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텐도의 비밀

   
데이비드 셰프(역자: 권희정·김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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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미디어
   
22000
2009�� 02��



■ 책 소개
쿄토의 허름한 가내수공업에서출발하여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이 되기까지 베일에 싸였던 닌텐도의 사업전략과 게임개발, 인재 채용, 마케팅의 비밀을 파헤친 책. 프리랜스저널리스트인 저자 데이비드 셰프는 총 15개 장에 걸쳐 이 닌텐도의 탄생과 게임개발 전 과정을 생생히 소개하고, 천재적인 게임 개발자와 게임디자이너, 불굴의 의지를 선보이는 마케터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닌텐도의 방향을 오락산업으로 설정한 야마우치 히로시 회장의 리더로서의 역할과카리스마, 천재적인 게임 개발자들이 들려주는 게임 이야기, 마케팅 측면에서의 새로운 시도와 불굴의 의지, 게임 자체에 대한 흔들림 없는 고집등에 중점을 두고 닌텐도의 비밀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 저자 데이비드셰프
「플레이보이(Playboy)」「롤링 스톤(Rolling Stone)」「옵서버(The Observer)」「해외문학(Foreign Literature)」 같은 출판매체들과 미국의 전국 단위 라디오방송 프로그램 <올 씽스 컨시더드(All ThingsConsidered, ATC)&&에 다수의 글을 기고해온 프리랜스 저널리스트다. 저서로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플레이보이」인터뷰(The Playboy Interviews with John Lennon and Yoko Ono)가 있다.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아내 카렌바버와 아들 니콜라스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일본과 미국, 유럽의 수많은 닌텐도 사람들을 만났으며 관련 업계에 대해서도폭넓고 깊이 있는 취재를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애플의 COO 마이클 스핀들러는 애플에게 가장 두려운 컴퓨터 회사는 어디냐는 질문에“닌텐도”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이 책은 놀라운 회사에 관한 놀라운 책이다. 


■ 역자 
김성균
 - 숭실대학교정치외교학과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번역과 출판기획편집을 병행하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군중심리』『명상의기술』『깡패국가』『유한계급론』『낯선 육체』 『자유주의의 본질』『테네시 윌리엄스』『바바리안의 유럽침략』등이 있다.


권희정 - 성신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및성균관대학교 번역.TESOL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마셜 맥루언: 미디어 시대의 예언자』『입사 후 1년 평생을좌우한다』『톨스토이 단편선 1, 2』『디즈니 속의 복음』 등을 옮겼으며, 『노트르담의 꼽추』『마다가스카』 등 수권의 아동도서도번역했다.


■ 차례
01. 장난감, 세계를 휩쓰는산업이 되다
02. 야마우치 가문의 코드 - Nintendo(任天堂)의 의미
03. 연구개발부 - 컴퓨터와 게임에 미친 해커들과괴짜들, 오타쿠 부대
04. 라이선싱 전략, ‘마더 브레인 왕국’의 비밀
05. 아라카와 미노루와 요코의 닌텐도 아메리카
06.게임 디자이너 미야모토 시게루의 <동키 콩&&
07. 게임 산업을 붕괴시킨 ‘아타리 쇼크’의 내막
08. 마케팅법칙들
09. 크리스마스를 훔친 그린치
10. 난공불락의 닌텐도 제국
11. 닌텐도식 라이선싱 계약의 아킬레스건을찾아라
12. 닌텐도의 보안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회사들
13. 닌텐도, 소니·NEC·세가와 승부하다
14. 유럽침공
15. 한 명의 진정한 천재(one true genius)가 필요하다




닌텐도의 비밀

장난감, 세계를 휩쓰는 산업이 되다
대다수 사람들은 비디오게임을 어린이용 장난감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초능력을 갖게 하는 버섯들과 ‘모턴 쿠파 주니어’ 같은 이름을 가진 적들이 등장하고, 멜빵바지를 입은 땅딸막한 주인공이 ‘리틀 굼바’들의 머리 위를 폴짝폴짝 뛰어넘어 다니는 비디오게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어린이용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닌텐도에서 이 게임이 출시된 이후 비디오게임은 실로 급속히 성장하는 사업 분야가 됐다. 그 게임 하나가 창출한 수익은 미국에서만 무려 5억 달러에 달했다. 그때까지 오락사업에서 이보다 많은 수익을 창출한 상품은 오직 영화 <ET>밖에 없었다.


