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과 싸우는 법

   
이기형
ǻ
링거스그룹
   
14000
2010�� 10��



■ 책 소개
국내시장 점유율 70%,세계 시장 점유율 25%. 창업 4년 만에 전 세계 MP3플레이어 시장을 석권한, 한국 벤처 1세대 신화로 기억되는 기업, 아이리버 이야기.기자 출신 저자 이기형은 창업자 양덕준 대표를 비롯한 창립멤버들의 인터뷰를 통해 세계를 재패했던 성공과 애플과의 전쟁에서 참패했던 뼈아픈 실패,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양덕준 대표의 끝나지 않은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한민국 벤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아이리버, 그시작이었던 양덕준은 성공 신화 뒤에서도 그와 함께 일한 동료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는 리더였다. 꿈을 가진 사람들이 비전을 가진 리더를 만나모든 것을 현실로 만든, 아이리버 신화의 성공과 실패를 살펴봄과 동시에, 누구든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희망을 이야기한다.

■ 저자이기형

서강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경제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 1999년 10월 머니투데이로 옮겨 10년을 보냈다.2010년 초 "온라인총괄부장겸 시장총괄데스크"라는 직책을 마지막으로, 15년의 행복했던 기자생활을 마감하며 『거인과 싸우는 법』을 썼다. 다른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에 비해 항상 받는 게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 『거인과 싸우는 법』을 쓰기 전, 양덕준 사장과는 개인적으로 전혀친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동안 그는 아이리버 스토리는 물론 만날 때마다 무엇이든 더 주려고 했다. 그런 양덕준 사장을 보면서저자 자신도 언젠가 멋진 선배가 될 날을 꿈꾸게 되었다.

■ 차례
프롤로그 - 스스로 거인이 된 어느 한 벤처기업의이야기

1부 디지털보다 아날로그에 가까운사람
병실에서 양덕준을 만나다

2부 신화는 시작되었다
인재들이 모여들다
브랜드를 생각하다
이노디자인을만나다
고객 지상주의를 실현하다
창의성, 자율성, 유연성을 지킨다

3부 아이리버, 길을 잃다
혁신의 적은 관성이다
애플이라는 거인과맞서다
제조업 트랩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이리버, 정체성을 잃다
작은 거인들, 아이리버를떠나다

4부 양덕준을말하다
마이 보스 양덕준
그가 일하면, 나도 일할 것이다 - 메를린 첸
스티브 잡스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창조적인 리더 - 최문규
돈보다 직원을 소중하게 여긴 CEO

5부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거실에서 양덕준을 만나다





거인과 싸우는 법


신화는 시작되었다

브랜드를 생각하다

퇴사를 하고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나오면 막막해진다. 막상 뭔가를 해보려고 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양덕준 사장이 삼성을 나와 회사를 설립하고 처음으로 한 일이 삼성과의 거래를 끊는 것이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들여 십시일반으로 3억 원의 자본금을 모아 회사를 시작한 상태에서, 그나마 회사를 굴러가게 할 현금을 끌어들일 수 있는 사업에서 손을 뗀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조치가 아니었다.


첫 번째 주문, 삼성과의 거래를 끊어라

삼성전자를 그만둔 양덕준 사장은 강호근 사장과 같이 일하기로 의기투합을 한 뒤 제일 먼저 강 사장에게 삼성과의 거래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강호근은 당시 옵티로직이라는 회사를 설립, 삼성전자 칩을 이용해 비디오 솔루션을 개발하는 등 삼성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현금을 창출할 수 있는 캐시카우 사업을 중단하라고 한 것이었다. 양 사장의 설명은 이렇다.


"삼성에 의존해서는 사업이 커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삼성이라는 회사는 정말 요구하는 게 많은 회사다. 협력사와 윈윈하는 관계가 아니다. 얻는 것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지불해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게 삼성이다. 리소스를 10배 투입해야 하나를 받을 수 있는 사업구조가 삼성과의 거래다. 그렇게 가다가는 꾸준히 돈이 들어오는 것에 안주하다가 새로운 것을 찾아보지도 못하고 굴러가게 된다. 나는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다. 기왕에 삼성에서 나온 바에야."


