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로버트슨

Julian Robertson: A Tiger in the land of Bulls and Bears

   
대니얼 스트래치먼(역자: 조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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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
   
17000
2011�� 08��



■ 책 소개
1980년 타이거매니지먼트를 설립해 2000년까지 타이거펀드를 운용했으며, 헤지펀드계의 수장으로도 불리는 줄리언 로버트슨. 그의 타이거펀드는 청산 직전 210억달러까지 불어났으며 세계 최대 헤지펀드 중 하나였다. 

헤지펀드 전문가가 우리시대의 가장 성공적인 헤지펀드 매니저 중 한 명을 최초로 깊이 있게 조명한 책이다. 노스캐롤라이나의솔즈베리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청년기, 그리고 월스트리트 시절까지, 그가 정상에 오르기까지 보여준 열정과,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헤지펀드 회사가운데 하나를 운영하면서 드러낸 그의 개인적인 성격까지도 자세히 서술한다.

그를 전설적인 존재로 만들어 준 매매 전략과 투자 스타일도 상세히 밝혀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로버트슨의 결단력과재무적 능력, 비전이 어떤 식으로 타이거매니지먼트를 성장시키고 게임을 이끌게 만들 수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20세기 말 헤지펀드의 양대산맥이었던 타이거펀드의 운용과 글로벌 투자전략 분석을 통해 헤지펀드의 운용과 글로벌 매크로 전략을 이해할 수 있다.
■ 저자 대니얼 스트래치먼 
A&C애셋매니지먼트의 운용담당 이사이며, 장기투자 전략의 장점을 알리는 데 주력하는 격월간 뉴스레터 「스트래치먼 리포트」의 편집장이다. 월스트리트에서일하면서 투자상품개발, 마케팅, 영업 등 자산운용 산업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경력을 쌓아왔다. 저서로는 『Getting Started inHedge Funds』『Essential Stock Picking Strategies』가 있다.
■ 역자 조성숙
덕성여대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성장의 모든 것』『모닝스타 성공투자 5원칙』『CEO 워런 버핏』『피터 드러커의 매니지먼트』『주식투자절대법칙』『까다로운 인간 다루기』『마음의 해부학』『두뇌는 평등하다』『영혼의 해부』『돌연변이』『핫스팟』『창조적 괴짜가 세상을 움직인다』『퍼펙트피치』 등이 있다.

■차례
서문 

01 금속 시장에서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다 
02 타이거의 탄생 
03 월스트리트의 남부인 
04 타이거, 새로운 사냥터를 발견하다 
05포효하기 시작하는 타이거 
06 1987년 시장 붕괴 
07 새 시대의 새벽 
08 타이거, 언론과의 싸움을 시작하다
09 정상과 추락 
10 언론, 타이거를 해부하다 
11 새끼호랑이들 
12 타이거에서 배우는 교훈 
13 노블레스오블리주 

부록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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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로버트슨

 

서문

오늘날 헤지펀드는 글로벌 자본시장과 파생상품 시장에 유동성과 위험자본의 상당 부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자본시장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자리 잡았다. 혹자는 헤지펀드가 글로벌 금융시장을 교란시킨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헤지펀드는 시장 생태계에 중요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면서 펀드매니저, 투자자, 그리고 서비스 제공사 모두에게 이득을 안겨주고 있다.


조지 소로스, 마이클 스타인하트, 줄리언 로버트슨, 이 세 사람이야말로 현대 헤지펀드 산업의 진정한 아버지들이다. 절정기를 구가할 때 이 세 사람과 그들의 펀드 조직은 전 세계 머니매니저들의 선망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현업에서 은퇴하거나 자본을 투자자들에게 돌려주고 몇 년이 더 흐른 뒤에도 이 세 사람은 대다수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성과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로버트슨과 타이거펀드의 진정한 성공은 엄청난 규모의 운용 자산과 놀라운 운용 실적을 뛰어넘는다. 결과적으로 말해 이 회사의 성공은 새끼호랑이들의 전설적인 실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그들의 성공은 로버트슨을 스타인하트나 소로스와는 다른 존재로 구분 짓는다. 두 사람이 성공한 펀드 조직을 구축한 것은 맞지만, 그들의 조직은 결코 타이거처럼 성공한 신예 매니저를 연달아 배출하는 산실이 되지는 못했다.



