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위기극복의 묘책이 떠오르지 않을 때, 왜 이순신을 찾아야 하는가?
시작은 평범했지만 비범하게 역사 앞으로 나아간 위인, 이순신의 참모습을 알아본다!
KBS ‘TV 책을 말하다’, 네이버 ‘오늘의 책’, 동아일보 「흥미진진한 역사 읽기 30선」, 부산시교육청 선정도서인 『이순신의 두 얼굴』을 10년 만에 새롭게 보완한 책이다. 7년전쟁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이순신이 어떻게 평범한 인물에서 비범한 인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다룬 책, 『이순신의 두 얼굴』을 펴낸 지 1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은 아직도 초라해 보일 때가 많다.
저자 김태훈은 10년 전처럼 다시 밤잠을 줄이고 휴일도 반납해가며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빠져들었고, 그 과정에서 전작 『이순신의 두 얼굴』에서 미처 밝히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저자는 이순신도 때때로 잘못을 범한 ‘인간’이라는 가정 아래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솔직담백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아울러 7년전쟁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이순신이 어떠한 상황에 놓였는지를 객관적으로 짚어내고자 했다. 더 나아가 동서양 고금의 전쟁사를 동원해 이순신의 해전과 비교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이 책은 시작은 평범했지만 비범하게 역사 앞으로 나아간 위인, 이순신의 참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 저자 김태훈
1964년 대구에서 태어나 전국은행연합회에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김태훈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러다 시중에 이순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해주는 책이 별반 없음에 놀라, 이순신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책을 쓰기로 했다. 저자는 이순신도 때때로 잘못을 범한 ‘인간’이라는 가정 아래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솔직담백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아울러 7년전쟁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이순신이 어떠한 상황에 놓였는지를 객관적으로 짚어내고자 했다. 더 나아가 동서양 고금의 전쟁사를 동원해 이순신의 해전과 비교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 과정 끝에 나온 책이 2004년에 펴낸 『이순신의 두 얼굴』이다.
저자는 『이순신의 두 얼굴』을 펴낸 뒤 언론과 대중독자 등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조선사를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전문가 못지않게 심도 깊은 내용을 다루고 그 누구도 발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해내어, KBS ‘TV 책을 말하다’, 네이버 ‘오늘의 책’, 동아일보 ‘흥미진진한 역사 읽기 30선’, 부산시교육청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
현재가 어려우면 과거를 되돌아보고, 위기극복의 묘책이 떠오르지 않으면 비범한 인물의 삶을 되짚어봐야 한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다. 7년전쟁 당시의 상황은 한마디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안일한 위기대처 능력으로 전쟁이 발발했으며,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선조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살피는 데만 급급했다. 뒤늦게 명나라가 참전했지만 전시작전권을 잃은 조선은 한없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7년전쟁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이순신이 어떻게 평범한 인물에서 비범한 인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다룬 『이순신의 두 얼굴』을 펴낸 지 1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은 아직도 초라해 보일 때가 많다. 그래서 저자 김태훈은 10년 전처럼 다시 밤잠을 줄이고 휴일도 반납해가며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빠져들었고, 그 과정에서 전작 『이순신의 두 얼굴』에서 미처 밝히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우공이산(愚公移山)’ 고사의 ‘우공’처럼 오랜 시간 산을 옮기듯 내놓은 이 책은, ‘지금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오늘을 위해 밝히는 역사의 진실’이다.
