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사략

   
증선지(역: 소준섭)
ǻ
현대지성
   
22000
2015�� 09��



■ 책 소개


조선 시대 선인들의 필독서!
고전에서 배우는 리더십과 삶의 지혜


중국 고대시대부터 송나라가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지은이는 송나라 말기 때의 사람 증선지이다. 그는 사마천의 『사기』부터 탁극탁이 지은 『송사』까지 당시 중국에 존재했던 정사(正史) 18가지 책을 요약해서 알기 쉽게 편찬하였다. 그래서 『십팔사략』이라는 책 제목은 ‘18가지 역사책을 요약하였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십팔사략』은 우리나라에서 조선 시대 때부터 선비들에게 필독서가 된 책이다. 6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랑받아온 고전 중의 고전인 것이다.


오늘 『십팔사략』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인간들의 치열했던 역사를 되짚어 본다는 의미에서, 우리 역사와 숨결을 가까이 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또한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시정 잡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양한 인간들의 지혜와 삶의 보고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높다.


■ 저자 증선지
송나라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에 살았던 학자로서 송나라 15대 도종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 관리를 비롯하여 법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정무를 지극히 공평하게 집행하여 명성이 높았다. 특히 그는 송나라 충신 문천상의 후배로서 충절로 가득 찬 학자였는데, 불행하게도 그의 시대에 조국 송나라가 몽골에 의해 멸망당했다.


송나라가 멸망한 후 그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여 이 『십팔사략』을 집필하였으며, 92세를 일기 로 세상을 떠났다.


■ 역자 소준섭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상하이 푸단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 대학교에서 대우교수로 강의하였고, 현재 국회도서관 중국 담당 조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기』(서해문집), 『중국을 말한다』(논형, 2012 문광부 우수학술도서), 『사마천 경제학』(서해문집, 2013 문광부 우수학술도서), 『왕의 서재』(어젠다, 2013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제국의 부활』(한울), 『청소년 사기』(서해문집, 2014 출판문화진흥원 권장도서) 등 다수가 있다.


■ 차례
머리말


 제1장 3황 5제의 전설시대
 제2장 하나라
 제3장 은나라
 제4장 후세의 모범, 주나라
 제5장 춘추시대
 제6장 전국시대
 제7장 초한지제8장 한나라
 제9장 아버지와 아들
 제10장 우환은 나라 밖에 있지 않고 나라 안에 있다
 제11장 한나라의 멸망
 제12장 후한後漢시대
 제13장 서진西晋 시대
 제14장 동진東晋 시대
 제15장 남북조南北朝 시대
 제16장 수隨나라 시대
 제17장 당唐나라 시대
 제18장 5대10국五代十國 시대
 제19장 송宋나라 시대
 제20장 북송北宋 시대
 제21장 남송南宋 시대


 중국 역사 연표


 




십팔사략


머리말

『십팔사략(十八史略)』은 중국 고대시대부터 송나라가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지은이는 송나라 말기 때의 사람 증선지이다. 그는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범엽의 『후한서』, 진수의 『삼국지』, 방현령의 『진서』, 심약의 『송서』, 소자현의 『남제서』, 요사렴의 『양서』 및 『진서』, 위수의 『후위서』, 이백약의 『북제서』, 영호덕분의 『후주서』, 위징의 『수서』, 이연수의 『남사』, 이연수의 『북사』, 구양수의 『당서』, 구양수의 『오대사』, 그리고 탁극탁이 지은 『송사』까지 당시 중국에 존재했던 정사(正史) 18가지 책을 요약해서 알기 쉽게 편찬하였다. 그래서 『십팔사략』이라는 책 제목은 18가지 역사책을 요약하였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증선지는 송나라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에 살았던 학자로서 송나라 15대 도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 관리를 비롯하여 법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정무를 지극히 공평하게 집행하여 명성이 높았다. 특히 그는 송나라 충신 문천상의 후배로서 충절로 가득 찬 학자였는데, 불행하게도 그의 시대에 조국 송나라가 몽골에 의해 멸망당했다.


송나라가 멸망한 후 그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여 이 『십팔사략』을 집필하였으며,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 『십팔사략』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인간들의 치열했던 역사를 되짚어 본다는 의미에서, 우리 역사와 숨결을 가까이 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또한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시정잡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양한 인간들의 지혜와 삶의 보고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지대물박(地大物博)한 중국 대륙을 무대로 각양각색의 인간군(人間群)들이 종횡무진하게 펼치는 파란만장한 역사는 실로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는 듯한 소설적 재미를 제공할 것이다.


