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과 싸운 사람들

   
이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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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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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6��



■ 책 소개
color=#804000>상식과싸우며 일상을 바꾸려 한 혁명가!


우리 역사와 문화의 물줄기를 틀어 놓았다고 평가받는 10명의 인물을 통해 새로운 상식과 역사, 문화가 창조되는 과정을흥미진진하게 구성한 책이다. 최북, 김수영, 나혜석, 유희, 황현, 서경덕, 김시습, 정인보, 최용신, 강항 등 활동했던 분야는 다르지만 견고한체제로 굳어가던 상식과 맞서 투쟁을 벌여온 10인의 삶을 들여다본다. 

이들의 정신적 유산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살았던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다.그들은 사회적으로 외면당했으며, 사회와 격리되거나 냉혹한 처벌을 받고 비참한 삶을 마감해야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한마디로 그 시대의"상식"과 맞섰기 때문이다.

신분 질서에 옥죈 사회를마음껏 조롱하며 광기를 부렸던 조선 후기 대표 화가 ‘최북’, 조선의 스타로 살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 희생된 국내 첫 여성 화가 ‘나혜석’,입신양명을 거부한 채 우국충정으로 임금까지 질책한 조선 말 사회비평가 ‘황현’ 등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고독한 열정에관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상식의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오늘날,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상식과 거부해야 할 상식이무엇인지, 그리고 그것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려줄 것이다. 

■ 저자 이재광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1996년 고려대학교에서사회학 박사학위를, 2007년 경희대학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뉴욕주립대학교(빙햄턴) 브로델연구소 객원연구원, 한성대 겸임교수,한성대 동아시아문제연구소 자문위원 등을 거치며 다수 대학과 대학원에서 강의했고, 현재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 1988년중앙일보에 입사해 주로 경제·산업분야를 취재했으며, 중앙일보에서 발행하는 경제전문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경제전문기자 겸 지역연구센터 소장으로일했다. KTV(한국정책방송), T-채널(Sky Life) 등에서 <이재광의 인터뷰 여행&&, <프라임 월드 리포트&&,<지역愛발견&& 등 다수의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식민과 제국의길』『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함평 나비혁명』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1장 세상을 조롱한 일상의 테러리스트 최북(崔北) 
“작은 예절 따위에 자신을묶어두지 않았다” 

2장 자유를 짊어진 시인김수영(金洙暎) 
“시여 침을 뱉어라, 누군가가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3장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 나혜석(羅蕙錫)
“여자도 인간이외다!” 

4장 사대주의를 슬퍼한국어학자 유희(柳僖) 
“언문은 배우기 쉬워 천하다고 한다. 슬프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무엇을 바라야 한단말인가”

5장 임금에게도 욕을 한 매서운 사회비평가황현(黃玹) 
“귀신 나라의 미치광이 속에서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6장 스승도 주류도 거부한 외골수 서경덕(徐敬德) 
“우리 동방(東邦)에도 학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도록하라” 

7장 성(聖)과 속(俗)을 넘나든 주변인김시습(金時習) 
“나이 오십에도 자식이 없으니 여생이 진실로 가련하구나” 

8장 조선의 역사를 부정한 국학자 정인보(鄭寅普) 
“수백 년 조선의 역사는 텅 비고 거짓된 역사였다”

9장 외모 컴플렉스 딛고 샘골의 기적 일군 신앙인최용신(崔容信) 
“이제 곧 약혼자와 함께할 텐데 살아나지 못하면 어찌하나…”

10장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가 된 전쟁 포로 강항(姜沆) 
“왜놈의 이 땅, 도대체 어인 일이란말인가” 





상식과 싸운 사람들


자유를 짊어진 시인 김수영(金洙暎)

1968년 6월 15일 토요일 오후 3시. 김수영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고료 7만 원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대다수 문인에게 글을 써 돈을 번다는 것은 쉽지 않다. 웬만한 유명 작가 아니고서는 돈을 떼이는 경우도 많다. 여러 권의 시집을 냈다지만 김수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7만 원이라는 거금이 생긴 것이다. 자장면 한 그릇이 몇 백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큰돈이었다.


