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라이프

   
오이와 게이보
ǻ
디자인하우스
   
9500
2005�� 02��



■ 책 소개
슬로 라이프 운동을 이끌고 있는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의 책. 걷기, 방랑, 반세계화, 슬로 푸드, 씨앗, 슬로 머니, 슬로 워터, 흙, 스몰, 인디언 타임, 에코 이코노미,친환경 주택, 슬로 비즈니스, 슬로 카페 등 모두 70개의 키워드를 통해 "느리고 소박한 삶"을 위한 방식과 실천법에 대해 소개한다. 책은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슬로 라이프"의 운동의 다양한 측면을 한 권에 담아 소개하는 데 중점을두었다. 각 에피소드마다 곧장 이어 읽을 수 있는 관련 키워드를 페이지수와 함께 수록해 놓아 원하는 대로 건너 뛰어 가며 읽어도좋다.

 


■ 저자 오이와 게이보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다. 도쿄에서 자라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15년을 살았다. 인류학자로 일하면서 『할렘에서 사는일본인과 미국 흑인 문화』를 발표했고, 『일본인 2세의 전쟁 기록』으로 캐나다 일본협회가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2005년 현재 오키나와의메이지가쿠잉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역자 김향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2005년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의 성지순례』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키친』『엔리코』『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하늘의 과학사』『깡통학교』『세계의 유적과 전설의 땅』등이 있다.


■ 차례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슬로 라이프 : 느리고 단순한 삶은 우리의 마지막 선택이다
걷기 : 슬로 라이프의첫걸음은 산책을 되찾는 일이다
방랑 : 진정한 풍요를 위해 물질과 돈에 의지하지 말자
근면-게으름 : 자, 생각해 보라구. 누구를위한 근면인지…
패스트 하우스-슬로 디자인 : 입고 먹고 사는 일 모두를 다시 디자인하기
맥도날드화 : 패스트푸드가 세계를균질화시키고 있다
반세계화 :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슬로 푸드 :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먹기 위해 세상에태어났다
생산한다-기다린다 : 우리는 생산자가 아니라 대기자일 뿐이다
농업-농사 : 농업이 잃어버린 생명의 시간이, 농사에는 아직흐르고 있다
씨앗 : 종자를 보존하는 일은 생태계를 지켜 내는 일이다
잡일 : 잡스러움을 허용하지 않는 삶은공허하다
경쟁-어울림 : 함께 살아가고 사랑하는 일이 점점 어려운 일이 돼 가고 있다
슬로 러브 : 사랑이란 본디 시간을 포함하는일이다
공포-안심 : 공포라는 산의 정상에 안심은 없다
편리함-즐거움 : 편한 것이 반드시 즐거운 것은 아니다
GDP : 선과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지출 총액일 뿐
슬로 머니 : 왜곡된 경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돈"이 필요하다
개발 : 봉오리를억지로 꽃피우고 아이를 빨리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 개발이라면?
새로운 빈곤 : 오늘날의 빈곤은 풍요로움의 환상이 빚어낸병
(…)
자동판매기-물통 : 나쁜 디자인 vs 좋은 디자인
자동차 : 이 속도가 절약해 준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간것일까?
테크놀러지-아트 : 기계 없이도 살 수 있는 삶의 기술을 회복하기
친환경 주택 : 땅에서 나고 땅으로 돌아가는 인생을 닮은집
잡곡 : 맛도 좋고 영양도 좋고 환경에도 좋다는데...
육식 : 먹어야 한다면 줄이기라도 하자
슬로 비즈니스 : 바쁘지않아도, 빠르지 않아도 잘 팔린다
뺄셈의 발상 : 덧셈은 시시하다. 뺄셈은 짜릿하다
컬처 크리에이티브 : 다른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생각보다 많다
지역 통화 :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에서 함께 사는 경제로
에코 투어리즘 : 여행지의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파괴하지않기
페어 트레이드 : "남과 북"이, 시골과 도시가, 자연과 인간이 공정한 무역
슬로 카페 : 차 마시고 수다 떨며 세상에 느리게딴지 걸기
대체 의학 : 내 안에 있는 생명의 텃밭은 내가 가꾸어야 한다
슬로 섹스-슬로 바디 : 그 넓고도 깊은 몸의 쾌락을 어떻게되찾을 수 있을까?
지금 여기-친밀감 : 익숙한 오늘 속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찾기
빈둥거리기 : 경쟁 바깥에 있는 참된 자신의"거처"를 발견해 내자
쉰다 : 목적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촛불 : 가끔씩은 어둠을 아름답게 되찾아보자
나무늘보 : 우리가 나무늘보에게서 배워야 할 몇 가지 것들


