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특별한 소방관

   
제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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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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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 책 소개
『나의 특별한 소방관』은 가정경제의문제점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풀어쓴 책이다.『아버지의 가계부』『불행한 재테크 행복한 가계부』등을 집필한 가계재무전문가 제윤경이 무리하게 빚을 내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한 한 평범한 가정의 예를 통해 대박 심리에 기댄 허황된 재테크의 꿈을 경계하고 참된 행복과 부자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평범한 부부와 가정이 어떻게 균형 잡힌 가계부를 설계하고 건강한 가정경제를 이룰 수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특별한 소방관의 이야기처럼 처음으로 되돌아가 문제를 풀고, 그저 행복하게 잘살고 싶었던 처음의 마음을끄집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부자의 삶이란 돈이 아니라 꿈을 좇는 것임을 안내한다.&nbsp& 


■ 저자 제윤경 
가계부 전도사이다. 쉽게 번 돈은쉽게 나간다는 믿음을 가졌다. 돈은 삶의 수단일 뿐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대박 재테크에 쏠리는 사람들을 염려한다. 돈으로 행복하게 살기위해 성실하고 합리적으로 벌어서 관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교육사업을 한다. 현재 경제 교육 전문업체인 (주)에듀머니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SBS잘살아보세(종방), KBS 경제비타민,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 등 경제 방송에 전문 패널로 자주 등장한다. 한겨레신문과 ‘재정 소방훈련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아버지의 가계부』『불행한 재테크 행복한 가계부』『부자들의 행복한 가계부』가있다.


■ 차례
낯선 손님 
부부 싸움 
불씨
쩐모양처 스트레스 
부자 아빠 스트레스 
마법의 거울, 김정수 이야기 
숙제 
오빠의 일기 가계부 
우리집경제 성적 냉정하게 대차대조하기 
군살을 빼고 가벼워져라 
잡동사니 소비의 함정 
튤립과 여배우 사진 
미래 계획, 인생을둘로 나눠 설계하자 
매일 조금씩 부자 되기 




가계 재정 소방관이 안내하는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경제

나의 특별한 소방관


낯선 손님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소방관입니다. 이 댁에 있는 불씨를 제거하기 위해 왔습니다."

"불은 무슨 불이에요? 어느 소방서에서 나온 거죠?"

그러고 보니 그는 전혀 소방관의 모습이 아니었다. 잘 다려입은 셔츠에, 적당히 세련된 넥타이를 매고 한 손에 서류가방을 들고 있는 말쑥한 세일즈맨 모습의 소방관이라……. 잠시 고민하다가 흔히 사기꾼의 겉모습이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할 때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선택은 당신이 하는 것입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던지는 한마디. 그의 눈빛은 인터폰을 넘어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나도 모르게 현관문을 열었다.


"불씨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희 집에는 지금 불씨 같은 건 없는데요. 다른 집에서 무슨 신고라도 한 건가요?"

"하하하. 놀라셨나 봐요. 제가 좀 장난기가 많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불씨는 생각하시는 그런 불씨가 아닙니다. 하지만 불씨가 있기는 있을 겁니다. 김정수 씨 아시죠?"

"김정수 씨라면 제 오빠인데……. 오빠를 아시나 봐요?"

혹시 오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덜컥 겁이 났다.

"네. 오늘 제가 여기 온 건 김정수 씨가 김미연 씨 댁에 나 있는 불을 좀 꺼달라고 부탁을 해서입니다. 어찌나 사정을 하시던지……. 괜찮으시다면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손님 오셨어?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잤네. 그런데 누구?"

"잠시 손님하고 인사나 나누세요. 저는 예진이 밥 차려 주고 올 테니까."

남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그 앞에 앉는다.

"이거 씻지도 않았는데 손님을 맞네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데 누구시죠?"

그는 남편을 향해 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내게 한 것보다 더 황당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소방관입니다. 이 집에 있는 불씨를 제거하러 왔습니다. 불이 나면 모든 것을 빼앗아 가잖아요. 처음 만날 때의 설렘도 약속도 없어지고, 함께 꾸었던 꿈과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죠."



