쏭내관의 재미있는 한국사기행

   
송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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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프레임
   
18000
2013�� 01��



■ 책 소개
45억 년 역사를 한 권의 책에담다!

45억 년 전 지구의 탄생부터인류의 진화, 한반도의 역사, 그리고 2000년대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단편적인 역사적 사건의 나열이 아닌, 역사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책으로, ‘역사’라는 큰 물줄기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이후 인간은 전쟁과 평화, 화해와 불협, 건국과멸망, 상생과 독단의 시대를 거치며 수백만 년을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그런데 이 같은 진화는 어느 한순간, 어느 하나의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는 현재와 동떨어진 먼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도 현재진행형임을 강조하며 근현대사의 역사 또한 비중 있게 다루었다. 또한 누구나알고 있어야 할 주요 사건들을 빠짐없이 담아내면서도 시대별로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가는지, 왜 그러한 역사가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질문들을끊임없이 던지며 전개해나간다. 

■ 저자송용진(쏭내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고와 중앙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으며, 영국 그리니치대학교 대학원에서아트매니지먼트를 공부했다. 1999년부터 우리나라 궁궐에 매료되어 본격적으로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저서로는 우리 궁궐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책 『쏭내관의 재미있는 궁궐기행』(올해의 청소년 도서), 우리나라 박물관 80여 곳을 직접 현장 답사한 뒤 집필한 『쏭내관의 재미있는박물관기행』(문광부 우수교양도서), 궁궐의 전각에서 일어난 조선의 사건을 소개한 『쏭내관의 재미있는 궁궐기행2』, 왕릉을 통해 조선의 27대임금들의 역사를 살펴본 『쏭내관의 재미있는 왕릉기행』 등이 있다. 현재 전국의 학교와 도서관에서 청소년과 학부모, 일반인을 대상으로 우리 역사와문화재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쏭내관의 재미있는 史교육현장’을 운영하고 있다.

■ 차례
1부 지구의 탄생 : 지구의 시작과 생물의 출현(약 45억 년 전~500만 년전) 
지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 생명의 근원, 물의 생성 | 생물의 출현과 대륙의 생성 | 지구의 첫 주인! 다세포생물의 출현 | 오존층의 생성 | 지구의 온난화 | 지구, 죽음의 행성이 되다 | 공룡, 지구를 지배하다! | 지구의 지배자, 공룡의 멸종 |설치류의 전성시대 | 인류 문명의 시작 | 원숭이의 진화 

2부 선사시대 : 인류의 등장과 진화(약 500만 년 전 ~ 4000년 전) 
유인원의등장 | 호모에렉투스, ‘불’과 친해지다 | 한반도에 첫 발을 디딘 에렉과 주먹도끼사건 - 구석기시대 | 또다시 찾아온 빙하기 | 한반도의 새주인공, 호모사피엔스의 등장 | 한반도에 찾아온 봄날 - 신석기시대 | 고래사냥의 달인, 신기의 등장 | 신기, 농사를 짓다 | 인간, 금속을다루다! - 청동기시대 

3부 고조선과삼국시대 : 한반도에 첫 나라를 세우다(약 4000년 전 ~ 1400년 전) 
첫 나라, 고조선 | 고조선, 중원의 강자가되다! | 천년의 우리 역사, 부여 | 고조선의 위만 왕조 | 고조선의 멸망 |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탄생 | 삼국과 가야의 전성시대| 수나라를 물리친 고구려 

4부 후삼국과남북국시대 : 찬란했던 문화 전성기(약 1400년 전 ~ 1100년 전)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안시성 전투 | 백제와고구려의 최후 | 22년간의 역사, 통일신라 | 해동성국 발해와 남북국시대 | 분열과 통합의 시대 
5부 고려시대 : 한반도의 대통합(약 1100년 전 ~ 620년 전)
왕건의 호족 대통합 프로젝트 | 고려의 혼란과 안정 | 고려 속의 세계, 세계 속의 고려 | 유교 국가 고려왕조 |고려, 요나라(거란)와 맞서다! | 군사들의 반란, 무신정변 | 민란이 일어나다! | 고려, 몽골제국과 싸우다 | 원나라 강점기 80여 년 |고려의 마지막 희망, 공민왕 | 저무는 고려, 이성계의 군사 쿠데타 

