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음식

   
부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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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15000
2022�� 12��



■ 책 소개


향토음식은 그 지역 사회상을 비추는 거울!
부산의 향토음식 속에 투영된 부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되짚어보다

‘부산’하면 떠오르는 대표음식이 몇몇 있다. 이를 바탕으로 부산시는 2009년 부산의 향토음식을 선정한 바 있다. 생선회부터 동래파전, 흑염소 불고기, 복어요리, 곰장어구이, 붕장어요리, 해물탕, 아구찜, 재첩국, 낙지볶음, 밀면, 돼지국밥, 그리고 붕어찜까지 총 13가지다. 향토음식 속에는 그 지역의 역사와 시대별 사회상, 지역민들의 기질이 면면히 녹아있다. 그렇기에 부산의 향토음식 속에 투영된 부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되짚어 보면, 지역의 역사적 사건과 사회 전반의 현상을 재미있게 풀어볼 수 있다.

이 책의 1부 〈누구나 잘 아는 부산 음식, 그러나 잘 모르는 부산 음식〉에서는 돼지국밥, 밀면, 어묵, 활어회와 선어회, 동래파전, 곰장어, 초량돼지갈비, 길거리 음식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2부 〈부산 사람도 잘 모르는 부산 음식〉에서는 바다 추어탕, 고갈비와 명갈비, 영도 조내기고구마, 해초 음식, 청게와 방게, 밀기, 전어넙데기회와 꼬시래기회쌈, 매집찜, 말미잘탕에 대해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부록에서는 기장미역, 조방낙지, 구포국수, 낙동김, 대변멸치, 산성막걸리, 가덕대구, 가덕숭어, 명지대파, 칠암붕장어 등 지역명을 딴 부산의 음식들을 다룬다.

■ 저자 최원준 외
부산문화재단 사람·기술·문화 총서 편집위원회
김한근(향토사학자)
박희진(사진가)
반민순(시나리오 작가)
배길남(소설가)
오지은(디자이너)
최원준(시인·음식문화칼럼니스트)

글쓴이
최원준(시인·음식문화칼럼니스트)
박찬일(맛칼럼니스트)
박정배(음식평론가)
박상현(맛칼럼니스트)
이춘호(기자)
김한근(향토사학자)
오지은(디자이너)
이욱(교수)
배길남(소설가)
김준(연구원)
반민순(시나리오 작가)
박희진(교수)
양용진(연구원)
김미주(기자)
나여경(소설가)
김정화(K스토리연구소 대표)
김성윤(기자)
박종호(기자)

■ 차례
총론
부산의 정체성과 부산 음식 · 최원준

1부 - 누구나 잘 아는 부산 음식, 그러나 잘 모르는 부산 음식
진화하는 부산의 소울푸드 - 돼지국밥 · 박찬일
근·현대사의 상흔을 품은 부산만의 음식 - 밀면 · 박정배
국민 반찬이자 서민 간식, 베이커리화로 변신하다 - 어묵 · 박상현
부산의 선어는 더 살아 있다 - 활어회와 선어회 · 이춘호
동래파전 먹으러 동래장터 간다 - 동래파전 · 김한근
영양가 높은 추억의 구황음식 - 꼼장어 · 오지은
초량, 돼지 음식의 발상지가 되다 - 초량돼지갈비 · 이욱
길거리에서 부산을 맛보다 - 비빔당면, 물떡, 씨앗호떡 등 · 배길남

2부 - 부산 사람도 잘 모르는 부산 음식
부산 추어탕을 보면 부산이 보인다 - 바다 추어탕 · 김준
생선으로 갈비 한 번 뜯어 보실라우? - 고갈비, 명갈비 · 반민순
배고픔의 설움 달래준 빼데기죽 - 영도 조내기고구마 · 박희진
밥상의 주인공, 해초로 만든 갖가지 음식 - 해초 음식 · 양용진
마을 사람들만 숨어서 먹는 게 맛 - 청게와 방게, 밀기 · 김미주
생선회, 이런 방법으로 먹어 봤수? - 전어넙데기회, 꼬시래기회쌈 · 나여경
바다마을의 대표 잔치 음식 - 매집찜 · 김정화
붕장어 주낙에 걸려 온 말미잘, 밥상에 오르다 - 말미잘탕 · 김성윤

