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양의 역사와 베토벤, 비틀즈, 휴대전화, 카페 등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서양의 문화를 뽑아 우리의 시선에서 바라보았다. 게다가 책을 구성하는 경쾌한 색채와 주제의 특징을 살려 낸 17개의 일러스트는 그간 복잡하고 따분하게만 느껴졌던 서양사와 문화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에 더해 풍부한 시각적 자료들을 통해 만만치 않은 정보와 지식을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다.
1부 ‘우리의 눈으로 보는 서양의 역사’에서는 시대별로 서양의 역사를 우리의 시선에서 바라보았다. 고대의 헤브라이즘에서부터 현대 사회의 아프리카와 아랍 세계까지 서양사의 주요 국면에 나타난 특정 인물, 현상,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회와 어떻게 소통하고, 문화를 어떻게 투영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2부 ‘일상 속에 스며든 서양의 문화’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의 문화들을 예술, 스포츠, 음식 등 17가지 키워드로 나누어 살펴본다.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합창 열풍과 카페 문화를 현시점에서 재조명하거나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는 신용카드나 휴대전화의 발전 과정을 돌아보는 등 문화를 객관적으로 살펴보았다.
■ 저자 구학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와 동 대학원 서양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주도 중문, 우도중학교 및 서귀포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지냈으며,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명예교수다. 저서로 『이야기 세계사2』가 있으며, 공역으로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공저로 『바이마르 공화국』 등이 있다.
■ 차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중요성
1부 - 우리의 눈으로 보는 서양의 역사
고대
헤브라이즘 | 헬레니즘 | 올림픽 | 로마 제국Ⅰ| 로마 제국Ⅱ
중세
게르만족의 등장 | 봉건 사회 | 중세 도시Ⅰ| 중세 도시Ⅱ| 중세 대학
근대
르네상스 | 종교개혁 | 과학혁명 | 바로크 음악 | 시민혁명 | 자본주의Ⅰ| 자본주의Ⅱ
자유주의 | 제국주의 | 1890년대 | 러시아 혁명
현대
대중 사회 | 아프리카와 아랍 세계
2부 - 일상 속에 스며든 서양의 문화
베토벤 - 위인과 괴짜 사이
바그너 - 히틀러가 좋아한 음악가
비틀즈 - 세기의 슈퍼스타
합창 - 침묵도 노래가 되다
콘서트 홀 - 돈으로 사는 특권
렘브란트 - 빛의 연금술사
뒤러 - 미켈란젤로가 닮고 싶어 한 화가
인상파 -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람들
축구 - 전쟁을 일으킨 스포츠
골프 - 홀인원을 꿈꾸는 사람들
와인 - 천 개의 얼굴을 지닌 술
치즈 - 신기한 노란 색종이
카페 - 커피 한 잔의 자본주의
휴대전화 - 소통의 수단 vs 단절의 씨앗
신용카드 - 안락한 덫
웃음 - 청춘의 묘약
여행 - 떠나는 자의 권리
사랑방에서 듣는 서양 문화
우리 눈으로 보는 서양의 역사
고대
올림픽
2008년 8월 베이징 올림픽은 먹고사는 문제에 허덕이는 대한민국 서민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다. 우리나라는 역대 올림픽 출전 사상 최고의 성적인 7위를 거두었고, 수영의 박태환, 여자 역도의 장미란, 배드민턴의 이용대, 야구의 김광현, 류현진 등 젊은 선수들이 새로운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역도, 레슬링, 복싱 등 전통적인 강세 분야가 아니라 새로운 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세계 최고임을 공인받은 사실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고대 올림픽 경기는 남성만이 벌거벗고 참가할 수 있었다. 고대 올림픽 우승자는 금메달을 목에 거는 대신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축복을 받았다. 이들의 출신 지역 폴리스는 우승자를 환영하기 위해 좁은 길을 넓히려고 벽을 헐기도 했다. 당시 많은 그리스 폴리스들도 우승자들에게 명예를 높였다고 하여 푸짐한 선물을 주었다. 이는 오늘날 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이 포상금과 병역 혜택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직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만이 우승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우승자를 부러워했다. 인간이 이룩한 대단한 업적을 신의 축복의 결과로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범하는 많은 잘못 가운데 교만, 즉 휘브리스(hybris)를 특히 죄악시했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 기자회견장에서 일본 야구 감독인 호시노가 한국 야구팀에게 보인 교만한 태도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큰 대가를 치러야 마땅할 범죄행위였을 것이다.
