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3세 대해부
삼성그룹
한국 대표기업 ‘삼성’
일제시대인 1938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가 삼성상회를 설립하면서부터 삼성의 역사는 시작됐다. 이 회장의 삶 그 자체가 한국의 근대사이자 경제발전의 역사인 셈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집계 기준 삼성그룹 계열사는 2010년 말 91곳이다. 삼성그룹 자체적으로는 매년 연말 사장단인사를 언론에 발표하는 28곳 가량을 주요 계열사로 본다. 삼성그룹은 크게 전자, 금융, 중화학, 독립 분야의 사업을 영위한다.
삼성그룹은 한국경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2009년 우리나라 총수출이 3,635달러인데 이 가운데 869억 달러를 삼성그룹 계열사가 올렸다. 전체의 24%를 기록한 것이다. 증권시장에서의 시가총액 비중도 23%(삼성 119조 3,000억 원, 한국 881조 8,000억 원)를 차지했다. 2009년 기준으로 삼성이 올린 매출 220조 원은 한국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1% 수준이다.
이재용 사장, 경영철학 키워드는 ‘인재’
이재용 사장은 2001년부터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 발령을 받고 출근하면서 “삼성이 자본시장에서 저평가되어 있는 상황에서, 중·장기적으로 경영전략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해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최대화시켜 나가는 데 일조할 계획이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건희 회장이 이재용 사장에게 강조한 것은 ‘인재중시’다. 이건희 회장 자신도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하면서 무척 바쁜 와중에도 일본으로 전화를 걸어 컴퓨터를 활용한 디자인과 제조(CADㆍCAM) 전문가인 엔지니어들에게 삼성에서 함께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스카우트 제의를 할 정도로 인재영입에 지극한 정성을 쏟았다. 사실, 이건희 회장이 이병철 선대회장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경청이었다. 부회장으로만 16년을 지낸 이건희 회장은 누구보다도 삼성의 사업에 대해 잘 알 수 있겠지만 늘 남의 얘기를 귀담아 들으라는 뜻으로 선대회장은 목계(木鷄)를 선물했다고 한다.
이 사장의 사무실에는 중국 고전 『삼국지』의 한 장면을 담은 그림이 걸려 있다. 촉나라를 세운 유비가 당대 최고의 책사로 알려진 제갈공명의 집을 세 번씩이나 찾아가 그를 군사(軍師)로 초빙하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좋은 인재를 널리 구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고 노력하는 모습, 바로 이건희 회장이 장남인 이재용 사장에게 준 메시지를 가장 극명하게 담고 있다. 한 명의 천재가 1,000명, 1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 회장 자신의 발언과 맥이 닿아있다. 그런 만큼 이 사장은 우수인재를 중시하고 이 인재를 불러 모으는 것에 관심이 지대하다. 우수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이다. 최고의 인재를 데려와 최고의 대우를 해주면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삼성 오너가의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셈이다.
이 사장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삼성의 해외거래처 최고경영진과의 관계 증진이다. 이들을 만나 새로운 사업기회를 타진하거나 기존 사업에서의 협력 확대 등을 논의한다. 이 사장은 삼성 스마트TV 사업의 성공적인 비즈니스 인프라 구축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뛰었다. 3DTV와 스마트TV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우수 콘텐츠 확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콘텐츠 회사들과의 적극적인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이 사장은 글로벌사업에도 힘을 쏟아왔다. 삼성전자가 2010년 말 중국 정부로부터 현지 액정표시장치(LCD) 공장 설립 승인을 받은 배경에는 그의 공이 컸다. 부사장 시절인 2010년 2월 말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당시 최지성 대표이사, 중국 본사 박근희 사장 등과 함께 시진핑 중국 국가 부주석을 면담한 데 이어 공장 설립 승인이 나기 직전인 2010년 10월께에도 시 부주석을 면담했다.
이 사장에게 맡겨진 미션은 ‘존경받는 삼성’ 구축이다. 사람들의 삶에 편하고 도움이 되는 제품을 개발해 인류사회에 공헌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창업을 통해 삼성을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키우고 이건희 회장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면 이재용 사장에게는 삼성을 글로벌시장에서 존경받는 기업으로 키워내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다. 이 사장이 이 같은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삼성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어떤 경영 수완을 보여줄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린다.
* 출생: 1968년
* 학력: 경기초등, 청운중, 경복고, 서울대 동양사학 학사, 일본 게이오대 경영학 석사, 미국 하버드대 경영학 박사 수료.
현대차그룹
한국 자동차의 역사 ‘현대차그룹’
현대자동차그룹은 1967년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설립한 현대자동차를 핵심 기업으로 하고 있다. 모기업이자 그룹의 주력회사인 현대자동차는 1967년 설립됐다. 당시 미국의 포드자동차와 기술계약을 맺고 포드 코티나를 조립 생산해 판매한 것이 현대자동차 1호 자동차다.
