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 문명의 수수께끼

   
필립 코펜스(역: 이종인)
ǻ
책과함께
   
18000
2014�� 04��



■ 책 소개 


가려져 있던 문명의 초창기를 파헤친 걸작!! 


기록된 역사 이전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탐구! 





이 책은 인류 문명이 4천 년 전 이집트에서 시작됐다는 통설에 의문을 품은 탐사보도 언론가 필립 코펜스가 그 이전에 이미 선진 문명이 존재 했었다고 밝힌다. 저자는 학계가 기존의 기원전 4천년이라는 문명 연대표의 패러다임을 유지하기 위해 객관적인 사실과 증거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신의 고고학 발견들과 다양한 역사적 고고학 자료를 수집 분석했으며, 학자들의 조사와 연구를 인용하는 등 객관적인 자료를 사용했다. 





신화 속 허구의 도시로 여겼던 호메로스 트로이는 실재하는 도시로 밝혀졌고,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천문시계 ‘안티키테라 기계장치’가 증명되었다. 또한, 예리코나 차탈 회위크는 기원전 8천 년이라는 연대기가 부여된 고대유적이며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는 탄소 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9천 5백년 이라는 연대가 부여되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사라진 고대 문명 아틀란티스와 무 대륙의 위치를 논리적으로 추적하고, 역사와 신화의 경계에 서 있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 저자 필립 코펜스 


1971년 벨기에 출생. 국제적으로 유명한 탐사보도 언론인이자 작가이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탐사보도 언론인이자 작가. 고대의 역사와 미스터리에 관련된 글을 「아틀란티스 라이징(Atlantis Rising)」과 「넥서스 매거진(NEXUS Magazine)」에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미국 히스토리 채널의 인기 있는 프로그램인 ‘고대의 외계인(Ancient Aliens)’의 주요 작가이자 출연자로서 1995년부터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에서 강연을 했다. 종교인들에게는 회의론자, 회의론자에게는 종교인이라고 평가받는데, 이러한 독특한 위치로 인해 합리적인 목소리를 내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2012년에 악성 종양으로 사망했다. 





지은 책으로 베스트셀러인 『고대 외계인의 문제(The Ancient Alien Questions)』을 비롯해 『로슬린 예배당 돌의 수수께끼(The Stone Puzzle of Rosslyn Chapel)』 『카노푸스의 계시(The Canopus Revelation)』 『신들의 땅(Land of the Gods)』 『새로운 피라미드 시대(The New Pyramid Age)』 『성배의 하인들(Servants of the Grail)』 『2012: 과학인가 허구인가(2012: Science or Fiction?)』 등이 있다. 





■ 역자 이종인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과 성균관대학교 전문번역가 양성과정 겸임교수를 지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양서를 주로 번역해왔으나 최근에는 발을 넓혀 현대 영미 작가들의 소설을 많이 번역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전문 번역가로 가는 길』 『번역은 글쓰기다』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남자』 등 다수가 있다. 





■ 차례 


들어가는 글 





1장 새로운 종교재판소 


날조된 진실과 사실이 된 루머 | 고고학계의 참호전 | 중국 피라미드의 존재 확인 | 보스니아 피라미드의 발견 | 잊힌 문명의 새로운 차원 | 금지된 고고학 





2장 구세계의 사라진 문명 


트로이를 찾아서 | 히페르보레오이로 항해하기 | 최초의 유럽 연합 | 어디에서 이집트로 왔는가 | 최초의 문명? 





