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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운 시프트
저   자 : 최승우
출판사 : 용오름
출판일 : 2019년 01월

  • 다운시프트


    서드 에이지, 새로운 여정의 시작

    서드 에이지의 출현

    내 서재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 중에서 ‘서드’ 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베스트셀러가 한 권 있다. 바로 1981년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라는 책이다. 20세기 저명한 미래학자의 역작인 <제3의 물결>은 지식을 기반으로 한 정보화 시대의 도래를 예언한 책으로 1980년대를 통틀어 대학생,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였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영국에서 ‘서드 에이지’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의 부제가 달린 책이 등장했다. 바로 역사학자 피터 래슬릿이 쓴 <인생의 새로운 지도: 서드 에이지의 출현>이라는 책이다. 흥미롭게도 두 책에 똑같이 ‘서드’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하나는 미래학자가, 다른 하나는 역사학자가 펴낸 책이다. 토플러는 미래에 다가올 제3의 물결을 예견한 반면, 래슬릿은 역사적 관점에서 과거와의 다른 생애 주기인 제3의 인생, 즉 서드 에이지라는 새로운 삶을 상정한 것이다.


    영국에서 서드 에이지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산업화가 고도로 성숙되고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래슬릿이 자신의 저서에 서드 에이지라는 말을 쓴 것도 영국인의 평균 수명이 75세 이상으로 늘어난 이후다. 우리나라에서 서드 에이지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고령화 현상이 급진전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다. 1987년에 70세를 넘어섰고 2012년에는 80세를 돌파했다. 고령화 현상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면서 장수혁명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인생 100세 시대의 생애 주기는 다음과 같이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퍼스트 에이지는 출생 후 성장해가면서 교육을 통해 사회화되어가는 ‘배움’의 단계다. 10대에서 20대 중반까지가 이 나이 대에 해당된다. 세컨드 에이지는 취업을 하고 가족을 형성해 독립적인 사회인으로서 경제활동을 왕성하게 펼쳐나가는 ‘행동’의 단계다. 30대에서 40대 후반까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서드 에이지는 인생의 하프라인을 돌고 나서 2차 성장과 자기실현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나가는 ‘발견’의 단계다. 50대 이후 70대 중반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포스 에이지는 본격적인 노후 생활을 영위하는 시기로 타인에게 기억될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일생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노화와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다.


    사회적 가치의 변화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나 직장에서의 명예퇴직, 자발적 경력 전환 등으로 50세 전후부터 하락하기 시작한다. 하프라인을 돌아 서두 에이지에 진입하고 나면 후반부 인생이 시작된다. 서드 에이지는 2차 성장을 통해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자기실현의 가치가 상승하는 시기다. 여기서 자기실현이란 숨어 있는 자아의 잠재력을 발견해 전체 인격으로서 자기의 모습을 완성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첫 직장 퇴직 후 전문 강사 여행 해설가, 큐레이터, 작가, 사회봉사자 등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하며 성장해나가는 것이다.


    늙어가지 말고 포도주처럼 익어가자

    사람마다 은퇴 이후 나이를 먹어가는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로 다른 느낌과 해석이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스티븐 필립스는 사람이 늙어가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했다. 내가 은퇴 관련 강의를 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학생이나 수강생들에게 반드시 소개하는 명언이다.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와인처럼 익어가는 것이다.”


    50세를 전후로 시작되는 서드 에이지는 인생의 하프라인을 돌고 후반부 삶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즉 장수 혁명으로 주어진 서드 에이지는 포도주처럼 잘 익어가는 인생 후반기를 살기 위해 숙성되는 기간이다. 그리고 술을 새 부대에 담듯이 서드 에이지를 향해 힘차게 이륙하는 열정과 에너지로 다시 채워야 한다. 인생의 전성기는 전반부에 오지 않는다. 장수혁명 이전에는 30~40대가 전성기였지만, 인생 100세 시대에는 50세의 하프라인을 통과해 60~70대가 되어야 잘 익은 포도주로 숙성된다. 기대수명이 단순히 길어진 데 그치지 않고, 더 활력 있고, 풍요롭고, 삶의 의미가 깊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와인 비평가 로버트 파커는 “맛있는 와인은 비싼 포도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담긴 포도로 만든 와인이 가장 맛있다.” 라고 말했다. 따라서 인생의 전반부에 값비싼 포도가 아니라 사랑으로 영근 포도를 많이 수확한 다음, 이것을 가지고 서드 에이지로 넘어와 인생의 후반부에 잘 익은 와인으로 숙성시켜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의 로드맵을 멋지게 그려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베일에 싸여 있는 돈의 본질과 속성을 제대로 파악해 자신이 돈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서드 에이지에는 성공이 아니라 목적 중심의 성장을 추구하고, 다운 시프트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를 실현해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생 후반부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해 자신만의 행복경제학을 다시 써내려 가야 한다.



