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네 살 때 건반 앞에 앉은 뒤로 50년이 넘도록 연습과 연마를 거듭해오며 깨달은 인생 내공을 무겁지 않은 문체로 담은 에세이이다.
흔히 사람들은 연주자를 보며 빛나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의 화려한 모습만을 기억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연주자가 지닌 극히 일부의 측면에 불과하다. 실제로 연주자의 인생은 당장이라도 음악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좌절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혜선이 이 책에서 주로 보여주려는 것도 연주자의 영광이 아닌 좌절의 순간들이다.
고단했던 순간을 서술하는 중에도 그에게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생을 향한 의지이자 음악적으로 자신을 거듭 계발하려는 집념이다. 유머러스하고 가볍고 편한 문체로 글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힘주어 말한다. 좌절이란 곧 특권이라고. 즉, 좌절과 불안과 걱정은 성장하는 사람에겐 반드시 뒤따르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디가 되었건 ‘여기가 종착역’이라며 눌러앉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당부하고, 앞으로 찾아올 좌절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며 백혜선은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이다.”
■ 저자 백혜선
한국이 낳은 우리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일본 사이타마현 문화예술재단 선정, ‘현존하는 세계 100대 피아니스트’. 196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 예원학교 2학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건반 위의 철학자’로 칭해지는 러셀 셔먼과 변화경 부부의 가르침을 받았다. 1989년 윌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 1위를 시작으로, 1990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 19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등에서 입상하며 국내에서는 “콩쿠르 여제”로 통했고, 1994년에는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라는 성적으로 한국인 최초로 입상을 하면서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수상 직후 서울대 음대 사상 최연소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10년 후인 2005년에 서울대 교수직을 박차고 미국으로 떠났다. 머나먼 타국에서 혼자 두 어린아이를 키우며 외롭고도 지난한 연마의 시간을 견딘 끝에 세계를 무대로 활발히 연주생활을 하고 있다. 런던 심포니, 모스코바 심포니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무대를 가졌다. 미국 클리블랜드음악원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모교이자 미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음악 대학인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가장 못생긴 발을 내밀다
1악장 좌절의 기쁨
쌀알만큼이나 작은 기쁨으로
하얀 양복을 입은 신사
때로는 듣고만 싶은 곡도 있다
자유로움의 조건
좌절의 스페셜리스트
2악장 다시, 연습이다
이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
언어가 표현을 허락한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배움이 끊기는 날이 인생이 끊기는 날
3악장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와도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인가
어느 축축한 날의 광시곡
아무런 성취 없는 하루에도
한 번은 오고야 마는 결정적 순간
순수한 마음은 순수한 마음을 움직인다
4악장 종착역 없는 행진
무대를 마친 연주자의 행보
이 열차는 종착역이 없습니다
저렇게 되고 싶은 사람
엄마에겐 엄마의 연주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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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세계 100대 피아니스트가 전하는 인생 수업!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네 살 때 건반 앞에 앉은 뒤로 50년이 넘도록 연습과 연마를 거듭해오며 깨달은 인생 내공을 전합니다.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다시, 연습이다
이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처음 피아노 의자에 앉았을 때를 어렴풋이 기억한다. 키가 나보다 크고 몸집은 몇 배나 되는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댕, 하고 눌렀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 한 켠에 남아 있다. 나에게 처음 피아노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사람은 외할머니였다. 네 살배기인 나를 피아노 학원에 데려간 외할머니는 “그래도 숫자는 알고 나서 시켜야 한다”는 학원의 거절을 마주했으나, 레슨비는 똑같이 낼 테니 그냥 옆에 앉혀 두고 피아노 음만이라도 듣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나를 맡기고 왔다. 혹시나 뭘 가르치기엔 너무 어리다고 정말 아무것도 안 가르칠까 봐 불안했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김치를 담그거나 이것저것 음식을 해서 선생님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김치 대신 내 앞에 놓이는 건 코코아였다. 유치원에 다닐 즈음, 외할머니는 새벽 여섯 시가 되면 나를 깨워 피아노 앞에 앉히는 대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를 타주었다. 그래서인지 유년 시절 피아노를 치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면 왠지 달달한 코코아향이 맴도는 것 같다. 김치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다.