마리오는 ‘패미컴[Famicom: 북미, 유럽 등 아시아 이외 지역에서는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NES: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으로 불렸다]용 게임의 주인공으로 1985년에 최초로 등장했다. 총격과 대량 살상만이 난무하던 테마들 사이에서 재치와 유머라는, 컴퓨터 단말기나 컨트롤러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요소들로 비디오게임 시장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어린이들은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복잡하고 신기한 미로들뿐 아니라 풍부한 보상 또는 벌칙이 조건반사적으로 주어지고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도록 설계된 이 게임에 사로잡혀 버렸다.


비디오게임 카트리지와 그것을 작동시키는 게임기를 판매하여 벌어들인 수익금은 닌텐도를 세계 최고의 수익률을 자랑하는 기업들 가운데 하나로 변모시켰다. 1991년 당시 성장력, 수익률, 시장 침투도, 주가 상승률 등의 지표들을 감안하면 일본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인 도요타를 추월하고 있었다.


1991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미국 어린이들은 슈퍼 마리오 3탄의 후속편이 출시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부모들에게는 그 소문이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식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닌텐도가 선보인 완전히 새로운 비디오게임기는 이전 게임기보다 더 강력해졌을 뿐 아니라 당연히 가격도 더 비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들이 고대하는 슈퍼 마리오 4탄은 새로운 ‘슈퍼 패미컴[Super Famicom: 북미, 유럽 등 아시아 이외 지역에서는 슈퍼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SNES: Super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으로 불렸다. 제작 단가가 높아지기 때문에 ’패미컴‘과의 호환성은 갖추지 못했다]으로만 작동될 수 있었다.


1991년 10월 닌텐도는 한 일간지를 통해 ‘슈퍼 패미컴’이 1분마다 열두 대씩, 혹은 5초마다 한 대씩 판매되고 있다고 밝혔다. 닌텐도는 1992년, 경기침체와 모든 암울한 전망에도 아랑곳없이 미국에서만 47억 달러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야마우치 가문의 코드 - Nintendo(任天堂)의 의미
서양문명의 19세기 말엽에 해당하는 메이지시대를 살았던 야마우치 후사지로는 화가 겸 장인이었다. 호방한 성격에 손재주 좋기로 유명했던 그는 카루타, 즉 오락용 카드를 만들었다. 일본에 카드놀이가 들어온 것은 350년 전 포르투갈 인들과 네덜란드 인들에 의해서였는데, 야마우치가 만든 카드들은 고대 일본인들이 놀이에 사용하던 복잡한 그림이 그려진 조개껍질과 닮은 데가 더 많았다. 서양의 카드보다 더 작고 두꺼운 ‘하나후다’, 즉 화투가 조개껍질을 대신하게 됐지만 고대 그림들의 정교함과 화려한 색상은 화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야마우치는 수제 카드를 제작, 판매하기 위해 1889년에 닌텐도 곳파이(任天堂骨牌)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그가 창업한 회사의 명칭으로 선택한 한자말-任天堂(닌텐도)은 ‘하늘의 뜻에 맡겨라’ 혹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명심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일본에서 이 말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겨라’였다.


화투가 가족용 오락거리였을 당시만 해도 닌텐도의 사업은 소규모였고 수익성도 소박한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후 도박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성장가도를 걸었다. 1907년에 그가 사업을 확장하면서 닌텐도는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서양식 카드, 닌텐도 카루타를 대량 생산하는 일본 최초의 회사로 거듭났다. 자신이 제조한 화투들을 닌텐도 직영 상점에서만 판매하던 야마우치 후사지로는 이제 좀 더 넓은 판매망을 필요로 했다. 이에 따라 일본 담배소금공사와 협상을 타결하여 전국의 담배 상점에서도 닌텐도 카루타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닌텐도는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다. 덕분에 야마우치 후사지로가 은퇴할 무렵 닌텐도 곳파이는 일본 최대의 카드 회사로 자리를 잡았다.


