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쓰는 중국이야기

   
이우각
ǻ
생각과사람들
   
13000
2015�� 02��





■ 책 소개


한 권으로 끝내는 중국 역사 ‘이름 속에 숨겨진 중국 역사의 비밀!’
성명학(姓名學)으로 풀어보는 중국 역사 속의 인물들

 
진시황제에서부터 모택동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륙의 역사 속에는 큰 영향을 남긴 인물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만 해도 수십 명이 훌쩍 넘는다. 중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이들의 이름을 성명학적 관점으로 풀이해 보는 것도, 중국의 과거 역사는 물론,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에 재미와 흥미를 더해 줄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중국을 대표하는 인물들일 뿐만 아니라, 중국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인물들이다. 
 
■ 저자 이우각
충북 보은 출생. 대전고 졸업. 서울대 사범대 졸업. 서울대 대학원 수료. 미국 Uni. of South Carolina 대학원 수학(사회학 석사, 국제정치학 박사). 미국 Uni. of South Carolina 경영대학원 및 오스트리아 비엔나 상경대학원 수학(국제경영학 석사). 경기고 및 선린중 교사.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실장 및 한나라당 국제국장. 미국 Uni. of South Carolina 국제문제연구소 교환교수. 중앙대 행정대학원 객원교수. 현재 창작실 ‘숨’에서 집필 활동 중이다.
 
■ 차례
머리말


1. 중국 현대화(現代化)의 주인공들


2. 당(黨)과 방(幇)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변화들


3. 창업(創業)의 주인공들
(1) ‘첫 황제’ 진시황의 짧지만 굵은 일생
(2) 4백 년 장수국가(長壽國家)를 세운 유방(劉邦)
(3) 유비, 조조, 손권의 『삼국시대』를 통일하고 진(晉)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
(4) 3대 37년 단명(短命)으로 끝난 양견(楊堅)의 수(隋)나라
(5) 3백 년 역사를 중원에 새긴 당(唐)나라 이씨(李氏) 왕조
(6) 3백 년 문화 대국을 세운 조씨(趙氏) 일족의 송(宋)나라
(7) 북방 유목 민족의 중원 진출 : 몽골의 백 년 통치와 원(元)나라
(8) ‘한족(漢族)의 부흥’을 내건 명(明)나라 주씨(朱氏) 왕조
(9) 북방 민족의 중원 진출 : 만주족의 청(淸)나라
(10) 청(淸)나라 멸망 후 중원 대륙을 떠맡은 중화민국(中華民國)


4. 수성(守城)의 주인공들
(1) 한무제(漢武帝)의 서역평정(西域平定)과 동서 교통로 확보
(2) 당태종(唐太宗)의 강성대국(强盛大國)을 통한 세계 제국화(世界帝國化)
(3) 송신종(宋神宗)의 부국강병책과 신법운동(新法運動)
(4)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바다 비단길(Sea Silk Road) 개척
(5)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18세기 형 통합과 개방


5. 기록(記錄)의 주인공들
(1) 『춘추(春秋)』를 남긴 공자(孔子)
(2) 『여씨춘추(呂氏春秋)』를 남긴 여불위(呂不韋)
(3) 『사기(史記)』를 남긴 사마천(司馬遷)
(4)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남긴 사마광(司馬光)


6. 창작(創作)의 주인공들
(1) 건안칠자(建安七子)와 죽림칠현(竹林七賢)
(2) 종합적 예술혼(藝術魂)을 꽃피운 당송팔대가(唐八大家)
(3) 문선(文仙) 도연명(陶淵明)과 시선(詩仙) 이백(李白)
(4)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민중시인(民衆詩人) 백거이(白居易)
(5) 중국 문학과 중국 정신을 결합(結合)하여 세계정신으로 승화(昇華)시킨 노신(魯迅) 


 




쉽게 풀어쓰는 중국이야기


창업(創業)의 주인공들

3백년 역사를 중원에 새긴 당(唐)나라 이씨(李氏) 왕조

수나라 말기에 반란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자 진압을 위한 노력 또한 숨 막히게 전개되었다. 그중 진양(晉陽)에서 반란을 진압하던 태원(太原) 방면 사령관 이연(李淵 : 565~635)은 차남 이세민(李世民 : 598~649)과 함께 장안을 점령했다. 수나라 2대 황제인 양제가 신하 우문화급에게 시해되자, 자신이 옹립한 양제의 손자인 공제(恭帝)를 협박하여 선양 형식을 밟음으로써 당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다.