외할머니는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누구보다 바랐으나 아직 피아니스트는커녕 피아노 꿈나무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던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다. 그래도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누구보다 바라지 않았던) 아버지에게는 단 한 번이라도 무대에서 연주를 들려줄 기회가 있었지만, 정작 외할머니에게는 전혀 그럴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은 참 아쉽다. 당신의 고맙고도 탁월한 선택 덕분에 피아노를 시작한 손녀가 여기까지 왔다면서, 정말 좋은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아, 물론 이건 한참 나이가 든 지금에야 하는 아름답고 기특한 생각이고, 솔직히 말해 나에게 피아노의 길을 제시해 준 외할머니를 원망한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연습을 몇 번이고 반복해도 도저히 진전이 없어서 주먹으로 머리를 찧고 발을 동동 구르고 할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못할까?’ 하고 자책하다가도, 자책에 자책을 거듭하다 보면 그것이 온갖 사람을 향한 원망으로 향할 때도 있었다. 한참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주요한 표적이었다. ‘재능도 없는 나한테 피아노는 왜 시켜가지고!’
음악인이 있는 집안도 아니었으니 외할머니조차 몰랐을 거다. 음악을 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아무리 많이 연습을 해도 늘 연습을 못 했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며 살아가야 하는 직업일 줄은.
실력이 쑥쑥 커가던 십대 때만 해도, 나는 이 피아노를 오십 년 정도 하면 이미 달인이 돼서 무슨 곡이든 자유자재로 치게 될 줄 알았다. 오십 년을 한 다음에도, 체력이 예전같지 않은 와중에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매일 연습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빛나는 조명 아래 무대에 선 나 자신만을 상상했지, 무대에서 몇 시간의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그 곡을 몇 달 동안 연마해야 할 줄이야.
가끔은 이렇게 고된 직업이 세상에 또 있나 싶을 때도 있다. 하물며 아이를 키우는 연주자로서의 생활은 정말이지 수행에 가까웠다. 서울대를 떠나 미국에 건너와 뉴욕 아파트에서 살 때는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밤새워 연습하고 또 아침이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다음 잠깐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어느 날인가는 연습을 하다 피곤한 몸으로 거실에 나와 물 한 잔을 마시는데, 그 모습을 보며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이 물었다.
“연습을 그렇게 해도 아직도 못하는 거야?”
나는 물을 다 마시고 나서 다시 연습하러 들어가며 대답했다.
“응, 아직도 잘 안 되네.”
그나마 나는 모르고 시작했는데, 이런 사정을 뻔히 다 알고도 음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내 아들이 존경스럽다(짠하기도 하고).
잠깐 피아노 연습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야기해 두는 게 좋겠다. 피아노 연습은 오늘은 몇 시간 동안 해야지, 하는 것처럼 시간 단위로 계획하지 않는다. 오늘은 이것을 끝내야지 하는 식으로 그날의 과업이 있는 식이다. 대부분의 피아노곡은 이십 분에서 삼십 분 분량이고 그보다 긴 곡도 많기 때문에 시작 단계에서 한 곡을 통째로 연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악보를 보고 어느 정도 분량까지 나아가겠다고 마음먹고 그 계획을 지키려 애쓰는데, 아무리 연습해도 하고 싶은 데까지 못 나아가는 때도 많다. 그런 날은 연습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곡이 나에게 익숙해지는 데는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데, 그것도 별다른 일상생활을 하지 않고 오롯이 피아노에만 집중하면 되는 사람들 이야기다. 나처럼 아이라도 키우게 되어 이런저런 생활을 해야 한다면 한 달이 부쩍 넘어가곤 한다.
자, 이제 한 곡을 다 외웠으니 무대에 올라 관객들 앞에서 멋지게 선보이면 되는 걸까? 안타깝지만 이제 막 다 외운 곡의 첫 번째 연주가 매끄럽게 잘되는 일은 절대 없다. 클래스를 열어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여 피드백을 받고, 자신의 선생님에게도 들려주면서 연주의 수준을 또 한참이고 끌어 올려야 한다.
하나의 곡을 연습하는 데 이렇게 지난한 시간이 걸리는데, 한 기간에 한 곡만 연습할 수 있는 것은 중학교 때까지의 이야기다. 특히 본격적으로 국제 콩쿠르에 참가하는 이십대가 되면 이미 배워서 연주 단계에 들어선 곡과 생소하거나 새로운 곡의 연습을 함께 돌려야 한다. 새 곡을 배우는 동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곡을 계속 연마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늘 말하곤 한다. 곡이 익숙해질 때쯤이면 다른 한 곡의 악보를 보기 시작하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달 전의 실력으로 돌아가는 불상사에 처하지 않으려면 당연히 단 하루도 연습을 쉬어서는 안 된다.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와도
아무런 성취 없는 하루에도
내가 칠 곡을 남의 연주로 듣고 감명 받아 ‘이 대목은 나도 저런 식으로 소화해야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이런저런 방법으로 건반을 눌러봐도 기대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기교가 주는 어려움은 그나마 시간을 투여하고 악바리처럼 버티고 기다리면 언젠가 정복할 수 있다. 하지만 기교가 아닌 소리의 문제는 끝까지 극복되지 않을 때가 많다. 처음 셔먼 선생님의 리스트를 듣고 나의 연주로는 도저히 그 소리를 낼 수 없었을 때 내가 얼마나 큰 자괴감에 휩싸였던지, 결국 나는 지금까지도 그 곡을 연주하지 못한다.