불씨 

그의 황당한 자기소개에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던 남편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는다. 아직 술이 덜 깬 걸까? 나는 아이 점심 준비를 하다 깜짝 놀라 거실 쪽으로 신경을 집중시켰다. 한참을 웃고 난 남편은 유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말씀이 너무 재미있어서요. 불이 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우리집에 그런 불씨가 있다? 좀 황당한 자기소개를 하셨는데 사실 우리집에 불씨가 하나 둘이 아니라서요. 어제만 해도 대단한 불이 날 뻔 했었죠.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혹 우리를 위해 어디선가 보내준 천사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지 뭡니까? 겉으로 봐서는 전혀 소방관 같지가 않은데, 그건 그렇고 누굴 찾아 오신건가요? 제 와이프 손님이신가요?"


"저는 어느 한 분만을 찾아온 게 아니고요. 가족 모두의 손님이라고 해야 되겠네요. 하하하. 부인께 말씀드렸듯이 부인의 오빠 되시는 분이 저와 막역한 사이입니다. 그분의 부탁으로 이 집에 있는 불씨를 제거하러 왔고요."

"사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누구신지도 잘 모르고 집안까지 안내를 했는데요. 오빠가 뭣 때문에 저희 집을 소개했다는 건지, 또 뭐하시는 분인지……. 지금까지 들은 내용대로라면 도저히 알 수가 없네요."

그는 여전히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을 바라보더니 가방을 열어 명함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정말 소방관입니다. 다만 진짜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이 아니고요. 이 가정의 행복, 가족의 꿈, 사랑을 위협하는 불을 끄는 소방관이죠."


명함을 살펴보니 가계 재정 소방관 이란 말이 쓰여 있다. 명함을 보고 그를 바라보니 그의 얼굴엔 더 이상 장난기가 없다. 진지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 것이란 생각을 갖고 삽니다. 특히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 돈이 가정의 행복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죠.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과거에 비해 많은 돈을 벌고 또 그만큼 많이 쓰면서 살고 있거든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행복해졌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불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자살하고 돈 때문에 이혼하고 돈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 거죠. 결국 돈 문제로 가정의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불이 나서 가족의 꿈, 미래, 사랑 이런 것들이 잿더미가 되는 거죠. 저는 이렇게 돈 문제로 가정에 불이 나기 전에 그 불씨를 제거하는 일을 합니다. 불씨를 하나하나 찾아서 소방 점검을 한다고나 할까요?"


돈 문제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가 과장된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어제의 우리 부부는 남편 말대로 불나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불씨가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다. 아니 솔직히 이미 어디선가 불씨가 번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마법의 거울, 김정수 이야기

일 년 전 나는 오빠와 크게 다투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일방적으로 크게 화를 내며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을 해버렸다. 우리 오빠, 김정수란 사람은 절대로 나와 다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내가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고, 늘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다. 오빠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나이가 많으면서도 결혼은 2년 늦게 했다. 새언니와 5년 넘게 연애를 했으면서도 결혼을 늦췄던 것은 순전히 나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조른 것은 아니다. 단지 오빠는 스스로 내게 아빠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내 대학 등록금 전부와 용돈까지도 오빠가 전부 책임을 졌다. 물론 엄마와 함께 사는 데 드는 생활비도 오빠 몫이었다.


