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 부자
 
지은이 : 이재호
출판사 : 쌤앤파커스
출판일 : 2018년 07월




  • 누구나 부자를 꿈꾼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모으고, 열심히 아낀다. 재테크 책을 읽으며 투자지식도 쌓고, 실제로 투자를 해서 목돈을 만지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열심히만 하면 작은 부자 정도는 얼마든지 될 수 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부자가 될 수는 있어도 그 부가 불어나거나 유지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큰 부자는 작은 부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돈을 벌어들이고, 게다가 돈이 저절로 들어오게 만든다. 이들은 부의 선순환을 만들기 때문에 남들과 똑같이 일해도 더 벌어들이고, 악착같이 벌지 않아도 부가 쌓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보며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도 하고, 원래 금수저로 태어났기 때문에 잘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필연적 부자


    불광불급 -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걸이를 만들거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1986년 1월 어느 날 아침, 나는 유난히 들떠 있었다. 해외는 처음인지라, 지내는 한 달 내내 모든 것이 낯설었다. 무엇보다 내가 이탈리아로 날아온 단 하나의 이유인 최신 기계들을 직접 보고 작동법까지 배우고 난 뒤였다. 날씨는 이탈리아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때 느껴지는 공기는 사뭇 달랐다. 그 순간,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고생했던 지난 시간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서 최고로 예쁜 목걸이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나는 온통 그 방법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목걸이 만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어디서 만드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금방을 할 때 목걸이를 팔러 온 직원이 생각났다. 그 영업사원이 지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매장 근처에서 볼일을 보는 그를 불러서 물었다. “도매상을 말씀하시는 거면 아마, 서울 어디쯤에 있는 공장에서 물건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영업사원이 다시 기억을 더듬어서 목걸이 체인을 만든다고 알려준 곳은 서울의 방배동이라는 동네였다. 당장 올라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이튿날 새벽 일찍 짐을 싸서 부산에서 서울 방배동으로 올라갔다. 쪽지에 적힌 주소만 가지고 알지도 못하는 길을 헤매며 힘들게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방배동에 가서 보니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기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마냥 신기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 사장님을 설득해 일을 배워야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생겼다.


    “사장님, 저는 부산에 살고 있는 이재호라는 사람입니다. 사장님한테 체인 만드는 기술을 배우러 이곳까지 왔습니다. 좀 가르쳐주시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가시오. 절대 안 됩니다.” 뭘 하는 사람인지, 왜 배우러 왔는지 설명할 시간조차 없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일하는 직원에게도 기술을 함부로 가르쳐주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러니 갑자기 찾아온 낯선 사람에게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것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뺨 맞을 각오로 공장을 찾아가다

    이튿날 아침 일찍 찾아간 공장에서는 사장뿐 아니라 직원들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의 열정에 비하면 그깟 대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혼자서 공장을 구경하는 시간이 오히려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이틀에 걸쳐 관찰하면서 공장에 무엇이 필요한지 꼼꼼히 체크할 수 있었다.


    3일째 되는 날, 나는 공장 사장에게 며칠간 보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했다. 체인 만드는 기술을 배울 방법은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니 단 한 번의 기회로 상대방의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을 해야만 했다. 이틀 동안 내가 관찰해본 바에 의하면 그 공장에서는 아주 적은 양의 금으로 그다지 많지 않은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금이 없어서 체인을 만들고 싶어도 원하는 만큼 다 못 만들고 있는 것 같으니, 사장님이 원하는 제품을 뭐든지 만들어볼 수 있게 금을 제공하겠습니다. 또한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제가 기술을 배우고 난 다음에는 그동안의 제 거래처들도 사장님의 거래처가 될 테니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이 아닐 겁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이익에 대해 말하자면, 체인을 팔아서 생기는 수익은 전부 김 사장님이 갖도록 하세요.” 공장도 살릴 수 있고 나도 체인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또다시 공장에 찾아갔다. “고민해보셨습니다?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해봅시다.” 드디어 합의가 되었다. 그날부터 나는 한 식구가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공정을 보고 싶은 열망에 공장 바로 옆에 작은 방을 하나 얻어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직원들이 기술을 하나씩 자세히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고, 옆에서 제품이 만들어지는 공정을 빠짐없이 보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기계의 원리를 깨우치는 데 능하고 기계적 알고리즘을 이해하는 능력도 남들보다 뛰어났다. 그래서인지 체인 기계의 작동법을 배우고 목걸이 만드는 원리를 체득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졌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온 지 3개월 만에 이론적으로 거의 다 이해를 했고 어떤 기계들이 필요한지도 알게 되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 합리화하지 마라

    ‘외국 회사를 찾아서 내게 초청장을 보내도록 편지를 써보자.’ 며칠 동안 찾고 찾은 끝에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진 일본 카탈로그에서 이탈리아 업체 주소를 하나 발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바로 이탈리아 스키오라는 곳에 있는 시스마 공장이었다. 체인을 제작하는 공장을 제대로 찾은 것이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당시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전문적으로 번역을 해주는 사람들이 번역소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누가 보더라도 초청장을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잘 번역해달라고 부탁했다. 번역된 편지는 번역소 직원이 부쳐주었다.