맺음말
역자 후기





슬로 라이프


슬로 라이프 : 느리고 단순한 삶은 우리의 마지막 선택이다


영어에는 ‘슬로 라이프(slow life)’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쓰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그 내력을 밝히자면 이렇다. 나는 『슬로우 이즈 뷰티풀』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매스컴이나 대기업이 말하는 ‘슬로 라이프’를 떠받치는 것은 다름 아닌 대량 생산?대량 소비?대량 폐기의 ‘패스트 이코노미(fast economy)’다.”


내가 염려한 대로, 아니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슬로 라이프라는 말은 이제 미디어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슬로 푸드 운동에서 나온 ‘슬로’도 그렇듯이 ‘슬로’에는 본래 ‘친환경’이라든가 ‘지속가능한’이라든가 ‘글로벌에 맞서는 로컬’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것이 슬로 라이프를 표방하는 잡지 등에 실리게 되면 대부분 간과되어, 느림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어야 할 ‘뺄셈’의 발상은 빠져 있고, 덧셈만 잔뜩 들어가 있는 셈이 되고 만다.


‘심플 라이프’는 영어권에서도 익숙한 표현인데, 실제로 북미 쪽에서는 최근 들어 이 컨셉트가 인기를 끌고 있다. 그곳에서도 물질적 풍요만을 우선하는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 문명의 양태에 질린 ‘문화 창조자’라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덧셈이 아닌 뺄셈의 발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다. ‘슬로’와 ‘심플’은 지금 시대의 심리와 지향을 나타내는 비슷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우리들의 존재 기반인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고, 결국은 경제에 있어서도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소박하고 느긋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역시 풍요로운 자연에 기반을 둔 ‘지속가능한 친환경 경제’의 구상과 창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씩 뺄셈을 시작하여 서서히 줄여가는 길밖에는 없다.


걷기 : 슬로 라이프의 첫걸음은 산책을 되찾는 일이다
슬로 라이프의 시작으로 추천할 만한 것은 ‘걷기’다. 걷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A지점에서 B지점으로의 이동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산책이다. 전자는 최소한의 에너지로 가장 짧은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후자인 산책은 걷는다는 일 자체에 만족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샛길, 돌아가는 길, 한눈 팔면서 가는 길, 사잇길, 곁길, 어슬렁거리며 걷는 길. 길을 가다가 잠깐 멈춰 서도 좋고, 가던 길을 그냥 되돌아와도 좋다. 혹은 길을 잃어도 무방하다.


하나하나의 길이 모두 다르고, 비록 같은 길일지라도 어제의 길과 오늘의 길이 서로 다르다. 한쪽에 더 빨리 효율적으로 도달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모두 필요한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인생을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의 이동만으로 여기고, 산책 쪽은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다. 효율성, 생산성 같은 경제 척도로 이 귀중한 자유를 낭비라는 한마디로 정리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슬로 라이프의 첫걸음은 산책을 되찾는 일이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곧게 뻗은 길을 버리고, 샛길로 들어가 한눈을 팔거나 멀리 돌아가면서 이것저것 살펴보는 것을 자신에게 허용하는 일이다. 자동차를 타는 대신 천천히 걸어보는 사치를 자신에게 허락하자.


노는 즐거움, 자신이 어딘가 목적지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생각에서 해방되어 지금을 사는 자유, 그저 저기에 존재함으로써 얻는 기쁨을 인정하자. 그 역시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이라 여기면서. 단순한 취미나 여가에 속하는 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서 본질적인 시간의 사용 방식으로서 말이다.