이연은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무장으로서 서위(西魏)와 북주(北周)를 섬긴 이호(李虎)의 손자다. 아버지 이병(李昞)이 일찍 죽자 7세 때 당국공(唐國公)의 작위를 승계했다. 이모가 수나라 문제 양견의 후비(后妃)였기 때문에 당연히 수나라의 귀족이 되어 황제의 신변을 경호하는 천우비신(千牛備身)이 되었다. 그 후 각 지방의 자사(刺史) 및 태수를 지냈다.


수나라 말기,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씨가 양씨를 대신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52세가 되던 해(617)에 군사 요충지인 태원에 파견되어 돌궐족(突厥族)에 대한 방비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들 건성(建成), 세민(世民0, 원길(元吉) 등과 함께 군비 확충에 박차를 가했다. 같은 해 7월, 3만 명의 군사로 태원을 떠나 11월에는 마침내 장안을 점령했다. 하지만 세상의 이목을 의식하여 양제의 손자를 공제로 추대하고 자신은 당왕(唐王)에 봉해져 관중 땅을 다스렸다.


이듬해 양제가 양자강 유역의 강도(江都)에서 시해되자, 이연은 공제로부터 선위를 받아 마침내 당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란이 곳곳에서 일어난 상황이라 몇 년간은 중원의 군웅들인 적양(翟讓)의 후계자 이밀(李密 : 582~618), 도둑 고사달(高士達)의 부하로서 하(夏)나라를 세운 하북(河北)의 두건덕(竇建德 : 573~621), 낙양의 왕세충(王世充) 등을 진압하는 데 진력해야 했다. 하지만 태평성대를 열어 보기도 전에 왕자들의 난이 일어나고 말았다. 차남 이세민이 태자인 장남 이건성과 제 아우인 이원길을 죽인 ‘현무문(玄武門)의 변(變)’(626)이 발발하고 만 것이다. 때문에 당고조(唐高祖) 이연은 아예 차남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 물러앉았다.


아버지를 도와 중원 통일에 앞장섰던 당태종(唐太宗) 이세민은 비록 형제들을 제거하고 대위에 올랐지만, 재위 23년간 현명한 군주로 남아 후세에 ‘정관(貞觀)의 치(治)’라는 칭송을 듣게 되었다. 그의 연호(年號)가 바로 정관(貞觀)이었기 때문에 그의 통치 기간을 통틀어 ‘정관의 치’로 부르게 되었다. 명신인 방현령(房玄齡 : 578~648), 두여회(杜如晦 : 585~630), 위징(魏徵 : 580~643) 등이 그를 도와 현군이 되게 했다.


방현령은 제주 임치(齊州 臨淄 : 산동성) 출신으로 18세에 수나라의 진사가 되었다. 이세민의 측근으로 활약하다가 그가 태종으로 즉위한 후에는 중서령이 되었다. 태종의 고구려 원정 때는 수도인 장안을 지켰다.


두여회는 경조 두릉(京兆 杜陵 : 산서성의 장안현) 출신으로 수나라 때 현위(縣尉)를 지낸 후 초야에 묻혀 있다가 태종이 등극하자 진왕부병참군(秦王府兵參軍)이 되어 전국 각처를 돌아다녔다. 방현령을 통해 태종에게 천거된 후에는 병부상서를 지내고 채국공(蔡國公)에 봉해졌다. 법령과 인사 제도를 정비하여 당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다져놓았다. 자는 극명(克明)이다.


위징은 곡성(曲城 : 산동성) 출신으로 본래 이밀의 부하였다가 이연의 장남인 이건성의 측근으로 활약했던 사람이다. 이세민이 태종으로 즉위한 후 그의 인격과 직언에 이끌려 재상으로까지 중용했다. 자는 현성(玄成)이다. 여러 이민족(예 : 투르크인, 서역인 등)의 복속을 이끌어 내고 천가한(天可汗 : 천자에 해당)이라는 존칭을 듣기도 했다.


이연(李淵)의 이름은 연못 ‘연(淵)’이다. 모든 것을 한데 끌어모으는 큰 연못이다. 수나라에 실망한 백성들을 당나라로 끌어모았다. 깊은 연못이라 쉬이 썩어 들어가지 않고 3백 년 가까이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연이 수나라 사람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새롭게 파놓은 ‘연못’은 290년간 버티며 20명의 황제들을 내놓았다.


