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제주를 다녀간 사람들의 기록을 읽고 주제별로 나눠 제주의 인문지리적 특징을정리하였으며, 직접 제주도를 둘러보고 그들이 빠뜨린 내용과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제주에서 재배하는 감귤에 대해서도소개하고 있다. 표류사나 한일교류사의 측면에서는 물론, 제주 문화사나 감귤 재배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헌이다.
■ 저자 정운경(鄭運經, 1699∼1753)
자가도상(道常), 호는 동리(東里)이다. 그는 1699년 2월 13일에 태어나 1753년 3월 28일에 세상을 떴다. 족보에는 문집이 있었다고했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부인 남원 윤씨와의 사이에 딸만 둘을 두었다. 동생 정운유의 둘째 아들 후조(厚祚)를 입계하여 후사를 이었다. 후조또한 후사 없이 세상을 떴다. 동생 정운유(鄭運維, 1704∼1772)는 문과 급제 이후 영조의 신임을 받아 대사간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공조판서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정운유의 아들은 조선의 다빈치로 불리는 정철조(鄭喆祚, 1730~1781)였다.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이가환(李家煥)이 바로 정운유의 사위였다. 정운경은 소북(小北)의 집안이었다. 그 자신이 입사(入仕)하지 않았고, 입계한 정후조 또한 후사를잇지 못해 『탐라문견록』을 비롯한 그의 문적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를 따라 제주도로 건너왔을 때 그는 33세의 중년이었다. 제주목에머물면서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틈틈이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여행을 다니며 지냈다. 그의 시문은 따로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 산방굴사(山房窟寺)와 망경루(望京樓)를 읊은 7언율시 두 수가 실려 있을 뿐이다.
■ 역자 정민
한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시미학산책』『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꽃들의 웃음판』을 통해 한시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작업을 해왔다. 도교적 상상력의 문제를 다룬 『초월의 상상』, 새의 기호학적 의미를 문학과 회화를 통해 읽어본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등 다양한 지적 편력을 보여주었다. 잠언풍의 청언소품을 모아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책읽는 소리』『내가 사랑하는 삶』, 『죽비소리』 등을펴냈다. 최근에는 『미쳐야 미친다』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으로 사회문화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문학을 넘어 문화사 전반으로 글쓰기와 사유의 폭을넓혀가고 있다.
■ 차례
서문
탐라문견록
제1화 : 1687년 조천관 주민 고상영의 안남국 표류기
제2화: 1729년 신촌 사람 윤도성의 대만 표류기
제3화 : 1729년 아전 송완의 대만 표류기
제4화 : 1679년 관노 우빈의일본 취방도 표류기
제5화 : 1698년 성내 백성 강두추·고수경의 일본 옥구도 표류기
제6화 : 1724년 도근천 백성 이건춘의일본 대마도 표류기
제7화 : 1723년 조천관 백성 이기득의 일본 오도 표류기
제8화 : 1723년 성안 백성 김시위의 일본오도 표류기
제9화 : 1726년 북포 백성 김일남·부차웅의 유구국 표류기
제10화 : 1704년 관노 산해의 일본 양구도 표류기
제11화 : 1701년 대정현 관리의 일본 옥구도 표류기
제12화 : 1729년 도근천 주민 고완의 일본 오도 표류기
제13화 : 1720년 대정현 백성 원구혁의 일본 신공포 표류기
제14화 : 1730년 관노 만적의 가라도 표류기
제15화: 어떤 사람의 이상한 섬 표류기
최담석전
영해기문(瀛海奇聞)
탐라기(耽羅記)
순해록(循海錄)
해산잡지(海山雜誌)
-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탐라귤보(耽羅橘譜)
- 서문
- 상품 5종
- 중품 5종
-하품 5종
부록
귤유보(橘柚譜) - 임제
귤유품제(橘柚品題) - 조정철
추사감귤론(秋史 柑橘論) - 김정희
탐라직방설(耽羅職方設) 중 감귤론 - 이강희
원문
탐라문견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
1729년 아전 송완의 대만 표류기
송완(宋完)은 부(府)의 아전이다. 윤도성과 함께 표류하다가 대만에 이르러 창화현에서 돌아왔다. 8일 동안 표류하다가 대만에 이르니, 길은 모두 바다를 끼고 밭 사이로 나 있었다. 들판은 비옥하여 한구석도 모래밭과 자갈땅이 없었다. 길 왼쪽에는 큰 산이 한 일 자로 하늘까지 걸쳐 있었다. 날씨는 따뜻했고, 땅에서 올라오는 기운은 습기가 많았다. 여염집은 모두 2층의 다락집으로 지었다. 네 계절 언제나 다락 위에서 산다. 방은 모두 갈대와 대나무로 시렁을 짰다.
