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적 서울 이야기

   
배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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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사
   
21,000
2025�� 05��



■ 책 소개


정치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궁궐이 아닌 골목에서,
왕이 아닌 백성들에게서 조선시대 서울의 ‘진짜’ 모습을 읽다

이 책은 그동안 왕과 신하 중심의 정치사로만 알려졌던 조선시대 한양을 벗어나, 골목과 백성들의 일상 속에서 도시의 진짜 모습을 발견해 나간다. 한양은 소고기 소비가 엄청났던 미식의 도시였고, 조선 후기에는 현재처럼 주택 광풍과 부동산 가격 폭등이 벌어지는 등 생동감 넘치는 공간이었으며, 청계천은 도시 하수도로 쓰였고 이태원과 한남동은 공동묘지였다는 흥미로운 사실들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서울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책에서는 한양의 도시 구조와 경제, 명소부터 노비, 무당, 군인, 상인, 여성 등 역사책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의 삶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정치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자리에서 조선을 들여다보며, 현재 서울의 도시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생활사 기반의 인문 콘텐츠로 구성되어 있다.

따분하기만 했던 역사서에 지친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과거를 전부 파헤치며 그 오랜 시간의 지층 위를 다시 한번 걸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배한
저자 배한철은 매일경제신문 현직기자이자 경영학 박사이지만 문화재와 한국사 전문가로 널리 알려졌다.

국보에 깃든 아름다움과 국보가 간직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고문헌과 역사서를 깊숙이 탐독하고 전국 유적지를 구석구석 답사해 왔다. 동시에 옛적 장소와 스토리에 흠뻑 빠져 서울 전역을 도보로 활보하며 웅장한 지금의 모습 속에 감춰진 도시의 역사를 유물을 발굴하듯 찾아내고 있다.

‘한국사 스크랩’,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 ‘역사, 선비의 서재에 들다’,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무관의 국보’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 역사 교양서를 펴냈다.

2021~2023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24년부터는 성남학연구소 연구위원을 겸직하고 있다.

■ 차례 
들어가며

1부 조선의 서울, 한양
1장 낯선 조선, 뜻밖의 서울
2장 지옥보다 못한 최악의 헬조선
3장 혼돈과 격동의 역사
4장 발길 닿는 곳마다 명승지

2부 한양의 사람, 삶의 이야기
5장 조선의 주인, 경화사족
6장 같은 듯 서로 다른 인생
7장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8장 오백년 사직 지킨 이데올로기

 




옛적 서울 이야기


조선의 서울, 한양

낯선 조선, 뜻밖의 서울

소고기 맛에 흠뻑 취하다

- 조선은 소고기 왕국

가난하고 궁핍했던 조선시대, 소고기는 큰 솥에 물 한가득 붓고 끓여 멀건 국으로 겨우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 같지만, 뜻밖에도 그 시절 사람들은 소고기를 숯불에다 구워 먹었다. 사실 조선 사람들은 소고기 마니아였고, 조선은 한 해 40만 마리의 소를 도축하는 ‘소고기 왕국’이었다.


- 매년 얼마나 많은 소를 잡았나?

“우리나라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과 한양 5부 안의 24개 푸줏간, 그리고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 (중략) 서울과 지방에서 벌어지는 혼사, 연회, 장례, 활쏘기 할 때 잡는 것과, 법을 어기고 사사로이 도살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그 수를 대충 헤아려보면 500마리라는 통계가 나온다.”


‘북학의’에서는 이렇게 기록했지만, ‘승정원일기’의 통계는 이를 훨씬 능가한다. 영조 51년 3월 24일 ‘승정원일기’의 한 기사에는 무분별한 도축의 폐단을 고발하는 인천의 유생 이한운의 상소가 올라와 있다. 여기에 도축 규모가 상세히 언급돼 있다.