1896년, 프랑스 귀족 쿠베르탱은 없어졌던 고대 올림픽을 부활시켰다. 대규모 전쟁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고 전쟁 중단과 평화를 외치며 부활을 주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날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은 20세기 초 유럽을 중심으로 부활했다. 부활한 올림픽은 모든 인류의 평화를 상징했다. 그러나 인류를 전대미문의 참화로 내몬 히틀러가 베를린 올림픽을 인류 축제의 놀이마당으로 꾸민 사실은 올림픽이 순수한 스포츠만이 아니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실제로 근대 올림픽은 부활 직후부터 개최국이 되기 위한 선정 로비, IOC 위원들의 부패, 선수들의 약물 복용 등 숨겨진 치부로 얼룩져 왔다. 올림픽 관련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미국 수영 선수 마이클 펠프스의 8관왕과 사이클 종목에서 8개의 금메달을 영국이 휩쓴 사실에 있다. 이와 반대로 역도, 양궁, 태권도를 살펴보자. 장미란은 중량급 인상, 용상, 합계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겨우 하나의 금메달을 땄다. 과거 올림픽 역도는 인상, 용상, 합계를 각각 따로 시상했다. 이 경우라면 장미란은 3관왕이 된다. 그런데 IOC는 언제부터인가 역도의 메달 수를 1/3로 줄였다. 양궁은 한국의 독식을 막기 위해 경기 방식을 변경하고 종목 메달의 수를 대폭으로 줄였다. 설상가상으로 태권도는 올림픽에서 퇴출이 논의되고 있다.
양궁은 서양인들이 만든 종목임에도 한국의 독주 낌새가 보이자 IOC는 즉시 종목 메달의 수를 줄이는 결정을 내렸다. 반면 일본 유도는 한동안 올림픽 메달을 독식했었지만 IOC는 메달의 수를 줄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국제 사회에서 무슨 이유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돌아볼 사실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몸값과 국제 사회가 우리를 평가하는 몸값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국제 사회에서 낮은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한반도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아무리 잘났다고 소리쳐도 많은 국가들이 너희는 아직 멀었다고 판단한다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의 귀중한 가르침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잊지 말아야 할 금언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더 나은 발전을 위한 초석임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중세
중세도시Ⅱ
서구 도시의 역사를 살펴볼 때 도시와 자유를 분리하기 어렵다. 자유가 없는 도시란 진정한 의미의 도시라고 할 수 없다. 중세에는 도시에 사는 시민들만이 특권으로써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예농(隸農)이라고까지 불리는 장원 지역의 농민들은 자유의 향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에도 국민의 자유라는 말에는 시민으로서의 자유가 포함된 느낌이 있지만, 국가 농민이라는 말에는 자유의 의미가 담겨 있기는커녕, 그 말을 사용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민이라는 말 속에 농민을 포함한 모든 국민을 일컫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이 도시 중심의 시민 사회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중세 도시의 시민을 대표하는 것은 수공업자가 아니라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도시에서 상업 활동을 영위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방해도 받지 않아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도시 영주와 특별한 관계를 맺어야 했다. 상인에게는 도시 영주로부터 특허장을 구입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특허장에는 시장 개설권, 부역 면제 및 여행의 자유 보장, 상품 몰수 금지, 상업 관련 세금의 자의적 부과 금지 등 여러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상인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허가한 도시 영주에게는 그에 알맞은 금전적 보상이 제공되었다. 그 특권의 가장 밑바닥에는 상업 활동을 하는 상인의 자유가 놓여 있었다. 요컨대 중세 시대에 특권이라 함은 곧 자유의 향유를 의미했다는 말이다.
