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세계 부의 흐름을 바꾼 기업가들에게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낸다. "남과 다른생각을 한다" "끊임없이 새것을 받아들인다" "시장의 흐름을 잘 읽는다" "신념과 의지가 강하다" "무자비할 만큼 냉정하고 엄격하다" 등이그것이다. 이들이 어떻게 세계 경제와 역사를 뒤흔들고 이를 통해 전설이 되었는지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다.
■ 편자
우베 장 호이저 - 1963년 독일 본에서출생하였다. 본 대학교, 캘리포니아 대학교(UC Berkeley), 쾰른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통(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차이트(Die Zeit)」, ZDF 방송에서언론인으로 활동해 왔다. 특히 1992년부터 「차이트」에서 편집인으로 일하며 개혁을 주도했고, 2000년부터는 경제부를 이끌었다. 현재 여러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저서로 『천 개의 세계(Tausend Welten)』 『자본주의의 불안(Das Unbehagen desKapitalismus)』 등이 있다.
존 융클라우센 - 1970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생했으며,런던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과 현대사를 전공했다.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2001년부터 「차이트」의 경제 전문 기자로서런던 특파원으로 활동해 왔다.
■ 역자 이온화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베를린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연구소의 연구원이며, 동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독일 문학의 장면들』(공저)을 저술했고 많은 책을 번역했다. 최근 번역서로 『미래, 진화의 코드를 읽어라』 외에 "클라시커 50" 시리즈인『재판』 『발명』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코시모 데 메디치
세계 최초의 콘체른을 세우다 _ 존융클라우센
야코프 푸거
왕위까지 뒤흔든 유럽 최대의 초기 자본가 _ 괴츠하만
토머스 스미스
군대로 무장한 무역 왕국을 건설하다 _ 토마스 피셔만
미쓰이소쿠바이
사무라이가 최고의 양조 전문가로 변신하다 _ 잭 웨이드
제임스와트
특허권으로 부와 권력을 거머쥔 발명가 _ 요하임 프리츠반나메
나탄로스차일드
유럽을 재패한 금융계의 나폴레옹 _ 나이올 퍼거슨
마리아 클레멘티네마르틴
만병 통치약으로 성공한 수녀 사업가 _ 우르줄라 쾰러루터베크
베르너 폰지멘스
전기 기술 산업의 대표적인 선구자 _ 디트마 H. 람파터
율리우스로이터
항상 최초가 되려고 했던 언론 기업가 _ 이네스 최틀
마티아스 호너
친구와적 모두를 위한 하모니카를 만들다 _ 디트마 H. 람파터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그에게 재산은 목적이아니라 수단이었다 _ 클라우스페터 슈미트
존 데이비슨 록펠러
『성경』과 채찍으로 교육받은 두 얼굴의기업가 _ 볼프강 우카티우스
자바 마몬토프
사업과 예술을 모두 사랑한 러시아의 메디치 _ 필립 로스불록
조지 캐드버리
대영 초콜릿 제국을 건설한 휴머니스트 _ 요하임프리츠반나메
찰스 헨리 다우와 에드워드 데이비스 존스
월 스트리트에서 이루어진 경제 혁명의 주역들 _아르네 슈토른
고틀리프 다임러
자동차 시대의 문을 연 이상주의자 _ 게오르크에차이트
존 스티스 펨버턴
"자본주의의 모유"를 만들어 낸 빚쟁이 약사 _ 위르겐크뢰니히
알베르트 발린
전속력으로 질주한 항해의 제왕 _ 주잔네 비보르크
배절자하로프
인간 학살을 준비하고 후원한 죽음의 상인 _ 크리스티안 텐브로크
존 하비 켈로그와 윌 키스켈로그
육식으로 인한 소화 장애를 초식을 극복하다 _ 토마스 피셔만
에르네스트오펜하이머
그의 이름은 다이아몬드와 함께 영원하다 _ 바르톨로메우스 그릴
헨리포드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끈 뜨거운 열정가 _ 라이너 플리크
앨프리드함즈워스
최초의 본격적인 대중지를 창간하다 _ 데이비드 칩
존 피어폰트모건
월스트리트를 붕괴 직전에 구한 금융의 천재 _ 마르크 브로스트
루이르노
반역자가 된 프랑스의 자동차 왕 _ 클라우스페터 슈미트
워너 형제들
영화"공장"을 차려 경영한 용감한 4형제 _ 비르기트 뎅겔
막스 그룬디히