■ 차례
머리말
제1장 이순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다
선조, 원균을 물리치고 이순신을 발탁하다 | 7년전쟁은 어느날 닥친 재앙이 아니었다
제2장 이순신의 조선 수군, 침몰하는 조선을 구하다
전쟁이 터질 일만 남았는데 조선은 그조차도 몰랐다 | 조선의 자업자득, 적의 부산 상륙을 허용하다 | 이순신은 전쟁 발발 20여 일간 무엇을 했을까? | 우리가 몰랐던 원균의 행적, 이제는 말해야 한다 | 서울은 함락되었지만 바다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 조선의 천하무적 전선, 판옥선 | 이순신의 제1차 출동 :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 제1차 출동, 그 뒷이야기 : 이순신, 조선의 희망이 되다 | 거북선의 진실 혹은 거짓 | 이순신의 제2차 출동 :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 제2차 출동, 그 뒷이야기 : 이순신, 부상당하면서도 승리의 기세를 떨치다 | 선조, 혼자 살고자 조선을 버리려 하다
제3장 한산해전, 큰 싸움으로 조선의 운명을 바꾸다
전라도 방어전, 적의 수륙병진을 저지하다 | 이순신, 학익진의 진가를 드러내다 | 이순신의 제3차 출동 : 한산해전, 안골포해전 | 용인전투의 승장 와키사카 야스하루, 이순신의 학익진에 갇히다 | 제3차 출동, 그 뒷이야기 : 일본의 수륙병진을 한산도 바다에서 좌절시키다 | 이순신의 제4차 출동 : 장림포해전, 화준구미해전, 다대포해전, 서평포해전, 부산해전
제4장 누구를 위해 휴전 협상을 하는가
명의 참전으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확대되다 | 이순신의 제5차 출동 : 웅포해전 | 웅포해전, 그 뒷이야기 : 이순신이 잃은 함선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 그들만의 강화 협상으로 서울이 조선 품으로 돌아오다 | 이순신, 조정이 감당할 수 없는 수륙합동공격을 들고 나오다 | 도요토미, 강화 협상에서 조선의 4도를 달라고 요구하다
제5장 이순신, 조선 최초로 3도수군통제사에 오르다
전쟁으로 신음하는 민초와 한산도에 뜨는 달 | 이순신, 조정에 수군만의 특별전형을 밀어붙이다 | 제2차 당항포해전, 강화 협정 중에도 이순신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 이순신은 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 이순신, 과연 23전 23승인가? : 무승부 또는 패전인 장문포전투 | 이순신, 내부의 적 원균을 제거하다
제6장 이순신의 실각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 궤멸까지
강화 협상에 뒤통수 맞은 도요토미, 다시 전쟁에 돌입하다 | 이순신의 실각과 그 이면의 진실을 찾아서 | 3도수군통제사 원균과 백의종군 이순신의 엇갈린 운명 | 원균, 연이은 패악으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다 | 조선의 버팀목 전라도, 적의 수륙병진에 함락되다
제7장 ‘명량, 기적의 바다’에서 ‘노량, 최후의 결전’까지
불가능한 전투,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 명량해전,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 명량해전, 그 뒷이야기 : 기적의 바다 | 돌아온 이순신, 궤멸된 조선 수군의 전력을 재건하다 | 조선과 명의 7년전쟁 최대 작전, 실패로 끝나다 | 노량해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제8장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이전의 이순신
그 시작은 평범했으나 | 평범에서 비범으로 | 시련에 굴하지 않고 강직의 삶으로 직진하다 | 이순신, 역사가 그를 부르다
제9장 7년전쟁과 오늘을 사는 우리
7년전쟁, 그 못다한 이야기 : 조선이 이긴 전쟁 대 일본이 실패한 전쟁 | 공신 선정, 비겁함의 극치 | 지금도 이순신의 전투는 현재진행형 이다
참고문헌
『이순신의 두 얼굴』 머리말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 침몰하는 조선을 구하다
전쟁이 터질 일만 남았는데 조선은 그조차도 몰랐다
대비되는 두 나라, 치밀한 전쟁 준비와 태평성대 구가
7년전쟁 발발 1년여 전인 1591년, 도요토미는 조선 출병을 선언하면서 규슈의 서쪽 해안에 나고야 성을 건설하여 전쟁을 총지휘할 대본영을 설치했다. 나고야 성은 군사 지후에 효율적이면서, 내부 반란 대비도 고려하여 지은 철옹성이었다.
