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지식계보학

   
최연식
ǻ
옥당
   
16000
2015�� 02��



■ 책 소개


조선시대 문묘 종사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드러나는 권력정치의 속살!


조선시대에는 지식인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대해 ‘문묘 종사’라는 꽤나 구체적인 기준이 존재했다. 유교의 성인인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 조선에서 유학과 주자학에 위대한 공헌을 한 현인들을 모셔놓는 문묘 종사는 조선의 지식인을 대외적으로 공인하는 과정이었다.


조선에는 수준 높은 학문과 비판정신을 겸비한 지식인들이 많았지만 문묘에 종사된 이는 정몽주를 포함해 15명뿐이었다. 그런데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민본주의라는 그만의 성리학적 이상세계로 오늘날까지도 ‘정도전 열풍’을 몰고 왔던 삼봉 정도전은 문묘종사 성현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반면 단심가라는 유명한 시를 남기며 조선개국에 반대했던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조선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문묘 종사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왜 조선을 위해 일했던 정도전은 조선의 지식인이라 볼 수 없는 것일까? 왜 단 한 번도 조선에 충성하지 않았던 정몽주는 조선의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이 문묘 종사는 어떤 기준으로 시행된 것일까?


이 책은 이 물음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알려준다. 조선의 지식인 15명이 문묘에 종사되는 과정을 다룬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생애와 학문을 검토하는 작업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저자는 ‘조선의 문묘 종사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자 선정의 표면적 결과가 아니라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정치의 적나라한 속살’이라 말하며 개별 인물 연구가 아닌 문묘 종사의 정치 동학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 저자 최연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같은 대학 국학연구원 부원장과 동아시아고전연구소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


그는 역사를 정치 동학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2003년 저서 『창업과 수성의 정치사상』을 통해 여말선초의 시대적 특징을 탐구했으며, 이후 한국사의 다양한 인물과 분야를 탐구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중국 북경대와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 경험 을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의 역사 속에서 살핀 권력의 메커니즘에 관심을 두고 한.중.일 삼국의 개국과 근대화 과정을 비교하는 연구를 기획하고 있다.『조선의 지식계보학』은 그의 이런 관심사를 대중적으로 드러낸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조선의 역사를 지식인의 국가공인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 암투의 역사로 보고, 힘의 논리에 따라 역사를 조망한다. 조선의 지식인 15명이 문묘에 종사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 일이 조선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상세하게 살핀다.


그는 앞으로 정치 동학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좀 더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그가 공동으로 저술한 책으로는 『한국정치사상사 : 단군에서 해방까지』『한국의 사회개혁과 참여민주주의』『정치학이해의 길잡이 : 정치사상』『현대정치사상과 한국적 수용』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지식인의 계보를 따라가며 500년 조선의 역사와 만나다


프롤로그 조선의 지식계보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지식계보학의 네 가지 관점 chr(124)_pipe 제도와 정신의 혁명으로 완성된 나라


제1부 지식국가 조선의 탄생
1장 마상의 건국
기로에 선 형제 chr(124)_pipe 용들의 노래 chr(124)_pipe 이자춘, 고려의 정치에 나가다 chr(124)_pipe 변방의 하급 무사, 개경에 등장하다 chr(124)_pipe 회군과 제왕의 꿈


2장 제도의 건국
혁명의 동반자를 찾아서 chr(124)_pipe 정도전과 정몽주 chr(124)_pipe 유배지에서 만난 사람들 chr(124)_pipe 천명의 소재 chr(124)_pipe 왜곡된 출생의 비밀과 악연 chr(124)_pipe 윤이와 이초의 밀고 사건 chr(124)_pipe 승자의 기록 chr(124)_pipe 정도전의 신념