금속 시장에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다

1994년 봄날, 14년 전 헤지펀드를 시작해 시장에서 이익을 내기 위해 롱쇼트에쿼티(long/short equity, LSE : 헤지펀드의 대표적인 전략으로 상승장에서는 레버리지 등을 통한 롱 포지션을 이용하고, 하락장에서는 쇼트 포지션으로 수익을 추구하는 전략) 전략을 사용해왔던 로버트슨이 볼 때 지금은 더 높은 차익을 제공하는 더 큰 시장으로 확장할 적기였다.


쇼트의 기본 개념은 간단하다. 어떤 증권의 거래가가 현재 지나치게 높은 수준이어서 가격 하락을 확신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당신은 증권 보유자와 계약을 맺어 수수료를 지불하고 증권을 빌려와 그것을 시장에서 판다. 가격이 떨어지면 그 증권을 다시 사서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준다. 증권의 매도가와 매수가의 차액에서 거래에 든 비용을 제한 금액이 당신이 벌게 되는 차익이다.


타이거 매니지먼트는 운용 자산 규모 면에서 연달아 기록을 갱신하면서 업계 최대의 헤지펀드회사 중 하나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로버트슨은 자산운용팀을 매섭게 몰아붙이면서 괜찮은 투자 기회가 없는지 계속 물색하게 했다. 타이거 매니지먼트는 일인자가 되어야 했다. 소로스 조직의 그림자에 가려진, 작은 구멍가게 수준의 그저 그런 펀드회사로 여겨지는 것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로버트슨은 오로지 자신의 성공만으로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다.


타이거 매니지먼트의 성공 투자 뒤에 숨은 비결은 바로 스토리이다. 스토리의 논리가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투자도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스토리를 구상할 수 없거나 전개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투자도 하지 않았다. 스토리가 변하면 투자도 변해야 했다. 타이거의 투자는 과거에도 지금도 모두 스토리를 위주로 이루어진다.


로버트슨의 지론에 따르면, 투자와 관련된 스토리에 변함이 없다면 투자의 포지션을 계속 늘려야 한다. 스토리가 변하는 순간이 발을 빼야 할 타이밍이었다. 타이거의 애널리스트들과 트레이더들은 이것이 타이거의 사업 방식임을, 그리고 그 원칙을 철저히 지켰기에 로버트슨과 타이거 매니지먼트가 헤지펀드 업계의 거대한 야수로서 부상할 수 있었음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간단하면서도 현명한 방식으로 일을 진행해왔다.


구리 가격은 1994년 초부터 시작해 연말까지 계속 급등했다. 1995년에도 오름세는 계속 되었다. 구리 가격은 1파운드당 1.25달러 이상으로 치솟았고 앞으로도 더 오를 소지가 다분해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번 구리 가격 상승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누가 그 가격을 지탱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세계 최대 구리 거래회사 중 한 곳에 대한 아주 흥미진진한 정보가 시장에 떠돌기 시작했다. 스미토모 상사의 트레이더 한 명이 구리시장에서 불법거래 행위를 했고, 그것이 잘못 되면서 이 일본의 투자 복합기업이 천문학적인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이미 입은 손실과 잠재적인 손실액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스미토모의 경영진은 트레이더들에게 현재 회사가 보유한 포지션을 헐값에 내놓아 시장에서 완전히 발을 빼고 거래에서도 손을 털라고 명령했다. 당시 스미토모는 구리시장 최대의 보유자이자 매수자 중 하나였다. 스미토모가 손실을 무릅쓰면서 시장에 저가로 구리를 토해내자 기다렸다는 듯 가격이 폭락했다.


시장의 환경을 이해하고, 또 조만간 구리 가격이 하락할 것을 예상하고 있던 로버트슨과 그의 팀에게는 이번 사태야말로 성공적인 거래를 행하는 데 꼭 필요한 기회였다. 스미토모가 거대한 손실을 입었고 그 금액이 계속 불어나고 있다는 소식에 구리시장은 방향을 잃고 허우적댔다. 1996년 5월까지 가격은 30% 이상 떨어졌다. 7월이 되었을 때 9월물 구리 선물가는 1파운드당 78.80센트에 거래되고 있었다.