김수영은 당연히 술을 떠올렸다. 술꾼으로 통하는 그에게 돈이 생겼으니 그냥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대낮이었지만 그는 신구문화사 편집장 신동문에게 빨리 나가자며 재촉을 했다. 막 나가려는 사이 한 사내가 들어와 넙죽 인사를 했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뒤늦게 문단에 데뷔했고 최근에 「마술사」라는 단편으로 문단의 이목을 끌던 이병주였다. 김수영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의 소설에는 관심이 갔지만 호탕한 웃음소리라든가 어딘가 으스대며 걷는 걸음걸이 등이 몹시 오만하게 보여 눈에 거슬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술 마시러 안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수영, 신동문, 이병주 그리고 함께 있었던 일간지 기자 네 사람은 곧장 청진동 곱창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 밤 11시 30분, 술집을 나선 김수영은 걷고 있었다. 몹시 취한 상태였다. 걸음조차 내딛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이병주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여유 만만하고 호방한 그가 영 꼴사나워 보였다. 시비를 붙여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저렇게 넘어갔다. 자신만 우스워진 꼴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김수영은 술 마시던 사람들이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다지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취한 걸음을 간신히 바로 세우고 을지로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마포 서강 종점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아직 술이 덜 깼는지 몸은 여전히 바로 서지를 않았다. 바로 이때였다. 부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그의 뒤로 무엇인가 돌진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그에게 달려오는 거대한 물체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성한 사람도 막거나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중앙선 침범 차량을 피하려던 버스 한 대가 인도를 향해 돌진한 것이다. 술 취한 사람의 나약한 팔로는 그 버스를 막을 길이 없었다. 그의 두개골은 심하게 파손됐고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는 영원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책임 없는 삶, 책임 없는 죽음

그의 죽음에 대해 그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굳이 책임을 따진다면 늦은 시간 술을 많이 먹고 비틀거리며 걸었다는 정도였을까. 그가 차도로 뛰어든 것도 아니요, 신호등을 무시한 채 건널목을 건넌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비록 취하기는 했어도, 인도로 천천히 걷고 있었을 뿐이다. 누가 봐도 그에게는 사고에 대한 책임이 없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는 주어진 사회적 책임이 있고 또 대다수는 어느 정도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모든 사회는 개인에게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한 특정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상식이고 이 상식에 어긋날 경우 사회는 그 개인을 비난한다. 그렇게 사회의 상식은 유지되고 지켜지는 것이다.


하지만 김수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되는 대로 술을 마셨고, 되는대로 친구들과 어울렸다. 놀고 싶을 때 놀았고, 일하고 싶을 때 일했다. 한 가족의 장남이자 또 다른 가족의 가장이었지만 그에게 그런 것들은 안중에 없었다. 그저 술 먹고 담배 피우기 위해 푼돈을 벌었으며 그나마 어려우면 아내나 동생, 심지어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노모에게도 손을 벌리기 일쑤였다.


김수영은 그렇게 사회적 책임을 철저하게 거부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사회적 책임이란 그에게는 짊어지기 어려운 부담이었으며, 나아가 짊어지기 싫은 부담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여기기까지 했다. 사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사회적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 많은 시를 남기지 않았다면 그 역시 손가락질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패륜아로 취급받았을 수도 있다.


시인 김수영은 삶에도 죽음에도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남아 있다. 해방 후 가장 주목받는 시인. 그것이 바로 무책임하게 살다가 무책임하게 죽어간 김수영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다. 책임으로부터 멀어져만 가려 했던 그에게 이 같은 평가가 내려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그의 무책임한 삶과 문학계의 평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평범한 독자의 눈으로는 그가 무절제한 삶을 살면서도 좋은 시를 써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바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가 많은 훌륭한 시를 남겼다고 할 수도 있다. 사회적 책임에 주눅 들어 살면서, 책임을 지지 못했다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대다수 독자들은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이름 석 자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김수영이 쓴 단 한 편의 시 제목이나 시 구절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거의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탓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김수영이라는 사람은 평범한 우리네 독자들이 읽기에 적당하지 않은 시만 골라 썼고, 범인들의 가슴을 적셔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시인을 가리켜 비(非)대중적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다지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시인이라는 뜻이다.


