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모든 뛰어난 전략은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쓰였다!
「춘추전국을 읽다」 시리즈는 춘추전국시대의 사건과 인물들을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새롭게 조명하고 분석한 책이다. 그 테마는 혁신, 경영, 리더십, 도전정신, 결단, 욕망 등 지금 우리가 근본적으로 이야기 나누어볼 만한 내용이다. 혁신을 테마로 한 『새판을 짜다』에 이어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춘추전국의 전략가들』은 천하를 제패한 전략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재상들을 다루고 있다.
인물이 처한 상황뿐 아니라 인물의 성격과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분석하여 뛰어난 전략이 어떻게 탄생했고, 그에 따른 결과로서의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물론 목표나 능력은 저마다 달랐지만, 천하를 경영하고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들은 어느 위치에서든 한 사람의 능력이 세상의 변화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이들에게서 삶의 기로에서 기회를 만들어내고, 성공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장박원
고려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19년간 매일경제신문 편집국에서 일하고 있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고전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현재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일이 직업이 되었지만 실용적 글쓰기를 하면서도 인문학적 글쓰기의 끈을 놓지 않는 데에는, 고전에 진정한 삶의 가치와 현명하게 사는 길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고전이라 해도 ‘오늘의 삶’을 전제로 재해석되지 않으면 버려진 폐품에 불과하다. 고전을 해석하는 일이 단지 역사적 사실과 문헌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학자의 몫이겠지만, 현재의 당면 과제를 풀 새로운 열쇠로써 고전을 재해석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수많은 사람과 사건을 접하고 분석해왔다. 이러한 경험은 역사적 인물과 상황을 재해석해 현재로 되살리는 작업에 자양분이 되었다. 현재에 대해 고민하고 따져보던 시야를 과거로 돌리자 옛 인물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저자는 『사기』 『국어』 『전국책』 등의 역사서와 사상가들의 핵심 이론이 집약된 고전을 통해서 역사 속의 인물들을 깊이 연구했다. 중요한 단락은 수십 번 반복해 읽으면서 그들이 삶을 통해 전하는 가르침을 현 시대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했다. 그리하여 동양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인 춘추전국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는 자들을 선별하고, 그들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의 인물을 제대로 만나 지혜를 얻는 것이 저자가 펜을 놓지 않는 궁극적인 이유다.
■ 차례
들어가는 글 | 오래된 미래, 춘추전국시대를 만나다
1장 제족 | 준비된 자는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기
사람을 읽고 정세를 주도하다
최악까지 생각하고 계획하라
2장 호언과 조쇠 | 시련이 길수록 성공은 크다
될성부른 사람에게 베팅하다
비전을 공유하는 힘
큰 것을 얻으려면 크게 생각하라
3장 손숙오 | 근본을 생각하면 해결책이 보인다
장강(長江)의 기적을 이룬 사나이
아래서 위로 흐르는 것이 순리다
나라의 근본은 민생이다
4장 자산 | 균형 감각으로 강자에 맞서다
내우외환 속에서 정치를 배우다
중립을 지켜 재상에 오르다
약자의 생존 정치학
인치와 법치의 중심을 잡다
5장 안영 | 소신 있는 발언으로 권력을 압도하다
사마천도 흠모한 희대의 명재상
예를 지키면서 위신을 세우다
관리자의 본보기로 남다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
6장 범려 | 탁월한 전략가는 승리를 만들어낸다
비상한 처방이 필요할 때
복수가 복수를 부른 오월춘추시대
승기를 잡기까지 인내하라
성공의 문턱에서 실패하는 이유
결말은 스스로 만드는 것
7장 이사 |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다
앞으로 올 세상을 설계하다
사람을 얻어야 천하를 얻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나오는 글 / 주요 참고문헌
춘추전국의 전략가들
제족 | 준비된 자는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제족(祭足)
