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백년기업을 꿈꾼다

   
매일경제 증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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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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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 책 소개
히든 챔피언들의 파란만장한성장 스토리, 최고의 애널리스트들이 분석한 기업들의 현재와 미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 협력’이라는 화두가 한 동안 산업 현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고 그룹 총수들이 화답을했다. 모양새를 넘어 실제 현장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가 조금이라도 개선됐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한국 경제의 선순환을 위해 정말 다행스런일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에 삼성전자 같은 기업이10개만 있다면 한국의 위상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은 히든 챔피언들이 나란히 삼성전자, 현대차와 같은 ‘빅 챔피언’ 반열에오르기를 바라며 만들어졌다. 히든 챔피언을 벤치마킹의 모델로 삼아 이제 씨를 뿌리려는 예비창업가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일선 기자들이 현장을누빈 기록을 모았다.

■ 저자 매일경제증권부
매일경제 증권부는 펄떡이며 살아 숨 쉬는 여의도 증시에서 기업들의 숨은 가치를 발굴해내는 ‘탐험가’다. 매일새벽부터 장이 끝나고 해가 저물 때까지 시장을 면밀히 살피며 우량 종목 발굴에 여념이 없다. 투자자들에게 당장 고수익을 안기는 것도 좋겠지만,대대로 물려줘도 좋을 만큼 뛰어난 기업을 찾아서 독자들에게 한발 먼저 알리는 것이 매경 증권부의 영원한 바람이고 목표다. 우리 경제가‘숲’이라면 이를 이루는 푸르른 ‘나무’는 바로 녹색기업이다. 빽빽한 기업의 숲 가운데 탄탄한 재무구조와 사업구조를 지닌 업체를 엄선해 이 책에담았다. 

증권부 임규준 부장과 설진훈 차장이 총괄하고,기업을 철저히 파헤치는 재무팀(이소아, 전범주, 서유진 기자), 미래의 주역들을 발굴하는 코스닥팀(문수인 기자), 간접투자의 나침반 구실을 하는펀드팀(김동은 기자)이 집필에 참여했다.

■ 차례
PART 01 글로벌 기업을 두려워 마라
“기초기술부터 확보해라. 세계가열린다” 김병규 아모텍 대표
‘골리앗만 골라 공략한다’ 나우주 엘엠에스 대표
일본 반도체사도 배우고 싶어하는 기업 이진효 알에프세미대표
글로벌 기업의 러브콜이 쏟아지는 기업 정지완 테크노세미켐 대표
‘체성분분석기 세계표준을 노린다’ 차기철 바이오스페이스대표
첨단 레이저장비 석권한 ‘레이저 마니아’ 성규동 이오테크닉스 대표

PART 02 시장을 지배하라 
세계최대 단조기업 일으킨 섬마을 선생님 허용도태웅 회장
‘위기는 공격적 투자의 호기’ 윤성덕 태광 대표
극세사에 혼을 불어넣은 작지만 강한 한 회사의 도전기 이영규 웰크론대표
처음부터 글로벌 엔터시장을 노렸다 김영민 에스엠엔터테인먼트 대표
라이터 기름을 팔다 세계 최고의 부탄가스 회사로 현창수 태양산업대표
필기인식기술의 작은 거인 도정인 디오텍 대표
“전세계 감시카메라는 우리가 맡는다” 김영달 아이디스대표

PART 03 사양산업은 있어도사양기업은 없다 
대한민국 석판산업의 개척자 손열호 TCC동양 명예회장
세계 2위의 줄자기업 강동헌 코메론대표
인형으로 세계를 사로잡다 노희열 오로라월드 회장
가드레일 시장 장악한 가출청년 한상원 동아에스텍 회장
만 원짜리 모터로세계를 움직인다 이준호 에스피지 대표
주조산업의 자이언트 최우식 삼영엠텍 대표

PART 04 신뢰와 끈기를 잃지 마라 
“품질이 안되면 내놓지 마라” 박원희세코닉스 회장
믿음과 뚝심의 경영 김성문 디아이씨 회장
30년 끈기와 집념의 경영인 황원 삼영이엔씨 대표
거북이를 닮은‘백년기업의 꿈’ 이상배 일진에너지 대표
소리의 한 우물을 판 기업 이덕수 네오피델리티 대표
카지노 모니터 글로벌 점유율 52%이한구 코텍 회장