3장 경복과 근정의 나라
정도전이 꿈꾼 나라 chr(124)_pipe 제도적 청사진 chr(124)_pipe 돌아올 수 없는 길


제2부 사화와 반정 그리고 조선 지식인의 상징
4장 폭정의 기원과 그늘

후견정치의 극복과 대간의 성장 chr(124)_pipe 정희대비와 수렴청정 chr(124)_pipe 한명회와 청주 한씨 세력 chr(124)_pipe 원상제도 chr(124)_pipe 능상의 풍조 chr(124)_pipe 연산군과 대간의 논쟁 chr(124)_pipe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김일손의 사초 chr(124)_pipe 설원과 폭정의 시작 chr(124)_pipe 연산군의 역공 chr(124)_pipe 왕권 회복과 왕토사상 chr(124)_pipe 연산군의 추락


5장 반정의 상징을 찾아서
충성의 길, 반역의 길 chr(124)_pipe 정몽주와 이성계의 분열 chr(124)_pipe 초혼 chr(124)_pipe 정몽주의 충성과 반역 chr(124)_pipe 문묘 종사의 자격 chr(124)_pipe 불교에 아첨한 안향의 후예들 chr(124)_pipe 고려인 정몽주의 부상 chr(124)_pipe 성삼문과 박팽년 chr(124)_pipe 새로운 대안, 김굉필 chr(124)_pipe 지식계보의 탄생


제3부 지식권력의 시대
6장 지식권력의 국가 공인

사화의 희생자들 chr(124)_pipe 조광조의 정치 원칙 chr(124)_pipe 정국공신 개정을 둘러싼 갈등 chr(124)_pipe 조선인 지식권력의 국가 공인 chr(124)_pipe 불만스러운 이언적의 행보 chr(124)_pipe 논의의 재개


7장 지식권력과 왕권의 길항
5현의 종사, 내분 속에 이룬 성취 chr(124)_pipe 정인홍의 공격 chr(124)_pipe 이이와 성혼, 서인 지식권력의 상징 chr(124)_pipe 왕권에 맞서는 지식권력 chr(124)_pipe 예송으로 왕권의 정통성을 논란하다 chr(124)_pipe 왕권의 벽에 부딪히다 chr(124)_pipe 환국정치에 편승한 서인 지식권력

 

에필로그 지식권력 시대의 종언
송시열과 송준길 chr(124)_pipe 노론 지식권력의 독주 chr(124)_pipe 동국 18현과 도통의 계승




조선의 지식계보학


지식인의 계보를 따라가며 500년 조선의 역사와 만나다

조선의 역사를 위기 극복의 관점에서 회고할 때면 언제나 신념 윤리에 집착한 완고한 지식인 군상보다는 위대한 성군과 영웅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성군과 영웅이 성공한 역사의 한 장면을 상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역사 전체를 책임질 수는 없다. 냉철한 역사가의 관점에서 볼 때 패배주의에 물든 식민사관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역사의 성패를 한 개인의 역량으로 판단하는 영웅사관이다. 난세의 역사를 헤쳐가기 위해서는 위대한 지도자의 혜안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도자도 자신의 실수와 판단 착오를 수시로 교정하기 위해 지식인의 비판을 경청해야 한다.


조선은 처음부터 성군과 영웅보다는 집단 지성의 역할이 중요한 나라로 설계되었다. 지식인의 나라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경제문감』에서 임금에게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간관의 역할을 재상 역할 못지않게 강조했다. 또 세종과 정조가 조선의 최대 성군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집현전과 규장각 지식인들의 비판을 경청했기 때문이다. 반면, 폭군이 등장하고 세도정치가 만연하던 때는 어김없이 지식인의 비판정신이 실종된 시기였다.


조선에는 수준 높은 학문과 비판정신을 겸비한 지식인들이 많았지만 문묘에 종사된 조선의 지식인들은 정몽주를 포함해 모두 15명이었다. 문묘 종사는 이들을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공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대표적 지식인의 국가 공인은 임금과 지식인 집단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논쟁은 문묘 종사 대상자의 인품과 학문에 대한 지식인 집단의 엇갈린 평가를 맨살로 드러내기도 했고, 왕위 계승의 적격성 여부를 문제 삼기도 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기성의 학문적 권위를 맹신하지 않았고, 때로는 절대 왕권에 대한 냉혹한 비평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의 문묘 종사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자 선정의 표면적 결과가 아니라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정치의 적나라한 속살이었다.