정장공(鄭莊公, 기원전 743~기원전 701년 재위)의 뛰어난 책사다. 자가 중족(仲足)이라 제중(祭仲)이라고도 불린다. 제족은 대략 기원전 720년대부터 기원전 680년대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 나이에 관직에 올라 장공을 비롯해 소공과 여공, 자미, 자의 등 5명의 군주를 보좌하며 정나라의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제족은 제후국의 세력 판도와 정세의 흐름을 간파하는 데 비상한 능력이 있었고, 위기 상황에서도 버릴 것과 버리면 안 되는 것을 결정하는 냉철한 결단력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파악해 상대방이 얻고자 하는 것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천자의 명이라 속이고 제후국과 연합하는 묘수를 내어 정장공으로부터 만전지계(萬全之計)라는 극찬을 들었다. 그 외에도 장공이 이복동생인 공숙 단의 반란을 제압할 때나 천자와 전쟁을 할 때 외교적인 고립을 피할 계책을 내어 정장공이 소패(小覇)의 업적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기
제족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에는 난세의 징조가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이전의 세상은 종주국인 주(周)나라와 주나라 왕인 천자(天子)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족이 살았던 시대부터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제족이 속해 있던 정나라는 천자의 숙부가 창업한 국가로 주나라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이는 정나라가 강한 국가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되기도 했다. 제족이 군주로 모신 정장공은 조상에게서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정나라를 대국으로 키웠다.
장공은 천자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는 신하가 아니었다. 천자를 천자로 보지 않고 내심 대등한 관계라 여겼다. 실질적인 힘에서는 더 강하다고 자부했다. 이로 인해 정나라와 주나라는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힘이 없었던 천자는 결국 속국인 정나라와 인질을 교환하는 초유의 사건을 용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동안 문틈으로만 살짝 보이던 춘추시대의 새 지평이 활짝 열렸고 세상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기원전 743년 정장공이 아버지 무공의 뒤를 이어 군주로 올랐을 때였다. 당시 제족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관료였다. 장공의 친어머니 무강은 장공을 무척 싫어했다. 무강은 장남인 장공을 싫어한 것과 달리 외모가 훤칠한 차남 단을 극단적으로 편애했다. 권좌를 단에게 넘기라며 무공에게 떼를 쓰기도 했다. 장공이 군주가 되자 무강은 다른 억지를 부렸다. 군주가 반드시 직할지로 삼아야 하는 경읍(京邑)을 단에게 넘기라고 한 것이다. 경읍은 당시 수도였던 신정에 버금가는 큰 지역으로 군주가 누구에게 전권을 넘길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지만 무강이 너무 강력하고 집요하게 요구하자 장공은 어쩔 수 없이 경읍을 단에게 봉지로 주었다.
제족은 막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장공이 통치 초기부터 동생과 분란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미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이 경읍을 다스리면 정나라는 분열될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군주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결코 나눠 가질 수 없는 권력의 속성을 알고 있던 정나라 관료들 역시 제족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장공은 아무런 사전 조치를 취하지 않고 태숙에게 반역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땅을 순순히 내주었다. 반역의 확실한 증거. 장공은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태숙 단은 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언젠가는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나이가 어린데다 병력이나 재력도 모자라 감히 야망을 드러낼 형편이 못됐다. 근거지를 마련하자 태숙은 정말로 실력을 쌓아나갔다. 자신에게 충성할 군대를 확충하고 널리 인재를 모았다. 명분은 변방의 혼란을 잠재우고 궁극적으로는 국력을 키운다는 것이었다. 군주인 장공으로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확실한 증거가 드러나기까지는 무려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정보에 따르면 태숙이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공은 선뜻 정벌에 나서지 못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어머니 무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다른 세력들이 오히려 태숙의 편에 설 수도 있었다.
어느 날 장공은 조정에 모든 신하를 불러놓고 이렇게 선포했다. "앞으로 나는 당분간 종주국인 주나라에 가서 지낼 작정이오. 천자에게서 높은 관직을 받고도 10여 년간 한 번도 가보지 못해 이번에 충성을 보이기 위해서요. 장나라는 제족을 중심으로 여러 대신들이 잘 다스려주길 바라오."