일본이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한 황윤길, 김성일 등이 귀국했고, 여전히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특이한 점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조차 인식하지 못하던 조선이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면서 무의식적으로 7년전쟁 최대의 방어벽을 쳤다는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원균의 행적, 이제는 말해야 한다
원균은 격전을 펼쳤을까, 졸전을 벌였을까?
원균이 자신의 근거지인 경상우수영을 스스로 불태웠다는 것은 임박한 적의 침입을 앞두고 방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전투력이 형편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5월 6일(음력, 이하 동일) 이순신 함대에 최종 합류한 원균 함대는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이 전부였으니 초라한 정도가 아니라 형편없었다. 여기서 판옥선(板屋船)은 당신 전선(戰船)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실제 전투를 담당하는 전투함을 말하며, 협선(挾船)은 물자, 인원 등의 수송에 쓰거나 정찰, 연락을 담당하던 소형선이다.
왜 원균 함대는 이토록 형편없는 규모였을까? 원균의 경상우수영 소속함대 집결일인 4월 22일 또는 그 이후의 어느 날부터 경상우수영 함락일인 4월 28일 또는 그 이전의 어느 날까지 벌어진, 최대 6일 동안 벌어진 적과의 전투에서 많은 함선을 잃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원균 함대의 치열했던 전투를, 또 반대로 생각하면 민망할 정도의 졸전을 추정할 수 있다. 원균의 함대는 적과의 전투에서 적선 10척을 격침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여러 지역 소속 장수들이 한 척의 판옥선에 승선하거나 아예 판옥선이 없어 협선에 타야할 정도로 그 피해가 또한 상당했다.
원균의 함량미달 지휘통솔력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기록된 전라좌수영은 일사불란한 군대 그 자체였는데 경상우수영은 왜 이렇듯 망가져 있었을까? 원균은 3도수군통제사로 조선 수군 최고의 지위였는데 "여러 장수가 몰래 그를 비웃었으며" 또 그를 "두려워하지도 않으므로 호령이 행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부하들이 3도수군통제사 원균을 이 정도로 무시했다면 전쟁 초기에 그보다 낮은 직책인 경상우수사 원균을 더 심하게 무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원균의 부하들이 "만일 왜적을 만난다면 오직 도망가는 수가 있을 뿐"이라고 한 점이다. 실제로 7년전쟁 초기에 원균휘하의 많은 부하들이 전장을 이탈하여 도망 길에 올랐다. 군대 지휘관의 능력은 군대 전체에 미치는 만큼 원균의 함량미달 지휘통솔력은 7년전쟁 초기에 경상우수영의 군기가 무너진 결정적 요인으로 봐도 될 듯하다.
원균의 변명은 받아들일 수 없다
전쟁 전에 원균이 경상우수사로 보낸 짧은 시기는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면서 분주히 전쟁을 준비하던 소중한 시기와 겹친다. 그 피와도 같은 시간을 헛되이 흘려버린 원균의 변명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순신은 13척의 함선으로 적함 130여 척을 격파하는 명량해전의 기적을 만들었다. 원균은 승리는커녕 이순신의 그늘에서만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 그의 변명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이순신을 알려면 그 대척점에 원균이 꼭 끼어든다. 원균은 전쟁 초기에 적선 10척을 격파한 이후 이순신 함대에 따라다니며 이순신의 그늘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면서 원균은 이순신과 끊임없는 불화를 일으키며 조선의 수군은 물론 멀리 조정에까지 분란을 촉발시켰다. 결정적으로 원균은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때 거북선을 보유한 막강 화력의 조선 수군을 궤멸시켰다.
거북선의 진실 혹은 거짓
거북선은 이순신의 발명품인가?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이순신 이전부터 나온다. 거북선은 이순신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거북선의 출현은 적어도 1413년의 조선 태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1592년의 『난중일기』에서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와 같은 문장을 여러 번 접할 수 있는 것처럼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든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왔지만 실전에 활용하지 않았던 거북선은 이순신에 의해 다시 탄생했다.