아울러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하여 역사란 결국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인간들의 지모와 힘을 다한 궤적들의 총화가 바로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이란 무엇이며, 과연 인생이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끊임없이 부닥치게 될 것이다. 동시에 그에 대한 해답도 곳곳의 인물과 사건들에 의해서 암시적이면서도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후세의 모범, 주나라(?~256 B.C.)

강태공

주나라 무왕은 성이 희씨요, 이름은 발(發)로서 후직의 16대 손이었다. 후직의 어머니는 강원으로 제곡의 부인이었다.


어느 날 강원이 들판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 그 발자국을 밟았다. 그 후 기(棄)를 낳게 되었는데, 불길한 아이라 하여 길거리에 내다벼렸다(이렇게 아이를 버렸기 때문에 버릴 기(棄)자를 이름으로 쓴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나가는 소와 말이 밟지 않고 피해 갔다. 이번에 산 속으로 데려가 버리려 하였는데, 마침 사람이 많아서 버리지 못했다. 걸음을 옮겨 이번에는 얼어붙은 강 위에 놓아 두었다. 그러자 새들이 날아와 날개로 덮어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에 강원은 하늘이 보살펴 주는 아들이라 생각하고는 아기를 안고 돌아왔다.


기는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어른스러웠다. 또 풀이나 나무 심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어른이 되자 곧잘 땅을 살펴보고서 무엇이 그 땅에 적합한지를 연구하곤 하였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요임금과 순임금한테서 봉토를 받고 희씨 성을 받았다.


그 후 8대 후손인 고공단보에 이르렀을 때 북쪽의 흉노족이 대규모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남쪽 기산 지방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때 백성들이 "고공단보는 참으로 어진 인물이다. 그분을 놓쳐서는 안 된다."라면서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업고서 모두 고공단보 일행을 뒤따랐다.


고공단보의 장남은 태백이고 둘째는 우중이라 했으며, 막내가 계력이었다. 계력에겐 창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창이 태어날 때 붉은 새가 붉은 책을 물고 와서 산모의 방 위에 앉는 상서로운 징조가 났다.


이에 태백과 우중은 아버지 고공단보가 막내인 계력에게 왕위를 넘길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고 남쪽 오나라 지방으로 가서 그곳 풍습에 따라 머리를 깎고 몸에 문신을 하며 계력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계력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서백창으로 후에 주나라 문황이 된 인물이다. 그의 높은 덕을 잘 알고 있던 제후들은 그가 즉위하자 앞을 다투어 그에게 복속해 왔다.


한편 동해 바닷가에 여상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70세가 되도록 가난하게 살고 있었는데 강에서 고기를 낚으며 주나라까지 유랑해 왔다. 너무 가난해 아내까지 도망쳐 버린 상태였다. 그가 바로 강태공이다.


어느 날 서백이 사냥을 나가려고 그날의 운세를 점쳐보니 이상한 점괘가 나왔다.


용도 아니요 이무기도 아니며 곰도 아니다. 또한 호랑이도 아니요 표범도 아니다. 잡은 것은 패왕을 보필할 신하이다.


그날 서백은 위수 강가에서 여상을 만났다. 그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눈 서백은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선왕이신 태공(太公)께서는 항상 후세에 반드시 주나라에 성인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의 힘으로 주나라는 번성하리라고 하셨는데, 당신이 바로 그 성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서백은 여상을 수레에 태워 궁궐에 모신 후, 그를 태공이 바라던 성인이라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스승으로 모시면서 언제나 그의 말을 경청하며 따랐다.


은나라를 멸망시키다

서백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발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무왕이다. 당시 은나라 주왕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는데, 마침내 무왕은 은나라를 치기로 하고 친히 선두에 나서 출전하였다.

이때 은나라의 충신 백이와 숙제가 무왕을 찾아와서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서 "당신은 부친께서 돌아가시고 아직 3년상도 치르지 못했는데 이렇게 전쟁을 벌이다니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소? 또 신하된 몸으로 왕을 죽이려 하다니 어찌 인(仁)이라 하겠소?" 하고 말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신하들이 그들을 베려 하자, 태공망이 제지하고 나섰다. "이분들은 의로운 분들이다. 공손히 모시도록 하라."


그 뒤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주나라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고 오직 고사리만 먹다가 끝내 굶어 죽었다. 그들이 남긴 채미가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도다!

포악함으로 포악함을 바꾸면서도

그것이 그릇된 줄 모르네.

신농씨와 순임금, 우임금이

홀연히 사라지니,

내 어디로 돌아갈거나!

아! 사라지리라.

운명이 이제 다했나 보다.


