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의 맞수

   
닛케이벤처(역자: 권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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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북스
   
14500
2010�� 06��



■ 책 소개
맨주먹으로 시작해 세계최정상에 오른 두 기업가의 전혀 다른 인생의 길.
정답은 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뜨겁게 살아라!

이렇듯전설이 된 두 인물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창과 방패와도 같은 두 사람의 특성 그리고 그 밑에 일관되게 흐르는 뜨거운 열정을 극명하게제시한다. 이는 오늘날 새로운 비즈니스환경에 적응하고자 하는 경영자, 혁신의 시대에 자기경영을 꾀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방향성을제시한다.

■ 저자닛케이벤처

■ 역자권혁기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일본학과 교수이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석사 학위를,일본 교토대학교 대학원 경제학연구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 산업연구센터에서 연구위원으로 근무한 바 있다. 저서로는『마쓰시타 고노스케 ― 일본이 낳은 경영의 신』『이케다 하야토 ―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일본형자본주의』(공저), 역서로는 『일본경제사― 근대와 현재』등이 있다. 

■차례
추천의 글 - ‘왜 다시 혼다 소이치로와 마쓰시타 고노스케인가?’ 
머리말 - ‘당신은 어떤 경영자가 되고싶습니까?’ 

제1장 유년시절부터 창업까지
혼다 - 솟구치는 열정과 가능성을 향한 질주 
마쓰시타 - 특유의 꼼꼼함과 성실성으로 전진

제2장 기업이념과 철학
혼다 - 자유와 평등을 중시한 독창적인 조직 
마쓰시타 - 사회적 사명을 실천하는 조직 

제3장 경영의 원칙과 방식 
혼다 - 혼다기연을 완성시킨투톱체제 
마쓰시타 - 마쓰시타전기를 키운 사업부제 

제4장 어떤 기술로 승부할 것인가
혼다 - 수익을 따지지 않는 최고의 기술 개발
마쓰시타 - 소비자가 원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시장주의 

제5장 인재를 키우는 기본 원칙 
혼다 - 창의적이고 개성 넘치는 인재 양성 
마쓰시타- 회사에 적합한 인재 양성 

제6장위기를 어떻게 관리하는가? 
혼다 - 더 좋은 기술 개발로 위기 돌파 
마쓰시타 - 철저한 정보수집으로 위기 대비

제7장 세계로 뻗어가는 국제화전략 
혼다 - 세계를 향한 적극적 현지주의 
마쓰시타 - 해외에서도 실천한 ‘수도철학’

제8장 어떻게 살것인가? 
혼다 - 열정과 호기심 가득한 순수 자유인 
마쓰시타 - 인간의 본질을 통찰한 사상가

혼다 소이치로 인터뷰 
마쓰시타 고노스케 인터뷰
오너경영자 200인 설문조사 
연보 
참고문헌 

 





경영의 맞수

기업이념과 철학
혼다 - 자유와 평등을 중시한 독창적인 조직

혼다 소이치로의 경영이념의 근간을 말해주는 키워드가 있다. 그것은 ‘자유’와 ‘평등’이다. 소이치로는 자택에 사원을 절대로 부르지 않았다. 상사가 특정 사원을 자기 집에 부르는 일은 파벌 조성으로 이어지고, 이 파벌이 회사 조직을 경직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학벌’, ‘지연’ 등 모든 파벌을 부정했다. 또 이른바 연고에 의한 사원 채용도 금지했고, 채용시험 때는 신상명세서에 자기소개란을 없앴다.