얼마 후 장공은 주나라로 향했다. 하지만 정말로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떠나는 척하면서 실은 단의 봉지인 경읍으로 갔다. 단이 정변을 일으키면 비어 있을 그의 본거지를 급습하기 위해서였다. 작전은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장공이 주나라로 떠나자 태숙 단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도성을 쳤고, 이후의 일은 모두 장공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결국 단의 정변은 실패했고, 공모했던 무강도 감금당하는 것으로 태숙 단의 반역 사건은 마무리됐다.
사람을 읽고 정세를 주도하다
만전을 기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을 수행하거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조금의 허술함 없이, 혹시 모를 위험 요소들을 미리 파악하고 제거해 실패를 줄이는 것을 뜻한다. 만전을 기한다는 의미의 만전지계(萬全之計)와 만전지책(萬全之策)은 제족과 정장공의 대화에서 역사상 처음 등장한다.
기원전 719년 당시 천하 정세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발원지는 위(衛)나라였다. 군주였던 위환공의 이복동생 주우가 형을 살해하고 스스로 군위에 올랐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차지한 것이다. 주우는 반대 세력을 숙청하거나 추방하는 채찍과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관대하게 퍼주는 당근으로 백성의 마음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주우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전쟁을 일으켜 백성이 딴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침략의 대상은 정, 곧 제족의 나라였다. 주우는 송(宋)나라를 비롯해 노(魯)와 채(蔡), 진(陳) 등과 연합해 정나라 동문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싸우는 척만 하다 돌아갔다. 처음부터 정나라와 싸울 의사도, 의지도 없었던 다른 나라들도 바로 군막을 거뒀다.
다만 송나라만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군주인 송강공의 정적이었던 공자 빙이 정나라에 망명해 있었기 때문이다. 송상공은 이 기회에 공자 빙을 제거하려 했다. 이런 속셈을 간파한 정장공은 연합군에서 송나라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빙을 다른 지역으로 피신시켰다. 이에 상공은 공자 빙이 도망간 곳을 끝까지 추격했다. 공자 빙을 잡으려고 군사를 이동시키는 와중에 정나라 땅과 백성을 유린했다. 결국 공자 빙을 죽이겠다는 최종 뜻은 이루지 못하고 정나라에 막대한 피해만 끼쳤다.
정장공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대신들을 소집해 불호령을 내렸다. "무조건 송나라를 정벌하라!"
그러나 대신들 사이에선 지금 당장 송나라를 치는 건 무리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더욱이 지금 바로 쳐들어간다면 주변 제후국들이 송나라 편을 들 가능성이 높았다. 어떤 일을 하든지 대의명분이 있어야 다른 제후국에게 인정을 받고, 힘을 쓸 수 있었다. 명분은 곧 힘의 다른 이름이었다. 장공의 엄명이 떨어지고 난 뒤 조정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때 제족이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동주열국지』의 기록이다.
"송나라는 벼슬이 높은 대국입니다. 왕조에서도 빈례(賓禮)로써 대우하니 경솔히 치지 마십시오. 지난날 주공이 천자를 뵈오러 (주나라) 조정에 가려다가 제후와의 언약 때문에 석문으로 갔고, 그 뒤는 또 주우가 군사를 몰고 침입해왔기 때문에 가시지도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먼저 조정에 가서 주왕(천자)을 뵈십시오. 그래야만 우리 정은 천자의 명을 받아 송나라를 친다는 거짓 구실이라도 내세우고, 제와 노(나라)를 부를 수 있으며, 그들의 군사와 함께 송나라를 쳐야만 명분이 뚜렷해집니다. 이러고도 이기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장공이 주나라에 가서 천자를 만나 명분을 구하라는 제안이다. 대신들은 송나라에 대한 보복심에 불타고 있는 장공이 과연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제족의 의견을 받아들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더군다나 장공은 천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장공은 잠시 제족의 말을 곱씹어보더니 탁하고 무릎을 쳤다. "경의 꾀는 참으로 만전지계다."