이 같은 행보는 레인콤이 아이리버 신화를 거둔 원동력이기도 했다. 레인콤이 다른 회사와 달랐던 점은 처음부터 브랜드를 생각하는 회사였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도 브랜드에 관심을 갖지 않던 시기였다. 강호근 레인콤텍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많은 창업자들이 브랜드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하죠. 하지만 브랜드를 만들고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모르고 하는 소리죠. 실제로 들어가면 브랜드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 브랜드를 위해서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삼성과의 반도체 칩 사업을 접고 레인콤이 시작한 일은 해외 루트를 뚫는 것이었다. 그 첫 단추가 미국 반도체회사인 시러스로직과의 칩 유통 판권 계약이었다. 이 칩을 유통하다가 MP3플레이어를 만들게 됐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MP3플레이어 샘플이 나온 것은 2001년 여름이었다. 제품 개발에 들어서면서 엔지니어들은 아예 개발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샘플이 나왔다는 소문이 나면서 많은 업체들이 레인콤을 찾아왔다. 당시 삼성전기 부장도 레인콤을 찾아왔는데 양 사장은 그 만남이 레인콤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한다. 첫만남에서부터 삼성전기 부장은 레인콤을 깔보는 태도가 분명했다. 부장은 CD 타입의 MP3 솔루션과 데모작품을 보고 나서 양 사장에게 생산에 대해 협의하고 싶다며 먼저 생산 조건을 제시하라고 했다.


"MP3플레이어 한 대당 우선 50%의 로열티를 지불하고, 이후 매출액의 4%를 주는 조건으로 하시죠. 수량이 늘어나서 20만 대 이상 팔리면 매출액의 2.5%로 낮추겠습니다."


"삼성전기는 외부에 하청을 주면서 1% 이상 로열티를 준 일이 없습니다. 이 제안을 회사에 가지고 가면 사장이 서류를 집어던질 겁니다."


양 사장은 이 말을 듣고 삼성과는 절대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삼성전기 사장은 양 사장이 삼성에서 일할 때 직접 상사로 모셨던 분으로, 서류를 집어던질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삼성전기가 레인콤을 찾아오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글로벌기업 HP(휴렛팩커드)가 MP3플레이어에 관심을 갖고 아웃소싱을 위해 레인콤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레인콤 같은 신설회사의 생산능력이나 자금력이 못 미더워서 삼성전기를 통해 레인콤에 MP3플레이어를 아웃소싱하려 했던 것이다. 양 사장은 그 부장에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보쇼, 지금 착각하고 있는데. 비즈니스를 누가 주는 거요? 1% 로열티를 주는 하청이라고 하는데, 당신이 MP3를 만드는 데 무엇을 할 수 있기에 하청이라고 하는 거요? 하청이 뭡니까? 내부에서 제품을 만들 수 있는데 고급인력 등을 투입해서 만들 가치가 없을 때 외부에 싼 가격에 아웃소싱하는 게 하청 아닙니까.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소닉블루를 통해 미국 시장에 진출하다

삼성전기 부장과의 만남이 있고 나서 양 사장은 싱가폴로 건너갔다. 싱가폴에서 MP3 사업을 하던 크레이에티브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생산한 제품을 사줄 회사가 필요했다. 회의 도중 크리에이티브는 MP3에 저장된 음악파일을 장르별로 찾아가는 방법을 자기들 특허라고 주장했다. 디스플레이의 UI(User Interface, 사용자에게 컴퓨터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설계 내용) 같은 것을 가지고 특허라고 몰아붙였다. 당시 레인콤은 특허조사 등을 할 여력이 없었다. 일이 계속해서 꼬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미국 소닉블루 부사장이 이사를 대동하고 레인콤을 찾아왔다. 국내와 아시아는 아이리버 브랜드로 팔고, 미국과 유럽에선 리오볼트라는 브랜드로 소닉블루에서 파는 조건이었다. 레인콤 개발팀은 자체 제품을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갔고, 양 사장은 홍콩지점장 시절 알고 지내던 AV컨셉으로부터의 투자를 유치해 제품을 만들 중국 공장을 마련하게 된다.