3장 신세계의 사라진 문명 


기원전 3000년의 구리 교역 | 교역의 결정적 증거? | 아카코르의 전설 | 잃어버린 도시들 | 신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 쥐라기 도서관 | 골드러시 





4장 사라진 문명, 아틀란티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 기록의 전당 | 아틀란티스를 찾아서 |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왈할라 | 오리온의 양팔 | 플라톤, 선사시대를 기술한 역사가 





5장 선사시대의 천재 정신 


세계 최초의 컴퓨터 | 수정 렌즈 | 비미니 수정 | 신과의 대화 





6장 지구, 기원전 수만 년 전 


잃어버린 대륙 , 무 | 잃어버린 문명에 대한 탐색 | 중국 사막의 백인 지배자들? | 엘리시움의 들판 | 석기시대의 잃어버린 문명 | 석기시대의 성당들 





7장 이 땅에 천국을 만들어내다 


중심을 찾아서 | 갈리아에서처럼 아일랜드에서도 | 아일랜드에서처럼 이집트에서도 





나가는 글 





- 부록: 세계의 사라진 문명들 


- 감사의 말 


- 옮긴이의 말 


- 주 


- 참고문헌 


- 도판 목록 


- 찾아보기




사라진 고대 문명의 수수께끼


들어가는 글

새로 쓰는 역사의 연대표

역사는 과연 역사책이 가르치는 그대로일까? 내가 열 살이었을 때 학교 선생님은 그리스가 문명의 온상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1981년 당시에도 그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했었다. 이집트와 수메르는 그보다 훨씬 오래된 문명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벨기에 학교에서 사용되는 역사 교과서들은 그런 사실들을 다루고 있지 않았다.


예리코나 차탈 회위크의 존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알려져 있었고 또 기원전 8000년이라는 연대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교과서나 기타 인기 있는 고고학 책들을 펼쳐보면 이런 도시들에 대한 설명이 없다. 몇몇 소수의 고고학 간행물들이 그 도시들을 언급했지만 이 유적들을 돌발적으로 나타난 문명의 개별적 소지역으로 취급할 뿐이다. 이 도시들이 하나의 문명에 소속되었다는 게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데도 과학자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아틀란티스 같은 사라진 문명을 누군가가 언급하면서 과학적 조사를 하려 들면, 역사학자들은 그 사람을 조롱하기에 바쁘다. 그런 것들이 공개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모든 것이 뒤집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사라진 고대 문명에 관한 많은 보고서가 진실과 현실에 근거한다는 객관적 증거가 있다.


여러 세기 동안 연대기 편찬자들은 아마존 열대 우림의 오지에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의심해왔다. 과학은 이제 그 오류를 인정하고 있고, 인공위성 사진은 이 사라진 고대 문명의 흔적을 보여준다. 사라진 고대 문명들이 서서히 다시 발견되는 것과 동시에, 알려진 문명들에 관한 새로운 정보가 거의 날마다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문명의 최고 연대가 앞으로 밀려 올라가거나 확대될 때마다 이 새로운 정보의 제공자들은 공격을 당한다.


우리의 역사는 교과서나 역사서가 가르치는 것보다 더 흥미롭고, 더 오래되고, 더 인상적이다. 그리스와 같이 잘 알려진 문명들은 태양, 달, 행성의 궤도를 시각화하는 유물들을 갖고 있었다. 예리코나 괴베클리 테페 같은 유명한 고고학적 유적들은 인간의 문명이 우리 생각보다 시기적으로 수천 년이나 앞서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새로운 이미지에다 아틀란티스 같은 사라진 문명을 추가해도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문명의 스토리에 하나의 챕터를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은 6천 년이 아니라, 적어도 1만 2천 년은 되었다. 우리의 문명이 첫 번째 문명이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어떤 문명이 사라져서 재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새로운 종교재판소