“서울에는 24개의 현방이, 지방에는 360개의 고을, 26개의 큰 병영과 여러 작은 병영, 여러 진보, 여러 우관이 도축한 것이 이미 500여 마리를 넘는다. 서울과 지방의 불법 도축에 의한 것이 또 500여 마리를 넘으니 이를 합치면 하루에 1,000여 마리가 되고 한 달이면 3만 마리가 넘는다.”


- 소 한 마리가 쌀 4석 가격

조선 사람들이 소고기에 매료된 것은 솟값이 너무 저렴해서였다. 1659년, 조정은 번식된 소가 너무 많아 고민이었다. ‘현종개수실록’에서 다음해인 효종 10년 8월 17일 기사에서 대사간 이정영이 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뢴다.


“소가 많이 번식되고 나서는 도리어 민간의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중략) 죽음에서 구제되기에도 겨를이 없는 백성들이 소를 사육하여 살찌게 한다는 것은 사정이 더욱 어렵습니다.”


우역이 발생해 소가 대량폐사되면 도축금령이 강화되고, 또 몇 년 뒤에는 소의 수가 다시 증가하는 사이클이 반복됐다. 우역이 발생하지 않은 평소의 솟값은 대략 20냥 수준이었다. ‘승정원일기’ 영조 51년(1775) 3월 24일 기사에서는 “예전에 솟값은 10냥을 넘지 않았고, 지금은 30냥 정도 한다”고 했다. 이를 쌀값과 비교하면, 개략적인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할 수 있다. ‘정조실록’ 정조 18년 12월 30일 기사에 따르면, 쌀 한 석(144kg)당 가격은 4~6냥이며, 평균 5냥이다. 소 한 마리 가격이 쌀 4석밖에 안 된다는 계산이다.


요즘 물가로 쌀 한 석 가격이 36만 원 정도라고 가정할 때, 소 한 마리는 144만 원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지금과 조선시대 쌀값의 절대 비교는 어렵지만 솟값이 저렴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 사람들이 소고기를 자주, 그리고 많이 먹을 수 있었던 이유다.


지옥보다 못한 최악의 헬조선

한양은 호랑이 소굴

- 인구 10만의 거대도시에 맹수 우글우글

인구밀도가 높았던 한양은 놀랍게도 호랑이가 우글대는 맹수의 소굴이기도 했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는 속담도 있듯 인왕산은 호랑이 출몰이 빈번했다. ‘인조실록’ 인조 4년 12월 17일 기사는 “인왕산 성곽 밖에 호랑이가 나타나 나무꾼을 잡아먹었다”고 했다. 이 호랑이는 성안으로 들어왔다가 결국 도성을 수비하는 훈련도감과 총융청의 군사들에게 포획됐다. ‘승정원일기’에도 인왕산 호랑이가 허다하게 언급된다.


- 도성, 궁궐 출몰하며 인명과 가축 살상

한양은 지형적으로 내사산과 외사산에 둘러싸여 있어 야생의 호랑이가 서식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산속에 낮에 숨어 살다가 밤이 되면 먹잇감을 노리고 수시로 민가에 내려와 사람과 가축을 살상했던 것이다.


한양의 호환은 조선 후기에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영조실록’ 영조 10년 9월 30일 기사는 “사나운 호랑이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140명을 물어 죽였다”고 했다. “피해는 서울, 경기지역이 더욱 극심해 식자들이 걱정한다”고 실록은 설명을 덧붙인다.


- 기후변화, 서식지 파괴로 인간 영역 침범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각사등록’ 등 문헌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숙종에서 정조 대 도성, 경기지역의 호환기록은 숙종 52건, 경종 9건, 영조 80건, 정조 48건 등 총 189건으로 나타난다. 이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같은 기간, 강원과 경상은 그 다음으로 각각 172건, 85건의 피해를 입었다.