당시 상인들이 특권으로 가진 자유는 도시마다 달랐다. 예를 들어 런던 도시의 상인은 1억 원을, 파리 도시의 상인은 2억 원을 내고 자유의 특권을 구입했다고 가정한다면 런던 도시와 파리 도시 상인들의 자유에는 그 내용과 인식에 있어 차이가 있었다. 이들 상인들에게 자유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1억 원 상당의 자유인가 아니면 2억 원 상당의 자유인가라는 구체적이고도 물질적인 자유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자유란 억압과 반대되는 추상적 개념으로 논의되지만 서구 중세의 도시 상인들이 생각했던 자유는 지금과 달랐다.
그러나 희생 없는 특권의 향유란 근거가 희박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서구 중세 도시 상인들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구입했던 자유를 그 후손들이 우리에게 아무 대가 없이 넘겨줄 까닭은 없다는 것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비싼 값으로 자유를 구입한 경험이 있는 서구인들은 단돈 500원짜리의 자유라 할지라도 그저 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관행은 서구인들이 외국인들에 대해 차별적으로 행하는 것이기보다는 그들이 힘써 얻은 자유를 오직 자신들만 누리려고 했던 데에서 비롯된다.
중세에 도시 상인에 예속되었던 도시 수공업자들은 비록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상인들이 누리는 자유를 향유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도 힘을 모아 자유를 획득했다. 이러한 자유는 그들의 직속 상전인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것이었다. 수공업자들은 어느 정도의 자유를 얻게 되자 이를 남에게 쉽게 주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공동 조직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이 조직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했다. 그래서 중세에는 도시에 거주하면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여기에 여성들이 포함되었다.
즉 중세 시민 가운데서도 시민으로서 자유의 특권을 온전히 누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부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권리, 다르게 말하면 제한된 자유만을 누렸다. 이 제한된 자유의 속박이 풀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특권으로써의 자유를 향유하기까지는 피 흘려 가며 싸운 수백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와는 달리 서구인들에게는 자유는 쉽게 쟁취된 것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쉽게 빼앗길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근대
르네상스
르네상스 이전 중세 시기에는 가톨릭교회와 관계없는 뛰어난 예술 작품을 손꼽기가 어려웠다. 서구 중세의 가톨릭교회는 예술 작품의 주요 발주처였다. 전업 예술가라면 발주처를 배려하지 않고 작품을 제작하지 않는 법이다.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발주처인 교회의 요구를 만족시킬 의무가 있었다.
예컨대 중세 초 가톨릭교회는 성당의 기본 형태를 성채처럼 단단하고 어두컴컴하게 만들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성당의 창문을 총안(銃眼)처럼 작게 만들어 건물 안으로 빛이 충분히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현실의 즐거움을 생각하기보다는 최후의 심판을, 최후의 대가라는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성당의 입구에는 흔히 지옥에서 고통스럽게 심판을 받는 인간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그릴 때에도 역시 아름답고 풍만한 인간의 육체는 죄악으로 이끄는 유혹으로, 거룩한 성인은 마른 몸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조각품과 미술 작품은 문맹이었던 중세 사람들을 교화하려는 수단이었다.
또한 교회는 가볍고 빠르고 힘차게 밝은 느낌의 음악이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어 죄악의 세계로 인도할 위험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음악인들에게 느리고 장중하고 단조로운 음정으로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할 것을 요구했다. 사람들이 현실에서 누릴 수 있는 삶과 예술의 즐거움들은 죄악을 범하게 만드는 미끼로 간주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이르면 예술 작품들은 중세와는 다른 성격의 예술적 목적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성당은 내부로 많은 빛이 들어오도록 건축되었고, 성당 벽에는 포동포동하고 귀여운 아기 예수와 자비롭고 우아한 자태를 지닌 성모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 걸리게 되었다. 일반 건물에는 예수 탄생 이전 시대인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이 장식되기도 했다. 이들은 인간의 아름다운 육체를 뽐내며 현실에서의 행복한 삶과 그 의미를 되새기도록 묘사되었다. 음악계에서는 가볍고 재미있거나 감미로운 선율의 음악들이 나타났다.