지식국가 조선의 탄생

마상의 건국

변방의 하급 무사, 개경에 등장하다

이성계가 동북면 병마사를 맡아 나하추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고려 조정의 기라성 같은 장수들이 보기에 그는 여전히 세상 물정 모르는 변방의 하급 무사에 불과했다. 그들의 갈등은 1364년의 전장에서 불거졌다. 이때 마침 고려 출신 최유가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해 요양성의 군대를 앞세워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 조정은 이에 맞서 최영을 비롯한 고려의 최고위 장수들을 총출동시켰지만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고려 장수들의 비겁함과 무기력함을 힐난했고, 그들은 “내일의 싸움은 혼자 해볼 태면 해보라”며 정예 기병 1,000명을 거느린 이성계의 능력을 폄하했다. 이성계와 그의 병사 1,000명은 보란 듯이 전장을 누비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고려의 장군들이 보기에 그들은 여전히 시골 무사에 불과했다.


이성계는 동북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원나라든 여진이든 출신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발탁해 심복으로 삼는 수완을 발휘했다. 원나라 장수 출신으로는 조무(趙武)가 있었다. 그는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무리를 이끌고 함경도 경원부의 공주(孔州)를 점령했는데, 그를 정벌하러 나선 이성계는 그의 재주를 아껴 쇠 화살을 쓰지 않고 연습용 나무 화살인 박두(樸頭)를 수십발 쏘아 항복시켰다. 그 뒤 조무는 마부가 되어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하며 평생 모셨고, 결국 공조전서에 등용되었다.


이성계는 22세에 전쟁에 출정하기 시작해 54세에 위화도 회군을 단행할 때까지 주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형적인 야전형 무장이었다. 전공이 쌓이면서 직책도 1362년 동북면 병마사를 거쳐 1388년에는 수문하시중이 되어 정승 반열에까지 올랐다.


회군과 제왕의 꿈

이성계는 위화도에 도착한 지 6일이 지난 5월 13일에 조민수를 설득해 우왕에게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함께 올렸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2일에 회군 결정을 내렸고, 6월 3일에 개경에 입성했다. 이성계의 회군은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민간에서는 이를 “목자가 나라를 얻는다(木子得國)”는 동요로 화답했다.


조선의 건국은 비록 선양의 형식을 빌렸더라도, 결과적으로 그것은 권력의 찬탈이었다. 이성계의 형 이원계는 위화도 회군조차도 고려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는 반역 행위라고 생각하고 음독자살을 선택했다.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그들은 임금의 도리를 잃고 민심을 저버린 공양왕의 실정을 문제 삼았지만 사실 조선의 건국은 홍건적과 왜구의 도발을 진압하며 세력을 키워가던 무장 세력이 무력을 배경으로 선양을 강요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에서 조선의 건국은 백성들과는 무관한 지배층 내부의 정치투쟁적 성격을 띠었다. 따라서 민심의 지지 없이 권력을 장악한 건국 세력은 저항세력과 백성들에게 건국의 정당성을 합리적으로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혁명에 성공한 이성계에게는 분열된 권력을 통합하고 민심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가 부여되었다. 그것은 곧 고려의 정신에 맞서는 동시에 조선의 비전을 제시하는 문제였다. 그는 육생(陸生)이 한 고조 유방에게 “마상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마상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했던 충고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려에 대한 충성을 선택한 정몽주와 화해를 시도했고, 정도전의 새로운 문명 설계도를 받아들였다.