중국 피라미드의 존재 확인

중국 국민들은 상당 기간 동안 진짜가 아닌 중국 역사를 배워왔다. 몰론 이런 사례가 중국만은 아니지만, 우리는 먼저 이 사례를 살펴볼 것이다. 중국의 거대한 농촌 지역에는 발굴과 탐사를 기다리는 유물들이 많이 있다. 20년 전만 해도 중국 외곽 지역에 이런 피라미드들이 실재한다는 증거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제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이 그 피라미드들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패러다임의 변화를 용납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아주 빠르게 바뀌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구의 방문객들은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1976년 마오쩌둥 주석이 사망하면서 외국인 여행자들의 규제가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실제적인 변화는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결정적인 변화는 철의 장막이 붕괴되면서 1994년에 찾아왔다. 그리하여 독일의 관광업자인 하르트비히 하우스도르프는 접근 금지 구역에 들어가서 중국 피라미드들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허가되었다. 이렇게 관광업자 겸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중국 피라미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1994년 3월 하우스도르프는 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 몇몇 피라미드를 더 볼 수 있었다. 1994년 10월에도 같은 피라미드에 올라가 그 근처에 있는 20여 개의 피라미드를 헤아렸다. 그것은 미국 공군의 시안 근처 인공위성 사진에 있는 장면이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그 사진에는 적어도 16개의 피라미드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오래된 습관(혹은 과학적 태도랄까)은 잘 사라지지 않았다. 1994년 3월 하우스도르프는 베이징 학계의 원료인 펑하오장, 그의 조수 셰돤위, 그리고 세 명의 동료를 만났다. 처음에 그들은 피라미드의 존재를 부인했으나, 하우스도르프가 서로 다른 3개의 피라미드를 찍은 사진 석 장을 보여주자 결국 승복했다.


중국 피라미드 이야기는, 한때 루머였던 것이 결국 진실로 판명되고 또 역사적 토론에서 누군가가 열린 마음을 보여주면 중요한 발견과 그에 대한 확인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고고학자들이 중국 피라미드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탐사와 확인에 직접 참여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사실로는, 그 발견 사항들은 고고학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주요 발견 사항이기는 하지만 기존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파괴할 정도로 논쟁적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스니아 피라미드의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보스니아 피라미드의 발견

보스니아는 앞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될지 모른다. 지난 10년 동안 피라미드는 이집트와 중앙아메리카에만 있다는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관점에 의해 대체되었다. 즉 피라미드가 전 세계에서 나타났으며 여러 시대, 여러 문명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발견 사항들은 언론의 주목을 아예 받지 못했거나 받더라도 폄하되었다. 심지어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런 새로운 사실들을 모르고 있다.


보스니아 피라미드 이야기는 2005년에 시작되었다. 이때 보스니아의 사업가인 세미르 오스마나기치가 비소코 마을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수수께끼 같은 비소시카 언덕을 보았던 것이다. 당시 그는 갖고 있던 마야 피라미드 책을 펼쳤는데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의 태양 피라미드 사진이 나왔다. 그러자 그는 비소시카 언덕의 모습과 태양 피라미드가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로소 피라미드를 태양 피라미드라고 불렀고 그 후 이 이름으로 굳어졌다. 그 결과 평소에는 평온하기 짝이 없던 비소코 마을이 세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고고학 지역으로 떠올랐다.


다행히도 이 구조물이 인공물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주로 이집트, 동유럽, 러시아 출신이다. 슬프게도 이들의 목소리는 서방 세계의 언론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서방 세계에서 보스니아 피라미드를 맹렬하게 부정하는 비판가는 영국 엑세터 대학의 앤소니 하딩 교수인데 하딩은 당시 유럽 고고학회의 회장이기도 했다. 2008년 8월 ICBP 직후에 하딩 교수는, 보스니아 지역을 좀 더 면밀하게 발굴할 가치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결론 내리고 추천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고고학계는 보스니아 피라미드를 사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하딩에 대해서는 이런 확인되지 않는 소문도 들려온다. 유럽 고고학회에 소속되었으면서 보스니아 피라미드 프로젝트에 협조하는 고고학자는 다른 지역에서 아예 발굴을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스마나기치는 피라미드 탐사를 지도해줄 고고학자들을 계속 찾아다녔다. 실제로 2010년 당시에 보스니아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고학 지역이었다. 그것은 시대가 이제 변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여러 해에 걸쳐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 후, 아주 흥미로운 얘기가 등장하고 있다. 보스니아 피라미드들은 당초 생각했던 것처럼 사라진 고대 문명의 증거가 아니라, 알려진 문명(즉 고대 유럽 문명)의 잃어버린 차원을 되찾은 것이라는 얘기이다.