최정상에 올랐다가 추락한 고집쟁이기업가 _ 프랑크 슐테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키오
10년 앞을 내다보며 미국을 따라잡다 _ 지카코야마모토와 기오르크 블루메
아서 모스
홍콩의 경제를 지휘한 금융계의 거인 _ 펠릭스쇠나우어
베아테 우제
세계 최초로 섹스 숍을 개장한 쾌락의 경영자 _ 모니카지덴토프
라인하르트 몬
인간은 스스로 자극을 받을 때 더 많은 것을 해낸다. _ 우베 장호이저
그레테 시케단츠
사람들은 그녀에게 거절을 못했다. _ 게오르크에차이트
잉바르 캄프라드
나무를 고르는 천부적 재능을 지닌 남자 _ 마르쿠스로베터
레이 크록
햄버거로 이룩한 패스트푸드 제국의 황제 _ 크리스티아네그레페
헤르베르트 크반트
BMW를 재건한 강력한 신념의 소유자 _ 우베 장호이저
리처드 브랜슨
모든 사업을 처녀처럼 대한 남자 _ 존 융클라우센
빌게이츠
가장 실용주의적인 경영자 _ 루트비히 지겔레
하워드 슐츠
커피를 황금으로바꾼 연금술사 _ 데버러 스타인번
글쓴이
옮긴이의 말
신화가 된 기업가들
올바른 기업가 정신이란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사실상 기업가이다. 정치가나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의 배후에도 늘 기업가가 있고, 엄청난 규모의 기부나 사회사업을 하는 주체도 대개 기업가이다. 또한 거의 모든 비리와 부패에도 기업가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
일찍이 경제학의 대부인 애덤 스미스는 자본가들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복지를 마련해 주기도 하지만 사기도 친다고 생각하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기업가’, 그들은 누구인가? 단지 기업의 창립자나 소유주, 또는 고용 사장을 가리키는 말일까?
일반적으로 기업가 상(像)을 생각할 때 반드시 ‘기업가 정신’을 언급하게 된다. 기업가 정신이란 ‘기업의 본질인 이윤 추구와 사회적 책임의 수행을 위해 기업가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세나 정신’을 일컫는다. 지금까지 기업가 정신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바뀌어 왔다. 따라서 기업가 정신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기업가가 갖추어야 할 본질적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기업가 정신과 관련하여 미국의 경제학자 슘페터는 새로운 생산 방법과 새로운 상품 개발을 기술 혁신으로 규정하고, 기술 혁신을 통해 창조적 파괴에 앞장서는 기업가들을 혁신자로 보았다. 그래서 슘페터는 혁신적 기업가가 갖추어야 할 요소로 신제품 개발, 새로운 생산 방법의 도입, 새로운 시장 개척, 새로운 원료나 부품의 공급, 새로운 조직의 형성, 노동 생산성 향상 등을 꼽았다. 이것은 전통적 개념의 기업가 정신에 해당하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과 새로운 것에 과감히 도전하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에 소개된 44명의 기업가들은 바로 이 창조적 파괴에 앞장선 혁신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타인이 결정하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때로 명약관화하게 어리석은 실수를 하고, 많은 경우 독선적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끈질긴 성격은 언제나 여론과 여론 조작이라는 외적인 세력과는 분명한 경계를 긋는다. 그들 중 성공한 기업가들은 지독한 황소고집을 부리면서도 핵심 문제에 대해서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이들 기업가 정신의 역사에는 한마디로 성공적인 행동의 모델이, 그리고 그들의 중요한 특성들이 나타난다. 이 특성들은 다음과 같이 크게 10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성공한(일부는 나중에 실패한) 기업가들의 10가지 특성
1. 남과 다른 생각을 한다
- 코시모 데 메디치
15세기 상반기에 코시모 데 메디치는 아버지의 은행과 상점을 넘겨받는다. 그의 이상은 사업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는 그 시대의 다른 경제 지도자들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 즉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사업의 분권화를 실천한 것이다.
