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이덕일(사진: 권태균)
ǻ
옥당
   
13000
2014�� 04��



■ 책 소개 


조선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부자의 엇갈린 선택, 


그 파란의 역사! 





『정도전과 그의 시대』에 이은 이덕일의 역사특강 두 번째 책. 저자는 이 책에서 사생을 함께했던 동지 정도전을 제거하고 골육상쟁의 비극을 겪으며 천륜이라 불리는 부자지간에서 역사의 라이벌이 된 이성계·이방원 부자의 파란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한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개국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왕대비 안씨를 압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위에 올린 주인공이었다. 그럼에도 태조는 이방원을 배제하고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왕이 되고 싶은 이방원에게 개국공신 정도전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방원은 정도전이 태조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 죽이려 했다고 트집을 잡아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 일파와 세자 방석을 살해했다. 그런데 난에 성공한 이방원은 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방과를 세자로 삼는다. 그의 숨겨진 계획은 무엇일까? 500년 조선 왕조의 기틀을 잡기까지, 부자를 둘러싼 조선 초기 파란의 역사와 만난다. 





■ 저자 이덕일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필두로 한국사의 쟁점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는 서술 방식으로 역사서 서술의 새 장을 열었다. 1차 사료를 중심으로 서술하면서도 뚜렷한 관점과 흡입력 있는 문체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당대의 문제를 현재의 문제로 전환시켜 왔다. 한 개인의 삶을 통해 한 시대를 바라보는 서술 방식으로 인간과 시대가 함께 살아 숨 쉬는 역사서 서술을 지향해왔다. 중앙공무원교육원의 고위공직자 과정 최우수 강사 선정을 비롯해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사 강사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 『정도전과 그의 시대』『세상을 바꾼 여인들』『김종서와 조선의 눈물』『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조선 왕 독살 사건 1, 2』『이회영과 젊은 그들』『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 1, 2』『조선 왕을 말하다 1, 2』『윤휴와 침묵의 제국』『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사』『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등이 있다. 





■ 사진 권태균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뿌리 깊은 나무」「중앙일보」 사진부 기자로 일했다. 한국의 역사,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사진 작업을 하고 있으며, 2014년 현재는 신구대학 정보미디어학부 사진영상미디어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차례 


서문_ 이성계·이방원 부자를 둘러싼 조선 초기 파란의 역사와 만난다! 


운명의 날 | 이색의 변심과 정도전의 위기 | 세자 책봉 문제로 엇갈리는 운명 | 이방원의 눈물 





1장_이성계 일가의 등장 


하늘의 명을 받다 | 무학대사와의 만남 | 고려 조정에 첫선을 보이다 | 최고의 활 솜씨로 무명을 떨치다 | 고려의 계속되는 내우외환 | 승승장구하는 이성계 | 무너지는 군사제도, 몰락하는 고려 사회 | 말 위의 사람 이성계, 서재의 사람 정도전 | 군신 관계를 넘어서 동지로 





2장_고려 500년, 최후의 날 


혼란에 빠진 원나라와 공민왕의 북강회수운동 | 공민왕 시해 사건 | 명 사신 채빈 암살과 친원파의 승리 | 명나라의 횡포와 요동정벌 | 이인임의 몰락 | 최영, 사전 혁파의 중요성을 깨닫다 | 비참한 말로로 치닫는 우왕의 운명 





3장_이성계, 새 왕조를 열다 


요동정벌과 사불가론 |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다 | 요동치는 정세 속, 과전법이 반포되다 | 정몽주의 반격 | 이방원의 등장 | 고려의 마지막 임금, 이성계 





4장_이방원, 아버지를 몰아내다 


무리한 세자 책봉이 불러온 위기의 씨앗 | 친명에서 반명으로, 다시 불거지는 요동정벌론 | 왕자의 난과 정도전의 처단 | 이성계의 분노 





5장_엇갈리는 부자의 길 


아버지를 달래는 이방원 | 깊어가는 이성계의 딜레마 | 반 태종 봉기에 가담한 이성계 | 측근도 가리지 않는 피의 숙청 | 종부법을 제정하다 | 사대부들의 반발 