 





나는 백년기업을 꿈꾼다

글로벌 기업을 두려워 마라
“기초기술부터 확보해라. 세계가 열린다” · 김병규 아모텍 대표

아이폰4, 갤럭시 S 등 세계적 브랜드들이 경쟁적으로 출시하는 스마트폰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 같은 스마트폰의 핵심부품을 국내 중견기업이 납품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많다. 바로 ‘칩 바리스터’ 분야의 글로벌 톱 메이커인 아모텍이 그 주인공이다.


신소재를 기반으로 첨단부품소재사업을 영위하는 아모텍은 이미 국내외 유관 기업이 인정하는 업체다. 국가기관인 KOTRA가 인증하는 보증브랜드로 선정되는 영광도 차지했다.


아모텍은 주력 제품은 각종 IT기기의 피뢰침 역할을 하는 칩 바리스터다. 칩 바리스터는 전자기기 내부에서 사람과 IT기기가 접촉하는 순간 발생하는 순간전압 1만 5,000V 이상의 정전기로부터 반도체를 보호한다.


아모텍은 2000년 칩 바리스터 생산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세계 시장점유율 1위로 올라섰다. 머지않다 800억 원 규모인 전 세계 시장 중 27%를 장악할 전망이다. 앞선 기술력으로 일본 업체들이 나눠 갖고 있던 시장을 순식간에 빼앗은 것이다.


문제는 칩 바리스터 시장의 성장 속도가 차차 둔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부품 회사로 도약을 노리는 아모텍을 만족시키기에는 시장 규모가 작다. 그래서 아모텍은 BLDC모터 분야로 눈을 돌렸다. BLDC모터는 일반 모터에 비해 전력 소모가 20~30% 정도 줄어드는 반면, 힘은 더 세고 회전속도를 제어하기도 쉬운 차세대 지능형 모터다. 세계 시장 규모도 3조 원 정도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모텍을 이끄는 김병규 대표이사는 “지난 1998년 일본의 한 전시회에서 출품된 BLDC모터를 보고 느낌이 와 개발을 시작했다”며 “얼마 전부터 월풀과 하이얼에 세탁기용 모터를 납품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BLDC모터 양산을 준비한 아모텍은 그 결과 미국, 일본, 독일, 중국 등에서 특허를 인정받았다. 일본의 한 대형 전자업체가 아모텍 측에 기술 공동 개발 의향을 물어온 것도 기술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자동차용 부품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먼저 휴대폰 업체에 납품하던 RF(Radio Frequency) 안테나 기술을 활용한 자동차용 블루투스 안테나가 그것이다. 미국 크라이슬러에 납품되는 것을 비롯해 독일 보쉬와 미국 델파이 등 세계적인 자동차 부품회사에도 제품을 공급한다. 김 대표는 이에 그치지 않고 BLDC모터 기술을 자동차 부품에 사용할 수 있도록 완성차 업체들과 협의 중이다.


이렇듯 소리 없이 강한 국내 중견기업 아모텍의 선전에는 공학도 출신 경영자이자 현 코스닥회장을 겸임하고 있는 김 대표의 역할이 컸다. 아모텍의 창업주이기도 한 그는 회사를 창업한 지 20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2009년 매출액 757억 원과 당기 순익 32억 원의 우량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진학하면서 창업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전공인 금속재료공학을 부품소재사업에 응용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당시 부품 소재를 만들 수 있는 국내 기업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있는 부품회사들도 대부분 재료를 수입해 조립하는 수준이었죠. 제 전공을 잘 살리면 사업 기회는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985년 박사학위를 마친 뒤 주식회사 ‘유유’라는 전자부품회사 연구소에 입사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무모해 보였던 이 선택은 그에게 많은 것을 돌려주었다. 먼저 정부가 주도하는 각종 연구개발 프로그램에 참가해 산업 전반에 걸친 동향과 발전 방향을 보는 시야를 갖추게 해 주었다. 또 정부 부처 및 학계 관련 인사와의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 사업 개발 및 운영에 꼭 필요한 귀중한 자산을 얻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렇듯 배움의 기회로 가득 찼던 연구소 생활 10년을 통해, 김 대표는 기술의 축적, 세일즈와 마케팅의 중요성, 조직원 관리 노하우 등 사업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요소와 결정적인 순간에 내려지는 판단의 중요성을 체득하면서 창업의 때를 준비했다.