상제묘에 있을 때 일이다. 대만 사람이 마패 가운데 천계 연호가 있는 것을 보고 다투어 전하여 살펴보더니,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대명(大明)의 제도가 여기에 남았구나.”
어떤 이는 탄식하면서 마패를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기색이 말과 얼굴에 드러났다. 복건을 지나 포성현(蒲城縣)에 이르러 고개 하나를 넘는데, 그 높이가 구름과 맞닿았고, 양쪽의 큰 산이 하늘을 떠받칠 듯 둘러쌌다. 길가의 댓잎은 새벽이슬이 구슬처럼 얼어붙었다가 방울방울 떨어져 아래쪽에 쌓여 있었다. 대만 사람들은 태어나 얼음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이것을 보더니 크게 기뻐하며 조심스레 가져다 보물처럼 어루만졌다.
항주를 지나는데 멀리 보니 동남쪽으로 산 하나가 우뚝 솟아 걸쳐 있었다. 꼭대기의 작은 산은 대접을 엎어놓은 것 같았다. 그 색깔이 붉어 마치 자줏빛 구름이 솟아나는 듯했다. 또 산 아래쪽 봉우리 하나가 빼어나 기둥처럼 우뚝 솟았다. 물어보니 큰 산은 천태산이고, 붉은 것은 적성(赤誠)이며, 빼어난 것은 석주봉(石株峰)이었다. 조금 구불구불하면서도 둥근 것은 안탕산(雁蕩山)이었다.
절강과 복건 등지의 물가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배를 집으로 여긴다. 아내는 노를 잡고, 사내는 닻줄을 끌어 왕래하는 나그네를 실어주고 뱃삯을 받아 먹고산다. 배 가운데서 자손을 길러 배 모는 것을 산업으로 여긴다. 이 같은 자가 이루 셀 수도 없었다.
산동 땅으로 접어들자 평야가 수천 리인데, 탑이나 누각 하나 없이 모두 밭이었다. 마을은 쓸쓸하여 강남의 풍부함에는 크게 못 미쳤다. 운하를 파서 열고 5리에 갑문(閘門)을 하나씩 두었다. 갑문 입구는 큰 배 한 척이 겨우 지날 만했다. 양쪽의 석축은 한 줄로 움푹 파고, 긴 판을 움푹 팬 안쪽에 넣어 꼭대기까지 차오른 물을 막아 버티게 했다. 운하를 지나는 배가 판을 열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서 얕은 여울로 넘치게 했다.
1723년 성안 백성 김시위의 일본 오도 표류기
계묘년(1723, 경종 3) 3월 25일, 성안에 사는 백성 김시위(金時位)가 육지에 들어오다가 서북풍을 만나 일본 오도로 표류했다. 왜인이 구제하여 6일 동안 보호하며 가서 장기도에 이르렀다. 관소에 들어가니 통사가 접대하는데, 서로 오래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정이 생기고 익숙해졌다. 하루는 그 방에 가서 통사가 병풍 안쪽에 앉아 막 식사하는 것을 보았다. 놋그릇, 숟가락, 밥사발 등의 그릇이 모두 우리나라의 제도나 모양과 같았다. 이에 웃으며 말했다.
“상관(上官)께선 어찌하여 몰래 만드셨소?”
통사 또한 웃으며 말했다.
“일본이 비록 법으로 금하고 있지만, 그릇과 의복이 쓰기에 간편하고 몸에 맞기로는 어찌 조선의 제도보다 나을 수 있겠소.”
그러면서 장롱 속에서 망건과 도포, 철릭과 가죽신 따위를 꺼내 죽 늘어놓고 보여주며 말했다.
“조선은 예의가 잘 갖추어져 있소, 이러한 의관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소.”
“예복이 좋은 줄 알았다면 어째서 고쳐서 이를 따르지 않습니까?”
“나라 풍속이 예부터 다르기 때문이오. 갑작스레 고칠 수는 없겠지요.”
하루는 통사가 옻칠한 궤짝을 앞에 놓더니 말했다.
“우리 도주(島主)께서 남경 상선에게 천금을 주고 이 보물을 샀소. 하지만 그 이름과 쓸모를 알지 못하겠구려. 혹시 알지 모르겠소.”