이 시기 호환이 급증한 것은 기상이변과 무관치 않다고 분석한다. 17세기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전대미문의 대기근이 덮치고 전염병마저 유행해 대량의 아사자와 병사자가 생긴다. 뿐만 아니라,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우역이 야생동물에게로 퍼지면서 호랑이 먹이가 급감했다. 서식 환경이 파괴되면서 호랑이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호랑이의 개체수도 늘어났다. 청나라는 1681년부터 1820년까지 전 황실과 대신들을 이끌고, 허베이성 위장현의 황실 사냥터에서 대규모의 가을수렵 행사를 무려 105차례나 벌였다.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는 사냥을 통해 호랑이 135마리, 표범 25마리를 잡았고, 6대인 건륭제는 1752년 위장의 악동도천구에서 호랑이를 사냥한 것을 기념해 ‘호신창기’라고 쓴 비석을 남겼다. 호랑이는 청나라의 이런 대대적인 사냥을 피해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대거 이동했던 것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명승지

승과 시험 보려는 스님 벌판, 강남 삼성동

- 유교국 조선의 불교사찰

강남구 삼성동의 봉은사는 서울의 대표적 도심 사찰로서 불자는 물론 일반 관광객도 즐겨 찾는 명소다. 봉은사는 조선 11대 중종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와 깊은 인연이 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12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하며 불교중흥을 선포한다. 봉은사를 중흥의 중심도량으로 삼고 설악산 백담사의 보우를 불러들여 주지에 임명한다. 그녀는 폐지된 선종과 교종의 불교 양대 종파를 부활시키고, 승려시험인 ‘승과’도 재개했다. 승과는 봉은사에서 거행됐고 시험이 있을 때면 봉은사 앞 벌판은 수천 명의 승려가 가득 메웠다. 이로 인해 삼성동 일대는 ‘중의벌’, 한자로는 ‘승과평’으로 불렸다.


봉은사는 뜻밖에도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시대 세종 때 창건된 절이다.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부인 신씨가 남편의 명복을 빌며 처음 지었고, 연산 4년에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자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가 남편 무덤인 선릉의 원찰로 재건축했다.


- 유교국 조선에서 불교 오히려 성행

귀천을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살아, 부귀와 무병 등 길운을 바라고 죽어서는 명복을 염원한다. 자기 수양을 강조하는 유교는 이에 대한 본질적인 해답을 주지 못했고 따라서 지속적인 국가적 탄압에도 불교는 소멸하기는커녕 오히려 성행했다. 불교 대중화의 중심에는 역설적으로 조선 왕실이 있었다.


- 이성계, 살해된 자식 그리며 절을 창건하다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번과 방석,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가 살해된다. 이성계는 비명에 간 자식들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흥덕사를 지었던 것이다. 흥덕사는 도성 십승에 꼽히던 절이었다. 경내에 맑은 연못이 있고 여름이면 이곳에 연꽃이 가득했다. 조선 전기 시인 성임은 “구름 비단 눈앞에 어지러이 피어있고, 맑은 향기 끊임없이 모시옷에 스며드네”라며 감흥에 젖었다. 하지만 폭군 연산군 때 폐사돼, 복원되지 못하고 절터에 민가가 형성됐다. 흥덕사 터는 현재 서울과학고와 종로구 시설관리공단의 일원이다.


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는 한국 불교계의 상징적 사찰이지만 그 역사는 80년에 불과하다. 애초 조계사 터에는 1906년 설립된 보성고등학교가 있었다. 불교계는 1925년 경영난에 빠진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해, 이듬해 학교를 넓은 혜화동으로 옮긴다. 1930년대 중반, 일본 불교 조동종이 박문사(현 신라호텔)를 총본산으로 하여 조선불교를 병합하려고 하자 한국 불교계는 반대에 나섰고, 31본산 주지 총회를 열어 한국불교 총본산 건립을 추진한다. 1938년 보성고 자리에 절을 완성해 태고사라 하고 1940년 7월 총독부의 최종 인가를 얻었다. 1962년 통합 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을 설립하고 절 이름도 조계사로 개칭했다.