1994년, 김 대표는 드디어 아모텍의 전신인 (주)아모스를 설립했다. 창립 멤버인 대학교 동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전공분야인 ‘아몰퍼스(Amorphous)’ 소재를 이용한 코어부품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몰퍼스란 ‘비정질 연자성 합금’이라 해석되는 물질로 고체지만 내부 분자구조는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소재다. 자기적 특성이 매우 뛰어나 여러 분야에 부품으로 응용되는 소재로 당시는 꿈의 신소재로 일컬어지며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연구 개발에 전력할 때였다.


사업은 안정권에 접어들어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속에서도 약 80억 원의 매출을 올리게 되고 회사명도 1999년 아모텍으로 변경한다. 이 시절에 김 대표는 칩 바리스터 제품을 두 번째 주력상품으로 개발하게 된다.


“일본에서 열린 산업박람회를 둘러보던 중 칩 바리스터를 처음 봤습니다. 일본 기업인이 쌀톨 만한 부품을 보여주며 ‘이게 얼마나 비싼 건지 아느냐’고 자랑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한번 해보겠다’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하지만 일본 업체들은 기술 이전을 꺼렸고, 국내에도 칩 바리스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회사는 없었다. 제품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납품처를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모두 검증된 해외 제품을 사용하길 원했던 것이다.


바리스터 사업 초기에 아모텍은 양산 노하우의 부재로 인해 품질과 납기 지연 문제에 봉착한 적이 있었다. 이때 김 대표는 직원들을 모아 놓고 아모텍이 당면한 문제 상황에 대한 대책회의를 주재하고는 직원 모두 눈을 감도록 했다.


“아모텍의 칩 바리스터가 세계 1등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는 김 대표의 질문 직후, 얼마간의 침묵 가운데 천천히 한 손이 올라왔다. 그 손의 주인공은 칩 바리스터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연구원이었다.


김병규 대표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어린 연구원의 모습을 통해 아모텍의 칩 바리스터 사업 성공의 가능성과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아모텍의 칩 바리스터는 점차 품질과 납기 문제가 해결되어 나갔고, 오늘날 국내외 시장에서 명실상부 글로벌 리딩 컴퍼니로 성장하게 되었다.


성공적인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영인은 또 다른 꿈을 향해 다시 출발점에 서는 것에 주저함이 없게 마련이다. 김 대표는 바리스터 외에도 칩 안테나, 그리고 차세대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각광받는 BLDC모터에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또한 전 세계를 아우르는 글로벌마케팅에서도 그의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아모텍은 사업 초기부터 글로벌 인프라 확충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쳐 왔으며, 이미 아시아는 국내시장의 일부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 산둥과 칭다오에 현지 생산법인을, 각 주요도시에는 마케팅 사무소를 두어 아시아시장을 개척하고 미국과 유럽에도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글로벌네트워킹 노하우를 바탕으로 마케팅 미개척지역의 현지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시장을 지배하라
처음부터 글로벌 엔터시장을 노렸다 · 김영민 에스엠엔터테인먼트 대표

아무도 ‘딴따라’ 회사가 이렇게 잘 나갈 줄 몰랐다. 주먹구구식이었던 연예계에서 에스엠은 최초로 체계적인 인재양성 시스템과 ‘기업’ 마인드를 도입해 성공을 거운 회사다. 한때코스닥 버블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여느 엔터테인먼트회사처럼 치부됐지만 이제는 ‘차원이 다른 ’ 회사로 성장했다.


이는 주가가 그대로 보여준다. 길게 보지 않아도 된다. 2008년 8월 금융위기께 에스엠 주가는 1,000원 아래로까지 추락했다. 그 뒤로도 주가는 2,000~4,000원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같은 모습은 대중들에게 ‘에스엠도 다른 엔터테인먼트 회사와는 별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하지만 2010년부터 에스엠 주가는 갑자기 치솟기 시작했다. ‘곧 꺾이겠지’라는 생각도 잠시, 주가는 이내 1만 원을 돌파하더니 2만 원까지 넘봤다.


