의 정치화는 사실 장기적으로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 중 하나이자 유기적인 요소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문화적 수준에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특별히 문화적 영역 내에서 가능하며, 이데올로기적 영역과의 특징적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문화적 형태들의 일반성을 인식하는 것과 나름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이미 체제 내부의 취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고, 비공식적 영역에 대한 공식적 영역의 힘을 해명하기 시작한 것이며, 모종의 자기변형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만사형통은 아니지만 적어도 새로운 시작은 될 것이다. 월요일 아침, 새로운 시작이란 반드시 매번 똑같은 월요일 아침의 끝없는 연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