야마우치 후사지로의 뒤를 이어 그의 사위인 야마우치 세키료가 1929년 닌텐도의 제2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그의 손자 야마우치 히로시가 1949년 닌텐도의 제3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회사의 명칭을 닌텐도주식회사로 바꿈으로써 새로운 사업으로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고, 닌텐도가 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오락산업’으로 설정했다.


오락실용 게임을 개발하는 동안 야마우치는 수시로 연구개발부를 찾아가 우에무라와 휘하의 게임 디자이너들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우에무라 팀은 닌텐도가 추진하던 가장 중요한 신제품의 개발을 담당하고 있었다. 비디오게임기라는 점은 같지만 이전의 컬러TV 게임 시리즈보다 훨씬 정밀한 것이었다. 그 게임기는 미국에서 출시되었는데 카트리지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여러 게임을 할 수 있게 고안된 것이었다. 그 교환방식 덕분에 게임기는, 야마우치의 표현을 빌자면 ’새롭고 재미있는‘ 게임을 즐길 수 있으면서도 결코 구식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우에무라를 포함한 기술자들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면서 관련 기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야마우치는 개발 중인 게임기들이 단순히 게임용에 머물지 않고 훨씬 다양한 용도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에무라는 야마우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자신이 컴퓨터를 조립할 줄은 몰랐지만 놀이용품으로 봤던 가정용 컴퓨터게임기의 엄청난 잠재력을 첫눈에 간파해버렸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말해준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요.” 요컨대 야먀우치는 닌텐도를 거대기업으로 만들 열쇠가 바로 그 게임기라고 본 것이다. 어떤 게임기가 어린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고 어린이들이 그 게임기로 점점 더 다양한 게임을 즐기기를 원하며 오직 닌텐도만이 그 모든 게임을 만들 수 있다면, 회사가 이를 근간으로 무한히 성장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우에무라가 해결해야 할 최대의 과제는 기술이 아닌 흥미유발 요소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야마우치는 되도록 많은 가정에 게임기가 판매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가격 역시도 거의 모든 사람이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해야만 했다. 에포크의 게임기를 제외하면 시장에 유통되던 모든 게임기는 한 대당 3~5만 엔에 팔리고 있었다. 야마우치가 목표로 설정한 닌텐도의 게임기 가격은 9,800엔 이었다. 동시에 그의 목표는 일본산과 미국산을 불문한 다른 게임기들의 성능을 포함하면서도 더욱 다양하고 우수한 성능들을 보유한 오락기를 제조하는 것이었다.


영상의 속도감을 높이고, 더 많은 색상을 구현하는 우수한 그래픽 화면을 위한 기술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기술자들은 야마우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게임기를 소형 컴퓨터 크기로 만들면 기존의 컴퓨터들이 구비한 모든 부가기능도 겸비할 수 있을 것인데, 게임기에 어떤 기능을 포함시켜야 하는가? 정보를 읽고 쓸 수 있는 디스크 드라이브도 포함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키보드를 포함시킬 것인가? 게임기와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데이터 포트(data port)도 포함시킬 것인가? 전화선으로 다른 게임기나 닌텐도의 중앙단말기와 연계될 수 있는 모뎀은? 그리고 더욱 복잡한 프로그램들을 작동시킬 수 있는 대용량 기억장치는?


야마우치는 질문을 던진 기술자들에게 먼 장래까지 감안하는 신중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는 당장은 지나치게 제작비가 많이 드는 기능들은 배제했지만 미래에 제작할 훨씬 우수한 성능의 비디오게임기에 그것을 첨가할 심산이었다. 닌텐도는 향후 어찌될지 모르는 10년간의 미래를 대비한 계획을 세움으로써 가전제품 및 오락상품 회사들의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는 잠재력을 확보했던 것이다.