나는 오빠의 이런 노고에 늘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 쓰려고 지독하게 굴었다. 당연히 동아리 활동이나 미팅 같은 여대생들의 흔한 사치 한번 못 해봤다. 물론 오빠에 비하면 넘치게 감사할 일이지만 그래도 갑갑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정말 오빠는 생전 투덜대는 일이 없다. 모아놓은 돈도 없다며 새언니 집에서 결혼을 반대했을 때조차 오빠는 그 흔한 술주정 한번 안 부렸다. 내 눈에는 그런 오빠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거나 완벽하게 가식적인 사람이거나, 아니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면서도 다른 이에게 자신의 신세 한탄을 늘어놓지는 않는 자의식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어려운 현실에 늘 의연한 것이, 작은 자극에도 심하게 자존심을 다치는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오빠는 거울 같은 존재였다. 내가 가장 보기 싫어하는 비뚤어진 내 모습이 비치는 마법의 거울. 그 거울을 마주하고 있으면 때로 내 스스로 연민에 사로잡혀 슬픔이 복받치기도 하고, 마주하기 싫은 나의 미운 속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달아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이유 없이 그 거울을 향해 괜한 트집을 잡아 화를 냈던 것이다.



숙제

"그나저나 제가 여기 온 시각이 점심시간 조금 지나서였는데요. 사실 두 분은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식사를 못하고 왔습니다. 오늘 하루 상담하고 끝날 일이 아니니 오늘은 이만 두 분께 식사를 대접 받고 몇 가지 숙제를 내드리는 것으로 상담을 마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어떠세요?"


"점심 안 하셨어요? 아이고 이런, 큰 실수할 뻔했네요. 저희 집 불씨를 꺼줄 분께 이런 결례를 하면 안 되지요. 게다가 사실 저도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상태입니다. 당신도 종일 굶은 것 같은데, 정말 이분 말씀대로 우리 뭐 좀 먹고 하자. 그나저나 지금 이것저것 차리고 하려면 시간도 걸리고 번거로울 테니까 나가서 하시면 어떨까요?"


"아닙니다. 저로 인해 계획 없던 일에 지갑을 열게 해서는 안 되죠. 오늘 제가 두 분께 식사 대접을 받는 일은 두 분께는 미리 계획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솔직히 그냥 있는 반찬에 고추장과 참기름 넣어 비빔밥을 해 먹으면 어떨까 하는데요. 그러는 편이 아마 나가서 외식하는 것보다 덜 번거로울 것 같은데요. 그저 조금만 함께 수고하면 즐거운 식사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심각하지 않았다. 그냥 편하고 자유롭게 어떤 주의나 주장, 고집이나 복잡한 생각 없이 가볍게 담소를 나누며 식사시간을 즐겼고 심지어 설거지도 함께 했다. 소방관이 거품을 내 그릇을 닦고 남편이 그것을 받아 헹구었으며 나는 제자리에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렇게 함께 웃고 떠들면서 설거지를 하니 시간도 금방 가고 평소 지겹기만 했던 집안일이 재밌게 여겨지는 것이다. 참 오랜만의 가벼움이다. 실로 오랜만에 유쾌해졌고 아무 생각 없이 실컷 웃었다. 큰 소리로 웃는 남편 모습도 오랜만에 봤다.


유쾌한 식사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소방관이 가방에서 다시 서류 몇 장을 꺼내었다.

"생각해보면 행복해지는 방법, 대단히 간단하죠?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그저 재밌게 하면 되는 겁니다. 두 분이 함께, 아니면 예진이까지 셋이 같이 즐겁게 수다 떨고 장난치고 하다보면 어떤 일도 어려울 게 없는 거죠. 외식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함께 즐겁게 식사할 수 있는데 우리는 문제를 점점 어렵게 하지요. 부인들은 일주일 내내 힘들었는데 또 부엌에서 시달려야 해? 하고 생각하고, 남편들은 남편들대로 부인의 잔소리 듣기는 싫고 그렇다고 대신 해줄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찾은 제일 쉬운 방법이 외식인데, 이건 알고 보면 집에서 즐겁게 먹는 쉬운 방법을 두고 어렵게 문제를 풀려 하는 것입니다. 외식이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란 걸, 가사 일을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 비용이 드는 것이란 걸 잊고 있죠. 오늘 두 분은 저 때문에 에너지, 시간, 비용을 절약했을 뿐 아니라 즐거움과 유쾌함까지 얻으셨으니 저에게 많이 고마워하셔야 합니다. 하하하."