6장_새로운 시대의 시작 


악역의 눈물 | 폭군과 성군 사이 | 하늘이 시켜서 한 일이다 | 어긋나는 양녕과의 관계 | 양녕을 폐위하다 | 아직도 남은 악역들 | 세종 르네상스를 잉태하다 





■ 연표 | 태조 이성계의 일생 


태종 이방원의 일생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이성계 일가의 등장

하늘의 명을 받다

이성계를 생각하면 먼저 개국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천명에 대해 검토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천명이란 무엇일까요? 하늘이 세상을 직접 통치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한 사람에게 명을 내려 대신 세상을 다스리게 한다는 유가 사상입니다. 『논어(論語)』 9장이 「자한」편인데, "공자는 이익과 천명과 인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다"로 시작합니다. 공자는 천명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는데, 그중 『사기(史記)』 「공자 세가(孔子世家)」에서 명에 대해 한 이야기 중에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이 있습니다.


공자가 지금의 산시성 북부에 있던 북방의 맹주 진나라에 가기 위해 황하에 도착했습니다. 진나라의 실권자 조간자를 만나려는 길입니다. 그런데 공자가 황하에 도착했을 때 조간자가 진나라의 대부 두명독과 순화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황하를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물이 넓고도 넓구나. 구(丘, 공자)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하는 것이 운명인가!(『사기(史記)』「공자 세가(孔子世家)」)"라고 한탄했습니다. 이때의 운명인가를 천명인가로 해석해도 마찬가지 뜻입니다. 조간자가 덕 있는 대부 두 사람을 죽였으니 그에게 가서 몸을 의탁할 수는 없다는 뜻이죠. 그래서 하늘은 자신에게 황하를 건너는 명을 주지 않았다는 한탄인 것입니다. 이처럼 황하 하나 건너는 것에도 명을 언급할 정도니 나라를 개창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명을 받아야 하는지 짐작할만합니다.


이성계를 추대한 역성혁명파는 이성계가 천명을 받았다는 여러 일화를 남겼습니다. 그래야 조선 개창이 하늘의 뜻으로 합리화되기 때문이지요.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만든 것은 새로 만든 훈민정음을 시험해보려는 뜻도 있었지만,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도 강했습니다. 그래서 『용비어천가』에는 천명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용비어천가』1장은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라는 노래입니다. 해동 육룡은 이성계의 4대조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을 뜻합니다. 이 여섯 인물에게 천명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용비어천가』13장은 "노래를 부르는 이 많되 천명을 모르셨는데, 하늘이 꿈으로 알리시니"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성계가 요동정벌의 명을 받고 위화도에 갔을 때 많은 사람이 노래를 불렀답니다. "서경성 밖에 불빛이요, 안주성 밖에 연기로다. 이 원수(이성계)가 그 사이로 다니시니, 우리 백성을 구하시옵소서"라는 노래였습니다. 이성계는 아직 확신이 없었는데, 꿈에 하늘에서 금척(金尺, 금으로 만든 자)을 내려주면서 "공의 자질이 문무를 겸했고 백성들이 모두 심복하니, 이 자를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을 이가 공이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금척으로 천명이 내렸음을 알렸다는 것이죠. 『용비어천가』83장이 이 금척에 대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군위(君位)를 보배라 할새 큰 명(命)을 알리려고 바다 위에 금탑이 솟게 하시니 / 자(尺)로서 제도가 생길새 인정(仁政)을 맡기시려고 하늘 위에서 금척을 내리시니."



고려 500년, 최후의 날

혼란에 빠진 원나라와 공민왕의 북강회수운동

고려의 멸망과 조선 왕조의 개창은 동아시아의 변화라는 큰 틀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관점을 놓치고 고려 내부의 일에만 초점을 맞춰 보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고려 말 조선 초, 대륙에서는 원·명 교체라고 불리는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첫선을 보인 것은 공민왕 5년(1356)입니다. 명나라는 그보다 12년 후인 1368년에 건국됩니다.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등장하기 한 해 전, 이자춘은 공민왕의 북강회수운동에 가담합니다. 반면 쌍성총관 조소생은 공민왕에게 저항하다가 북쪽으로 도주하게 됩니다. 공민왕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군주입니다. 재위 4년(1355) 북강회수운동에 나서고, 그 다음 해에 아주 중요한 일을 단행합니다. 기철(奇轍) 일당을 주살한 것입니다. 기철은 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가 된 고려 여인 기씨(奇氏)의 오빠입니다.