1983년 닌텐도는 몇 개월 동안이나 비밀리에 마라톤작업을 진행한 끝에 개발한 게임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게임기의 가격은 야마우치가 예상한 것(약 100달러)보다 비싸게 책정됐지만 경쟁사 게임기에 비하면 절반에도 훨씬 못 미쳤다. 새 게임기는 일본 최초의 가정용 컴퓨터인 ‘패밀리 컴퓨터’이고, 그 영어 명칭을 줄여서 ‘패미컴’으로 부르기로 했다. 회로 불량으로 모든 게임기를 회수한 후 불량 칩을 교체하여 나온 패미컴의 판매량은 100만 대를 기록한 후에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수백만 가구가 ‘패미컴’을 보유하면서 게임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덕분에 닌텐도가 생산한 모든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야마우치는 제한된 시장을 보유한 하드웨어 상품에서 무한한 시장을 보유한 소프트웨어 상품으로 전환하는 것이 닌텐도가 가야 할 길임을 알았다.


‘패미컴’은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가정용 비디오게임기 회사 열네 곳이 시장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닌텐도의 적수는 이미 시장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소박한 가내수공업으로 시작했던 야마우치 가문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동안 일본 역사상 아니, 그야말로 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한 기업들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던 것이다.


연구개발부 - 컴퓨터와 게임에 미친 해커들과 괴짜들, 오타쿠 부대
닌텐도의 ‘패미컴’은 생산되는 족족 불티나게 팔렸다. 그 성공은 그때까지 생각하지 못한 하나의 문제를 불거지게 했다. 비디오게임기도 다른 보통의 컴퓨터만큼 세련되고 강력해질 수 있었지만 통상 그 게임기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의 가치에 의해서만 판단됐다. 당시의 모든 컴퓨터 회사 기술이라면 ‘패미컴’의 하드웨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모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업계에서 선두를 유지하기 위한 열쇠는 소프트웨어였다.


야마우치는 닌텐도가 비디오게임 예술가들의 천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굉장한 비디오게임을 만드는 사람은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봤다. 야마우치는 이렇게 말했다.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난 게임을 개발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극소수만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게임을 개발할 수 있다. 바로 그런 극소수가 닌텐도에서 원하는 인재들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대로 닌텐도를 이끌어갈 소수의 천재들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야마우치 회장은 기술적 지식에는 문외한이었지만 혁신적 디자인을 자극하는 법은 잘 알았다. 그는 오사카와 나고야에 조성된 일본의 중심 산업단지를 벗어나서 도쿄의 금융자본에도 전혀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통상적인 기업경영의 교과서마저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에 중요한 기술자 세 명 - 요코이, 우에무라, 다케다- 을 엄선하여 채용했고, 그들은 그의 기대에 훌륭히 부응했다. 그들을 밀어주기 위해 (그리고 기술자들과 디자이너들의 업무를 더욱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그는 1984년에 ‘회사의 핵심 부서’인 닌텐도 연구개발부 전체를 관리하는 감독관으로 자처했다. 그러고는 인력과 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그 부서들을 지원했다.


야마우치는 요코이, 우에무라, 다케다를 직속 부하간부로 하고 각자 연구개발 1부, 2부, 3부를 이끌게 했다. 하나의 연구개발부는 서로 경쟁하는 여러 팀으로 구성됐다. 하드웨어를 연구하는 부서에 소속된 팀들은 저마다 획기적인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소프트웨어 팀들도 최상의 게임을 개발하기 위한 경쟁을 멈추지 않았다.


야마우치는 평생 한 번도 비디오게임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즐겨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닌텐도가 출시할 게임을 결정하는 유일한 판관이자 배심원이었다. 그런데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였거나 아니면 엄청난 행운아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업을 안하무인격으로- 시장조사 결과를 날조하거나 직원들을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밀어붙이는 야마우치의 무자비한 독재성을 비판하는 직원들은 많았지만, 출시할 게임을 선별하는 그의 천재성만큼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닌텐도의 연구개발부원들은 야마우치의 관심과 칭찬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했지만 회사 내에서는 최고의 그룹이었다. 그들은 닌텐도의 스타들이었다. 대다수 회사들이 시장조사 결과와 판매실적 등으로 연구개발부에 은근히 압력을 행사하곤 하는 경향을 보였음에도 야마우치는 연구개발부만큼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임을 강조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창의적인 부하들에게 아무도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수 없었다. 마케팅팀은 오직 연구개발부에서 완성해 내놓은 제품만 볼 수 있었다.