또 소이치로는 철저하게 평등을 중시한 경영자였다. 회사 내의 신분에 의한 차별이나 편파적인 태도를 싫어했고, 스스로도 절대 교만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세는 ‘종업원은 곧 경영자‘라는 경영방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업원은 경영에 참가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생산조정 등을 할 때는 명확하게 회사의 실정을 전달하여 전원이 한몸이 되어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기업에서 상하의 서열은 학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이디어의 질‘에 의해서 결정했다. 소이치로는 실제로 “아이디어에서 사원들을 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사장을 그만두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애사심은 필요없다. 자신을 위해 일하라
‘자유’와 ‘평등’의 정신은 혼다 사원들의 자주성을 키웠다. 대다수 회사의 경영자들은 사원에게 애사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소이치로는 “우선 자기를 위해서 일하라!”라고 말한다. 남을 위해 일한다는 미사여구는 절대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해서 한 일이 남에게도 기쁨으로 이어진다고 느낄 때 가장 행복하다. 남의 기쁨이 결국은 자기 마음으로 되돌아와 큰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된다. 애사심은 각자가 자신을 연마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히 발현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사원들에게도 명백히 밝혔다.


기업의 세습을 절대로 허용하지 말라
소이치로의 기업관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기업의 사유화를 철저하게 배제했다는 점이다. 특히 창업자이면서도 자식이나 친인척이 혼다에 입사하는 것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소이치로의 장남 히로토시도 혼다에 입사하지 않고 경주용 자동차의 엔진을 전문으로 만드는 ‘무겐’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자신도 오너의 길을 걸었다.


아름답게 떠난 소이치로
소이치로의 이런 자세는 경영에서 물러날 때도 나타난다. 그는 회사 창립 25주년을 맞은 1973년, 후지사와 다케오 부사장과 함께 경영의 제일선에서 전격적으로 퇴진했다. 그의 퇴임 이유는 “기술자로서 시대감각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 “25년에 걸친 다케오와의 인간관계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었지만 아름다운 퇴진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자기 자식에게 회사를 계승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창업 이래 14년간 제조 부문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자신을 도와온 동생 벤지로를 ‘가족회사 탈피’라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1962년에 해임한 것도 그의 강한 의지를 잘 드러낸다. 전 경제기획청 장관이자 경제평론가인 다카하라 스미코는 이런 소이치로의 생각과 결단에 대해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일단 권좌에 오르면 내놓기 싫은 것이 인간세상의 이치다. 명예회장 등의 직함이 유행하고 게다가 권좌에 오래 있으려고 한다든가, 집안사람을 후계자로 앉히려고 내분을 야기시키는 대기업들도 적지 않은데 소이치로의 뚜렷한 경영자상은 세상에 빛을 발하고 있다. 최근 경영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경영자로서는 소이치로를 가장 존경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마쓰시타 - 사회적 사명을 실천하는 조직
고(故)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떠나보내는 마쓰시타그룹의 합동장이 거행된 1989년 5월, 마쓰시타 마사하루 마쓰시타전기산업 회장에게 미국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이례적으로 조전(弔電)이 왔다. 조전은 “마쓰시타는 성공한 사람이 완수해야 할 더욱 큰 사명과 책임을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다.”라는 말로 경영자로서의 고노스케의 유덕(遺德)을 기렸다. 미국과 일본 간의 경제마찰이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는 시기였지만 일찍이 “생활의 질적 향상과 개선을 도모하고 세계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높은 차원의 기업이념을 내걸고 그 실현에 노력해온 고노스케의 자세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아도 빛나는 것이었다. 고노스케의 성공 요인에서 배울 점은 수없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경영이념의 확립일 것이다.


혼다 소이치로가 지닌 경영이념의 근본에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으로서의 철학이 있었다. 이는 ‘인간’ 혼다 소이치로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노스케는 사업에 대한 사명감, 경영에 필요한 선견지명이 바탕에 있었으며 이는 ‘천재경영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여실히 말해준다.