    기약 없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재호 사장님, 계십니까?” “외국 편지가 왔습니다. 이게 그렇게 기다리시던 편지 아닙니까?” 편지를 들고 여행사로 달려갔다. 그러나 기뻐하는 나와 달리 편지를 확인한 직원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 초대장에 이탈리아 한국대사관의 직인이 찍혀야만 여권이 나옵니다.” 짧은 탄식을 내뱉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다시 한 번 도와달라고 편지를 썼다.


    결과를 가르는 포인트는 스스로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이다. 아니, 그 정도의 마음가짐으로는 부족하다. 한 발만 더 내딛으면 추락하고 마는 낭떠러지 끄트머리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의 마음이어야 했다. 나는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쏟아서 꼭 해내고 싶었고,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그저 내 실패를 스스로 위안하는 핑곗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드디어 이탈리아에 도착하다

    마침내 이탈리아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조심스레 편지를 뜯어보니 대사관 관인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처음 편지를 보낸 지 어언 1년 만의 일이었다. 막상 이탈리아에 갈 수 있게 되자 나는 의사소통이 걱정되었다. 그러다 문득 MBC에서 보도국장을 하고 계신 8촌 형님이 떠올라, 그분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내 말을 들은 형님은 코트라를 알려주었다. 고맙게도 코트라는 곧장 이탈리아 밀라노 지사에 전화를 걸어, 내가 도착하는 날짜에 마중 나올 수 있는 가이드를 섭외해주었다.


    해외여행도 처음이고,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동행하는 사람도 없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국제선 표를 쥐고 공항터미널에 앉아 있자니 온 신경이 곤두섰다. 비행기를 여섯 번이나 갈아타는 동안 조금은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밀라노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를 탈 때까지 긴장을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이.재.호. 입국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내 이름 석 자였다. 내 이름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나를 감싸고 있던 긴장감은 그제야 완전히 없어졌다. 나는 곧바로 이탈리아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일정에 들어갔다.



    무일푼 청년에서 1000억대 자산가로

    끼니를 걱정하던 청년, 시계방을 열다

    “사장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일을 처음 시작하실 때부터 잘될 거라고 믿었습니까?” 나는 그 대답을 하기 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을 시작할 때는 잘될 것이다, 안될 것이다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살아남는 것’이 하루를 사는 가장 큰 목표였고, 그래서 돈 버는 데 몰두했으니 잘되리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서른여덟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생존 자체가 가장 큰 문제였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떻게 하면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데 삶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10대 시절에는 내일까지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생의 갈림길을 헤맸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내 삶에 없다고 생각했고 오직 먹고 살기 위해서, 다시는 굶지 않기 위해서 미친 듯이 일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서 절대 굶어 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백화점 근처에 있는 시계방을 보면서 시계 기술을 익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아는 분의 소개로 ‘고려당’이라는 시계방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런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 신기하게도 일을 시작한 첫날의 경험 때문이었다. 사장님이 큰 벽걸이 시계를 조립하는 과정을 지켜보니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장님, 제가 한번 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처음 해보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무색할 만큼 별로 어렵지 않게 시계를 조립해버렸다. “너 어디서 배웠구나”하고 사장님이 오해할 정도였고, 나 스스로도 이 일에 소질이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고려당을 시작으로 이후 여러 시계방을 거치면서 기술을 더 익히고 돈도 조금씩 모아갔다. 그러다 1963년, 스물두 살의 나이에 경북 영천에서 내 명의로 된 ‘신시당’이라는 첫 가게를 열었다. 그렇게 조금 살 만해지자 나는 내 인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가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평생 재미있게 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재미가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타인에게 기여를 한다는 뜻이다. 타인에게 기여하지 않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지금도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계 경제 상황에서 힘은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청춘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이 어렵다는 핑계로 약해지거나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고 있다면, 앞서 말한 ‘타인에게 기여가 되는 일’을 가장 먼저 찾아보길 권한다. 당장은 와 닿지 않겠지만, 어느 순간 인생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서른여덟, 60억을 벌다

    두 번의 도둑을 맞은 후 장사는 점점 잘되기 시작했고, 4년 뒤인 1967년에는 부산으로 터를 옮겨 ‘황금사’라는 시계소매점을 창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부산에 정착할 무렵, 금방을 하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게를 옮겼다. 나는 금방 자리에 욕심이 생겼다. 금방 사업은 시장의 변동에 따라 다소 리스크가 있긴 했지만, 수입 면에서 보자면 시계점보다 좋았다. 이때부터 나는 금방과 시계점을 갖춘 제법 그럴 듯한 사장님이 되었다. 사업은 잘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주 종목을 시계보다는 금방쪽으로 서서히 바꿔갔다.