    돈의 본질

    경제학이 가르쳐 주지 않는 돈의 본질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앨프리드 마셜 교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창시자다. 그는 “경제학자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심장을 가져야 한다” 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가 사망한지 100년이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경제학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경구다. 여기서 차가운 머리는 냉철한 지식을 상징하고, 따뜻한 심장은 덕성과 사랑 같은 온정어린 인간미를 뜻한다.


    그러나 정작 영어로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 economy의 단어적 의미는 단순하다. 이 단어는 집을 의미하는 오이코스oikos와 법이나 규칙을 뜻하는 노모스nomos라는 두 헬라어의 합성어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원래 경제학의 어원적 의미는 ‘가계를 관리하는 규칙’ 또는 ‘집안 살림살이’라는 정도의 뜻을 가진다. 반면에 동양권에서는 경제의 의미는 영어의 이코노미와 범위가 다르다. 일본 메이지 시대에 신지식인들이 영어의 이코노미를 경제라고 번역했다. 이 용어가 일본으로부터 중국이나 한국으로 역수입되어 통용되고 있다.


    위에서 보듯이 경제학은 동서양에서 범위는 다르지만 다같이 ‘살림살이’를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경제학의 분야를 학문적으로 크게 나누면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으로 대별할 수 있다. 먼저 ‘나무’에 해당되는 미시경제 이론은 제일 먼저 효용의 개념을 소개하는 소비자이론으로부터 시작된다. 미시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변수는 개별 상품의 가격이다. 개별적 가격이야말로 재화의 수요와 공급, 자원의 분배 이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숲’에 해당되는 거시경제 이론은 국민 경제의 총체적인 관점에서 국민소득이나 고용 및 일반적 물가 수준 등을 중요한 변수로 다룬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나무’에 해당하는 미시경제학과 ‘숲’에 해당하는 거시경제학을 동시에 바라다볼 수 있는 쌍안경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경제학이 살림살이를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돈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미시경제학의 주된 관심은 효용이나 가격이고, 거시경제학은 소득과 물가 안정, 성장에 초점을 둔다. 돈의 속성이나 그 안에 녹아 있는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직접 가르쳐주지 않는다.


    “경제학자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심장을 가져야 한다” 던 마셜의 경구처럼 차가운 머리로는 돈의 겉면에 해당하는 재무적 측면을, 따뜻한 심장으로는 돈의 안쪽에 해당하는 비재무적 측면을 서로 균형있게 다루어야 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들

    미다스는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음에도 언제나 더 많은 재물을 손에 넣는 것이 소원인 인물이다. 어느 날 미다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자기가 손을 대는 어느 것이나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디오니소스는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들이 발생한다. 음식을 먹으려고 손을 댔더니 황금으로 변해 먹을 수가 없었다. 배가 고파 상심한 나머지 엉겁결에 딸을 안았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딸마저 황금으로 변해버렸다.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달라고 간청한다. 디오니소스는 술김에 한 일이니 선심을 쓴다. 미다스가 강물에 목욕을 하니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온다. 황금 조각상으로 변한 딸도 강물에 담그고 다시 인간의 모습을 되찾는다.


    미다스의 손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해보자. 조선시대 말기 불운했던 선비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친숙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이름이다. 바로 방랑 시인 김삿갓이다. 원래 그의 본명은 김병연이다. 그는 조선 순조 때 과거에 응시해 홍경래의 난 때 봉기군에게 항복한 선천부사를 비판하는 글로 급제한다. 나중에 그 선천부사가 자기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김병연은 스스로 집안을 욕되게 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괴로워한다. 그러다 결국 벼슬을 버리고 유랑의 길에 나선다. 그는 전국을 떠돌며 부자와 부패한 권력을 풍자하거나 조롱하는 여러 편의 즉흥시를 남겼다. 그래서 김삿갓은 조선 시대 민중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부귀영화와 벼슬을 다 내려놓고 유랑 생활을 하며 돈 없는 서러움을 처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구름에 달 가듯 떠돌던 방랑 시인은 돈에 대해 고고하고 초연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최초로 확립한 철학자다. 형이상학이란 경험의 세계를 초월해 본질적이며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말한다. 이에 대비되는 형이하학은 과학적 연구나 경험에 의해서 관찰 가능하고 현상적인 실체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보면 미다스 왕은 형이하학적이고, 김삿갓은 형이상학적이다. 왜냐하면 미다스 왕은 눈에 보이는 황금에 대한 욕망에 빠져 얼떨결에 사랑스런 딸까지 손댄 반면, 김삿갓은 돈에 초연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고고한 선비의 품격과 덕성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침대, 시계, 책, 의자, 약, 아파트 등은 모두 돈으로 살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것이다. 반면에 여기에 일대일로 대응되는 잠, 시간, 지식, 명예, 건강, 가정 등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다.