난해한 시, 다양한 해석

그러나 그는 평론계나 문학계에서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현대시 분야에서 김수영만큼 문제작을 많이 쓴 시인은 없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왜일까? 왜 유독 김수영에 대해서만큼은 평론계나 학계에서 끝없는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단순히 그가 현대시의 역사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그 이유를 찾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평론가들이 그에게 주목하는 진짜 이유는 아마도 그 해석의 다양성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 현실 참여, 민중주의, 산문시, 고백시, 역사와 자유 등 어떤 종류의 시각에서도 좋은 분석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징병 피하려 3년 만에 귀국

많은 이들은 김수영의 시 세계의 화두를 자유로 꼽는다.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구속받기 싫어하는 자유란 그에게 혼 그 자체다. 그는 이 자유를 얻기 위해 생활의 구속에서 벗어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이었다. 그가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에서 자유롭게 되고 싶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곤궁함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그를 사로잡는 악귀였음이 분명했다.


1960년 4월 19일 부패한 권력을 쓸어버리겠다며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김수영은 비로소 이 자유를 화두로 꺼냈다. 개인적으로나 정치적, 사회적으로나 처음 가져보는 자유였다. 그가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이처럼 흥분한 적은 없었다. 4·19는 그의 시 세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그는 4·19 이전의 권위주의와 부패를 가리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그러니 5·16로 군사 쿠테타가 그에게 줬던 충격을 이해할 만하다. 시내 곳곳을 무장한 채 돌아다니는 군인들은 15년 전 전시(戰時)의 악몽을 되살려줬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수영은 군인들에 대해 공포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군인이나 전쟁은 그를 피폐하게 만들고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유를 근본적으로 말살시키는 흉물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찾아간 시인

난해한 시인 김수영,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핵심은 분명 그가 말하고 추구해왔던 자유에 있다. 그의 자유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의 삶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한 유명한 철학자 겸 정신분석학자로부터 그 답의 작은 단서 하나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자유의 개념이다.


프롬의 자유 개념은 복잡하다. 하지만 간단하게 말해보자. 그가 보는 자유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해왔다. 즉, 새롭게 얻는 자유는 늘 새로운 자체의 모순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자유를 두 종류로 구분한다. ~을 위한 자유(freedom to~)와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이다. 그가 보기에 ~을 위한 자유(freedom to~)는 긍정적인 자유인 반면,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는 부정적인 자유다.


인간은 늘 ~을 위한 자유를 갈구한다. 프롬은 그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인간의 자율(autonomy)과 존엄(dignity)이 그것이다. 따라서 ~을 위한 자유란 결국 인간의 자율과 존엄을 위한 자유(freedom to human autonomy and dignity)로 규정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자유는 부정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니 바로 고독(aloneness)과 불안(anxiety)이다. 자율과 존엄의 자유를 얻은 인류는 궁극적으로 고독과 불안을 함께 얻는다는 것이다.


고독과 불안에 대한 인간의 심리 상태는 같다. 극도의 공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류는, 한편으로 모순적이지만, 이 고독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얻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고독과 불안)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프롬이 말하는 자유의 개념을 김수영에게 대입해보자. 그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기 위해, 즉 자율성을 얻기 위해, 또 굴종을 벗어나 자신의 존엄성을 찾기 위해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직장을 때려치웠던 것이다. 그리고 평생 룸펜으로 살아간 것이다. 결국 그는 ~을 위한 자유라는 긍정적 의미의 자유를 찾아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라고 왜 고독과 불안의 공포가 없었겠는가. 그 역시 이 고독과 불안의 공포에서 탈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부정적 자유, 즉 예속의 길을 택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는 없을까? 시인 김수영은 극심한 고독과 불안의 공포와 싸웠으며 이겨냈고 나아가 이를 생명력 있는 시로 승화시켰다. 이런 시각에서라면 그는 진정한 자유를 추구한 온전한 자아의 소유자가 된다. 그것이 아니라 해도 최소한 그는, 혼란스러웠겠지만 그 길을 계속 걸은 것인지도 모른다. 끝없는 고독이나 불안과 싸우면서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가 난해한 시인으로 비춰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른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 고독과 불안이 주는 공포를 이겨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당장의 생계가 급급한데 자율과 존엄을 추구하기 위해 직장을 때려 치울 용기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바로 이런 점에서 그의 룸펜 생활은 용기로 치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한 자유 역시 용기로 대체될 수 있다. 콩코드 광장과 같은 넓이와 크기의 자유를 추구했던 시인 김수영은 그것과 같은 넓이와 크기의 용기를 추구한 시인이었던 것이다.