    시계점과 금방을 동시에 운영하면서 1977년이 되자 30억 정도를 벌었다. 그즈음 부동산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서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부동산에 뛰어들어 2년 만에 다시 그만큼의 돈을 벌었다. 돈을 그렇게 많이 벌면서 나는 쉽게 돈을 번다는 것이 두려워졌다. 인생을 바꾼 나의 가치관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사사로운 이익을 좇느라 폭주 기관차처럼 앞으로 달리기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중 1979년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났다. 그때까지 일을 하면서 항상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말이 ‘하루만 쉬었으면 좋겠다’였다. 그러던 차에 세계 경제까지 안 좋아지자 나는 뭔가 좋은 핑곗거리를 찾은 듯했다. 나는 나에게 1년간의 휴식을 선물해주기로 했다. 쉰다고 생각하니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 행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한 한 달이었다.


    한 달쯤 지나자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빨리 재미가 없어진 데 대해 내심 놀랐다. 그래도 1년 동안 쉬기로 한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다만 아침에 날이 밝으면 부산 금정산에 매일 등산을 가는 것으로 출근할 때와 같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올라가서 저녁을 먹을 때쯤 내려오고, 그 사이에는 산 정상에 하염없이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차츰 나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 인생을 바꾼 산사에서의 강연

    쉬겠다고 하고 8개월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다. 등산을 하며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에 절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종종 밥을 얻어먹기도 했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70~80명이나 모여 있는 게 아닌가. 호기심이 생겼다. 알고 보니 사람들은 산사에서의 강연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점심 한 끼는 해결했겠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나는 앉아서 주지 스님의 설법을 듣기 시작했다.


    어느 중생이 지장보살님의 이끌려 극락과 지옥을 번갈아 가보았답니다. 이 중생이 생각하기에 극락은 휘황찬란하고 지옥은 불구덩이에 아비규환일 줄로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양쪽이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게 아닙니까? 다른 것이 있다면 극락 사람들은 모두 얼굴에 윤기가 나서 복스러워 보이는 반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죽 한 그릇 못 먹은 얼굴로 피골이 상접해 있더라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극락에서나 지옥에서나 똑같이 팔 길이보다 훨씬 긴 밥숟가락을 하나씩 주는데, 극락 사람들은 그 긴 숟가락을 가지고 서로 떠 먹여주는 반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그 숟가락으로 오로지 자기 입에만 퍼넣으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무릇 중생들이 사는 이치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입이 아닌 남의 입, 나를 위한 마음이 아닌 남을 위한 마음. 이것이 곧 나를 살리고 이 사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맞다. 바로 저것이다!’ 설법을 듣고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멍해져서 정신없이 절을 나서는 바람에 어떻게 산을 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을 들여 고민해온 삶의 가치관에 대한 의문이 한순간에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이후 나는 내가 일을 하는 이유를 명확히 깨닫게 되었고, 남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했다. 그 가치관은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가장 먼저 나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보았다. 내 능력과 재능을 어디에 투자해야 많은 사람한테 도움이 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모든 가치 기준을 거기에 두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일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두 가지가 다르다면 ‘잘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 수혜자가 ‘나’이지만, 잘하는 것을 하면 수혜자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는 나를, 다른 손으로는 남을 돕다

    美친 CEO

    1987년 주얼리 기술협회 이사장 조기선 씨가 일본의 캐스팅 공장(정밀주조 공장)을 간다고 하여, 국내에서 그나마 규모 있는 제조업체 대표 20여 명이 모여 일본 견학을 다녀온 적이 있다. 3박 4일 정도의 여정이었는데, 나는 그때 우리 공장에서 운영하고 있는 기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안녕하세요. 리골드의 이재호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평소 저희 회사 제품에 대해 궁금증이 많으셨을 줄로 압니다. 만약 여기 계신 분들이 원하신다면 제 공장의 모든 시설과 기술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서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우리 회사는 부산을 중심으로 영업을 했지만 서울 쪽에도 상당히 알려져 있던 터라 그들에게는 경쟁상대가 분명한데, 그 경쟁상대가 먼저 나서서 기술을 전부 알려주겠다고 하니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반신반의하는 업체 대표들에게 나는 언제든 우리 회사에 견학을 와도 좋다는 말을 한 번 더 하고 헤어졌다.