당시 예술 작품들이 현세적 삶의 쾌락과 즐거움을 표현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종교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세속적 삶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을 통해 이탈리아의 부유한 상업 도시도 점차 세속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르네상스가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찍은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정한 시대의 문화를 표현하는 용어로써의 르네상스는 19세기 후반 이후에 문화 외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결국 유럽 전체의 한 시대를 나타내는 역사 용어가 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의미가 확대되는 이러한 과정에는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익을 보는 특정한 계층의 힘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서구를 암흑으로 묘사하고 르네상스를 밝게만 평가하는 것은 중세를 책임졌던 종교 세력의 대부 가톨릭에게 책임을 묻는 태도이다. 그러나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가 암흑의 시기는커녕 평온하고 안정된 천 년의 마지막 시기였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아프리카와 아랍 세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중재하던 사다트(이집트 3대 대통령)가 국가 기념일 퍼레이드 도중 암살당했다. 그러자 당시 공군의 참모총장이었던 무바라크는 불안정한 국가 상황을 이용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981년부터 2011년 3월까지 39년 넘게 독재정치를 펼쳤다.
무바라크는 30년 동안 권좌에 앉아 저지른 부정, 부패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일 무렵에 스위스 은행이 그의 비밀계좌 동결을 선언하면서 무일푼의 늙은 국제 망명객으로 전락했다. 장기간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이집트 국민들의 시위와 그 성공은 주변 나라들로 번져 나갔다. 이후 튀니지, 리비아, 알제리,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요르단 등에서도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요구가 요원의 불꽃처럼 번졌다. 그 가운데 리비아의 국가원수인 카다피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이들을 쥐새끼라고 부르며 전투기 폭격으로 응답하였고 시위대를 대량 학살했다.
이러한 아프리카, 아랍 지역 국가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주로 장기 집권으로 인한 정치적 부정부패가 직접적인 원인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관련 지역의 빵값 급등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앞서 언급한 지역 국민들의 소득 수준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그래서 주식은 대부분 밀가루를 이용한 단순한 빵이다.
그런데 지난 2010년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세계 주요 곡물 생산국의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에 러시아는 곡물 수출량을 대폭 줄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캐나다, 미국도 극심한 가뭄으로 외국으로 내다 팔 곡물을 넉넉하게 생산하지 못했다. 그 결과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는 나라의 가난한 서민들은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다시 돌아가 이 지역의 독재 정권들은 어떻게 장기 집권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먼저 짐작할 수 있는 바는 이들 국가 모두에게 과거 민주화의 경험이 없었다는 점이다. 서구의 경우 시민 사회가 내부 근대화를 통해 지배자를 견제하는 형식의 민주공화국이라는 체제를 확립시킨 것과 달리 이 지역 국가들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오랜 지배를 받으며 왕국에 버금가는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 식민지국의 입맛에 맞아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이들 지역 국가의 지도자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곧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위대한 지도자라고 착각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세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소통 관계의 확산은 이러한 모순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
21세기 신개념의 소통 수단인 인터넷이나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SNS는 전 세계를 실시간으로 연결하고 있다. 과거에는 라디오나 신문, TV가 새로운 소식을 알려 주는 대표 매체였지만 지금은 SNS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과거 매체들은 정치권력의 감시, 검열을 받아 조작된 소식을 알려 주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여러 매체들은 아무런 여과 없이 생생한 소식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전달한다. 새로운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에 낡은 방식의 권력이 개입할 기회 자체를 줄이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집권층이 낡은 관계 속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로운 권력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한 예가 바로 아프리카와 아랍 세계의 민주화 운동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새로운 관계, 특히 권력 관계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힘없는 사람들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그러니 내부의 변화 동력을 키우는 것은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훈련이 아닐 수 없다.
일상 속에 스며든 서양의 문화
베토벤_위인과 괴짜 사이
음악의 성인, 베토벤
베토벤은 집안이 네덜란드에 뿌리를 두고 있어 van이라는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독일 본에서 태어났고 젊은 시절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그는 20대 중반 이후 귀에서 소리가 나는 질병인 이명으로 평생 고통을 받았다. 이명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해져 결국 청력을 잃기에 이른다. 그런데 오히려 베토벤은 청력을 잃은 후에 더욱 독창적이고 위대한 음악들을 창작해 냈고, 이로써 서양음악계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조막손의 장애를 떨치고 꿈을 이룬 메이저리그의 투수나, 의족을 끼고 경기 크랙에 선 육상 선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인간 승리의 모델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베토벤은 청력을 잃고도 불세출의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으니, 음악 분야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운명에 도전한 음악가
신의 사랑을 받고 태어난 모차르트 못지않게 베토벤 역시 음악의 천재였지만 이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연주회 포스터에 나이를 속여 6세로 써 놓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베토벤도 불과 7세에 첫 공개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13세에 건반악기 변주곡을 작곡하여 천재적 음악 재능을 인정받은 바 있다.