메디치는 본점에서는 단 열 명의 직원들과 전략적인 결정만을 담당하고 최고 경영자만이 일하는 방식을 도입, 실천했다. 지점의 사장들은 독자적으로 사업 결정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이익을 얻게 된다. 그로부터 500년 후, 미국인들은 이런 원칙에 따라 그들의 복합 기업을 구조 조정하기 시작했다.
- 헨리 포드
미국 자동차 시장에 대한 헨리 포드의 아이디어는 간단한 동시에 천재적이었다. 그 아이디어는 단순한 사람들을 위한 단순한 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이다. 1908년부터 그 유명한 T형 포드 자동차 생산량이 매년 늘었고, 이로 인해 포드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마케팅 이론을 창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고임금과 저가 제품 정책을 결합시킨다. 5달러 일당을 도입하는 동시에 자동차 판매 가격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근로자와 기업의 고리를 단단히 하고, 그들이 자가용을 구입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포드의 경쟁자들은 그를 비웃었지만, 마지막으로 웃은 사람은 포드였다.
2. 끊임없이 새것을 받아들인다
- 율리우스 로이터
1850년 율리우스 로이터는 통신을 거래 상품으로 발명한다. 처음에 그는 전서구를 이용한다. 1년 후 해저 전신망이 도버 해협과 칼레시를 잇자, 로이터는 런던에 ‘서브마린 텔레그래프’ 회사를 세운다. 그 후 제품을 개선하는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그의 통신사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다.
- 자바 마몬토프
기본적으로 갈아타기에 능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능력을 이용할 줄 알았던 미국 철도 재벌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의 묘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여기에 자신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일을 맡길 줄 알았던 한 남자가 누워 있다.”
그와 맞먹는 러시아인 자바 마몬토프의 묘비도 이와 동일한 신조로 장식할 수 있다. 카리스마를 지닌 자바는 러시아 산업혁명의 개척자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예술 애호가였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에게 많은 유산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하릴없는 미학가가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바는 단 30년 만에 마치 독주를 하듯이 혼자서 러시아 제국의 산업화를 일구어 냈다.
자바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먼저 고문을 두고 지속적으로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철도 사업을 더욱 확장하여 러시아 제국의 모든 방향으로 뻗어 나가게 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경제적 가능성뿐만 아니라 정치적 중요성도 보아 계속되는 고문의 조언을 받아들이며 정부의 정책 방향을 끌고 나가기에 이르렀다.
- 막스 그룬디히
배우기를 거부했던 회사 경영자들도 있다. 막스 그룬디히는 견고한 독일 제품의 가치에 대한 자신의 성공 처방전이 이미 1970년대 말 오락?전자 제품 분야에서는 추월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능력 있는 후계자들을 기업에서 쫓아내 회사에 필수적인 학습 문화 정착을 방해했다. 그런 행동이야말로 성공을 지속시키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결국 기존의 것만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룬디히는 1984년 네덜란드의 전자 제품 콘체른 필립스 사에 경영권을 넘겨주게 된다. 그러다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해온 그룬디히 사는 2003년 4월 14일, 최저점에 도달해 폐업 신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최정상에 있을 때는 거의 4만 명에 이르는 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던 회사가 말이다.
3. 시장의 흐름을 잘 읽는다
- 빌 게이츠
빌 게이츠는 이미 10대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빌 게이츠보다 프로그램을 더 잘 개발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물론 많이 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완벽하게 디지털 기기의 사업 잠재력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밀은 이렇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컴퓨터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더욱더 많은 수요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이츠는 자기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고, 다른 제품을 몰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이것을 완벽하게 해낸 그의 회사,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침내 시장 그 자체가 된다. 이렇게 컴퓨터 관련 시장은 점점 더 빨리 성장하고, 실용주의적인 경영자인 게이츠는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되었다.