레인콤은 소닉블루와 거래를 시작하면서 매출액이 크게 늘어났다. 연말에 MP3 매출이 시작되면서 2001년 매출액이 533억 원으로 늘어났다. 영업이익이 74억 원에 달했다. 70~80%의 매출이 소닉블루에서 나왔다. 레인콤은 소닉블루를 통해 미국 시장을 뚫었고, 진출 6개월 만에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소닉블루의 ODM으로 인한 수익은 양 사장이 구상하고 있던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 투입하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가격이 더 싼 싸구려 제품을 만들어달라는 소닉블루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던 레인콤은 소닉블루와 결별하게 된다.


이미 레인콤은 당시 국내외에서 펌웨어를 통한 업그레이드 등 파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아이리버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은 상태였다. 미국 시장의 마니아들도 이미 레인콤에서 리오볼트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싸구려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베스트바이를 뚫고 소니를 이기다

2002년 초, 서울은 월드컵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레인콤은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소닉블루와의 ODM 계약을 통해 리오볼트라는 브랜드로 해외로 수출되던 물량이 올스톱됐기 때문이었다. 소닉블루를 대신할 새로운 매출처를 뚫어야 했다.


레인콤이 소닉블루와 결별하고 선택한 자체 브랜드 전략이 성공한 것은 미국 최대 양판점 베스트바이와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영업을 맡고 있던 이래환 부사장이 대형 양판점을 찾아가서 그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5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데이터플레이라는 미국 회사의 소개로 베스트바이와 연결이 되었다. 당시 데이터플레이가 만든 저장매체를 이용해 세계 최초로 휴대용 오디오기기로 출시한 곳에 레인콤이다. 데이터플레이는 자기 물건을 팔기 위해 레인콤을 베스트바이에 소개시켜준 것이었다.


그때까지 레인콤은 CD 타입 MP3플레이어만 생산하고 있었지만 플래시메모리를 만드는 데는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가격이 문제였다. 베스트바이는 마진이 박했다. 게다가 당시 플래시메모리 가격의 변동도 심해 중소기업이 뛰어들기에는 리스크가 크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미국 최대 양판점에 아이리버 브랜드를 넣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당시만 해도 베스트바이에는 삼성, LG 같은 대기업 제품만 들어가 있었다. 2002년 8월 20일부터 레인콤의 첫 플래시메모리타입 제품인 프리즘이 선적되기 시작해 그 해 12월까지 12만 대가 팔려나갔다. 당초 10만 대 정도를 예상했는데 대성공이었다.


이익도 예상을 크게 상회했다. 원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플래시메모리가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떨어지면서 돈이 그냥 굴러들어왔다. 물량은 1년 동안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iFP-100 모델 프리즘은 베스트바이를 통해 전 세계 100만 개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로, 레인콤이 아이리버 브랜드를 글로벌화하는 기반이 된 제품이다. 이 모델이 소비자들의 인기를 끌면서 다른 거래처에서도 물건을 달라고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 후속 모델이 바로 iFP-300. 우주선 모양의 크래프트다. 이 모델은 더 큰 인기를 얻어 150만 개 이상 팔려나갔다. 2002년 799억 원이던 매출이 2003년에는 2259억 원으로 늘어났다. 영업이익이 540억 원에 달했다. 이런 실적을 기반으로 2003년 12월, 레인콤은 코스닥시장에 상장했다. 첫날 공모가의 2배에서 시초가가 결정된 후 가격제한폭까지 올라 10만 원을 넘어섰다. 주가는 13만 5000원까지 거침없이 올랐다. Sorry sony 광고 카피가 실제 판매대에서 현실이 되었다. 베스트바이 등 실제 판매현장에서 소니를 제치기 시작했다.