제족의 말에 따라 장공이 주나라 환왕을 찾은 때는 기원전 717년 무렵이었다. 평소 주나라에 관심을 두지 않다가 갑자기 찾아온 정장공을 환왕이 반길 리 없었다. 더욱이 얼마 전 정나라가 주나라의 힘과 반응을 떠보기 위해 변방에서 곡식을 훔쳐간 사건을 그는 잊지 못했다. "다행히 수년 동안 저축한 온 지방의 보리와 성주 지방의 나락(벼)이 있어 짐도 굶지 않고 견딜 만하다." 은과 성주 지방은 제족이 도둑처럼 침입해 곡식을 훔쳤던 곳이다. 환왕은 장공을 도둑놈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어 이렇게 비꼬아 이야기한 것이다. 환왕은 이것만으로 화가 풀리지 않자 장공에게 흉년에 쓰라며 곡식 열 수레를 보냈다. 남의 곡식이나 몰래 가져가는 거지 같은 놈이니 이거나 받고 떨어지라고 욕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주나라 대신인 주공(周公) 흑견이 장공을 찾아와 비단 두 수레를 바치며 아부만 늘어놓다가 돌아갔다. 제족은 흑견의 속셈을 눈치 채고 그가 놓고 간 비단을 정나라에 유리하게 활용할 대책까지 세워놓았다.
"흑견은 천자의 둘째 아들을 (정치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훗날 첫째와 둘째 아들이 정권 다툼을 벌일 겁니다. 그때 정나라의 지원을 받고자 비단을 놓고 간 것입니다. 일이 잘됐습니다. 우리는 이 비단과 수레를 이용해 송나라를 칠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흑견이 바친 비단을 열 대의 수레에 나눠 싣고 비단보로 덮은 뒤 천자가 송나라를 치라고 하사한 활과 화살이라고 속이는 겁니다. 송나라가 천자에게 조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아 모든 제후들을 모아 송나라를 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선전하고 제와 노나라를 비롯한 제후들을 규합하십시오. 이런 명분으로 송나라를 치라고 하는데 우리를 따르지 않는 제후가 있겠습니까?"
비록 정나라가 자신의 이름을 팔아 송나라와 전쟁을 벌인 것을 나중에 환왕이 알게 된다 해도 그때는 이미 정나라가 목적을 이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후 제족이 예상한 대로 주요 제후국들은 정나라가 천자의 명을 받았다고 믿었다. 이로써 송나라를 칠 명분과 연합군을 모을 구실이 만들어졌다.
안영 | 소신 있는 발언으로 권력을 압도하다
안영(晏)
제경공(齊景公, 기원전 547년~기원전 490년 재위) 시기의 명재상으로, 자(字)는 평중(平仲)이다. 청렴결백한 관리의 모범이자 군주에게 간언하는 소신 있는 정치인을 대표하는 현신(賢臣)이다. 특히 외교력과 언변이 뛰어나 제환공 이후 권력 다툼으로 세력이 약해진 제나라를 강대국의 반열에 올리는 업적을 이루었다. 안영은 권세가 높은 집안은 아니었음에도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 3대에 걸쳐 수십 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었고, 군주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직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남은 수레 하나까지도 반납하고 은퇴할 만큼 청빈한 태도, 오직 법과 원칙에 근거해 펼치는 논리 정연한 언변을 갖췄기에 가능했다. 후세 사람들은 안영의 뛰어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총 8권 215장으로 이루어진 『안자춘추』를 남겼으며, 지금까지 경세사상의 중요한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안영이 살아있다면 그를 위해 채찍을 드는 마부가 되어도 좋을 만큼 흠모한다"고 했을 정도로 그의 신념과 태도를 높이 샀다.