구리 파동은 스미토모가 하마나카 야스오 부장을 해고하면서 비등점에 달했다. 그간 쌓아놓은 막대한 포지션으로 인해 시장 참가자들로부터 미스터 5퍼센트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스타급 구리 트레이더인 하마나카가 구리시장에서 부적절한 거래를 행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번 금융 스캔들로 회사가 입은 피해액은 26억 달러가 넘었다. 쇼트 포지션을 취하는 트레이더라면 누구든 그렇겠지만 이번 사태는 로버트슨에게는 달콤한 음악이었다.


어떤 것의 가격이 고평가되어 있다면 가격 하락은 누구든 가정할 수 있다. 그러한 가격 상승이 시장 자체의 움직임에 따른 것이라면 시장 스스로가 자정작용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 고평가되어 있는데 고평가된 경로 자체가 잘못돼 있다는 가정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두 번째 가정에 근거한 거래야말로 훨씬 짜릿하고 재미있으며, 물론 투자 수익도 훨씬 높게 거둘 수 있다.


하마나카는 10여 년 동안 구리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의 대담한 거래행보는 전설이었고 사람들은 구리 하면 으레 하마나카를 떠올릴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하마나카가 빠져나오지 못할 궁지에 몰리게 된 이유가 자신의 포지션이 매우 크므로 시장 가격을 마음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자만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미토모의 사내 통제 능력 부족, 무능한 경영진, 그리고 감독 소홀이 문제의 근원이었지만, 문제가 표면에 드러난 계기는 헤지펀드들의 본격적인 움직임이었다.


스미토모사가 하마나카의 부정행위와 막대한 포지션, 그리고 조만간 확실시되는 엄청난 손실에 대한 진상을 발효하기 몇 달, 심지어 몇 주 전부터 많은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시장이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구리 가격을 살펴본 매니저들은 가격 추이가 비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금세 파악했다. 또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형성되어 있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안타깝지만 쇼트밖에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여름과 가을 내내 타이거는 구리에 대한 쇼트 포지션을 계속해서 늘려나갔다. 1995년 6월에 타이거펀드가 쌓아 놓은 구리 쇼트 포지션은 10억 달러가 넘었다. 로버트슨은 애널리스트들을 출장 보내 국제 구리시장의 동향, 현재의 이용량, 앞으로 예상되는 이용량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게 했다. 1990년대 초는 인터넷만 접속해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직접 돌아다니는 길밖에는 없었다. 로버트슨과 운용팀은 가격은 더 오를 여지가 없으며 내려갈 일만 남았음을 확신했다. 로버트슨은 트레이더들에게 계속 쇼트를 행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시장이 흘러가는 방향에 완전히 역행하는 행동이었다.


자신의 거래 방식에 대한 확신과 부하 직원들에 대한 믿음은 그에게 막대한 보상을 안겨주었다. 1996년 봄, 하마나카의 부정행위와 관련한 대대적인 금융 스캔들로 시장이 발칵 뒤집히면서 구리 가격이 대폭락하기 시작했다. 1996년 5월말에 타이거 매니지먼트는 하루에만 구리 쇼트 포지션으로 3억 달러가 넘는 차익을 보았다. 이것은 하루치 이익으로는 창사 이래 최대 금액이었으며, 이번 일로 로버트슨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머니매니저 중 한 명으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는 정보를 갖추었고 자신이 옳다는 신념이 있고 이제는 수익도 올렸다. 이 세 가지의 결합이 그에게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트레이더, 투자자, 머니매니저라는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1987년 시장 붕괴

1980년대 내내 월스트리트에는 꿈과 희망이 흘러넘쳤다. 월스트리트에 있는 모든 조직, 모든 직급의 사람들이 유례없는 호황에 즐거움의 탄성을 지르고 있었으며 적대적 경영권 인수와 정크본드 시대에서 생겨난 엄청난 부로 한 몫을 톡톡히 챙기고 있었다. 월스트리트의 모든 분야가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고 세계 각지에서 자본이 유입되었다. 이 새롭게 발견된 부를 통해 머니메이커(자산관리사, 애널리스트, 펀드매니저를 총칭하는 말), 거래 중개인, 증권 인수자 모두 한계를 모를 정도의 화려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타이거펀드는 절대 실적을 기준으로 하면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상대적인 기준으로는 시원찮은 성적을 내고 있었다. 1987년 3월, 로버트슨과 그의 팀은 S&P 500과 막상막하의 실적을 유지했다.