베토벤은 20대 초반에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의 전주곡 푸가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유명했고, 30대 초반에는 현악 4중주 작품들과 함께 교향곡 1번과 2번을 작곡했다. 또한 베토벤은 피아노의 신약성경이라고 불리는 32곡의 위대한 소나타를 작곡했을 뿐더러 무척이나 유명한 〈교향곡 제5번 운명〉과 〈교향곡 제6번 전원〉, 환희의 송가로 널리 알려진 걸작 〈교향곡 제9번 합창〉을 귀가 먼 상태에서 세상에 내놓았다. 베토벤은 훌륭한 제자도 양성했는데, 그는 바로 피아노 교본의 작곡가로 유명한 체르니이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들의 악보 원본에는 수정한 흔적이 거의 없지만 베토벤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악보를 여러 번 수정하며 위대한 작품들을 창작했다.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베토벤의 삶에서 사람들은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찾았다.
베토벤에 관한 날조와 진실
베토벤이 자신의 삶과 음악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은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 이유는 그가 40대 후반 귀가 더욱 나빠진 후에 주변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때 메모장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가 음악과 예술에 대해 지인들과 나눴던 필담이 기록되어 있었다. 베토벤의 메모장은 400권 이상 남아 있었으나 베토벤이 사망한 이후 유품을 정리한 안톤 쉰들러에 의해 현재 140권 정도만 전해진다. 쉰들러가 베토벤의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미칠 내용들을 없앴기 때문인데 현재 남아있는 내용들도 그에 의해 일부 수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즉 우리가 지금 베토벤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은 어느 정도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음악 세계의 위대함은 전혀 그렇지 않다. 베토벤은 서양 고전음악의 엄격한 형식을 중시하면서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또한 고전주의 전통을 계승한 동시에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양식의 토대를 쌓았다. 이러한 음악적 공헌이 매우 크기에, 베토벤이 위대한 음악가라는 평가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뒤러_미켈란젤로가 닮고 싶어 한 화가
횃불을 든 사람
14세기 이후 이탈리아에서 꽃을 피운 르네상스는 알프스 이북 지역으로 확산되어 북구 르네상스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 풍요를 이룬 이탈리아에서 전개된 르네상스가 세속적이고,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이었다면 경제적으로 다소 뒤쳐진 북구 르네상스는 종교적이고 소박하며 조금은 어두운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북구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로부터 지적, 예술적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자신들 고유의 감성을 더해 독자적인 예술 사조를 발전시키려고 애썼다.
북구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많은 예술가 가운데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가 우뚝 서있다. 당대 최고의 북구 르네상스 화가였던 뒤러는 이탈리아 기법과 르네상스적 감성을 화폭에 그대로 재현했다. 또한 뒤러는 회화뿐 아니라 판화, 수학, 예술 이론의 분야에서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뒤러는 미술에 관하여는 라파엘로, 다 빈치와 교류했고, 인문학자인 멜란히톤, 에라스무스, 그리고 종교 개혁가 츠빙글리, 루터와도 교분을 나누었다. 이는 뒤러가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통섭 교양인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에서 인간으로
1949년, 23세의 뒤러는 뉘른베르크에서 발생한 흑사병을 피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곳에서 뒤러는 새로운 예술 사조를 보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절정에 이르렀고, 고대의 유물이나 성경 등에서 제재를 얻은 역사화나 종교화가 주로 제작되었다. 그곳에서 수채화, 데생, 드라이 포인트, 목각 및 조각동판화 등의 제작 기법을 익힌 뒤러는 이탈리아 미술에 흠뻑 젖어들었다.