사마천도 흠모한 희대의 명재상
기원전 548년 5월 17일 늦은 밤, 제장공(齊莊公)은 최저(崔)의 가병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겨우 담에 올라가 집 밖으로 뛰어내리려 할 때였다. 화살 한 대가 정확하게 허벅지를 맞췄다. 단말마의 고통을 느끼며 장공은 담 안쪽으로 떨어졌다. 가병들은 달려와 쓰러져 있는 장공을 죽였다. 그렇게 장공은 권좌에 오른 지 6년 만에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권신인 최저에 의해 군주의 자리에 올랐던 장공이 이렇게 죽을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빌미가 된 장본인은 최저의 아내 당강이었다. 최저는 장공이 자신의 아내와 사통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장공을 유인해 시해했던 것이다. 최저는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장공을 죽인 직후부터 일사천리로 정적(政敵)을 숙청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처럼 살벌한 상황에서도 소신에 따라 행동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안영이었다.
제장공이 살해될 당시 안자(안영)는 최저의 집 문 밖에 서 있었다. 이때 그의 수하들이 물었다. "군주와 함께 죽을 작정이십니까?" "그가 오직 나만의 군주요? 그럴 생각은 없소." "그럼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려는 것입니까?" "그것이 내 죄요? 망명할 일이 없소." "그러면 댁으로 돌아갈 것입니까?" "군주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소?"
이 말을 마치고 최저의 집으로 들어가 장공의 시신 앞에서 군주가 죽었을 때 하는 상례(喪禮)를 한 뒤 돌아섰다. 비록 사직을 위해 죽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예의와 원칙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장공은 안영이 진(晉)나라 침략을 반대하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던 군주였다. 그런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저런 행동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장공에게 조금이라도 동조하는 자는 처단하겠다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 최저와 그의 측근들 앞에서 그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최저는 끝내 안영을 죽이지 않았다. "안영은 백성으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는 사람이오. 그를 놓아두어야 민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우리는 최저의 말에서 안영의 이율배반적 행위를 정당화해줄 키워드를 찾을 수 있다. 바로 민심이다. 최저는 이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영마저 죽인다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군주를 죽인 것에 반대하는 쪽의 숨통은 틔워줘야 한다. 그래야 민심을 수습하고 빠른 시간 안에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다.
제경공 초기 최저는 새 군주를 세운 공신으로 거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아들들이 후계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싸운 것과 경봉의 배신이 화근이었다. 최저 다음으로 권력을 거머쥔 경봉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는 아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자신은 가무와 사냥에 빠져 지내다가 고씨, 난씨, 진씨, 포씨가 주축이 된 권세가들에 의해 쫓겨났다. 안영은 이때도 적극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그러다 보니 경봉을 제거한 공로가 없었고, 권력에서도 밀려났다. 그 후 10년 이상 네 가문이 서로 권력을 나눠 갖다시피 했다.
시간이 갈수록 두 패로 갈려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고씨와 난씨가 공조하고, 진씨와 포씨가 한편이 돼 호시탐탐 상대 진영을 공격하려 했다. 직접적인 움직임은 기원전 532년에 일어났다. 진씨와 포씨가 선제공격에 나섰다. 당시 힘에서 우위를 보였던 고씨와 난씨가 자신들을 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고씨와 난씨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대응하기보다는 군주의 신변을 확보하는 전략을 썼다. 그들은 병력을 이끌고 제경공이 있는 궁으로 향했다.
네 가문이 군사를 동원해 내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안영은 궁으로 달려갔다. 고씨와 난씨보다 먼저 도착해 조복을 입은 비무장 상태로 병사들의 난입을 막았다. 고씨와 난씨의 병사들과 안영이 대치하고 있을 때 진씨와 포씨 무리도 궁 앞에 도착했다. 네 가문은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안영에게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안영은 평소 소신대로 중립을 지켰다. 『춘추좌씨전』은 이때 안영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안영의 수하가 묻는다.
수하 : 진씨와 포씨를 돕는 것이 어떻습니까?
안영 : 그들에게 어디 도와줄 만한 점이 있는가?