아이리버, 길을 잃다

애플이라는 거인과 맞서다

애플이 미국 시장 등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때에도 플래시메모리 타입 MP3 시장에서는 여전히 레인콤이 확실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애플이 아이팟 미니를 내놓으면서 그 균형이 깨지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사전 수요조사를 해온 레인콤은 2004년 HDD타입 MP3플레이어를 시장에 출시하면서 애플과의 전쟁을 불사하게 된다. 그 모델이 바로 H10이다.


애플 타도, H10으로 승부를 걸다

레인콤의 H10은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빅히트를 칠 것이라고 입을 모았던 제품이다. 게다가 당시 애플에 대항하기 위해 냅스터 등 콘텐츠업체들과 제휴하면서 애플의 아이튠즈에 대적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MS-냅스터-아이리버로 이어지는 반 애플 진영의 라인이 구축된 상태였다. 레인콤은 이들과 애플을 압박하는 전략을 썼다. H10은 MS의 호환 인증 플레이 포슈어(play for sure)를 받은 제품이다. 플레이 포슈어는 휴대 오디오 기기에 윈도우 호환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반 애플 진영의 공조체제였다. 애플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이팟 미니에 이어 2005년 1월 플래시메모리 타입의 아이팟 셔플을 선보였다. 아이팟 셔플은 512MB가 12만 5400원, 1GB가 18만 9200원으로 아이리버 제품의 절반 가격으로 시장에 치고 나왔다.


레인콤은 H10의 시판과 더불어 대대적인 해외마케팅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당시 글로벌 마케팅에 들어간 비용만 100억 원에 달할 정도였다. 광고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H10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던 레인콤은 너무나 희망적인 시나리오에 빠져 있었다. 레인콤은 수요 예측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공장을 마구 돌리기 시작했다. 2004년 말 매출이 4500억 원으로 전년의 2배를 기록할 정도로 급성장하던 레인콤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2005년에는 7000~8000억 원을 거쳐 매출 1조 원을 달성하자는 표어가 회사에 붙어 있었다. 현재 아이리버 COO(최고운영책임자)를 맡고 있는 양동기 부사장이 이야기했다.


"H10에 들어갈 하드디스크드라이브만 대략 200억 원어치를 샀어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시장에 내놓으면 폭발적인 반응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죠. 처음에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을 때는 기대했던 것처럼 반응이 좋았어요. 미국, 유럽에서 물량이 잘 팔리는 듯싶었죠. 자신감에 불이 붙기 시작할 즈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불량에 의해 제품이 반송되는 경우가 발생하더니 반송 물량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H10에 들어간 하드디스크에 문제가 생긴 것이죠. 소프트웨어의 문제는 펌웨어 등으로 보완할 수 있었지만 하드의 문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출시 초기에 잘 팔려나가던 제품들이 갑자기 재고로 쌓이기 시작했어요. 이미 공장에서는 라인이 풀가동되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레인콤의 참패를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H10으로 인한 손실 규모는 100~200억 원 수준이 아니었다. 누적매출 1조원으로 벌어온 돈을 H10으로 인해 모두 날리게 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전 세계 재고량이 500억 원 규모로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당시 플래시메모리 가격은 6개월 만에 반값으로 떨어지던 시기였으므로 재고는 곧 큰 폭의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자금이 달리기 시작했다. 애플과의 전쟁에서 전세가 기울자 레인콤은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구할 수 있는 루트가 막혀버렸다. 할 수 없이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통해 2700만 달러를 조달하게 된다. 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은 0% 금리에 기준주가 대비 25% 할증된 행사가격, 2만 3786원으로 정해졌다. 레인콤은 주가 하락 시에도 행사가격의 조정이 없는 고정부로 결정됐다며 주주들에게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당시 레인콤은 이것이 레인콤의 경영권을 바꿔놓는 덫으로 되돌아올 줄은 전혀 몰랐다. 주가가 떨어져도 행사가격이 조정되지 않는다는 조건은 상황이 나빠졌을 때 사채가 주식으로 전환되지 않아 회사가 상환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당시에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새로운 게임의 룰을 만든 애플

