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서양 최초의 문명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세계사를 다시 생각한다!
‘청소년 인문교양 시리즈’ 3권. 서양 역사 5천년이 단숨에 읽히고, 그 오랜 역사의 실타래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서양 최초의 문명에서부터 고대, 중세, 근현대 역사의 흐름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한편으로, 서양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난 세계 역사의 실체를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생생하게 되살렸다.
서양사의 파란만장한 시대와 사건, 인물을 현장감 있게 서술하면서 그 역사의 의미를 제대로 짚어낸 것은 이 책의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 민주주의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본모습, 알고 보면 역동적이었던 중세 천 년, 식민지 침탈에 나선 서양 열강과 그로 인해 희생된 두 대륙, 미국 독립혁명의 진실 등 본문에는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 상식 그 너머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 저자 정헌경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에서 한국사와 서양사, 동양사, 역사교육론을 두루 익혔다. 그중 익숙해진 것은 한국사요, 재미를 느낀 것은 서양사이다. 졸업 후 중학교 두 곳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그 후 출판계에 입문하여 교과서와 참고서 개발을 시작으로 온라인 콘텐츠, 전집, 단행본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여러 책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중학교 시절 지리 공부를 하다가 이해되지 않아서 토씨 하나 빼지 않고 교과서 문장들을 통째로 외운 적이 있다. ‘친절한’ 글쓰기를 생각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책이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채 상당한 지식을 빼곡 담고 있다. 그 속에서 의미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 주목하여,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알기 쉽게 풀어 전달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삶이 녹록하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역사학과 글 쓰는 일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글쓰기와 결합하자 역사가 한층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앞으로 역사 속 사건과 인물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대중에게 다가가는 일에 힘을 쏟고자 한다.
■ 차례
추천사 | 세계사 입문서의 새 지평을 연 책!
머리말 | 우리 안의 서양사 바로 보기
지중해에서 시작된 서양 최초의 문명 | 민주주의의 고향? 아테네 정치의 본모습 | 알렉산드로스, 새로운 시대를 열다 | 제국으로 발전한 로마의 성공 비결 | 로마, 공화정의 몰락과 함께 저물다 | 알고 보면 역동적인 시간, 중세 천 년 | 중세 유럽을 지배한 크리스트교 | 종교를 내세운 폭력, 십자군과 마녀사냥 | 중세 유럽을 무너뜨린 변화의 물결 | 르네상스, 인간에 주목하다 | 루터, 근대의 시작에 불을 붙이다 | 종교전쟁으로 얼룩진 유럽과 새로운 변화 | 대항해 시대, 유럽의 팽창이 시작되다 | 절대왕정,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다 | 영국혁명, 입헌군주제의 전통을 세우다 | 자유로운 국가의 탄생? 미국 독립혁명의 진실 | 프랑스혁명, 또 다른 차별을 인정하다 | 혁명이 몰고 온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물결 | 산업혁명, 풍요로운 삶의 시작이었을까? | 유럽 열강의 다툼, 제1차 세계대전으로 번지다 | 또 한 번의 세계대전과 전후 세계
단숨에 정리되는 서양사 연표
참고 문헌
단숨에 정리되는 세계사 이야기
지중해에서 시작된 서양 최초의 문명
서양 최초의 문명이 탄생하다
인류 최초의 문명은 기원전 3500년경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탄생했습니다. 그 후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 중국의 황허 강 유역,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서 문명이 탄생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은 가까운 지중해로 전해졌습니다. 지중해의 동쪽에 자리한 오늘날의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는 에게 해가 있습니다. 이 일대에서 기원전 3000년경 에게 문명이라는, 서양 최초의 문명이 탄생했습니다. 이 문명을 섬 이름을 따서 크레타 문명, 또는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서 미노아 문명이라고 합니다.
크레타 문명은 고고학적 발굴에 힘입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1400년경에 세력이 크게 약해졌습니다. 가까운 산토리니(테라) 섬에서 사상 초유의 화산 폭발이 일어나 크레타 섬까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스 문화에 관한 우리가 몰랐던 진실
민족의 기원, 뿌리에 얽힌 여러 가지 신화가 있지만, 그리스신화는 유독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곤 합니다. 그러나 그냥 재미로 읽기에는 그리스신화 속의 세계가 너무나 복잡합니다. 엽기적이고 황당한 내용이 많고, 전쟁 장면에서는 폭력이 지나칩니다. 특히 제우스가 최고의 신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파란만장합니다.