아버지 이연을 도와 천하 통일을 달성한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은 ‘세상의 모든 백성을 비추는 태양’이다. 세상을 비추는 것은 오직 태양 하나뿐이다. 아버지 이연이 천하를 통일하고 큰 연못을 만들어 백성들을 한데 모았다면, 아들 이세민은 모인 백성들뿐만 아니라 연못 밖의 백성들까지 고루 비추는 눈부신 태양을 하늘에 띄워 놓았다.


당나라 초기를 탄탄하게 다져 놓은 명신들은 바로 방현령, 두여회, 위징이었다. 방현령(房玄齡)의 이름은 ‘오묘한 시대를 만든다’는 뜻이다. 검을 ‘현(玄)’에는 ‘오묘하다’는 뜻이 있고 연령 ‘령(齡)’에는 ‘세월과 시대’가 들어 있다. 건성으로 지나가는 세월이 아니다. 아이들의 치아가 하나둘씩 자라나듯 그렇게 차곡차곡 채워지고 한발한발 앞서 나가는 세월이다.


두여회(杜如晦)의 이름은 ‘어둡게 한다, 어리석게 만든다’는 뜻이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 어째서 어둡게 하고 어리석게 만든다는 뜻인가. 어둠은 자궁과 잉태를 암시한다. 새로운 기운이 다시 일어날 조짐이다. 새로운 빛을 만들어 내기 위한 비밀스러운 휴식이다. 40년을 채 못 넘긴 수나라를 대신하여 3백 년 가까이 이어질 장수 왕조를 창조하는 일인데, 어떻게 긴 밤과 긴 잠이 없을 수 있겠는가. 두여회의 자는 극명(克明)이다. ‘빛을 이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빛을 이기는 어둠이란 말인가. 아마도 ‘빛을 잉태한 어둠’을 의미할 것이다. 단순한 어둠이 아니다. 단순한 잠이 아니다. 눈부신 빛과 빛나는 생명을 잉태한 어둠이고 밤이다.


위징(魏徵)의 이름은 ‘불러들인다, 한데 불러 모은다’는 뜻이다.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뜻도 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굽히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강직하고 정정당당해서 많은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또 존경했다. 그렇기에 반란군 괴수인 이밀의 부하였던 사람인데도 살아남았던 것이다. 태종 이세민이 제거한 비운의 태자 이건성의 심복이었는데도 태종의 신임과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오극이 당태종의 업적을 기려 편찬했다는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위징과 태종의 대화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자는 현성(玄成)이다. ‘오묘한 것을 이룬다’는 뜻이다. ‘캐묻는’ 천성을 바탕으로 ‘오묘한 것을 이루도록 하려고’ 하늘은 그를 반란군의 손에서 건져 내어 3백 년간 이어질 당나라의 기틀을 확립하게 했다.


기록(記錄)의 주인공들

『춘추(春秋)』를 남긴 공자(孔子
)

『춘추』는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공자(孔子 : BC 552~BC 479)가 사관의 기록을 바탕으로, 은공(隱公) 원년(BC 722)부터 애공(哀公 : 재위 BC 494~BC 468) 14년(BC 481)에 이르는 기간의 일들을 편년체(編年體)로 엮어 놓은 역사책이다. 중국 최초의 편년사로 간결하고 평이한 서술이 특징이다.


공자는 애공 때에 위나라에서 돌아와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오로지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했다. 당시 노나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고 있었다. 밖으로는 오(吳)나라와 제(齊)나라의 협공에 시달리고, 안으로는 삼환(三桓)씨로 불린 공족삼가(公族三家)의 세력이 워낙 강대해져 군주의 권위가 제대로 설 수 없었다. 애공 스스로도 월(越)나라의 힘을 빌려 삼환씨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왕위에서 쫓겨나야 했다.


공자는 창평향의 속읍(昌平鄕 謖邑 : 산동성 곡부) 출신이다. 춘추 말엽을 살며 주(周)나라가 쇠락해지자 주나라 최기로 돌아가 봉건 질서를 다시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여읜 아버지 공흘(孔紇)은 무장이었다.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다. 공자는 주문왕(周文王)의 아들로 노나라를 창건한 주공(周公)을 흠모하며 청소년 시절부터 학문에 힘썼다.