부록 - 부산 지명, 부산 음식
기장미역, 조방낙지, 구포국수, 낙동김, 대변멸치, 산성막걸리, 가덕대구, 가덕숭어, 명지대파, 칠암붕장어 · 박종호

 




부산의 음식

부산의 정체성과 부산 음식 · 최원준
음식을 보면 한 국가의 역사와 그 민족의 정체성을 읽어 낼 수가 있다. 지역의 풍습과 생활상, 지역 사람들의 기질 또한 들여다보기도 한다. 비록 흔하고 소소한 식재료, 투박한 음식 한 그릇이지만, 이들이 시대를 담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소홀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음식 속에 담겨 있는 시대적 담론은 사람의 역사를 만들며 문화인류학의 근간이 된다.

부산은 예부터 다양한 ‘외부 세력과 문화’에 유연한 태도를 보여 왔다. 이는 부산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성정에서도 기인하지만,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지정학적으로는 한반도 남단의 해양을 국경으로 하고 있었기에 해양문화 수용이 자유로웠다는 점, 역사적으로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여러 경로를 통한 인위적이고 다양한 문화 유입이 급속도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있다.

부산의 근현대사는 한 마디로 이주의 역사였다. 부산 근대사의 두 축은 내국인의 동래부와 초량왜관 자리의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대변할 수가 있는데, 그중 지금의 원도심을 형성했던 일본인 거류지역은 그 시작부터가 ‘이주의 역사’였다.

초량왜관 시절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된 이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부산 유입은 급속도로 증가하였고 조선보다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신문물은 다양한 일본문화와 함께 유입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 귀환동포가,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흘러들어왔다.

다시 말해, 부산은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에 의해 급속하게 팽창된 도시이다. 피난민들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피폐했는데, 특히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할 기본적인 끼니 해결이 생사를 좌우하는 큰일이었다. 이들은 값싸고 양을 늘려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활용하여 가족들을 건사했는데, 그 시절 탄생했던 음식들이 바로 밀면, 돼지국밥, 구포국수, 부산어묵, 곰장어 등으로 오늘날 부산의 향토음식들이다. 산업화 시대의 부산은 직업을 찾아온 경남, 호남, 제주 사람들로 흘러넘쳤다. 이들과 함께 유입된 이종의 문화와 더불어 식문화도 부산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부산의 이주역사가 현재 부산사람들의 정체성과 아울러 ‘부산의 향토음식’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된다.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부산으로 들어오면서, 부산은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가치관을 담은 음식들이 한데 섞이고 어우러져, 독특한 부산만의 문화와 정서를 탄생시킨 것이다.

부산 사람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수용성’과 ‘개방성’, ‘다양성’이 바로 그것으로, 각지의 이주민들이 각 지역의 문화를 받아들여 부산의 문화로 만들고, 부산의 문화를 개방하여 모든 이와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 부산 사람이 가지는 ‘부산의 정체성’이다.


1부 - 누구나 잘 아는 부산 음식, 그러나 잘 모르는 부산 음식
진화하는 부산의 소울푸드 - 돼지국밥 · 박찬일
돼지국밥은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 즐겨 먹는 탕반의 일종이다. 탕반이란 국과 밥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민족 음식이다. 아궁이라는 열원과 다중을 위한 습식 탕 국물, 대체로 추운 겨울을 가진 대륙성 기후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음식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돼지국밥은 경상도, 특히 부산에서 발달해온 음식이다. 서울과 수도권의 순대국밥처럼, 부산 돼지국밥 역시 기원설이 다양하다. 돼지국밥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산, 경남, 경북으로 벨트가 형성되어 있는데, 기타 지역은 대체로 순대국밥이다.

돼지국밥은 돼지고기국밥도 아니고, 순대국밥도 아니다. 그냥 돼지국밥이라는 명명이 이미 상당히 투박하고 직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의 한 시인이 ‘야성을 가진 음식’이라고 갈파했듯이, 뭔가 타지인들은 부산 돼지국밥에 그런 남쪽 도시의 기질, 거칠고 우직한 성격을 규정짓곤 한다.

필자는 2000년대 초반 처음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먹게 되었는데,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머릿고기를 거의 100퍼센트 쓰는 서울식과 달리 머리 이외의 부위, 즉 정육이 들어간다는 점이 놀라웠다. 정육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정선된 고기이며 정식(?) 고기다. 또 정구지라고 부르는 생부추나 부추무침의 제공, 풋고추가 아닌 더 매운 ‘땡초’의 제공, 새우젓과 다지기의 사용량이 적은 점도 순대국밥과 다른 점이다.