반세계화 :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슬로 푸드는 요리의 트렌드나 기업의 새로운 외식 아이템이 아니라 지금 전 지구적 물결을 이루고 있는 반세계화 운동에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반세계화 운동과 슬로 푸드 운동의 중심 인물인 조제 보베는 프랑스의 르라르자크 지방의 작은 촌락에 사는 농부로 1998년 8월 프랑스 남부 지방의 미요에서 건축 중인 맥도날드 매장을 파괴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 전에도 보베는 반핵?환경 운동가로서 다양한 행동을 벌인 바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유전자 조작 작물에 관여한 다국적기업의 시설을 파괴하려 한 것이다.


그가 벌인 일련의 행동 뒤에는 좀더 넓은 배경이 있는데, 그것은 EU(유럽 연합)와 미국 사이에 일어난 무역마찰이다. 우선 EU가 성장 촉진 호르몬제를 사용해 기른 쇠고기에 대해 국내산과 수입품을 불문하고 판매를 금지했다. 그러자 미국은 WTO(세계무역기구)를 통해 이러한 EU의 제재 조치가 자유무역에 반하는 불공정한 수입금지 조치라며 철회를 요구했다. 경제의 세계화를 추구하는 WTO는 이런 대립에서는 사회적인 악영향이나 환경 파괴 따위에는 눈 감고 다국적 기업에 손들어 주는 것이 상례였다. 이때도 WTO는 미국의 주장을 통과시켜 EU의 조치를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EU가 이를 거부하자 WTO는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미국이 유럽에서 수입하는 물품에 대한 관세 인상을 허용했다. 그 수입품 가운데 하나가 보베가 생산하는 록폴 치즈였던 것이다.


1999년 말, 시애틀에서 열린 WTO 회의를 포위한 반세계화 데모대에서도 보베를 필두로 한 ‘보베와 아홉 명의 동지들(미요 10)’이 있었고, 2000년 6월에는 그들의 재판 투쟁 지원을 위해 미요에 5만여 명이 집결했다. 데모대의 유니폼이 된 티셔츠에는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는 보베의 말이 적혀 있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를 취재한 드넬라 메드우즈와 헐 해밀튼은 보베가 사는 마을을 방문해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사실을 취재한 바 있다. 불과 6, 7세대가 사는 이 작은 마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시장이 서는데, 인근 마을 사람들이 각자의 농산물과 공예품을 들고 모여든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나온 음식물과 와인을 함께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춘다. 여기에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별이 따로 없다. 하나의 공동체가 있을 뿐이다.


보베의 항의 행동이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은 이러한 삶의 방식, 즉 ‘슬로 라이프’와 맥도날드나 유전자 조작 작물로 대표되는 ‘패스트 라이프’의 대비였다. 메드우즈와 해밀튼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 교환의 논리에 지배되어 온 문화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버린다. 보베와 그 공동체 사람들은 이에 대해 단호히“안 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에 절대 반대한다고. … 우리에게는 자유무역이나 값싼 음식물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공동체, 문화, 미각, 일, 그리고 자연이라고.”


공포-안심 : 공포라는 산의 정상에 안심은 없다
〈볼링 포 콜롬바인〉은 총기 살상 사건이 끊이지 않는 미국 사회 내의 총기 소지 문제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마이클 무어 감독은 영화를 통해 미국이 총기의 위협에 얼마나 많이 노출된 위험한 나라인가를 드러내려 한 것이 아니라 총기보다 더 위험한 존재인 공포에 대해 말하려 했다. 이 영화는 공포가 얼마나 미국인들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으며, 사고와 행동을 좌우하고 있는지, 또 국가 권력은 어떻게 그 공포를 능숙하게 다루어서 국민을 컨트롤하고 있는지, 어떻게 대기업이 대중의 소비를 선동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얼마나 많은 공포들이 가득 차 있는가. 미디어는 그러한 공포를 선동하고, 한층 더 부풀려진 그 공포 위에 날로 번성한다. 테러, 북한, 전력 부족에 의한 정전, 사스(SARS), 금융 위기 등이 그것이다. 미국의 경우, 총기 규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스스로의 방어가 불가능한 데 따르는 위험을 주장하면서 공포를 부추긴다. 그 공포 너머 저편에는 분명 평화와 안심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공포를 만들어내는 힘을, 더 큰 힘으로 제압하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논리는 무기 소지나 전쟁에서뿐만 아니라 ‘경쟁’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우리 사회에서도 일상다반사로 전개되고 있다.