드디어 목야 지방에서 은나라와 주나라의 운명적인 결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 전투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주왕의 잔인한 폭압정치에 신물이 나 있던 은나라 군사들이 오히려 창을 거꾸로 잡고 주나라 군대를 환영하며 맞아 들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주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추대하였다.


경국지색 포사

선왕이 재위 46년 만에 죽은 후, 아들 유왕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거리에서는 아이들이 이런 동요를 불렀다.


산봉나무로 만든 활과 가느다란 풀로 만든 화살통,

주나라를 망치네 주나라를 망치네


마침 그 무렵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을 팔고 다니는 부부가 있어 왕이 곧장 그들을 잡아들이도록 명령했다. 그 부부는 놀라 달아나다가 밤에 길에서 울고 있는 어린 계집아이를 보았다. 그들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 그 아이를 데리고 포나라로 도망갔다.


그 뒤 포나라 사람이 유왕에게 죄를 지은 일이 있어 용서를 빌기 위해 여자를 바쳤다. 그 여자는 옛날 뽕나무 활장수 부부가 주워 기른 포사였다. 유왕은 포사를 보자마자 흠뻑 빠져들었다.


포사는 웃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유왕이 웃게 만들려고 애를 써도 절대 웃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병사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봉화가 올려졌다. 봉화가 올려지면 외적이 침입했다는 표지였기 때문에 각지에서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러나 와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 이에 제후들과 군사들은 어이없어하며 제각기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웃지 않던 포사가 제후들과 군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웃어대는 것이 아닌가!


그날부터 봉화가 시시때때로 올려졌다.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하여 유왕이 시킨 것이었다. 봉화가 오를 때마다 포사는 크게 웃어댔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로 북쪽에서 견융족이 밀물처럼 쳐들어왔다. 유왕은 황급히 봉화를 올렸지만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마침내 유왕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여산의 산기슭에서 견융족에게 피살되었다. 포사는 사로잡혀 견융족 추장에게 넘겨졌다.



춘추시대(770~403 B.C.)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

관포지교

관중은 제나라의 영수 기슭에 살던 사람이었다. 관중에게는 포숙아라는 젊을 때 사귄 친구가 있었는데, 포숙아는 그의 현명함을 잘 알고 있었다. 관중은 매우 가난했으므로 포숙아를 몇 번이나 속였지만 포숙아는 언제나 그를 후대하였다.


그 무렵 제나라의 양공은 무도한 군주였다. 그는 노나라의 환공을 술에 취하게 만든 후 살해하고 환공의 부인과 정을 통했으며 걸핏하면 신하들을 마구 살상하였다. 양공의 동생들은 그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이웃나라로 망명해야 했다.


이때 포숙아는 공자 소백을 따라 망명하고, 관중은 공자 규와 함께 함께 망명하였다. 그 후 무도한 군주는 마침내 암살되었다. 소백과 규는 그 소식을 듣고 새 군주가 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규와 함께한 관중은 별동대를 거느리고 매복하고 있다가 소백을 화실로 맞춰 쓰러뜨렸다. 그러고 나서 공자 규와 함께 6일 만에 제나라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백이 이미 귀국하여 군주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제나라 환공이다. 관중의 화살은 허리띠의 쇠장식이 있는 곳을 맞췄던 것이다. 소백은 화살을 맞자 죽은 척하고 급히 영구차를 타고 제나라로 돌아왔던 것이다.


즉위한 소백은 공자 규가 망명해 있던 노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후 노나라에 사신을 보내 명령하였다.


"공자 규는 피를 나눈 형제이므로 차마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으니 노나라에서 그를 죽여 주었으면 한다. 관중은 나를 죽이려 했던 원수이므로 송환시켜 마음껏 욕보인 후 죽여 젓을 담글 것이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노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궁지에 몰린 노나라는 할 수 없이 규를 죽이고 관중을 붙잡아 제나라로 보냈다. 이때 포숙아는 거듭 환공을 설득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제나라만 다스릴 생각이시면 모르겠지만, 만약 천하를 다스릴 패자가 되려 하신다면 반드시 관중이 있어야 합니다. 관중을 중용하는 나라가 천하를 다스릴 것입니다."


관중을 붙잡아 즉시 처형시키려단 환공은 마음을 바꿨다. 관중은 대부의 자리에 기용되었고 환공을 보좌하게 되었다. 뒷날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가난할 때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몫을 더 많이 가졌지만 그는 나를 욕심 많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가 실패한 적도 있었지만,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일의 성패란 처지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 벼슬에 나갔다가 모두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나를 무능력하다고 하지 않았다. 때를 만나지 못했던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 번의 전쟁에서 모두 패하여 달아났지만, 그는 나를 겁쟁이로 몰아세우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로 나를 낳아 준 사람은 부모지만, 알아 준 이는 포숙아였다."