투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버트슨은 시장의 한 가지 흥미진진한 현상을 어리석은 계절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는데, 시장이 극도의 모멘텀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시장의 모멘텀은 회사 자체의 고유한 성장률이나 PER와는 상관없이 성장률이 증가하는 종목을 매입하고 성장률이 떨어지는 종목을 매도하라고 요구했다. 로버트슨은 투자자들이 성장률이 연 15~30%인 보험회사인 마시앤 맥레넌과 같은 회사의 주식을 팔고 대신에 성장률이 (-)에서 (+)로 전환되어 1988년 예상 주당순이익의 40배 정도에 거래되는 반도체회사의 주식을 매입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전략에는 가치가 철저히 무시돼 있다고 밝히면서 그런 투자 전략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로버트슨과 그의 팀은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1987년 6월 당시 일본은 세계 최대의 금융자본국이었다. 일본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을 합한 금액이 미국 시장보다 컸을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도 누적되는 적자재정의 재원 조달을 위해 일본에 의지했다. 타이거의 사람들은 여러 기회를 발견했다. 첫째, 그들은 일본인들이 미국 시장에 투자할 전망이 높다는 사실을 반겼으며, 둘째로 일본 기업 몇 곳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고평가되어 있다고 믿었다. 한 예가 일본전신전화, NTT 사였다. 이 일본의 전화회사는 시가총액이 3,340억 달러가 넘었는데, 주식시장의 총 시장가치가 2,360억 달러인 독일, 120억 달러인 프랑스, 1,530억 달러인 이탈리아보다도 훨씬 높았다.

 

거품이 형성되고 있다는 징후는 이것만이 아니었는데, 로버트슨은 일본 기업의 재무담당자들이 흥미로운 행동을 보이고 있음을 알아챘다. 리서치 결과는 일본 대기업의 재무담당자들 대다수가 미국 기업의 재무담당자들처럼 현금을 단순히 양도성예금증서(CD)에 넣어놓는 차원에 만족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회사 자금을 주식시장에서 굴리기로 결정했고 이 목적을 위해 별도로 펀드까지 조성했다. 문제는 재무담당자들 다수가 시장이 달성한 40%의 가치 증가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차입금까지 끌어다 시장에 투입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시장에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초과현금을 일종의 증거금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목적으로 조성한 투자 몇 개가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주식시장에서의 신용거래를 위해 초과현금까지 이용하는 일본의 모습에 로버트슨과 그의 애널리스트들은 긴장했다. 로버트슨이 볼 때 문제점은, 노사정 협력 하에 커다란 경제력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일본인들이 그 성공에 도취되어 시장이 한번 오르기 시작하면 계속 오르기만 할 것이고 시장이 상승할수록 모두에게 더 좋으므로 돈을 많이 벌 기회를 더 많이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과 초가을 내내 투자 세계에는 주가가 지나치게 올랐다는 전문가들의 한탄성이 그득했으며 이런 상승세가 영원히 지속될 리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타이거의 포트폴리오 역시 대량 매물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합리적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주식들로 포트폴리오를 채웠다.


10월 초가 되자 타이거펀드는 13.9%의 수익률을 달성하면서 S&P 500을 600베이시스 포인트 차이로 앞질렀다. 로버트슨은 외국인 매수세가 강세장의 중요 요인이라고 보았다. 그는 일본 시장이 붕괴될 때까지는 대단히 변덕스럽기는 해도 외국인 자본이 미국 주식시장으로 계속 흘러들어올 것이라고 점쳤다. 이러한 자본 유입은 차입 매수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상당한 자산군과 더불어서 시장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인 성장세를 유지시켜줄 것이었다. 로버트슨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만족했으며 이 상황을 기꺼이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것은 분명 폭풍 전의 고요였다.