주가는 기업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척도다. 주가가 상승한다는 것은 기업이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다. 물론 과거에도 이 같은 흐름을 보인 적이 있었지만 최근의 모습이 관심을 끄는 것은 과거와 달리 기업의 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2002년을 끝으로 나오지 않았던 증권가 애널리스트의 분석보고서까지 나오고 있다.


김영민 대표는 “에스엠이 그간의 어려움을 딛고 기업이 제 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냐”며 “에스엠의 성장은 이제부터이고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서 우뚝 서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되기 위해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무엇이 에스엠을 이처럼 바꿔 놓았을까. 먼저 에스엠의 포트폴리오 변화에서 첫 번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에스엠은 매년 인기그룹을 배출할 정도로 가요계에서 선두주자이다. 상장 당시인 2000년부터 한 해도 에스엠 출신 가수 혹은 그룹들이 인기를 끌지 않은 적이 없었다.


상장 초기에는 한 해 동안 인기를 얻는 가수가 하나 아니면 둘에 그쳤다. 업계 특성상 고정비 지출의 비중이 커서 이들이 인기를 얻어도 벌어들이는 파이가 적어 회사 실적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특히 2000년대 초반은 음반 시장이 붕괴되던 시기였다. 당시까지 회사 매출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던 것이 음반매출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특정 가수의 인기에 기대 회사 실적을 내기란 어려웠다. 실제 에스엠은 상장 이후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영업손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2005년 이후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를 연달아 내세우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해 인기를 얻으며 활동하는 에스엠 소속 그룹들이 계속 쌓여가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8년 소녀시대가 <GEE>로 소위 ‘대박’을 내고 국민 걸 그룹으로 떠오르면서 현재와 같은 포트폴리오가 완성됐고 실적은 획기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9년에는 2001년 이후 처음으로 영업손실이 흑자로 전환됐다.


김 대표는 “현재의 회사 포트폴리오 구성에는 그간 에스엠이 쌓아온 노하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면서 “이는 다른 엔터기업과 비교할 수 없는 에스엠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에스엠이 초기부터 주력한 소속 가수들의 해외 진출 전략도 최근 변화에 톡톡히 한몫 했다. 해외 진출은 여러 포석이 깔린 전략이다. 일단 세계무대를 겨냥한다는 것은 더 큰 시장을 노리고 들어간다는 것. 성공을 하면 그만큼 거두는 과실이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일찌감치 일본 무대에 진출한 보아, 동방신기가 대표적인 예다. 보아와 동방신기의 일본 진출 성공은 에스엠의 매출 영역 확대에 기여했다. 여기에다가 이들의 활동을 통해 한류를 계속 살려나갈 수 있다는 점은 국가 브랜드를 높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무형의 이익도 가져다준다.


회사 이익기여도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해외에서 발생한 매출은 회사 이익으로 들어오는 비중이 국내 매출에 비해 상당히 트다. 해외 매출이 많으면 많을수록 회사의 이익은 좋아진다. 2009년 회사가 흑자전환한 것도 해외 매출 비중이 확 늘면서 가능했다.


소녀시대가 국내 인기를 발판으로 일본 시장에 진출하는 것도 이런 현실이 깔려 있다. 소녀시대의 일본 진출은 이미 시장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김 대표는 “에스엠은 다른 회사에 비해 음반 매출 비중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장 폭은 그리 높지 않은 게 현실”이라면서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큰 폭의 성장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각 부문별 매출 비중도 상장 초기엔 음반 비중이 높았으나 최근에는 해외 로열티, 디지털 음원 등으로의 포지션이 점차 확대되는 등 많이 바뀌었다. 디지털음원의 경우 스마트폰 등 새로운 디지털 기기의 확대에 따라 앞으로 더 큰 성장세가 기대된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다음으로 에스엠을 변화시킨 주요 원인으로는 2005년 일어난 경영상의 변화를 들 수 있다. 2005년 당시 CEO였던 이수만 씨는 현 김영민 대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프로듀서 직으로 물러났다. 이는 두 사람 모두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당시 시장에서는 ‘에스엠’ 하면 ‘이수만’으로 통하던 시기였다. 그가 CEO직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시장에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김영민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이수만’이란 큰 그림자 아래에서 무늬만 CEO인 존재로 인식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같은 변화는 성공적이었다. 당시 두 사람은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철저하게 역할을 분리했다. 이 프로듀서는 회사의 핵심 자산인 가수 양성 등 문화 콘텐츠의 기획을 전담하는 쪽을 맡았다. 사실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트렌드를 놓친다면 핵심역량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타고난 감각을 지닌 이 프로듀서가 맡았고 지금은 시대를 선도하고 있다.