부산사람에게 맛있는 돼지국밥을 묻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대답하는 사람마다 다 다른 답을 내놓는다. 지역 말단 골목까지 맛있는 돼지국밥집이 존재하며, 매우 넓은 데다 독특하고 폐쇄적인 지형으로 교통이 쉽지 않은 부산의 특성 때문인지 권역별로 맛있는 돼지국밥집의 계보도가 다르게 그려진다. 그러니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먹어보겠다는 의지는 매우 길고도 치밀한(?) 계획이 있어야 하나의 장정을 마칠 수 있다.

부산 돼지국밥이 서울 순대국밥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국물의 농담이다. 순대국밥은 맑게 내는 법이 없다. 만약 그 국물이 맑다면 ‘제대로 끓이지 않아서 묽다’는 의미로 서울시민은 받아들인다고 봐도 좋다. 그러나 부산에는 한 방식으로 맑은 국밥이 존재한다. 이는 수육의 제공과 관련이 있다. 부산 경남 일대에서는 돼지 사육업이 발달하여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수육이 될 수 있는 정육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원인으로 짚이고 있다.

범일동 할매국밥은 부산식 돼지국밥의 발달사를 압축해 놓은 것 같다. 분분한 돼지국밥 유래설 중 가장 유력한 것으로 이북 피난민 창업설을 이 가게가 보여주고 있다. 1·4후퇴를 중심으로 한 실향민들이 처음 만들어 팔았다는 설이 제일 설득력이 있고 부산 음식문화 전문가들도 다수 인정하고 있다.

또 부산이 전국의 노동자를 빨아들이는 산업기지가 되었을 때 돼지국밥이 발달했다는 기원설을 범일동 할매국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부산은 수산, 제분, 섬유, 신발 제조 등의 거대한 기지였다. 이 가게의 배후지역에 바로 삼화고무라는 대형 신발제조회사의 노동자들이 많이 기거했다. 그들의 주말 휴식은 영화 관람이 많았고, 가게 옆에 있는 보림극장이 매우 인기 있는 극장이었다. 쇼와 영화를 같이 하는 1970년대식 극장으로 큰 인기를 얻어 사람들이 몰렸고, 이때 할매국밥도 크게 성장했다고 2대 주인 김영희 씨가 증언하고 있다.

돼지국밥의 이북 유입설과 관련하여 나는 평양 현지 취재를 시도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북한은 원래 돼지고기, 소고기를 많이 먹는 지역이다. 조선요리협회 연구사의 레시피 육필이 사진 형태로 전송되어 왔는데, 흥미로웠던 것은 부산 돼지국밥 조리법과 별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받은 조리법으로 부산 서면의 노포 돼지국밥집인 포항돼지국밥집에서 재료를 준비하고 끓였다. 놀랍게도 서울 순대국밥보다는 부산 돼지국밥과 비슷했다. 맑은 국물 때문인 듯했다. 같이 맛본 포항돼지국밥집 업주도 우리 국밥과 차이가 별로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한편 부산 돼지국밥은 더 진화하고 있다. 중국 양념인 마라국밥과 우동을 섞어내는 국밥과 실제 이름인 ‘하이브리드 국밥’도 있다. 동시에 전통의 노포는 길게 줄을 설 정도로 전국적인 인기를 끈다. 부산인은 돼지국밥 육수가 혈관에 흐른다는 농담 섞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근·현대사의 상흔을 품은 부산만의 음식 - 밀면 · 박정배
밀면은 부산만의 음식이다. 경상도 어디를 둘러봐도 밀면이 대중 음식 문화로 정착한 곳은 부산이 유일하다. 밀면의 부산화는 부산이 경험한 근현대사의 맛있는 상흔이다.

조선 시대까지 한반도 북쪽은 조, 수수, 콩을 주식으로 사용했고, 남쪽은 쌀이나 조, 콩을 주로 먹었다. 국수는 별식이었고 주재료는 메밀이었다. 밀은 한반도의 기후와 잘 안 맞고 쌀 중심의 남쪽 음식 문화권에서는 그렇게 절실한 곡물도 아니었다. 게다가 밀은 껍질이 단단하고 제분이 까다로운 장치 산업이다. 그러나 밀을 도정한 밀가루는 가공이 쉽고 매끈한 식감이 나는 멋지고 귀한 음식이었다.