공민왕이 북강회수운동을 벌인 것이나 기철 일당을 주살할 수 있었던 것은 원나라가 그만큼 약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원나라는 왜 약화되었을까요? 인구에 비해 통치 지역이 너무 넓었다는 점과 라마불교를 너무 깊게 신봉했다는 점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라마불교는 평생 한 번은 승려가 되어야 하고, 집안 남자 중 한 명은 승려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적은 인구로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면서 이런 계율을 가진 종교가 국교가 되다 보니 급속도로 세가 약화된 것이 중요한 요인입니다.


게다가 중국 남방에서는 주원장이 나타나 급속도로 세를 불리고 있었습니다. 원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여기저기서 봉기군이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장사성, 진우량 등이 반원 봉기를 주도했습니다. 한나라를 건국한 진우량이 가장 강했는데, 주원장은 1363년 당시 중국에서 가장 큰 담수호였던 중국남방의 파양호에서 진우량 군과 맞부딪칩니다. 이때 진우량 군은 무려 60만이었고, 주원장 군은 20만이었습니다. 주원장은 병력의 열세를 딛고 동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 화공을 펼쳐 진우량 군을 꺾었습니다. 이에 힘을 얻어서 이듬해 오왕으로 자립합니다.


왕을 자칭했던 주원장은 남방을 통일하자 황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원나라 순제의 연호였던 지정 28년(1368) 1월, 응천부에서 황제를 자칭하며 즉위하고 홍무를 연호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해 윤7월 서달을 보내서 북벌을 단행하게 합니다. 원나라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난 때는 공민왕 17년(1368)입니다.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선을 보인 지 12년 후죠.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추구한 것이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입니다. 같은 해에 명나라가 건국되지만, 아직 명나라는 중원 전역을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공민왕은 재위 21년(1372) 홍사범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한 해 전에 명나라가 사천 지역에서 봉기했던 명승을 평정한 것을 축하했습니다. 정몽주가 서장관으로 홍사범을 따라 명나라로 갔습니다. 이때 명나라 수도는 남경이었는데, 아직 만주가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배를 타고 가야 하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남경까지 무사히 가서 명 태조 주원장을 만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귀국길이 문제였습니다. 바다 가운데 허산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회오리바람이 일었습니다. 배가 파선해서 바위섬에 겨우 표착했는데, 이 와중에 정사 홍사범은 그만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홍사범은 남양부원군 홍규의 증손이자 문하시중 홍언박의 아들인데, 이런 명가 출신인 그가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죽었으니 당시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정몽주는 말안장 안쪽에 흙이 튀지 말라고 까는 말다래 같은 것을 먹으면서 13일 동안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주원장은 선박을 보내 정몽주를 맞아 후한 대접을 하고 귀국시켜 주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정몽주는 명나라 주원장으로부터 직접 신임을 받는 인물이 됩니다. 『고려사』「정몽주 열전」은 "정몽주는 고려가 건국되자 그 조정에 적극 요청해서 가장 먼저 명나라에 귀부했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적극적인 친명파였던 정몽주를 숙명적 친명파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정몽주에게 친명을 이념으로 만든 계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몽주가 당연히 위화도 회군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몽주가 위화도 회군에 찬성해서 회군공신까지 되었다고 하면 크게 놀랍니다. 저는 정몽주가 위화도 회군에 찬성한 가장 큰 이유를 거의 이념 수준이 되어버린 친명 성향의 표출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성계가 나중에 정도전과 요동정벌에 나서는 것은 친원파로 살아온 젊은 시절의 경험이 개입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성계, 새 왕조를 열다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다