소방관은 서류들을 보여주며 차근차근 설명을 한다.

"여기에 지금까지 형성된 복잡한 경제 상황을 다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선 대차대조표가 있죠. 자산과 부채를 일일이 기록해보세요. 특히 부채의 경우 종류를 정확하게 해주시고 더불어 담보 대출일 경우 어떤 자산을 담보로 했는지 기록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을 넘기면 이 가정의 지출 사항들을 적는 곳이 있습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그냥 대충 간단히 어림잡아 적는 것이 아닙니다. 항목 하나하나를 잘 떠올리면서 십 원 단위까지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가급적 실제 쓰는 돈의 크기를 적으셔야 합니다."


소방관이 내민 지출 기록 숙제를 보니 순간 아득해지며 과거의 짠순이 주부였던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밀려왔다. 갑자기 제대로 따져 적어보고 싶은 의욕이 마구 밀려왔다.


"김미연 씨. 김정수 씨와 화해하고 싶으시죠? 제가 보기에는 많이 미안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직 문제가 하나도 정리된 것이 없어 사과할 기회를 못 가진 건 아닌가요? 정수 씨도 김미연 씨와 같은 심정일겁니다. 제게 이 댁의 방문을 부탁하면서 이 노트를 전해 줬으면 하더라고요."

노트를 받아 들었다. 세 권이었는데 첫 번째 노트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표지에 일기 가계부란 말이 적혀 있었다.

"일기 가계부라……. 형님도 참, 별거 다하고 사시네. 암튼 당신 오빠는 인물이야. 그러니까 여기에다 일기도 쓰고 가계부도 썼다는 거잖아. 게다가 이건 아주 오래된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런 걸 쓰신 거지?"

 


우리집 경제 성적 냉정하게 대차대조하기

남편은 거실에 앉아 소방관이 우리에게 준 숙제를 꺼냈다. 우리는 예진이를 불러 다같이 숙제를 해보기로 했다.

"그럼 우선 대차대조표부터 적어보자. 자, 하나하나 적어볼까? 음, 먼저 자산 부분인데, 제일 먼저 부동산 자산에 대해 쓰는 거네. 지금 이 집이 시가 대충 5억 정도 되지? 그리고 일산에 있는 아파트가 2억 5,000만원이고 오피스텔은 지금 어느 정도 하나? 2억 정도 받을 수 있을까?"


부동산을 빼고는 모두 초라하다. 비상금 같은 것은 한번도 별도 자산으로 가져본 적이 없을 정도다. 급할 때는 마이너스 통장에서 빼 쓰면 된다는 생각으로 비상시를 대비해온 것이다. 또 대출 기입란을 보니 대출의 종류대로 구분해서 적게 되어 있는데 그 구분이 모자랄 정도로 빚이란 빚은 다 끌어다 쓰고 있는 형편이다. 순간 나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있잖아, 여보. 우리 좁은 집으로 이사해서 살 수 있을까?"

갑작스런 나의 질문에 남편은 어리둥절한 것 같다.

"좁은 집? 글쎄, 나야 뭐 집 좁은 거 괜찮은데. 당신이 답답하다고 했잖아. 예진이 친구에게도 괜히 기죽는 거 싫다고 했고."

"답답한 것 싫고, 아이 기죽이는 것 같은 정말 별것 아닌 이유로 그동안 허세부리고 살아왔잖아. 집 크기가 아이 자신감하고 무슨 상관있다고……. 답답한 거 사실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인데. 이 집 처음 이사 왔을 때만해도 정말 운동장같이 넓게 느껴졌는데 살아보니 그저 그렇잖아. 점점 짐은 늘어나고 이전처럼 답답해지기는 마찬가지야. 결국 내 마음이 답답한 걸. 욕심이 지나쳐서 부자는커녕 이렇게 위험천만하게 사는 거, 정말 잘못된 것 같아."