간추리면 우라노스, 크로노스, 제우스 3대에 걸쳐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통치권을 빼앗고 나서 세상 질서가 세워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우스가 크로노스와 티탄들을 물리치는 이야기에는, 그리스인들이 이주해 와서 선주민(먼저 살던 사람)들을 힘으로 제압한 역사적 사실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화는 히타이트 신화의 쿠마르비 이야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쿠마르비는 하늘의 신인 아버지 이누를 죽이고 땅의 자식을 삼켰다고 합니다. 히타이트는 기원전 2000년경 소아시아에서 일어나 세력을 확장하면서 메소포타미아에 철기를 전한 민족입니다. 이들의 신화가 그리스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준 것이지요.
예전에는 서양 문화의 원천으로서 고대 그리스 문화의 독자성, 우수성이 많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주변 문화와의 교류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당시 앞섰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일대의 문화를 적극 받아들인 뒤 자기만의 색채를 곁들여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제국으로 발전한 로마의 성공 비결
200년이나 걸려 완성된 로마 공화정
로마 역사를 쓴 책 중에 폴리비오스가 쓴 『역사』가 있습니다. 폴리비오스는 그리스 역사가인데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로마에 끌려왔습니다. 그는 로마 성공의 비결을 정치체제에서 찾았습니다. 로마 공화정은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요소를 모두 가진 가장 이상적인 정체 체제라는 것입니다.
로마는 건국 이래 200여 년간 일곱 명의 왕이 왕정을 이어가다가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을 이루었습니다. 기원전 509년, 로마 귀족들은 왕정을 무너뜨린 후 집정관(콘술) 두 명과 원로원 의원 300명을 뽑았습니다. 집정관은 임기가 1년뿐이었고 서로를 반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서 상대방을 견제하면서 독재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 평민들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참정권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494년, 평민들은 집단행동에 들어갔습니다. 기원전 449년에는 12표법이 민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12표법은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그 후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결혼이 가능해졌고,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에 따라 집정관 둘 중 하나를 평민 중에서 뽑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로마는 기원전 509년부터 거의 200년 동안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과 투쟁이 이어진 끝에 공화정을 완성했습니다. 왕을 대신하는 집정관, 귀족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원로원, 평민을 지켜 주는 호민관과 민회가 모여, 폴리비오스가 말했던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이루어졌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조, 로마 귀족들
상류층의 도덕적 의무를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합니다. 노블리스는 귀족, 오블리주는 의무를 뜻합니다. 이 말은 지체 높고 돈 많은 사람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때 쓰이지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처음 실천한 사람들은 로마 귀족들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2차 포에니 전쟁 때 있었습니다.
카르타고를 물리치려면 군대와 식량, 무기를 보충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집정관들은 식량과 돈을 나라에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시민들은 돈도 없고 식량도 없는데 무엇을 바치라는 말이냐며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이때 집정관 라이비누스가 원로원으로 가서 귀족들이 먼저 부담을 져야 시민들이 따를 것이라는 연설을 합니다. 이 연설에 마음이 움직인 원로원들은 재산을 국가에 바쳤고, 덕분에 로마는 카르타고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로마 귀족들은 병역과 납세에 있어서도 모범을 보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적에게 재산을 빼앗기느니, 자신의 재산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금 또한 재산 정도에 따라 부과되었습니다. 특권에 상응하는 의무를 지는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시민들은 기꺼이 병역을 지고 세금을 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작은 나라였던 로마가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번영을 누리기까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부터 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고 도덕이 무너지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서서히 자라져갔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부의 대물림, 상류층의 병역 기피가 일어나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절실히 요구되는 가치입니다.
종교를 내세운 폭력, 십자군과 마녀사냥
서양의 편견으로 왜곡된 이슬람교
서양 선진국들이 대부분 크리스트교를 믿다 보니, 다른 종교는 편견에 의해 왜곡되기 쉽습니다. 이슬람교는 7세기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에서 무함마드가 창시한 종교입니다. 무장 세력 탈레반, 석유 파동 등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이슬람교의 본모습이 가려지곤 하지만, 이슬람교는 알라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기본 생각을 갖고 출발한 유일신교입니다. 알라는 이슬람교에서 유일신을 부르는 말이지요. 이슬람 경전은 『쿠란』입니다.