요코이가 이끈 연구개발1부는 ‘게임 보이(Game boy)를 디자인하고, 우에무라가 이끈 연구개발2부의 닌텐도 하드웨어 카트리지를 개발했다. 그리고 다케다가 이끈 연구개발3부에서는 ’스타 트로픽스(Star Tropics)를 시작으로 그 흐름을 잇는 여러 게임을 디자인했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몇 가지 마법 같은 기술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다케타 팀이 개발한 일련의 칩으로 ‘패미컴’의 처리능력은 높아졌으며, 기타 특수 능력을 게임기에 부여할 수 있었다. 영상을 대각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고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으며 한 번에 훨씬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할 수 있었다. 보다 복잡하고 정밀한 게임을 설계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으며, ‘패미컴’의 기억용량을 늘려주었다.


다케다 휘하의 부원들은 고급기술과 미지의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이 기울인 노력의 결실은 드라마틱했지만-최고의 닌텐도 게임들 대부분은 그들이 없었다면 개발되지 못했을 것이다-그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막연한 것이었다. ‘루마니아(Rumania)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던 연구개발3부 20명의 부원들은 대부분 컴퓨터에 미친 해커들과 괴짜들로 구성된 일종의 오타쿠 부대였다. 그들은 숙련된 지식인들이자 괴짜들이었다. 다케다는 “미쳐라. 그래야 발상이 시작된다”라고 말하곤 했다.


어느 날 야마우치가 연구개발부에 재능 있는 디자이너 한 명을 차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세 부서는 각자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었으므로 여력이 없었다. 야마우치는 기획부의 견습 직원, 미야모토 시게루를 차출했다. 마야모토는 대학에 다닐 때 각종 비디오게임을 즐겼다. 그는 비디오게임광이었다. 그 안에서는 그림들이 살아서 움직였다.


야마우치로부터 참담한 실패작인 ‘레이더 스코프’를 팔릴 수 있는 게임으로 개조해보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미야모토는 요코이가 주관하던 그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수행하게 됐다. 이후 미야모토가 개발한 슈퍼 마리오와 그 후속편들은 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비디오게임들이 됐다. 마리오 게임은 단계가 높아질수록 흥미진진해지는 세계들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어서 게이머는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여겨졌다. 그 세계에는 걸어 다니는 식물들, 세우스 박사(Dr. Seuss)가 창조했을 물고기들, 용들, 사악한 뱀들, 날아다니는 거북이들, 불을 뿜는 국화꽃들, 마리오와 루이지가 가로채서 타고다닐 수 있는 천사의 날개들도 있었다.


그런 모험에 유머가 절묘하게 배합됐다. 미야모토는 게이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게임의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배려했다. 슈퍼 마리오 2탄의 예를 들자면, 공주는 1단계의 두목을 상대하려면 무당벌레에 올라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내야 한다(무당벌레는 엉큼한 녀석으로 공주의 치마 속을 훔쳐보기도 한다). 그 세계를 지키는 악당들의 소두목 미니보스는 ‘자신의 머리통보다 큰’ 무시무시한 달걀폭탄을 내뿜는다. 후속편에서도 마찬가지다. 게이머들은 도저히 닿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문을 향해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는 마리오가 문 앞에 있는 동전들을 낚아채어 다른 방으로 가져가서 스위치 블록을 사용해 돌로 만드는 것이 힌트다. 그런 다음 그 돌을 문 가까운 곳으로 옮겨 계단처럼 밟고 올라가면 된다. 알고 나면 아주 간단하지만 어린이들은 몇 시간이고 방법을 찾아 지혜를 짜내며 게임을 즐긴다.


나이가 많고 노련한 게이머들은 게임에 담긴 많은 묘미들을 놓치곤 한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목표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아이들보다는 여유롭게 탐험을 즐기는 아이들과 사색을 즐기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들이 숨겨진 비밀들을 발견할 기회를 더 많이 얻는다. “그런 아이들은 필시 ‘음, 여기서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뭔가 있을 거야. 나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아이들은 그곳을 탐험하는 데 충분한 호기심을 지닌 셈이지요. 그 아이들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을 발견하면 ‘아, 내가 해냈어. 내가 그렇게 만든 거야’라고 느낄 겁니다. 그런 경험은 대단한 만족감을 선사합니다.”