수하 : 그러면 고씨와 난씨를 돕는 것이 어떻습니까?
안영 : 그들이 어찌 진씨나 포씨보다 나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수하 : 그렇다면 (궁궐 문 앞에서 위험을 무릅쓰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안영 : 군주가 공격을 당하고 있는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결국 군주인 제경공과 안영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양 진영은 궁 밖에서 교전을 벌였다. 군주와 안영 외에 네 가문의 운명을 결정짓는 캐스팅보트가 하나 더 있었다. 국인(國人), 즉 백성이었다. 정치권력이 더 컸던 난씨와 고씨는 불행하게도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백성은 진씨와 포씨의 편을 들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백성이 지원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교전에 패한 고씨와 난씨는 노나라로 망명했고 진씨와 포씨는 상대 가문의 재산을 나눠가졌다.
역설적이게도 네 가문의 권력 다툼으로 가장 많은 것을 취한 사람은 안영이었다. 이 사건 이후 제경공은 안영을 더욱 신임했고 조정의 최고 관직인 재상에 임명했다. 그 후 기원전 500년에 안영이 죽을 때까지 32년간 제나라 백성은 안영의 내치와 외교, 부국강병의 정책에 힘입어 비교적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더불어 제나라의 위상도 높아졌다.
군주가 패전이라는 땅을 주려고 할 때 안영이 사양하며 한 말이다. "욕심을 다 채우고 나면 그 다음에는 망할 날이 며칠 남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돼 밖으로 쫓겨나면 이미 가지고 있는 봉읍조차 하나도 없게 됩니다. 패전을 받지 않는 것은 부(富)가 싫어서가 아니라 부를 잃을까 두려워 그러는 겁니다. 부라는 것은 마치 베나 비단폭과 같은 것으로 이를 잘라 옷을 만들 때 그 제한폭을 넘어 더 많이 쓴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무릇 백성에게 후하게 하고 나서 그 이익을 써야 하는 겁니다." 이처럼 안영은 경공이 봉지나 재물을 주려고 할 때마다 거절했다. 심지어 안영의 집이 시장 인근 빈촌에 위치해 있어 이를 옮겨주려고 할 때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경공은 안영의 처가 늙고 못생긴 것을 보고 말했다. "과인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어리고 또한 예쁘다오. 선생 집안사람 숫자를 채우고 싶소." "제 아내가 늙고 볼품은 없지만 이제껏 함께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보아도 젊고 예쁩니다. 또 남의 아내가 된 자는 본래 모두가 젊을 때부터 늙음이 올 때까지 의탁하는 겁니다. 일찍이 저에게 의탁하여 이를 수락한 여자입니다. 임금께서 비록 딸을 내려준다 해도 저로 하여금 그 의탁을 배반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안영은 나이가 들어 공직에서 은퇴할 때도 남은 수레 하나까지 반납하고 사직했다. 죽기 직전에도 아내에게 그동안 지켜온 청빈한 가풍을 그대로 이을 것을 부탁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그의 태도는 절대 권력자인 군주와 의견이 맞지 않을 때 당당하게 직언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또 군주 주변에 있는 대신들이 잘못된 정책을 추진하려고 할 때 오직 법과 원칙에 근거해 소신을 가지고 정치를 펼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이사 |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다
이사(李斯)
전국시대 말기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46년~기원전 210년 재위)을 도와 천하통일의 업적을 이룬 정치가이자 법가사상가다. 초나라 하급 군관시절, 눈치 보며 분뇨를 먹는 변소의 쥐와 당당하게 곡식을 먹는 창고의 쥐를 보고 쥐나 사람이나 장소가 습성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신양명을 꿈꾼다. 순자의 직하학파에서 한비자와 함께 법가사상을 연구한 후 당시 패권국이었던 진나라로 가 진시황의 눈에 들게 된다. 이사의 진면목은 진나라가 통일제국이 된 후에 비로소 드러난다. 이사는 권력을 중앙집권화하기 위해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정착시켰으며 문자, 화폐, 도량형, 도로 구조를 일원화하여 통일제국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사마천은 민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빠른 성과를 얻기 위한 정책들만을 입안한 점, 진시황 사후에 환관 조고의 음모에 결탁한 점 등을 비판하기도 하였으나, 그 업적에 있어서만큼은 주(周)나라를 만든 주공, 소공과 견줄 수 있을 것이라고 평하였다.