성(聖)과 속(俗)을 넘나든 주변인 김시습(金時習)

매월당 김시습이 천재임을 그 주면에 알린 것은 태어난 지 오래지 않아서다. 겨우 8개월 만에 글을 깨우쳤고 3세 때 시를 지었다고 하니 누구라도 그의 비범함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름부터가 그렇다. 시습(時習). 때로 익힌다는 이 뜻은 『논어』「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유명한 어구인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비범함을 알아챈 집안 어른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의 자(字)인 열경(悅卿)도 마찬가지다. 같은 어구에서 기쁘다는 열(悅)자를 따 지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때로 배우며 기뻐한다는 그의 이름과 자는 마치 예언과도 같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때로 배우는 것만이 유일한 기쁨이 되어버렸지만…….


어린 천재, 신동에 대한 얘기가 화제가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임금인들 어찌 관심이 없었을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면 두루 인재를 찾아 써야 한다는 성군(聖君) 세종대왕이 아닌가. 사람까지 시켜 직접 매월당의 됨됨이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그 사자(使者)가 바로 승정원의 박이창이었다. 박이창은 매월당의 부모에게 즉시 아이를 데리고 입궐하라는 명을 내렸고 이제 아이는 어명을 받은 신하로부터 직접 시험을 받게 됐다.


서양에는 모차르트, 동양에는 김시습

이 대목은 마치 서양 최고의 천재 중 하나인 모차르트를 연상시킨다.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다섯 살 때 피아노 소곡을 작곡했던 모차르트. 그 역시 여섯 살 때 7년전쟁의 주역인 합스부르크 공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신기(神技)를 시험받는 역사적 장면을 연출한다.


매월당은 피아노 의자 대신 나이 많은 사신의 무릎 위에 앉았고, 피아노 연주 대신 한시를 읊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의 시험을 거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숨 막히는 긴장과 기대가 방 안을 감싸고 돌았을 것이다.


"아가야, 네 이름을 갖고 글을 지어보겠느냐?"

박이창은 아주 쉬운 주제로 시험의 문을 열었다.

이 정도쯤이야…….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시강보김시습(來時襁褓金時習)." 

올 때 강보(포대기)에 싸여 있던 김시습입니다라는 뜻이다.

박이창은 감탄하며 무릎 위에서 노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글을 청했다. 이번에는 좀 더 어려운 청이었다.

"저 앞에 있는 산수화를 보니 무엇이 생각나느냐?"

이번에도 답할 수 있을까? 시험관은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어서 자칫 분위기를 깰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봤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의 입에서는 거침없이 한시가 흘러나왔다.

"소정주택하인재(小亭舟宅何人在)."

작은 정자와 배 위의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라는 뜻이다.

"허허-."

박이창은 놀라움과 동시에 흥이 나기 시작했다.

"참으로 신기하구나."

처음 대하는 신동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시 한 수가 튀어나왔다. 감탄과 찬사의 시였다.

"동자지학백학청공지말(童子之學白鶴靑空之末, 어린아이의 학식이 백학이 되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을 추는구나)!"

극찬이었다. 더 이상이 없을 정도였다. 이제 시험이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는 한 걸음 더 나갔다. 박이창의 시구를 이어받아 대구를 읊고 있지 않는가.

"성주지덕황룡번벽해지중(聖主之德黃龍翻碧海之中, 성스러운 임금의 덕은 황룡이 되어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서 번득이고 있네)."