미야모토가 개발한 많은 후속 게임들은 동일한 캐릭터들과 엇비슷한 목표로 구성될 뿐 아니라 게이머로 하여금 이전 게임에서 습득한 기교들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후속 게임들에는 다양하고 새로운 무대와 함정들, 새로운 임무들을 완수해야 갖춰지는 능력들이 등장하지만, 처음부터 새로 익힐 필요가 없이 이전 버전의 능력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마케팅 법칙들
닌텐도 아메리카 사장인 아라카와 미노루(야마우치의 사위)는 판매 촉진 활동에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게임의 내용이 좋아지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닌텐도가 좋은 게임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자각했다. 미야모토의 ‘슈퍼 마리오’나 ‘젤다의 전설’은 틀림없이 미국 어린이들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건은 닌텐도의 새로운 게임기는 지금까지의 게임기들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그들에게 이해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게임기를 개선하고, 케이스 디자인을 바꾸었으며, 위조품 문제 해결에 나서는 등 많은 시도가 이루어졌지만 판매는 활발하지 않았다. 낙담한 나머지 아라카와에게 야마우치는 말했다. “지금부터 미국의 한 도시를 골라 그 게임기를 팔기 위해 노력해보게나. 그래서 실패하거든 그때 그만두면 되지. 어쨌든 소비자가 실제 그 게임을 해보도록 만들어야 해. 의미 있는 테스트란 그런 것이지.”


테스트할 지역을 뉴욕으로 최종 결정했다. 뉴욕 시장은 경쟁이 치열한 데다 1983년의 아타리 쇼크(비디오게임 기업 아타리의 몰락으로 비디오게임 산업 자체가 붕괴된 1983년 전후의 공황상태)로 가장 심한 타격을 입은 곳이다. 더구나 과잉생산된 엄청난 재고품들이 헐값에 팔려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약삭빠르고 냉소적인 장사꾼들이 우글대는 도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야마우치는 뉴욕이야말로 테스트 판매에 최적지라고 결론짓고 아라카와에게 5,00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했다.


10월부터 판매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인조로 결성된 특공대원들이 백화점들, 크고 작은 완구점들, 가전제품 대리점들을 각개 공략하면서 판로를 뚫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토이저러스(Toys :R" Us), 시어즈, 서킷 시티(Circuit City), 메이시(Macys) 같은 유통회사들을 설득했다. 토이저러스의 창업주 찰스 래저러스와 다른 극소수의 경영자들은 그들을 반겼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닌텐도’라는 발음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발음하는 방법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라카와는 닌텐도가 소매상에게 제품을 무료로 공급해주고 디스플레이까지 모두 해주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어떤 상점도 90일간 물품대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90일이 지나면 상점들은 각기 판매한 만큼의 대금만 지불하면 되고 팔지 못한 제품은 반품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바이어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지만, 그대로 여전히 의혹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닌텐도 직원의 대다수는 1985년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까지 3개월간 일주일 내내 하루 열여덟 시간씩 일했다. 어느 쇼핑몰에서는 닌텐도 팀원들이 시연대(소비자들이 직접 게임을 해볼 수 있도록 닌텐도가 채택한 진열 방식. 게임 카트리지를 갖춘 게임기를 매장 등에 설치한 것이다)를 준비하느라 밤을 새기도 했다. 손님들이 게임기들을 향해 몰려들자 몰의 여성 관리인이 다가와 게임기를 켜지 못하게 했다. 아라카와는 프로스포츠의 유명한 선수들과 협찬계약을 체결하여 유명한 운동선수들이 게임기를 직접 시연하기도 했는데, 여성 관리인은 스타들을 만나는 것만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은 여전히 나빴다. 소매점에 유리한 조건, 매혹적인 매장 시연대, 500만 달러에 달하는 광고비를 들였지만 대부분의 소매점들은 최소한 세 번 정도는 전화를 해야 겨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 바이어 공략에 성공했다 해도 이번에는 구매팀 관리자가 “안 됩니다”라는 말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가 설득에 넘어갔을 때에도 부사장이라는 사람이 거부했다. 그러나 닌텐도 팀은 집요했고 갈수록 많은 상점들이 호응했다.