신세계의 사라진 문명

잃어버린 도시들

아마존과 남아메리카는 계속하여 우리에게 그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 남아메리카 역사의 전모가 이미 드러났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마추픽추가 발견된 것은 기껏해야 1911년의 일이었다. 잉카족의 잃어버린 도시는 고대 도시 쿠스코에서 겨우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유적에 대하여 새로운 이론들이 나오고 있다.


1952년 빅터 폰 하겐은 티티카카에서 에콰도르의 키토에 이르는 옛 잉카 도로를 탐험하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 후 그는 잉카 문명이 엄청난 마스터플랜 아래 도로망을 구축했다고 썼다. 전천후 도로가 16,093킬로미터나 뻗어 있는 대규모 도로망이었고 그중 상당수가 공학 기술력의 경이였다. 많은 도로가 경계의 가장자리를 이루었고 또 내부적으로 영토 구분의 기능을 담당했다.


폰 하겐의 발견 사항은 미국인 저자 찰스 C. 만이 『1491』에서 제시한 관점과 일치한다. "미국인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아주 다르게, 콜럼버스 이전의 원주민들은 원시적 황무지에서 듬성듬성 떨어져 살지 않았다. 그들 주위의 땅을 개간하고 또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치면서 다수가 모여서 살았다." 찰스 만은 새로운 발견 사항들이 속속 나오면서 남아메리카의 역사를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찰스 만은 뒤이어 아메리카의 문화가 유럽 못지않게 발달해 있었으며 놀라운 통신수단과 운송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한다. 이것은 마야나 잉카 같은 잘 알려진 문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아마존 정글에서 페루 해안까지 모두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페루에 있는 몇몇 언덕들은 자연적인 지형물인 것으로 오해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들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로 밝혀지고 있다!


신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기원전 3500년 혹은 3200년 전에 작물이 전혀 자라지 않는 농업적 불모 지대인 페루의 노르테 치코에서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다. 피라미드를 포함하여 아메리카의 진정한 문명이 발견된 곳이기도 한 이곳은 기원전 3500년경에는 수메르나 고대 이집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지금까지 25개의 대형 의례·거주 지역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카랄이 가장 유명하다. 카랄의 고대 피라미드는 잉카 문명을 4천 년이나 앞서는 것이며 기자의 피라미드들이 건설된 시대보다도 1세기나 앞선다.


카랄은 아스페로에서 내륙으로 2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카랄은 1905년에 발견되었지만, 이곳에서 황금이나 도자기가 나오지 않자 곧 잊혔다. 진정한 패러다임 변화가 벌어지게 된 것은 1994년 루스 세이디 솔리스가 현장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거기에는 6개의 대형 평대형 마운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높이가 20미터에 한쪽 측면은 길이가 1백 미터 이상이었다.


그녀는 그 마운드가 피라미드라고 직감했다. 그녀는 그 마운드를 계속 조사하고 연구하여 2001년 4월 27일자 「사이언스」에 이 지역의 탄소 연대측정의 결과를 실었다. 그 연대에 의하면 카랄은 기원전 2600년 이전에 건설된 것이 명확했다. 그리하여 카랄은 기자 피라미드보다 더 오래된 피라미드를 가진, 신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피라미드라는 카랄의 명성은 오래 가지 못할 것 같다. 고고학자들은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북쪽으로 368킬로미터 떨어진 카스마의 세친 바호에서 5천5백 년 된 의식용 광장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당초 높이가 1백 미터는 되었음직한 플랫폼 피라미드가 있다. 탄소 연대측정은 이것이 아메리카에서 발견된 것들 중 가장 오래도니 구조물의 하나임을 밝혀냈다. 그리고 근 2천 년 뒤에 세로 180미터 가로 120미터의 다른 구조물이 세친 바호 단지에 추가되었다.