이러니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쳐오다가도 중간에 그만두고 다른 길로 향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포기하거나 다른 길을 걷기로 한 동료들을 떠나보내면서도, 그들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던 나는 어째서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피아노를 칠 수 있었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방황할 때마다 나에게 옳은 길을 제시해 준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났다는 행운이 주어졌기 때문이겠고, 두 번째 이유는 나에게 연주 말고는 사람 노릇을 할 만한 대단한 재주가 없어서일 테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머나먼 미국 땅에서 홀로 공부하다 보니 이 음악의 길이, 마치 더 이상 내가 벗어날 수 없는, 말하자면 타고나거나 이미 주어진 운명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나는 미국에서 살게된 열네 살 즈음부터 이십대 후반이 되도록 거의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일기를 써왔는데, 하루하루의 내용을 보면 당장 그날이라도 피아노를 접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이다. 그중에는 이십대 중반에 처음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했을 때의 기록도 있다. 하필이면 그중에서도 가장 현란하기로 유명해서(악명 높아서) “세상에서 라흐마니노프만이 연주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도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순전히 힘들고 어려워서 이 곡은 못 할 것 같다고까지 생각한 것은 내 피아노 인생에서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여기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는 이 글에도 옮겨오기가 민망해서 그 생생한 푸념을 고스란히 싣지 못할 정도인데, 그중엔 내 성별을 핑계로 대는 구절도 있다. 이 곡을 칠 수 없는 것은 순전히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얄미운 라흐마니노프가 남자 연주자나 칠 수 있는 곡을 쓴 거라고(혹시나 당시의 내가 조금이라도 덜 지질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변명하자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힘이 많이 들어가고 또 체력을 많이 요하는 만큼 여성 피아니스트들은 이 곡을 피하는 게 좋다는 말이 실제로 돌기는 한다).
다행히도 그 며칠을 이어가던 푸념과 원망과 자학은 한참이 지나서 다짐으로 돌변하긴 했다. 그런 다짐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곡을 칠 때면 으레 내가 나 자신을 향해 꺼내들곤 하던 무기였다. 일기 속에서 나는 자신에게 말한다.
“이 곡을 하지 않으면 너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이걸 하지 않고 스스로 피아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사기를 치는 거다. 하지 않을 거라면 그다음부터는 스스로를 피아니스트라고 부르지 마라.”
피아노 연주가 다짐만큼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뒤로도 오랫동안 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소화하지 못하는 사기꾼으로 존재했다. 스물아홉 살에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준비하면서도 다시 그 곡을 붙잡고 연습했으나 콩쿠르에 도전하기에는 역부족임을 느끼고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선택했다. 반면 함께 참가함 러시아의 니콜라이 루간스키는 영락없이 라흐마니노프를 선택했고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
“이 곡을 하지 않으면 너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라는 다짐은 그 뒤에도 그치지 않았다. 영영 사기꾼으로 남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이 곡을 연주할 기회가 주어졌다.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지휘하는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하는 무대였다.
내가 피아니스트가 맞는다는 것을,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정도의 실력은 쌓았지만, 정말로 최고 수준의 연주자와 협연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나 스스로에게 당당해진 것은 그로부터도 십 년은 더 걸렸던 것 같다. 곡 하나에서 ‘성취’라는 것을 얻기까지 삼십 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그 성취라는 것도 과연 내 삼십여 년의 노력에 합당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피아니스트를 비롯하여 연주자라는 직업이 원래 그렇다. 보통의 직업은 인정, 성공, 성취, 보람, 지위, 유명세 등을 통하여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기 마련이다.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늦더라도 언젠가 마땅한 진전과 보상이 주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연주자에게는 노력과 성취의 등가교환이 주어지는 법이 결코 없다.
피아니스트에게도 가끔씩 보상이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꼭 알아두어야 한다. 잔인하고 잔혹하지만, 정말 아무런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걸. 하루 열 시간의 연습을 반복했는데도 단 한 발짝을 나아가지 못할 수 있다.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인기와 유명세는커녕 존재감조차 얻지 못할 수 있다. 그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넘길 것인가. 특히 자기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기를, 스타가 되기를 기대하는 연주자가 말이다.