김 대표는 이를 바탕으로 한 비즈니스 영역을 맡았다. 이 프로듀서가 만든 문화 상품으로 수익을 내는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의 기여도를 따로 떼어내 논하기는 힘들지만 소속 가수들이 대중문화를 이끌어 나가고 있고, 회사는 탄탄한 실적을 내는 기업으로 변모했으니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은 충분히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금의 결과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회사를 변화시키기 위한 시도가 성공한 후 또 다른 목표인 ‘아시아 넘버원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위해 이들은 지금도 끝없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이 프로듀서는 문화 트렌드를 이끄는 기업으로서의 역할을 유지하기 위해 글로벌 시장 곳곳을 찾아다니고 있다. 김 대표는 이를 수익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새로운 사업 발굴에 여념이 없다.


사양산업은 있어도 사양기업은 없다
세계 2위의 줄자기업 · 강동헌 코메론 대표

이사를 가거나 신체검사를 할 때 아주 가끔씩만 쓰게 되는 줄자. 이런 제품을 만드는 회사라고 하면 미래 성장성에 대해 의심을 살 만도 하다. 그러나 국내 1위 줄자업체 코메론의 강동헌 대표는 이런 선입견을 단호히 거부한다.


“사양산업은 있어도 사양기업은 없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수출 덕분에 사세를 확장했듯 금융위기 속에서 개발한 고부가가치 제품이 이익의 질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코메론은 줄자와 냉간압연 등 정밀기기 분야 전문업체다. 한국산 제품의 강점을 세계시장에 떨치고 있는 강소(講所)기업이다.


1963년 창업했으니 50년을 바라보고 있다. 절연테이프를 제조하는 한국엠파이어공업사에서 출발해 1974년 계량계측기를 제조하는 회사로 업종을 전환했다. 1978년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줄자’라는 의미를 품은 독자브랜드 ‘KO(KOrea)+ME(MEasure)+LON(화학섬유접미어)’을 사용하고 있다. 1983년 한국도량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법인으로 전환했으나 1990년 1월 코메론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선친의 뜻을 이어받은 2세 경영인인 강동헌 대표는 고교 졸업 후 야간대학을 다니면서부터 회사 일에 매진해 왔기 때문에 회사를 키워왔다는 자부심이 창업자 못지않다. 유리섬유나 녹슬지 않는 스테인리스를 사용한 줄자, 자석이나 롤러가 부착돼 한 손으로 사용하기 편리한 줄자 등 신제품 개발 과정에 늘 함께했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전에 대일금속과 대동강업을 인수하면서 압연사업을 강화한 것이 신제품 개발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한 동력이 됐다. 외환위기는 코메론에게 위기이자 기회로 큰 전환점이 됐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불과 몇 달 전에 코메론은 10년 이상 OEM 제품을 공급하던 미국의 거래처와 관계를 청산하고 직접 현지법인을 설립해 영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독점거래처 매출은 연간 500달러에 달하는 최대 고객이었다.


강동헌 대표는 “당시 대만 경쟁사와 다투다 보니 단가 인하 압력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사업을 자존심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기 살기로 도전해 보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랬는데 막상 외환위기가 닥치자 후회막급이었다. 조금만 참으면 환차익을 볼 수 있었는데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밝혔다.


당장 힘든 시절을 겪었던 코메론은 그러나 30년 노하우를 살려서 결국 2년 후에 월마트와 직거래를 트게 된다. 강 대표는 직접 판매망을 장악했을 때의 시너지 효과는 2,000만 달러에 달한다고 자랑한다.