부산은 1876년 일본의 강제 개항 이후 일본의 관문이었고, 해방 이후 미국의 물자와 해외 곡물의 수입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상도 곡물을 모아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이송하는 중심 항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구포에는 ‘남선곡산’, ‘영남제분’, ‘조선도정’ 같은 밀가루 제면 공장이 있었고, 이를 활용한 소면 생산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구포 일대와 부산의 산동네에 정착한 실향민들에게 구포국수는 싸고 맛있는 하얀 동아줄 같은 존재였다. 구포와 주변 일대에는 전성기인 1960∼70년대에는 국수공장이 30여 곳이나 있었다. 경상도 사람들의 국수 문화는 칼국수가 중심이었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늘여서 기름을 발라 만드는 소면 문화가 도입됐고, 전쟁 이후 부산에 대거 정착한 실향민들을 통해 북한식 면 문화인 압출 방식의 뽑아내기 기술이 밀가루 면 문화에 결합된다.

지금의 밀면이 밀가루 면이면서 메밀 면에 주로 쓰이던 압출 방식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실향민들이 만든 기술로 밀면 만의 고유한 특성의 핵심 기술이 된다. 밀면은 북한의 압출식 면 뽑기 기술과 부산의 밀국수 전통, 전쟁과 분식장려운동 기간을 거치면서 흔해진 밀과 고구마 전분 같은 재료를 바탕으로 틀이 마련되고 경상도식 한약재 육수와 양념장이 더해지면서 완성된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 요소가 그 생성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음식 문화는 흔치 않다.

‘내호냉면’은 지금의 자리에 1953년 3월 고향 이름을 딴 식당을 열었다. 창업자는 1919년 10월 함경남도 흥남 내호리에서 ‘동춘면옥’을 운영했었다. 그러나 부산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전쟁 직후라는 사회 경제적 환경 때문에 고향과는 다른 상황이 발생했다. 고향에서 국수를 만들 때 쓰던 감자 전분은 구하기 어려웠는데 반면 전쟁 구호품인 밀가루는 흔했던 것이다.

여러 시도 끝에 1959년에 밀가루 7에 고구마 전분 3의 비율로 만든 면발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이 섞인 밀면은 ‘경상도 냉면’, ‘부산냉면’, ‘밀냉면’으로 불리다 1970년대 이후 100퍼센트 밀가루만을 사용하면서 ‘밀가루 면’이라는 뜻의 ‘밀면’으로 정착한다.

그리고 1966년 개금시장 입구에서 영업을 시작한 ‘개금밀면’과 1968년 가야2동 동의대 입구역 언덕 초입에 ‘가야밀면’이 문을 열면서 밀면은 완성된다. 밀면은 면발과 국물을 두 개의 큰 축으로 다대기와 꾸미를 보조 축으로 발전해 왔다.

면발은 밀가루를 반죽해 압출 방식으로 뽑아내는 것을 공통된 특징으로 한다. 국물은 닭과 소고기 뼈를 기본으로 한약재를 넣은 방식과 넣지 않는 방식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개금골목시장 한켠에 위치한 개금밀면은 100퍼센트 밀가루로 만든 면에 닭고기 국물을 기본으로 하는 맑은 국물로 유명해졌다. 현재 부산 밀면 국물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한약재 육수를 사용해 단맛이 강한 국물을 내는 집들과 구분하기 위해 보통 ‘개금식 육수’로 불린다.

개금밀면은 1966년 가야동에서 ‘추곡식당’으로 시작하면서부터 밀냉면을 팔았는데, 당시 가야동과 당감동 일대에는 제조 공장이 많아 음식 수요가 많았다. 추곡식당은 1980년대 중반에 지금의 개금동으로 자리를 옮기며 ‘해육식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1990년대 초반에 밀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밀냉면은 밀면으로 자연스럽게 이름이 바뀌었고, 가게 이름도 해육식당에서 개금밀면으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호냉면에서 시작된 부산식 냉면의 변형은 가야밀면에 의해 완성된다. 100퍼센트 밀가루 면과 한약재가 들어간 국물을 사용한 밀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1970∼80년대를 풍미한 가야밀면은 창업주 사후에 100곳이 넘는 같은 이름의 식당이 생겼지만 창업주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고 알려졌다.

