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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럭키 드로우
저   자 : 드로우 앤드류
출판사 : 다산북스
출판일 : 2022년 01월

  • 럭키 드로우


    결과는 모르지만 두렵기보다는 설레는 순간

    스물다섯 살, 내가 당긴 첫 번째 레버

    3년간의 휴학을 마치고 복학한 학교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함께 입학했던 동기들은 이미 취업을 했거나 취업 준비에 한창이었고, 나는 처음 보는 후배들과 4학년 1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주변에선 다들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이렇다 할 계획이 없는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무렵 학교 도서관에 들렀다. 그러다 문득 도서관 게시판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 시선이 꽂혔다. 미국 인턴십에 참가할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한번 지원이나 해보자는 생각이었고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막상 서류를 제출하고 나니 미국에서 일하는 내 모습이 그려지면서 괜히 설레기 시작했다. 내게 해외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사람들은 로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어쩌면 이 인턴십이 내가 평소 선망해오던 삶에 나를 더 가까이 데려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 서류 전형에 합격해 면접을 보러 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나와 함께 면접을 본 학생들 중에는 미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 토익 스피킹 점수가 아주 높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영어 면접은 나도 자신이 있었다. 휴학 후 1년간 머물렀던 호주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수많은 영어 면접을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우연히 포스터를 발견해 ‘한번 지원이나 해보자’며 도전한 인턴십 프로그램에 진짜로 합격해버린 것이다. 그 뒤로 미국 이민국과 에이전시 그리고 현지 회사와의 화상 면접을 통해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에 LA의 한 한인 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나의 첫 번째 럭키 드로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렇게 길고 고된 여정이 될 줄은 몰랐지

    아직 사회에 나가기 두려웠던 내게 미국 인턴십은 도피처였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자랑할 만한 영어 점수나 공모전 입상 같은 스펙도 없는 내가 과연 제대로 된 회사에 취업이나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1년이라는 인턴십 기간 동안 앞으로 내가 진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아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이것이 길고 고된 여정의 시작일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미국에 도착하고 이틀이 지나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주 가디나라는 도시에 위치한 한인 회사였는데, 사무실에 있는 대다수의 직원은 한국에서 이민을 온 분들이었다. 국제전자제품박람회나 매직 쇼(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매년 2월, 8월에 열리는 북미 최대의 패션 박람회) 같은 공간에 들어가는 부스를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회사였고, 내가 맡게 된 일은 부스에 필요한 디지털 파일을 내려받아 시트지 전용 프린터로 출력해 부스 벽에 붙이는 무척 단순한 업무였다. 그로부터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미국에서의 생활도, 회사의 일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을 무렵 회사에 조금 복잡한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 날 팀장님이 나는 조용한 곳으로 불렀다. “앤드류, 뭐 잘못한 거 있지? 본인은 알 텐데?” 갑작스러운 팀장님의 추궁에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정확한 내부 사정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는 아무튼 내가 누명을 쓰게 된 것만은 확실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앞으로 뭘 조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회사에서 최약자였던 나는 그저 상사에게 잘못을 비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이 사건은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으로 밝혀졌고 나의 누명도 자연스럽게 벗겨졌다. 하지만 당사자인 나는 쉽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를 협박한 팀장님 밑에서 더 이상 웃으며 일할 자신도 없어졌다. 며칠 고민 끝에 나는 인턴십 에이전시에 연락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에이전시 측에서는 내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남은 기간을 잘 마치고 귀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달 안’에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 한 달 안에 새 회사를 찾지 못하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다음 날 평소처럼 출근을 한 뒤 에이전시에 전화를 걸었다. “저 이직 해볼게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두려움과 걱정은 회사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싹 사라졌다. 나는 스스로 답을 내렸다. 나 스스로도 내가 가진 것이 보잘 것 없다는 걸 잘 알았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나의 잠재력을 이력서와 포트폴리오에 고이 담아 이곳저곳에 닥치는 대로 보냈다. 그렇게 나의 럭키 드로우는 또다시 당겨졌다. 