한편 거북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절묘한 완성 타이밍이다. 거북선은 『난중일기』에서 1592년 2월 8일 처음 등장하여 1592년 4월 12일에 완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592년 4월 12일은 7년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이틀 전이다. 실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이순신이 거북선에 올라타 지휘했다?
거북선은 돌격용으로 제작된 특수 전함이었다. 따라서 거북선은 임무를 수행할 때 최일선에서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 거북선에 이순신이 탔다면 그것은 함대의 편제상으로도 큰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전 함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이순신이 돌격선에 탔다면 적의 집중 사격에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한산해전, 큰 싸움으로 조선의 운명을 바꾸다
전라도 방어전, 적의 수륙병진을 저지하다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조선은 7년전쟁 초기에 최강의 수군을 보유하고도 적군의 부상상륙을 고스란히 허용했다. 육군도 신식무기인 조총을 소지한 일본군에게 제대로 된 전투도 몇 번 없이 조선의 심장부 서울을 내주었다. 국가 차원의 무능이 여실히 드러난 가운데 국왕이 국토의 최북단인 의주까지 피신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의외로 전라도는 조선의 것이었다. 조선이 초기의 연전연패를 딛고 일본을 궁지로 몰아넣는데 전라도 지역은 막대한 기여를 했다. 7년전쟁 초기에 전라도 지역은 도요토미의 부산-서울-평양이라는 기본적인 전략 공격 루트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순신은 보고서에서 일본군이 "뱃길로 본도(전라좌수영)를 침범"하는 것은 물론이고 "육지로 침범"하는 것도 염려했다. 그는 일본군이 뱃길로 침범하면 자신이 "해전으로 결사적으로 담당"하겠다고 밝혔지만, "육지로 침범해" 오면 "전마(戰馬)(전투에서 쓰는 말)가 한 필도 없어서 대응할 도리가 없습니다."라며 암담한 심정을 피력했다. 이순신이 보고서에서 적의 바다와 육로를 통한 전라도 침략 가능성을 언급한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일본군이 그의 보고서를 엿보기라도 한 듯이 그러한 전투는 현실로 나타났다.
바다에서 한산해전이 펼쳐진 1592년 7월 8일, 육지에서는 웅치·이치전투가 동시에 벌어졌다. 조선군과 일본군이 전라도를 걸고 벌인 해전과 육전은 조선에게 7년전쟁 최고의 날을 선사했다.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은 해전에서 격퇴당하고 육전에서도 물러나 실패로 끝났다. 조선에게 전라도 방어전의 승리는, 허를 찔려 허둥지둥하던 조선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적에게 항전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이순신, 학익진의 진가를 드러내다
이순신이 제3차 출동 때 한산해전에서 학익진(鶴翼陣)을 구사하여 적을 궤멸시킨 것은 유명하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학익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이순신이 학익진을 처음으로 고안했다고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다케가 신겐의 전투는 한산해전보다 먼저 벌어졌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학익진은 이순신이 처음 고안한 진법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또 학익진은 해전만이 아니라 육전에서도 구사하는 전법인 것도 알 수 있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펼친 학익진은 적의 궤멸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그 이유로 조선 수군의 우세한 전력에 주목해야 한다. 언뜻 보아 함선 수에서 조선 수군이 열세인 듯하지만, 조선 함대는 협선 등을 제외하고 계산한 것이므로 판옥선만 55척인 조선 수군에 비해 대선 36척에 불과한 일본함대는 전체 화력에서 열세였다. 이순신의 학익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포의 화력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학익진도 예측 불능의 상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학익진을 구사할 때는 정확한 유효사거리의 계산과 그에 따른 일정한 간격의 유지가 필수적이다. 다행히 한산해전에서 격침된 조선 함선은 한 척도 없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학익진의 문제점을 사전에 간파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순신, 조선 최초로 3도수군통제사에 오르다
이순신, 과연 23전 23승인가? : 무승부 또는 패전인 장문포전투
장문포전투, 조선 단독의 최대 수륙합동공격
수륙합동작전인 장문포전투는 총지휘관 좌의정 윤두수, 사령관 도원수 권율, 부대지휘자 도별장 곽재우 선봉장 의병장 김덕령, 공격지원부대 충청병사 선거이였고, 예비대로 의령에 박종남, 김경로를, 함안에 겸상 순변사 이빈, 전라병사 이시언을, 견내량에는 순변사 이일을 배치했다. 수군은 이순신 3도수군통제사의 지휘 아래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이순신(李純信)이 모두 참여했다. 이순신의 수륙합동공격 요청에 착안하여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좌의정 윤두순의 개인 기획전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순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수륙합동공격이 현실화되었으니 기대해 볼 만 했다.