한손에는 『쿠란』, 다른 손에는 칼이라는 말은 서양에서 지어낸 것입니다. 이런 말은 마치 무슬림들이 칼을 들이대고 종교 개종을 강요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무슬림들은 서쪽으로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동쪽으로 중국 서부 산악 지대까지 진출했지만, 종교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정복지의 주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할 경우 인두세(개인에게 부과하는 세금)를 면제해 주었는데, 그 수입이 줄어들까 봐 오히려 개종을 억제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슬람 문화의 진가는 높은 수준의 학문에 있습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학문 연구가 금지된 중세 서양과 달리, 이슬람 세계에서는 지적 탐구가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도 이슬람 학자들이 인도에서 숫자 영의 개념을 받아들여 만든 것입니다. 또한 정확히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성지를 찾아가야 했기에 지리학, 천문학이 발달했습니다. 금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한 연금술은 화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알코올, 알칼리 같은 화학 용어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슬람 학문은 유럽에 전해져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누구든 마녀사냥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먼 옛날부터 동서양 어디든, 미래를 점치거나 병을 고치기도 하고 저주도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무당 같은 사람이지요. 크리스트교에서는 이들을 악마와 가까이 하는 사람으로 단정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잊지 않는 초자연적인 힘은 신 또는 악마에게서 나오는데, 신에게 그 힘을 받는 사람은 성직자뿐이라는 논리였습니다.
마녀 재판은 종교 재판소에서 이루어졌는데,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고문이 가해졌습니다. 이를테면 몸을 꽁꽁 묶어 강물에 던져, 만약 떠오르면 마녀로 판결했습니다. 일단 마녀로 의심되면 헤어 나올 길이 없었고, 누구와 함께 악마의 연회에 참석했는지 그 이름을 대라는 고문까지 이어졌습니다.
더러 남자도 있었지만, 마녀로 몰린 사람은 대부분 여자였습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여인들은 대게 적절한 약초를 캐어 병을 고쳐 주기도 하고, 산모가 아기 낳는 것을 돕기도 하면서 근근이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전염병이 돌거나 출산 과정에서 사고가 나는 등 불행이 닥치면, 이들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재앙의 원인을 가까운 데서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교회 또한 이런 심리를 이용해 마녀사냥을 부추겼습니다.
마녀사냥이 극에 달했던 16~17세기에 유럽은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교회와 왕은 크리스트교의 질서에 따라 사회가 안정되기를 바랐습니다. 마녀사냥은 그 수단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마녀사냥은 과학적인 사고가 확산되면서 잦아들었습니다.
자유로운 국가의 탄생? 미국 독립혁명의 진실
보스턴 차 사건으로 시작된 독립 전쟁
17세기부터 영국 사람들은 북아메리카로 이주했습니다. 주로 경제적인 어려움과 종교 박해가 원인이었습니다. 특히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간 영국인 100여 명은 미국인들의 조상으로 간주됩니다. 이들은 그해 11월 플리머스에 도착해 첫 겨울을 났습니다. 그 후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는 점점 늘어나 18세기 전반에는 13개 주가 되었습니다. 영국은 1756년부터 7년 전쟁에 끼어들어 프랑스와 패권 다툼을 벌이느라 식민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7년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자 영국은 부족한 재정을 매우기 위해 식민지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세금이 많아지자, 식민지 사람들은 비로소 본국 사람들과 처지가 다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대표 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영국 왕에게 탄원서도 보내고 납세 거부 운동도 벌였습니다. 결국 영국은 차에 대한 세금만 남기고 다른 세금들을 없앴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사람들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1773년 식민지 사람들은 인디언으로 변장하고, 보스턴 항에 머무르고 있던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배를 습격하여 차 상자들을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입니다.
영국에게 보스턴 차 사건은 식민지의 반란이었습니다. 영국은 군대로 보스턴 항을 봉쇄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맞서 식민지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대륙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독립선언에는 이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연권을 갖고 태어나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정부에 저항할 권리가 있음이 밝혀져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기초한 공화국이 세워졌다고 해서 미국 독립에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이후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합니다.
자유의 여신상에 가려진 불평등과 편견
미국 뉴욕 항 입구에 있는 리버티 섬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우뚝 서 있습니다. 이 여신상은 미국을 상징하는 기념물이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입니다. 그런데 이 여신상은 미국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이 여신상을 만들어 선물했습니다. 프랑스는 10년 걸려 여신상을 만든 뒤, 분해해서 미국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 선물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인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거대한 동상을 만든 프랑스를 이해하기 힘들었고, 쇠사슬에서 풀린 여신상의 발이 흑인 노예들을 자극할까 염려되었습니다.
자유의 연신상은 프랑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혁명의 이념보다 이민자들을 환영하는 뜻으로 해석되면서 미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국은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민자들을 대환영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미국은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자유롭게 사는 나라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디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미국에는 차별과 불평등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단적인 예가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입니다. 와스프는 앵글로색슨계 백인으로 개신교를 믿는 사람입니다. 미국에 처음 이주한 영국인들의 자손이지요. 이들은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인종 사이의 갈등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해 암암리에 미국이 정의로운 나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매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잘 포장된 미국 이미지를 접하더라도, 그 속의 진실이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산업혁명, 풍요로운 삶의 시작이었을까?