    시급 10달러를 받고 일을 시작하다

    이력서를 돌린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아 면접을 보러 갔다. 홍콩의 종이 공장을 기반으로 미국에서 문구 사업을 시작한 신생 회사였다. 나는 구인광고에 나와 있던 시급보다 2.5달러나 낮춘 시급 10달러로 나를 한 달 만이라도 써볼 것을 제안했다. 어떻게든 미국에서 살아남고 싶었던 내게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잡다한 심부름을 하던 인턴에서 직원 3명의 자그마한 문구 회사의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만 빼고 라스베이거스에 놀러 간 팀원들

    미국에 온 지 햇수로 3년이 되었다. 두 번째 회사에서 일한 지도 2년이 넘었고 어느새 나는 회사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직원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혼자서 회사의 모든 디자인 업무를 도맡았지만, 동료 디자이너들이 들어오면서 서로 일을 분담해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게 되었다.


    직원들이 늘어나며 회사의 규모가 커지자 관리자가 필요하다고 느낀 레이먼 사장님은 자신의 친구 캐리를 회사로 데려왔다. 그녀는 디자이너와 마케터의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나를 탐탁지 않아 했고, 내가 디자인 업무에만 집중하길 원했다. 회사는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몫을 해야만 했던 ‘수평적 스타트업 구조’에서 모든 것이 분업화된 ‘수직적 계층 구조’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금씩 나의 업무를 줄여나갔고 내가 열심히 관리해온 회사 인스타그램 계정마저 마케팅팀에 위임하라고 지시하며 멋대로 비밀번호도 변경해버렸다. 그녀와 타협점을 찾지 못한 나는 브랜드 분리를 선언했고 새로운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그동안 준비해온 레트로 스타일을 바탕으로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했다. 다행히도 새로 만든 브랜드는 한 유명 블로거를 통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감독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문구 브랜드”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원래 우리 회사의 제품을 취급하던 바이어들의 주문도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밤을 새워가며 일한 보람을 느끼며, 부디 내가 만든 제품이 무사히 생산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사실 이 제품을 기획할 당시 ‘생소하다’는 이유로 회사의 반대가 심했다. 이 때문에 제작이 늦어지면서 해당 제품의 재고가 중국 공장에서 미국으로 제날짜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공장과 소통하는 일을 담당하는 잭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캐리 매니저가 따로 미팅을 잡아서 제작 주문량을 확 줄였어.” 그녀는 매섭게 나의 의견을 묵살해버렸고 그 뒤로 나를 향한 보복은 더욱 심해졌다.


    패션업계에 오래 종사했던 그녀는 소소하고 캐주얼한 이미지를 구축해온 우리 브랜드를 자꾸만 트렌드에 민감하고 패셔너블한 브랜드처럼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라스베이거스의 한 패션쇼에 스폰서로 참가해 회사의 문구 브랜드를 홍보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소소하게 다이어리 꾸미기를 좋아하는 고객들을 위한 브랜드가 패션쇼 스폰서라니…


    그렇게 패션쇼 스폰서 제안이 받아들여지며 캐리와 마케팅팀은 라스베이거스에 출장을 가게 됐다. 결국 나와 새로 입사한 직원 1명을 제외한 모든 직원이 라스베이거스 패션쇼에 가게 됐다. 그날 저녁 동료들의 인사타그램에는 라스베이거스 호텔에서 다 같이 파티를 하며 즐겁게 노는 영상이 올라왔다.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출장을 가장한 워크숍에서 내가 철저히 배제당했다는 것을.


    앤드류는 내일부터 나올 필요 없어

    회사에 인원이 많아지자 사무실을 더 넓은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마침 내가 살고 있던 집의 계약 기간이 끝나 새로운 사무실 근처로 미리 이사를 한 상태였다. 영혼 없이 회사를 다니다 보니 일에 성과가 나지 않았고 리프레시가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새로운 사무실에서 일할 날이 기다려졌다.


    드디어 사무실 이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리한 짐들을 내 차에 싣고 나오는데 레이먼 사장님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앤드류는 내일부터 회사에 나올 필요 없어.” “아니, 절 이렇게 갑자기 해고한다고요? 지금 저랑 장난하는 건가요?” 그동안 같이 일한 시간이 무색할 만큼 차가운 말투였다.


    비록 고용된 직원이었지만 내 회사처럼 늘 최선을 다해왔기에 배신감은 더욱 컸다. 하지만 회사 일이라는 건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회사 브랜드의 가치를 키우려고 열심히 일해왔지만 정작 나라는 브랜드는 전혀 키워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의 가치가 나의 가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냉정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시간이었다.