드러나는 장문포전투의 진상
1, 2차 전투 모두 조선 수군의 참패였다. 이 참패가 더욱 뼈아픈 것은 적군에게 함선 1척의 손실, 군사 1명의 사망자도 없었다는데 기인한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싸우려 했으나 적이 나오지 않아 싸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홍이상의 보고서로는 이순신의 지시로 군사 1백여 명이 상륙했으나, 50여 명의 적이 돌진해 와서 도망치다 많은 군사가 적에게 죽임을 당한 민망한 사건으로 바뀐다.
휘몰아치는 탄핵의 칼바람과 선조의 철벽 수비
1594년 11월 22일 조정은 떠들썩했다. 사헌부가 앞장서서 선조에게 윤두수를 파면하고 권율을 압송하자고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헌부는 이순신의 압송도 선조에게 청했다. 사헌부는 "서로 숨기고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도리어 장황한 말로 늘어놓고 망령되이 공훈을 보고"했다며 권율과 이순신을 나국(拿鞠), 즉 서울로 잡아와 신문하자고 했다. 또 이미 좌의정에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밀려 난 윤두수를 이번에는 파직시키자고 했다.
하지만 사헌부의 간청에 선조는 "무겁게 다스려서 신하로서 속이는 버릇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한 전날과 달리 움직이지 않았다. 사헌부의 처벌 수위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선조는 사관까지 지쳐서 나중에는 "양사가 권율 등의 일을 잇달아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라고 간략하게 기록했을 정도로 이순신을 보호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정에서 장문포전투에 대해 더 이상 논하지 않게 됐다. 자칫했으면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될 수도 있었던 장문포전투의 후폭풍은 선조의 철벽수비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이순신, 내부의 적 원균을 제거하다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는 절정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3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원균보다 높은 지위가 되었어도 그 불길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맹렬히 타올랐다. 그들이 선의의 경쟁을 했다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었으련만 그것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1594년 8월 30일의 『난중일기』다.
원균 수사가 하는 일이 매우 해괴하다. 나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하니, 천 년을 두고서 한탄할 일이다.
이순신이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자칫하다가 일본 함대의 포위 공격에 노출될 위험 때문이었다. 원균은 이순신이 채택한 전술을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상관인 이순신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제 이순신과 원균, 둘 중에 하나는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이순신, 원균을 제거하다
1594년 12월 1일, 조정은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이때는 장문포전투의 후폭풍이 아직도 궁궐의 뒤안길에 도사리고 있는 시점이었다. 처음에는 장문포전투에 대해 말하다가 뜬금없이 원균이 경상우수사 자리에서 쫓겨나게 생겼다. 비변사는 "이순신과 원균이 다 같이 중한 군율을 범했는데" 원규만 조치하는 것도 문제이므로 그냥 원균과 선거이를 맞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선조에게 아뢰었다. 선조는 자신이 원하는 답변이 나오자 "아뢴 대로 하라"고 전했다. 조정은 원균과 충청병사 선거이를 맞바꾸기로 했으나, 바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어떤 문제가 더 논의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경상우수사는 선거이가 아니라 비변사가 추천한 3번 배설로 정해졌다.