세친 바호의 발견은 이 피라미드 단지가 카랄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하여 신세계에서 문명의 여명은 그 연대가 점점 앞으로 올라가고 있다. 그리하여 신세계가 실은 구세계 못지않게 오래되었음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사라진 문명, 아틀란티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아틀란티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라진 문명이다.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 철학자이며 역사가인 플라톤이 이 사라진 문명을 언급한 이래 아틀란티스는 사람들을 매혹시켜 왔다. 플라톤이 아틀란티스를 언급한 이래, 세상은 그것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양분되었다. 회의론자들은 입을 모아 아틀란티스가 실제로 존재했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플라톤이 역사가라기보다 철학자라는 입장을 취한다. 여기에는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플라톤은 철학이 아니라 역사에 관한 책 속에서 이 잃어버린 문명을 언급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플라톤이 오해를 했다고 말한다. 아틀란티스는 그보다 최근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이다. 즉 기원전 1450년경에 크레타 근처의 미노아 문명을 끝장낸 티라 섬 용암 폭발이나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억이 그런 왜곡된 형태로 되살아났다는 얘기이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해보자면, 아틀란티스는 분명 하나의 뚜렷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기원전 9600년에 세상은 마지막 빙하 시대에서 막 빠져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해수면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그 시기에 따라서 어떤 문명이 바다에 삼켜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얘기이다.


게다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지만, 이미 플라톤 당시에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플라톤의 제자인 크세노크라테스는 크란토르라는 제자를 두었는데, 이 손자뻘 제자가 플라톤의 주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사실 고대에는 많은 사람이 아틀란티스의 존재와 플라톤의 주장의 타당성을 믿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전문적인 지리학자인 스트라보와 포시도니오스도 있었다.


아틀란티스를 찾아서

아틀란티스는 독특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이집트어 케프티우(Keftiu)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고, 케프티우는 원래 아틀란티스의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플라톤은 그런 식으로 설명했다. 아무튼 아틀란티스는 독특한 이름이고 또 독특한 이야기이지만 그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아주 어렵다. 아틀란티스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많은 연구자들 가운데 미국인 로버트 사마스트도 들어 있다. 그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가능성이 높다는 이점이 있다.


아틀란티스의 실종과 관련하여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 대륙이 천천히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사마스트에 의하면, 그런 사실이 위치를 파악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사마스트는 지중해가 아틀란티스의 소재지라고 본다. 더 구체적으로 그 위치는 키프로스 남동쪽 인근의 해역이다. 그 지역은 현재 1천5백 미터의 물밑에 가라앉아 있다.


사마스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편다. 대략 1만 년 전에 해협이 봉쇄되어 일찍이 세상이 보지 못한 거대한 폭포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지진이 일어나 그 통로가 다시 개방되자, 수백만 톤의 물이 천천히 지중해로 흘러들었고, 그 일대의 땅은 천천히 물밑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사마스트는 아틀란티스가 이 대재앙 때 사라졌다고 본다.


지중해의 여러 해안들은 문명의 발상지였다는 흔적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지중해의 동쪽 해안들에 기원전 8000년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아틀란티스의 실종을 기원전 9500년으로 보고 있으니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 미지의 문명이 피어났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만약 아틀란티스가 대서양에 있었다면 지중해 서부의 해안들이나 대서양 동부의 해안들, 예를 들어 스페인이나 모로코에서 그런 문명의 흔적들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문제는 키프로스가 아틀란티스일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의 지수를 적어놓았는데 넓이가 거의 1천6백 킬로미터였다. 이 정도 크기의 문명이면 아무 곳에서나 발견할 수는 없다. 일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지중해 가운데의 작은 화산섬인 티라는 더욱 후보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아틀란티스에 대한 추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사 시대의 천재 정신

수정 렌즈

아서 C. 클라크는 로버트 템플의 책 『수정 태양(The Crystal Sun)』에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썼다. "과학의 역사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며, 이 주제에 관하여 하나의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2000년에 출판된 이래 10년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혁명의 징후는 보이지 않으나(앞에서 설명한 그런 이유들 때문에), 이 책은 전 세계의 박물관에서 템플이 확인한 다양한 유물들(대부분이 렌즈)의 주목할 만할 분석서이다. 그의 결론은 이 모든 박물관이 획기적 증거를 가진 유물들을 그저 쥐고만 있다는 것이다.