고노스케가 경영이념을 선포한 것은 1932년 5월 5일의 일이었다. 이날 오사카 시내 중앙전기클럽에 169명의 사원을 모아놓고 발표한 ‘소주고사(所主告辭)’와 1929년에 정해놓은 ‘강령(綱領)’이 마쓰시타전기의 경영 기본방침으로서 이는 이후 회사의 성장을 떠받치는 확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250년에 걸쳐 사명을 달성하자
회사의 사명과 경영이념에 혼을 불어넣고 항상 살아 있는 목표를 내건 것도 고노스케의 뛰어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명지의 회(命知の會)’라고 명명된 발표회에서 고노스케는 앞으로 250년에 걸쳐서 그 사명을 달성하자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250년이라는 기간을 25년씩 10기로 나누고, 25년을 다시 3기로 분할해서 최초의 10년을 ‘건설시대’, 다음 10년을 ‘활동시대’, 나머지 5년을 사회에 대한 ‘공헌시대’로 정했다. 그것은 “자기 세대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 그리고 또 다음 세대로 사명의 달성을 계승시키겠다.”는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데 ‘명지원년(命知元年, 명지란 사명을 안다는 뜻)’에서 60년째가 되는 1992년은 제3의 ‘건설시대’ 10년째인 셈이다.


1920년대 후반에는 ‘산업보국(産業報國)’, ‘공명정대’ 등 준수해야 할 ‘7가지 항목의 정신’ 구호를 정하고 직장 단위로 아침회의와 저녁회의 때 이 구호를 전원이 복창하도록 했다.


이러한 형식 이상으로 고노스케는 자신의 경영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그때그때 사회적 사명의 중요성을 설명해왔다. 특히 회사의 다양한 활동을 사명이나 이념과 결부시켜 설명하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그의 집념이 전 사원에게 경영이념을 인지시키는 데 큰 힘이 된 것은 틀림없다.


1956년 고노스케는 ‘경영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1955년 당시의 매출액이 220억 엔이었는데 1960년에는 4배나 되는 800억 엔으로 대폭 늘리자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은 꼭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것은 일반 소비자의 니즈를 숫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른바 사회에 대한 의무이행이며, 우리가 게으름만 피우지 않는다면 실현되리라고 믿는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과 소비자는 보이지 않는 계약, 소리 없는 계약을 맺고 있는 것이며 그들의 니즈를 겸허하게 듣고 그 의무를 달성하기 위해 평소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은 산업인에게 부과된 중요한 의무다.” 동시에 “이익은 그 사업이 사회에 공헌하고 있는지에 대한 결과다.”라는 말도 했다. 사업 책임자에게 최대의 관심사인 이익과 사회 공헌이라는 이념을 결부시킴으로써 그의 이념을 사업 내부에 침투시켰다. 또 “이익이 나지 않고 있는 것은 사회에 공헌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라고 단언함으로써 소비자의 니즈와 시장의 수요를 정확히 파악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목적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창업한 지 얼마 안 되는 벤처기업의 경영자 다수가 ‘확고한 경영 이념의 확립’을 중요한 경영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이미 60년 전에 이른바 벤처기업의 경영자였던 고노스케가 품고 있던 문제의식이 오늘의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빛을 잃지 않고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재를 키우는 기본 원칙
혼다식도 정답, 마쓰시타식도 정답

소이치로와 고노스케 두 사람은 모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정(人情)을 적절히 통하게 하고 주체성을 신장시킴으로써 훌륭한 인재를 육성했다. 이런 점을 보면 양자의 인재육성법은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회사운영방법, 제도, 사풍 등은 오히려 정반대인 것이 많은데, 그 차이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노스케는 기본적으로 마쓰시타전기라는 회사 그 자체의 이념이나 목적을 수행할 인재의 육성과 배출을 지향한 데 비해, 소이치로는 반드시 혼다에 구애받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데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노스케는 인재육성을 조직론으로까지 발전시켜 갈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매뉴얼화도 필요했다. 일사불란하고 정연한 조직과 그것을 짊어질 인재의 육성은 이러한 발상과 방법에서 출발했다.


한편 소이치로는 ‘관리’라는 말을 극도로 싫어했다. 어느 때인가 인사과 직원이 작업시간을 조사하려고 현장 근로자의 작업을 시계를 보며 측정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소이치로는 “인간의 노동을 시계로 재다니 말이 되는가?” 하고 격노했다. 그런 그의 자세가 혼다의 자유분방한 사풍을 키운 것이다.