    따라서 돈에 대한 본질은 제대로 파악해 돈으로 살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것들과 돈으로 살 수 없는 형이상하적인 것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그래야 서드 에이지 시대에 형이하학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후반부 인생의 로드맵을 품격 있고 가치 있게 그려나갈 수 있다.



    다운시프트

    가치의 프레임을 바꿔라

    나는 대학 시절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철학서들을 즐겨 읽었다. 프롬은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현대인의 고뇌와 인간다움을 통찰하면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몇 년 후 프롬의 신간이 또 한 권 나왔다. 바로 <소유냐 삶이냐> 였다.


    어느 비가 갠 날 오후 두 시인이 산책을 나섰다고 하자. 한 시인은 낭떠러지의 경사진 언덕을 오르다가 갈라진 벼랑 사이에 피어 있는 예쁜 꽃 한 송이를 보았다. 또 다른 한 시인은 오두막집을 지나가다가 울타리 옆에 피어 있는 냉이꽃 한 송이를 보았다. 그리고 각자의 느낌과 언어로 시를 썼다.


    “갈라진 벼랑에 핀 한 송이 꽃, / 나는 너를 틈 사이에서 뽑아 따낸다. / 나는 너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앨프리드 테니슨


    “가만히 살펴보니 / 냉이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 울타리 옆에!”

    -마쓰오 바쇼


    테니슨은 ‘소유하려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테니슨의 손 안에 있는 꽃은 이내 시들어 죽었을 것이다. 반면에 꽃에 대한 바쇼의 반응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꽃의 뿌리를 뽑으려 하지 안고 다만 피어 있는 상태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바쇼는 거기에 만족하고 자신을 꽃과 일치시키면서 서로 ‘존재하려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즉, 두 시인의 프레임의 차이가 결국 꽃의 운명을 죽음과 상생으로 갈라놓았다.


    프롬이 분석한 대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두 가지 생활 양식이 있다. 하나는 ‘소유 양식’ 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 양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물신적 속성은 돈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을 무한대로 부추긴다. 소유 양식에 속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다가 서로 갈등을 낳는다. 사람들은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나 오히려 돈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결국 소유의 노예가 되고 만다.


    반면에 존재 양식은 삶에 대한 고찰과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활 양식이다. 존재 양식에 속한 사람들은 ‘나는 존재하는 나’ 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이 정해진다. 존재의 프레임에서는 소유물을 상실할 위험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서 자유롭다. 그들은 타인을 인정하고 경청하고 사랑함으로써 서로 나눠 갖는 상생과 공유의 즐거움을 누린다. 결과적으로 나의 존재는 ‘실행 하는 나’ 에 의해 자신감을 가지고 성장한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서드 에이지 시대에 인생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것은 삶의 커다란 변화다. 지금 인생의 하프라인을 돌고 있거나 곧 돌아야 할 사람이라면 삶의 가치를 바라다보는 나의 프레임은 무엇인지 스스로 진지하게 짚어보아야 한다. 소유의 프레임의 덫에서 빠져나와 존재의 프레임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삶의 속도가 조절되는 다운시프트가 시작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더 많이 소유한다는 것이 행복의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자기중심성의 함정

    수선화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했다.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사랑하게 되고 그것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결국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미소년이 죽은 자리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났는데 이 꽃을 그의 이름대로 나르키소스, 즉 수선화라고 불렀다. 이 미소년의 슬픈 이야기로부터 독일의 정신과 의사 폴 네케가 나르시시즘 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 후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에서 자신의 존재성이 과장되어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게 되는 자기애를 나르시시즘이라고 했다.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사물의 이치를 주관적으로 해석한다. 대상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자기에 도취하는 경향이 강해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타인과의 소통이 어려워진다. 자기중심성은 사전적으로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의 관점, 필요,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특성을 뜻한다. 자신만의 소우주에 갇혀 있는 독불장군이나 자기 스스로 쇠사슬을 차고 있는 노예와도 같다.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은 심리학자 최인철 교수가 그의 저서에서 말하는 일종의 자기 프레임이다. 자기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사람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창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다본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의사전달이 항상 객관적이라고 믿지만, 자신의 프레임 안에서만 자명할 뿐이다. 타인의 프레임으로 바라다보면 그 내용이 지극히 애매할 따름이다.