농촌에서 시작된 초기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어쩐지 도시에서 시작되었을 것 같지만, 실은 농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도시에서는 길드가 자유로운 활동을 규제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생겨나기 힘들었습니다. 18세기까지는 유럽에서 농업이 지배적이었고, 그런 가운데 초기 자본주의가 나타났습니다.
중세 봉건시대에 농민들은 농노라는 신분으로 영주에게 묶여 있는 처지였지만, 자기 땅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직물 산업이 발달하면서 양모 값이 치솟자, 영국의 지주(젠트리라는 새로운 지주)들은 농사 대신 양 기르기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영국에서 16세기에 일어난 인클로저(enclosure, 울타리 치기) 운동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이 농사짓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들은 농촌에 남아 임금을 받으며 농사일을 해 주기도 하고,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에 종사하기도 했습니다. 도시로 떠난 사람들은 산업혁명 전까지는 일자리가 별로 없어서 정처 없이 떠돌며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도시에 공장이 늘어나면서 공장의 임금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농민 중에는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부를 축적한 자영농들도 있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벅찰 만큼 땅이 늘어난 후에는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농업 경영을 했습니다. 이들 중에서 자본가가 나타났습니다.
산업혁명이 초래한 심각한 문제
인류 경제사를 통틀어 중요한 혁명을 두 가지만 꼽는다면 신석기 혁명과 산업혁명을 듭니다. 신석기 혁명은 인류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 비로소 먹을거리를 생산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산업혁명 역시 인류가 삶을 이어 가고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농업 사회에서는 점점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만큼 생산력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산업 혁명으로 기계가 생산을 담당하게 되면서 인류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 풍요의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가져온 물질적 풍요 뒤에는 심각한 사회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빈부 격차가 날로 커지고,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 놓인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일할 사람이 널려 있으니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았고, 노동 시간을 비롯한 환경도 악조건이었습니다. 1830~1840년대에는 영국 노동자들이 참정권을 요구하며 차티스트 운동을 벌였지만, 이 또한 좌절되었습니다. 그 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거센 저항이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새로운 사상도 나타났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구조상 생산 수단, 생산 과정 등에서 노동자가 소외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계급투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며 이를 통해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가 건설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본론』으로 유명해진 마르크스의 이 이론을 마르크스주의라 합니다. 1922년에는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1991년에 해체되었고, 자본주의는 체제의 모순을 그대로 끌어안고도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달리 더욱더 강고해졌습니다.
빈부 격차의 심화, 환경문제, 삶의 질 하락, 인간성 상실 등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갈수록 심화될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또 한 번의 세계대전과 전후 세계
독일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독재자, 히틀러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졌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남녀 보통 선거권, 내각제 등 민주적 헌법을 채택하고,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대공황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쓰러뜨렸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히틀러입니다. 히틀러는 미술 대학에 낙방한 후 좌절감에 젖어 있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그는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가 당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 이름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줄여서 나치당)으로 바꾸고 당의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는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자신이 있었고, 대중 선동기술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패배와 베르사유 조약 체결이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의 음모라고 주장했습니다. 히틀러의 인기에 힘입어 나치당은 선거를 통해 제1당이 되었습니다. 1933년, 팔순이 넘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습니다. 그 후 히틀러는 강력한 독재자로 군림했습니다. 히틀러가 집권하고 있던 시절의 독일을 제3 제국이라 합니다. 신성 로마 제국과 통일 후 성립된 두 번째 제국을 계승했다는 의미였습니다. 제3 제국은 곳곳에서 하일(만세) 히틀러를 외쳐 대는 나치 천하였습니다. 게슈타포라는 비밀경찰이 국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가운데 제국 전체가 전쟁 준비에 매진했습니다. 아이들은 유년단을 거쳐 히틀러 유겐트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강인한 신체에, 군대식 규율을 잘 따르고 나치 이념으로 철두철미하게 무장한 독일 청소년들이 양성되었습니다.
냉전 시대를 넘어 새로운 혼란 속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원자폭탄을 비롯한 최첨단 무기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된 결과 약 5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전쟁은 과학 기술의 방향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근본적 검토가 절실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계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체제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이 시기를 냉전 시대라 합니다. 냉전의 산물로 베를린 장벽과 한반도 분단이 꼽히지요.
공산주의는 전 세계 지표 면적의 3분의 1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자본주의 진영을 위협했습니다. 국가 권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당 간부들과 일반 국민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깊이 파였습니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독일은 1990년에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세계는 냉전의 시대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서로 다른 종교, 인종 등을 이유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잘 알려진 유고슬라비아 내전, 팔레스타인 분쟁, 르완다 내전처럼 동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 일부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준비해 갈 때입니다. 지난 역사에서 지혜를 얻는다면, 앞으로 닥칠 세계 변화에 조금은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요?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