우연히도 이와 같은 두 회사의 사풍을 완벽하게 부각시킨 행사가 있었다. 1973년 혼다와 마쓰시타전기는 현장의 반장급 직원을 대상으로 상호교류연수를 실시했다. 두 회사가 각각 열 명 정도의 인원을 선발해서 약 5일간 상대 회사의 사업장에 투입하여 숙박연수를 시켰다. 혼다쪽 사원들은 마쓰시타전기의 세탁기, 콘덴서, 냉방기, 난방기 등의 부서에서 연수를 받았다. 그런데 혼다 사원들은 마쓰시타전기의 강령이나 7개조의 정신을 복창하는 조회부터 규칙적인 하루 일과와 직원들의 단정한 복장, 청결하고 잘 정돈된 식당이나 화장실 등 혼다에는 없는 사풍을 보고 모두가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작업 중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일이나 회사에 관한 것을 마쓰시타전기의 여러 종업원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대부분 비슷했다는 것이다. 또 일을 마치고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마쓰시타전기의 사원들은 모두 공부를 했다. 사내 시험 준비를 위한 공부였다. 이런 사원들의 자세를 혼다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혼다의 스즈카제작소에서 연수를 받은 마쓰시타 전기의 사원들은 질서나 환경 등 사풍이 자기네 회사와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데 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혼다에서는 긴 머리를 한 사원도 예사로 볼 수 있었고 작업 중에도 떠들썩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누가 상사고 누가 부하인지 도저히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사람마다 대답하는 내용이 달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이 연수 후 마쓰시타전기 사원들은 ‘혼다는 엉터리 회사’라고 비웃은 반면, 혼다 사원들은 ‘저렇게 숨이 막히는 회사는 없을 것’이라고 마쓰시타전기에 대해 혹평했다고 한다.


연수 결과를 보고 받은 소이치로는 파안대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다. 인간은 본래 자유를 좋아하니까 자주성에 브레이크를 걸 필요는 없다. 우리들은 제품으로 승부를 걸고 있으니 우리의 프로세스는 이대로가 좋다.”


그렇다고 해서 소이치로가 마쓰시타전기의 방식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혼다도 정답이고, 마쓰시타도 정답이다. 방식은 몇 개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인재를 양성하는가에 따라서 그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향해서 어떻게 효과적인 육성방법을 생각해서 실천해가느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혼다식도 정답, 마쓰시타식도 정답’인 것이다.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는가?
혼다 - 더 좋은 기술 개발로 위기 돌파
결함차 문제를 더 좋은 제품개발로 돌파하다

혼다가 4륜차 시장에 진출한 후 첫 히트상품은 경자동차인 ‘N360’이다. 이 모델은 인기가 떨어지고 있던 경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할까, 1969년에 N360에 결함문제가 발생했다.


원래 이 자동차의 결함문제는 미국 소비자운동이 발단이었다. 미국 소비자운동의 리더 랄프 네이더가 제기한 자동차의 리콜 문제가 일본에까지 비화된 것이다. 리콜(recall)이란 결함이 발생할 경우 신문을 통해 결함을 공표하고 해당 차종을 회수하여 수리한다는 제도인데, 사태는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에만 그치지 않았다. N360의 결함으로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비자와 이를 지원하는 소비자 조직인 유조 유니온이 소이치로를 살인죄로 고소하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이 문제는 후에 유조 유니온의 책임자가 공갈죄로 맞고소를 당하는 등 심각한 양상을 보였다. 각 언론들도 대대적으로 취급했으며 연일 결함문제에 대한 논란이 확산됐다. 어디선가 혼다차와 관련되는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전적으로 자동차의 결함으로 보도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자 N360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969년에 20만 대 이상 매출실적을 올렸는데, 1970년대에는 4만 대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혼다는 N360이 연간 30만 대에서 40만 대 정도 팔리면 이익을 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 아래 당초 적자를 감수할 각오로 싼 가격으로 발매했다. 그런데 원가는 고사하고 설비투자 자금도 회수하기 전에 감산 위기에 몰린 것이다. 더욱이 1971년에 발생한 미국의 ‘달러 쇼크’로 인해 빚어진 엔고 현상으로 수출에도 큰 타격을 받았다.