뒤러는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뒤, 이탈리아 미술의 흔적이 드러나는 종교적 색채의 목판화나 제단화를 주로 제작하였다. 하지만 드물게 〈남자들의 목욕〉처럼 세속적 주제의 작품도 만들었다. 그동안 신에게만 쏠려 있던 관심은 점차 인간에게로 옮겨졌다. 이시기 미술가들의 최대 관심사는 다름 아닌 인체였다. 그러나 사회적 제약은 인간의 사고만큼 빨리 변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당대 미술가들은 쉽게 인간의 누드를 그릴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뒤러는 목욕탕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인간의 육체를 표현해 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뒤러는 인체의 정확한 소묘를 위해 많은 해부 공부를 하였다. 완벽한 인체, 이상적 비례를 추구한 뒤러는 그의 작품 〈기도하는 손〉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
서구 근대의 발전은 중세 권위적 기독교 세계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세속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주된 관심이 당장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힘겨운 현실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과 하느님에게 집중된다면 이는 근대가 추구하는 세속적 인간의 심성과는 거리가 멀다. 세속적 인간의 심성이 발전할수록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관념은 희미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북구 르네상스의 발전으로 이러한 심성이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뒤러의 그림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으로서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와인_천개의 얼굴을 지닌 술
포도주 VS 와인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포도주라는 말보다 와인이라는 말이 고급스럽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교적 오래전부터 맛보던 마주앙(Majuang) 같은 국산 포도주는 정통 프랑스 와인과 비교해 한 등급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현상의 시작은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에 나타난 듯하다. 초기 여행자들은 면세점에서 구입한 조니워커나 발렌타인 같은 스카치 위스키류,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마신 시바스리갈 같은 브랜드 양주를 최고의 귀국 선물로 가져왔다. 이러한 분위기에 발맞춰 전문적으로 와인을 감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소믈리에도 등장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다
고고학자들은 구소련 그루지야 연방(현재의 조지아)의 슐라베리에서 발견된 질그릇 항아리 안에서 와인을 보관한 흔적을 찾았다. 연대를 추정한 결과 약 8천 년 전의 것으로 판독되었고, 학자들은 이를 인류가 최초로 와인을 마신 증거로 삼았다.
발칸 반도에서는 기원전 4,500년 즈음 와인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투탕카멘 시대 이집트에서 발견된 두 손으로 잡는 항아리(Amphoras) 속에서 와인을 보관한 증거가 발견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이르러 와인은 일상용품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 때 황제 찬드라굽타의 재상 카우틸랴(또는 차나키아)가 와인에 대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중국의 신장에서도 기원전 2천 년과 1천 년 사이에 와인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이슬람은 술을 금하는 코란의 가르침이 있으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979년 이슬람 혁명 전까지 와인 산업이 번창했다. 이러한 사례를 볼 때 인류는 오래전부터 전 세계에 걸쳐 와인을 즐겨 마셨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일찍부터 포도 이외의 다른 과일로도 와인을 만들어 마셨지만 주류는 역시 포도로 만든 와인이었다.
땀방울로 얼룩진 와인
와인의 주원료인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은 식생 기후 조건으로 위도의 제한을 받는다. 와인의 생산과 소비는 문명의 발전지역과 근접할 수밖에 없으므로 포도 재배도 여러모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서양 고대 시대의 노예들은 갱도 안에서 생명을 걸고 작업해야 하는 광산 노동과 뙤약볕 아래에서 장시간 일해야 하는 포도 농장 일을 가장 힘든 일로 꼽았다.
그리스 폴리스와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와인이 일상 음료가 되자 늘어난 수요를 맞추기 위해 대규모 포도 농장이 조성되었다. 특별한 장비 없이 오직 인간의 노동으로 대규모 포도 농장이 가동되어야 했으니 가혹한 노동이 없었다면 포도를 대량으로 재배할 수 없었다. 고온건조일수록 당도가 높은 포도가 생산되는데, 달콤한 맛과 은근한 향을 내뿜으며 우아한 색깔을 지닌 와인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땀방울을 감내했음을 알 수 있다.
와인은 19세기에 이르러 세계 도처에서 생산되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가장 건조한 남유럽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에서 포도나무 해충이 들끓자 포도나무들을 몰살시킨 일도 있었다. 이로 인해 포도나무를 다시 심고 가꾸는 일은 유럽의 주요 국책 사업 중 하나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대규모 포도 생산 지역에서 직접 일하는 농부들은 정작 자신들이 생산한 와인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와인을 통해 삶을 즐길 여유가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의 포도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농민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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