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은 사람이다

   
윤병철
ǻ
까치글방
   
18000
2014�� 02��



■ 책 소개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의 명암 속에서 성장한 


한국 금융사의 살아 있는 증언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의 명암 속에서 한국개발금융, 한국장기신용은행, 한국투자금융에서 재직한 뒤에 하나은행을 세우고 우리금융지주회사의 토대를 놓은 ‘금융인 윤병철’의 77년의 생애와 50여 년의 금융계 활동을 돌아보는 책이다. 





그의 50여 년에 이르는 일과 삶은 한국 금융사의 살아 있는 한 증언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때로는 새 길을 만들어서까지 갔던 그는 은행 경영에 창조적, 혁신적, 모험적 사고를 접목, 실천시켰을 뿐만 아니라 발레와 그림을 사랑한 ‘춤추는 은행장’이자 예술 애호가였고, 재계의 댄디, 신사이기도 했다. 





■ 저자 윤병철 


한국개발금융주식회사 부사장, 한국장기신용은행 상무, 한국투자금융주식회사 사장, 하나은행 회장,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에프에스비(FPSB)와 한국FP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하나가 없으면 둘도 없다(1996)』『금융 빅뱅과 파이낸셜 플래너(2001)』가 있다. 





■ 차례 


제1부 자신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다 


스스로 은행장직에서 물러나다 





제2부 소년시절과 청년시절 그리고 새내기 은행원 


농업은행 시절: 금융계에 첫발을 내딛다 | 잊을 수 없는 인연 1: 무원 김기호 선생님 | 혼이 난 도둑질 | 아버지의 방목이 나를 키우다 | 생애 첫 실패를 안겨준 고시에 다시 도전하다 | 한국경제인협회 시절: 역동의 현장에서 일을 배우다 | 경제인협회에 눈먼 돈을 벌어주다 | 잊을 수 없는 인연 2: 김입삼 국장 | 잊을 수 없는 인연 3: 윤태엽 부장 





제3부 한국개발금융 시절: 시련과 희망의 교차로에서 


민간 주도 최초의 금융회사 설립에 참여하다 | 한국개발금융의 틀이 세워지다 | 첫 해외출장 | 돌풍을 일으킨 새 금융기법 | 송백(松柏)의 푸르름은 겨울에 빛난다 | 잊을 수 없는 인연 4: 김진형 회장과 홍재선 회장 | 잊을 수 없는 인연 5: 다이아몬드 국장과 니시하라 이사 | 큰돈과는 인연이 별로 없는 평생 | 아내 이정희 





제4부 한국장기신용은행과 한국투자금융 시절: 금융의 새 장에 동참하다 


한국장기신용은행: 공업화 시설자금을 전담하다 | 모난 돌이 정을 맞지 않는 것도 복이다 | 마부가 되어 새 둥지를 틀다 | 개혁 바람을 몰고 온 ‘독일병정’ | 머슴과 프로페셔널 | 도전정신으로 새 판을 펼치다 | 미래를 외치는 ‘양치기 소년’ | 잊을 수 없는 인연 6: 정영의 장관 





제5부 하나은행 시절: 33번째 은행을 만들다 


꿈을 이룬 축포소리 | 꽁무니만 따라가서는 선두가 될 수 없다 | 금융은 사람이다 | 한마음으로 뭉친 하나정신 | 별 볼일 없는 기업은 사장실이 붐빈다 





제6부 우리금융지주 시절: 한국 최초의 금융지주 선장이 되다 


들러리가 신부 되다 | 해도(海圖)도, 나침반도 없는 출항 | 은행 이름을 둘러싼 소동 | 밭을 갈려고 해도 소가 꿈쩍 않다 | 자고나면 뒤집히는 합의 | 세계 금융의 중심에 서다 | 평생의 화두, 금융자율화와 인재 양성 





제7부 재무설계와 메세나 운동: 나의 마지막 의무와 봉사 


변화의 바람 | 한국FP협회, 금융 전문가를 기르다 | 맨땅에 뿌린 씨앗 | 준비되지 않은 장수는 위험하다 | 사람을 키우는 보람 | 성공하려면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신나게 일하라 | 춤추는 은행장이 되다 | 문화는 물질문명을 싣고 가는 수레 | 행복한 돈 심부름꾼 