    내가 설 무대가 없다면 직접 만드는 수밖에

    불공평한 세상을 나를 위한 무대로 만들 순 없을까

    나는 일이 그리웠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하고 싶어서 하는 일. 하지만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이 우울감과 무기력의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러던 중 습관처럼 손가락을 튕겨 확인하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답을 찾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SNS를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나도 사진 잘 찍는데. 나도 인스타그램 잘하는데. 그래서 우리 브랜드도 팔로워가 많아졌잖아. 나도 할 줄 아는데 왜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거지? 나랑 그들이 다른 게 뭐야?’ 하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에겐 팔로워를 바탕으로 한 실질적인 영향력이 있었고 나에겐 없었다. ‘잠깐, 그럼 나도 인플루언서가 되어서 영향력을 갖추면 되잖아?’ 그들이 부럽다면 나도 인플루언서가 되면 되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이 있다. 나는 회사 SNS 계정을 운영하며 맨땅에서 시작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경험이 있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내가 배운 ‘인스타그램의 성장 방법’은 계정의 목적에 맞춰 페르소나를 정해 일관성 있게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을 때는 ‘캘리그래피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LA에 살며 캘리그래피를 하는 사람’이 페르소나가 되었고 ‘캘리그래피’가 그에 맞는 콘텐츠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업이나 개인으로부터 협찬 광고를 받는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을 새로운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고 드디어 커뮤니티에서 내 사진이 인기 게시물에 오르자 나는 여러 브랜드에 DM을 보내 멋진 사진을 찍어줄 테니 제품을 협찬해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거절도 많이 당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반응을 보이는 브랜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협찬으로 사진을 찍어줬다. 그러자 해당 브랜드의 계정에 종종 내 사진이 리그램(인스타그램에서 누군가의 게시물을 똑같이 복사해 자신의 게시물로 다시 올리는 것)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내 게시물이 사람들에게 노출되면서 팔로워가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나는 미국에서 서서히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사람이 되어갔고, 브랜드 이벤트 행사나 프라이빗 클럽 파티에 초대되어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사진을 올려주고 광고비를 받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남의 일 말고 나의 일

    새로운 회사를 다니며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동안 돈 때문에 좁은 방 한 칸을 빌려 살았는데 이제는 넓은 거실이 딸린 큰 집으로 이사를 갔다. 업무량이 많지 않아 야근도 거의 없었고 트레이드쇼나 페어 때문에 지방으로 출장을 나갈 일도 없었다. 저녁 5시에 퇴근하면 운동을 하거나 저녁을 먹으며 재밌는 영화를 보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주말에는 해변이나 공원에서 스케이트보드를 원 없이 타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늘 바라던 일상이 현실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인간을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평온하고 안정된 일상이 반복되니 점점 지루해졌다. 아니, 단순히 지루함을 넘어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즐겁기만 했던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에도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나만의 레버를 당겨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벌써 올해가 거의 다 지나갔는데 이대로 그냥 해를 넘기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좋은 영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곧장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6시 퇴근, 이제 나의 일을 해야 할 시간

    유튜브를 시작한 뒤 일상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출근길엔 내 유튜브 채널에 사람들이 남겨준 댓글을 읽었고, 점심시간엔 새 영상을 기획했다. 퇴근후엔 집에서 드라마를 보며 저녁을 먹는 대신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했다.


    유튜브 채널이 성장할수록 몇 가지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유튜브 영상을 만들다 보니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 사람들’이 구독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한국에 있는 기업들로부터 강연이나 협업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미국에 살고 있던 나는 대부분의 제안을 포기해야만 했다. 물론 영어로 만든 영상을 올리는 유튜브 채널 ‘Drawandrew’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지만, 한국어 영상을 올리는 ‘드로우앤드류’ 채널이 훨씬 더 빠르게 성장했다. 결국 나는 한국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유튜브 채널 운영에 더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계획보다는 기회를 좇기로 했어

    20대를 지나며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 하나 있다. ‘계획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늘 계획이 아닌 기회를 따라갔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전혀 몰랐다.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른 채 그저 내 앞에 놓인 기회를 쫒았다.