2000년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옛 현대정공) 등 10개 계열사로 출발한 현대차그룹은 2011년 현대건설을 인수하면서 계열사 50개, 총자산 126조 원, 임직원 수 18만 4,000명으로 성장했다. 2011년 현재 자산 기준으로 공기업을 제외할 경우 현대차그룹은 삼성그룹에 이어 2위다. 자동차업계 글로벌 순위에서 현대·기아차는 판매량으로 5·6위권에 속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그룹의 후계구도를 둘러싼 정주영 회장 아들 간의 다툼인 소위 ‘왕자의 난’ 직후인 2000년에 설립됐다. 차남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현대차, 기아차, 모비스, INI스틸(구 인천제철), 현대캐피탈 등을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해 현재의 토대를 만들었다.
자동차 특종 메이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정몽구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 부회장은 현대그룹 경영권을 놓고 아들들이 다툼을 벌인 소위 ‘왕자의 난(2000년)’이 있기 직전인 1999년 말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아버지 부름을 받고 본격적으로 현대자동차에서 일하기로 한 것이다. 처음 받은 보직은 현대차 자재본부 구매실장. 직급은 이사대우였다. 자동차처럼 수만 개의 부품을 조립하는 산업의 경우 구매 분야는 회사의 생존을 좌우하는 핵심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이곳에서 자동차산업의 큰 그림을 그리기를 기대한 것이다. 정 부회장은 이곳에서 나사 하나, 케이블 하나까지 자동차 부품을 죄다 외울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정 부회장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다. 상무(2001년), 전무(2002년), 부사장(2003년) 등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정 부회장은 입사 6년 만인 2005년에 기아차 사장으로 승진하며 기아차 경영을 맡게 됐다. 후계자에게 일단 일을 맡기고 이를 통해 경영 자질을 검증하는 현대그룹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정 부회장은 ‘디자인 경영’을 선언하며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차 디자인담당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이를 발판으로 정 부회장은 적자 상태이던 기아차를 흑자로 돌려세웠고 2010년에는 매출액과 영업이익, 당기순이익은 물론 판매대수와 글로벌 시장점유율 등에서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기아차의 중국 제2공장, 슬로바키아 공장, 미국 조지아 공장과 같이 굵직굵직한 해외 프로젝트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정 부회장은 2009년 8월,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현대차로 입성했다. 2010년에는 등기이사로도 선임되며 경영권 승계에 한걸음 더 다가갔다.
정의선 부회장의 경영능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다. 만년 적자 상태인 기아차를 성공적으로 회생시켰고 현대차를 글로벌 자동차업계가 주목하는 회사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인식도 많다. 아버지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룹 전체의 키를 쥐고 움직이기는 시기상조라는 지적이다.
정의선 부회장의 과제는 아버지가 일궈낸 글로벌 5∼6위권 업체 위상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글로벌 1,000만 대 생산·판매 체제를 갖춰야 하고 전기차 등 친환경차 개발에서도 선도적인 입지를 다져야 한다. 향후 자동차·철강·건설의 삼각체제로 재편되는 그룹에서 계열사 간의 시너지를 높이는 것도 정 부회장의 몫이다. 이를 위해 아버지 세대의 경영진을 점차 자기 세대의 사람으로 바꿔 나가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 출생: 1970년
* 학력: 구정중, 휘문고, 고려대 경영학 학사, 미국 샌프란시스코 MBA
LG그룹
‘최초’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LG
LG그룹은 우리나라 최초로 플라스틱산업과 전자산업을 개척해 산업에 혁명을 일으키고 중화학산업으로부터 전자, 서비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영역에서 경제발전에 기여해왔다. LG는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이 1947년에 락희화학공업사를 창립함으로써 잉태되었다.
‘21세기 세계 초우량기업’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적인 기업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아이덴티티를 만들 목적으로 1995년 1월 1일을 기해 그룹명칭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꿨다. 이를 통해 본격적인 세계화 드라이브에 시동을 거는 한편 2월 2일에는 구자경 회장의 뒤를 이어 구본무 회장이 취임함으로써 제2의 경영혁신을 견인하는 새로운 LG시대를 열었다.
LG는 1997년 말부터 시작된 IMF 외환위기 때 ‘선택과 집중’이라는 기조 아래 단계적 구조조정 방향을 설정했다. 특히 LG는 2000년 7월 계열기업 간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출자관계의 재편에 들어갔다. 즉, 지주회사가 계열기업의 지분을 소유하고 계열기업 간 출자관계는 해소해 나감으로써 출자구조를 단순화, 수직계열화해 나가는 것을 골자로 한 ‘지주회사체제’로의 전환을 발표한 것이다. 이를 통해 2003년 3월 국내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체제를 출범시켰다.