2005년 초 애플이 레인콤 MP3플레이어의 절반 가격에 내놓은 아이팟 셔플로 인해, 레인콤은 유통업체들로부터 아이리버 제품도 가격을 인하해달라는 압력에 직면한다. 그러나 애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강도의 승부수를 던졌다. 애플의 CEO인 스티브 잡스는 삼성전자에 대량구매를 보장하는 대가로 플래시메모리를 대폭 할인된 가격에 공급받아 2005년 9월 아이팟 나노를 내놓기에 이른다. 레인콤의 아성이었던 플래시메모리 타입 MP3 시장까지 완전히 접수하겠다는 의도였다. 레인콤은 갑작스럽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이팟 나노가 나오자 증권사들은 레인콤의 목표주가를 하향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양덕준 사장의 설명이다.


"애플의 가격 파괴는 삼성에서 싼값에 플래시메모리를 공급받아서 이루어진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엄청난 글로벌 아웃소싱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글로벌 유통망을 통해 가격을 인하할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싸움에서 2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2등은 가격을 무기로 싸우는데, 1등이 가격을 무기로 사용하니 2등은 설 땅이 없었다. 애플이 새로운 게임의 룰을 만든 것이었다."


2005년 여름 이후 애플이 가격을 인하할 때마다 아이리버는 전 세계에 깔아놓은 물량에 대한 재고보상을 해줘야 했다. 생산원가 문제가 아니었다. 애플의 제품 가격 인하에 따라 발생하는 재고를 보상해달라고 유통업체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재고보상을 안 해주면 아이리버 제품을 안 팔겠다고 나서는 판이니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레인콤도 계속해서 MP3 제품 가격을 인하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타격을 당하는 처지였다.


2005년 상반기 매출액 2437억 원에 영업이익은 101억 원에 그쳤다. 경상이익은 1억 7000만원, 순이익은 13억 원에 그쳤다. 상황은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2005년 3분기에 매출액 1615억 원, 영업이익 84억 원, 순이익 19억 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4분기에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면서 2005년 연간기준으로 매출액 4393억 원에 117억 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한다. 당기순손실은 355억 원에 달했다. 레인콤 설립 이후 첫 적자였다.


2006년 초 애플은 1GB 용량의 아이팟 나노를 149달러로 내렸고, 아이팟 셔플 1GB 제품의 가격을 129달러에서 99달러로 내렸다. 512MB 제품은 99달러에서 69달러로 내렸다. 레인콤은 이제는 더 이상 설 땅이 없었다. 레인콤은 2006년 1분기 187억 원의 순손실을 기록한 데 이어 상반기에도 445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쓰라린 패배를 통해 배우다

2005년에서 2006년까지 레인콤을 떠나 있었던 기성호 부사장은 애플과의 정면승부에 대해 상당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소비자 쪽에서 보면 애플이 가지고 있던 영역과 아이리버의 영역은 달랐는데 정면으로 싸움을 걸었다는 것부터 잘못이었다. 레인콤은 이미지가 나쁜 포르노 배우를 모델로 써서 사과를 씹어 먹는 광고를 내보내면서 애플을 자극했다. 그런 전략이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준비된 물건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싸움만 걸었고, 애플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 판만 키워놓고 장렬히 전사한 꼴이다."


기 부사장의 지적은 계속되었다. "애플의 아이팟은 하드디스크 기반이었다. 레인콤은 플래시메모리의 강자였다. 저장공간, 속도, 휴대성, 디자인 측면에서 우리가 월등했다. 그런 레인콤이 HDD 기반에 싸움을 걸었다. 국내외적으로 우리 제품에 대한 마니아들이 무척 많았고, 최종 소비자들은 우리 제품에 감탄하고 있었다. 유저들의 자체 커뮤니티도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있었다. 애플과의 싸움은 전략적 선택이었지만 스스로 자멸하는 길로 빠져들게 된 측면이 크다."