    개인으로서 자신은 분명히 내 인생의 주인공임에 틀림없다. 개인의 뜻하는 ‘individual’ 의 단어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다’ 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나 자신은 더 나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삶은 그 어느 것에도 귀속될 수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은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으로서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일원, 전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아들러는 개인이 공동체 의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수용을 하라고 조언한다. 자기수용이란 현재의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의지를 말한다. 이것은 자기가 제대로 할 수 없으면서 할 수 있다고 과신하는 자기긍정과는 구분된다. 자기수용에서 더 나아가 타인을 신뢰하면서 타인을 위해 공헌하게 될 때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공동체 의식을 높일 수 있다.


    자아와 자기를 구별하고 의식을 확대해 전체 인격으로서 자기실현을 추구해 나가야 하겠지만, 내 얼굴만을 바라보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는 자기중심성의 함정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특히, 50세 이후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가치관이 고착화되면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 매몰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행복한 삶의 조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라파엘로는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요청에 따라 바티칸 궁에 거대한 <아테네 학당>이라는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다. 이 벽화는 고대 그리스를 풍미했던 인문주의가 재현된 당시 르네상스 시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아테네 학당>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책을 한 권 들고 있다. 이 책의 주제가 윤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행복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최고선인 행복을 얻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행복은 지적인 탁월함으로 진리를 탐구해나가는 삶, 그리고 높은 도덕 기준의 윤리적 삶을 통해 얻는 영혼의 만족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우연한 일, 욕구 충족에서 오는 행복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행복은 욕구 충족의 대상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삶 뒤에 따라오는 결과물이다.


    반면에 플라톤은 현실적 삶보다 이데아 세계에 대한 깨우침을 진정한 행복으로 보았다. 여기서 이데아란 늘 변하는 현상의 세계와는 달리 절대 변하지 않는 참된 이성의 세계를 말한다. 그는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플라톤의 행복론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좀 난해하다. 플라톤은 먹고살 만한 수준보다 다소 적은 듯한 재산,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사기에는 약간 빠지는 용모, 자신이 기대하는 것보다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두 사람에게는 지지만 한 사람에게는 이길 정도의 체력, 연설을 해서 절반 정도의 청중으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는 말솜씨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두 철학자의 행복론은 좀 어려운 것 같지만 정리해보면 간단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란 욕구 충족이 아니라 최고선을 위한 이성적인 진리 탐구와 윤리적인 행복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참된 이성의 세계에서 완벽을 추구하기보다는 조금은 부족한 상태에서 만족할 때 행복해진다는 것이 핵심이다.


    인생 100세 시대라지만 인생은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아테네 학당>의 앞쪽 계단에 팔꿈치를 기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그러기에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져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는 각자의 행복에 대한 가치관과 자기 자신이 설정한 올바른 행복의 조건에 달려 있다. 인생의 하프라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나 이미 넘어온 사람일수록 <아테네 학당> 정중앙에 있는 두 철학자의 행복에 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행복이란 불행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다

    행복과 불행은 장미나무에 피어 있는 장미꽃과 가시처럼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진다. 어떤 시인은 장미에 가시가 있어서 장미꽃이 더 아름답다고 노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미동산에 만개한 아름다운 꽃송이를 보며 느꼈던 쾌감과 뾰족한 가시에 찔려 아팠던 통증은 인간의 뇌에 완전히 별개의 체험으로 서로 다른 기억의 상자에 저장된다.


    행복과 불행이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진화 과정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긍정적인 정서는 생존하는 데 필요한 쾌감으로부터 나온다.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며칠 동안 굶주린 사자를 생각해보자. 이 사자가 다른 동물을 사냥해 먹는 즐거움이나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냥을 하지 않고 그대로 굶어죽고 말 것이다. 이러한 쾌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기 위해서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서게 되고 반복적인 사냥을 통해 생존해나갈 수 있다.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근본적 이유는 쾌감이라는 긍정적 정서를 통해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반면에 불행에 관련되는 부정적 정서는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기능을 한다. 위의 예에서 물소는 사바나의 우거진 관목 뒤에 숨어서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사자와 맞닥뜨린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굶주린 사자의 배고픔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부터 감지되는 공포, 불안 등의 부정적인 정서는 본능적인 자기방어 기제를 유발시킨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속에서 부정적인 정서를 차단하는 것보다 긍정적인 정서를 더 자주 느끼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있을 때만 행복감을 높일 수 있다. 불행을 유발하는 부정적인 요소만을 줄이려는 소극적인 삶의 태도로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불행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수동적인 사람은 행복해지기커녕 더 불행해지기 십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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