6부 조선시대 : 500년 왕조의 흥망성쇠(약 620년 전 ~ 110년 전) 
조선의건국과 혼란 | 태종 이방원과 강력한 왕권의 시대 | 세종, 문화의 꽃을 피우다 | 최고의 세자, 문종의 비극 |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 같지만 다른 태종과 세조 | 성종, 조선을 완성하다! | 조선의 위기, 폭군 연산군의 시대 | 희망과 절망, 역사의 반복 | 전운이 감돌다!| 일본과 명나라의 전쟁, 풍전등화 같은 조선의 운명 | 조일전쟁의 후유증 | 역사의 치욕,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 청나라에 대한 집착, 불통의조선 | 숙종과 장희빈 | 영조의 극적인 즉위 |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다, 영조와 사도세자 | 정조, 조선을 개혁하다! | 나라의 기운이 다하다| 박해의 시대, 외척 세력에 기울어가는 왕조 | 변화와 전통의 갈림길에 서다 | 삼국간섭과 일제의 만행 
7부 일제강점기 : 민족의 어두운 역사(약 110년 전 ~ 70년 전)
근대국가 대한제국의 건립 |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대한제국의 운명 | 을사늑약, 빼앗긴외교권 | 불법적인 황위 이양식과 정미7조약 | 빼앗긴 땅, 간도 | 안중근 의거와 한일병탄조약 | 일제의 경제 수탈 | 3·1 독립운동과임시정부의 탄생 | 간도 지역의 독립 투쟁 | 사회주의 vs 민족주의 | 일본의 꼭두각시, 만주 괴뢰국 | 중국도 놀란 윤봉길 의거 |중일전쟁의 희생양이 된 국민 | 일본의 진주만 공습, 태평양전쟁 | 미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그리고 원폭 투하 |무산된 승전국의 자격 | 아! 광복! | 대한민국 현대사를 뒤바꾼 편지 한 장 

8부 현대사1 : 이승만 정권과 한국전쟁의 비극(약 70년 전 ~ 50년 전)
이승만과 독립투사들의 귀국 | 모스크바 3상회의, 분열되는 남한 | 찬탁과 반탁으로 혼란스러워진 나라 | 김일성을중심으로 한 38선 이북 | 무산된 통일정부, 남한의 단독 선거 | 이승만의 실수와 제주 4·3항쟁 | 소련과 미국의 철수, 그리고 김구의 죽음| 에치슨 선언과 전쟁의 기운 |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 이승만! 독재의 길을 가다 | 전쟁 3년 만의 휴전 | 전쟁보다 무서운 내부 분열| 살아남은 사람들의 또 다른 전쟁 |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 국민의 승리, 4·19 민주화 투쟁 | 5·16 군사 쿠데타

9부 현대사2 : 산업화와 박정희독재정권(약 50년 전 ~ 33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 | 수출 총력과 베트남전쟁 | 굴욕적인일본과의 외교 | 수출 기업의 양성, 서민경제는 바닥 | 전태일, 고달픈 노동자들의 삶 |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부동산 투기 열풍 | 농촌의현대화? 새마을운동의 문제점 | 독재 그리고 7대 대통령 선거 | 핑퐁외교와 7·4 남북공동성명 |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수출 증대 |100억불 수출 달성의 진실 |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시한 유신헌법 | 김대중 납치 사건 | 독재 정부의 언론 탄압 | 독재 정부의 국민 탄압 |YH 사건과 부마 항쟁 | 박정희 정권의 최후, 10·26 사태 