경복과 근정의 나라

제도적 청사진

‘정보위’란 ‘임금의 보배로운 지위를 바로 잡는다’ 또는 ‘임금의 바른 지위’란 뜻이다. 물론 정도전은 이 부분에서 임금은 보배로운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임금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라고 언급했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정도전은 백성은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어리석지만 지혜로 속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배반하므로 임금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인(仁)으로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정도전은 신하들이 왕권의 일탈을 교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 임금이 갖추어야 할 자질과 책임을 법적으로 규정하고자 했다.


‘정국본’은 국가의 근본인 세자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정도전에 따르면, 옛날에 선왕이 세자를 정하는 원칙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왕권 경쟁을 근절하기 위해 장자를 세자로 세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질을 존중해 어진 이를 세자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조 사회에서 왕위 계승은 기본적으로 혈통 문제였기 때문에 어느 경우든 임금의 적격한 자질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정도전은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경륜과 덕행을 갖춘 학자를 기용해 세자에게 제왕의 길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새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이라 지으면서 태조가 궁궐을 짓기 전에 종묘를 먼저 세운 것을 칭송했다. 그리고 『시경』<대아> 편의 “군자가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는 시구를 인용해 궁궐의 이름을 지었다. 태조가 자손들과 더불어 영원히 태평한 왕업을 누리기를 염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만년토록 왕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진정한 왕의 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경복궁의 의미를 밝힌 글 말미에 넓은 궁궐을 짓고 한가로이 있을 때에도 가난한 선비를 생각하고, 서늘한 전각에 있을 때에도 그 그늘을 나누어줄 것을 생각해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는 충고를 덧붙였다.


근정정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국왕이 주관하는 공식 행사를 치르는 공간이다. 정도전은 경복궁 내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공간인 근정전의 이름을 『서경』의 여러 고사에서 인용했다. 정도전이 인용한 첫 번째 고사는 백익이 순임금에게 “근심이 없을 때 경계하여 법도를 잃지 말라”고 했던 충고였다. 두 번째 고사는 고요가 우임금에게 “안일과 욕심으로 나라를 가르치지 말고 삼가고 두려워하라”고 했던 충고였다. 그리고 세 번째 고사는 주공이 문왕을 평가하며, “아침부터 해가 기울도록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일하여 만민을 화합시켰다”고 했던 말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임금이 부지런해야 하는 줄만 알고 그 까닭을 알지 못하면, 그 부지런함도 결국은 번거로운 것이 되어 온전한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임금이 추구해야 할 부지런함의 핵심은 어진 이를 구하는 데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임명하는 데 신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왕실과 군주의 권위를 높이는 동시에 왕권의 일탈을 지식인의 학문과 도덕으로 견제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궁궐과 전각의 이름에 담고자 했다. 또 앞서도 나왔듯이 문무를 겸비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문은 태평한 정치를 구가하기 위한 것이고, 무는 혼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으로 사람의 두 팔과 같이 모두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경복궁 동쪽과 서쪽의 누각 이름을 융문루와 융무루로 짓고, 태조에게 문무를 아우르는 정치 구현을 촉구했다.


돌아올 수 없는 길

정도전은 조선이 영원토록 경복(景福)을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이 먼저 사욕을 버리고 근정(謹政)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혈통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는 정치는, 아무리 합리적인 기준을 세우더라도, 왕위 계승의 적격성에 대한 시비와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연의 정치였다. 따라서 정도전은 정치의 우연성을 배제하기 위해 제도에 의한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고, 우연과 사익이 정치에 개입되는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사병 혁파를 주장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역린(逆鱗)을 건드리고 말았다.