2005년 1월 유통, 에너지, 서비스사업 등 14개사가 GS그룹으로 계열분리를 완료함에 따라 LG는 ‘전자·화학 중심의 글로벌 리딩기업’으로 재도약하는 데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독한 실행력’ 강조하는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LG전자는 2010년 스마트폰 대응 실기에서 비롯된 휴대전화 사업 악화로 실적 부진의 위기에 빠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던 LG그룹이 꺼내든 카드가 당시 LG상사를 맡고 있던 구본준 부회장이다. 2010년 9월 17일 남용 부회장이 LG전자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나고 구 부회장이 새 사령탑으로 들어선다고 전격 발표한 것이다.
구본준 부회장이 취임 후 직원들에게 가장 많이 주문한 것 중에 하나가 ‘독해질 것’이다. 그는 2011년 초 “옛날 LG전자는 강하고 독했는데 그 부분이 많이 무너진 게 안타깝고 그런 현상이 품질 저하로 이어졌다"며 “독한 DNA를 가진 회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취임 후 구호를 패스트(Fast), 스트롱(Strong), 스마트(Smart)로 정했다"며 “이는 경쟁사보다 빠르게 준비한다는 뜻과 강하고 독한 실행력, 스마트한 일처리 등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구 부회장은 현장을 중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스스로 “취임 후 현장을 부지런히 다녔다"고 얘기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현장을 찾고 해외법인을 가더라도 공장부터 들른다. 품질도 그의 주된 관심사다. 매일 아침 품질과 관련된 보고를 직접 받고 챙긴다.
구 부회장은 그룹 내에서 최고의 ‘전자통’으로 통한다. 그는 LG 입사 후 LG전자, LG반도체, LG필립스LCD 등 전자 분야에서 25년간 일하며 그룹 최고 전자통으로 불려왔다. 그는 전자계열사를 거치는 동안 적극적 투자를 바탕으로 시장 선두를 노리는 공격적 경영으로도 유명했다.
구 부회장의 가장 큰 당면과제는 ‘LG전자의 부활’이다. 스마트폰을 비롯해 LG전자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들을 하루 빨리 해결하고 실적을 회복시켜야 한다. 취임 후 LG전자의 체질강화를 위한 시도를 해 온 만큼 이를 바탕으로 실적을 내야 한다. LG전자의 미래를 맡길 신사업을 키우는 것도 그의 몫이다.
* 출생: 1951년
* 학력: 경복고, 서울대 계산통계학, 미국 시카고대 MBA
한화그룹
제조ㆍ건설 중심에서 태양광 등 신사업으로 턴하는 한화그룹
1952년 한국화약으로 출발해 성공적으로 사업 다각화를 전개해온 한화는 50개 국내 계열사와 67개 해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현재 그룹의 미래 성장 동력인 금융업을 중심으로 제조·건설, 금융, 서비스·레저 3대 사업 부문의 끊임없는 시너지 창출과 해외 시장 개척을 통해 글로벌 한화의 미래를 열어 가고 있다.
한화그룹의 근간인 제조·건설 부문은 글로벌 한화의 꿈을 실현할 핵심 원동력이다. (주)한화는 항공우주사업 등 미래 성장 동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해외 자원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 한화건설은 대규모 개발 사업과 친환경 건설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국내 대형 건설사로 자리매김했으며, 해외 플랜트 사업 분야에서도 약진하고 있다. 한화케미칼은 신소재·태양광에너지 등 신성장 동력을 적극 개발하며 글로벌 화학 선도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한화는 이미 세계 최대의 단일 시장인 미주 지역을 비롯해 무한한 잠재력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에 다가서고 있는 중국, 자원 부국으로 각광받는 중동지역과 러시아를 필두로 한 동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글로벌기업의 꿈을 실현해 가고 있다. 한화는 각 사업 부문별 해외 사업 성과를 더욱 구체화하는 가운데, 그룹사의 해외 동반 진출로 시너지를 극대화할 것이다.
태양광 사업 주도하는 한화 후계자 김동관 차장
한화그룹은 중국 태양광업체를 인수해 태양광 사업을 신수종으로 키우고 있다. 한화그룹은 중장기적으로 폴리실리콘에서 태양전지 모듈까지 일괄생산하는 수직계열화를 추진하고 있다.