포숙아는 관중을 천거한 뒤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포숙아의 사람 보는 눈을 더 칭찬하였다.



전국시대(403~221 B.C.)

진시황

시황제

겨우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진시황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건설하였다.


어느 날 진시황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천하는 이미 통일되었는데 이 크나큰 업적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는 이 제왕이라는 호칭을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겠소. 그대들의 의견을 말해 보시오."


그러지 신하들은 입을 모아 아뢰었다. "폐하의 덕은 삼황보다 크고, 그 공적은 오제보다 높사옵니다. 옛날 태곳적에 천황, 지황, 태황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태황이 가장 존엄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왕을 태황이라 부르는 것이 어떠하온지요."


이에 진시황이 말했다. "그러면 태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따서 황제(皇帝)로 칭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짐(朕)이라 칭할 것이다."


그 후 진시황은 다시, "짐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기로 한다. 짐의 뒤는 차례대로 2세, 3세 등으로 하여 이를 천만세까지 이어나가도록 하자."고 하여 진나라가 영원히 존재할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겨우 2세에 이르러 멸망했고 15년이라는 짧은 왕조시대를 마쳤다.



한나라(202 B.C.~8 B.C.)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

유방이 고릉 지방에서 항우의 기습에 휘말려 궁지에 몰리게 되자 장량은 한신을 부르게 하였다. 한신은 해하의 마지막 전투에서 총 대장이 되어 항우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렇게 하여 드디어 한나라가 천하를 제패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나라 5년 정월에 한신은 초나라 왕으로 임명되어 초나라로 가게 되었다.


한신은 예전에 자기에게 밥을 먹여 주었던 무명 빨래하던 노파를 불러 천금을 하사하였고, 한때 신세를 졌던 남창의 유지에게는 백 전을 주며 말했다. "당신은 소인이오. 은혜를 베풀려면 끝까지 베풀어야지……."


또한 자기에게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가게 했던 건달도 찾아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에게 벼슬까지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 사나이는 장사이다. 그러나 나를 욕보이던 때 내 어찌 이자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하지만 죽여본들 내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꾹 참았었다. 참으로 이 사나이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한나라 6년, 초나라 왕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비밀 보고가 들어왔다. 그러자 고조 유방은 전국 시찰에 나선다고 알리면서 모든 제후들을 초나라 남쪽의 운몽이라는 큰 호숫가에 모이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어디까지나 한신을 체포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신은 이를 눈치 채지 못했지만, 유방이 초나라의 운몽으로 행차한다는 것이 불길하게 여겨졌다.


난 문책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 아무튼 고조를 만나고 보자. 그래도 혹시 체포당하기라도 하면……."


한신은 매우 초조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한신에게 제안했다. "종리매를 처치한 후에 고조를 만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종리매는 항우의 부하였으나 한신의 고향 친구로 항우가 죽은 후 한신에게 온 장군이었다. 그런데 유방은 종리매에게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초나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초나라에 명령하여 종리매를 체포해 놓도록 지시했었다. 한신이 종리매를 만나 의논하자 종리매가 크게 화를 냈다.


"한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나를 잡아갈 생각이라면 내 스스로 여기에서 목숨을 내놓겠소. 하지만 내일은 당신의 차례가 될 것이오."


그리고는 한신을 한참이나 비난하더니 스스로 목을 찔렀다. 한신은 그 목을 가지고 고조를 만났다. 유방은 즉시 한신을 잡아 포박하였다. 이에 한신이 탄식했다.


"과연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고(兎死狗烹), 하늘을 나는 새가 없어지면 활을 창고에 처박아 놓으며, 적국을 모두 함락시킨 후에는 공신들을 처치한다는 말이 맞구나.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이제 나를 잡아먹는 것인가!"


한신은 체포되어 낙양으로 호송되었다. 낙양 도착 후에 유방은 그의 죄는 용서하고 제후로 격하시켜 회음후로 불렀다. 한신은 그 후 유방의 경계가 심함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밤낮으로 유방을 원망하며 불만을 품었다.


어느 날 한신이 장군 번쾌의 집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번쾌는 한신을 맞아 신하의 예를 갖추며 스스로 신이라 불렀다. "대왕께서 신의 집에 들러 주시니 황공하옵니다."

그래도 한신은 그 집을 나오면서 스스로를 비웃었다. "내가 오래 살다 보니 끝내 번쾌 따위와 같은 서열이 되었구나!"