마침내 짐승의 가죽을 꺼내는데, 범의 머리에 소의 발굽을 하고 있었다. 수염이 있는데, 길이가 몇 치쯤 되었다. 꼬리는 성글어 가늘었고, 털을 부드럽고도 촘촘했다. 색깔은 짙은 청색에 동전같이 생긴 흰 무늬가 있었다. 알록알록한 것이 아낄 만했다. 가죽은 크기가 말 두세 마리만 했다. 또 둥근 나무 하나를 꺼내는데, 길이는 예닐곱 치요, 높이가 몇 치쯤 되었다. 껍질은 후박나무 같은데, 빛깔은 검고 옅은 황색의 무늬가 있었다. 양끝에는 깎아 자른 흔적 없이 가죽의 색깔과 한 가지였다. 향내가 몹시 진해서 코를 막았다. 혹 손을 대서 물건에 닿아 움직이면 향기가 더욱 풍겨 나와 마치 연기가 어지러이 피어나는 듯하더니, 향내가 사람의 피부에 스몄다. 우리는 모두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러자 통사가 물건을 싸서 간직해두었다.
나가사키 항구 판화. 여러 척의 범선과 네덜란드 국기가 게양되어 있는 남만관이 보인다. 나가사키 미술관 소장.
하루는 통사가 우리를 이끌고 가서 남만관(南蠻館)을 보여주었다. 그 사람들은 눈이 깊고 코가 높았다. 눈동자는 노랗고, 코는 가늘고도 길었다. 세상 사람과는 완전히 달랐다. 검은 옷을 입었는데 사지와 몸이 몹시 길고 컸다. 키는 한 장(丈) 반 가까이 되고, 손가락이 정강이만 했다. 그 모습이 북실북실했다. 머리에는 붉은 담요를 둘렀는데, 제도가 북방 오랑캐들이 쓰는 모자와 같았다. 여섯 사람의 면모가 서로 아주 비슷했다. 누린내가 나는데, 한 사람이 일어나 이리저리 다니자 50보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 냄새가 코를 찔렀다.
통사에게 물었다.
“저들은 장사차 와서 머무는 것입니까?”
“아니오. 일본과 화호(和好)하여 볼모로 온 것입니다. 3년마다 한 번씩 교체되지요.”
그들은 태어나서 8~9세가 되면 덩치가 저리 커지고, 서로 혼인하여 성인이 된다. 50세만 되어도 오래 살았다고 하니, 50을 넘겨 사는 자가 없다. 왜도 이를 사람으로 생각지 않았다.
하루는 통사와 더불어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데, 통사가 말했다.
“일본이 일찍이 조선에 덕을 베풀었는데, 조선은 알 수 없을 게요.”
“무슨 말입니까?”
“남만이 제주를 치려고 했으나 바닷길이 익숙지 않아 일본에 군대를 청해 길잡이로 삼겠다고 했지요. 관백(關白)께서는 이를 허락하려 했지만, 대사마(大司馬)가 간하여 말했소. ‘일본과 조선은 강화를 맺어 이웃으로 좋게 지내 관계가 매우 도탑습니다. 어찌하여 일본 군대를 내어 조선 땅을 침략하려 하십니까? 남만이 치고 안치고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관백께서 허락하지 않자, 남만 또한 그만두고 군대를 내지 않았답니다.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병력의 강성함이 남만보다 더한 곳이 없습지요.”
다만 남만이 군대를 요청한 것이 어느 해에 있었던 일인지 알지 못하니 안타까웠다.
관소에 있을 때 동향 사람 이기득의 배도 표류해 와서 서로 만나 보았다. 6월에 장기도에 출발하여 대마도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수십 일을 머물다가 물을 건너 동래에 정박했다.
최담석전
최담석(崔淡石)은 동래 사람이다. 그 아비는 담사리(淡沙里)라 하며, 솥 때우는 일을 하며 먹고살았다. 신사년(1701, 숙종 27)에 왜사(倭使)가 왜관에 왔을 때, 100금을 주고 옛 그릇을 구하려고 했다. 이에 담사리가 그 처와 상의했다.
“일 년 내내 고생해도 먹을 것도 얻지 못하는데, 진실로 옛날 그릇 하나만 얻는다면 죽을 때까지 굶주리지 않을 것이오, 내가 온 나라를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오겠소.”
이때 담석은 태어난 지 석 달째였다. 담사리가 말했다.
“내가 돌아오는 것은 세월로 기약할 수가 없으니, 이 아이에게 내 이름을 얹어서 알게 하리다.”
그러고는 이름을 담석이라고 지어주었다.