템플은 현대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광학 기술과 렌즈 제조의 정교한 기술이 고대에 기본적인 사항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또한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측량하고 아주 치밀하고 정교하게 건축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템플은 카르타고의 탑을 포함하여 수많은 고고학적 증거들을 찾아냈다. 이런 증거들은 과학계의 오류를 통렬하게 지적한다.


렌즈의 활용은 지중해 문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템플은 거석문화에서도 렌즈를 사용했다고 보았으며 디오도로스의 히페르보레오이에 대한 설명은 그곳에도 역시 거대한 망원경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템플은 또 거석문화 시대의 영국이 적어도 망원경 하나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5백 개 이상의 거석 유적을 조사한 알렉산더 톰이 유적들의 정확성을 항상 강조한 점을 지적했다. 톰은 유적들을 그렇게 배치하려면 어떤 고도의 기술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템플은 그 기술이 망원경이다. 그와 유사한 장치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물론 고대에 렌즈가 있었다는 얘기는 그런 렌즈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과학계 내에서는 금기의 주제이다. 어떻게 렌즈들이 만들어졌는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이 모든 질문은 여전히 누군가가 연구하여 해답을 내놓기를 기다리고 있다.


신과의 대화

계약의 궤는 모세의 십계명을 새긴 돌을 넣어둔 상자이다. 인디애나 존스는 그 궤를 찾으러 다녔고, 그 운명과 행방은 계속하여 수백만의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 궤의 명성은 그 성물(聖物)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관찰 사실들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집트를 탈출해 올 때, 신은 모세에게 시나이 산에서 어떻게 궤를 만들어야 하는지 자세한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성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즉 하느님은 이 궤를 통하여 모세와 의사소통을 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하느님의 기술에 대한 설명이다.


물론 어떻게 궤가 작용했는지 다양한 설계가 제시되었지만, 우리가 그것을 알거나 검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성서의 문장을 있는 그대로 읽었을 때, 궤는 분명 하나의 도구였다. 나는 궤가 실제로 신과 소통하는 기술을 가진 물건이라고 본다. 이 궤가 가장 유명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그런 종류로 이 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신들의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신들이 그들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했다. 다른 다양한 고대 문명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여러 사례들을 통하여 이것이 특별한 선사적(先史的) 효과라는 것이 밝혀졌다. 조각상 내부에는 일련의 관들이 설치되었고, 그런 관들은 보통 작은 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방에서 성직자들은 몸은 숨긴 채 성스러운 말을 했다. 그러면 그 말이 관을 통해 흘러나와 마치 조각상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이런 얘기는 수정 해골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 해골들과 작업을 했던 심령술사들은 그들과 의사소통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준 정보를 받아 왔다고 말했다. 이집트 조각상 혹은 수정 해골 등은 우리 현대 사회가 정보 저장을 위해 사용하는 재료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석영을 시계에, 모래를 컴퓨터에 사용한다. 오늘날 컴퓨터 시대는 대부분 모래와 바위를 기본 소재로 사용하고 이것들은 정보 보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이런 과학적 사실을 발견했고 그래서 모래와 바위를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이런 재료를 조각상이나 수정 해골 등 더욱 매력적인 형태로 변형시킴으로써 예술적인 면마저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례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모든 사항을 간단히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아아, 그렇지만 이 분야에 있어 전혀 아무런 연구도 일어나고 있지 않았고 또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니 선조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냈는지(혹은 해냈는지 여부)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려야 나오게 될 것이다.



지구, 기원전 수만 년 전

엘리시움의 들판

1930년대, 프랑스 경찰 국장이자 고고학자 사비에르 귀샤르는 엘레우시스라는 이름을 가진 곳에 대하여 평생 연구해온 결과물을 출판했다. 그런 이름의 도시는 그리스와 이집트 두 곳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리스의 도시는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의 고향이기 때문에 더 유명하다. 그리스 신화에는 엘리시움의 들판이라는 사후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된 곳도 있었다. 귀샤르가 도달한 결론은 이러했다. 알레시아(혹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름)라고 불리는 모든 장소는 그 이름이 이미 선사 시대에 있었다는 것이다. 귀샤르는 그 이름이 인도유럽 어족에서 나왔다고 생각했고, 여행자들이 만나는 장소라고 정의 했다.