에필로그: 배움과 열정 그리고 인연으로 건너온 삶 


감사의 말




금융은 사람이다


자신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다

스스로 은행장직에서 물러나다

1985년 한국투자금융 사장을 시작으로 1994년 하나은행장 재임(再任) 첫해까지 장장 9년 넘게 조직의 외형과 업무 체계만 바꾼 채 기존 조직을 그대로 이끌었던 나는 최고경영자로서 10년째 되던 어느 날 결재를 하면서 나 자신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 순간 이쯤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리를 맡는 것은 남의 힘에 의한 것이지만, 물러나는 것은 누구와도 상의 없이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 하는 자리일수록 스스로 그 자리를 버리고 나오기란 쉽지 않다. 내가 스스로 은행장에서 물러난 것을 두고 미담(美談)이라고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최고경영자의 당연한 의무이자 조직에 대한 가장 큰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최고경영자가 무턱대고 물러나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을 두고 후임자를 양성하고 그가 최고 경영자가 되었을 때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조직을 미리 정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다음에 그만두어야 조직에 혼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금융 역사상 연임이 보장되는 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은행장 자리를 물러난 사람은 내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금융계에서 조금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들이 그래도 금융인 윤병철을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77년의 삶을 살아오면서 내가 이룬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하나은행장 경영승계는 가장 자랑스러운 일 중의 하나이다. 그만 두는 것도 복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참 복 받은 은행장이었다. 좋은 후임자가 있었고, 덕분에 담담하게 퇴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년시절과 청년시절 그리고 새내기 은행원

농업은행 시절: 금융계에 첫발을 내딛다

내가 사회에 첫발을 디딘 곳은 농업은행(農業銀行)이었다. 처음부터 평생 은행원으로 살겠다거나 금융인으로 성공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뛰어든 직업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잘하는 일을 발견해서 평생 그 일에 몸담게 되었으니 참으로 나는 행운아였고 나의 삶은 성공적이었고 행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에는 은행이 몇 개 되지 않았는데, 학벌이 좋은 순서대로 한국은행, 산업은행, 시중은행을 택했다. 특수은행인 농업은행은 파격적 대우를 내세우며 인재들을 모집하여 시중은행에 합격한 사람들 중에 농업은행을 선택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나는 시골 출신으로 부산에서 대학을 나온 촌놈이라 서울 정보에 어두워서 은행에도 순위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농업은행을 지원했던 것이다. 1개월의 연수를 마친 나는 지금은 통영시가 된 경남 충무시의 충무지점에 발령을 받았다. 사회생활의 시작이자 생애 첫 직장이었던 농업은행 충무지점에서의 생활이 따지고 보면 금융인으로 살면서 가장 재미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방목이 나를 키우다

우리 부모 세대는 흔히 그랬지만 아버지도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완고한 데다 집안 형편마저 넉넉지 않아 누나들은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애지중지하는 아들의 학비를 줄 때도 그냥 주는 게 아니라 던지다시피 할 만큼 무뚝뚝하고 엄했지만, 자신이 정해놓은 기준에서 그 울타리만 넘지 않으면 시시콜콜 간섭하지 않았다. 아마 학창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공부를 잘하고 별로 큰 말썽도 부리지 않았던 막내아들을 믿는 구석이 있어 그렇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자신이 허용한 울타리 안에서만큼은 나를 방목(放牧)하다시피 길렀다.


나는 아버지의 방목으로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자랐지만, 일단 아버지가 설정해둔 울타리를 넘어서면 따끔하게 혼이 났다. 덕분에 일찍이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스스로 구분할 줄 알게 되었고, 내가 정한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하고자 하는 일을 자율적으로 추진하는 능동적인 기질을 기를 수 있었다.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나를 있게 한 밑거름이 아버지의 적당한 방목이었다. 만일 아버지가 시시콜콜 간섭하며 자식을 키웠다면, 지금까지 내가 이룬 성취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경제인협회에 눈먼 돈을 벌어주다

나는 한국경제인협회에 1962년부터 근무하기 시작하여 한국개발금융으로 이직한 1967년까지 근무했다. 청년시절을 마감하는 20대 후반의 나의 정열과 도전의 시대였다.


지금 생각해도 과거 경제인협회는 상당히 개방적인 조직이었다. 직원들 스스로 알아서 책임지고 일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로 인해서 그 시절에는 일하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경제인협회 역사상 최초로 내가 큰돈을 벌어준 것도 따지고 보면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 덕이었다. 그때 벌어준 돈은 다름 아닌 항공 티켓 판매 커미션이었다. 이 일로 260만 원을 협회에 벌어주었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우리나라가 벽돌을 쌓듯 차근차근 국가경제 기틀을 만들어가던 시기에 경제인협회에서 일했던 나의 경험은 이후 사회생활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이때 경험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해서 훗날 토론을 할 때 같은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결론이 나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자세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직장생활을 포함하여 두고두고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훌륭한 인간관계를 배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경제인협회에서였다.