"그래, 사실 우리 그동안 집 때문에 너무 힘들었지. 시세 다 합치면 거의 10억에 가깝지만 그 10억이 우리 주머니에 들어온 돈도 아니고, 알고 보면 써보지도 못한 돈에 마음만 너무 힘들잖아. 나는 좁은 집 얼마든지 괜찮아. 솔직히 우리 일산에 그 21평짜리 아파트 살 만했잖아. 난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 그래, 우리 처음 살았던 그 집으로, 진짜 우리집으로 이사를 하자. 마침 계약 기간도 끝나가니까 우리가 들어가 살면 되겠네. 그리고 나머지 집이랑 오피스텔은, 모두 팔아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자, 그럼 이제 제대로 우리집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볼까? 그러니까 두 집을 팔고 집이 한 채 남으니까 거주 부동산으로 2억 5,000만원이네. 나머지 7억 가량을 손에 쥐는 거지. 부채가 총 3억 가량이니까 다 갚고도 4억이나 남네. 우와, 이렇게 간단한걸. 당신 그동안 헛고생했다고 서운해하지 마. 이것 봐 당신 노력으로 4억이나 남잖아."


"아니, 우리 4억 못 남겨. 거의 일 년 넘게 3억의 부채를 유지해왔는데 당신 월급 가지고 그게 감당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 당신이 자꾸 집 팔자고 조르는 바람에 말 못한 게 있는데, 사실 마이너스 통장 3,000만원이 있고 이 집 살 때도 자금이 부족해서 친구에게 빌린 돈 5,000만원이 더 있어. 그리고 엊그제 당신이 이야기한 거 있잖아. 주식 투자하느라 퇴직금하고 보험 담보로 5,000만원 빌렸다며. 그러니까 1억 3,000만원 더 빼야 하고 거기에 자동차 할부도 갚아야지. 그건 당신이 선택해. 할부를 갚을 건지 아니면 차를 없앨 건지. 게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팔고 나면 양도소득세도 내야 해. 세금 때문에 명의를 분산한다고 했지만 아직 비과세 적용을 받으려면 6개월 정도 더 기다려야 하는데 당장 팔아야 하잖아. 적어도 차익에 대해서는 20% 이상 세금을 내야 할 거야.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 가격에 팔 수 없을지도 몰라. 요즘 부동산 시장 거래가 거의 없다는데, 아마 여러 가지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봐야 할 거야. 또, 오피스텔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게, 그간 나도 급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시세를 알아봤는데 분양가보다 많이 손해 봐야 팔 수 있겠더라고. 계약금 정도는 포기하고 내놓은 물건도 많은데 그런 것도 거래가 잘 안 되는 모양이야. 그니까 당장 팔려면 그 이상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건데……. 이래저래 따져보면 아마 남는 돈이 거의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 생각은 빚 정리할 정도만 되는 수준에서 다 팔자는 거지? 그래, 솔직히 4억이 생길 거라고 기대심을 갖고 있다가 그게 무너지니까 조금 서운하기는 한데, 우리 아직 젊은데 뭐가 문제냐. 그보다 이렇게 당신하고 마음이 통하는 게 더 중요하지. 나 사실 새벽에 형님 일기장 읽었거든. 다 읽은 건 아니고 당신이 읽다 펼쳐놓은 것만 봤어. 처남댁이 결혼 전에 형님한테 썼던 편지 같아 보이던데……. 당신 오빠, 진짜 멋진 남자야. 그거 읽고 나 반성 많이 했어. 형님이 했던 청혼 내용 읽으면서 어찌나 부끄러워지던지, 난 당신에게 그렇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형님이 꿈꾸는 부자 말이야.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게 정말 제대로 된 부자인 것 같아. 마음 편한 게 최곤데 말이지. 허황된 것 꿈꾸느라 매일 더 힘들게 살잖아.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도 모자랄 판에 괜히 주위에 휩쓸리고 부러워하고 쫓아다니고. 그러느라 우리 생활이 이렇게 힘드니…….