드디어 역사적인 요동정벌군이 북벌에 나서 그해 5월 위화도에 진을 쳤습니다. 『고려사』는 시종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라는 식입니다. 물론 회군을 합리화하려는 조선 측의 시각이죠. 거꾸로 이성원수 홍인계와 강계원수 이억이 먼저 요동으로 건너가 적군을 죽이고 돌아오니 우왕이 기뻐하면서 금정아와 비단을 하사했다는 상반된 기록도 있습니다.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저는 만일 우왕과 최영 등이 요동정벌군에게 땅을 부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면 요동정벌군의 사기가 낮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해서 회군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선왕인 공민왕이 명나라에 사대했는데 지금 명나라를 치는 것은 선왕의 유지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성계는 또한 장마철이라 갑옷이 무거워져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하다는 이유 등을 덧붙이면서 조민수에게 회군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우왕은 환관 김완을 보내 진군을 재촉했지만, 이성계와 조민수는 거꾸로 김완을 억류했습니다. 신하가 임금이 보낸 사신을 억류했다는 사실은 군신 관계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때 요동정벌군이 압록강을 건넜으면 과연 요동정벌에 성공했을까요? 최영은 고려 군사만으로 명나라와 싸우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최영은 배후라는 인물을 북원에 보내 협공을 제의했습니다. 『고려사』는 "원나라는 사막으로 도망하여 헛 칭호만 일컫고 있었는데 최영이 그들의 응원을 받으려 했으니, 그 계책이 소루(疏漏)했다"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원 군사와 연합하려던 계책은 허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명나라는 아직 중원을 통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왕의 말대로 조금만 더 빨리 요동정벌군을 보냈으면 훨씬 성공 가능성이 컸을 것입니다. 명나라는 홍무 20년(1387) 9월 영창후 남옥에게 15만 대군을 주어서 북원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4월 말에는 포어아해(지금의 중국과 몽골의 국경 부근의 패이호)라는 곳에서 북원 군사와 결전을 벌입니다. 이 전투에서 명군이 크게 이기고, 북원은 황자 지보노와 비빈, 공주 등 여인 120명, 관속 3,000여 명, 남녀 백성 7만 명이 포로로 잡히고, 가축 15만 마리까지 빼앗겨 결정적으로 약화됩니다.


이렇게 북원의 세력은 약화되었지만, 그렇다고 주원장이 중원을 통일한 것도 아닙니다. 그해 8월에는 월주에서 또 봉기가 일어나는 바람에 군사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명나라도 아직 중원을 통일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최영의 계획대로 북원의 기병과 합세했다면 전세는 어찌 흘러갔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위화군 회군을 단행했습니다.



이방원, 아버지를 몰아내다

무리한 세자 책봉이 불러온 위기의 씨앗

만 474년 만에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가 들어섰습니다.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 "나라 이름은 그대로 고려라고 하고"라고 말했지만, 이것이 일시적인 수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성계는 즉위년(1392) 11월 예문관 학사 한상질을 명나라 수도 남경으로 보내서 국호를 정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조선이 제시한 국호는 조선과 화령, 두 개였습니다. 이성계는 충숙왕 4년(1335) 10월 11일 화령부에서 태어났는데, 그 탄생지를 조선과 함께 국호의 하나로 요청한 것입니다.


명나라는 태조 2년(1393) 2월 "동이의 국호 중에는 조선이 아름답고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면서 조선을 선택했습니다. 명나라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택한 것은 기자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조선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 있었으니, 단군, 기자, 위만이 바로 그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자 앞에 단군을 놓아 우리 민족의 시조가 단군임을 명시한 것입니다.


고려라는 국호에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왕건의 의지가 들어가 있었다면, 조선이라는 국호에는 단군 조선을 잇겠다는 정도전의 의지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국호를 바꾼 것은 이제 새 왕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474년 만에 고려를 대체한 새 왕조가 얼마나 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자 책봉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공양왕이 세자 왕석을 명나라로 보낸 것은 나름 뛰어난 선택이었습니다. 친명 사대를 명분으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이성계 측에서 명나라에서 세자 왕석을 고려의 차기 국왕으로 대접한 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양왕은 너무 서둘렀습니다. 서서히 시간을 갖고 명나라라는 카드를 유효적절하게 활용했으면 그렇게 빨리 종말을 맞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공양왕은 명나라라는 힘의 지렛대를 너무 빨리 사용해버렸습니다.