혼다가 결함차 문제의 충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세운 방침은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여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혼다는 연구 부문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1971년에 새 자동차인 ‘라이프’ 개발에 성공했다. 이 차는 경자동차이면서도 4도어 사양으로, 일반 가정의 수요를 강하게 의식한 차종이었다. ‘라이프’는 기존 고출력 자동차의 기술적인 측면이나 성능 등에서 일대혁신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는 제품의 기술적인 클레임에 대해 더욱 우수한 기술로 대처한다는 혼다다운 경영방식이며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일련의 결함차 소동이 가라앉을 무렵 혼다 기술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소비자에게도 올바르게 운전하면 사고를 줄일 수 있다는 계몽활동도 벌였다. 자동차의 결함문제와 관련하여 혼다가 홍역을 치른 교통사고의 원인 대부분이 운전자의 운전기술 미숙 탓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운전자에 대한 실기교육을 적극적으로 실시한 기업은 없었다. 소이치로와 다케오는 일찍부터 실시하고 있던 2륜차 안전운전 캠페인이나 안전운전 교육을 4륜차에도 확대하여 실시하기로 했다. 1967년에 ‘혼다안전운전보급본부’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위기에 직면했을 때 대증요법식으로 어떻게든 그 위기에서 벗어날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다시는 똑같은 위기에 처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예방의학적인 조치가 동반되어야 위기관리 능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혼다가 취한 대처법은 바로 이 이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마쓰시타 - 철저한 정보수집으로 위기 대비
1977년 2월, 야마시타 도시히코 마쓰시타전기 상담역은 당시 26명이었던 임원 중 끝에서 두 번째인 평이사였다. 그랬던 그가 이례적으로 사장에 발탁되어 취임했다. 갑작스런 인사에 놀란 야마시타 도시히코가 강력히 고사하자 고노스케는 “이대로 가다가는 마쓰시타전기는 위태로워진다. 자네가 큰일을 맡아 위기에서 탈출하게 해 달라!”고 간곡히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사장 취임을 수락한 야마시타 도시히코는 즉시 경영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회계 관리를 중심으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담당자들의 설명을 듣는 한편 약 3개월간 업무 파악에 전념했다. 그 결과 표면상의 호조와는 달리, 마쓰시타전기의 경영실태는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산상으로는 매출과 수익이 매우 좋은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분석한 결과 매출 신장은 수출에 의해 이루어졌고, 국내에서의 판매는 한계점에 도달한 상태였다. 수익도 금융이자 수입이 이익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본업의 수익을 나타내는 영업이익률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었다. 마쓰시타전기의 근간을 이루는 가전제품 판매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었고, 이것은 경영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사원이 이러한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잠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느낀 야마시타 도시히코는 사원들의 의식개혁과 경영진의 세대교체, 사업부 간 인사교류 등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그리고 종합전기업체로의 전환을 목표로 하는 경영 3개년계획 ‘액션 61(Action 61)’을 1984년부터 추진했다. 주변에서는 회사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기에 고노스케와 도시히코는 위기감을 느끼고 민첩하게 대책을 강구했던 것이다. “나는 회사에 문제가 있다는 고노스케의 말을 듣고 실태를 조사를 한 후에야 비로소 위기가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고노스케는 조사 전에 이미 직관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라고 도시히코는 당시의 위기 상황을 회상했다.


고노스케는 위기관리에 능수능란한 경영자였다. 고노스케는 “모두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불황 시에는 누구나 위기감을 갖고 대응책을 모색하지만 사실 호황일수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사고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깨닫기 전에 위기의 싹을 찾아내서 잘라버리기 위해서는 정보수집이 필수적이었다. 고노스케는 무엇보다도 이 정보수집력이 뛰어났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타고 거리에 나갔을 때는 전기용품점 앞에 주차해 있는 배달용 자동차의 숫자를 유심히 셌다고 한다. 자사의 계열점에 서 있는 차량과 비교하여 마쓰시타전기 제품의 이동이 다른 업체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또한 일부 판매점과 핫라인(hot line)을 설치해서 정보수집의 통로를 열어두었다. 주된 목적은 나쁜 정보를 모으는 것이었다. 사내외의 나쁜 이야기는 상부에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시장의 변화와 실태를 제대로 알 수 없으며 결국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노스케는 과거의 거래 경험에서 듣기 거북한 이야기라도 기탄없이 전해주는 점포를 지정해서 정보통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핫라인의 벨이 울리면 고노스케가 직접 수화기를 들었다.