더글러스 러미스에 따르면 애당초 경쟁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가 바로 공포다. 안심이나 자기 만족 따위는 금기 사항이다.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면 끝장이며, ‘지금 여기’는 뛰어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소비도 혼자서 뒤쳐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근거하고 있다. 소비 행위는 타자와의 경쟁이며,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다. 물론 경쟁에도 승리했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지속되지 못하며, 안심은 한순간일 뿐이다. 경쟁을 떠받치고 있는 근원적인 공포가 제거되지 않는 이상, 경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곳곳에서 공포에 휘둘리고 있다. 암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교통사고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지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 자신이 죽게 됐을 때 남은 가족들의 생계에 대한 공포. 이러한 공포들을 뛰어넘기 위해 공포가 마련되어 있지만, 보험만으로 안심은 어렵다. 항상 그것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릴 것이다. 보험을 통해 궁극의 안심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지금 여기’를 부정하고 축소하면서 ‘장래’를 계속해서 사들인다. 공포를 이용한 ‘사업’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테러와 북한을 대상으로 한 공포에 휩싸여 군비 확장 경쟁의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논의에는 어째서 자신들이 그러한 공포에 휘말려 들었는지, 그 공포의 근원이 된 위험에 어떻게 직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색은 없다. 그러니 공포에 휘말려 들게 된 자신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사색은 거의 불가능하다. 공포란 자신들의 미약한 생각이나 힘 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에 공포라고 믿는 것이다. 공포의 기원은 대단히 애매하여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신화이다.


어찌 보면 현대 사회가 바로 공포의 체제인 듯하다. 일종의 ‘의자 빼앗기’ 게임과도 비슷해서 ‘더 많이, 더 빨리’라고 외치며 늘 앞으로 고꾸라질 듯한 아슬아슬한 자세로 영원히 얻을 수 없는 안심을 뒤쫓고 있다. 그러한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슬로다운’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공포의 연쇄로부터 걸어 나오는 일이다. 그렇다면 안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찬찬히 살펴보면 안심의 씨앗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전통사회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안심은 풍족했다. 그곳에서는 문화가 곧 안심의 시스템이었다. 근대 사회는 이러한 안심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고, 자유와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도록 부추겼으며, 그 너머에 도달해야만 안심이 있는 것처럼 믿게 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많은 것을 얻었지만 도저히 얻지 못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안심이다. 슬로 라이프란 바로 이러한 안심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빈곤 : 오늘날의 빈곤은 풍요로움의 환상이 빚어낸 병
빈곤을 생각할 때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은 전통적인 빈곤과 새로운 빈곤이다. 전통적인 빈곤은 대략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급자족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물질적으로 어려웠지만 사람들은 이를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삶에 대한 만족도도 높았다. 물질적으로 어려웠으니 빈곤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 빈곤은 외부로부터의 가치 판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근대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빈곤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좀먹는 질병과도 같다.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줄거라 믿었던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이 새로운 빈곤은 지금 전염병처럼 지구상에 퍼져 나가고 있다.


반다나 시바는 이 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빈곤을 낳은 것은 ‘인간 대 자연’이라는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희소성이라는 개념을 ‘자연’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일방적으로 그 희소성을 보완하고 벌충하려고 하면서 여러 테크놀러지를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테크놀러지는 희소성을 벌충하기는커녕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한층 더 가난하게 만들면서 역으로 희소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예를 들어 바다는 수세기 동안 어민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공급해왔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의 개발로 마침내는 거대한 저인망을 가진 하이테크 트롤선이 출현해 바다 밑의 뿌리까지 훑어 내 해양이 지닌 생명 사이클을 파괴해버렸다. 그 결과 이러한 파괴적인 테크놀러지를 뒷받침해온 FAO(국제식량농업기구)조차도 세계 기업의 약 90%가 붕괴의 나락에 처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을 빈곤으로부터 지켜주리라 여겼던 테크놀러지에 의해 전에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던 소규모 어민들이 더 가난한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빈곤이란 ‘풍요로움’의 환상이 빚어낸 병이다. 이 병을 치료하는 데는 ‘인간대 자연’이라는 대립으로부터 해방되어 대자연이라는 본래의 풍요를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선진국 사회도 이러한 빈곤과 무관하지 않다. 이반 일리히의 말에 따르면 빈곤은 사람들이 시장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더 깊어진다. 즉 산업 생산에 의한 풍요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손발이 뒤틀린 사람들이야말로 불만과 무력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희소성을 둘러싼 정신없이 빠른 경쟁 세계의 아득한 심연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바라는 풍요로움이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다시 한번 풍요로움이라는 말에 대해 정의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풍요로움은 안정된 생태계와 자족적인 공동체를 토대로 한, 느리고 성숙한 삶 속에 있을 것이다.