- 알베르트 발린
알베르트 발린은 결코 대단한 부자는 아니지만, 고객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이해했다. 그는 이것으로 독일 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가 중 하나가 된다. 그의 주요 분야는 해운업이다.
함부르크 항구에서 놀던 지저분한 아이는 17세 때 아버지의 여행 대행사를 넘겨받고, 미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에게 배표를 팔았다. 대형 경쟁사와 맞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주요 타깃을 평범한 대중으로 삼아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증기선은 좁지만 운임이 저렴했고, 당연히 처음부터 배표는 매진되었다.
4. 신념과 의지가 강하다
- 하워드 슐츠
하워드 슐츠는 27세 때 시애틀의 ‘스타벅스 커피, 티 앤드 스파이스’라는 이름의 작은 회사에 관심을 집중한다. 슐츠는 더 많은 것을 알아 내기 위해 뉴욕에서 시애틀로 날아간다. 스타벅스 창립자들이 그를 채용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슐츠는 1년 이상 그들을 설득했다. 그런 다음에야 그는 스타벅스의 매니저라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슐츠의 사업수완은 소유주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그들은 거기에만 만족했다. 하지만 슐츠는 계속해서 사세 확장론을 주장했고, 그들은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커피 전문점 회사를 세우고, 마침내 스타벅스를 인수했다. 오늘날 이 기업의 연 매출은 100억 달러에 이른다.
- 레이 크록
하워드 슐츠처럼 ‘한 우물 파기’는 성공의 범주에 속한다. 이것은 레이 크록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부엌 가구 판매상이던 크록은 캘리포니아 주의 샌버나디노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패스트푸드 음식점을 보았다. 그는 이를 체인점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이 음식점의 주인인 맥도널드 형제들을 부추겨 함께 일했고, 결국에는 그들을 회사에서 쫓아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맥도날드는 크록에 의해 미국의 대명사, 세계적인 패스트푸드로 크게 성장한다.
5. 성공을 위해 게임 규칙까지 바꾼다
- 마리아 클레멘티네 마르틴
19세기 초 마리아 클레멘티네 마르틴 수녀에게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있었다. 그녀의 우수한 건강 보조 음료 ‘멜리센가이스트’를 다른 제조업체들이 모방한 것이다. 이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마르틴 수녀는 권력의 도움을 구한다.
그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프로이센의 문장인 독수리를 자신의 상표에 넣을 수 있는 지고한 은총을 구한다. 2개월 후 그녀는 허가를 얻는데, 이것은 마케팅이 거둔 커다란 성과이다. 그로부터 30년 후 독일 최초의 상표 보호법이 비로소 발효될 때까지, 마르틴 수녀는 작은 그룹 하나를 세웠다.
- 제임스 와트
제임스 와트와 그의 동업자 매슈 볼턴 역시 국가의 도움을 받아 대형 사업의 안전성을 보장받는다. 그들의 제품은 증기 기관이다. 그 당시에 특허법의 유효 기간은 단 6년이었고, 1774년 두 사람이 공동으로 시장을 정복하고자 할 때는 이미 와트의 특허권 유효 기간이 종료된 뒤였다.
영리한 볼턴은 영국 정부에 있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와트의 특허 기간을 국회법으로 18세기 말까지 연장하는 데 성공한다. 그때까지 두 동업자는 거의 500대에 가까운 증기 기관을 판매하게 된다. 이 책략이 점잖은 것은 아니지만, 시장 경제 초기에는 이와 유사한 방법에 의해 경쟁이 결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6. 기회를 잘 포착한다
- 베아테 우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베아테 우제는 노르트프리슬란트에 있는 인구 300명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이 암울한 시기에 젊은 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부인들은 피임 문제를 드러내 놓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이때 우제는 어린 시절에 받았던 성교육을 기억해 내고, 그중 가장 중요한 정보들을 요약했다.
그 후 부인들은 정기적으로 무료 임신 주기표를 받기 위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우제는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그녀는 섹스라는 주제를 불결한 테이블 밑에서 끌어내고 결혼 생활 위생을 위한 제품을 만들어, 유럽에서 가장 큰 에로틱 콘체른(재벌)의 초석을 놓았다.