- 보도각 백불, 신통한 기도처로 소문나다

서울 사찰 중 기록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이 확인되는 절은 장의사다. 신라 태종 무열왕이 백제와의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의 넋을 기리기 위해 태종 무열왕 6년에 창건했다. 세검정초교 운동장 한구석에 높이 3.63m의 통일신라 시기 ‘장의사지 당간지주(보물)’가 남아있다. 장의사지에서 홍제천을 따라 1.5km 남짓 하류에 보물 ‘보도각 백불’이 위치한다. 보도는 ‘불법으로 널리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백불의 정식 명칭은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이다. 거대한 바위 면에 조각된 백불은 5미터에 가까운 크기이며 제작시기는 고려 후기로 본다.


백불은 한양 인근에서 신통한 기도처로 이름나 여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불상은 흰옷 차림의 비구니로 현신해 산모와 아기를 보살펴주는 ‘백의관음’ 형상이다.



한양의 사람, 삶의 이야기

조선의 주인, 경화사족

한양 인구 절반이 노비였다?

조선시대 노비는 인격체가 아닌 짐승으로 취급받던 신분 계층이었다. ‘말을 알아듣는 가축’으로서 재산목록 중 가장 값나가는 귀중품이었다. 양반 사족들은 재산 증식을 위해 노비를 늘리는 데 혈안이 됐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의 ‘이애 남매 화회문기’를 통해 그 적나라한 실상을 볼 수 있다. 성종 25년 이애 남매가 부친의 사망 후 재산을 합의로 분할하고 작성한 문서다. 이애 남매의 부친 재령 이씨 이맹현은 문과에 급제해 이조참판을 지냈고 청백리에 봉해졌다. 화회문기에 따르면, 놀랍게도 이맹현이 가진 노비의 수는 한성부와 전국 71개 군현에 걸쳐 총 758명이다. 청렴한 관리의 상징이라는 청백리가 이런 수준이니 다른 고관과 벌열가의 노비가 얼마나 많았을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이맹현의 노비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서울이 147명이며 다음으로 함경도 함흥 67명, 경상도 함안 49명, 전라도 임실 32명, 경기도 임진 28명 등이었다. 지역별 분포를 보면, 서울이 제일 많다. 서울은 조선 팔도의 여러 고을 중 노비가 가장 많은 노비의 도시였던 것이다.


- 중인, 상민, 도시 상업 발달과 함께 급부상

중인은 애매한 신분이다. ‘홍재전서’ 제49권 ‘명분’에서 정조는 중인으로 장교, 의원, 역관, 율관, 화원, 왕실기록물 작성 관원인 사자관 등의 기술관을 꼽고 있으며 이와 유사한 부류로 ‘시정’이라 해서 각사의 서리와 시전상인 등을 언급한다. 이 기준에 근거해 ‘조선시대 서울 도시사’는 18세기 중인 신분의 인구를 기술직 1,700여 명, 중앙관청의 하급관리인 경아전 1,500명, 군영 장교가 4,005명, 시전상인이 6,000여 명 등 총 1만 3,200여 명으로 추계했다.


상민 역시 중앙관청의 하급 관속이 되기는 했지만, 소상인, 수공업자, 임노동자, 군역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봉건적 구속이 느슨해지며 지방에서 유입된 하층민들이 상민에 합류됐다. 조선은 농민이 천하의 큰 근본인 사회였지만 농토가 희박한 서울에서는 상민들이 주요 주민으로 성장했다.


- 노비들은 늙고 병들어야 비로소 해방

서울의 공노비 수가 모자라면 지방의 공노비를 서울로 불러올려 노역을 시켰다. 이들의 서울 생활은 혹독했다. ‘세종실록’ 세종 5년 5월 28일 기사는 “(노비들이) 잡혀서 서울에 올 때 스스로 지고 온 쌀은 두어 말에 불과하고, 서울에 들어오는 날 돌아가 쉴 데도 없다. 혹 관아 건물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비바람을 면하지 못하고 깔 자리도 없으며, 밥을 지어 먹기도 어렵다. 열흘쯤 되면 지고 온 식량도 다 떨어져 춥고 배고프니 부득불 도망하게 된다”고 했다. 서울 각사 노비는 궁궐과 각 관사에 소속돼 잡역에 종사했고 관원이 외출할 때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기도 했다. ‘경국대전’ 규정에 의하면, 총 161개 기관에 3,629명이 배정됐다.