    결국 중요한 건 “지금 행복하니?”라는 질문에 “행복하다”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뒤, 나는 회사에 퇴사 의사를 밝히고 곧장 짐을 싸서 사무실을 나왔다. 다행히도 큰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시기였기에 회사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일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브라이언 팀장님도 내 결정을 응원해줬다. “앤드류, 그동안 고생 많았어. 너는 어디서든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또다시 나는 계획보다는 기회를 좇기로 했다.


    엄마, 저 딱 1년만 놀게요

    그동안 해외에서 살아남기 위해 혼자 발버둥을 치며 고생한 아들이 가여웠는지 어머니는 서른 살 먹도록 모아둔 돈도 없이 부모님 집에 당분간 얹혀살겠다는 아들의 염치없는 부탁에 이렇게 말해주셨다. “너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왔어. 조금 쉬어 가도 돼.”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와 집 앞 공원을 매일 걸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공원에 나와 혼자 걸었는데 문득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집에 돌아와 미국에 있을 때부터 유튜브를 통해 댓글로만 소통하던 유튜버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회사를 다니며 유튜브 활동을 병행하던 우리는 첫 만남부터 급속도로 친해졌다.


    당시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 회사에 다니던 그는 내게 회사 동료를 소개시켜줬고, 아예 온라인 클래스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나는 그동안 유튜브를 통해 나누었던 내용을 토대로 ‘인스타그램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온라인 클래스를 론칭했다. 반응을 예상외로 폭발적이었다. 그동안 유튜브를 통해 내 가치를 믿어준 많은 구독자가 온라인 클래스를 수강해주었고 하루 만에 얼리버드 티켓이 모두 마감되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 온라인 클래스에 올릴 콘텐츠를 제작해야 했다. 가족들 없이 혼자 온전히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날 바로 부동산에 연락해 조그만 오피스텔을 알아봤다. 당시 내 통장에는 미국에서 모은 1000만 원이 전부였다. 유튜브를 통해 매달 들어오는 평균 수익금은 70만 원 정도였다. 우선 1년간의 생활비로 사용하려고 했던 1000만 원의 절반을 보증금으로 내고 월세 70만 원짜리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사이 한국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학교와 회사는 문을 닫았고 온라인 교육과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오프라인 세상은 멈췄지만 그 밑에서는 모든 것이 서서히 온라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때맞춰 나의 ‘인스타그램 퍼스널 브랜딩’ 클래스가 세상에 나왔다. 정확히 한 달이 지나자 매일 작업실에 처박힌 채 만들어낸 온라인 클래스의 첫 정산금이 통장에 들어왔다. 내 클래스는 수강생들의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통해 입소문을 탔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수강을 신청했다.



    부자는 아니지만 돈은 잘 법니다

    세상과는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

    세상에 나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브랜딩 기획도 하고 나의 메시지도 찾았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그런데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관심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소통 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성장하고자 하는 분야에는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당신이 이야기하려는 메시지를 이미 전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때 그들을 경쟁자라고 생각하면 당신은 아주 힘든 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셜미디어 안에서는 한 콘텐츠가 인기를 끌면 알고리즘이 그와 비슷한 콘텐츠를 계속 소비자들에게 추천해준다.


    이때 나와 비슷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내가 진입하고자 하는 시장을 먼저 개척해주고 사람들의 수요를 증명해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며 함께 파이를 키우려고 해야지, 그들의 파이를 빼앗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해보자.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댓글로 통해 살펴보자.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에 공감하는지, 내 콘텐츠는 그들과 어떻게 다르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 바로 이것이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호감을 얻는 소통 전략이다.


    세상에는 전문가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소셜미디어는 멀게만 느껴지는 ‘전문가’보다 친구 같은 ‘리더’가 더 환영받는 곳이다. 전문가는 가르치려고 하지만 리더는 함께 성장하며 영감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 말하는 ‘광고’는 잠깐 반짝일 수 있지만 결국 오래도록 사랑받는 건 모든 가정을 공유하는 ‘드라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했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갔는지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사랑받는 콘텐츠를 만들고 사랑받는 리더가 되는 가장 쉬운 길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마지막 소통 방법은 바로 ‘일관성’이다.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는 콘텐츠를 통해 일관된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야 한다. 처음에는 잘해주는 것 같더니 시간이 갈수록 태도가 변하고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일관된 태도가 선행되어야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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