10부 현대사3 : 독재정권을 벗어난 민주화, 그 이후(약 33년 전 ~ 현재)
반복되는 군사 쿠데타, 12·12 사태 | 무자비한 학살의 현장, 5·18 민주화운동 |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의의| 전두환 시대의 개막 | 언론 장악, 국민의 눈과 귀를 막다 | 국민들의 시선을 돌린 프로 스포츠 | 단군 이래 처음으로 무역 흑자 | 비리의온상 속 한국 경제, 그리고 계속되는 억압사회 | 6·10 민주화 항쟁 | 미완의 민주화, 노태우 시대 | 88서울올림픽과 탈냉전의 시대 |20여 년 전 또 다른 시련, 김영삼 시대 | OECD 가입과 무분별한 기업 확장 | 국가 부도 위기, IMF 사태 | 새로운 시대를 위해,김대중 정부 | 신성장동력, IT와 문화산업 | 베를린선언과 남북정상회담 | 전 국민이 하나가 된 2002 월드컵 | 젊은 세대의 정치 참여,노무현 시대





쏭내관의 재미있는 한국사기행


들어가는 편지

저는 궁궐에 미쳐 궁궐을 공부하다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살지 않았던 이전의 지구는 어떤 곳이었을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렇게 해서 저는 45억 년 지구의 역사까지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런 호기심이 결국 지금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답니다.


이 책을 쓰면서 저는 몇 가지 제 나름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먼저, 역사는 암기라는 선입견, 어렵다는 선입견을 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눈높이는 어린 학생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써내려갔습니다. 지금까지는 역사를 잘 몰랐더라도 많은 분들이 우리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다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역사는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든 자랑스러운 것이든, 제대로 알아야 우리의 미래가 더 밝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원인을 중심으로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역사는 스포츠 경기와 다르게 결과보다는 원인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학창시절에 그저 결과만을 달달 외우는 그런 반쪽짜리 역사를 공부했지요. 이 책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과정과 원인, 그리고 그 결과가 이후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연속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00여 년 동안의 근대사를 많이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먼 과거에서만 찾으려 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내일이 되면 역사가 됩니다. 그래서 좀 더 현실성 있고 생동감 있는 역사의 교훈을 이 시대의 역사에서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진행 중인 역사에 대해서는 민감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만을 말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역사는 무엇일까요? 역사는 인간이 남긴 흔적입니다. 시대는 변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바뀌지 않으니 인간의 역사 또한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반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조선과 삼국시대 : 한반도에 첫 나라를 세우다(약 4000년 전 ~ 1400년 전)

고조선, 중원의 강자가 되다!

고조선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거대한 국가였습니다. 조선왕조가 519년 역사라 자부하지만, 2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조선에 비교하자면 정말 짧은 시간입니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 중 절반이 고조선의 역사가 되는 셈이지요.


어쨌든 한 나라가 2천 년의 역사를 유지한다는 것은 강력한 통치 제도와 안정적인 사회 시스템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런 유추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중국의 기록에 남아 있는 고조선 법률에 관한 몇 줄 때문인데요. 이 조항을 들여다보면 고조선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한다.

도둑질한 자는 50만 전(錢)의 돈으로 갚거나 노비가 된다.


위의 조항을 통해 고조선은 생명이 존중되었던 신분사회였고, 구성원들의 사유 재산을 인정하는 성숙한 사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평양에서 출토된 고조선 시대의 마차 부품을 보면, 마치 로마제국시대의 마차가 연상됩니다. 이런 대형 마차가 평양의 넓은 거리를 달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우리 역사의 시작은 이렇듯 웅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선진형 고대국가 고조선의 영토는 얼마나 넓었을까요? 현재 남아 있는 자료가 부족해서 아직도 정확한 영토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고조선의 영토는 지금의 중국 요서와 요동 지방까지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중국의 기록에도 "현독현은 (고)조선의 옛 도읍지였다"라고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현독현은 요동과 요서를 말함).