사화와 반정 그리고 조선 지식인의 상징

폭정의 기원과 그늘

능상의 풍조

대간의 적극적인 언론활동과 권력 비평은 폭군에게만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종의 치세는 대간의 성장을 바탕으로 구가될 수 있었고, 성종도 대간의 적극적인 권력 견제 활동을 용인했다. 반면, 연산군은 대간의 논박을 능상(凌上), 즉 윗사람을 능멸하는 행위로 간주했고, 대간의 성장을 용인한 아버지 성종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역사에서 치세와 폭정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연산군의 폭정은 개인적 성향과 자질에 기인한 문제이기도 했지만 많은 부분은 성종 시대가 남긴 유산의 결과였다. 사실 성종은 아무런 준비 없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연산군 이융은 성종 14년에 8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9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11년 이상 세자 수업을 받았다. 따라서 성종은 정치적 후견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간의 언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이미 성년에 가까운 나이에 즉위한 연산군은 세자시절부터 대간의 언론활동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연산군과 대간의 논쟁

연산군과 대간의 논쟁은 왕실의 관행적 불교 행사와 사찰 지원에서 시작되었지만 논쟁의 본질은 새 임금의 정치가 어떤 정치여야 하는가에 관한 양자의 시각 차이에 있었다. 성종의 치세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성장한 대간은 연산군에게 성종의 정치를 성헌으로 삼아야 한다며 환관과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정치의 원칙을 준수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연산군 입장에서는 “지금의 형세로 보아서는 내시가 권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대간이 권세를 부리는 것이다”라고 했던 말처럼, 대간의 요구는 임금의 권위를 위협하는 월권행위였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폐비에 관한 의전을 정비했다. 이것은 세조를 비난하며 성종의 성헌을 따르라고 압박했던 삼사의 관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세조를 비난한 사초가 문제의 발단이었던 무오사화나 성종의 윤씨 폐비 조치에 가담해 세자의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든 점이 강조된 갑자사화는 모두 신하들의 능상에 대한 연산군의 경고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적어도 연산군의 관점에서는 능상을 허용한 성종의 정치가 남긴 잘못된 관행의 결과였다.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김일손의 사초

연산군 시대의 언관들은 임금에게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때, 흔히 자신들의 행위를 충분(충의에서 비롯된 분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예컨대 수륙재 시행이나 폐비 추숭 문제로 논란이 발생했을 때도, 삼사의 언관들은 유교의 정도와 성종의 유훈을 지키라고 연산군을 압박하던 자신들의 행위를 충분의식의 발로라며 정당화했다. 이들의 주장은 충분의식이라는 충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왕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과 관련되더라도 성군이라면 마땅히 용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입장에서 볼 때, 언관들의 ‘충분’ 운운은 임금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미화하려는 불온한 수사에 불과했다. 특히, 연산군은 “세조께서 일찍이 김종직에게 불초하다 하셨는데, 김종직이 이것을 원망했기 때문에 글을 지어 기롱하고 논평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고 언급했듯이, 김종직의 충분은 순전히 세조에 대한 사감(私感)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연산군은 ‘조의제문’에 대한 자신의 최종 해석을 통해, 김종직과 그의 문도들이 불신(不臣)의 마음으로 세조 이래 세 조정을 내리 섬기면서 세조의 성덕을 기롱했고, 역사에 거짓 기록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반정의 상징을 찾아서

충성의 길, 반역의 길

부왕(父王) 때 양정(兩鄭)이라고 일컬었으니, 한 사람은 정몽주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정몽주는 왕씨(王氏) 말년에 시중이 되어 충성을 다했고, 정도전은 부왕의 은혜에 감격해 있는 힘을 다했으니, 두 사람의 길이 모두 옳은 것이다(『태종실록』, 3년 6월 5일).


이것은 태종이 된 이방원이 정몽주와 정도전을 평가한 말이다. 그러나 정작 태종 자신은 왕이 되기 전에 정몽주를 죽여 조선 개국을 도왔고, 정도전을 살해한 이후 왕이 되는 수순을 밟아갔다. 그는 부왕인 태조가 가장 아끼던 신하 둘을 살해했을 뿐 아니라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용상에 올랐다. 그렇다면 정몽주와 정도전에 대한 태종의 평가는 위선이었을까?