귀샤르는 연구와 관련된 대부분의 장소들을 직접 방문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그 장소들에 두 가지 특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금물이나 광천수가 담긴 인공 우물 주변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귀샤르는 또한 이 모든 장소가 동부 프랑스의 알레즈 마을에서 방사형으로 뻗어 나온 선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귀샤르는 그런 선들이 고대의 어떤 사람이 당시의 지도에 그려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런 선들을 기초로 실제 어떤 도로 체계가 있었는지 여부는 조사하지 않았다.


만약 귀샤르가 주장하는 선들의 체계가 도로라면,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높은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이며 심지어 극동 지역도 이동 범위 안에 있었다. 귀샤르의 연구 덕분에 우리는 기원전 10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때는 괴베클리 테페가 건설되었고, 아틀란티스가 유럽 지역을 지배했으며, 문명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고대의 이야기들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원전 10000년을 넘어 그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이 시기가 되면, 고고학적 유물들이 산발적으로 발견된다. 그 당시 문명의 중심이 지금은 바다 밑에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석기 시대의 잃어버린 문명

큰 규모를 가진 선사 시대 광산들과 채석장들은 최소한 남아프리카, 즉 주로 모잠비크 남부나 스와질란드에서 발견되었고 10만 년 전의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클 크레모가 볼 때, 이것들은 고대 문명의 증거가 되는 몇몇 최신 사례다. 그는 인류가 지구상에 수백만 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크레모의 이런 극단적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영국의 인류학자 리처드 러글리는 수만 년 전 석기 시대에 잃어버린 문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러글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인류의 선사 시대는 단순히 역사의 서장이 아니다. 오히려 기록된 역사가 석기 시대의 다채롭고 파란만장한 후기(後記)인 것이다" 그는 석기 시대의 탐험가들이 세계의 주요 대륙 모두를 발견했으며, 계산과 측정을 할 수 있었고 절단 및 두개골 수술을 포함한 의학적인 수술을 했으며, 이끼 연료를 실험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선사 시대의 기대 수명은 오늘날 제3세계의 사람들보다 높았고, 전쟁은 오늘날보다 덜 벌어졌다고 말했다.


러글리는 또한 널리 받아들여지는 고정관념을 타파했다. 예를 들어 농업의 채택이 일반적으로 문명의 증거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농업은 신장, 체격, 기대 수명 등의 저하, 거기에 더해 나병을 포함한 새로운 질병과 장애들을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더욱 최근에는 암, 비만, 그리고 당뇨병이 이런 재앙의 목록에 추가되었다. 선사 시대는 실제로 사람이 더 오래 살았고 질병에도 덜 걸리는 일종의 황금 시대였다는 것이다!


석기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발전되어 있었지만, 과학계는 이 시대의 발전을 인정할 수 없는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바로 문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문명이 이뤄낸 상당한 과학적인 성취를 아예 무시해버린다. 당시 선조들은 문자는 없었을지 몰라도 분명 말은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10만 년 전에 채광 같은 구체적인 작업을 준비할 수 있었겠는가? 채광을 하려면 최소한 과학, 사회 조직, 사업 관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미 수만 년 전에 채광 작업을 했던 선조들에게 우리가 인정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진보한 문명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과학계가 잘 인정해주지 않지만, 선조들은 분명 전문적인 천문학자였다. 거석 구조물들은 별의 현상에 따라 전문적으로 배열되어 있었고 동굴 벽화들은 최소한 달과 특정 별자리의 주기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 라스코 동굴의 한 그림은 오록스(소과의 멸종된 포유류) 위에 6개의 큰 점을 찍어두었다. 고대에는 플레이아데스 성좌를 황소자리의 어깨나 등 위에 그렸다. 그들은 이 구석기 기대의 동굴 벽에 그들이 관찰한 밤하늘의 성좌들을 그려놓은 것이다. 이런 동굴 벽화들은 주로 선조들이 동굴에서 살았다는 생각을 뒷받침해왔다. 동굴은 단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최초의 자연적 성당(聖堂)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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