한국개발금융 시절: 시련과 희망의 교차로에서

한국개발금융의 틀이 세워지다

1967년 4월 20일, 3년여의 준비기간이 끝나고 회사 창립 주주총회가 열린 가운데 대망의 한국개발금융주식회사(韓國開發金融株式會社)가 정식 출범했다. 회사 투자자 지분은 전체 주식 가운데 내국인이 61%, 국제금융공사와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 도쿄은행(東京銀行), 차타드(Chartered) 은행 등 10개 외국 금융기관이 39%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회사 설립에 앞서 국내 출자분의 65.5%를 일반에서 공모키로 했다.


당시의 주식 일반공모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1956년에 우리나라 증권거래소가 설립된 이래 1972년까지 주식을 공개한 기업이 66개 회사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기업공개에 대한 인식이 폐쇄적이었다. 하지만 한국개발금융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반 공모방식에 의한 회사설립을 택했고,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일로 훗날 신생 기업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돌풍을 일으킨 새 금융기법

우리 회사가 보는 시각은 제도권 금융과 달랐다. 경제가 연간 10% 안팎의 고속성장을 구가하는 나라에서 장차 가장 번창할 사업 분야가 해운업과 원양어업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미래의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 서자 수송선박과 원양어선 도입 자금을 직접 지원했다. 그 결과 이 부문의 사업 경쟁력이 강화되고 이후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는데, 이는 한국개발금융이 이룩한 커다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개발금융은 우리나라 기업 발전뿐만 아니라 금융계 발전에도 한몫을 했다. 일찍이 국내외 합작투자로 선진 금융기법을 익힐 수 있었던 한국개발금융은 새로운 금융기법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선보임으로써 이후 우리나라 금융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 내가 실무자로 참여했든, 최고경영자가 되었든 우리나라의 금융기관 탄생을 뒷받침하고 주도한 것이 세 번이다. 그중 하나은행은 내가 직접 이끌었고, 우리금융지주는 초대 회장을 맡아서 국내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의 뼈대를 만들었다. 그 모든 나의 출발의 원점이 바로 한국개발금융이었다. 서른의 젊은 나이로 국내 최초 민간 금융회사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우리나라 금융역사를 새로 써나갈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크나큰 나의 행운이자 영광이었다.


큰돈과는 인연이 별로 없는 평생

나는 돈이 사람을 좇아야지 사람이 돈을 좇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몸소 깨달은 계기가 있다. 본의 아니게 발을 담그게 된 사업에서 톡톡히 쓴맛을 본 것이다. 한국개발금융 영업부장 시절, 부산대 법대 동기로 학창시절 하숙을 함께 했던 친구가 나를 찾아와서 독립하여 사업을 해보려고 하니 좀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결국 친구가 구상한 봉제공장에 공동 투자를 결정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애쓴 보람도 없이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나자 투자금을 모두 날릴 지경이 되었다. 사업의 사(事)자도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톡톡히 대가를 치렀지만, 이 일로 몇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우선 사업이라는 것이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 사업은 자신이 직접 해야지 남에게 맡겨서는 되는 일이 아니었다.


비록 짧은 기간의 경험이었지만, 투자 실패는 많은 공부가 되었고 후에 은행을 경영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 경험을 토대로 직원들에게 항상 강조했던 얘기가 있다. 가령 여러분들이 은행 주식에 1원을 투자했다고 치자. 그 돈을 날렸다고 불평만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투자에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데 투자의 결과로 나타난 실패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려 하고 거기서 깨닫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그 배움이 투자에 대한 보상이고 그것은 새로운 성공의 자본이 될 것이다. 불평만 자꾸 하면 1원이 아니라 천만 원을 날려도 얻는 게 없다.