이외에도 여러 가지 증거들이 있습니다. 특히 비슷한 모양의 고인돌과 청동검의 출토지를 통해 고조선의 광활한 영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과 중국, 일본의 문화 양식이 각기 다른 것처럼 고조선 시대 역시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특히 고조선 특유의 비파형 청동검(청동검의 모양이 악기인 비파 모양이라 비파형 청동검이라 부름)과 탁자형 고인돌의 출토 지역이 우리가 예상하는 고조선의 영역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찬란했던 역사만큼이나 거대한 고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나 짐작됩니다.



후삼국과 남북국시대 : 찬란했던 문화 전성기(약 1400년 전 ~ 1100년 전)

해동성국 발해와 남북국시대

남쪽의 활발한 분위기와 달리 북쪽 당나라와의 국경 지역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시끄러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나라는 포로로 잡아갔던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도독(오늘날의 도지사)으로 임명합니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크지 않은 땅덩어리 때문에 골치 아픈 것이 싫었을 테고, 적당히 세금을 받으면서 제후국 정도로 관리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보장왕을 고구려로 돌려보냈는데 이런 조치는 오히려 고구려인들의 단결을 촉진시킵니다. 요서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인들과 고구려에 예속된 말갈족, 원주민인 거란족 등이 당나라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겁니다. 이에 고구려인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당나라의 힘이 적게 미치는 동쪽 저 멀리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로 합니다.


이 이주 집단 중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대조영입니다. 대조영은 유민 등을 이끌고 동모산을 중심으로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합니다. 새 나라 발해가 건국되면서 이제 북쪽의 발해국, 남쪽의 신라국, 즉 한반도의 남북국 시대가 시작됩니다.


대조영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빠른 시간 내에 발해를 안정화시킵니다. 또 대조영의 뒤를 이은 2대 무왕 때에는 영토를 더 확장해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하는 왕조로 성장합니다. 이런 발해의 성장을 보고 당나라는 해동성국(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이라는 기록까지 남겼으니, 해동성국 발해는 이미 당나라와 국력을 겨루는 황제국이었던 것입니다.


발해가 황제국이라는 증거는 국립중앙박물관 발해실에 전시되어 있는 발해의 불비상에서도 나타나는데, 불비상을 보면 아미타 부처를 중심으로 보살들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이 불비상이 만들어진 이유가 새겨져 있습니다.


"함화 4년 허왕부 조문휴의 어머니가 모든 불제자를 위해 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


이 글에서 우리는 발해의 숨겨진 힘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함화 4년과 허왕부입니다. 보통 황제국은 임금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달력을 만듭니다. 우리도 조선시대에는 없었지만 황제국이었던 대한제국 때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해를 광무 1년이라고 썼죠. 함화 역시 마찬가지 의미인데, 그것은 그만큼 발해의 국력이 강했다는 의미입니다. 또 허왕부(許王府)는 왕을 허가하는 관청이란 뜻입니다. 즉 왕 위에 왕을 허락하는 황제가 있었다는 뜻이니 발해는 황제국이었던 겁니다. 또한 발해의 수도가 무려 5곳(상경, 중경, 동경, 서경, 남경)이었다는 점도 발해의 위상을 잘 말해줍니다. 게다가 지금 남아 있는 수도의 유적지를 보면 외성, 도성, 궁성이 있는 전형적인 황제국의 도시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당나라 장안성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이런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발해는 당나라, 일본, 신라와 무역을 하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합니다.



고려시대 : 한반도의 대통합(약 1100년 전 ~ 620년 전)

왕건의 호족 대통합 프로젝트

한반도 내 최초의 통일국가를 만든 왕건! 왕이 된 그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렇지 못했습니다. 쿠데타로 잡은 권력은 정권을 유지하는 게 훨씬 더 어렵거든요. 왕건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보다도 지방 유지들, 즉 호족들이 가장 큰 걱정이었죠. 당시 지방 호족들은 그 힘이 막강해서 몇몇이 뜻을 모으면 얼마든지 왕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에 왕건이 생각해낸 방법은 지방 호족들의 딸과 혼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왕건은 무려 29명의 지방 호족 딸들을 신부로 맞이하면서 옛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의 지배 계층이었던 호족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북진정책으로 왕권을 강화해나갔습니다. 왕건은 북쪽으로 주민을 이주시키고 북쪽 국경지대의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 고구려, 발해의 영토까지는 아니었어도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영토를 수복할 수 있었고, 또한 국경의 경계를 강화함으로써 외세 침입을 막고 국가 초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빠르게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군사들의 반란, 무신정변