인디언 타임 : 중요한 건 시계가 아니라 상황과 형편에 따른 배려다
내가 2년 전에 죽은 모호크족의 장로인 월터 데비드의 모덤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그의 양아들인 존 쿠리가 마중을 나와 주었다. 내가 묘지를 늦게 찾은 것에 대해 사과하자 그는 J.R. 톨킨의 『반지의 제왕』 가운데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마법사가 지각한 데 대한 책망을 듣자 이렇게 말한다. “아니 아니, 우리 마법사들에게 지각이란 있을 수 없지. 언제든 우리가 도착한 때가 우리가 도착해야 할 시간인 거야.” 그러면서 존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인디언들은 언제나 백인들로부터 ‘늦었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우리들 입장에서 보면 ‘도착해야 할 때 도착했을 뿐’인데도 말이죠.”


블랙푸트족을 방문했던 때의 일이다. 그들 거류지 안의 선물가게에 있는 다양한 인디언 물건들 중에서 특별히 내 눈길을 끈 것은 기묘한 시계로 긴 바늘과 짧은 바늘이 정확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숫자는 여기 저기에 제멋대로 적혀 있었다. 글자체와 글자 크기도 모두 제각각이었는데, 이 시계의 이름이 ‘인디언 타임’이라고 했다.


인디언 타임. 원주민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시간이 언제나 북미 사회의 표준 시간보다 늦다는 점을 원주민들 스스로 얼마쯤은 자조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원주민 마을을 방문해보면 하이다족에게는 하이다 타임이, 호피족에게는 호피 타임이 있게 마련이어서 약속 시간에 1시간 정도 늦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로 여긴다. ‘인디언 타임’이라는 말 속에는 바보 취급을 당해온 그들이, 역으로 자신을 바보 취급해 온 사람들을 향해 보내는 비웃음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자신들에게 가해져 온 모욕적인 언사인 ‘굼뜨다’, ‘느리다’와 같은 이야기를 표면적으로는 받아들였지만, 속으로는 주류 사회의 기계적이면서도 융통성 없는 시간 감각에 대해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내 친구인 모호크족의 엘렌 가브리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충분한 학습 과정인 거야. 예를 들어 예의라든가 관습이라든가 생활 기술을 익히는 방식들은 멀리 돌아가고 시간이 걸리고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문화가 생생히 이어져 온 것은 그러한 학습 방법 덕분이었다고 생각하네. 거기서는 느림이 바로 키워드인 셈이지.”