노비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주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을까.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연령군 소유 준호구 호적증명서’에 의하면, 영조의 이복동생인 연령군에 예속된 서울 사환노비는 24명(남자 16명, 여자 8명)이다. 연령분포는 30대가 46%로 절반가량 됐고, 20대와 40대, 50대는 17~21%로 비슷했다. 사환노비는 주인집 내에서 거주하며 노동에 동원됐던 노비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10대 이하와 60대 이상의 노비가 없다는 점이다.


같은 듯 서로 다른 인생

조선에서 가장 천한 무당이 국정농단

- 무속의 늪에 빠진 유교국

나라에 망조가 든 고종의 시대에는 뜬금없이 관우신앙이 풍미했다. 고종비 명성황후 민씨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극한의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죽음의 공포와 절망 속에 병적으로 미신에 집착했다. 다음은 황현의 ‘매천야록’내용이다.


“명성황후는 세자의 복을 빌기 위해 명산의 사찰에 두루 기도를 드렸다. 이에 무당과 소경들이 거리낌 없이 활개를 쳐 군읍에서 이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잔치가 이어졌다. 금강산을 세상에서 일만이천봉이라 하는데 봉우리마다 바치는 제물이 돈으로 만 꿰미에 이르렀다.”


- 명성황후, 극한 권력투쟁 속 미신을 맹신하다

고종 19년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황후는 친정집이 풍비박산 났다. 그녀마저 궁녀차림으로 장호원까지 몰래 도망쳐 겨우 목숨을 보전했다. 이때 황후는 용하다는 이씨 무녀의 소문을 듣고 그녀를 불렀다. 이씨 무녀는 명성황후가 곧 대궐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사이 청나라가 개입해 반란을 진압하면서 명성황후는 과연 피란 50여 일 만에 환궁했다. 예언이 적중했다고 믿은 명성황후는 무당을 궁궐로 데려왔다. 무당은 자신이 관우의 영을 받은 딸이라며 황후를 현혹해 현 혜화동 서울 과학고인 송동에 관우사당인 북관묘를 짓고 살았다. 고종은 ‘진실로 영험하다’라는 뜻의 ‘진령군’이라는 작호까지 내렸다. 진령군은 명성왕후의 전속무당으로 황후를 위해 수시로 점을 치며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 황후 전속 무당, 인사/국정도 입맛대로

벼슬은 진령군의 말 한마디에 달렸고, 고관들은 앞다투어 그녀에게 아첨했다. 조선말 시인, 문장가인 김택영의 ‘소호당집’은 “(명성황후는) 진령군이 말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니 내외 관직의 제수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많았다. 사대부들 중 간사하고 우둔한 자들은 분분히 좇아서 심지어는 어머니니 누님이니 하고 부르는 자들까지 있게 되니...”라고 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고종 21년 갑신정변이 터지자, 북묘로 달려가 의지하기도 했다.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자 이번에는 윤씨 무당이 고종의 후궁 엄비를 움직여 국정을 흔들었다. 윤씨 무당 역시 관우 딸을 사칭해 현령군에 봉해졌다. 광무 6년 새로운 관우사당인 서묘를 현 서대문구 천연동인 이궁동에 세웠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는 “현령군이 받드는 관묘는 이궁동에 있었는데 세상에서 이궁대감 전내신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진령군은 왕비의 명령으로 송동의 북묘에 거주하였으며 세상에서 진령군 대감이라 하였다”고 했다. 서묘는 융희 3년, 북묘는 1913년, 각각 현 종로 숭인동안 동묘로 합사돼 철거됐다.