하지만 원균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뜻밖에 사간원이 원균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12월 19일 사간원은 선조에게 원균의 경상우수사 직책을 그대로 맡길 것을 선조에게 청했다. 사간원은 내지(內地), 즉 경상우수사에서 충청병사로 전출시키면 "주사(舟師)(수군)의 일이 형편"없어질 것을 염려했다. 그것을 고스란히 듣고 있던 선조는 사간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마디만 했다. "이미 정하였다(已定)!"
이것으로 이순신이 자청한 3도수군통제사 사임 파동은 끝났다. 이순신과 원균의 운명이 같이 올라섰던 저울대의 추는 인순신의 편이었다. 그 과정에서 조정 대신의 원균에 대한 평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많이 달라 불편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순신은 내부의 적, 원균을 제대로 내쳤다.
이순신의 실각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 궤멸까지
이순신의 실각과 그 이면의 진실을 찾아서
의문의 부산방화사건
이순신의 실각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혼재했다. 그 단초는 뜻밖에도 이순신의 부하들이 적의 근거지인 부산에 침투하여 적함과 군량미 등을 불태웠다는 이른바 부산방화사건에서 비롯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순신의 부하들이 특공대를 조직해 적의 근거지인 부산에 침투했다. 그들의 전공은 화려했다. 적함 20여척을 태우고 적의 건물 1,000호, 화약 창고 2개 군량 2만 6,000섬을 태웠으며 일본군 34명을 불태웠다. 그 정도의 전공이라면 웬만한 전투에서 승리한 것보다 공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직접 특공대원으로 활약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부하들이 이러한 전공을 세웠으니 그 또한 이순신의 공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그런데 이순신의 부산방화사건 전공은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흘렀다. 이순신의 보고서가 조정에 도달한 것은 1597년 1월 1일이었는데 그 다음 날인 1월 2일 이조좌랑 김신국(金藎國)의 보고서가 조정에 올라왔다. 김신국은 이순신의 보고서가 잘못이라는 것을 조정에 알렸다. 부산방화사건은 이원익의 부하들이 결행했고 이순신의 부하와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부하의 말을 믿고 보고서를 올린 이순신, 바로 이 점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이순신을 애정의 눈으로 보면 실수려니 할 수 있지만, 선조와 조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 문제로 조정은 들 들끓기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 도해 차단 작전
불행히도 조정의 타오르는 이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뜻밖에도 적장 고니시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지에 파견한 밀사 요시라(要時羅)에게서 비롯되었다. 이 정보가 옳다면 가토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가토는 조선의 두 왕자를 인질로 잡기도 한 일본의 맹장이였다. 요시라가 준 정보는 가토의 군대가 쓰시마에 도착할 것이고 그곳에서 대기하다 순풍이 불면 바다 건너 조선에 상륙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한산도에 주둔한 이순신이 도원수 권율로부터 가토의 도해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접한 것은 이미 시기적으로 늦었다. 따라서 그 사실을 주된 죄목으로 삼아 이순신을 실각시킨 것은 잘못이었다. 즉 이순신의 실각은 선조를 위시한 조정의 무능과 모함으로 어처구니없이 일어난 사건이었다.
조선의 버팀목 전라도, 적의 수륙병진에 함락되다
일본, 11만 대군으로 전라도를 침공하다
일본의 전라도 진격 작전의 핵심은 전주성 공격이었다. 전쟁 초기 전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여파로 전라도 지역에 대한 패권을 상실했다. 일본은 전주성을 점령하면 그것을 발판으로 진행될 다음 단계도 구상하고 있었다. 전주성 이남 지역으로 병력을 돌려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동시에 다른 병력으로 전주성 이북 지역으로 치고 올라가 조선을 흔든다는 전략이었다.
1597년 7월, 일본은 전주성 공격에 돌입했다. 가토의 선봉대는 곽재우의 군대와 일촉즉발의 대결 상태까지 갔으나 그대로 지나쳤다. 가토는 화왕산성을 칠지 말지 고민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제1차 조일전쟁 때에 보여준 가토의 용맹성에 비추어 의외였다. 아마도 그에게는 선봉대로서 전주성 점령이 우선이었을 터였다.