한국장기신용은행과 한국투자금융 시절: 금융의 새 장에 동참하다

한국장기신용은행: 공업화 시설자금을 전담하다

1980년 6월 2일, 회사 설립 13년째를 맞은 한국개발금융이 한국장기신용은행으로 새로 탄생했다. 은행 전환의 배경에는 70년대 들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의 국가적 성공과 더불어 근본적인 금융환경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장기신용은행의 뿌리인 한국개발금융은 법과 제도에도 없는 일을 많이 시도했다. 국제 금융기구와 합작을 추진하면서 외자도입법에도 없는 조세감면 혜택을 얻어냈는가 하면, 주식공모 방식으로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로 단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을 설립하여 단기금융시장을 개척했고 심지어 단기금융업법의 산파역할까지 해냈다.


그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개발금융이 실물경제, 특히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기존의 금융관행과 제도를 과감히 갈아엎고 새로운 시스템을 설계하는 창조적 파괴정신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장기신용은행으로의 전환이라는 희망의 빛을 얻은 우리 구성원들은 금융을 통한 경제발전을 목표로 한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희열을 온몸으로 느끼며 가슴 가득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마부가 되어 새 둥지를 틀다

1982년 2월, 나는 장기신용은행 상무에서 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주식회사 전무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그곳으로 갑자기 자리를 옮기게 된 배경에는 당시 우리나라의 정치적 혼란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군부 세력은 공무원 사회를 일대 쇄신한다는 명분하에서 마음대로 금융기관 인사권까지 휘둘렀던 것이다. 우리는 이미 모회사인 장기신용은행장을 교체했기 때문에 자회사 사장은 그대로 두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지만, 신군부가 단자회사 사장을 전부 바꾸라니 별 수 없이 따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진형 회장은 회사운영에 많은 권한을 내게 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김 회장이 이렇게까지 나를 설득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이왕 갈 거면 마부(馬夫)로서 철저히 사장을 보필하겠습니다"며 나는 한국투자금융 전출을 받아들였다. 어찌 보면 이때가 나의 사회생활의 커다란 전환점이었으며, 그후의 삶을 돌아보면 오히려 잘된 전출이었다.


도전정신으로 새 판을 펼치다

1982년 한국투자금융 전무로 자리를 옮긴 뒤 맨 처음 눈에 띈 것이 북새통을 이루는 영업부 창구였다. 하루 종일 사람들로 붐비는 데다 특히 마감시간이 임박한 오후 서너 시가 되면 각 기업의 자금담당자들이 몰려와 마치 바겐세일에 들어간 백화점 매장을 방불케 했다.


어떻게 하면 주요 고객들이 우리 회사를 좀 더 편하게 이용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 고객에 대한 서비스마인드를 무장시키기 위해 회사조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선 영업부를 수신고객을 담당하는 영업부와 여신고객을 담당하는 기업금융부로 분리했다. 한국투자금융은 중요 고객을 별도로 맞이하는 프라이빗 뱅킹(PB) 서비스 개념을 이때 벌써 적용한 것이다.


10년 동안 유지되어온 회사조직을 과감히 바꾼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경영에서 조직은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때문에 고객에게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조직체계를 바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회사가 고객의 입장에서 그들의 편의를 먼저 생각하고 그 생각에 맞추어 조직을 바꾼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고객 입장에서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조직을 과감히 변화시킨 당시 한국투자금융의 조직 모델은 그후 국내 단자업계에서 보편화되었다. 매우 보람된 일이었다.



하나은행 시절: 33번째 은행을 만들다

꿈을 이룬 축포소리

1991년 3월, 재무부로부터 은행 전환 인가를 받았다. 단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주식회사가 하나은행이 되었고, 나는 주주총회에서 초대 은행장으로 선임되었다. 그후 4개월이 지난 1991년 7월 15일, 요란한 세 발의 축포소리가 서울특별시의 중심부 을지로의 분주한 아침 출근길을 뒤흔들었다. 나를 비롯한 전체 임직원 수백 명의 기쁨과 열망을 담은 은행 개업 축포소리였다.


한창 장사가 잘되던 단자회사를 미래를 위해서 은행으로 바꾸어야 한다며 직원들을 설득하여 함께 준비하고 애쓴 결과로 마침내 은행업 시장의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그 무대에서 하나은행이 자신이 맡은 역을 훌륭하게 소화하여 관객들의 진정한 박수갈채를 받는 일인 것이다. 나는 그 기대가 어긋나지 않도록, 지금까지 어려움을 견디며 자신의 몫을 다해온 직원들과 함께 정말 훌륭한 하나의 은행을 만들자는 의욕이 저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솟아올랐다.