정몽주와 이성계의 분열

정몽주와 이성계의 밀월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분열의 계기는 공양왕 2년 5월에 발생한 윤이‧이초 사건이었다. 사건은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의 명나라 침공 계획을 무고한 것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성계 세력은 그들의 배후를 의심했다. 반면, 정몽주는 사건 관련자들의 죄상이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처벌에 반대하며 대사면을 요청했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정몽주가 윤이와 이초의 도당을 두둔한다고 탄핵했고, 정몽주는 이에 맞서 두 차례에 걸쳐 사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정몽주의 입장을 지지하며, 정몽주를 오히려 수문하시중에 임명했다.


정몽주는 공양왕의 지지를 배경으로 공양왕 3년(1391)에도 이성계 세력에 맞서 구세력에 대한 정치적 구명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자 이성계 세력이 장악한 사헌부와 형조는 윤이‧이초 사건과 연관된 일련의 사건을 다섯 가지로 묶어 각 사건의 주모자들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요구했다. 이제 윤이‧이초 사건의 본질은 단순한 외교적 사안이 아니라 이성계 세력과 구세력 사이의 권력투쟁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침내 공양왕 4년(1392) 3월에 정몽주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때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 낙마하자, 정몽주는 이를 계기로 4월 1일에 조준, 정도전, 남은을 귀양 보내 이성계의 수족들을 제거했다. 그러자 이방원은 4월 4일에 조영규를 포함한 네댓 명의 자객을 보내 정몽주를 살해하고 그의 목을 개경 거리에 효수했다. 이성계는 정몽주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방원의 불효를 나무랐다.


이성계는 이방원의 불효를 나무랐지만 본심은 자신의 고려에 대한 충성을 강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말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오히려 거사에 앞서 이방원이 휘하의 군사들에게 했다는 다음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은 온 나라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제 정몽주의 모함을 받아 오명을 입게 되었으니 후세에 누가 진실을 분변할 수 있겠는가?” 이방원은 자신과 가문의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 정몽주를 역신으로 몰아야 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하고, 그를 나무라는 이성계에게 그것만이 집안을 살리고 효를 다하는 길이었다고 강변했다. 결국 이성계도 이방원의 뜻을 받아들여 “정몽주는 죄인을 비호했고, 대간을 꾀어 충량(忠良)을 모함했기에 죄를 받았다”며 공양왕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적어도 시해 사건 당시 정몽주는 충량한 이씨 가문을 모해하고 간계를 획책한 변란의 주모자에 불과했다.


문묘 종사의 자격

사헌부의 문제의식은 문묘의 형식이 비록 중국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더라도 문묘의 내용과 정신은 조선적인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헌부는 문묘 종사 대상자의 자격 요건으로 학문적 업적과 정치적 헌신을 제시했다. 우선 문묘 종사 대상자는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업적도 갖추어야 했지만 그가 쌓은 학문의 내면에 도덕적 진실성이 담겨 있어야 했다. 다음으로 문묘에 종사될 수 있는 인물은 정치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임금에게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물론 조선의 문묘에는 관례에 따라 설총, 최치원, 안향이 이미 종사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조선의 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헌부는 신축된 지 2년 만에 도덕성과 정치적 업적을 기준으로 제시하며, 문묘 종사에 합당한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을 선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지식계보의 탄생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성공시킨 주역은 조광조와 그의 추종세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한 김굉필의 문묘 종사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안으로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시킴으로써 부당한 권력에 맞서다 희생된 지식인의 절의정신을 치세의 상징이자 시대정신으로 부활시켰다. 이 점에서 정몽주는 김굉필의 정신적 기원이자 시대정신의 상징으로 조광조 등에 의해 초혼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정몽주의 절의정신이 반정시대의 시대정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위해서는 정몽주의 학문이 길재, 김숙자, 김종직을 거쳐 김굉필과 조광조에게 계승되었다는 선명한 계보가 확립되어야 했다.