이성계에게도 세자 책봉은 공양왕만큼이나 중요했습니다. 새 왕조 개창 세력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국공신들은 개국 직후부터 세자 책봉을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개국공신들과 이성계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태조실록』은 "처음에 공신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이 세자를 세우고자 청하면서 나이와 공으로써 세우려고 하니 임금이 신덕왕후 강씨를 중하게 여겨 방번에게 뜻을 두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때가 조선이 개국한 지 불과 한 달쯤 지난 8월 20일경입니다. 이성계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고향에서 얻은 향처 한씨와 나중에 개경에서 얻은 경처 강씨입니다. 한씨에게서 6남 2녀를, 강씨에게서 2남 1녀를 얻었는데, 한씨는 개국 한 해 전인 1391년 9월 12일 만 쉰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몽주 등의 공세로 한창 정도전, 조준 등이 위기에 빠지기 시작할 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계가 지쳤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성계가 세자 책봉에 관해 묻자 배극렴은 "적장자를 세우는 것이 고금에 통하는 의리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한씨 소생의 맏아들을 세우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태조가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성계는 다시 조준에게 "경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물었습니다. 조준은 "때가 평안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이를 우선하오니, 원하건대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라고 답했습니다. 평안할 때라면 한씨 소생의 맏아들을 세우고, 어지러울 때라고 생각되면 개국에 공이 있는 이방원을 세우라는 소리일 것입니다. 절묘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때 신덕왕후 강씨가 이를 엿듣고 통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습니다. 자신이 낳은 방번을 세자로 삼아달라는 눈물의 항의입니다.


이때 이성계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공과 사가 부딪힐 때 공을 선택하면 잠시는 괴로워도 장기적으로는 편해집니다. 그러나 사를 선택하면 잠시는 편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괴로워집니다. 그러나 웬만한 내공이 없는 경우, 항상 공은 멀고 사는 가깝습니다. 이때 이성계가 배극렴이나 조준의 간언을 받아들였다면 신덕왕후 강씨는 잠시 불평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받아들였을 것이고, 왕조는 편안했을 것입니다. 이성계도 마찬가지로 형제들끼리 담장 안에서 싸우는 형제혁장의 비극을 목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이성계의 장자 진안대군 방우는 만 서른여덟이었고, 방원은 만 스물다섯이었습니다. 열세 살 위의 적장자를 세웠는데 방원이 난을 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번의 나이는 만 열한 살, 방석은 열 살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태조가 종이와 붓을 조준에게 주면서 방번의 이름을 쓰라고 했지만, 조준은 땅에 엎드려서 쓰지 않았습니다. 이때 공신들이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세자 말이 나온 이때 방우나 방원 중에서 세자를 결정했어야 합니다. 차기 권력이 걸린 이런 대사를 순리대로 처리하지 않고 중도에 멈추면 뒤에 탈이 나기 십상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생각하는 미래권력에 줄을 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긴 쪽은 환호하지만 패한 쪽에는 피바람이 불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이성계와 강씨 모두 방번에게 뜻을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개국공신들은 타협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강씨 소생의 아들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기로 한 것입니다.


『태조실록』은 방번에게는 여러 문제점이 있어서 세자로 삼기 어렵다고 여겼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사적으로 만나서 만약 강씨 소생 중에서 세자를 세우고자 한다면 막내가 낫겠다고 의견을 교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씨 소생을 세우려는 이성계의 뜻과 방번만은 안 된다는 공신들의 이해가 최대공약수를 만들어 만 열 살짜리 방석이 세자가 되었습니다. 서른여덟 살 적장자 방우를 제치고, 정몽주를 격살한 스물다섯의 방원도 제치고, 만 열 살짜리 아이를 세자로 책봉하는 무리수를 둔 것입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의 「정국본(세자를 정함)」이라는 글에서 "세자는 천하 국가의 근본이다. 옛날 선왕이 장자를 세자로 세운 것은 (형제간의) 다툼을 막기 위한 것이고, 현자를 세운 것은 덕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장자도 현자도 아닌 조선의 세자 책봉에 대해서는 "지금 우리 동궁(방석)은 뛰어난 자질과 온화한 성품으로……"라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얼버무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세자 책봉은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모는 초청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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