로버트슨이 1987년 10월 2일 투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꽤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가 지나친 자기만족에 사로잡히게 되면 급격한 시장 하락의 위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익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이익을 써버리기 시작할 때가 바로 위험한 순간입니다." 로버트슨은 장밋빛 시나리오를 전개하기는 했지만 스스로를 보호하고 투자자들에게 신중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불과 이 주 후, 사태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급반전되었고 로버트슨과 그의 팀은 이전에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던 시장 상황에 대응해야 했다. 1987년 10월 19일, 주식시장이 붕괴했다. 다우지수는 그날 하루 508포인트(22.6%)나 떨어진 1738.74포인트로 장을 마감했다. 이번 하락은 대공황의 시작을 알렸던 1929년 10월 28일에 발생한 12.8%의 폭락보다도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월요일에도 하락이 이어졌고 금요일의 폭락과 합쳐서 주가는 총 743.47포인트(30%)나 폭락했다. 모든 주요 시장 지수가 일제히 큰 폭으로 하락했다. 10월 19일 S&P 500 지수는 57.86포인트가 떨어진 224.84였다. 나스닥 역시 46.12포인트 하락한 360.21로 마감되었다.


1987년의 시장 붕괴는 말할 나위 없이 대다수 투자자들이 겪은 최악의 폭락장이었다. 월스트리트 전체가 믿을 수 없어 할 말을 잊었다는 반응이었다. 이때의 시장 붕괴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는데, 시장이 5년 동안 진지한 조정이나 인플레이션에 대한 두려움, 금리 인상, 그리고 파생상품 사용에 따른 변동성 증가 등을 한 번도 겪지 않았다는 사실도 한 요인이었다.


로버트슨에게도 1987년의 시장 붕괴는 폭풍우 그 자체였다. 타이거는 이 기간 동안 발생한 손실로 인한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상당한 손실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로버트슨과 그의 팀은 자신들이 전체 시장에 비해 나쁜 성적을 거둘지라도 시장은 계속 상승할 것이 분명하다고 믿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생각 자체가 피해를 불러왔다. 폭락장에서의 가치 하락을 이용하기 위한 적절한 헤지 수단이 포트폴리오에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폭락과 그 후폭풍이 불어 닥치는 동안 타이거가 당시 로버트슨의 진정한 맞수였던 소로스나 스타인하트보다는 나은 성적을 거뒀다고 생각했다. 그럴지라도 타이거가 손실을 입은 것은 분명했다. 1987년 시장 붕괴 시 타이거는 절대실적과 상대실적 모두에서 시장보다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그러나 이 저조한 실적은 로버트슨으로 하여금 시장을 앞지르기 위해서는 시장을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을 굳건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시장보다는 견실한 투자 종목을 발굴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가치주를 찾아야 하며 발견하기만 하면 분야와 상관없이 매수해야 한다. 그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타이거의 슬로건이었고, 시장이 붕괴하든 붕괴하지 않든 변함없이 유지될 표어였다. 



새끼호랑이들 

현재 타이거 매니지먼트는 완전히 분해된 상태이다. 하지만 로버트슨은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이를 이익으로 전환할 방법을 찾기 위해 자신의 방대한 정보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에 여전히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전화를 주로 사용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오늘날에는 일명 새끼호랑이(Tiger Cubs)라고 알려진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얻는다. 로버트슨이 함께 투자를 하면서 조언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대략 30~40명 정도이다. 그들 모두 과거에 이런저런 식으로 로버트슨의 동료였거나 부하 직원으로 일했던 사람들이다. 새끼호랑이라는 별명은 언론이 지어준 것으로, 타이거의 직원이었던 그들은 타이거가 아직 왕좌를 유지하고 있을 때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이 새끼호랑이들은 타이거 매니지먼트의 2세가 되어서 로버트슨이 세계 시장에서 가치를 찾고자 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주었다.


2004년 봄, 과거 타이거 사무실이 있었던 곳에서는 톰 파치올라와 마이클 시어스가 운영하는 타이거샤크 매니지먼트, 빌 황(황성국)의 타이거 아시아, 체이스 콜먼의 타이거 테크놀로지, 패트릭 맥코맥의 타이거 킨슈머 파트너스, 케빈 케니의 이머징 소버린 그룹 등 15개의 펀드가 운영되고 있다.