노나라의 말단 관리로 시작했지만 50세 이후 애공의 아버지인 정공(定公)에게 발탁되어 중책을 맡게 되었다. 삼환씨(三桓氏)로 통하는 세 명의 권신을 몰아내고 군주의 통치력을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사전에 들통 나 스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그 후 14년간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보려 했다. 그러다가 69세 때(BC 484) 모든 꿈을 접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 양성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아들 공리(孔鯉), 애제자(愛弟子) 안회(顔回)와 자로(子路)가 연이어 죽는 슬픔을 겪었다. 그 후 수제자인 자공(子貢)과 증삼(曾參)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73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72명의 고제자(高弟子)와 3천 명의 제자들을 남겨 그의 사상을 전 세계로 확산하게 했다.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論語)』는 공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도덕과 예의로 교화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통치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인(仁)이 바로 최고의 덕이라고 생각했다. 부모형제에 대한 효제(孝悌)를 타인에 대한 인(仁)의 시작으로 보았다. 예의(禮儀)를 다하다 보면 자연히 인의(仁義)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나 국가가 된다고 보고 전통과 관습을 존중했다. 형식의 굴레에 복종하는 삶이 아니라 타고난 바탕을 온전하게 개발하는 인간중심 사상을 강조했다.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사상적 혼란을 초래하자 잠시 뒤로 물러섰다가 맹자에 의해 다시 중흥되었다. 그 후 한무제(漢武帝)가 유학(儒學)을 국가교학(國家敎學)으로 선택하자 공자의 위상은 한껏 고양(高揚)되었다. 몽골의 원나라나 만주족의 청나라 때도 공자의 사상은 존경되었다. 국가 관료의 선발을 위한 기준이자 통합과 통일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20세기 들어와 유학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시시때때로 공자를 봉건적 잔재(殘在)로 비하(卑下)하는 흐름이 존재했지만, 21세기로 들어서는 국가위상(國家位相)을 높이는 핵심 가치 중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 공자의 가르침은 2천 5백 년을 거뜬히 뛰어넘는 중국의 초일류 상품이다.


더욱이 21세기는 동양에서 부는 문화와 사상의 바람으로 서양이 변화되는 세기라고 하지 않는가. 공자 문화권이 서양을 구하고 더 나아가 세계 인류를 구원하게 될지 누가 아는가. 세계가 단일 문명 대국을 향해 줄달음치는 21세기는 누구나 다 문화적 혹은 사상적으로 피폐하고 궁핍하기 마련이다.


공자의 이름은 언덕 ‘구(丘)’다. 무덤이 되기도 하고 마을이 되기도 하는 그런 언덕이다. 사람이 살면 마을이 되고, 사람이 모두 떠나면 폐허가 될 그런 언덕이다. 자는 중니(仲尼)다. ‘중이 될 팔자’를 암시하고 있다. 도를 닦는 사람이라 세상과 잘 안 어울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벼슬길에도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았다. 그래서 14년간 주유천하(周遊天下)했어도 문전박대(門前薄待)를 당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 3년여 동안 수천 명의 제자들을 양성했다. 고향 집이 바로 절간이고, 토굴이고, 언덕이었다. 공자의 이름인 언덕은 ‘학문과 교육에 몸 바쳐 깨달음의 세계를 넓히려는’ 칠순의 노인을 맞아 마침내 진리를 깨우치는 숭고한 마을로 변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흘(紇)이다. ‘묶는 실’이다. 자는 숙량(叔梁)이다. 대들보나 징검다리와 관련이 있다. 아재비 ‘숙(叔)’에는 ‘젊다’는 의미도 있고 ‘줍는다’는 뜻도 있다. 실과 대들보, 실과 징검다리가 모두 교육 사업과 연관되어 있다. 즉, 그것은 제자 양성이자 사람 깨우치기다. 어머니의 이름은 징재(徵在)다. 앞 글자에는 ‘부른다, 캐묻는다, 구한다, 거둔다’는 뜻이 들어 있고 뒷 글자에는 ‘존재한다, 살핀다, 본다’는 의미가 있다. 학문이나 교육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부모의 이름과 자(字)에 위대한 교육가(敎育家)인 공자의 일생과 불꽃같은 마지막 삶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칠순의 나이에 아들과 사랑하는 두 제자가 먼저 죽는 애통함을 겪어야 했다. 아들인 공리(孔鯉)는 잉어를 뜻하는 이름이다. 편지를 뜻하기도 한다. 결국 아들은 칠순이 된 아버지의 천수(天壽)를 늘려 달라는 메시지(message)를 듣고 하늘나라로 먼저 떠난 것인가. 스승보다 먼저 이승을 하직한 제자는 안회(顔回)와 자로(子路)다. 안회(顔回)는 ‘돌이킨다’는 이름이다. 자로(子路)는 ‘큰길’이다. 안회는 스승과 함께 본래 자리로 돌아온 후 죽었다. 자로는 스승이 새로운 길을 닦기 시작하자 죽었다. ‘잉어’로 다시 태어날 아들은 아버지가 큰 연못을 파고 고기를 키우기 시작하자 죽었다. 천하 만물과 세상만사에 어디 우연한 일이 있겠는가. 잘 살펴보면 모두 다 필연이다. 사람들이 우연과 필연 중 하필이면 우연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세상일이 마치 우연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람이 본 것이 세상인가, 세상 자체가 세상인가.