꽁무니만 따라가서는 선두가 될 수 없다

하나은행은 국내 은행 가운데 33번째로 출발했다. 후발주자인 만큼 남들과 달라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절대 그들을 따라잡을 수도, 앞설 수도 없었다. 처음 하나은행을 만들었을 때 금융계는 우리를 향해서 하나마나한 은행이라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을 보기 좋게 잠재웠다.


하나마나한 은행으로 무시당하던 우리가 단기간에 금융계 안팎에서 주목을 끌었던 이유는 고객이 없으면 은행도 없다는 근본 철학에서 출발했다. 고객을 최우선으로 두고 "손님의 기쁨 그 하나를 위하여"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우리만의 방식을 찾다 보니 새롭고 다양한 시도들이 나왔고, 그 시도들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동안 국내 금융계의 관행을 깨고 상식을 파괴하는 일이 많다 보니, 하나은행 사람들은 날마다 요란을 떨고 시끄럽게 군다고 눈총을 많이 받았다. 사실 우리는 단자회사 직원들이 그대로 은행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기존의 은행원들하고는 생각과 개념이 좀 달랐다. 그래서 정부규제의 틀 속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가진 특성을 살려 시장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여러 가지 상품을 만들었다. 어쨌든 후발주자로 시작한 하나은행은 오랫동안 관습에 젖어 있던 우리나라 금융계에 신선한 돌풍을 불러일으키며 단숨에 선도 은행으로 자리 잡았다.


금융은 사람이다

금융에서는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특히 금융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협력하여 결과를 만드는 사업이므로 개인의 역량과 능력발휘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팀이나 회사의 실적을 높이기 위해서 보다 협력하고 헌신할 때 그 사람의 진가가 발휘된다.


하나은행을 떠난 지 13여 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후배를 만나면 빼놓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다. "나한테는 하나은행과 함께 당신들이 백이오. 당신들이 잘못하면 안 돼요. 당신들의 빛이야말로 나의 빛이기 때문이오."


국가와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소위 기업시민운동도 결국은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은행이 그동안 문화, 봉사 등을 통해서 사회적 기업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기업시민운동 측면에서 좀 부족한 점이 있었던 것은 내가 잘못한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하나은행의 후배들을 만나면 "과거에 비해 하나은행이 엄청나게 커진 만큼 그에 상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지요. 국가 전체를 놓고 은행이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고 열심히 당부한다.



우리금융지주 시절: 한국 최초의 금융지주 선장이 되다

해도(海圖)도, 나침반도 없는 출항

내가 나의 소임을 다하고 우리금융지주회사를 떠나던 날, 직원들 앞에서 했던 이임사 첫마디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3년 전 망망한 바다에 해도(海圖) 한 장 없이 오직 과거의 실패를 가득 싣고 금융인의 자존심을 되찾아보겠다는 의욕으로 뭉쳐서 우리는 이 땅에 아무도 해보지 않은 금융지주회사라는 배를 띄웠습니다."


지주회사의 회장 선임 통보를 받은 다음 날, 나는 해도도, 나침반도 없이 출항채비를 하는 배를 둘러보는 심정으로 지주회사 설립준비사무국으로부터 그동안 진전된 사항을 보고 받았다. 본격적인 구조개편에 돌입하자 그때부터 사사건건 마찰이 시작되었고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자회사 편입과 통합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던 은행장들도 평소의 얘기와는 달리 막상 자신의 자리가 문제가 되자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심지어 교묘한 방법으로 통합 등의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는 은행장들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각 은행별로 노조들도 전부 반기를 들었다.


지주회사 직원들이 본점 건물에 사무실을 차리려고 하자 한빛은행 노조원들이 머리띠를 두른 채 건물 입구를 봉쇄하고 "왜 꼭 우리 건물에 들어오려고 하느냐? 지주회사는 우리와는 별도 회사다"며 출입을 막았다. 오랜 실랑이 끝에 어렵게 노조와 타협하고 한빛은행과 한 지붕 아래 동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사무실 문제로 불거진 갈등을 겪으면서 앞으로 사업구조개편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 얼마나 더 험난한 폭풍우의 바다를 건너야 할지 미리부터 그 고난이 짐작되고도 남았다.


세계 금융의 중심에 서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뉴욕 증시 상장이라는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맞았다. 2년 반 전, 들러리를 섰다가 신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금융지주회사를 맡았을 때 회의에 찬 눈으로 걱정해주던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떠올리고 잠시 뒤에 있을 뉴욕 증시 상장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뉴욕 증시 상장을 준비할 때 미친 짓이라고 한 사람들의 빈축을 귓전으로 흘리고 나는 앞만 보고 달렸다.