다만 초읍동에 있는 ‘삼성밀면’은 초기 가야밀면의 레시피가 남아있는 곳이다. 창업주는 가야밀면 창업주의 동생이면서 창업 때부터 1994년까지 가야밀면 주방에서 일한 분이다. 삼성밀면 창업주의 증언에 따르면 가야밀면의 창업주인 오빠의 친구 아버지로부터 밀면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당시 친구의 아버지는 실향민이었다.

그렇다면 한약재는 왜 국물에 사용됐을까? 삼성밀면 창업주에 의하면 한약재는 밀가루 냄새를 잡아주고 달고 강한 음식을 좋아하는 부산사람들의 식성에도 맞다고 한다. 게다가 한약재는 밀면의 또 한 축인 다대기의 매운맛을 중화시키고 단맛을 증폭시킨다.

밀면이 함경도 사람들을 넘어 부산사람들의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면발의 변화와 더불어 가야식의 달콤한 한약재가 들어간 육수와 개금식의 개운한 닭 육수가 완성된 이후의 일이었다. 면과 육수, 부산의 재료와 풍토, 사람들의 입맛을 완벽하게 반영하면서 밀면은 비로소 완전한 정체성을 가지고 발전과 분화를 시작한 것이다.


2부 - 부산 사람도 잘 모르는 부산 음식
부산 추어탕을 보면 부산이 보인다 - 바다 추어탕 · 김준
추탕, 별추탕으로 불리는 추어탕의 주재료는 원래 ‘밋구리’였지 미꾸라지가 아니었다. 밋구리가 귀해지면서 그 자리를 미꾸라지가 차지했다. 이 미꾸라지마저 구하기 힘들었던 부산에서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고등어, 붕장어, 웅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서울식도 남원식도 아닌 부산 추어탕이다.

부산 추어탕은 동해와 접한 기장에서는 장어를, 낙동강과 접한 하단포에서는 웅어를, 고등어 배들이 오갔단 자갈치와 영도에서는 고등어를 이용했다. 이런 부산 추어탕을 돌아보면 부산의 자연환경과 어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각 추어탕에는 한국전쟁, 새마을운동과 이주민의 삶의 문화가 고명처럼 더해진 부산의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다.

고등어추어탕의 중심은 영도와 자갈치시장이다. 선원들과 노동자와 상인들은 이른 새벽에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반찬을 챙기고 상을 차리는 일은 사치스럽다. 후루룩 국을 마시듯 밥을 먹어야 했다. 여기에 잘 어울리는 것이 국과 밥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고등어추어탕이다.

비린내 가득한 영도선창이나 부산어시장에서 미꾸라지를 구하는 일은 산삼을 찾는 일이나 다름없다.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면 어시장에 발로 차이는 것이 고등어였다. 고등어의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쌀뜨물을 이용했다. 고등어를 삶아 가시를 발라내고 살은 으깼다. 여기에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래기를 넣고 된장으로 간을 해서 끓여냈다.

기장은 장어, 미역, 다시마, 멸치가 유명하다. 이중 멸치와 장어로 조리한 음식이 향토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장어는 기장 칠암의 붕장어회, 월전의 장어구이, 학리의 장어탕이 유명하다. 장어탕으로 말미잘을 더한 말미잘장어탕과 장어추어탕은 집밥에서 시작해 여행객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향토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때 이용하는 장어는 붕장어다. 우리나라에서 식용으로 이용하는 장어는 붕장어 외에 뱀장어와 갯장어가 있다. 낙동강 하구댐이 막히기 전에는 하단포에서도 뱀장어를 많이 잡았다. 기장에서는 붕장어탕으로 매운 양념을 한 붉은 붕장어탕, 말미잘을 넣어 끓이는 말미잘매운탕, 그리고 붕장어를 추어탕처럼 끓이는 붕장어추어탕이 있다.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넣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바닷마을에서 미꾸라지는 쉽게 구할 수 없고 비싸다. 미꾸라지를 대신한 것이 붕장어다. 

부산 추어탕 중에서 가장 생경한 식재료는 웅어였다. 웅어추어탕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조합이다. 웅어를 많이 잡았던 마을은 하단, 장림, 홍치 마을 어민들이다. 이곳은 낙동강 하구 을숙도 아래 장자도와 백합 등의 모래섬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봄에는 웅어, 도다리, 간재미를 잡았고, 여름에는 까치복, 서대, 가을에는 전어, 겨울철에는 김 양식과 숭어잡이로 일 년 내내 어장으로 먹고살았다.