우리의 역사는 쿠데타로 인해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곤 합니다. 후백제의 견훤도, 후고구려의 궁예도, 고려의 왕건도 마찬가지였죠. 어쨌든 이런 고려의 태평성대는 무신이 천대받고 문신이 출세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고려의 문인들은 대부분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무신을 얕보는 경향이 있었음).


문신들은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많은 토지를 차지해 특권적 지위를 누렸지만 무신의 지위는 그들의 호위무사 정도로 격하되고 맙니다. 그러니 무신들의 불만은 쌓이고 또 쌓여갔을 것입니다. 이 불만이 쌓여 결국 일이 터집니다.


하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개경 근처에 있는 보현원으로 놀러가는 길에 군졸들을 위로한다고 무술 시범인 수박놀이를 선보인 겁니다. 이때 무신으로서는 나이가 많은 대장군 이소응이 시합을 하다 지고 말죠. 그 모습을 한 벼슬 낮은 문신이 갑자기 나서서, "네 놈이 그래도 장군이라고 칼을 차고 다니느냐!"며 이소응의 뺨을 칩니다. 그 모습을 본 왕과 문신들은 박수를 치며 무신들을 조롱했습니다. 그날 밤 더 이상 치욕을 참을 수 없었던 정중부, 이의방 등의 무신들은 문신들의 목을 베고 대궐까지 쳐들어갑니다. 동시에 그들은 당시 왕인 의종을 폐위하고 아우인 19대 명종을 왕위에 앉힙니다.


이날의 사건을 무신정변이라고 합니다. 무신정변은 문신 중심의 정치적 모순이 쌓여 폭발한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민란이 일어나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무신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개혁에 대한 의지도, 통치의 철학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백성들을 쥐어짜 세금은 걷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이때 충청도 공주의 천민 부락인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 형제가 난을 일으킵니다. 천민들이 난을 일으킬 정도면 당시 지배 권력에 얼마나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군사 쿠데타 이후 60여 년 동안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는 4대를 이어 왕을 쥐락펴락하는 최고의 독자재로 군림합니다. 원래 고려는 왕을 중심으로 중서문하성, 중추원 같은 중앙정치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충헌은 새로운 기관을 만듭니다. 바로 교정도감이라는 것인데, 지금으로 치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의 모든 국가 권력기관을 자신이 만든 교정도감 내에 편입시킨 겁니다. 그러니 결국 독재를 한 것과 마찬가지죠. 무신 정변은 우리 역사에 매우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습니다. 정상적인 절차가 아닌 군사력을 이용한 권력 장악의 본보기가 된 겁니다.



조선시대 : 500년 왕조의 흥망성쇠(약 620년 전 ~ 110년 전)

조선의 건국과 혼란

태조 왕건이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국한 지 474년 만에 고려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끝에 새 왕조가 탄생합니다. 조선왕조는 유학을 공부한 젊은 선비들(신진사대부)이 이성계 장군을 앞세워 만든 나라입니다. 그러니 나라를 다스리는 철학은 유교였고 또 나라의 지배 계층은 사대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일등 개국 공신 정도전이 있었습니다.


정도전이 꿈꾸는 새 나라 조선은 똑똑한 선비들이 왕을 보필하는 나라였습니다. 즉, 사대부의 나라였죠. 하지만 이는 이성계 가문에게는 그리 반가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왕조는 왕의 나라인데 신하들의 힘이 세면 왕권이 위협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버지를 도와 조선 개국에 큰 공헌을 세운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은 왕권이 강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믿었던 인물입니다.


이방원은 결국 일을 저지릅니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둘째 부인의 둘째 아들인 세자 이방석을 죽이며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왕자의 난이라 부릅니다.