지식권력의 시대

지식권력의 국가 공인

조광조의 정치 원칙

이황이 선조 즉위년에 올린 상소에서 사화의 희생자들에 대한 신원을 요구하면서, 첫머리에 거론했던 인물은 조광조였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정의의 수호자인 동시에 희생의 상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학』의 무리’라는 참소를 받았던 조광조가 『소학』에 입문한 계기는 김굉필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앞서 나왔듯이 무오사화가 일어난 바로 그해, 평안도 어천의 찰방으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가 인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김굉필의 문하에서 『소학』을 익혔다.


조광조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고, 중종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면서 자신이 믿는 정치의 원칙을 중종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조광조에 따르면, 바른 선비란 임금의 뜻을 거스른 직언이 결국 원망과 노여움을 사더라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다. 이 점에서 조광조는 중종에게 필요한 학자는 비록 중용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기상이 탁월하고 입지가 고원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국공신 개정을 둘러싼 갈등

소격서가 혁파되고 현량과가 실시된 이후 조광조는 곧바로 중종 반정에 참여한 자들에게 수여된 정국공신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조광조가 제기한 논거에 따르면, 정국공신 중에는 연산군이 총애하던 신하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반정에 기여한 공로도 없는데 공신에 책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종으로서는 자신을 옹립한 세력을 일거에 제거해야 하므로 그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국공신 개정 문제와 관련된 중종과 조광조의 대립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의 요구를 받아들여 100여 명의 정국공신 중 문제가 있는 76명을 삭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 조치로 인해 조광조는 되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이 지시가 내려진 지 나흘 만에 기묘사화가 발생한 것이다. 사화 발생 직후 중종은 조광조를 극형에 처하는 대신 고신을 박탈하고 원방(遠方)에 안치하도록 조치했다. 조광조가 급박하게 지치를 추구해 물정에 어긋나긴 했지만 그것이 나라를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행위였다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종은 조광조를 유배지인 능주에서 사사했다.


조선인 지식권력의 국가 공인

성균관 유생들이 선조 6년(1573)부터 30여 년에 걸쳐 5현의 문묘 종사를 주장한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모두 사화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우선 김굉필과 정여창은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의 대표적 희생자들이었다. 조광조는 기묘사화(1519)의 희생자였으며, 이언적은 을사사화(1545)의 희생자였다. 그리고 이황은 사화의 직접적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친형 이해가 이기의 모함을 받고 갑산으로 유배를 가던 도중 양주에서 사망한 아픔을 갖고 있었다. 중종과 명종의 재위 시기에 발생한 사화로 인해 중앙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사림들이 선조 대에 사림정치가 부활되자 사화의 희생자들과 그들을 학문적으로 결집할 수 있는 이황을 중심으로 문묘 종사 운동을 재개했던 것이다. 이로써 정몽주에서 유래된 도통 계보의 출발과는 무관한 새로운 정치적 계보의 형성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이는 문묘 종사자의 선정이 도통의 신성한 기원과 그 연속성의 확인이라는 관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따라 새롭게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방증이다.


논의의 재개

선조의 호응을 얻지 못했던 5현의 문묘 종사 논의는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재개되었다. 그러나 광해군도 즉위 초기에는 선조와 마찬가지로 5현의 문묘 종사에 대해서는 경솔히 시행할 수 없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광해군의 입장 변화를 촉구한 계기는 광해군 2년(1610)부터 시작된 삼사와 예조의 요구였다. 먼저 같은 해 5월에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에 홍문관이 가세해 5현의 문묘 종사를 청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해군이 잇달아 거부하자, 7월에는 예조가 나서서 광해군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 후 9월 4일까지 예조를 중심으로 5현의 문묘 종사 절차를 확정하고 다음 날 이를 알리는 교서를 반포했다.


5현의 문묘 종사는 정몽주가 종사된 지 93년 만의 일이었고, 그것도 다섯 명이 한꺼번에 종사되는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유생들의 상소로 시작된 5현의 문묘 종사 청원에 예조를 중심으로 정부의 대신들이 가세하고 이를 국왕이 수용함으로써 지식권력의 국가 공인이 확정된 것이다.