자동차 : 이 속도가 절약해 준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테크놀러지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 시간을 절약하면 그 절약한 만큼의 시간을 우리는 더 의미 있는 일에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열심히 새로운 테크놀러지를 사용해 시간을 절약해왔다. 하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그렇게 절약한 시간으로 우리는 정말 시간이 많아졌는가? 테크놀러지가 절약해주었어야 할 시간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바로 그것이 문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테크놀러지는 자동차다. 그 자동차가 온 세상에 불러일으키는 제반 문제의 심각성은 날로 더해가고 있는데도 많은 차의 자동차가 생산되고 판매된다.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자, 대기 오염 관련 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연간 추정치, 지구 온난화의 영향, 도로 혼잡에 따른 손실, 운동 부족으로 인한 비만 증가, 폐기물 증가, 도로 건설에 의한 환경 파괴…. 이루 다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지만, 여기서는 ‘자동차라는 테크놀러지가 절약해주었을 그 많은 시간들이 대체 어디로 가버렸는가’라는 점만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50년 전에 자동차로 1년간 평균 2천 킬로미터를 달렸던 독일인의 경우 현재는 1년간 평균 1만 5천 킬로미터를 달린다고 한다. 자동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온갖 신기술들로 인해 ‘벌어들인 시간’이 이제 더 먼 거리로, 더 큰 출력(에너지의 출력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시간을 절약해 결국 다른 에너지를 낭비한다는 뜻으로 쓰였다)으로, 보다 많은 비즈니스 미팅으로 전환된다. 그러니 아무리 도로를 더 만들어도 혼잡은 해소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동차 없이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다. 일본의 경우도 특히 시골에서는 점점 더 그런 추세가 되어가고 있다. 휴대전화나 컴퓨터가 없는 사람도 점점 더 살기가 불편해지는 사회가 돼가고 있다. 새로운 제품들을 사지 않으면 생활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사회의 틀 자체가 바뀌어 가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이 종래의 기술을 능가하거나 새로운 제품이 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이제 우리는 자유경쟁의 결과라고 너무 당연하게 믿어 버린다. 정치학자인 더글러스 러미스는 미국의 자동차 사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20년대까지 로스앤젤레스는 세계 유수의 통근 전차가 다니는 거리였다. 그런데 그것을 자동차 회사가 매수해서 그들은 점차 전차를 줄여가며 이를 불편한 것으로 만들어갔고, 마침내 적자로 만들어 이를 완전히 폐지해버렸다. 자동차 산업은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미국 전역의 철도와 지상 전차 회사를 매수하여 자동차 문화를 만들어갔다. 이는 대단히 폭력적인 역사다.”


덧붙여 일본의 사정에 관해 언급하며 러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구 철도는 적자로 인해 국민의 세금을 쓰고 있다는 비난을 듣고 있지만 만일 닛산이나 토요타가 고속도로를 전부 만들고 이를 관리하고 있다고 가정해본다면 과연 자동차 한 대 값은 얼마나 비싸지게 될까? 자동차가 편리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동차 사회가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책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여기-친밀감 : 익숙한 오늘 속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찾기
현대사회는 수많은 부정들 위에 세워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손꼽을 만한 것이 ‘지금의 자신’에 대한 부정이다. 그런 메시지는 대개 이런 식이다. “그대는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끝장이다. 더 나은 내일이 있으며, 더 나은 누군가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이런 식으로 ‘지금 여기’는 반드시 넘어서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넘어서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내일은 반드시 오늘보다 나아져야만 한다. 현대인의 ‘새로움’을 좋아하는 성향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일에 대한 중요성을 쉼없이 강조한다. 그것은 동시에 소비 의욕을 부추기고 상품 경제를 활성화하고 경제성장을 지탱하는 구조가 된다. 하지만 새로움의 생명력은 너무 짧다. 그리고 그때가 지나면 우리들은 그 다음의 ‘새로운 것’을 또 찾아 나서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친밀감 속에 있는 아름다움, 따사로움, 평온함과 같은 가치는 거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다. 친밀감은 진부하고 평범하고 너무나 흔해빠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한, 친밀함에 기초한 앎의 넓이와 깊이에는 한계가 없다. 경험의 무한함은 새로움 속이 아닌 친밀감 속에 존재한다.”


흔히 중남미 사람들이 ‘그것은 내일이 있지’라고 할 때 그들은 ‘지금 여기’를 충분히 즐기고 음미하며 살기 위해서 당장의 일들을 내일로 넘기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내일주의’는 사실 오늘을 무엇보다 소중히 하는 ‘오늘주의’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지금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과는 다르다. ‘찰나주의’는 내일을 희생물로 삼더라도 오로지 지금만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것은 얼른 보기에는 지금을 사는 일에 대한 강렬한 표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밖에 사랑을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능성으로 가득 찬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일이 있으니’와 동류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가 없으면 내일도 없고, 내일이 있기에 바로 ‘지금 여기’도 있다. ‘지금 여기’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내일의 자신이 존재한다. 내일의 자기 자신을 포용할 자세가 되어 있을 때만이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도 있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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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