마침내 김해 사람과 함께 떠나 5~6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었다. 탐라는 바다 밖에 있는지라 전쟁이 이르지 않아 오래된 물건이 많았다. 이에 그 땅으로 들어갔지만, 그 백성은 가난하고 피폐해서 고기 잡고 나물 캐서 먹고 살 뿐, 옛 그릇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므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들으니 대정현에는 삼을나 적에 옛 성터가 있다고 했다. 이에 삽과 삼태기를 갖추고 그곳으로 가서 땅을 파서 기와 그릇에 사발 따위를 얻었다. 만든 모양이 크고 질박했는데, 깨지고 망가진 데다 새겨 적은 것도 없었다. 그것들은 쓸모가 없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에 타려는데, 마침 함께 갔던 사람이 석 달을 앓다가 죽었다. 장례를 치러주고 나니 짐 보따리가 텅 비어서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무릇 바다를 건너는 자는 한 달 치 양식을 준비해야만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이를 마련할 길이 없어 이리저리 떠돌다가 대정현 경계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남의 집에 고용살이를 하다가 아내를 얻어 두 아들을 낳았다. 속주(屬州)에서 유군(流軍. 汲水軍)에 복역하느라 세월을 끌며 돌아갈 수가 없었다.
담석은 이미 성장하여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것을 혼자 상심했다. 죽든 살든 아버지를 찾기로 맹서하고, 18세에 어미를 하직하고 길을 나섰다. 삼남(三南) 땅으로부터 서북에 이르기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솥 땜질을 업으로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만나서 제 어미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끝내 찾지 못했다. 몇 해가 지나면 반드시 돌아와 그 어미를 살펴보고는 양식을 싸들고 또 떠났다. 15년 동안 세 번이나 북도(北道)까지 들어갔지만 마침내 들은 바가 없어 죽었다고 생각했다.
을사년(1725, 영조 1)에 대정현 사람이 마침 일본에 표류했다가 동래로 돌아왔다. 이에 담석이 가서 물어보았다.
“육지 사람으로 솥 땜질 일을 하는 최씨 성에 이름이 아무개인 사람이 혹시 제주도에 들어와 삽니까?”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솥 땜질장이로 뭍에서 온 사람이 지금 관에서 복역하고 있소.”
담석이 즉시 편지를 써서 일의 시말을 적고, 아비를 찾는 뜻을 갖추어 서술한 후, 술병을 그 사람에게 맡겨 전했다. 담석은 또 서울로 올라와 아버지를 찾았다.
7년 뒤 신해년(1731, 영조 7) 겨울, 담사리의 성중(城中) 주인이 장사차 동래로 나왔다. 이에 담사리가 답장을 써서 부쳤다. 집 떠난 세월과 이웃 마을 친족의 성씨를 적고, 또 헤어질 때 주고받은 말로 신표를 삼았다. 이때 담석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마침 한 달쯤 전에 제주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갔다. 담석은 그 편지를 얻고서 놀라고 기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어머니에게 자세히 말하고 행장을 차려 섬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담석의 아내가 말했다.
“듣자니 제주의 아낙네는 아양을 잘 떨어서 사람이 떠나게 놓아주질 않는답니다. 당신이 만약 당신 아버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장차 누굴 바라고 삽니까. 반드시 같이 가야겠어요.”
길이 험하다고 여러 번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마침내 부부가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서 제주 사람을 따라서 함께 제주도로 들어왔다.
그들은 임자년(1732, 영조 8) 정월에 담사리의 주인집에 도착했다. 때마침 담사리가 번(番)을 교대하여 예년에 살던 고을 집에 왔다. 이에 주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이 네 아비고, 이 사람이 네 아들이다.”
이에 부자가 서로 끌어안고 크게 통곡했다. 그 모습을 보는 자가 감격해서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담사리가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대정현으로 돌아와 양식을 준비해서 돌아가려 했다. 당시 담사리는 관가에 복역하고 있었으므로 와서 그 연유를 고했다. 이때 내가 곁에 있다가 이를 보니, 늙고 젊은 것은 비록 달랐지만 참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이었다. 관으로부터 관역을 정지 받고, 배와 곡식을 지급하여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온전한 배를 가려 그들을 실어 보냈다. 담석은 동래의 갖바치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다고 한다.
탐라기(耽羅記)
숲 사이로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있으려니까 포수 수십 명이 담여에 산짐승을 메고 와 앞에다 어지러이 내려놓는다. 멧돼지의 크기가 작은 송아지만 했다. 미리 이들에게 사냥을 하게 해서 길에서 기다리게 한 것이다. 사슴 한 마리, 노루 한 마리, 멧돼지 두 마리를 잡았다. 장작을 쪼개서 불을 붙였더니 성난 불길이 집채를 온통 태울 듯했다. 사냥꾼은 저마다 더벅머리가 부스스하고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손때는 마치 이끼가 핀 것 같았다. 허리 사이를 더듬어 칼을 뽑는데, 창포 칼날에 서리 기운이 서려 있었다.