양 사장도 애플과 규모의 게임을 했다는 점에서 전략적 실수를 인정한다. 하지만 양 사장은 이보다는 아이리버를 잃어버렸다는 점이 패배요인이었다는 데 방점을 둔다. "규모의 게임은 대기업에게 우위가 있을 뿐이며, 중소기업이 쓸 수 있는 전략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이리버가 섣부른 디자인경영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예쁜 것만을 찾다가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렸다. 개성을 잃어갔고 독특한 컬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제품을 수없이, 많이 내놓고 있을 뿐이었다."


작은 거인들, 아이리버를 떠나다

김형렬 부사장은 창립 초기부터 이래환 부사장과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2인자 자리를 둔 권력 투쟁 당사자 중 한 명이었던 김 부사장은 2006년 1월 모바일방송 및 콘텐츠전문업체인 옴니텔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에는 H10의 실패가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회사를 떠나는 창립멤버들

김 부사장이 나간 후 이래환, 양동기 부사장이 남았는데, 이때부터는 양동기 부사장이 2인자였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CFO였던 양 부사장은 김 부사장이 맡았던 국내외영업까지 맡게 되었고 계속된 적자로 외부에서 투자를 받아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양동기 부사장도 2006년 8월 김혁균 사장을 영입하면서 이래환 부사장과 함께 구조조정을 당하게 되었다. 양 부사장은 2006년 말까지 미국 현지법인을 정리하고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2008년 4월 양덕준 사장이 민트패스를 설립할 때 함께하게 된다. 2009년 보고펀드에서는 양동기 부사장에게 아이리버에 와서 다시 일해 달라고 제안했다. 


신임 경영진과 직원들간의 불화

2006년 4분기에 레인콤은 5분기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 회생의 전기를 마련한다. 게다가 보고펀드로부터 6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한다. 3자배정 형태로 500억 원을 유상증자하고 100억 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방식이었다. 2007년 2월에 실제 자금이 납입됐고 보고펀드가 최대 주주에 올라서게 된다. 보고펀드가 31.36%, 보고펀드와 같이 투자한 코리아글로벌펀드가 5.91%를 취득했다. 양덕준 사장의 지분은 10.87%로 줄어들었다.


당시 양 사장은 30대의 젊은 김혁균 사장에게 CEO를 맡기고 미래사업구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혁균 대표가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데는 무리가 따랐다. 당시만 해도 IT업계에서 상당한 지명도가 있었던 레인콤의 대표이사를 외부에서 초청하는 자리가 많았다. 장관간담회, 상공회의소, 중소기업모임, IT벤처 모임 등에서 양덕준 사장은 벗어날 수 없었다.


2007년 8월에 취임한 이명우 사장은 이 같은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1977년에 삼성전자에 입사, 2001년부터 소니코리아 사장을 맡아왔던 중량급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명우 사장은 소니코리아 회장을 거쳐 한국 코카콜라보틀링 회장을 역임했다. 이명우 사장과 소니코리아에서 함께 일했던 김군호 코닥코리아 사장도 레인콤 수석 부사장에 영입됐다. 김 부사장은 레인콤 COO(최고운영책임자)를 맡았다.


이렇게 레인콤 경영을 맡게 된 이명우 사장-김군호 부사장 카드는 레인콤에 상당한 갈등을 유발했다. 이 사장과 김 부사장은 대부분 삼성, 소니, 코닥 등 대기업에서 일을 해왔기 때문에 자유분방한 레인콤 조직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벤처회사에서 급성장한 레인콤은 몸집은 커져 있었지만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회사가 아니었다. 레인콤을 다시 정상궤도에 올려놔야 하는 임무를 맡고 선임된 이 사장의 입장에서는 회사가 우선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고 해도 회사의 규정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양 사장의 조직운영 스타일과는 180도 달랐던 것이다.


신임 경영진은 "크리에이티브팀이 도대체 말을 안 듣는다"고 말했고, 크리에이티브팀은 "회사가 왜 이렇게 삼성 같은 조직이 돼 가느냐"며 불만이 쌓여갔다. 조직 내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직원들은 문화적 충격 때문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하는지 직원들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보고펀드가 최대주주인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정치적인 기류가 사내에 형성되고 있었다.