게이넨의 『일일기』에 의하면, 일본군은 "재보를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쟁탈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래서 침략군의 승려인 게이넨도 "도저히 눈뜨고 볼 수조차 없는 기분"이었다. 일본군은 "남원으로 넘어"가면서 전투와 전혀 무관하게 조선의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조선인을 쳐죽였으며, 그들에게 잡힌 조선인은 "금속 줄과 대나뭉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다녔다.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은 전라도의 요충지를 확보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의 목표인 전주성이었다. 일본의 좌군과 우군의 대병력이 접근하자 전주성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전주성의 관리들이 성을 비우자 민간인도 피란해 버리는 바람에, 전주성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일본의 좌·우군은 8월 25일 전주성에 무혈입성했다. 전략상 너무도 중요한 전주성을 허망하게 적에게 내주었다.
명량, 기적의 바다에서 노량, 최후의 결전까지
불가능한 전투,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바다로 다시 돌아온 이순신
이순신이 칠천량 대패의 비보를 접한 것은 이틀이 지난 1597년 7월 18일 새벽이었다. 이순신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조선 함대의 궤멸이었다. 그 안타까운 심정을 그날의 『난중일기』에 "16일 새벽에 수군이 야간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와 여러 장수 등 다수가 해를 입어 수군이 대패했다고 하니 들려오는 것마다 통곡이 나오는 것을 이길 수 없다."라고 기록했다.
선조는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한다. 백의종군의 신분에서 벗어나 3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것은 이순신의 명예가 회복되고 실질적인 힘을 되찾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름만 3도수군통제사일 뿐 그 휘하에는 아홉 명의 군관과 약간의 군사밖에 없었고 판옥선은 거의 다 사라진 뒤였다.
이미 선조에게 결사 항전의 자세를 피력한 이순신이었다. 선조는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했지만, 그 규모가 너무 미약하여 수군을 폐지하고 육전에 종군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이때는 이순신이 12척의 함선으로 수군을 재건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순신은 적의 대규모 공격을 눈앞에 두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지금 신에게는 전선 12척이 있습니다."라는 말은 이순신의 자신감을 잘 드러내준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깔보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자신감을 넘어 오만하다고 할 정도의 결의를 보인다. 하지만 정말 멋진 오만이다.
이순신이 이렇게 미약한 수군을 거느리고 곧 다가올 일본의 본 함대를 대비하며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전세는 이미 일본에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이순신이 벽파진에 진을 친 8월 29일, 일본의 좌군은 전라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남하했고 우군은 북상 중이었다.
>명량해전,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명량해전,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명량해전은 한산해전과 더불어 이순신 해전의 꽃이자 7년전쟁의 백미이다. 넓은 바다에서 적의 주력 함대와 정면으로 맞부딪친 한산대전에서 장중함이 느껴진다면, 단 13척의 함선으로 대규모의 일본 함대와 상대해야 했던 명량해전에는 비장미가 흐른다.
1597년 9월 16일의 날이 밝았다. 곧이어 명량의 좁은 해협을 타고 들어오는 적함이 보였다.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등이 지휘하는 130여 척의 대함대였다. 결코 물러날 수 없는 한판이었다. 이 13척의 함선이 곧 조선의 운명이었다. 조선 수군의 규모를 크게 보이려고 13척의 함서 뒤에 늘어서게 한 피란 어선 100여 척을 위해서라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순신의 함선이 휘하 부하의 함선을 뒤로 하고 불쑥 앞으로 나왔다. 선공은 이순신의 몫이었다. 이순신의 공격지시에 따라 일시에 지자포를 쏘고 현자포도 가세하자 바다가 화염에 싸였다. 이순신의 함선에서 한꺼번에 쏟아내는 불기둥은 바람처럼 날아 적함에 꽂혔고 우레처럼 적의 귓전에서 터졌다. 이순신의 함선과 적의 선봉 함대는 명량의 바람을 가르며 장대한 화력을 뱉어냈다.