사람을 얻어야 천하를 얻는다
이사가 진나라 수도 함양에 도착했을 때 마침 큰일이 발생했다. 진장양왕(秦莊襄王)이 재위 3년 만에 갑자기 서거한 것이다. 장양왕은 진시황의 아버지로, 천하의 운명을 놓고 도박을 벌였던 여불위(呂不韋)와 얽혀 많은 사연을 남긴 인물이다. 이사는 진나라로 가서 바로 왕을 만나 천하통일의 계책을 알릴 작정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이때 눈에 들어온 사람이 군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승상 여불위였다. 이사는 약 3년 만에 여불위의 눈에 들어 기원전 244년경에 왕의 시위관(侍衛官)으로 임명됐다. 그는 어렵게 배알한 진시황을 이렇게 설득한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기회를 놓치지만 큰 공을 이루는 사람은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밀고 나갑니다. 옛날에 진나라 목공이 우두머리가 되고서도 동쪽에 있는 여섯 나라를 끝까지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제후의 수가 너무 많은 데다 주나라 왕실의 은덕이 여전히 쇠퇴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오패가 차례로 일어나 번갈아가며 주나라 왕실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나라 효공 이래 주나라 왕실이 쇠약해지고, 제후들은 힘을 합쳐 진나라 동쪽 지역에 오직 여섯 나라만 남았습니다. 진나라가 상승세를 타고 제후들을 눌러온 지 벌써 6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제후들이 진나라에 복종해 마치 진나라의 군이나 현과 같습니다. 진나라의 강대함에 대왕의 현명함이 있다면 취사부가 솥단지 위에 앉은 먼지를 훔치듯 손쉽게 제후를 멸망시키고, 왕의 대업을 이루어 천하를 통일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은 만년에 한번 있을 기회입니다. 지금 게으름을 피우고 서둘러 이루지 않는다면 제후들이 다시 강대해져서 서로 모여 합종을 약속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현명한 왕일지라도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진시황은 열다섯 살 소년 군주였고, 거의 모든 국정은 여불위가 주도했지만 어느 정도 정치에 눈을 뜨고 있었다. 진나라가 점점 강해지고 영토도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진시황도 알고 있었지만 청년 진시황에게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말해준 사람은 이사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사의 설득에 진시황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 후 수시로 만나 조언을 들었다. 진시황이 자신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하자 이사는 빠른 시간 안에 천하를 통일할 묘수를 귀띔한다.
"모사들에게 은밀하게 황금과 주옥을 주고, 각 제후국에 가도록 하십시오. 이들의 임무는 각국에 진나라를 옹호하거나 진나라를 위해 첩자 노릇을 할 고위급 관리들을 많은 뇌물로 포섭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후국의 유력자 중 뇌물로도 포섭이 되지 않고 진나라와 결탁하지 않으려는 자가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죽이면 됩니다. 이렇게 군주와 신하를 따로 놀게 만들어 여섯 나라의 국력을 약하게 만듭니다. 그런 다음 강력한 진나라 군대를 보내 공격하면 멸망하지 않을 나라가 있겠습니까?"