보고펀드, 결정적 책임을 묻다

보고펀드가 레인콤에 투자를 결정한 지도 1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레인콤의 경영 상황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주주인 보고펀드가 투자할 당시의 경영계획에서 계속해서 벗어나고 있었다. 특히 2007년 8월 이명우 사장이 취임한 이후 빚어진 조직 갈등을 하루 빨리 정상적으로 돌려놔야 했다. 게다가 양 사장이 진행하고 있던 미래를 위한 기획, 개발사업 부문에서는 개발비만 투입되고 성과가 없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결정적 순간이 다가온 것은 2007년 11월이었다. 2007년 3분기 성과를 결산하기 위한 경영협의회에 보고펀드 변양호 대표가 참석해 실적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양 사장은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따금씩 양 사장은 변 대표의 말에 그대로 동의하고 회사를 나오겠다고 말한 것을 후회하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다. 진심이라기보다는 퇴사 이후 현실의 어려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주 힘들 때는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아이리버에 그냥 남아 있을 걸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적어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급여는 나오고, 창립자로서의 예우는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니까." 왜 그렇게 쉽게 회사를 떠났느냐는 나의 질문에 양 사장은 대답했다. "이미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 상황에서 내가 왜 떠나야 하냐고 물어보면 더욱 구차해질 것 같아 변 대표의 뜻을 받아들였다."


양덕준, 아이리버를 떠나다

양 사장은 2008년 4월 민트패스를 설립하고 레인콤을 떠난다. 보고펀드 측은 양 사장이 회사를 나가는 조건으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이사회 의장을 그대로 맡아달라는 것과 아이리버의 제품 기획, 디자인컨설팅을 계속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회사에서 MP3플레이어, 전자사전 등 동일 제품은 하지 말고, 아이리버 경쟁회사의 디자인을 해주지 말아달라고 했다. 양 사장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레인콤은 민트패스에 지분을 투자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단, 투자의 전제조건이 있었다. 민트패스가 외부에서 40억 원을 조달하면 아이리버가 30억 원을 투자한다는 조건이었다. 레인콤은 민트패스 설립 초기, 전환사채로 6억 원을 먼저 조건부로 투자했다. 그리고 이후 외부 투자를 보면서 레인콤이 24억 원을 추가로 투자해 민트패스 지분 35%를 갖기로 했다. 그러나 2008년 말에 출시한 전자복합기 민트패드가 시장에서 히트를 치지 못하면서 민트패스는 2009년 상반기에 심각한 자금난에 처하게 된다. 양 사장은 보유하고 있던 레인콤 주식을 팔아 민트패스 운영자금을 조달했다. 한때 1주당 가격이 10만 원을 상회했던 레인콤의 주가는 3000원 선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이리버의 경쟁력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2009년 12월 아이리버 이사회에서 보고펀드의 이재우 대표가 이이리버의 새 대표이사로 선임되었다. 2007년 이후 3년 동안 1년마다 대표가 바뀌는 혼란의 시기를 거치게 된 셈이다. 창업자들만 회사를 떠난 게 아니었다. 회사가 본격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한 2006년 이후 레인콤 직원의 70%에 가까운 인력이 회사를 나갔다. 2010년 1월, 취임 후 처음으로 직원들 앞에 선 이재우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이리버를 떠났고, 상당기간 많은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리버의 경쟁력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시스템 문제만 제대로 컨트롤하면 다시 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바뀌고 회사가 어려워졌음에도 아이리버는 여전히 세계적인 디자인상을 휩쓸고 있고, 아이리버 브랜드의 힘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직원들의 머릿속에는 창조적인 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숨쉬고 있습니다. 아이리버에는 양덕준 DNA가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독창적인 발상과 혁신적인 제품으로 고객의 마음을 움직여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는 회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전의 실현을 위해 각 조직이 융화, 단결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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