군살을 빼고 가벼워져라

이제 우리 가정 경제 현실을 냉정하게 대차대조 해보았으니 다음은 우리가 어떻게 돈을 쓰고 사는지만 정리하면 된다. 정말 이 부분은 두려움이 크게 앞선다. 얼마나 엉망으로 살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줄 대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대차대조표를 정리할 때와 마찬가지로 피해가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이거 보니 정말 굉장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평소 많은 종류의 돈을 쓰고 산다는 거지? 그런데 참, 당신 예전에는 가계부도 쓰고 그러지 않았나? 이제 와서 말이지만 당신 가계부 쓰는 모습 무지 예뻤었어. 설거지도 그렇게 즐겁게 해보니까 재밌더라고. 어릴 때 하도 설거지를 해서 주부 습진까지 걸린 기억 탓에 정말 부엌 근처에도 가기 싫었거든. 그런데 그날, 그렇게 싫어하는 걸 당신이 매일 하면서 얼마나 힘들까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내가 좀 너무했다 싶더라고. 혼자 하면 힘들고 같이 하면 별거 아닌데, 그치? 형님 일기 가계부 보고 생각한 건데, 우리도 앞으로 가계부 같이 써보는 건 어떨까? 남자가 가계부 쓰는 거 나쁘지는 않지만, 솔직히 나는 혼자 쓸 자신은 없거든."


남편에게 이런 속 깊은 자상함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집에서 동생 돌보느라 고생한 건 알았지만 주부 습진까지 걸릴 정도였다니. 이 사람도 자존심 때문에 자기 이야기를 드문드문 했었나 보다. 우리는 너무 어린 나이에 감정에 이끌려 정신없이 결혼하고 바쁘게 살아오기만 했다. 쓸데없는 환상과 이유 없는 실망, 유치한 자존심에 피해의식까지 정말 잡다한 것에 서로 너무 상처 내고 살아오기 바빴던 것 같다.


"함께 가계부를 쓴다? 이야, 우리 신랑에게 이렇게 멋진 모습 있는지 몰랐네. 좋았어! 그래도 내가 경험이 있고, 엉터리 재테크 공부이긴 하지만 간혹 쓸 만한 내용도 있었거든. 그거 응용 잘 해서 기본 가닥은 잡을 테니까 당신은 늘 공유하고 우리 오빠처럼 이야기 덧붙이면서 그렇게 우리 부부 가계부 만들어보자. 너무 멋진데! 호호호. 그런데 그건 그렇고 그 전에 우리 숙제는 마저 해야겠지."


우리는 함께 라면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그동안 쓰고 살았던 돈에 대한 불안들이 남아 있었는지 불쑥불쑥 소비 이야기가 나왔다. 가급적 가볍게 풀면서 싸움을 피하려 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가벼움에 익숙하지가 않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문제 해결에 대단히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동안 쌓인 오해와 불신의 무게 때문에 가벼워지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다. 오랫동안 과식을 통해 불어난 군살을 빼는 것만큼 어렵다고 할까. 어제 오늘 몇 년치의 에너지를 써가며 어렵게 다이어트 했는데 자칫 잘못하면 요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나는 가슴에 쌓인 상처와 자기혐오, 오만에 직접 눈을 맞추고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쉽게 어리석은 나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 정도 어려움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치러야 할 아주 작은 대가일 뿐이다. 내 웃음에는 그런 의지가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나와 남편의 그 의지 덕에 자칫 불편한 말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실컷 놀고 온 예진이의 활기도 우리의 의지를 더욱 굳게 했다. 예진이는 놀러 다녀온 후 줄곧 나와 남편을 쫓아다니며 하루종일 있었던 일들에 대해 수다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생기 넘치는 예진이를 실로 오랜만에 본 것 같다. 아니 거의 처음 본 것 같은 생각도 들어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내가 그동안 아이에게 무엇을 빼앗아왔는지 이제야 또렷이 보인다. 아이는 너무 쉽게 제 것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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