물론 사내에서도 널리 정보를 모았다. 임원진이나 사업부장급은 말할 것도 없이 과장, 대리에서 평사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정보원으로 폭넓게 활용했다. 거기에 천성적으로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고노스케의 능력도 위력을 발휘했다. 이처럼 다양한 경로로 수집한 정보가 있었기에 때로는 사업 부장이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을 고노스케가 지적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영업소장이 진상을 숨기고 문제가 없는 듯이 거짓말해도 고노스케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고노스케는 문제 처리능력도 빨랐다. 상품 불량 이야기가 나오면 당장 조사를 명력하고 사후대책을 강구케 했다.


노동조합결성대회에서 축하 연설로 박수를 받다
고노스케와 소이치로의 노조 대처방법은 확실히 달랐다. 마쓰시타 전기에서 노동조합이 발족된 것은 1946년이다. 고노스케는 기본적으로 “정당한 노동조합이 있으면 기업은 발전한다.”라고 생각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초대받지 않았음에도 노동조합결성대회에 스스로 참가했다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를 낸 소이치로와 노동조합결성대회에 스스로 참석하여 축하를 한 고노스케, 노동조합에 대한 두 사람의 접근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소이치로는 제품 만들기를 무엇보다 좋아해서 동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경영자와 적대하는 위치에 있는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비해 고노스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노동조합이 생기는 것이니, 서로 잘 해보자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고노스케는 경영자에게 성의가 있다고 판단될 땐 노동조합이라 할지라도 경영자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경영자로서의 자신감과 ‘성선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쁜 것도 숨김없이 모두 공개해서 이해를 구한다는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그후 노사관계를 원활히 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후 고노스케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추방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때 노동조합이 앞장서서 고노스케의 공직추방반대운동을 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1986년 92세 생일에는 노동조합으로부터 동상을 선물받기도 했다. 고노스케는 이기적인 욕망이나 조직을 방어한다는 등 지엽적인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직원들의 복지를 폭넓게 추구했기 때문에 노동조합과의 대립을 미연에 방지했다고 할 수 있다.


세계로 뻗어가는 국제화 전략
혼다 - 세계를 향한 적극적 현지주의

혼다 소이치로가 타계한 1991년 8월 5일, 세계 각국의 유력한 매스컴들은 그의 타계 소식을 경쟁이나 하듯이 일제히 보도했다. 미국에서는 「뉴욕타임스」가 1면 톱으로 그의 사진과 함께 상세한 기사를 실었으며, 3대 TV방송은 대대적으로 아침 뉴스에서 소이치로의 타계 소식을 보도했다. 한편 친교가 있었던 프랑스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도 소이치로의 타계를 애도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는 등 일본의 민간인으로서는 이례적인 예우를 받았다.


세계 각지에 진출해서 국제적으로 비즈니스를 전개하는 일본 기업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소이치로가 이처럼 세계인들에게 예우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맨손으로 세계적인 기업 ‘혼다’를 만들었다는 성공담이 외국인들의 호감을 갖게 한 일면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소이치로가 진정한 국제인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제품에는 국경이 없다
“혼다 소이치로는 일개 동네 공장 시절부터 ‘나는 세계인이 된다!’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곤 했다. 물론 당시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허풍쟁이 소이치로’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혼다기연이 일명 ‘딸딸이’ 오토바이를 만들던 시절부터 친해진 혼다크리오도쿄의 나카다 도시로 사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또 그 무렵 혼다에 입사한 가와시마 기하치로 혼다기연 고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이치로 사장은 늘 ‘좋은 제품에는 국경이 없다’, ‘세계 제일이 아니고서는 일본 제일이 될 수 없다’, ‘국제화의 시대는 곧 온다’고 말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 회사는 조그마하고 보잘것없었는데도 그는 이미 세계로 웅비할 듯한 기운을 갖고 있었다.”