잡은 짐승을 바위 위에 놓고 갈랐다. 소금과 장은 쓰지 않고, 큰 고깃덩어리를 꼬치로 만드니 길이가 몇 자나 되었다. 불가에 꽂아 김을 쐬어 구웠다. 기름이 지글지글 탔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길이 대정현의 경계로 접어들었다. 긴 숲을 뚫고 길을 열었다. 산유자와 비자, 금동(金桐) 등의 나무가 모여 서 있었는데, 모두 아름드리 나무였다. 정오부터 10리를 갔는데도 해가 보이지 않았다. 쌓인 잎이 무릎을 묻고 얽힌 가지가 옷에 걸려 사람들이 감히 그 속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날은 자단촌(紫丹邨)에서 잤다. 동틀 무렵에 천제담에 이르렀다. 그곳은 평지가 움푹 꺼져서 절로 골짜기를 이루고, 돌기둥이 늘어서서 마치 병풍처럼 하늘을 버티고 섰다. 가운데를 에워싸고 못물이 담겨 있었다. 검푸른 것이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콩 한말 남짓 뿌릴 만한 너비였다. 그 바깥은 숫돌이 문짝이나 자리처럼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물은 바위 사이에서 울었다. 혹 내뿜고 혹 머금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모습이 달랐다. 또 펑퍼짐한 너럭바위가 있어 물이 그 위로 골골 흐르다가 떨어져서 폭포가 된다. 길이는 100척이다. 두 벼랑에는 푸른 절벽이 깎은 듯하고, 진귀한 나무가 가득했다. 바위의 이끼를 쓸고서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며 온종일 놀다가 왔다.
이날은 춘분이었다. 서귀진에서 잤다. 서귀진은 남쪽 바다를 누를 듯 내려다본다. 섬 세 개가 포구에 늘어서 솟아 있다. 바위절벽이 사방에 깎은 듯하고, 나무가 무성하여 그 모습이 마치 산으로 된 시렁 같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범도(凡島)라 하는데, 바로 최영 장군이 ‘하치(哈赤)’를 깨뜨린 곳이다.
저녁 무렵 하늘 끝에서 첩첩 쌓인 산처럼 한 줄기 구름이 일어났다. 서귀진 사람이 말했다.
“오늘은 틀림없이 바다 노을이 자옥해서 별을 보기에 좋지가 않겠습니다.”
조금 후에 몰려든 구름이 사방으로 퍼지더니 바다와 하늘이 뒤엉겨 다만 푸를 뿐이었다. 혼돈이 갈라지기 전처럼 어지러워 원기(元氣)가 자옥했다. 한밤이 못 되어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등불을 돋우고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동행한 사람에게 말했다.
“그대나 나는 모두 한양 사람인데, 밤중에 남쪽 끝 한바다의 물가에서 자게 될 줄이야 어찌 평소 생각이나 해보았겠는가? 북쪽 사람에게 들려준다면 비록 죽을 때까지 해보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일세. 지금 우리는 모두 원치 않아도, 또한 그만두고 가버리려 해도 할 수가 없네. 사람의 일은 앞서 정해진 운명이 있어 그렇게 시키는 것인가 싶네.”
이튿날 아침 비가 갰다. 천연지(天淵池)를 보려고 덩굴을 더위잡고 돌 비탈을 올라 골짜기 속을 굽어보며 들어갔다. 비가 와서 시내가 불었다. 폭포의 흐름은 내뿜는 듯 100여 척이나 쏟아져 내리고, 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벼랑 가까운 곳의 나뭇가지와 잎은 물의 기세에 따라 잔뜩 움츠렸다. 사면의 푸른 절벽은 겹겹이 포개진 것이 마치 방 같았다. 온갖 진귀한 나무들이 모두 바위틈에 뿌리를 서려 이리저리 뻗은 뿌리가 들쭉날쭉했다. 이끼가 엷게 침식해서 바위의 색은 마치 그림 같은 옅은 황색이었다. 박연폭포의 웅장함에 견주면 비록 못 미쳐도 은근한 맛은 이곳이 더 나았다.
?
동쪽으로 돌아 10리를 가서 정방연(正方淵)에 이르렀다. 깎아지른 절벽이 매달리듯 꽂혀 있고, 바다의 파도가 그 밑동을 거세게 할금거렸다. 폭포는 1,000척을 흘러내려 곧장 바다 위로 쏟아진다. 그 형세가 기이하고 대단해서 앞서 본 두 폭포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