중국에 지출할 때도 당장 안위를 찾기보다 정도를 걷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정도공구(正道工具)’로 지었을 정도다. 현지에서 경영을 하다가 잘못될 경우 적당히 공무원들을 뇌물로 무마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코메론은 모든 것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하는 것을 회사 모토로 삼고 있다. 다른 기업들의 경우 중국에서 뇌물의 악순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세무조사를 당하고 철수하기도 했다. 코메론은 장기적인 승자가 되길 원한다.


강동헌 대표가 지속가능한 기업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만큼 기업의 토대는 탄탄해지고 있다. 그래서 강 대표의 고민도 내실을 지키면서 서서히 사업을 확장하는 데 있다.


코메론은 미국 미터맨에서 영업권을 확보해 밀면서 측정하는 측륜(Measuring wheel)을 국내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또 코메론의 해외 영업 네트워크를 활용해 국내 중소기업 제품 수출을 지원하기 위해 2009년 8월 자동차부품 유통업체 시몬스아이케이도 인수했다.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새로운 도전을 끊임없이 펼치고 있다. 지구 구석구석에 코메론 줄자가 펼쳐지는 그날을 꿈꾸면서 말이다. 강 대표는 매년 대형 박람회에 4회씩 참가하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왔다. 수출 비중이 전체 매출의 65%에 달하는 것도 이 덕분이다. 1,300번 이상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닌 경험이 180만 마일이 넘는 항공사 마일리지로 남았다. 강 대표는 세계 줄자 시장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다.


보수적인 공구업계에서도 디자인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1990년대 초부터 디자인경영을 도입한 점도 돋보였다. 2007년 6월에는 중소기업으로는 이례적으로 제품설계와 디자인 시각디자인을 총괄하는 디자인경영연구센터를 설립하고 디자인 전문인력을 키우기도 했다. 코메론의 줄자는 까다로운 유럽인들로부터 대번에 고급스럽고 멋지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디자인 감각이 돋보인다.

그러나 다른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후발 경쟁주자가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강 대표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코메론을 모방한 제품이 종종 나오지만 기술적 장벽이 높고 시장 규모가 크지 않아 아직까지는 위협적이지는 않다”고 말한다.


코메론은 중국에 자체 공장을 설립한 후 원가 경쟁력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품질 관리를 했고 해외 바이어들에게 납품 단가를 낮추지 않았다. 그 정도로 차별화된 제품을 공급하는 것에 대해 자신이 있다는 얘기다.


줄자는 일반인에겐 낯설지만, 인테리어에서 애용하는 줄자만 해도 단가가 5,000원에서 8만 원까지 다양하다. 대형 유조선 탱크를 측정하거나, 나무 둘레를 재서 연식을 확인한다든지, 소 가슴둘레를 재는 줄자 등 상황에 따라 사용되는 전문가용 소모품 줄자가 전체 시장에서 60%를 차지한다. 가구를 직접 조립하고 만드는 DIY 문화가 확산된 선진국일수록 시장 규모도 크다. 전체 줄자 시장은 놀랍게도 매년 7%씩 성장하고 있다. 


코메론은 줄자 등 계측공구 관련 특허와 실용신안권 등록건수가 200여 건이 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줄자 관련 매출은 종합공구업체인 미국 스탠리워크스가 5,000억 원 이상 올리고 있으나 전체 사업 중 12%에 불과하기 때문에 진일보한 제품은 코메론에서 가장 먼저 개발되고 있는 실정이다.


강 대표는 “1963년 부친(고 강의조 회장)이 창업한 이래 일본 줄자업체 ‘다지마’를 꺾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5년 전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졌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는 “세계 80여 개국 환경에 맞춰 200여 종의 줄자를 공급하는 것은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면서 “세계 1위 업체 스탠리워크스처럼 관련 사업을 다각화하는 모델을 지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코메론의 2009년 매출은 전년보다 10% 가량 줄어든 340억 원 정도였지만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76억 원, 52억 원으로 전년보다 급증했다. 회사 영업이익률은 꾸준히 15%를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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