이로서 마침내 모든 시험이 끝났다. 시중에 떠도는 소문의 진상은 모두 밝혀졌다. 그는 신동이었고 소문은 모두 사실로 판명 났던 것이다. 왕실의 기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왕조 창건 이래 처음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던 세종 시대였다. 그런 좋은 시절에 종묘사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최고의 천재를 발견했으니 길게는 3대까지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인재를 찾은 것이었다. 태평 시대의 또 하나의 길조였다. 하늘이 이 작은 조선에 내려준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어찌 임금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세종대왕은 친히 비단 여러 필을 하사하며 마지막 시험을 했다. 어린아이가 들 수 없을 무게의 비단을 혼자 가져가라 시켰던 것이다. 이때 이 어린 시습은 장차 550년 후, 21세기를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지혜와 교훈을 가르쳐주는 유명한 한 장면을 연출한다. 비단의 끝을 몸에 매달아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이 이야기는 아이들 동화책 한구석을 차지하는 전설로 남아 있다.


이후 사람들의 입에서는 5세 시습이라는 말이 떠돌아다녔다. 김5세라고 말하기도 했다. 수십 년이 지나도, 나이를 먹고 흰머리가 났어도 세간에 알려진 김시습은 바로 5세 시습이었을 뿐이다. 그만큼 다섯 살 때의 김시습은 뭇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무량사에 있는 그의 부도에는 아직도 5세김시습지묘라고 쓰여 있다. 그는 죽어서도 5세 시습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화려했던 5세 시습

우리가 조선 500년사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매월당이 왜 실패한 삶을 살게 됐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인 중심의 조선 사회요, 임금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 입신출세를 최고로 여기는 조선 사회가 아니었던가? 임금에게까지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천재적 문장가가 입신출세는커녕 가족조차 없는 낭인이 되어 기구한 삶을 살게 된 배경이 궁금하기만 하다. 그의 타고난 성품 탓이었을까, 아니면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그가 떠돌이 생활을 했던 이유 중 하나를 불우한 청소년기에서 찾고 있다. 사실 그의 집안은 별 볼일이 없었다. 강릉 김씨이니 그 뿌리는 신라 김알지(金閼智)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지만 매월당 당대에는 이렇다 할 부도 권세도 없었다.


그러나 가난은 그의 청소년기를 불행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는 부모님들의 정성스러운 후원으로 착실하게 천재 수업을 쌓아갔다. 당대 석학으로 인정받던 김반(金泮)과 윤상(尹祥)이 그의 개인 교사였다. 특례 입학으로 성균관에까지 입학하는 특전을 얻기도 했다. 빈한한 집안의 자식으로서는 호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기 들어 그에게는 또 한 번의 불행이 찾아들었다. 한창 예민한 시기인 15세 때 일이었다. 느닷없이 어머니를 잃었던 것이다. 어려운 생계를 꾸리고 건강도 좋지 않은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자식의 공부를 위해 애써 선비 마을로 이사를 했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를 여의었으니 어린 매월당에게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단지 불우한 청소년기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혼자 몸으로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지 외숙모에게 아이를 맡겼고 외숙모는 어머니처럼 끔찍하게 아이를 위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허전함을 외숙모가 극진한 사랑으로 메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에 이어 외숙모마저 세상을 뜨고 만다. 그의 인생에서 최대 후원자였던 세종대왕이 승하한 것도 이때였다.


이 모든 일들이 불과 3년 사이에 일어났다.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대상도, 정신적 지주도 모두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후처를 얻은 것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맞아들인 계모와 시습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계모가 들어온 직후 그는 곧장 집을 나가버렸다. 이후 그는 줄곧 혼자 살며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에 또 다른 불행이 그를 덮쳤다. 1453년 19세 때인 단종 1년 치른 과거 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던 것이다. 신동이라며 세상이 입이 닳도록 칭찬했던 그가 과거에 떨어졌다. 신동이라더니, 천재라더니……. 세간의 비아냥거림은 아마도 시험에 떨어진 것보다 그의 자존심에 더 큰 상처를 줬을 것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로 속세 등져