    직원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결정이 과연 할 수 없는 일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직원들이 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기술 공개를 함으로써 ‘고객에게 돌아갈 이익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주얼리 업계의 모든 사람이 우리의 기술을 익히게 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제품의 질이 향상되고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경로도 파격적으로 늘어날 것이었다. 고객을 위한다면 틀림없이 옳은 결정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직원들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게 설득하는 것뿐이었다. “결국은 같은 시장에서 같은 기술로 만든 같은 제품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우리 공장은 백 프로 문을 닫게 될 겁니다. 기술 공개를 하면 직원들 전부 다 죽습니다.” 극렬히 반대하는 직원들에게 나는 단호히 말했다. “아니야. 당신들 직장은 내가 지켜! 나와 내기를 해도 좋아.” 나는 자신만만히 이야기했다. 기술 공개를 하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돈을 벌려고 일하는 사람과 고객 만족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의 경쟁에서는 고객 만족을 생각하는 사람이 당연히 이기게 되어 있다. 좋은 제품을 만들려고 밤낮으로 고민하다 보니 제품을 만드는 능력이 향상되고, 그 결과 앞서나갈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점을 확신한다. 결과적으로 내 생각이 전적으로 맞았고, 지금까지도 이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벌어서 베풀지 말고 베풀어서 벌어라

    내가 사업을 시작한 것은 ‘고객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걸이를 선물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생각한 수준만큼의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속이 상했지만, 그것조차 만들어놓기기만 하면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설 정도였으니 굳이 마케팅이라는 것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상상 속에 있는 것을 현실에 내놓는 일이야말로 참된 고객만족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는 자기 돈벌이를 위해 ‘고객 만족’이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과장된 마케팅으로 고객을 속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해야 물건이 팔리니 제품 판매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고객은 알려진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허탈해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심지어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더 이상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돈벌이를 위해 고객을 속이려는 마음이 없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고객의 결정은 항상 옳은가? 자신의 가치관이 확실히 정립되어 있다면 그 답은 명확히 나온다고 생각한다. 고객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고객의 결정은 항상 변화무쌍하고 예측하기가 어렵다. 섭섭한 마음이 들 수도 있고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능력으로 타인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고객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적어도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노력했기 때문에 고객은 틀림없이 행복을 느꼈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고객의 환한 웃음을 상상하며 나도 웃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일하면서 늘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열쇠다. 그렇게 살다 보면 결국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나는 남을 도왔다. 그래서 당당하고 떳떳하다.

    나의 도움을 받은 고객은 만족했을 것이다. 행복할 것이다.

    아니 ‘행복하다’고 단언했고 ‘만족을 느낀다’고 자신했다. 그랬을 거라고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돈을 끌어들이는 삶의 법칙

    부의 패러다임

    우리나라에서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는 ‘갑질’이란 ‘갑을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갑’이라는 단어에 나쁜 행태를 뜻하는 ‘질’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만들어진 단어다. 고객을 위한다는 말은 너무 흔하다. 기업의 모든 결정과 행동은 고객 만족을 위해서라고 하면서도 많은 기업들이 ‘갑질’을 공공연히 행해온 것은 충격적이다.


    기업은 내가 만들었다고 해서 내 개인 소유가 아니다. 기업이 창출해내는 가치를 이용하고 즐기는 모든 고객의 것이다. 사업자가 줄 수 있는 월급 역시 결국은 고객이 선택해주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 잘못된 기업 고용주의 생각은 직원들의 생활과 가치관에 혼란을 준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생기는 손해는 전부 고객이 받게 되어 있다. 또한 그런 정상적이지 않은 생각은 사회를 병들게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부의 뜻을 잘못 정의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제는 경영자들이 부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부’란 기업의 오너가 그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고객이 믿고 맡겨놓은 것이다. 나는 고객이 맡겨놓은 재산을 고객에게 다시 돌려줘야 할 의무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부를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제품을 만들어 팔면서 사실 돈을 버는 것 따위는 잊어버렸다. 돈이 벌리는지 안 벌리는지도 몰랐고, 그저 고객을 기쁘게 해줘야겠다는 열정만 좇았다. 고객이 내 열정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은 고객의 미소였다. 그것에 미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랬더니 돈은 저절로 벌렸다.


    리골드의 수입이 고객을 위해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모를 수도 있고, 고객을 위해서 쓰인 돈이라는 게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장은 직원이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정성을 다 쏟아서 고객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말없이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리고 고객이 추구하는 뜻을 받들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내는 데 가장 앞장서는 탐험가가 되어야 한다.


    탐험가가 오직 ‘탐험’ 그 자체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살피며 조사하는 열정을 불태우듯이, 사장도 ‘고객 만족’ 그 자체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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