창작(創作)의 주인공들

문선(文仙) 도연명(陶淵明)과 시선(詩仙) 이백(李白)

도연명과 이백은 여러모로 흡사한 데가 많다. 유교적 훈계보다도 주로 대자연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면을 문학의 소재로 삼았다. 대자연과 하나가 되고 우주 만물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삶의 극치로 여겼다. 죽림칠현 식의 기행이 없지는 않았지만, 세상을 냉소하는 유아독존적인 독설이 아니라 그저 자연과 하나가 된 신기하고 오묘한 느낌과 감동을 표현하려 했다. 쉽게 말해 삶을 대자연에 비추어 보며 갑론을박으로 지새우는 속세를 벗어나 보려 했다. 그래서 은둔하지 않으면서도 은둔자처럼 살 수 있었다. 기행과 초월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도 선각자로서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문재(文才)를 마음껏 뽐내고 상상력을 깃발처럼 휘날렸지만 세상은 신선의 환생으로 인정해 주었다.

도잠(陶潛 : 365~427)은 구강현(九江縣 : 강서성)의 시상(柴桑) 출신으로 증조부는 서진(西晉)의 명장인 도간(陶侃)이고, 외조부는 당대의 명사인 맹가(孟嘉)였다. 집안은 소지주(小地主) 정도의 살림이었다. 28세 때 벼슬을 시작하여 주(州)의 제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못 가 사임하고 말았다. 군웅이 할거할 때는 진군참군(鎭軍參軍)과 건위참군(建衛參軍)을 역임했다. 벼슬길에 나가서도 늘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40세 때 누이가 죽자 핑계를 대고 팽택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끝으로 벼슬 생활을 접었다.


이때 벼슬을 그만두는 심정을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읊었다. 낙향한 후 스스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대자연과 어울린 삶을 문화적 표현으로 승화시켰다. 전형적인 민중문학이요, 삶에 뿌리를 둔 생활문학이자 농경문학이었다. 담담하면서도 인간미가 물씬 배어 있는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대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는 더욱 많은 영향을 미쳐 모든 시인이 도연명의 자연주의적 시풍(詩風)을 닮고자 했다. 시 이외에 산문집으로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과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있다. 소설(小說)을 묶은 『수신후기(搜神後記)』도 남겼다. 자는 연명(淵明) 혹은 원량(元亮)이다.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62세로 죽자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시호가 주어졌다. 수묵문인화에도 일가견이 있어 국화를 특히 즐겨 그렸다.


도연명의 문체를 전범(典範)으로 삼는 이들이 늘어나자 연명체(淵明體)라는 말마저 생겨났다. 평범하고 담백하면서도 자연에 심취한 전원생활의 묘미가 잘 드러나 있기에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도연명의 이름은 잠(潛)이다. ‘물 속 깊이 잠기듯 세상으로부터 멀리 도망친다’는 뜻이다. 이름으로만 보면 도연명이 물에 빠져 죽었어야 했다. 자(字)마저도 연명(淵明)이 아닌가. ‘물에 비친 모습처럼 모든 걸 분명하게 한다’는 뜻이니 그 또한 물에 더 가까운 운세가 아닌가.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 불리는 이백(李白 : 701~762)은 자(字)인 태백(太白)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불리며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천 1백여 편의 시를 남긴 시선(詩仙)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농서(隴西 : 감숙성) 출신으로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대상(大商)이었다. 젊어서부터 호박(豪放)한 기질이라 20대 중반 이후 산중(山中)을 떠돌며 신선사상(神仙思想)에 빠져들기도 했다. 고적(高適),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杜甫) 등과 교류하며 중국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40대 중반에 도사(道士)인 오균(吳筠)의 천거로 당현종을 만나 장안에서 한두 해 살며 한림공봉(翰林供奉)을 역임했다. 일종의 궁정시인이었다. 그래도 당현종과 양귀비의 향연에서 지은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를 남겨 곧바로 장안에 필명을 날렸다.