한편 독일이 이제 막 경제 기적에 돌입한 시기에 베아테 우제의 이야기는 100배로 부풀려 회자되기도 했다. 이처럼 기업가들은 다른 사람이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작은 기회에서 큰 사업을 만들어 낸다.
- 앨프리드 함즈워스
영국의 출판인 앨프리드 함즈워스도 자기 시대의 상징을 인식한 사람 중 하나이다. 19세기 영국에는 새로운 중산층이 생겼다. 정치적으로 개방적이고, 자의식과 돈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즐거움을 원했다. 당시 함즈워스가 이 새로운 계층의 요구에 부응하여 만든 최초의 신문 「데일리 메일」은 현대적인 오락 제품이자 정보 제품이었다. 1896년 첫 호가 발간 된 지 3년 후 「데일리 메일」의 발행 부수는 100만 부를 웃돌았고, 1920년에는 200만 부에 이르렀다.
이 성공으로 힘을 얻은 함즈워스는 다음 프로젝트로 「데일리 미러」를 시장에 내놓았지만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론 사업의 천재성을 배경으로 하여 수상을 퇴임시킬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까지 높아갔다. 그 후 획기적인 광고의 도움을 받아, 함즈워스는 1921년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출판인이 되었다.
7. 경영관이 명확하고 건전하다
- 라인하르트 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라인하르트 몬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출판사 베텔스만의 경영 상태는 바닥에 놓여 있었다. 몬은 이 작은 출판사를 유럽 최대의 미디어 그룹으로 만들었다. 그는 분명한 경영관을 가지고 있다. 즉 회사 사장은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기만 하고 내버려 두어야 하고, 솔선수범과 견손한 태도에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몬은 일찍이 경영 후계자를 정하고 훗날의 과제를 준비하도록 했다. 개개 전문 분야의 사장들은 직접 작은 기업가가 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몬의 생각은 사규에 확고하게 드러나 있다. 몬은, 다른 사람들을 열광시키지만 스스로는 허영심과 거만함에 휩쓸리지 않는 자세를 경영진들에게 요구했다. 이런 요구는 수준이 높긴 하지만,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회장들이 있고 회계 부정 스캔들이 발생하는 시대에는 중요한 덕목이다.
8. 절약 정신이 투철하다
- 존 데이비슨 록펠러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열여섯 살 때 경리 사원이 되었다. 그는 강박관념이 있는 직원이었는데, 교회에 가는 일요일에만 쉬었다. 그 나머지 시간은 주어진 일에만 전념하며 엄청난 돈을 모았다. 후에 록펠러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고, 미국 최고의 자선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가족에게는 절약을 규율로 정해 돈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엄격했다. 엄청난 부를 축적했음에도 그의 자녀들에게는 또래 친구들보다 용돈을 적게 주었다. 이렇게 록펠러는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의 교리에 자극을 받아 돈을 긁어모으고,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의 정신이라고 말하게 되는 자선을 구현해 냈다.
- 잉바르 캄프라드
철저한 절약 정신은 세계적인 조립식 가구 판매 체인점인 이케아의 설립자, 잉바르 캄프라드의 성공 철학의 일부이기도 하다. 식탁 다리를 빼내 식판 아래에 넣고 모든 부품을 얇은 상자에 담으면 수송비가 절약된다. 캄프라드는 일찍이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그대로 실천해 그의 성공 초기에 이미 절약적인 배송 체계가 자리 잡았다.
이케아의 첫 번째 계명은 ‘절약하라!’이다. 400킬로미터 이내 거리의 출장은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는다. 종이 한 장도 양면을 사용한 다음 버려야 하고, 새 거울이 필요한 사람들은 자전거 틀 대신에 자전거 폐타이어를 사용한다. 그것이야말로 특별히 싸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9. 무자비할 만큼 냉정하고 엄격하다
- 존 데이비슨 록펠러
다시 한 번 록펠러의 예를 들어 보자. 그는 가족에게만 엄격했던 것이 아니다. 경쟁자들에게는 철저하게 가혹했다. 그는 전부를 갖기 원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산산조각 나누어진 미국의 석유 산업을 하나의 그룹, 즉 자신의 그룹으로 통일하고자 했다.