한나라의 멸망

왕망이 나라를 빼앗다

원제 말년에 대사마 왕근이 사직하고 대신 원후의 조카인 왕망이 그 요직에 오르게 되었다. 결국 한나라는 외척 왕씨의 권세에 짓눌리다가 이 왕망에게 망하고 말았다.


유방이 천하통일한 지 12대, 214년 만에 망한 것이다. 왕망은 국호를 신(新)이라 했다. 왕망은 왕만의 아들이다. 원래 원제의 황후 왕씨에게는 여덟 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오직 왕만은 일찍 죽어서 제후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왕망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원후는 이런 왕망을 가엾게 여겨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


애제가 죽자 원제의 황후 왕씨는 미친 듯이 미앙궁으로 달려가서 천자의 옥새와 인수를 빼앗은 다음 곧바로 왕망을 불러들여 정권을 맡겼다. 그리고 중산왕을 맞아들여 즉위하게 하니 바로 평제이다. 그때 평제의 나이 겨우 아홉 살이었다. 이렇게 하여 사실상의 모든 정사는 스스로 안한공(安漢公, 한나라를 안정시킨다는 뜻)이라 일컫던 왕망이 행사하게 되었다.


평제에게는 생모 위씨가 있었는데, 왕망은 그녀를 억류한 채 장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왕망의 장남 왕우가 이 일을 비판하다가 왕망의 노여움을 사 자결을 명령받았다. 장남을 자결시킨 그해에 평제의 생모 위씨도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주살되었다. 그러고 나서 왕망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었다. 이후 그의 권력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는 부하들에게 오히려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왕망은 작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오히려 생활은 더욱 검소하고 겸손해져서 그 이름을 온 세상에 널리 떨치고, 그 권세는 숙부들을 능가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한나라의 정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평제는 즉위한 지 5년 만에 죽었다. 이 죽음 또한 왕망이 독살한 것이었다. 평제가 자신의 생모를 왕망이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제의 뒤를 이어 황족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두 살짜리 자영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망은 이때 사람들에게 섭황제(攝皇帝)라 칭해지고 있었다. 왕망은 천자의 지위를 섭정한 지 3년 만에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 한나라의 제위를 빼앗았으며, 국호는 신(新)이라 했다.


너무 번잡스러워진 세상

신나라를 세운 뒤 왕망은 한나라 시절의 모든 것을 가능하면 철저하게 바꿔 버리려고 하였다. 그는 관직명과 12주의 경계를 바꿔 버렸으며, 한나라 때 사용하던 화폐도 모두 바꿨다. 그리고 천하의 논밭 이름을 고쳐서 왕전(王田)이라고 부르면서 사고 파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농민이나 상인들이 직업을 잃고 음식물과 돈의 유통이 마비되어 매일같이 백성들이 길거리에서 울부짖었다.


왕망의 정책은 비단 국내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면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고구려에 대해서도 동호족을 치는 데 도와주지 않았다는 구실로 고(高)자를 하(下)자로 바꾸어 하구려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렇게 제도는 자주 바뀌고 법령은 지나치게 많아져서 세상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번잡스러워졌다. 또 가뭄과 해충의 피해까지 극심하여 백성들은 서로 죽이고 전국 곳곳에서 난리가 일어났다.


이에 천하의 인심은 크게 흉흉해졌고, 사람들은 노래를 지어 한나라의 태평시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15년으로 막 내린 왕조

이른바 신나라 시절 왕망은 오색 빛깔의 약석과 구리로 위두(威斗)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은 북두칠성의 첫째 별모양을 따서 만든 것인데, 그것으로 천하 각지에서 일어나는 군사를 눌러 억제하려고 한 것이다. 왕망은 출입할 때마다 시종들에게 이것을 지니게 다니게 했다. 그리하여 반란군들이 궁중으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계속 자리를 바꾸어 위두의 끝을 반란군에게로 돌려대고, 자기는 그 자루 쪽에 앉아서 큰 소리로 외쳤다.


"하늘이 짐에게 만민을 다스려 천자가 될 덕을 주셨다. 한병(漢兵)이 감히 짐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러나 왕망의 목도 잘리고 말았다. 그때 군사들은 그의 몸을 토막토막 끊고 갈기갈기 찢어서 쌓이고 쌓인 원한을 풀었다. 그 살과 뼈를 조금이라도 빼앗아 가지려고 서로 다투다가 수십 명이 밟혀 죽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왕망의 살을 조금이라도 가져가면 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왕망이 제위를 찬탈한 지 불과 15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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