그러나 갈등의 소지는 남아 있었다. 문묘에 종사된 5현은 조광조를 제외하면 모두 영남 출신 지식인들이었다. 지식권력의 국가 공인 자체가 정치적 타협의 소산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5현은 학문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매우 제한적인 대표성을 띠고 있었다. 그 결과 5현으로 획정된 계보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이 곧바로 제기되었다.


지식권력과 왕권의 길항

이이와 성혼, 서인 지식권력의 상징

지식권력의 새로운 상징을 문묘에 종사하려는 시도는 인조반정(1623)을 주도한 서인들에 의해 재개되었다. 서인들의 문묘 종사 논의는 반정에 성공한지 14일 만에 『논어』를 강론하는 조강 자리에서 처음 거론되었다. 당시 승지 민성징 등이 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했지만 인조 입장은 문묘 종사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경솔히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기사에 첨부된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논의가 정지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영남 사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아마도 인조는 영남 사림의 의견을 활용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청원을 거부함으로써 서인 세력의 독주를 막아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환국정치에 편승한 서인 지식권력

경신환국으로 남인 세력이 몰락하자, 서인들은 현종 사후 중단되었던 문묘 종사 논의를 같은 해 8월부터 재개했다. 이 때 황해도 생원 윤하주가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는 상소를 세 차례나 올렸다. 물론 숙종도 처음에는 서인 지식 권력의 국가 공인을 용납하지 않았던 선대 임금들의 대응방식을 답습했다. 그러나 1년 뒤 이연보를 포함한 전국의 유생 500여 명이 송나라의 양시, 나종언, 이동 등과 함께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결국 그들 다섯 명의 문묘 종사를 윤허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 세력이 재집권하자, 이들은 곧바로 이이와 성혼의 출향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기사환국 직후인 2월 22일부터 제기되기 시작한 출향 요구는 그 해 3월에도 계속되었다. 물론 출향 요구의 주된 논거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이의 불교 입문과 성혼의 명쾌하지 않은 정치적 행보였다. 숙종도 처음에는 경솔히 판단할 수 없다며 출향을 윤허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송시열이 주도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논의를 사설(邪說)로 규정하며 이들의 출향을 윤허했다. 결국 이이와 성혼은 문묘에 종사된 지 7년 만에 문묘에서 출향되는 비운을 맞았다.


갑술환국이 숙종의 결단으로 단행되었듯이, 이이와 성혼의 복향도 숙종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사실 숙종은 갑술환국 3개월 전에는 이이와 성혼이 본래 덕을 갖춘 사람도 아니고 숨기기 어려운 결점도 많았는데 자신의 잘못으로 문묘에 종사했다며, 향후 이들의 문묘 종사를 거론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문묘를 모욕한 죄를 물어 엄벌하겠다는 비망기를 내린 바 있다. 이들의 복향 문제는 갑술환국 후 20일 만에 유학(幼學) 신상동에 의해 다시 제기되었으나 이때에도 숙종은 과거의 출향 처분을 번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난처하다며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약 한 달 뒤 충청도 유학 임봉진 등이 재차 복향을 건의하자, 숙종은 예조판서 윤지선과 영의정 남구만 등의 신중론에도 과거 자신의 출향 결정을 후회한다며 전격적으로 복향을 결정했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는 인조 1년(1623)에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이후 서인 세력의 정치적 부침과 함께 종향-출향-복향을 반복한 끝에 71년 만인 숙종 20년(1694)에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로써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 학맥과 이이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 학맥이 국가가 공인하는 조선 지식권력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 확정된 5현의 문묘 종사가 지식인 사회의 정치적 희생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이루어낸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면, 이때의 문묘 종사는 특정 정치 세력의 문묘 종사를 둘러싼 정치투쟁의 산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지식권력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를 둘러싸고 왕권에 맞설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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