그래서 록펠러는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그 결과 1880년 초, 그의 회사 스탠더드 오일은 드디어 미국 석유 사업의 9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단 세 곳의 대형 정유사에서만 집중적으로 기름을 생산했다.
- 에르네스트 오펜하이머
에르네스트 오펜하이머는 1920년대 경제 대공항 시기에 다이아몬드 사업으로 세계 무역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다이아몬드 세계 시장을 싹쓸이하고, 그 다음 ‘중앙 판매 기구’를 설립했다. 이 기구는 계속 독점적으로 세계 다이아몬드 무역을 관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펜하이머의 권력이 너무 막강해지자 비밀경찰은 그를 주목하게 되고, 일련의 범죄 음모들이 밝혀졌지만 그의 회사, 드비어스 사의 세계적 헤게모니는 무너뜨릴 수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틀림없이 야비한 샤일록은 아니었지만, 그의 동화 같은 부의 축적으로 오늘날 사람들은 그를 천부적 재능을 지닌 무자비한 세계화의 주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계에서 거래되는 다이아몬드 원석의 상당 부분이 지금까지도 킴벌리의 오펜하이머 저택 13층에서 종류별로 분류되고 있다.
몇몇 성공한 기업가들의 잔인함은 사실 추악하다. 이것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종종 경탄을 자아내는 경영자의 엄격한과 자기 몰입적인 권력 남용 사이의 경계를 긋는 것은 특히 어렵긴 하다.
- 존 피어폰트 모건
존 피어폰트 모건도 무자비한 경영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록펠러나 밴더빌트와 같은 대재벌의 재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그의 추진력은 개인적인 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투자자들에 대한 책임감과, 자신의 목적을 안정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필요한 권력욕의 혼합이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부와 권력을 가진 모건에게 1907년은 최고의 기회이자 위기의 해였다. 미국의 전 금융 체계가 무너질 위협에 직면한 경제 공황이 월 스트리트에 불어 닥친 것이다. 아직 중앙은행이 없을 때였다. 그래서 우울증을 앓고 있던 모건이 재판관이자 사형 집행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과거의 어떤 은행가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는 독단적으로 어떤 은행이 신용이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기도 했는데, 그의 그런 독단이 없었더라면 위기에 처한 금융 체계는 몰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처럼 모건 개인에게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 반면 국회는 은행의 권력이 모건과 같은 그렇게 막강한 은행가에게 몰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12년 75세의 모건은 국회 청문회에 불려 나가기에 이르렀다.
10. 자신의 사업을 즐긴다
- 리처드 브랜슨
“사업은 재미있어야 한다.”라는 명제는 리처드 브랜슨의 경영 철학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즐거움은 새로이 도전하는 모든 분야에도 적용된다. 그는 20세 때부터 복합 기업을 세우기 시작했다. 음반 회사가 생겼고, 음반 판매점, 라디오 방송국, 영화관 체인 등 지속적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브랜슨은 자신의 흥미를 끄는 모든 시장에 뛰어들었고, 계속되는 도산의 위험까지도 감수했다. 결국 그의 회사들은 굳건히 자리를 잡고 번창했다.
브랜슨은 언뜻 보기에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덩어리의 남자이다.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큰 음반 회사 중 하나를 창조한 사람이고, 독서 곤란증자이면서도 현대적인 경영자론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성공 이야기를 쓴 사람이고, 수줍은 성격이면서도 끊임없이 용기를 내서 자신의 인생을 모험하는 남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랜슨은 버진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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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늘날 이동 통신사와 비행기 회사 두 개, 여행사 그리고 철도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 이 모든 회사들은 ‘버진’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 있다. 브랜드 버진은 브랜슨 만큼이나 즐겁고, 꾸밈없이 자유롭고, 관습에 얽매어 있지 않다. 브랜슨은 ‘버진 웨딩드레스’를 광고하기 위해 직접 마네킹이 되어 웨딩드레스를 입을 정도로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경영가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