진시황은 이사의 비전에 매료돼 있었으므로 이 전략을 무조건 따랐다. 이사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여섯 나라 조정에는 진나라의 뇌물을 받은 관리들이 점점 늘었다. 심지어 왕 바로 밑에서 국정을 총괄하는 재상들 중에도 진나라의 뇌물에 혹해 나라를 망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 결과가 치명적일수록 이사에 대한 진시황의 신임은 높아졌다. 진시황에게 첫 유세를 하고 약 4년이 지난 뒤 이사는 객경(客卿)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이사는 바라고 바라던 명예와 부를 누리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진시황의 천하통일 대업도 속도를 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개혁은 이사의 뒤에 카리스마가 넘치는 절대 권력자 진시황이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간축객서> 사건 이후 무려 16년가량 진나라 조정에 몸담아왔던 이사는 진시황이 통일 이후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왕이 죽으면 그 업적에 따라 후세가 정하는 시호를 없애고 왕의 호칭을 황제로 정했다. 또 진나라 고유의 달력을 만들고, 의복과 의례 등의 풍속과 법규를 혁신했다. 법령도 엄격하게 시행해 법치 국가의 근간을 마련했다.
이렇듯 일사분란하게 추진됐던 이사의 개혁 정책 중에 처음으로 도전받은 분야는 군현제였다. 제후국을 평정하면서 군현을 설치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넓은 영토를 진시황 혼자 통치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로 보였다. 그래서 이사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던 승상 왕관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은 진시황에게 주청했다. "제후들을 이제 막 평정했지만 연과 제, 초나라 땅이 너무 멀어서 왕을 두지 않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황자들을 왕으로 세울 것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다수의 의견은 주요 지역에 왕을 세워 분권체제로 다스리자는 것이었다. 모두가 제후를 세우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던 상황에서 이사가 반기를 들었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은 많은 자제들과 일족을 왕으로 봉했지만 후손들이 점차 소원해지고 멀어져서 서로 원수처럼 공격했고, 심지어 제후들끼리 서로 주벌하였음에도 주나라 천자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폐하의 신령(神靈) 덕에 통일을 이뤄 모두 군현으로 삼았으니 황자나 공신들에게 국가의 부재로써 후한 상을 내리신다면 그들을 다스리시기에 매우 쉬울 겁니다. 그렇게 하시면 천하에 다른 마음이 없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하를 안녕케 하는 책략이오니 제후를 설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권력을 나누지 말고 상벌로 유력자들을 관리하라는 것이다. 이는 법가사상을 총정리한 『한비자』에도 수없이 나오는 주장이다. 이사가 한비자와 더불어 전국시대 말기 대표적인 법가 추종자였음을 드러내는 발언이기도 하다. 진시황 역시 군현제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행정 개혁에 대한 논의가 끝난 뒤 이사는 진나라 전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관리를 파견했다. 그러나 여섯 국가의 백성을 통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는 여전히 다른 문자와 화폐를 썼으며 무게와 길이, 부피를 재는 기준이 달랐다. 또 수레가 달리는 도로 규격이 달라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이를 방치한다면 병합한 6개국 백성은 황제의 나라로 통합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이사는 군현제 공포 후 즉시 법률과 도량형을 통일하고 수레의 궤 폭도 하나의 기준만을 따르도록 했다. 화폐와 도량형을 한 가지로 개편한 것은 경제 측면에서 일대 혁신이었다. 수레의 궤 폭을 통일한 것은 군사적 목적이 강했다. 궤 폭이 다르면 군대가 빠르게 이동하기 힘들다. 6개국을 병합해 광대한 영토를 갖게 된 진나라는 외부 세력이 침략하면 즉시 군대를 이동해야 했다. 이사는 이 점에 착안해 요즘의 고속도로와 같은 직도(直道)를 놓고 함양을 중심으로 사방팔방 나갈 수 있는 동일 규격의 간선도로를 건설했다. 6개국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썼던 문자 모양을 소전(小篆)체로 합친 것도 주목할 만한 개혁이었다. 문자의 통일 이후 중국은 정치와 문화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사는 수년간 사회 기반 시설과 제도를 정비했다. 진시황이 다섯 차례나 전국을 돌 때마다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며 개혁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 살폈다. 이와 더불어 진시황의 업적을 곳곳에 기록하며 흔적을 남겼다. 이사가 놓은 개혁의 초석 위에 진 제국은 문제없이 건설되고 있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정국은 안정과 평화를 찾아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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