하지만 낙동강 하구둑 준공과 매립, 해안도로 조성으로 이제 포구의 기능이 약화되고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과거 하단포는 명지 소금, 김해평야에서 생산된 벼가 유통되는 상업 포구로 번성해 구포와 함께 주목을 받았던 장터이기도 했다. 하지만 특히 화려했던 이 하단포는 강변도로에 가로막히고 황금갯벌은 주거단지와 상가시설이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로 겨우 배를 접안할 포구만 남아 애처롭기만 하다.

봄철이면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하단횟집에서 웅어회를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웅어추어탕은 찾기 힘들다. 웅어추어탕을 끓이는 과정은 추어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웅어는 갈대밭이 발달한 강 하구 기수역에 산란을 하지만 방조제 공사와 매립과 도로건설, 신항만건설 등으로 서식지가 파괴되었다. 또 공장과 가정에서 나오는 폐수로 어족자원도 크게 줄었다.

마을 사람들만 숨어서 먹는 게 맛 - 청게와 방게, 밀기 · 김미주
한여름 부산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으로 ‘게’를 꼽는다면 부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조차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부산 청게’, ‘기장 방게’, ‘을숙도 밀기’는 부산사람에게도 다소 생소한 키워드다. 하지만 이들 ‘게 맛’을 아는 지역 사람 사이에서는 일 년을 기다려 한 철만 맛보는 인기 식자재로 통한다.

세 종류의 게는 이르면 주로 매년 5월부터 9월 사이 잡힌다. 여름철에만 맛볼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각의 생김새와 맛은 모두 다르다.

청게는 주로 낙동강 하구에서 상업적으로 어획된다. 경남 하동과 전남 신안에서도 소수 잡힌다. 청게가 부산에 자리 잡아 개체 수를 불린 데에는 부산시 수산자원연구소의 ‘방류’가 한몫했다. 청게는 잡식성이고 특히 생굴을 가장 좋아한다. 큰 청게는 몸길이가 20cm가 넘고 무게도 한 마리에 1kg이 넘는데 일반 대게와 크기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아서 국내에서는 대형 게로 분류된다. 청게는 담백하고 은은한 맛을 자랑한다. 한 여름 부경신협수산물위판장 바로 옆 진해 용원시장을 찾으면 청계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기장 방게는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장 앞바다 깊은 뻘에 살았다.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기장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되는 장소로 다양한 생물이 산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게 바로 방게. 해운대구 기장 중에서도 문중, 칠암마을에서 주로 잡히는 기장 방게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어려서부터 접한 익숙한 음식이다. 방게는 크기가 작고 갑각이 연해 튀겨서 통째로 먹어도 큰 부담이 없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알을 품은 방게의 백미는 찜 요리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낙동강 을숙도에 주로 서식하는 ‘밀기’는 어쩌면 곧 사라질 추억의 음식이 될 지도 모를 기로에 섰다. 수십 년 전에는 집마다 ‘밀기젓갈’을 만들어 일이 년을 먹었을 정도로 해당 지역에서 알아주던 밥도둑이었지만, 요즘은 개체 수가 줄어든 데다 밀기젓갈을 찾는 사람도 적어 만나기가 무척 어려워진 탓이다. 가로 5cm도 채 안 되는 청록색 작은 몸집의 밀기는 ‘방게’로 부르는 게 더 정확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의 서식지인 갈대숲에서 잘 잡혀 을숙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밀기’라고 불렀다. 갈대 순을 먹고 자라는 밀기에게 깜깜한 여름밤 갈대숲은 천국과 같다.

그런데 요즘 밀기를 만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우선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 잡는 사람이 덩달아 줄어든 게 가장 큰 이유다. 또 밀기는 여름철 산란기에 반짝 잡히고 마는 탓에 이때를 놓쳐 버리면 잡을 수 없어 밀기젓갈을 만들어 먹는 일도 드물게 됐다. 그러니 자연스레 밀기젓갈을 즐기는 사람도 줄었다. 전통시장에서 가끔 밀기를 마주한 사람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밀기를 구매한다. 오일장에서 때를 잘 맞춰 어쩌다 밀기를 마주치면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마저 든다고.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고, 또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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