광고대행사와 언론을 상대하는 일은 게일 틸든이 담당했는데, 그는 ‘패미컴’을 광고할 때 지켜야 하는 기본 원칙을 대행사에 주지시켰다. 모든 제작물에서 닌텐도와 아타리의 이미지가 겹치지 않도록 디자인해야 함을 강조했다. ‘비디오게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됐다. 예컨대, 비디오게임 시스템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라 해야 한다. 소프트웨어에 대해서도 ‘게임 카트리지’로 불러서는 안 된다. 그것도 역시 아타리를 연상시키는 단어였다. 닌텐도에서는 ‘게임 팩’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게임기 본체도 ‘콘솔’이 아니라 ‘컨트롤 데크’로 결정했다. 아라카와는 소매상들에게 약속한 대로 뉴욕의 상권에 TV광고를 대대적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그들이 온 힘을 다해 노력한 결과들이 서서히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문을 내는 상점들의 수가 많아진 것이다. 광고와 쇼핑몰 현장 판매촉진전은 ‘패미컴’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데 성공했고 상점들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었다. 뉴욕에서의 판매 테스트는 닌텐도가 기대했던 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게임기 10만 대 중 절반가량을 소화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매상들이 생명력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고 판단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향후 판매활동을 계속해도 좋다는 충분한 근거였다.


닌텐도의 마케팅담당 부사장에 취임한 메인이 처음 추진한 일은 닌텐도와 소매업자들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완구 및 가전제품업체의 동향을 분석하는 주요한 애널리스트들을 만나면서 월 스트리트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메인은 애널리스트들을 만나 닌텐도를 알려나가기 시작했는데 당시만 해도 그들은 닌텐도를 전혀 몰랐다. 그는 본사인 일본 닌텐도주식회사의 배경과 역사, 재무상태-채무가 전혀 없는 대차대조표까지 포함된-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메인의 설명이 그들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그들은 자료들을 유심히 살폈다. 자료들에는 닌텐도가 일본에서 번창하는 사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로 제시되어 있었다.


애널리스트들은 도쿄에서 활동하는 동료들을 통해서 사실이 틀림없음을 확인했고 그 이야기는 소매상들에게도 알려졌다. 최고의 애널리스트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 덕분에, 닌텐도는 아직까지 미국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얻을 수 없었던 ‘신뢰감’이라는 자산을 획득했다.

메인의 절묘한 작전이 먹혀들었다. 시어스가 계약서에 서명했고, 이어서 서킷 시티와 (소프트웨어 대리점을 200개나 보유한) 배비지도 서명했다. 월 스트리트는 닌텐도에 관한 이야기로 들썩였다. 보수적이고 신중한 케이마트와 월마트도 주문량을 늘렸다. 완구업체들도 닌텐도 제품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1988년에 ‘패미컴’은 700만 대가, ‘패미컴’용 게임 카트리지는 3,300만 개가 팔렸다. 1989년에는 전체 가구의 4분의 1이 ‘패미컴‘을 한 대씩 보유하게 됐다. 1990년에는 전체 가구의 3분의 1로 증가하면서 보급대수는 모두 3,000만 대를 넘어섰다. 1992년부터는 비디오게임 산업이 다시 호황기에 접어들었고, 그해 소매상들이 올린 매출액은 50억 달러를 넘었다. 이 산업을 되살린 모든 성과는 오직 닌텐도라는 한 회사의 힘에 의한 것이다.


만약 닌텐도가 미국식의 경영이념을 좇아 운영되는 미국의 회사였다면 성공의 조짐이 나타나기 훨씬 전에 사업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라카와가 처음 시장조사를 실시했을 때- 시장조사 결과를 과신하는 많은 미국 회사들은 표적집단연구 같은 조사에서 실망스런 결론이 나올 경우 사망신고를 받은 것처럼 여겼다- 나 ‘AVS가 실패했을 때, 아니면 첫 박람회에서 거부당했을 때 등이다. 조금 더 나간다면 그렇게 애를 써도 뉴욕의 소매상들이 주문하기를 거절했을 때 또는 일 년이 지나고도 대량의 판매실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됐을 때 즉시 문을 닫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경영이념은 일단 수립된 계획을 굳건히 믿고 기어코 그 결실을 맺고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근성 있게 추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본 기업들을 성공시킨 핵심적인 요인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