변화와 전통의 갈림길에 서다

흥선대원군이 어린 왕 고종을 대신해 정치를 할 당시 세상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서양의 공장에서는 계속해서 물건이 생산되고,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 포르투갈 등은 넘쳐나는 물건을 팔아야 할 곳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수출입니다. 만들어놓은 물건을 팔아야 하고, 또한 더욱 싼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좀 더 저렴한 원자재가 필요했을 테니 그런 곳을 찾기 위해 서양인들은 중국, 일본을 거쳐 조선에까지 들어오게 된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조선의 시장을 개방해서 교역, 즉 장사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나라의 문을 닫고 강경하게 나옵니다. 앞서 청나라와 일본은 서양의 엄청난 군사력에 맥없이 당한 후 나라의 문호를 개방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전쟁을 통해 서양인들의 엄청난 힘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그런 그들의 힘을 직접 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심지어 일부 전투에서는 승리까지 하면서 자신감이 생기자 문호 개방에 있어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고종과 흥선대원군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은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의 강대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문호 개방을 준비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들이지만 당시 조선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우리 것을 지키자고 하고, 한쪽에서는 서양의 것을 본받자고 하니, 100년 전 당시 고종과 흥선대원군에게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선비들의 반대, 파도처럼 몰려오는 서양 세력들, 그리고 외척 세력들의 부정부패에 당시 죽어나는 것은 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믿고 의지했던 것은 역시 동학이었습니다. 동학은 농민들 사이에 무섭게 퍼져갔고 전봉준을 중심으로 지배층의 부정부패를 없애자며 수많은 농민들이 시위를 합니다.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입니다.


그런데 이런 농민들의 시위가 무서웠는지 조선의 고위 관료들은 청나라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하며 농민들의 시위 진압을 부탁합니다. 이렇게 해서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자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 역시 조선 내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들이 위험하다는 핑계로 수천 명의 일본 군사를 조선에 보냅니다. 그런데 그사이 조선 정부와 농민군이 타결을 합니다. 이제 상황이 종료되었으니 청나라와 일본 군사는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일본 군대는 이런 조선을 무시하고 오히려 아무런 선전 포고도 없이 청나라 군대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영토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인 겁니다(청일전쟁).



현대사1 : 이승만 정권과 한국전쟁의 비극(약 70년 전 ~ 50년 전)

5·16 군사 쿠데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박정희 육군 소장 등 군인 3,600여 명은 내각의 무능력과 사회의 혼란을 명분으로 탱크를 몰아 국가 주요 기관을 점령합니다. 박정희 소장은 고려 무신의 난 때 교정도감처럼 군인들이 통치할 수 있는 임시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듭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말대로 이 군사 쿠데타가 정말 구국의 결단, 즉 나라를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요?


박정희는 내각의 무능력이 쿠데타의 첫 번째 이유라고 했습니다. 1960년 이승만의 독재정권에 맞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되찾았습니다. 비록 초기라서 어느 정도의 혼란은 있었지만 쿠데타 세력들이 말하는 만큼 무능한 정부는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정식으로 장면 정부가 출범한 1960년 8월 23일부터 다음 해 쿠데타가 일어난 5월 16일까지, 9개월도 안 된 기간 동안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정부는 없을 것입니다. 즉, 내각의 무능함을 꼬집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의 쿠데타 이유는 사회의 혼란이라고 합니다. 당시 상황은 10여 년의 독재 이후 찾아온 민주화였습니다. 막혔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건 민주주의에서 당연한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와 주장은 결코 사회의 혼란이 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이 역시 결정적으로 쿠데타의 명분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쿠데타보다 더 슬픈 역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친일파의 등장이었습니다. 박정희 스스로도 일본 천왕에게 혈서를 쓰며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니, 박정희의 등장으로 친일파들은 사회, 정치, 경제계의 요직에서 그 명맥을 더욱더 견고하게 유지를 해나갑니다.