순진하다 할지도 모르겠으나 연주자로서 내가 내린 답은 이렇다.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연주자는 자기 연마를 통해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나는 아무런 진전도 거두지 못했지만 이렇게나 열심히 연습했고 그러니 내일은 한 발 나아가게 되리라, 하며 헛되어 보이는 시간에 기어코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시간이 행복이고 축복이라는 것을 진실되게 느껴야 한다. 사람이 자기 마음에 따라 어찌할 수 없는 것이 ‘결과’라면, 적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과정’만이라도 충실히 그리고 기꺼이 따라야 한다.
더 순진한 소리를 하나 덧붙이자면, 다행히도 음악은 진심으로 연마하는 연주자를 영영 버리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오십 년 넘게 피아노를 쳐오면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래왔다. 자기 연마만으로 만족하는 것을 거듭하며 어느 순간 한계에 봉착해 ‘이제 진짜 끝인가 보구나’ 할 즈음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회가 등장하고 성취감을 일으키면서 나를 계속 음악으로 이끌었다. 생각해 오면, 살아오면서 사람도, 사랑도, 직장도 모든 것이 결국 끝에 가서는 나의 기대를 실망시켰다. 하지만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끝끝내 나에게 실망을 주지 않은 것은 음악 하나뿐이었다.
종착역 없는 행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들어가는 연주자로서 나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기교적인 면에서 젊고 창창한 연주자가 들려주는 수준을 나는 결코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무대에서 한번도 해오지 않았던 획기적인 기획을 시도하는 일도 그들보다 부족할 것이다. 한 세대 이전의 연주자인 내가 지금의 젊은 연주자들만큼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대중을 상대로 감동을 자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연주를 계속해 볼 생각이다. 젊은 연주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연주가 있다면, 늙어가는 연주자가 들려줄 수 있는 연주도 있다. 러셀 셔먼 선생님이 아흔에 다다른 나이에도 연주 자체로 나를 울린 것처럼, 예순, 일흔이 넘은 나의 선배들이 저 앞에서 음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나도 나만의 세계를 그려가고 싶다.
내가 오를 무대가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지만 아직은 쉽게 물러서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이 글을 쓰는 나의 나이는 쉰여덟이다. 한 예술가가 정말로 자기의 세계를 걷고 있는가를 보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나이다. 예순 살은 훌쩍, 아니 일흔 살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그때까지 연주자로 남아서 여태 예술에 파고들고 있는 사람이 진정한 예술가이다. “저 사람은 정말 ‘쟁이’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삶 말이다.
후배들의 길을 가로막겠다는 뜻은 추호도 아니다. 젊었을 때와 달리 반드시 큰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도 이제는 없다. 더 이상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졌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 연주를 진정으로 들어주는 관객 앞이라면 그걸로 족하다. 나는 선생의 입장에도 서 있기에, 내가 못다 한 것은 나의 후배나 제자들이 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이런저런 엄살을 늘어놓았지만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들면서 쉬워지고 편해지는 것도 많이 있다. 연주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근육운동인 만큼 예전에는 하루에 여덟 시간에 이르는 강행군의 연습을 매일 반복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느 시기에 이르니 손가락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근육운동이 조금 덜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는 신체적인 훈련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전달할지, 그리고 나의 생각과 마음이 들려주고 싶어하는 목소리를 나의 피아노 소리와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지를 객관적으로 듣고 고민하는 정신적인 연습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십대 때 셔먼 선생님을 사사하면서, 내가 육칠십 살이 되어도 음악을 하고 있을 것인가를 혼자 궁금해했다. 다행히도 이대로라면 얼마 남지 않은 예순 살에는 음악을 하고 있을 것 같다. 한동일, 신수정, 백건우, 정경화, 정명훈, 이경숙…… 존중과 존경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의 영웅이자 위인들이 이름이다. 러셀 셔먼과 변화경 선생님이 그랬듯이 이들은 혼자 늙어가지 않았다. 그들이 소리가 남긴 여운을 따라다니던 청중과, 또 그들의 연주와 가르침을 통해 늦게나마 깨달음을 터득한 수많은 제자와 함께 늙어갔다. 내가 따르고 싶은 길이 바로 그 길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나의 연주를 찾아주는 청중들과 함께, 그리고 순수히 음악에 헌신하는 후배와 제자들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음악을 하면서, 이 거대한 산을 끝없이 등정하는 기분으로 음악에 헌신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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