김승연 한화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 차장은 2010년 8월 인수한 세계 4위의 태양광 셀 모듈 생산업체인 한화솔라원의 등기이사로 등재돼 있다. 이 회사는 미국 나스닥에 상장돼 있다. 한화솔라원은 현재 중국 치둥에 태양전지 500MW(메가와트)와 모듈 900MW 규모의 생산설비를 갖춘 세계 4위 규모의 태양광 회사다. 2011년 말까지 태양전지 1.3GW(기가와트), 모듈 1.5GW까지 생산규모를 확대한다는 방침에 따라 지속적인 투자를 전개하고 있으며, 김 차장은 이 회사의 이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김동관 차장은 김승연 회장의 해외일정을 직접 수행하고 한화그룹의 신사업인 태양광 사업 부문을 사실상 전담하고 있다”며 “부드럽고 섬세한 스타일로 직원들에게도 인기가 높다”라고 말했다.
김 차장은 아버지를 수행해 다보스포럼 등 해외 일정을 챙기고 있다. 비즈니스 출장에서 주요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난 2010년 1월 군 복무를 마치고 곧바로 한화 차장으로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 출생: 1983년
* 학력: 구정중, 미국 세인트폴고,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 학사
효성그룹
효성, 중공업ㆍ풍력 날개 달고 비상
효성은 섬유, 산업자재, 중공업, 화학, 무역, 건설, 정보통신 등 7개 PG(Performance Group), 23개 PU(Performance Unit)의 사업 구조를 이루고 있다. 매출의 70% 이상이 수출인 만큼 미국, 중국,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 50여 곳에 제조법인과 무역 사무소를 운영,글로벌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효성은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타이어코드, 스판덱스를 비롯해 글로벌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초고압 중전기 등 주력 제품을 중심으로 시장 지배력을 높여나가고 있다.
효성은 글로벌 시장 확대와 초일류 기업으로의 성장을 위해 회사의 미래 성장 사업을 지속적으로 육성해 나가고 있다. 2001년부터 강원도 풍력발전단지에서 실질적인 운영을 통해 운영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한국남부발전, 한국동부발전 등과 연계하여 제주도, 강원도 등 국내 대규모 풍력발전단지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신재생 에너지 사업에 활용되는 스마트그리드 사업도 본격화했다. 스마트그리드(차세대 지능형 전력망) 사업은 전력기술에 IT를 접목해서 전력 공급자와 소비자가 양방향으로 실시간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하는 전력망 사업으로, 효성은 2010년 한국전력공사에 국내 최초로 자체 기술 개발한 스태콤(STATCOM) 2기를 공급했다. 또한 전기차 모터와 충전 사업에도 진출, 차세대 전력 산업 선도를 위한 사업 본격화를 추진 중이다.
이외에도 효성은 2009년 자체기술로 개발한 고강도 섬유인 아라미드 원사 사업, TV 모니터, 노트북, 휴대전화 등에 사용되는 LCD 부품인 편광판을 보호해주는 필름인 TAC(Tri Acetyl Cellulose) 필름 사업, LCD의 중요 소재인 광학용 폴리에스터 필름 사업, 태양전지용 필름 등의 산업용 필름 사업 등도 중요한 신성장동력 사업으로 보고 이들 사업의 본격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글로벌 전략가인 효성가 장남 조현준 무역PG장 겸 섬유PG장
조석래 효성 회장의 장남 조현준 사장은 1997년 효성 입사 후 1997년 선진적인 경영시스템인 PG·PU 시스템을 도입하고 1998년에는 그룹의 주력 4사 합병이라는 과감하고 혁신적인 구조조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그가 3형제 중 가장 결단력이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국내 최초로 전 사원 연봉제를 선진적으로 도입하고 직무분류에 따른 인사평가 시스템을 구축했다. 변화와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기 위해 체인지 리더 프로젝트를 수립하는 등 신 경영 전략의 도입과 포트폴리오 전략 수립, ERP와 같은 경영 시스템의 개선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수행했다.
섬유 부문은 2007년 조 사장이 PG장을 맡아 흑자로 전환시킨 이래 해마다 큰 폭의 수익개선을 이루어 왔다. 특히 스판덱스 부문에서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는 물론 유럽(터키)까지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등 글로벌 생산 체제를 갖추고 유럽의 고급시장과 신흥 섬유시장을 적극 공략해왔다. 효성의 스판덱스 부문은 현재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조 사장은 차세대 신 성장동력 발굴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조 사장은 특히 IT 서비스와 모바일 서비스, LED 사업에 관심을 갖고 사업을 이끌고 있다. 이들 IT 사업들은 조 사장의 IT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과 관심, 오랜 기간 동종업체에 대한 연구 분석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그룹의 정보통신 계열사들과의 시너지도 확대해 나가고 있다.
* 출생: 1968년
* 학력: 보성중, 미국 세인트 폴스고, 미국 예일대학 정치학과, 일본 게이오대 법학대학원 정치학부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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