이 둘이 끝이 아니었다. ‘조선무속고’는 “이씨, 윤씨 뒤에 또 수련이라는 여자 무당이 있어 대궐을 출입하며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의례를 했고, 두 아들은 모두 고관이 되었다”고 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서울 공식 공동묘지, 마포/이태원

- 조선말 서울은 ‘무덤의 도시’

매장이 유일한 장례 방식이던 조선시대 한양은 무덤의 도시나 다름없었다. 한양도성과 성저십리는 묘지를 둘 수 없었지만, 국가 통제가 느슨해지는 조선 말기로 접어들면 금지법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사람이 거주하지 않거나, 농사를 짓지 않는 마을 뒷산의 땅은 묘지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묘지를 두고 벌어지는 산송도 비일비재했다.


- 일제, 식민지 도시개발 위해 묘지 통제

조선총독부는 이에 따라 1912년 6월 20일 묘지사용을 통제하는 ‘묘지 규칙’을 발표한다. 총독부가 인정한 공동묘지 외에는 사유지라 하더라도 묘지를 설치할 수 없고, 한국 사회에서 금지됐던 화장을 합법화하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어, 1913년 9월 1일 ‘경성 공동묘지 19개소’를 고시한다.


미아리(강북 미아), 신당리(중구 신당동), 이태원/한강(용산 이태원동, 한남동), 두모면 수철리(성동 금호동/옥수동), 연희(마포 연희동), 동교(마포 동교동), 만리현 봉학산(마포 아현동), 염동 쌍룡산(마포 염리동), 은평면 신사리(은평 신사동)는 이미 조선말 이후부터 광범위한 집단매장지가 있던 지역이다. 동대문 이문, 서대문 남가좌, 종로 평창, 여의도, 광진 능동도 19개 묘지에 포함됐다. 경성공동묘지는 도시 확장 계획에 포함되면서 단계적으로 주택지구로 변화해 갔다. 묘지는 민가와 달리 대단위 토지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개발지로 주목받았다.


- 신당동 묘지, 고급 주택지로 상전벽해

물이 흐르는 수문과 가깝다고 해서 수구문, 죽은 사람을 내보낸다고 해서 ‘시구문’으로 불렸던 광희문 밖의 중구 신당동은 조선시대부터 묘지가 형성됐다. 무당이 모여 살아 ‘신당’으로 불렸다가 갑오개혁 때 ‘신당’으로 개명됐다. 광희문 문밖 좌우에 조선인 공동묘지가 존재했고, 청구동 쪽은 일본인 묘지로 사용됐다. 신당리 묘지는 1920년대 전원주택지 건설이 추진되며 1929년 폐지되고 분묘는 홍제동(서대문), 수철리(금호/옥수동) 묘지로 이장됐다. 신당동 주택단지는 14만 평 규모로 개발돼 일본인과 상류층 조선인에게 공급됐다. 자동차도로, 상하수도, 학교, 놀이터 등의 편의시설과 도시 기반 시설을 갖췄고,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경치와 공기가 좋은 점이 부각돼 성공리에 분양됐다.


이태원 묘지는 이태원동, 한강동(현 한남동)에 산재했다. 1920년대 초반 분묘가 2만기를 넘어 포화 상태에 이르고 1930년대 접어들면 4만기를 초과했다고 당시 신문이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1906년 군사시설인 용산기지가 조성되면서 배후 주거단지로 이태원 묘지 활용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신당동 주택 조성 사업 성공 이후 삼각지에서 신당리까지 이어지는 남산 주회도로(현 이태원로)가 개통되며 1939년 이태원 묘지는 한남 토지구획 정리 지구로 지정되고 12만 4,000평의 토지가 고급 주택단지로 변모했다. 이태원 묘지의 무덤은 망우리와 미아리, 신사리로 이전했다.


- 이태원/한남동 묘터, 서울 부자 동네 부상

이태원 공동묘지도 신당동처럼 일본인을 위한 전원도시를 지향했지만, 일본이 패망하면서 광복 이후 서울의 부촌으로 자리 잡는다. 보광동의 이태원 모범묘지는 1936년 조성돼 1950년 폐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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