명량 파도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대격전의 뒤에는 조선 민초의 안타까운 눈길이 있었다. 초라한 함대의 규모를 위장하려는 이순신의 뜻을 이해하고 나선 그들이었다. 조선 수군의 패배가 감지되면 재빨리 노를 저어 그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절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30여 척의 일본 함대가 주는 절망의 무게에 비해 13척의 불과한 조선 수군의 전력에서 전해지는 희망은 너무나 실낱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한낱 기우로 드러났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독전하던 이순신 함선에 이어 두 함선에 가세하더니 다시 두 척의 함선이 싸움에 가세했다. 그 와중에 적선 3척이 조선 함선과 부딪혀 뒤집히는 것도 보였다.
격전 속에서 쌍방의 함선이 내뿜는 화염이 점차 짙어졌다. 좁은 명량해협은 그 연기로 뿌옇게 덮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전투 장면을 가려버렸다. 포성이 멈추고 뿌연 연기가 바람에 날려가기 시작했다. 명량 바다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해협을 가득 메웠던 일본 함선은 간 곳이 없었다. 일본 함선은 사력을 다해 뒤로 도망치고 있었다. 승리였다! 기적이었다. 민초의 생명도 살아났다. 해상에서 육지에서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다가 차라리 목 놓아 통곡했다. 그 감격적인 통곡이 해상에서 육지에서 울려 명량 해협을 뒤덮었다.
노량해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노량해전, 최후의 격전
1598년 11월 18일, 밤바다를 가르며 노량으로 출동하는 이순신의 가슴에는 황량한 겨울바람보다 더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때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60여 척의 판옥선 규모로, 진린의 수군은 200~300척 규모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칠천량해전 때의 규모를 넘어선 것이었다. 1597년 11월 19일 새벽어둠 속의 노량 바다에 조명연합 수군이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새벽 2시, 아득히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어둠에 몸을 의지한 채 다가서는 적이 내는 노 젓는 소리였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이순신의 함대가 선봉의 적함을 겨냥했다.
불화살의 시위가 당겨졌다. 노량 바다를 덮은 어둠이 물러나자 그 자리는 적함의 차지가 되었다. 어둠 속에서 점점이 바다에 깔린 것이 어림잠아도 500여 척은 되었다. 일제히 포성이 울렸다. 선두에 선 일본 함선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조명연합군의 함대에서 연이어 포환이 날아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승기는 조명연합군으로 넘어갔다. 기세등등하던 일본군은 이순신의 저지선에 가로막혀 피해만 늘어났고 그 틈을 타서 조명연합군이 일본 함대의 한복판으로 치고 들어갔다. 일본 수군은 저지선의 돌파는 고사하고 밀물처럼 파고드는 조명연합군의 화력도 감당할 수 없었다.
이순신이 전군에 더욱 분발하라는 북소리를 울리려던 바로 그때, 달아나던 적군이 쏜 탄알이 이순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이순신의 가슴을 치고 나간 총탄은 그의 목숨을 요구하고 있었다. 좌우에 있던 부하들이 급히 이순신을 부축해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부하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전투가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前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노량해전의 전과는, 이덕형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에 일본 함선 200여척 격침에 사망자가 수천 명이라고 했다. 또 명의 군문에서 조선 조정에 통보한 전과는 적선 100척 포획에 200척을 불살랐다고 했다. 이를 종합하면 적선 200여 척의 격파로 보면 무난할 듯하다. 가히 7년전쟁 최대의 전공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이순신의 삶은 우리에게 몰러서지 않음이라는 화두를 선사한다. 이순신은 외부의 적은 물론이고 내부의 적에게도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이순신은 죽음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물러서지 않음의 절정은 전투였고 그 전투를 통해 한반도를 살렸다. 그래서 냉철했을 사관도 『선조실록』에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아, 애석하다."라고 탄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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