소이치로는 1954년에 혼다가 존립하는 목적과 기본운영방침의 하나로 ‘시야를 세계로 넓힐 것’을 제창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소이치로가 지향한 참다운 기업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소이치로의 경영이념을 집대성해서 1956년에 작성한 것이 “우리 회사는 세계적인 시야에서 고객의 요청에 부응하여 성능이 우수하고 저렴한 제품을 생산한다.”라는 그 유명한 혼다의 사시다.


마쓰시타 - 해외에서도 실천한 수도철학
혼다 소이치로가 창업 초기부터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쓰시타 고노스케도 일찍부터 세계시장을 염두에 둔 기업 경영을 지향하고 있었다. 1929년에 고노스케가 정한 마쓰시타전기의 ‘강령’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산업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사회생활의 개선과 향상을 도모하여 세계 문화 발전에 기여토록 한다.”


고노스케 방식의 해외사업 추진
고노스케는 1973년 회장에서 상담역으로 물러났는데, 이 무렵에는 이미 국제화에 대한 그의 생각이 사내에 깊이 침투되고 있었다. 이것을 집대성한 것이 마쓰시타전기의 ‘해외사업전개의 기본’ 등의 내용이다. 1985년 경영방침발표회에서 당시 야마시타 도시히코 사장(현 상담역)은 이와 같은 마쓰시타전기의 해외사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나라에서 환영받는다’라는 단 한 마디로 귀착된다. 아무리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상품일지라도 품질과 성능이 나쁘고 또 이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기업이라면 절대로 그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환영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그 회사에서 일을 함으로써 그 나라의 경제?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자각과 인식을 갖게끔 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 새로운 목표에 도전할 수 있는 활기차고 유능한 회사로 키워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그 나라에서 환영받는 기업이 되는 것이다. ”


일본식 경영의 교과서가 되다
오사카 가도마시에 있는 마쓰시타전기 내에는 마쓰시타전기 역사관이 있다. 1968년에 개설된 이 역사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지금까지 109만 명에 이르는데, 그중 6만 명이 외국인이다. 외국인에게도 고노스케가 실천한 경영사상은 흥미로운 측면이 있는 모양이다. 일본과 미국의 기업 경영에 정통한 평론가 아베글린은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최근엔 마쓰시타경영으로 대표되는 ‘일본식 경영’ 기법을 많은 미국 기업이 배우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자세로 바뀌어가고 있다. 함부로 해고하지 않는 종신고용에 의한 인본주의적 인사 정책, 경영자를 중심으로 한 가족적인 조직, 종업원이 자주적으로 실수나 손실을 없애고 생산성 향상에 힘을 쏟는 QC(Quality Control, 품질관리) 활동 등 일본 기업들이 갖고 있는 강점을 미국 기업들이 받아들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식 경영의 교과서로서 고노스케의 사상을 연구하는 해외의 학자들이나 경영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고노스케의 저서 중 열 권 정도가 영어나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말레이시아어 등으로 번역되어 각국에서 읽혀지고 있다. 이는 고노스케가 주장한 ‘수도철학’과 ‘공존공영’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마쓰시타전기가 실천해온 ‘그 나라로부터 환영받는 기업’이라는 사고가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혼다’와 ‘파나소닉’이라는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어낸 소이치로와 고노스케. 제품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제품을 만든 두 사람은 일본이 자랑하는 훌륭한 경영자로서 세계에서도 크게 평가받고 있다. 물론 당대에 거대기업을 일궈낸 것이나 또 많은 사재를 사회활동에 기부했다는 점에서 ‘재패니즈 드림’을 실현한 성공자로서 국민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두 사람 모두 창업 초창기부터 ‘세계를 염두에 둔’ 원대한 경영을 목표로 했고, 시대를 초월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소이치로와 고노스케, 일본이 낳은 위대한 두 벤처 경영자의 공통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