박정희의 측근인 이선근의 경우 일본을 찬양하며 친일의 선봉에 섰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초대 국사편찬위원장이 되고 문교부 장관까지 역임합니다. 친일파가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기관의 총책임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승만 정권 때 처리하지 못한 친일 청산의 후폭풍은 이렇게 우리 현대사에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현대사2 : 산업화와 박정희 독재정권(약 50년 전 ~ 33년 전)

전태일, 고달픈 노동자들의 삶

대부분의 국민들이 죽도록 일을 하는데도 기업만 돈을 버는 상황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국민들은 지치기 시작합니다. 그곳에 민주주의와 복지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1960년대, 불과 50여 년 전 우리의 현실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이제 복지와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경제 성장으로 노동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노동자 계급은 한국 사회의 주요 계층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의식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져 있을 때 일이 터집니다.


1970년 11월, 서울 평화시장의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하며 분신을 합니다. 안중근의 죽음 뒤에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야 했던 우리 민족의 간절함이 있었듯, 전태일의 죽음 뒤에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던 우리 국민들의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당시 전태일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는 50년 전 우리 경제의 문제점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여 명이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2만여 명 중 40%를 차지하는 보조 노동자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들어합니다. 전부가 다 가난한 자녀들로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이 일주일에 45시간인 데 비해, 15세의 어린 보조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해 안질과 신경통, 위장병, 폐결핵 등을 앓고 있습니다….


1970년 당시 보조 노동자가 하루 15시간을 일하고 받는 돈이 라면 5봉지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합니다(당시 라면 1봉지는 20원이었음). 한 달에 쉬는 날은 고작 이틀이었다고 하고요. 1970년, 전태일 열사가 이 편지를 쓸 때 우리나라 수출액은 9억 달러 가까이 되었고, 국민소득은 10년 전에 비해 무려 4배나 늘었습니다. 세계가 놀랄 만한 성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폭죽을 터트릴 때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의 삶은 이 편지 속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 어린 여공들이 이젠 60∼70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경제를 발전시킨 영웅은 바로 이분들이었습니다.



현대사3 : 독재정권을 벗어난 민주화, 그 이후(약 33년 전 ~ 현재)

6·10 민주화 항쟁

군사독재가 절정에 이르렀던 1987년 1월, 경찰은 독재에 항의해 시위하던 대학생 박종철을 잡아들여 온갖 고문을 합니다. 결국 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되죠. 이 일이 커질 것을 우려했던 경찰은 박종철의 시신을 몰래 화장하고 사건을 덮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시신을 부검한 의사의 폭로로 이 사건은 알려집니다. 이 사건은 전 국민을 분노케 했고, 그 분노는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로 이어집니다.


이에 국민들은 더 이상의 독재는 용납할 수 없다며, 당장 헌법을 고쳐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선거제도를 만들라며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런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기존의 헌법을 그대로 지킨다며 호헌조치[지킬 호(護), 헌법 헌(憲)]를 합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 전만 해도 시위하는 사람들은 주로 대학생들이었는데, 호헌조치 이후에는 직장인부터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시위에 참여합니다. 이때 대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국민들의 감정에 불을 지른 이 사건으로 범국민적인 시위는 더욱 확산되어 갔습니다. 시민들은 시위대에게 자발적으로 빵 같은 구호물품까지 보내주었고 중고등학생들도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위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런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전두환은 결국 항복을 하고,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인 직선제를 약속합니다.


1987년 일어난 이 6월 항쟁은 4·19, 5·18과 함께 우리나라 민주화 투쟁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날 그 힘은 지난 무려 30여 년간 독재에 맞서 싸운 우리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이 선언 이후 출판이나 집회, 특히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었고, 여당과 야당은 "대통령은 5년을 할 수 있으되 임기는 한 번뿐이다"라는 5년 단임제를 중심으로 하는 새 헌법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16년 만에 드디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당연한 대통령 직선제이지만, 이 쉽고 당연한 민주주의 제도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려 16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수많은 민주투사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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