이들 펀드들은 조직의 울타리 안으로 걸어 들어와 헤지펀드 분야에서 20년간 축적된 경험을 1초 만에 이용할 수 있었다. 새끼호랑이들은 아마도 가장 훌륭한 헤지펀드 매니저에 속한다는 것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결국에는 투자와 자산운용에 대한 로버트슨의 생각이 이 새끼호랑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체이스 콜먼은 현존하는 가장 똑똑하고 운이 좋은 머니매니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스무 명 가량의 매니저들은 2001년 3월부터 놀랄 만큼 성공적으로 타이거 테크놀로지 펀드를 운영해왔다. 운용 자산이 5억 달러가 넘는 타이거 테크놀로지는 2001년에는 50% 이상, 2002년에는 35%의 수익률을 달성했다. 2003년은 14%가 넘는 수익률로 마감했으며 2004년 첫 네 달 동안에도 16% 이상을 달성했다. 로버트슨의 아들과 친구 사이인 콜먼은 대학을 졸업하고 타이거에 입사해 자료 분석 업무를 행하면서 자산을 운용하는 방법도 배웠다. 어떤 면에서 그는 한 번도 타이거를 떠난 적이 없는 셈이었다. 


콜먼이 설명했다. "우리가 거둔 성공은 위험을 잘 헤지하고 장기적인 접근법에서 투자 결정을 내리는 헤지펀드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투자를 할 때 한 가지 중요한 접근법을 잊지 않는데, 즉 자기만족이야말로 언제나 최대의 적이라는 사실이다."


로버트슨은 투자를 하거나 무한책임 파트너를 맡는 식으로 그들 펀드에 참여해왔는데, 이는 그가 그들의 투자 수익만이 아니라 성과보수도 함께 나누고 있다는 뜻이다. 이들 펀드매니저들은 그와 정기적으로 만나 아이디어를 얻거나 시장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그들의 아이디어가 로버트슨 본인의 거래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그가 이들 펀드들이 취하는 포지션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는 알 수 없다.


2003년 가을 여러 관찰자들이 추정한 바에 따르면, 전직 타이거 직원들은 전체 헤지펀드에 투자된 자산 중 거의 10%를 운용하고 있었으며 롱쇼트 매니저들에게 할당된 자산의 거의 20%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 수치 파악은 꽤 정확하다고 판단되는데, 이게 정확하지 못하다고 해도 로버트슨의 새끼 호랑이들이 헤지펀드 산업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아주 정확하다. 그들은 자산이 운용되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타이거에서 일했던 경험이 자신들의 성공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존속하는 내내 타이거 매니지먼트는 직원들이 거의 정상에 가까운 실력을 기를 수 있게끔 진화했고, 그런 과정에서 로버트슨은 성공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어냈다. 그는 누구에게도 성공 매뉴얼을 전수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로 하여금 관찰하게 했을 뿐이다. 배운 것을 관찰하면서, 그리고 이를 체득하면서, 타이거의 직원들은 직접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로 발전하고 또 발전했다. 그들은 포트폴리오의 현황을 유심히 지켜보는 능력과 펀드를 운용하고자 할 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웠다.


많은 사람들은 로버트슨이 20년 동안 군림하면서 세운 성공적인 수익률은 헤지펀드에서건 월스트리트에서건 혹은 다른 어떤 분야에서건 결코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동안 최악의 상황이 계속 이어질 때에도 타이거는 누구보다도 빠르고 훌륭하며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타이거는 거래를 하고 이익을 내고 자산을 모으고 있었다. 불행히도 한 번의 큰 풍랑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지만, 그 이후에 남은 흔적은 헤지펀드의 운영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으며 월스트리트 안팎의 모두가 그 흔적을 두고두고 되새기게 되었다.


타이거가 성장할수록 모든 매니저들을 압도하는 매니저로서의 로버트슨의 명성도 같이 자라났다. 사람들은 그를 월스트리트의 마법사라고 불렀고 몇 번이고 언론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매니저라고 칭했다. 하지만 로버트슨은 타이거의 진짜 힘은 직원들이라고 믿는다. 물론 훌륭한 팀을 거느린다는 것과, 그 훌륭한 팀을 위대한 코치가 이끈다는 것은 별개지만 말이다. 


타이거의 직원이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빈스 롬바르디(미식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칭송받는 감독)에 비유하고 싶다. 롬바르디는 선수들을 대하는 태도가 서툴렀음에도 그들로 하여금 노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 롬바르디는 선수들로부터 언제나 최상의 경기를 이끌어냈다. 로버트슨도 같은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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