그가 다시 시험을 봤다면 아마도 급제했을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5세 신동에 그치지 않고 10대 후반에 이미 그의 문장과 학식은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다시는 시험을 보지 않았다. 이것이 그를 떠돌이로 만들었다는 데 이견을 달 사람 또한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가 시험을 보지 않으려 했던 것, 관직의 길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 여기에 또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사람들은 지적한다. 세조의 등극, 바로 그것이었다. 유달리 지조와 절개가 강했던 그였기에, 또 세종대왕의 음덕이 컸던 그였기에, 세조의 왕위 찬탈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직도 생육신(生六臣)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그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기록에 상세히 나와 있다. 『매월당선생전』에서 윤춘년(尹春年)이 묘사한 이때의 매월당의 모습을 보자. "사흘 동안 문을 닫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통곡이 끝난 뒤 갖고 있던 책을 모두 불살랐다"고도 했다. 그리고는 "거름 구덩이에 빠졌다가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선비의 절개를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던 그에게 불법으로 왕위를 빼앗은 임금은 결코 모실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과거도 입신출세도, 관직을 얻어 웅지(雄志)를 펼치는 것도 모두가 허망한 일이었을 뿐이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방랑의 길에 들어선다.


변절인가 예의인가

사실, 속세로 돌아오려는 매월당의 욕구는 매우 컸다. 30대 후반에는 아예 관직을 얻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적도 있었다. 37세 되던 해 봄이었다. 경주 남산에서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막 끝냈을 때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이곳에서 죽겠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하나의 사건이 그의 생각을 순식간에 뒤집어놓았다. 깊은 산속의 그에게도 새 왕 성종이 즉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매월당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 임금은 내 목숨을 바쳐도 좋을 것이다. 드디어 꿈을 펼칠 때가 왔어. 그는 서둘러 산을 내려와 서울로 향했다. 이미 임금을 위한 치도(治道)와 경제론까지 정리한 터였다. 그의 정치사상을 읽을 수 있는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國家興亡論)」과 경제사상을 읽을 수 있는「불의부귀여부운변(不義富貴如浮雲辨)」은 지금도 연구되는 주제다. 그는 "나라의 화(禍)는 나라가 위태로운 데에 있지 않고 편안한 데에 있으며, 나라의 복(福)은 경사(慶事)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심과 걱정에 있다"고 봤다. 또한 경제의 기본 원리는 "백성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와 닿는 말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했을 것이다. 조선에 나만 한 인재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자부했던 그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그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무도 그를 추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때 커다란 좌절을 맞봐야 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정치·경제사상은 후학의 연구 주제로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가련한 인생, 불쌍한 50세

환속한 지 꼭 10년째인 1491년, 57세의 매월당에게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얻은 것은 병뿐이요, 잃은 것은 건강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죽을 곳을 찾아 나섰다. 부여 만수산의 무량사(無量寺). 왜 그가 이곳을 영면(永眠)의 장소로 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자신도 알지 못했을지 모른다. 다시 중이 되려 했던 것일까? 그는 다시 중이 되고 싶었으면서 동시에 중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것이 정답일 것이다. 다시금 절에 들어가 선(禪)을 연구하면서도 그는 중으로 죽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1493년 환갑을 앞둔 매월당은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무엇 하나 제대로 얻은 것이 없다. 불우, 불행, 불운 등의 수식어가 제격인 삶이다. 관직을 갖고 싶었지만 갖지 못했고 자식을 갖겠다는 평범한 꿈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며 살려고도 했지만 그는 늘 혼자 고독하게 진리를 구해야 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마지막 희망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늘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매장하라는 그의 유언까지도 거절했다. 처음에는 땅에 묻었지만 절에서 죽은 그를 매장한다는 것은 불법(佛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3년이 지난 후 스님들은 결국 시신을 꺼내 화장했다. 그리고 감탄했다. 고승에게서나 있는 사리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결코 돌중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지금껏 그의 사리는 무량사에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다. "재주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율곡의 매월당에 대한 해석은 40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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