우리금융지주를 맡아 맨 처음 큰 틀의 밑그림을 구상할 때 나는 뉴욕 증시 상장을 최종 목표로 세웠다. 엄청난 공적자금이 투입된 지주회사에 대한 시중의 불신과 의혹을 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뉴욕 증시 상장이라는 어려운 고지에 올라야 했다. 나는 그 길만이 공적자금 투입이라는 국민 부담과 지주회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나는 인간의 덕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용기라고 생각한다. 용기가 없으면, 행동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금융지주는 뉴욕 증시 상장을 목표로 그룹 전체의 부실자산들을 모두 처리했다. 부실 금융회사가 뉴욕 증시 상장이라는 프로세스의 벽을 통과하기는 매우 어렵다. 상장 덕분에 우리금융지주가 더 이상 부실 금융기관이 아니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재무설계와 메세나 운동: 나의 마지막 의무와 봉사

한국FP협회, 금융 전문가를 기르다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이 있고,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애초부터 자신이 원하는 일에 발을 들여놓고 열성적으로 매진하여 그 분야의 정상에 오르는 것은 개인의 운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사회로부터 커다란 혜택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 나는 농업은행 입사와 함께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후 50년 넘게 금융계에 몸담으면서 최고경영자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사회로부터 받은 큰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어떻게 우리 사회에 되돌려줄 수 있을까? 심사숙고 끝에 내가 결정한 계획은 두 가지였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 금융계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이 문화를 지원하는 메세나 운동을 돕는 일이었다.


나는 금융계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다가 우리나라가 금융선진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필요하고 시급한 것이 금융전문가를 길러내는 인재교육임을 깨달았다. 세상 모든 일이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지만, 금융이야말로 정말 사람이 중요하다. 나는 금융전문가를 길러내는 인재교육을 하려면 우선 기존의 교육방법과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FP협회 설립에 앞서 구체적으로 CFP 제도를 국내에 도입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임의단체인 한국FP협회를 만들어 CFP 보드에 가입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준비되지 않은 장수는 위험하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고 있는데, 이는 국가와 사회, 개인을 통틀어 하나의 커다란 리스크다. 우리나라만 해도 지금은 고령화사회이지만 갈수록 고령화가 빠르게 심화되어 고령사회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반면 국가와 개인 차원의 고령화에 대한 준비는 미흡한 실정이다. 삶은 치열한 경쟁이고 전쟁이다. 직장을 떠나 은퇴했다고 삶이 멈추지는 않는다.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장수는 위험한 것이다.


한국FP협회를 만들 때 첫 번째 목표가 금융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이었지만, 지금은 국민계몽운동 차원에서 FP보급에 힘쓰고 있다. 안정적인 가정경제 설계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재무설계에 대한 교육을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돈의 관리에 대해서 FP협회가 앞장서서 교육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금융문화가 성숙하고 재무관리에 대한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져서 그 결과 자신의 역량에 맞게 안정된 삶을 살도록 돕는다면, FP협회가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것이다.


행복한 돈 심부름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으로서 나는 기부자를 찾아다니며 "좋은 데 돈을 쓰십시오" 하고 권유하는 일이 처음에는 좀 미안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기부를 하면 금전적 이득인 이자는 챙길 수 없지만, 대신 스스로 떳떳하고 만족스럽고 그로 인해서 보람을 느낄 기회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경험은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기부자들을 찾아다니며 좋은 곳에 돈을 쓰라고 권유했다.


1년 8개월간 모금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느낀 점은 우리나라는 정기적인 기부보다 경기가 어렵거나 자연재해 등이 생길 때 하는 동정성 기부가 많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 비해 유산기부와 고액기부가 미약한 편인데, 나는 기업인들과 자산가들의 기부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소득공제 비중을 높이는 식의 제도 개선이 절실히 필요함을 알았다.


간혹 경제적 여유가 없어 기부를 하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물질적인 기부만이 기부의 전부가 아니다. 나눔은 우리 사회를 보다 행복하게 만드는 일종의 사회투자다. 거기에 돈 말고도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자원봉사로, 재능이 있는 사람은 재능봉사로 자신이 가진 것을 사회를 위해서 내놓으면 그것이 바로 기부이자 나눔이다. 기부자들 대부분은 기부 후에 "마음이 참 편하고 기부하길 잘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나도 "당신들 때문에 모금회 일을 즐겁게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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