그러던 중 자신을 ‘적선인(謫仙人 : 귀양 온 신선)’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과 술로 나날을 보내며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이다가 권신인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장안을 곧 떠나게 되었다. 날마다 술독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으니, 어떻게 딱딱하고 위선적인 궁중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겠는가.


50대 중반에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亂)(755~763)을 만나 사천으로 피신한 현종을 대신해 군사를 일으킨 영왕(永王) 인(璘)을 따라 출정했다. 하지만, 영왕이 현종(玄宗 : 685~762/재위 712~756) 대신 즉위한 숙종(肅宗 : 711~762)과 대립하다가 패하게 되자, 이백도 심양(尋陽 : 강서성의 구강현)의 옥중에 갇히게 되었다. 그 후 야랑(夜郞 : 귀주)으로 유배되었다가 당나라 최고의 무장(武將)으로 통하는 곽자의(郭子儀 : 697~781)의 구명 운동으로 사면되었다. 금릉(金陵 : 남경)과 선성(宣城 : 안휘성)을 오고 가며 방랑 생활을 했으며, 이후 환갑의 나이로 당도(當塗 : 안휘성)에 사는 친척인 이양빙(李陽氷)에게 얹혀 살다가 병사했다.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는 이백의 도학적인 시풍이 물씬 묻어난다.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자문한 후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니 저절로 마음이 한가롭다’고 했다.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이라는 구절이 참으로 도학적이다. ‘참으로 별천지로다! 정말 인간 세상이 아니구나!’라는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에 다다르면 저절로 탄복하게 된다. 머리와 가슴속에 이미 시(詩)가 다발다발 들어 있어 물이 흐르듯, 바람이 일 듯 저절로 술술 토해 내는 듯하다. 그토록 낭만적이고 도학적이던 이백은 결국 예로부터 채석장으로 쓰던 채석기(采石磯 : 안휘성의 마안산 서남쪽) 근처 양자강에서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환관 고력사(高力士 : 684~762) 같은 이들이 활제를 멋대로 세우고 넘어뜨리는 세상이 되었다. 당나라 말기까지 열 명에 가까운 황제들을 환관이 중심이 되어 세웠다. 두 명의 황제들은 환관 무리에게 죽기까지 했다. 환관들은 황제가 어려울 때 측근에서 도울 수 있었기 때문에 일등 공신으로 대우받기가 아주 용이했다.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추밀사(樞密使), 지방 군사를 감시하는 감군(監軍), 황제의 호위군인 금군(禁軍) 대장 등을 거머쥐고 당나라를 패망으로 급히 질주하게 했다.


이백이 살던 시대는 바로 망해가는 단초였다. 백성들은 그나마 이백이 토해 내는 시를 읊조리며 암울한 현실을 망각하려 했다. 이백의 시는 더 이상 신선의 것이 아니었다. 퀴퀴한 바람 속에서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을 찾아내려 발버둥치는 백성들의 차지였다. 천지 만물을 새롭게 발견하고 대자연을 새롭게 끌어안는 비결이 이백의 시 속에 가득히 들어 있었다.


백성들은 도잠(陶潛)과 이백(李白)을 통해 진짜 부자(富者)는 바로 자기들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대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져 사는 삶이 바로 부자라는 생각을 했다. 강자라면 그 길은 너무도 가까이 있고 또 너무도 손쉬운 데 있었다. 이미 대자연 속에 속해 있는 자신들이 바로 부자이자 강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도잠과 이백은 단순한 문인으로 다가오지 않고 불세출의 구원자로 다가왔다. 글을 몰라도 깨달을 수 있었고, 낮은 벼슬조차 낯설기만 해도 환하게 웃으며 따라나설 수 있었다. 한쪽에 도잠이 있고, 다른 한쪽에 이백이 있어 무척이나 행복하고 의기양양했다. 나라야 이미 환관이 차지했어도 천지는 여전히 도잠과 이백의 시를 품고 글을 외우는 백성들 차지였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